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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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과 운명, 인간의 한생은 때로 순간에 결정된다. 그렇다면 태민은?… 아버지는 만주군관학교를 저주하였고 때로는 종파사대주의분자들을 원망하기도 했다. 거기서는 성민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객관적요인과 환경이 작용하는 일면에만 한한것이다.
여기서는 려아도 같다고 해야 할것이다.
성민은 자기에게서 가장 괴로왔던 날들을 그려보며 계속해 글을 써나갔다.
…온대진쪽 바다가에는 까까중이들로부터 어른들까지 인산인해를 이루고있었다. 지독스럽게 찌물쿠는 날씨였다.
성민은 언젠가 외삼촌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후미진 모래불쪽으로 가다가 낯설은 이동천막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인차 되돌아서려 했다.
하지만 돌아설수 없었다.
짧은 속치마와 수영빤쯔차림으로 뛰쳐나오는 로씨야녀성군인들의 천막주변에는 해빛에 감실감실 탄 열서너살가량 되는 까까중이들이 잔뜩 모래불에 엎드려 이방녀인들의 육체미를 흥미진진하게 감상하고있었던것이다. 저들끼리 키득키득 웃기도 하고 뭐라 수군대다가도 처녀들의 눈길이 쏠릴제면 손까지 흔들어주는것이 이런 관람에 이골난 애들 같았다. 다행스러운것은 로씨야처녀들 역시 상대방이 아이들이여서인지 아무런 타내는 기색도 없이 혼연히 손을 마주 젓기도 하고 《하라쇼!》《하라쇼!》하며 웃어주기도 했다.
《이러면 못써. 저리들 가 놀아라.》
성민이가 키득거리는 한 애의 팔을 잡아 일쿼세우는데 누군가의 시선이 자기에게 못박혀있는것을 느꼈다.
귤색수건을 손에 말아든 처녀였다. 몸에 착 달라붙는 까만 수영복에 금발머리… 성민의 눈길과 마주치는 순간 처녀의 입에서 실낱같은 소리가 새여나왔다.
《지!》
성민이도 알아보았다.
《아니―》 그가 나쟈가 아닌가고 묻기도 전에 처녀의 팔이 목에 휘감겼다.
《성민! 성민동무가 옳았군요.》
연한 향수내와 함께 일생 처음 느껴보게 되는 뭉클하면서도 탄력있는 젖가슴이 가슴에 마쳐왔다. 이로 하여 당황함이 앞섰다.
《야― 멋진데.》
까까중이들의 감탄에 더욱 그랬다.
《잠간 기다려요.》
나쟈는 얼굴이 불돌처럼 달아있는 성민에게 방긋 웃어보이고는 천막안으로 날듯이 뛰여들어갔다. 잠시후 다시 나타난 나쟈는 방금전보다 더욱 날씬하고 싱싱한 모습이였다. 군복을 입고있었다. 가죽반도를 띤 어깨우에는 소성 두알의 견장이 붙어있었다.
《어데 좀 가앉자요.》
나쟈는 예나 다름없이 능숙한 일본말로 속삭이고는 떠들썩 웃으며 손을 휘젓는 동족의 말괄량이들에게 뭐라 소리치고는 그 말이 재미난다는듯 까르르 웃었다. 성민은 벗이라는 말밖에 알아듣지 못했지만 나쟈와 그 동족들의 태도로 봐 짐작할수 있었다. 나쟈는 동족의 말괄량이들에게 또한번 눈인사를 보내고는 성민의 팔을 잡아꼈다.
《지금 저 처녀들이 뭐라고 하는줄 알아요. 동무를… 미남자라고 해요.》
《허허, 참.》
더위도 도당일군과의 불쾌한 담화도 잊혀졌다. 나쟈의 옷차림을 다시 살폈다. 언젠가 하던 명례의 말이 옳다고 생각되였다.
