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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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이 열흘만에 도착한 봉천은 자유와 무법의 왕국이였다.
명목상 쏘련군 위수사령부가 치안을 맡고있다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일본군 패잔병들을 적발억류하는것과 폭력배들의 준동을 억누르는 정도에 머물러있었다. 시안의 유지들과 여러 계층의 대표들로 구성된 자치위원회도 있었지만 그것은 유명무실한 존재에 불과하였다.
어느 쪽으로 가는가. 키도 방향타도 없는 상태였다.
도시에는 팔로군의 공산당활동가들과 국민당정객들이 제가끔의 세력을 규합하고있었으나 누가 패권을 쥐겠는지는 두고봐야 알 일이였다.
시안에서 활개치는것은 장사군들과 사기군들, 소매치기와 부랑아, 화류계의 녀성들이였다. 시장과 뒤골목들에서는 일본돈과 중국돈을 쏘련군표와 바꾸는 놀음이 성행했고 일본인과 부자집들을 털어내는 인파가 네거리를 누볐으며 이런 속에 애매한 사람들이 《따》를 당하고 주머니의 잔돈까지 털리우군 했다.
형님이 있다는 피난민구제소라는 곳에 가니 담벽에 붙인 광고문에도 그런 내용이 적혀있었다.
―환영! 고국에 가려는 조선동포들의 숙박, 차편을 알선해드림―
조선문과 중문으로 쓴 글이였다.
허름한 협화회복차림에 커다란 배낭을 진 성민이 그 광고문앞에 이르자 눈섭등에까지 일본놈의 도리우찌를 내리쓰고 색안경을 낀 스물두세살 나보이는 갱핏한 얼굴의 청년이 그를 불렀다.
《조선사람이야?》
《네.》
《뭣하러 왔어?》
접이걸상우에 앉은 그 청년의 말투에서는 광고문과는 다른 불친절이 느껴졌다. 도리우찌밑으로 삐여져나온 고수머리칼과 색안경이 성민이로 하여금 경계심을 가지게 했다. 광고문을 보며 말했다.
《저두 도움을 받자고.》
《돈이 있어?》
《네.》
성민은 웃옷주머니에 있던 백원짜리지페를 내보였다.
《흠.》
고수머리는 코방귀를 뀌였다.
《천황이 자빠진지 언제게 그따위걸 들고다녀. 무슨 돈냥이 될것이 없어?》
《없는데요.》
아편덩이를 생각했다. 고수머리는 또 한번 그의 아래우를 내리훑고는 쌀쌀하게 말했다.
《후날 다시 와보라구. 지금은 정원이 다 찼어.》
《저긴 고국에 가려는 사람들을 알선―》
《정원이 다 찼다고 하지 않아.》
팩 하고 내쏘는 고수머리의 말은 군사교련때 소리치던 왜놈사관의 호령과 흡사했다.
《한가지만 더 물읍시다. 여기에 지태민이라고 하는분이 안계십니까?》
《지태민?!… 그를 어떻게 알아?》
성민은 그의 태도가 돌변한것을, 여차직하면 끌어안던가 한주먹 먹일듯 한 태도를 보며 솔직히 말했다.
《저의 형님입니다.》
《형님?!… 정말이야?》
《그런것두 거짓말 하겠습니까.》
《뭐, 증명할만 한것이 있어?》
《건 없습니다.》
《그럼 신분을 확인할것도 없는가?》
《있습니다.》
성민은 미심결로 가지고 왔던 려순공대학생증을 꺼내보였다.
《어!―》
고수머리는 외마디소리를 내지르며 성민의 두손을 와락 그러잡았다.
《맞아. 려순공대 수재!… 친구, 안됐다.》
고수머리는 대번에 삽삽한 사람이 되여 성민의 잔등까지 두드려주었다.
《내 군의 말을 많이 들었어. 이러고보니 진짜 태민형을 먹고 게웠군.》
고수머리는 색안경까지 벗어내렸다.
《그래, 여긴 어떻게 왔나?》
《집에 일이 생겨서… 아버지가 앓고있습니다.》
《어, 그거 안됐는걸.…》
고수머리는 진심으로 걱정어린 기색을 보이고는 성민의 배낭을 벗겨내렸다.
