제 3 장

4

 

《HG란 나겠지?》

《죄송합니다. 각하의 성과 장군이라는 뜻의 략자로―》

《뭐 틀렸다곤 할수 없지.》

얇은 미농지로 된 새끼수첩 몇장을 뒤적여보고난 지태민은 책뚜껑자국이 생생한 한쪽볼을 쓰다듬으며 부관실대기의자에 가앉았다.

《그럼 들어보자구.》

정창호는 눈앞이 캄캄했다. 이럴 때면 눈물이라도 콱 쏟아지면 좋으련만 그놈의 눈물은 어데 가 말라붙었는지 맨숭맨숭한 눈시울이 종이까풀처럼 빳빳스럽기만 했다.

빌어먹을 문, 그런데 문을 조금 열어놓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어떻게 되여 지장군이 이 부관실에 나올 때까지 기척조차 알아듣지 못했는가. 일기장을 치워버리지 못한것이 한스러웠다.

《왜? 들려줄수 없는건가?》

지태민이 재차 하는 말에 정창호는 우들쩍 몸을 떨었다. 깨알같이 박아쓴 글자들이 벼룩뜀을 했다. 자포자기상태에서 읽었다.

《10월 11일 오늘―》

《그건 봤어. 그 다음날부터.》

《알겠습니다.》

정창호는 활랑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음장을 번졌다.

《10월 12일. 비상대기해제는 일장춘몽, 파티취소와 함께 또다시 얼음 동산. HG는 24시간 대기상태에 있겠다고 함. 면도도…

하지 않고 나왔고 눈에는…》

《왜 반벙어리소린가. 눈에는 충혈이 져있다고 했지. 사내답게 읽으라구.》

《알겠습니다.》

정창호는 속이 한줌만 해진 속에서도 오제도의 수기를 생각했다. 이 비슷한 위기상황일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고 상대방에게 약점을 잡혔을 때에는 그 약점을 숨길것이 아니라 솔직히 드러냄으로써 신뢰를 얻을것.

읽었다.

《눈에는 충혈이 져있었음. 북의 동생으로 인한 불면증때문일것이다.

오전 첫 시간에 HG로부터 3가지 특별지시를 받았다.

A, HG에 대한 사적면회를 일체 불허할것.

B, HG에게 걸려오는 사회전화를 일체 두절시킬것. (장모댁과 시내 집전화도 매한가지임.)

C, HG에게 걸려오는 사모님의 전화도 차페시킬것.》

《왜 그대로 읽지 않아? 사모님이 아니라 OK로 쓰지 않았는가.》

《잘… 잘못했습니다.》

《빼지도 더하지도 말고 곧이곧대로 읽으라구.》

《알겠습니다.》

젠장, 부관직에서 쫓겨나면 갈데가 없을가.

《오후 3시에 퇴역륙군중장인 H외무장관께서 래림. HG는 긴급브리핑(정황통보)이 있어 만날수 없다고 함.

의장각하의 비서실에서 부탁전화가 와서야 만났음.

HG는 불쾌한 상으로 H를 맞았다. 그들은 다 북쪽출신이지만 HG는 H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는 정평이 있다.

방에서의 대화;

H ; 일본유람을 가게 되였는데 군의 도움을 받자고 하네.

HG; 미안하지만 저에게는 그럴 경황이 없습니다.

H; 하, 이건 의장각하의 권고에 따른걸세. 실은 유람이 아니라 한일관계의 첫 돌파구를 열러 가는거지.

   뭐 놀랄건 없네. 그것들이야 나에게도 오랜 숙적이지만 어쩌겠나. 늘 눈을 부릅뜨고 산대서 얻어질건 없잖나. 한마디로

   그것들을 달구고 주물러서 배상금부터 뽑아내자는거여.

HG; 거기에 이 지태민이 무슨 보탬을 줄수 있겠습니까.

H; 따는 그렇기도 해. 날 놓고 봐도 다들 기름외교라고 하지만 북과의 정전담판때도 둘러리놀음밖에 못한 처지라 그닥 자신

  은 없어. 하지만 해봐야지. 임자한테서의 도움이란 법조계나 내각에 그전 친구들이 있지 않나 알자는걸세. 짚오래기건 썩

  은 판자건 도움될 때가 있을것 아닌가.

HG; 저에게는 애당초 그런자들과의 친교가 없었습니다.

H; 임자의 배일감정이 어떠했는가는 나도 아네. 하지만 생도대장까지 한 자네였으니 굽실거리던 하잇뽄들이 있었을것 아닌

   가.