《어떻게 여길 왔소?》
의사소통을 하려니 일본말을 쓰지 않을수 없었다. 키낮은 해당화 몇그루가 가림막으로 되여있는 소나무밑에 앉았다.
《왜 왔는가구요.》 나쟈는 날씬한 다리를 쭉 펴며 깜찍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동무를 만나려 왔지요.》
《나를…》
《믿어 안지는가요.…》
나쟈는 길고 곧은 매끈한 다리우에 하얀 모래를 솔금솔금 뿌리며 그간의 이야기를 했다.
려순에서 붉은군대에 입대했다고 했다. 그후 자진하여 조선에 나왔고 이곳에 오기는 보름전이라고 했다.
《동문 지금 뭘하고있어요?》
《군교육부에 있습니다.》
《군교육부에! 아이, 훌륭하군요.》
나쟈는 기뻐서 어쩔바를 몰랐다.
하지만 성민은 마음이 우울해졌다. 군교육부지도원의 일도 오늘로써 끝장인때문이였다. 도당에서 나온 일군이 그렇게 선언했던것이다.
쏘련에서 나왔다는 그 일군은 성민이앞에서 책상까지 두드려댔다.
어떻게 지주집안출신이 군교육부에 있을수 있는가.
문서장을 뒤질 때 입에서 침방울까지 튀여나왔다.
여기엔 월남한 일본군장교까지 있군. 놀랍소. 놀라와, 친일주구의 동생이… 당장 군교육부에서 나가 다른 직업을 구하라 고래고래 소리쳤다.…
《왜? 어데 몸이 불편하지 않아요?》
나쟈의 푸른 눈에 의혹이 실렸다. 성민은 망설였다. 백계로씨야식당의 평범한 접대부가 단 2년사이에 붉은군대 군관으로 되였다는것은 그가 보통처녀가 아니라는것을 생각하게 되였다. 그로부터 레닌전집을 받았던것도 생각했다.
《한가지 물어도 되겠소?》
《뭔데요?》
《쏘련에서는 계급투쟁을 어떻게 합니까?》
《어떤 면에서요?…》
《그… 저… 10월혁명이 끝난 다음 지주, 부농계급을 청산했다는건 알고있습니다. 한데 지주계급이라고 해서… 다 청산했는지.…》
《그건 왜 묻는가요?》
나쟈의 물음에 성민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가문의 래력으로부터 태민형의 일까지 말하자 나쟈는 나직이 한숨을 쉬였다.
《동무네도 저희와 비슷한 집안이였군요.》
《비슷하다는건… 무슨 소리입니까?》
《저의 집안도 오랜 귀족가문이였으니까요.》
나쟈는 다리우의 모래들을 쓸어버리며 생긋 웃었다.
《지금 친척들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얼마 없어요.》
《다들 잘못되였습니까?》
《그저… 그렇게 되였습니다.》
나쟈는 한동안 바다멀리 수평선쪽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키다가 추연히 말했다.
《혁명은 누가 누구를 하는 준엄한 싸움이니만치 류혈도 있고… 그 과정엔 애매한 사람들의 희생도 없지 않지요. 독초를 뽑을 때 그옆의 화초들도 피해를 당하듯이… 어쩌겠어요. 이건 력사발전의 불가피한 현상이니 그 희생에 익숙돼야 하고 또 이겨내야 하지요.》
《그렇다면 저나… 친척들도… 그런 희생을 받아들여야 한다는것입니까.》
《그건 본인의 태도여하에 관계되지만… 크건… 적건… 어찌하겠어요. 이겨내야지요.》
《이겨낸다는건?》
《아니, 이젠 그런 말은 그만하자요.》
나쟈는 풀어 제쳐진 금발을 올려쓸며 생긋 웃었다.
성민은 그의 가슴속에도 아물지 않는 상처가 있음을 알았다.
《한가지만 더 물읍시다.》
《뭔데요.》
《동문 어떻게 군관으로 되였습니까?》
《나 말이예요? 그러니 이 군복차림이 어울린다는거지요.》 나쟈는 묘하게 대답을 피했다.