《이러고있지 말고 어서 들어가자구. 난 군의 형님과 막역한 사이야.》
미닫이문 안쪽의 긴 복도를 지나 구석진 한 방에 갈 때까지 고수머리가 봉천군관학교 졸업반생이였고 형님이 교관을 하였음을 알게 되였다. 올여름 일본륙군사관학교를 마치고온 형님이 아버지와 어머니앞에서 일본놈 총대잡이는 절대 아니 되겠다고 다시 맹세했다던 말이 사실로 되였다는것으로 안도감을 느꼈다.
《잠간 기다리게.》
돋음무늬의 벗꽃모양이 새겨진 문앞에 이른 고수머리는 도리우찌까지 벗어들며 약간 굳어진 기색을 보였다.
《뭐야, 다들 떠나갔다고?!》
고수머리가 열어제끼는 문틈으로 탁을 내리치며 울리는 노성에 성민은 저도 모르게 흠칫 했다.
좀 있어 문이 다시 열리며 고수머리가 반기는 기색으로 손짓했다.
《어서 들어오라구.》
누비돗자리를 깐 방에는 7~8명되는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다부산자차림도 있고 제낀 신사복차림도 있었다. 제낀 신사복에 넥타이를 맨 눈매가 날카로운 사람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성민군이라지. 군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알고있어. 정말 들은바 그대로 끌끌한 미청년이구만. 그런데 어쩐다? 한발 늦었으니―》
그 사람은 이 말을 하고는 성민이가 더 물을 틈을 주지 않고 주변사람들을 손짓해보였다.
《여기 모인 사람들도 다들 태민군의 친구들이야. 나로 말하면 이곳 반장을 하는 원권이라고 하네.》
원권이라고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때까지 성민이를 지켜보다가 자기옆에 끌어앉혔다.
《그래 집에서 부친이 잘못되였다는데 어찌된 일인가. 얼마전에 보낸 우리 사람의 말로는 다른 일이 없었다고 하던데―》
어조는 부드러웠으나 눈빛은 속까지 뚫어볼듯 예리했다. 성민은 진땀이 났다.
《제가 집에 가보니 따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통에 아버지는 허리까지 상했는데 제대로 운신조차 못합니다.…
사실 지금에 와서 저희 집은 별로 잘살지도 못하는데두.》
성민은 만약을 생각해 이런 말까지 하다가 흠칫하며 혀를 깨물었다.
벗꽃문양의 은지를 바른 벽에는 화보장에서 본 레닌과 쓰딸린의 초상화가 걸려있고 그밑에는 쏘련국기까지 붙어있었다. 그의 놀라와하는 기색을 본 원권은 싱그레 웃으며 더 살갑게 물었다.
《그래 점심은 먹었나?》
《네.》
《그럼 좀 쉬다가 저녁식사때 다시 만나자구.》
《저… 저의 형님은 지금 어데 있습니까?》
《그에 대해선 걱정 말라구. 이제 다시 올테니 그때까지 우리와 함께 있자구. 부친의 병세때문에 되돌아가겠다면 별문제지만…》
《여기서 기다려보겠습니다.》
《그래, 그게 좋을거야. 택규군, 동무해주라구.》
《하잇!》
고수머리는 용수철처럼 튕겨일어나며 거수경례를 붙였다. 원권의 눈섭이 일그러졌다.
《이봐, 언제면 그 버릇이 고쳐지겠나.》
《죄송합니다, 고치겠습니다.》
택규라는 고수머리의 황급한 대답에 원권은 손을 한번 휘젓는것으로 더이상 할말이 없다는것을 표시했다.
《저 사람들은 지금 무얼하고있습니까?》
밖으로 나온 성민은 택규가 들고나온 또 다른 접이걸상에 허물없이 앉으며 물었다.
《새 나라를 세우는데 필요한 의논들이지.》
택규는 방금전에 핀잔을 들은 사람같지 않게 밝은 얼굴이였다. 성민은 호기심이 부쩍 치밀어올랐다.