HG; 그것들이 어느 구석에서 뭘 해먹는지 제가 알겠습니까?

H외무는 랑패한 얼굴로 떠나갔다. 그런데 그를 바래주고난 HG의 얼굴은 더욱 험상스러웠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일로 현관밖에서 가래침을 뱉았다. 그리고는 사격장에 가자고 했다.

권총이 아니라 기관총사격을 하였다. 한탄창 다 쏘았지만 목표판을 맞힌것은 두발뿐이다.

추리에 기초한 심리분석;

HG는 극도의 불안과 심리적인 방황속에 있다.

그 불안과 심리적방황은 동생의 출현으로 초래된것으로서

첫째, 동생의 운명에 대한 불안.

둘째, 동생으로 인해 생겨난 자기자신의 처지와 립장에 대한 불안.

셋째, 동생을 고발한 형으로서의 고민.

여기서 HG가 일체 면회를 사절하고 24시간 대기근무상태에 들어간것은 나라앞에 죄를 지었을 때 스스로 자기를 결박하고 죄다스림을 청한 옛 량반님들의 자학행위를 본딴것으로서 훌륭한 자기보신법이라고 할수 있다.》

정창호는 이 대목의 마지막글은 입안의 소리로 굴리며 지태민을 슬쩍 곁눈질했는데 다행스럽게도 태민의 눈은 반쯤 감겨져있었다.

목소리를 더 낮추었다.

《또 하나 OK와 장모의 전화까지 차페시킨것은 동생구원에 대한 호소가 있을수 있는 경우 형제간의 감정이 되살아날 위험을 막기 위한것일것이다.》

《이봐, 그런 말투는 련애할 때나 써.》

지태민의 말에 정창호는 소리를 높이지 않을수 없었다.

《H외무의 도움요청을 거절한것은 HG께서 설명한것과 함께 주요하게는 복잡한 심리적요인의 작용때문일것이다.

그것은 첫째, 한일관계개선방침에 대한 반감이고

둘째, 동생의 출현으로 충격받은 남북분렬에 대한 번민때문일것이다. 침을 뱉은것, 줄담배를 피운것, 기관총사격시 두발밖에 맞히지 못한것, 무엇때문에 기관총을 쏘았는가, 그것은 울화증의 폭발이다. 그럼 그 울화증의 과녁은?…

HG의 심정이 리해된다.》

지태민은 여전히 눈이 감긴 상태였다.

《10월 13일.

지난 밤 HG는 말한바 그대로 자기 방을 떠나지 않았다. 밤 12시, 본부 당번들의 근무상태를 검열하고 문을 닫아걸었다. 불은 껐으나 잠든 상태는 알수 없다.

나 역시 부관실에서 잤다.

HG는 계엄해제조치에 따를것을 권했으나 나로서는 그럴수 없었다.

어려운 처지의 상관을 방치해두는것은 부관으로서만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잘못된 처사이기때문이였다. 급식당번장교의 말에 의하면 HG는 아침식사는 건네고 점심식사는 절반밖에 하지 못했다고 한다.

오후 첫 시간에 담배가 떨어졌다고 하여 나의 비상용〈켄트〉두갑을 주고 보급계에 추가공급을 요구했다. 그런데 빌어먹을 보급계녀석들은 새달분을 미처 못 타왔다고 하며 애걸복걸… 내가 마련하겠다고 선심을 보인 후 HG에게 외출을 신청했다.

HG는 담배를 얻으러 간다는데 대해서는 불응했으나 세브란스에 입원한 어머니의 병문안소리에는 선선히 허락을 표시하며 문병금까지 주었다. 참 후덕하신분이다.

어머니의 병문안이란 순간적으로 꾸며낸 거짓말이다.

나의 외출은 담배도 담배지만 북의 동생을 맡은 한인수를 만나려는데 진목적이 있었다.

나의 중학시절 문학써클 책임자였던 한인수는 륙사시절에도 3년 선배로서 나와 각근한 사이였으니만치 응당한 친절을 보이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인수는 나를 만나는것마저 경계하며 HG의 동생에 대한 질문에 동문서답의 대답만 하였다. 부득불 내가 알고있는 파악사항을 알리고 HG의 내밀적인 부탁이 있었다는것을 암시해서야 약간의 토설을 했다.

그의 말을 간추려보면

첫째, HG의 동생이 매우 점잖고 교양이 높다는것.