《그렇습니다.》
《동무도 멋있어요.》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 경적소리에 이어 《률라!― 률라!》하는 강한 억양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를 찾는군요.》
《동무의 성이 률라였던가요.》
《네. 지금의 저는 률라 쎄묘노브나라고 불러요. 률라 쎄묘노브나. 똑똑히 기억해두세요. 그럼 저녁에 다시 만나자요.》
나쟈는 만날 장소와 시간까지 찍어말하며 일어섰다.
성민으로서도 바라던 일이였다. 채 듣지 못한 대답을 꼭 들어야 했기때문이였다. 어떻게 백작가문의 처녀가 붉은군대 군관으로 될수 있었는가.
군교육부 사무실에 돌아와 심란한 생각을 달리던 성민은 퇴근시간이 되기 바쁘게 밖에 나섰다.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있었다. 우산이 있어야 했다. 하여 먼저 집부터 들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여느때면 그의 발걸음소리가 울리기 바쁘게 열리던 문이 굳게 닫겨있었다. 퇴마루밑의 낯선 코고무신을 보며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문을 여니 방에는 뜻밖에도 려아가 와있었다.
려아의 신색이 달라진데 무척 놀랐다. 눈만 남은듯 한 수척한 얼굴에는 눈물자욱까지 어려있었다. 어떻게 왔느냐 하는 인사물음에도 대답을 안했다.
어머니의 얼굴색도 좋지 않았다.
그동안 려아는 세번인가 그의 집을 다녀갔다. 첫번째는 성민이가 서울에 갔을 때이고 두번째는 옥영이와 태민이의 결혼식때였다. 그때는 화려한 성장을 하고 왔었는데 지금은 어느 구석짬에 박아두었던듯싶은 물날은 연두색달린옷차림이였다.
《얘네 집안이 지금 말이 아니구나.》 어머니가 장탄조로 말을 뗐다. 《엄마는 앓아누워있구 이 애두 학교에서 쫓겨났다는구나.》
《쫓겨나다니?》
려아는 녀중학교의 음악교원이였다.
《쫓겨난것이 아니예요. 제가 저절로… 나왔어요.》
《그럼 벼슬길에 올랐다는거냐. 예수쟁이라구 해서 나왔으면 쫓겨난것이지.》
성민은 가슴이 덜컹했다. 오늘 만난 도당일군이 출연한 며칠전의 강연회에서는 계급대오의 순결성을 보장할데 대한 장시간의 강론끝에 사회기관들과 교육문화단체들에 숨어배긴 친일파, 민족반역자, 부르죠아인테리를 비롯한 자산계급의 떨거지들과 석가모니, 그리스도, 천도교의 어중이떠중이들을 말끔히 청소해치우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려아는 분명 그 불호령속의 어중이떠중이로 지목되였을것이였다.
려아에게 무슨 말부터 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우리 집 이야기도 대수간 들었겠구만.》
밥상을 차려놓은 어머니가 아버지의 방에 올라갔을 때에야 입을 열었다.
음식들을 들며 그사이의 일들을 주고받았다.
상에는 려아가 사가지고온 갖가지 떡들과 어물반찬들이 수두룩 했으나 려아도 그랬고 성민이 역시 구미가 동하지 않아 인차 수저를 놓고말았다.
《좀더 드시지 않고.》
려아는 무척 서운해하는 기색이였다.
성민이 랭수 한사발을 다 들이키는것을 보자 겁기어린 눈을 깜빡이다가 뜻밖의 소리를 하였다.
《저한테 명례씨가 왔댔어요.》
《명례가.》
하마트면 물에 개킬번 했다.
도문역에서 헤여질 때 명례는 곧추 서울의 고향집으로 간다고 했다.