《새 나라를 세운다는건?…》
《그건 한두마디로 말하기는 어려운거요. 군이야 사각모선생님이니 잘 알테지만 이곳 땅이야 우리 조상들이 개척하고 자리잡은 고구려의 옛땅이 아닌가. 그러니 필부가 아닌 이상 지금과 같은 기회를 스쳐보낼수 있는가, 되찾아야지.》
《아니, 그러면 쏘련군대와 중국사람들과 전쟁을 한다는것입니까?》
《허허, 이런 선생님이라구야.》
택규는 유쾌한 웃음을 터쳤다. 허나 눈만은 웃지 않았다. 성민을 스쳐볼 때도 또 앞의 행길을 지나가며 《빈 땅후루.》(아가위 사시오.)를 부르는 로인을 살필 때도 매눈같이 예리하고 차거운 빛이 번쩍였다. 꽃무늬게다를 따각거리며 지나가는 기생퇴물림인듯 한 녀인을 보자 한손을 휘저어보이며 말을 계속했다.
《필요하면 싸움도 해야지. 하지만 그런 싸움은 없을거네. 쏘련군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끝내면 돌아가게 되는것이고 장개석총통이나 홍군의 모택동은 관내 패권싸움에 여기엔 시선을 돌릴수 없거던. 군은 삼국지를 읽었나?》
《읽었습니다.》
《력사적으로 중국은 내란이 심한 나란데… 이 동북만은 관심밖이였어. 그러니 우리가 잽싸게 여기를 타고앉으면 그들로서 어쩌겠나. 그래 내 말이 어떤가.》
그는 길거리를 살피기도 하고 성민이의 반응을 곁눈질해보기도 하며 이 말을 했다. 성민은 그가 밖에 나와있는것이 그 《새 나라 의논》을 지켜주기 위한 망보기임을 알았다.
더 깊이 알고싶어 능청스럽게 머리를 끄덕였다.
《듣고보니 그럴듯 합니다.》
《거야 명백한 리치니까. 한데 일은 여의치 않아. 관내의 싸움군들이라고 하던것들이 죄다 서울로 갔다는거야. 그까짓 〈림정〉령감태기들은 계산밖이였으니 애당초 제껴놓은것이지만 일본군에서 쟁쟁히 이름을 떨치던 장교들까지 서울로 들고뛴다는거야. 통분할 일이지. 신념도 량심도 없는것들이야. 군은 미군이 서울에 들어온걸 알아?》
《그건 처음 듣는 소립니다.》
《그럴테지, 그 관내의 패거리들은 미군한테 붙어 한자리 얻을 생각부터 했을거란 말이야. 그러니 통분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이건 비밀이네만 자네 형님은 바로 관내에서 도망칠 궁리를 하는 떨거지들한테 갔어, 이곳에 와서 힘을 합쳐 기회를 노리자구.》
《관내란… 어느곳인데요?》
《쭉 훑어야지. 여러곳에 널려있을테니까 잡힌 장교들은 어쩔수 없지만, 혼자 간건 아니니 념려할건 없어. 빌어먹을것들, 우리두 여기에 있는게 좋아 있나? 붉은군대를 보면 역기가 나지만 대업을 생각해야지.…》
《저… 방금 볼려니 방엔 로씨야 수령들의 사진과 붉은기까지 걸려있던데요.》
《그건 위장때문이야. 그래 쏘련군이 판을 치는 땅에서 방법있나. 큰일을 위해서는 공산당과도 손을 잡고 필요하면 쏘련군대도 등에 업자는거야.》
《저… 김일성장군님은 공산주의를 한다고 하던데 그러니 우리 나라는―》
《아니, 아니야. 우리로 말하면 이 땅을 타고앉고 조선까지 죄다 우리것으로 만든 다음 그 정치라는 기발도 우리의 기발로 바꾸자는게야. 다나까내각을 뒤집던 방식으로 몇명 청년용사의 칼부림만 있으면 박씨든 리씨든 우리가 필요한 사람을 왕으로 아니, 대통령이지. 대통령으로 올리면 만사가 쭉 펴이지.》
성민은 기가 막혔다. 이자의 눈을 봐서는 만만치 않지만 하는 말은 미친자의 잠꼬대같은 망언이였다. 목단강에서 여기까지 오며 알게 된 장개석군과 모택동군간의 싸움을 봐도 이들의 생각이야말로 천진란만한 꿈이라는 가소로움을 금할수 없었다.