둘째, 전반적인 인상과 대질심문의 결과를 종합해볼 때 쉽게 우리편으로 될수 있다는것이다.

이에 기초한 추정;

한인수의 말에서 느낀것은 간단한 전향기만 보이면 석방될수 있다는것이다. 이것은 한인수의 결심이 아니라 웃어른들의 내밀적인 지시에 따른것일것이다.

좋기는 내가 직접 그를 만나보는것인데 한인수는 규정상 위반일뿐아니라 그렇게 되는 경우 련좌법에 걸릴수 있다고 하며 벌벌 떨었다.

보고할것인가 말것인가 많은 생각을 하던 끝에 HG에게 사실그대로 말했다. 그에 대해 HG는 몹시 언짢은 기색이였으나 끝까지 다 들어주었다.

〈그런 일에 다신 삐치지 말어.〉 HG는 이 말만을 하고 문건철을 펼쳤다. 그런데 문건철은 거꾸로 끄당겨있었다.

심리분석;

한인수를 만난 나의 처사에 대해 HG는 그닥 나쁘지 않게 생각했을것이다. 언짢은 기색을 보인것은 만약시의 잡음을 우려한것이고 나의 관심에는 고마움을 느꼈을것이다. 문건철을 펼친것은 이런 심리를 엿보이지 않으려는것이고 그 문건철이 거꾸로 놓인것을 몰라봤다는것은 동생에 대한 나의 말에 흥분했다는것을 의미한다.

10월 14일.

오늘 아침 나는 OK에게 전화를 걸었다. HG가 아침식사도 절반밖에 하지 못했다는것을 알았기때문이다.

OK는 그동안 전화 한통 걸어주지 않은것과 교환대에서 일체 전화가입을 받아들이지 않은데 대해 야단을 쳤다.

나는 군기상 필요에 따라 그런 조치가 취해진데 대해 량해를 구하고 HG의 영양식사와 수면보장을 위한 음료를 청탁했다.

OK는 무척 반가와하면서도 HG로부터 부대안에 얼씬하지 말라는 엄명을 받았다고 하며 우는 소리를 하였다. 내가 부대후문에서 만날것을 약속하고 정한 시간에 나가니 OK는 블랙위스키 두병, 칠면조구이 둘, 함박크와 나박김치외에 여러가지 안주와 이차떡, 팥밥을 해가지고 왔다.

(OK도 그동안 퍼그나 수척해진 인상, 시동생에 대해선 일언반구 묻지 않았다.)

나는 저녁식사시간이 되기 바쁘게 HG가 거실로 리용하는 뒤방에 그 음식들을 들여갔다. 동기훈련대강을 검토하던 HG는 자못 의아해하는 기색이였다.

〈그게 뭔가?〉

〈저, 오늘이 나의 생일이여서 함께 식사를 했으면 하는것이 소원입니다.〉

뻑따고 하는 거짓말에 HG는 저으기 당황해하는 기색이였다.

〈허, 군의 생일이라고…〉

〈각하, 부탁입니다.〉

나는 애처로운 기색을 지어보였다.

〈이거 미안하게 됐군.〉

HG는 쾌히 응해주었다.

〈이런건 딱 오늘만일세.〉

오늘처럼 내가 술을 많이 마시기는 처음이다.

두번째 병의 밑굽까지 비웠을 때는 저녁 9시, HG는 조금도 취하지 않은 목소리로 예하 당직장교들과 전화를 건 후 다시 문건검토에 착수했다. 나에게는 쉬라고 했으나 떠날수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만전지책의 긴장대기가 필요한것이다. 취침나팔이 울려 30분 조금 지났을 때 탱크의 엔징음과 같은 요란한 코소리가 울렸다. 손등두께만큼 열어놓은 문을 조금 더 열고보니 HG는 쏘파에 기댄채 세상모를 굳잠에 빠져있었다. 《일본륙전사》 한권을 베워드리고 돌아섰다. 측은한중에 기쁨이 컸다. 부관으로서 상관의 건강보호에 한몫 한것이 아닌가. 식사도중에 오고간 대화를 더듬어보며 책상에 앉았다.

무슨 말을?… 딱히 적어둘만 한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젠장, 나도 자빠져 잘가. 음식준비를 OK가 했다는 말을 했을 때 〈거짓말재간이 있군.〉했지.

이건 실점이야 실점. 그리고…》

일기는 여기서 끝났다.

정창호는 어떤 불호령과 처벌에도 끄덕하지 않을 장부의 기상을 보이려 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답니다.》

《잘 썼군. 그럴듯해.》 반쯤 눈을 감고있던 지태민은 정창호의 손에 쥐인 수첩을 보다가 싱긋이 웃었다.