《저도 뜻밖이였어요. 라진에 있는 친척을 데리러 왔다고 하면서 무슨 조선업기술자라고 하던가…》
《그런데 동무한텐 무엇때문에 왔다고 하오?》
성민의 거치른 말에 려아의 얼굴이 빨깃해졌다.
《그는 저와 어머니도… 함께 가자고… 했어요.》
《함께?!―》 성민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요동치는것 같았다.
《그래 어떻게 하기로 했소?》
려아는 절망적인 기색이였다.
《전… 어찌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성민은 《모르겠다는거야 가겠다는거나 같은 소리가 아니요?》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오는것을 간신히 참았다.
《어머니도… 같은 생각이요?》
《어머니는… 저만 좋다면… 저한테 맡겼어요.》
려아는 간곡한 기대와 애원어린 눈길로 성민을 보았다.
성민은 그의 눈길을 외면하였다.
그가 지금 무엇을 바라는가를 알았기때문이였다.
어느만큼 려아를 위해줄수 있는가.
아침에 만났던 도당일군의 서슬푸른 모습이 떠올랐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지금 나로서 말할수 있는것은 명례든 뭐든… 절대로 가서는 안된다는 그것이요.》
려아의 눈에 희망의 불꽃같은것이 반짝했다.
《사실은… 어머니도 그 비슷하게 말씀했어요. 그러면서 동무와 의논해보라고…》
성민은 속이 흠칫했다. 태민의 결혼식때 려아와 함께 왔던 그의 어머니의 말이 생각났다. 봐둔 처녀가 있는가 하고는 의미있게 려아를 향해 웃으며 이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했다.
그때 성민은 아직은 나이가 안됩니다라는 식으로 적당히 넘겼다. 그것이 후회막급했다. 그러니 려아에게도, 그의 어머니에게도 의연히 미련을 준셈이 아닌가.
(모질지 못한때문이다. 아프더라도 명백히 선을 그어주어야 한다.)
하지만 말은 다르게 나왔다.
《어머님의 생각이 옳소. 그런데 지금 명례는 어데 있소?》
《무슨 이모네 집인가 있다는데… 한번 가보자고 하는걸 싫다고 했어요.》
려아는 귀뿌리까지 빨개졌다.
《난 명례라는 인간을 신통하게 보지 않소. 그러니… 그의 말은 믿지 마오.》
려아는 방긋 웃었다.
《그래요. 저도 좀 싱거웠어요.》
성민을 쳐다보는 려아의 눈에는 더 짙은 기대와 희망의 빛이 얼른거렸다. 성민은 랭정해지려 애썼다.
《명례가 가자는건 남쪽이겠지.》
《네, 거기선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 억누르는 일은 없다고 하며―》
성민은 울끈했다.
《동문… 예수를 꼭 믿어야겠소?》
《이제 와서 그것이 무슨 의의가 있나요. 전 학교에서 나왔을뿐만 아니라 민청에서도 출맹되였어요!》
《출맹?!… 한데 동문 도대체 입은 뒀다 뭘하고있소. 예수건 뭐건 상관없는것이라고 하면 될거 아니요.》
《전 거짓말을 할줄 몰라요.》
《거짓말?!… 난 동무가 진짜로 그렇게 될걸 바란단 말이요.》
《건 뭣때문에요?》
려아의 말은 도전적으로 울렸다. 눈빛도 달라졌다. 비웃는듯 한 눈길인가 하면 설음에 찬 눈길이였다.
성민은 가슴이 뻐근해졌다.
(어쩔수 없다. 우리들 사이에는 바로 이것이 넘을수 없는 계선이다.)
성민이 묵묵히 침묵을 지키자 려아는 불시에 입술을 옥물며 발딱 일어섰다.
《전 가겠어요.》
《아니, 이제 어떻게 간다고.》
《열한시차가 있잖아요. 집엔 오늘안으로 돌아간다고 했으니까요.》
려아의 얼굴은 얼음처럼 차거웠다.
웃방문이 드륵 열리며 아버지의 웅글진 목소리가 울렸다.