택규로부터 이러루한 장광설을 듣는 사이 세사람이 왔다가 물러갔다. 다들 초라한 행색에 들고온 짐이란 이불보따리와 쌀짐이였다. 택규는 그들에게도 성민이한테 하던 식으로 묻고는 후날 보자는 식으로 쫓아버렸다. 봉천역에서 근무했다는 대모테안경을 낀 사람으로부터 《당신네는 돈잡이를 하려고 이걸 차려놓았소?》라는 말을 듣자 다짜고짜 귀쌈을 후려쳤다.
《이놈의 친일분자야, 네가 다시 왔다간 뼈다귀도 추리지 못할줄 알아라.》
택규는 싸쥔 볼을 움켜잡고 쫓겨가는 대모테안경에게 주먹까지 흔들어보이고는 껄껄 웃었다.
《별 떨거지들이 다 온다니까.》
《아니, 그럼 저 광고문은 떼버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야 되나. 필요한 사람들은 우리가 도와줘야 하니까, 물론 돈은 탁탁히 받아야지만.》
《돈은 무엇때문에.》
《허, 부자집 도련님이니 깜깜이구만. 우리가 여기서 먹고 사는것도 그렇고… 보다는 군자금확보지. 총도 사람도 돈이 없으면 어데서 얻을텐가.》
《그래도… 너무하군요.》
《역시 선비님이군. 그런 생각으론 아무 일도 치지 못해. 그리고 저러루한 떨거지들은 아무 판에도 살아갈것들이거던. 저 대모테안경은 펜대나 놀리며 꽤 살았겠지만 여하튼 백성에 불과하거던. 백성이란 다스림을 받고 다스림을 하는 힘앞에 끌려다니는 마소와 같은거야.》
《저도 백성인데요.》
《허허, 이 친구 봐라. 한다하는 부자집 아드님이 하잘것 없는 백성이라니, 더구나 태민형의 동생이.》
태민을 상기시키는 말에 성민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처럼 총명하고 깨끗한 형님이 이러루한 사람들의 동아리속에 있다는것이, 더구나 되지도 못할 망상에 빠져 이러구저러구 한다는것이 억이 막혔다. 잘 믿어지지도 않았다. 그렇다 해서 더이상 물어볼수도 없었다.
성민은 한주일동안을 이 집에서 살았다.
이 집은 얼핏 보면 조용했으나 밤이면 몹시 부산스러웠다. 군인출신들이 분명한 사람들이 찾아왔다가는 날이 밝을녘이면 어데론가 떠나갔다. 어느날 밤에는 멱을 따는듯 한 비명에 놀라 깨여났다. 문짬으로 내다보니 마루를 구르며 나가는 사람들의 손에 커다란 마대같은것이 들려있었는데 그 마대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아직 살았군.》하며 마대짝을 걷어차기까지 했다.
그 다음날로 숙박장소를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시안의 여기저기를 헤매던 그는 조선사람이 경영한다는 려관을 찾게 되였다. 《해방려관》이라고 국한문으로 쓴 간판옆의 미닫이창에 《조선동포들에 한해서는 렴가로 봉사함》이라는 글발까지 붙어있는 려관이였다.
이 려관에서 달포가량 묵어있는데 그동안 이틀이 멀다하게 찾아들던 택규가 어느 하루는 불맞은 노루모양으로 허겁지겁 뛰여들었다.
《이보게, 여기를 떠야겠네.》
《뜨다니요?》
성민이 《일로사전》을 놓고 쓰딸린의 《민족문제에 관하여》를 한창 뜯어볼 때였다. 그런데 그전까지만 해도 성민의 앉은뱅이책상우에 놓인 맑스며 레닌의 책들을 볼 때면 이게 뭔가고 사시눈을 흡뜨면서 비양거리던 그가 이번에는 쓰딸린의 초상까지 붙어있는 책이건만 외눈도 돌리지 않고 엮어댔다.