《한데 그런건 뭣때메 쓰지?》

《…》

《기자가 되려는가?》

불현듯 높아지는 소리에 정창호는 동태짝처럼 차렷을 했다.

《아, 아닙니다.》

《왜, 요즘은 누구는 어쨌소 저랬소 하는 글만 쓰면 돈이 삼태기로 쏟아진다는데.》

《용서해주십시오. 그저… 필력을 높이고… 훌륭한분들의 인간상을 연구해 모범으로 삼자고…》

《허허, 그러니 이 HG가 훌륭한 사람이렷다?》

《각하, 그… 그건 사실입니다.》

《유치해.》

지태민은 또 한번 싱그레 웃었다.

《그런건 중학생때나 하는 장난이지. 필력도 분석도 중학생정도야. 하긴 나에 대한건 비슷이 맞쳤어.》

《버릇없이 써서 죄송합니다.》

《한데 한인수가 우리 애를 맡았다는건 어떻게 알았지?》

정창호는 다시 동태짝이 되였다. 잔등으로 진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는 저와 오랜 지기로서… 우연히 만나 알게 되였습니다.》

사실은 방첩계 장교로부터 알게 된것이였다. 수첩에 그를 밝히지 않은것이 천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태민은 미덥지 않아하는 눈길이였으나 더 따지지 않았다. 비웃는듯 한 어조로 물었다.

《이제 그 일기장을 어떻게 하지?》

운명적인 시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령관님!》

그는 한마디 거세게 웨치고 수첩을 북 찢었다.

《연극하지마.》

두쪼각으로 된 수첩을 보는 태민의 눈빛은 사뭇 날카로왔다.

정창호는 사색이 되여 우들우들 떨었다. 다져먹은 각오요, 결심이요 하는것이 공중으로 날아났다.

《쓰는건 자유야. 하지만 두번다시 들키지 말게 하라.》

지태민은 손을 홱 내젓고는 문밖으로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맙소사.》

정창호는 풀자루처럼 주저앉으며 가슴을 쓸어만졌다.

시계를 보니 12시 32분이였다. 그런즉 지태민은 12시에 깨여났을것이다. 어제도 그제도 바로 그 시간에 청사경비검열을 나갔다. 계엄은 해제되였건만 지태민은 여전히 계엄인것이다.

빌어먹을, 북에서 온 동생이 원망스러웠다.

그때문에 방첩계의 장교는 련일 전화질이고 지장군의 일거수일투족까지 보고하라는 그 엄명을 따르려고 하니 오늘같은 망신살이 뻗쳐온것이다. 그런데 이제부터 태민을 대할 일이 낟가리같은 시름으로 마음을 짓눌렀다.

두쪼각으로 된 수첩을 갈기갈기 찢어 휴지통에 넣고(몇쪼각의 종이는 휴지통옆에 흘렸다. 지장군의 눈에 뜨이는것이 좋다고 보았기때문이였다.) 30분 넘게 벌받는 소학생의 자세로 책상을 마주하고있을 때 지태민이 방으로 들어섰다. 정창호가 바라던대로 휴지통옆의 종이장들을 봐준 지태민은 왜 자지 않느냐고 사뭇 친절히 묻고는 한대포 하지 않겠느냐 하며 침실로 이끌어들였다. 지태민이 비상용으로 건사하고있은듯 한 포케트용 위스키까지 말끔히 비우고나니 새벽 2시였다.

《난 임자가 좋아.》

지태민은 이 말을 하며 자리에 눕고 정창호는 임자가 좋다는 그 말때문에 기상시간을 30분 넘게 어겼다. 아침식사는 맹물로, 점심에는 언 김치물에 만 꽁보리밥으로 알콜에 지쳐빠진 위를 달래고 밀려드는 졸음에 한숨 붙일가 하는데 지태민의 운전사가 그를 찾았다.

한달음에 지태민의 방으로 가니 이건 무슨 일인가. 말끔히 면도를 하고 정장을 하고 기다리는 지태민의 몸에서는 향수내까지 풍겼다.

《나와 함께 가자구.》

차림과는 달리 사뭇 근심스러운 얼굴이였다. 차안에서도 시종 어룩한 얼굴이였는데 왜서인지 정창호와 눈이 마주칠 때면 어색스러울 정도로 다정한 눈길이였다.

(내가 술기운에 감각이 잘못된것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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