《려아야, 네가 정말 떠날 작정이냐?》
《네.》
려아는 소리없이 미닫이문쪽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절을 하였다.
칠칠한 머리태가 장판에 가로누웠다. 흑 하는 흐느낌과 함께 비오듯 눈물이 샘솟아 흘렀다.
성민은 보기 민망하여 문밖으로 나섰다. 신발을 찾아신다가 부산스런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어머니가 려아를 붙안아 당기고있었다. 그통에 려아의 손에 들린 가방이 떨어져내리며 분홍색비누곽과 치약이 굴러내렸다.
성민은 려아가 자고가려고 했음을 알았다.
거리는 조용하였다. 이 지방에서 즈내라고 부르는 이슬비가 추썩거리는 길바닥에 뿌잇한 연기발같은것이 굽실거리며 력청탄 타는 냄새를 진하게 풍겼다.
역기다림칸에 이를 때까지 거의나 말없이 걸었다. 려아는 차표를 사왔을 때도 《고마와요.》라고 했을뿐 눈길마저 피하고있었다.
역표받는 곳으로 나갈 때 그의 표정이 얼마나 깔끔하고 차거웠던지 성민이의 나들표를 검열하던 역원은 수상스러워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마치 동무의 가해자이고 동문 피해자쯤 되는것으로 보는구만.》
머리속이 온통 벌둥지가 된 속에 이런 말로 호기를 보였으나 려아는 걸음발만 재촉했다. 우산을 줄 때야 뭔가 달라졌다.
《거기서는… 어떻게 해요?》
《내야 뭐라오. 게 가면 비가 더 올수도 있으니까.》
려아는 잠시 망설이는 기색으로 있다가 우산을 받아들었다.
기적소리가 길게 울리자 려아는 기다렸다는듯이 재빨리 승강대로 뛰여올랐다. 성민은 자리까지 잡아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려아는 거절했다. 승강구를 막으며 돌아설 때 눈에 물기같은것이 핑 고이는것이 알렸다.
덜커덩, 차가 움직이자 려아의 몸이 휘친하며 넘어지는듯 했다. 그러나 다시 꼿꼿이 펴졌다. 차의 속도가 빨라져도 그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어둠속으로, 안개속으로 사라져가는 그 모습은 하나의 굳어진 조각상같았다.
《내 인차 한번 가겠소.》
성민이의 이 말은 재차 울리는 기적소리에 묻혀버리고말았다.
려아를 바래주고 왔을 때 성민은 또 하나의 가슴아픈 사실을 알게 되였다. 군서무과에서 일하던 아버지도 해고령을 받았다는것이였다.
역시 태민형과 자산계급출신이라는 딱지때문이였다.
어떻게 할것인가.
성민은 밤새워 아버지와 의논을 한끝에 언젠가 도인민위원회에서 일한다고 기별을 보내온 외삼촌의 옛 동무를 찾아보기로 락착을 보았다.
아버지가 가기로 했다.
《잘되겠지. 요즈음 반일혁명자들을 내세우는데 우리도 사돈에 팔촌쯤 되지 않겠니.》
이런 말을 남기고 떠난 아버지는 그날 밤 늦어서야 집에 들어섰다.
《안된다고 하더라.》
렬차안에서 술을 마셨는지 얼굴이 불깃해진 아버지는 방에 들어서기 바쁘게 잠자리에 들었다가 두세시간도 안되여 깨여났다.
벙긋벙긋 타는 그의 담배불을 보고 성민이도 일어나자 아버지는 한숨을 꺼지게 쉬며 낮에 겪었던 일을 자초지종 말했다.
아버지를 반겨맞은 외삼촌의 옛 동무는 그게 무슨 일인가고 펄쩍 뛰며 도당으로 가자고 했다. 쏘련의 따슈켄트에서 당사업을 하다가 왔다는 도당위원장은 그 사람한테는 공경스러운 태도였다고 했다.