《서울에서 기별이 왔네. 신경에 있는 우리 본부에서도 지시가 있었구. 당장 여기를 떠 서울로 가라는걸세.》
성민은 놀랐다.
동북땅을 다 타고앉는다던 기세는 어데로 갔는가. 웃음집이 흔들거렸다.
《저… 거사계획은 어떻게 하구요?》
성민의 말에 택규는 게면쩍게 웃고는 낯을 찌프렸다.
《자넨 려관방에 있다나니 영 깜깜이구만. 이제 여기서두 장개석군대와 모택동군대가 대판 싸움을 벌리게 돼. 그러니 우리같은 새우들이야 고래싸움에 등 터질 노릇이 아닌가. 그리고 좀 있으면 38°선을 경계로 서로 다른 정부가 서게 돼. 38°선 이남은 미국식민주주의정권이 서게 되고 이북은 쏘련식붉은정권이 서지. 이건 물론 우리가 바라는건 아니야. 때문에 우리가 빨리 가서 우리가 바라는 정부를 이북에까지 세우기 위해 혈전분투를 해야 할거거던.》
너무나도 뜻밖의 무지스런 말이였다. 나라가 둘로 갈라진다는것은 뭐고 혈전분투란 또 뭔가.
《그럼 우리 형님은 어찌 합니까?》
성민은 나라도 나라지만 당장은 태민형의 일이 걱정되였다.
《실은 그때문에 온거야. 지금 임자 형님은 광동 아니면 중경에 있을터인데 그를 찾아와야겠어. 아직까지 여기 오지 못한걸 봐서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것 같고… 일본군에 있은 사람은 장개석도 모택동도 사정보지 않으니까.》
성민은 가슴이 덜컹했다. 그러지 않아도 늘 그때문에 시름이 컸던 성민이였다. 저도 모르게 불쑥 일어섰다.
《그렇다면…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광막한 대륙, 그 머나먼 험한 길과 형을 그려보니 가슴이 화들거리며 눈물이 핑 고였다.
《성민군, 장하이.》
택규가 목멘 소리를 지르며 성민의 손목을 와락 그러잡았다.
그는 강개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도 가겠네. 사지판에 동지를 두고 외면할수 있는가.》
《아니, 택규형이?》
《그럼.》
성민은 가슴이 쩡해들었다.
《고맙습니다.》
《아니, 이건 우리 본분일세. 그리고 나도 꼭 찾아야 할 사람이 또 있네.》
갈 일을 의논했다. 로자가 문제라고 하자 택규는 피씩 웃었다.
《그건 념려말게.》
저녁녘에 기차에 올랐다. 그런데 차는 두 정거장을 지나 멎고말았다. 그때부터 간고한 려행이 시작되였다.
마차를 세내여 타기도 하고 도보로 걷기도 했다.
택규한테는 넘치도록 돈이 많았다. 금붙이따위들도 수두룩했다.
피난민도움을 바라 찾아온 사람들에게서 옭아낸것일것이였다.
웃음도 있고 눈물도 있는 길이였다. 어설픈 《연기》도 해야 했다. 이런데서 택규는 비상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다 낡아빠진 다부산자차림의 택규는 대상에 따라 중국사람행세도 하고 반벙어리흉내도 냈다. 그리고 그에게는 여러가지 증명서들이 교예사의 손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주패장처럼 취체자들의 행색과 말투에 따라 연신 뒤바꿔 나왔다.
팔로군앞에서는 연안의 화북조선인독립동맹휘장을 보였고 국민당군한테는 중경《림시정부》의 공인이 찍힌 증명서를 휘둘러댔다. 그보다도 더 잘 통하는것은 돈과 금붙이였다.
그러나 이런 단속은 드물었다.
피난민떼가 범람하는 때이라 웬간히 표가 나지 않는 한 스쳐보내는것이 일쑤였다. 그런데다가 택규는 먼발치에서 울리는 대포소리를 듣고도 저건 어디 편이고 저건 팔로군이고 하는 식으로 재빨리 판단하였고 그들과 맞다들지 않을 길을 찾아내군 하였다.
관내에 들어서면서 언어가 통하지 않아 애를 먹었다.
성민이나 택규가 배운 얼치기중국말은 동북방언이여선지 도저히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종이장에 글로 써서 화답하는 경우가 많았다.
광동까지 오는데 두달반이 걸렸다.
성민은 여기서 택규가 오게 된 진짜 목적을 알게 되였다.
택규는 태민형도 태민형이겠지만 자기 누이와 매부때문에 온것이였다.
큰 점포를 7개씩이나 가지고있다는 매부라는 사람은 택규의 매부라기보다 아버지벌로 볼 중늙은이였다.
그들 내외는 초라한 거지행색의 택규를 선뜻 알아보지 못했다. 차림도 그렇거니와 까뭇하게 타고 말라빠진 얼굴에 눈만 남은 정도였다.
성민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택규가 한바탕 친척간의 상봉극을 보인 다음 태민에 대하여 물었다.
매부라는 사람은 가엾다는듯 성민을 보며 말했다.
《그 사람은 서울로 간지 오래다, 여기 왔던 병정들과 함께. 한데 그걸 알린다구 너희한테 사람을 보낸것 같은데 못 만났느냐?》
택규는 그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다행이라는듯 끔뻑 반가운 흉내를 냈다.
《됐군요. 저도 그때문에 온겁니다. 매부네도 당장 짐을 싸고 서울로 가야겠습니다.》
《아니, 서울루는 무슨 서울. 이곳 집과 재산은 어찌하고…》
《허참, 매부는 목이 두렵지 않수. 이제 여기두 장개석이나 모택동의 땅이 될텐데. 그렇게 되면 일본령사관 경찰출신의 매부는 더 말할것도 없고 누이까지 잘못될것 아닙니까.》
《하긴 여기 온 군대들두 그렇게 말하더라만…》
《여기 온 군대란 어떤 사람들입니까?》
《태민이라는 사람을 찾아왔는데 그가 떠난 다음이여서 우리 집에 눌러있다. 그들도 매일 서울루 가자고 성환데 배를 얻는것때문이라고 미루던 참이다.》
《떠나야 합니다. 더 우물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허허 참.》
그 집에서 점포의 물건과 가산을 처리하는 동안 성민은 몸살을 만나 열흘넘게 자리에 누워있었다. 오는 길의 로독도 로독이지만 집생각과 태민형에 대한 근심으로 몸과 마음이 완전히 시진해버렸던것이다.
설명절을 코앞에 두고 큰돈을 들여 마련했다는 밀선에 올랐다. 그동안 지하실에 붙박혀있던 일본군장교출신들은 배가 뭍을 떠나자 《갓떼 구르도조》(일본군가)를 불렀다.
성민은 아연해졌다.
(어떻게 되여 형님이 이런자들과 가까울가.)
배가 인천에 도착했을 때는 3월말이였다. 지난 기간 잠상으로 이곳 배길에 도통했다는 선장이였건만 풍랑이 사나운데다가 곳곳에 널린 군함때문에 여기저기 에돌고 도중도중 섬에 올라 물도 얻고 식량을 얻으며 오느라니 이처럼 늦어지게 되였던것이다.
고향에 있을 때 아버지가 가지고있던 배들을 타고 여러번 바다에 나가봤던 성민이였지만 그도 이 배길에서는 내내 멀미를 하며 몇숟가락씩 들군 하던 낟알까지 죄다 토하군 하였다. 심청이 빠져죽었다는 림당수어림에서는 아예 선실바닥에 쓰러져 형도 부모님과도 다 하직이라고까지 생각하였다.
인천항에 들어설 때 처음으로 미군을 보았다. 자그마한 순찰정을 몰고온 그들은 배의 곳곳을 뒤져보고 승선자들의 명단까지 작성한 후 역한 냄새가 나는 소독약으로 배안과 성민이네의 옷까지 화락하게 적신다음 허가가 있을 때까지 항구밖에서 기다리라고 하였다. 다음날 그 순찰정이 다시 나타났다. 거기에는 미군군복과 비슷한 옷차림을 한 조선사람들도 있었다.