《그 도당위원장이라는 어른이 조선말도 아직 잘 모르더라. 우리가 독립운동자를 도왔다는데 대해서는 성을 내였구 외삼촌이 조국광복회 회원이였다는 소리엔 광복회가 뭔가고 하지 않겠니? 그다음은 나한테 호령을 치더라. 착취요, 압박이요, 프로레타리아독재요 하며 알아들을수 없는 소리를 하던 끝에 하나만은 똑똑히 말하더라. 〈그만큼 무산자의 피땀을 짰으면 되지 않았는가. 이젠 당신네도 마치와 호미를 잡고 피압박인민이 당한 고통을 맛보라. 이건 반동계급에 대한 우리의 어길수 없는 원칙이다.〉하구.
가만 생각해보니 과히 틀린 소리는 아니더라만 쓰다달다 말하지 않구 나왔다. 그다음 너의 외삼촌 동무가 나오는데 한바탕 싸운 기색이더라. 역전까지 바래주면서 하는 말이 지금 장순명이라고 하는 그 도당위원장이 하는 일이 김일성장군님 뜻과 어긋난다고 하면서 바루 잡힐 때가 온다는거다.
그랬음 오죽 좋겠냐마는… 우리가 그전에 호의호식했으니 그 도당위원장 말대로 해야 할것 같다.》
성민은 속이 울끈했다.
《아버지, 무슨 일을 하든 그건 일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왜 반동계급입니까? 그럼 저나 아버지는 일생 반동의 락인을 찍히우고 살아야 한다는겁니까?》
《어쩔수 있니. 살긴 살아야 하는거구 사느라면 알아줄 때도 있겠지. 참, 청진역에서 그전 왜놈들한테 죽은 목재상의 딸을 만났다. 우리 집에 와 숨어있던 처녀애 말이다.》
《순정이 말이지요. 그 애 아버지는 빨찌산지하공작원이라고 했어요.》
《그래, 맞다. 그 애가 먼저 나를 알아보구 어떻게나 반기는지 평양으로 가는 길에 차에서 잠시 내렸더구나.》
《그 애 집은 경원 어디라고 하던데요?》
《평양에서 산다고 한다, 지금 김일성종합대학엘 다니구… 우리가 경성에서 사는걸 알았더면 들려보는걸 그랬다구 아쉬워하더구나. 여기 온포온천에 와서 보름넘게 있었다는데… 그런데 말이다. 그 애가 글쎄 김정숙녀사님과 함께 온포에 와있었다는것이 아니겠니. 그 앤 김일성장군님과 김정숙녀사님께서 각별히 돌봐주신다고 하면서… 너랑 우리 얘기를 듣더니 꼭 그분들께 우리 얘기를 하겠다더구나.》
《우리 얘기를?!… 그렇게 될수 있을가요?》
《글쎄 말이다.》
그런데 이로부터 사흘째 되는 날 성민은 군보안서의 호출을 받았다. 혹시나 하여 달려가보니 도보안국에서 내려온 사람이 그를 만났다.
날카로운 눈매의 그 일군은 려순공대시절에 대하여 몇가지 묻고는 명례를 아느냐고 심문조로 물었다.
《네.》하고 선뜻 대답하자 일군의 말투가 부드러워졌다.
《그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오?》
성민은 뭔가 심상치 않는 일이 생겼다는것을 느끼며 덜지도 보태지도 않고 자기 생각을 죄다 말했다. 말없이 듣던 일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적으로 글렀다 이 말이구만. 그런데 그 명례라는자가 라진조선소에 폭탄을 던지고 도주한걸 아오?》
성민은 깜짝 놀랐다. 그가 입을 하 벌린것을 알아본 일군은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그렇소. 폭탄을 던졌소.》
그 일군은 종이장 몇장을 뒤적이다가 눈섭을 찌프렸다.