《성민아, 성민아.》
그중의 한사람이 입나팔을 하고 소리쳐 부르는 소리에 그가 형님인것을 알아보았다.
태민은 그럴 필요도 없겠건만 순찰정과 성민이네 배가 나란히 맞붙을 때 성민이네 배의 배전을 짚고 훌쩍 뛰여올랐다.
《성민아!》
또 한번 거센 소리를 지르고는 성민을 와락 그러안았다.
부두에서 간단한 조사를 다시 받은 다음 성민은 태민이 타고온 스리쿼타에 올랐고 택규와 일만군장교출신들은 미군이 몰고온 대형군용차에 올랐다. 그 차의 적재함 량쪽의 붙임걸상에는 총을 세워든 미군 네명이 죄인을 몰고가는 호송병의 엄엄한 자세를 취하고있었다.
《저 택규형이랑 이제 어떻게 됩니까?》
《간단한 심사를 하지. 그다음 적당한 밥자리를 얻을거다.》
《신분이 탄로되면 전패국 장교로서의 처분을 받겠군요.》
《아니, 저건 그저 형식이지. 나도 심사를 받았다.》
《한데 형님은 지금도 군댑니까?》
《아니, 응. 지금은 군사영어학교 학생인셈이다만 이제 곧 장교로 될거다.》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한시간 못미처 서울시가로 들어선 차는 2층목조가옥앞에서 멈춰섰다.
《이게 내가 사는 집이다.》
《야, 굉장하군요.》
《인사차비를 잘하거라. 이젠 옥영이가 너의 형수로 된셈이고 목단강녀걸은 내 장모님으로 되였다.》
《네?!―》
《흠, 그렇게 되였다. 이 집은 옥영이네 집인데 얼마전에 그와 약혼을 했다.》
운전사가 두번 경적을 울리자 현관문이 활짝 열리였다.
처음에는 몰라보았다. 노란반회장조선저고리에 옥색치마를 받쳐입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녀인이 두손을 찰싹 맞부딪치며 《아휴―》하고 소리를 칠 때야 옥영임을 알았다. 성민은 어떻게 인사말을 해야 할지 몰라 벙긋이 웃었다.
옥영이가 한수 높았다.
《온다온다 해서 눈이 까매 기다렸는데 이제야 오셨군요.》
깍듯한 례입에 더 기가 죽어들었다. 현관 전실의 푹신한 주단을 밟고서야 인척간의 례법을 상기했다.
《형수님, 시동생의 절을 받으시우.》
성민이 넙죽 엎드려 절을 하자 옥영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 창피해. 어서 일어나요.》
성민은 행주치마바람으로 뛰여나오는 옥영이 어머니에게도 무릎절을 했다.
《장모님, 그동안 귀체 무강하셨습니까?》
《허허, 장모야 나한테 장모지 너한테도 장모야.》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옥영의 어머니가 성민이의 무안을 덜어주었다.
《형님의 장모면 어떻고 동생의 장모면 어떻소. 아직 성례도 치르기 전인데.》
집안은 지지고 볶는 냄새로 꽉 찼다. 부엌에 들어갔다 나온 태민이 옥영의 옷차림을 훑어보며 한마디 했다.
《옥영이, 이제 손님들이 오면 그 옷 말고 다른걸 입소.》
《야회복에 분화장도 하리까?》
《건 좋을대로.》
태민은 비주룩이 웃으며 성민에게 돌아섰다.
《너의 저 말괄량이는 지금 숙명녀대에 적을 붙이고있다. 게서는 조선옷이 위주다.》
조선옷이 좋다는지 나쁘다는지 모를 소리였다.
《미국사람들도 오는가요?》
옥영의 물음에 태민의 숱진 눈섭이 꿈틀했다.
《것들은 뭣때메―》
부엌에서 2~3명의 녀인들이 얼굴을 기웃이 내밀고는 사위를 빼물어 닮았다거니 그보다 잘났다거니 하며 수선을 부렸다. 옥영이와 그의 어머니의 손에 붙잡혀 여기까지 오는 도중의 일을 대충 말하는 사이 옷을 갈아입고 나온 태민이 자기 방으로 가자고 했다.
방은 서양식으로 꾸려져있었다.