《동문 동무의 형이라는 사람이 남으로 간걸 아오?》
《네. 그 길밖에 없을것입니다.》
《그 길밖에 없다?! 한데 왜 동문 함께 가지 않았소?》
성민은 속이 욱 끓어올라 쓴입만 다셨다.
《내 말이 지나쳤다면 용서하오.》
일군은 빙그레 웃으며 성민이를 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지금은 반동들의 준동이 심하오. 대체로… 동무네 같은 잘살던 사람들속에 그런자들이 많이 나오오.》
《저흰… 그렇지 않습니다.》
성민의 고집스런 대답에 일군은 무척 호감어린 기색이였다.
《동문… 우리와 함께 일할 생각이 없소?》
《네?!…》
성민은 잘못 듣지 않았는가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일군은 또다시 문서장을 뒤번져보고는 나직이 한숨을 지었다.
《지금 우리한테는 공부한 사람이 적소.… 동무네 집안은 좀 복잡한데 김정숙녀사님께서 하신 말씀을 봐서는… 문제는 동무가 어떤 립장으로 건국사업에 림하는가 하는거요.
동문 이 고장의 자본가였던 박주래가 몰수당했던 양조장이며 재산까지 다 되찾은걸 알고있소?》
《네?!―》
《허, 같은 곳에서 살면서도 그걸 모르다니. 그건 김일성장군님을 받들어싸운 김정숙녀사님께서 취하신 조치요. 그분께서는 이곳 도당에서 하는 일에 대해서도 장군님뜻과 어긋난다고 하시며 지난 기간 잘살았다고 해서 죄다 반동취급하는것은 잘못이라고 하셨소. 잘 생각해보오. 나도 좀 더 알아보겠소.》
날아갈듯 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온 성민은 아버지와 함께 박주래를 찾아갔다. 그 일군의 말은 사실이였다.
화만 쌍으로 오는것이 아니였다.
다음날 성민은 김일성종합대학으로 가라는 지시를 전달받게 되였다.
그 지시는 다름아닌 도당의 쏘베트쓰끼가 전달했다. 성민이를 군교육부에서 떠나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던 때와는 판다르게 풀이 죽은 기색이였다.
그는 종합대학이 마음에 안 들면 군교육부에 그냥 있어도 좋다고 하며 멋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동무때문에 되게 꾸중을 들었소.
내딴으로는 프로레타리아 계급투쟁원칙대로 했는데… 우에서는 동무와 동무의 아버지에 대해 애국적이고 량심적인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내 말은 다요.》
그날 저녁 성민은 려아가 탔던 렬차에 올랐다.
아, 얼마나 기쁨넘친 길이였던가. 또 얼마나 가슴들먹였던가. 쏘베트쓰끼는 상급당의 뜻대로 한다면 려아도 대학에 갈수 있다고 했다.
이때문에 려아를 찾아떠나게 된것이였다. 날이 푸름푸름 밝아올 때 려아네 집을 찾아가니 자그마한 기와집앞에서 웬 중년사나이가 마당청소를 하고있었다.
성민이 려아에 대해서 묻자 그 사나이는 비자루를 집어던졌다.
《그와 잘 아는 사인가?》
《좀 압니다.》
《좀 안다?! 그년들은 하루밤새에 솔가도주를 했소, 조선소를 파괴했다는 반동과 함께.》
성민은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섰다.
그때를 더듬고난 성민은 이렇게 썼다.
《…려아가 그렇게 된데는 당시 함북도당에 잠입하였던 종파사대주의자들과 어중이떠중이들의 좌경적책동과도 관계되지만 나의 잘못도 크다고 본다. 이로부터 나는 무식하고 독선적이고 교조와 편견에 사로잡힌자들의 책동으로 오인된 우리 공화국의 정책에 대한 재인식을 주기 위하여, 그런자들의 활개짓속에 인간적의무를 다하지 못한 나자신을 반성하기 위하여 남으로 왔다. 왜 그를 돕지 못했는가, 이것이 나의 반성이고 아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