상두대에 놓인 풀색전화기가 이채로왔다.
《앉아라. 그래 무슨 목적으로 예까지 왔니?》
태민이 걸상을 권해보였으나 성민은 어릴적부터의 습관대로 장판바닥에 꿇어앉았다. 장판은 두툼한 해면마분지로 된 북신한 장판이였다.
《이 집을 사는데 굉장한 돈이 들었겠습니다.》
좀더 케를 봐가며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태민은 유심히 그를 보다가 별다른 기색없이 대답했다.
《이 집은 옥영이 어머니가 공짜루 얻은거다.》
《공짜루요?》
《그렇다. 옥영이네 부친의 선생이였다는 미국선교사의 아들이 지금 미군정청 민사처에 와있는데 그가 얻어주었다.》
《대단한 인심인데요. 그 미국선교사도 왔습니까?》
《아니, 그 아들이라는 사람만이 왔다. 옥영이 아버지는 그의 주선으로 지금 미군정청에서 통역 겸 무슨 사무일을 본다고 한다. 잠도 대체로 거기서 자고― 건 그만 하고 이젠 본론으로 들어가자.》
태민은 꺼칠하게 마른 성민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안됐구나.》하며 빙그레 웃었다.
《네가 집을 떠난건 11월초라지?》
《그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다 아는수가 있다. 널 보낸건 아버지겠지?》
《네, 저도 그렇고.》
《하여튼 용타. 한데 아버지가 화를 당했다는것이 사실이냐?》
《그건 거짓부릴 했습니다.》
《집에서 나때문에 무척 속을 태우겠구나.》
《네.》
성민은 부모님들을 만나기까지의 전후사를 간단히 밝히고 여기까지 오면서 가장 적중하다고 생각한 대답을 덧붙였다.
《아버진 지금과 같이 시국이 복잡한 때일수록 집안이 한군데 모여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옳다. 한데 내가 가도 일없을가.》
태민은 두눈이 가느스름해져 중을 떠보듯 웃었다. 성민은 속이 울뚝했다.
《일없지 않구요. 아직 나라두 서지 않은 때에 여기서 군대노릇하다가 무슨 코에 걸려들지 어찌 안답니까.》
《허허, 그 말두 일린 있다. 한데 여기선 지금 군대가 피신처루 된다. 친일파 타도요, 공산당 타도요 하고 서루 죽일 놈만 찾는데 군대한텐 어쩌구저쩌구 없다. 그러니 정치를 한다는 어중이떠중이들의 놀음이 잦아들 때까진 군대가 적당한 피신처로 된다 그 말이다.
하긴 이 도깨비정치놀음이 언제 끝날진 모르겠지만.》
《그러니 더욱 그렇지요. 이제 집엘 가면 만사가 잘될겁니다.》
《아니 북쪽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것이 없다. 거기선 공산당이 득세한다지만 조용하진 않다. 더구나 여기선 나도 이쯤한 정도로 무사하다만 거기선 나같이 일본군에 관계된 사람은 마구 족치는 판이니 어림있니?》
《아, 거야… 아버진 목단강에 있는 외삼촌 동무로부터 반일애국자 보증서까지 받았는데요.》
《나도 그런 정도는 알고있다. 아버진 지금 군자치위원회에서 서무과 일을 본다고 하더라.》
《군자치위원회에서… 그걸 어떻게 압니까?》
《허, 이 나라 크지 않은 땅에서 그만한것도 모르겠느냐. 지금 쓰고사는 집이 어느 모퉁인지도 알고있다.》
《그래―요?!》
태민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집안소식을 묻지 않은것이 이제야 리해가 되였다.
《한데 다시 말한다만 그곳 정세도 여의치 않다. 복잡하긴 여기와 다를바 없고 어쩌면 더 소란해질거다.》
《더 소란해진다는건 어떻게 된다는겁니까?》
《넌 우리가 경성에서 살 때 린근 지주들 다가 우리 집을 눈에 가시처럼 여겼던걸 알겠지. 그래, 령세어민들과 소작농들을 좀 봐준것으로 우릴 죽자꾸나 미워하던 사람들이 공산당을 그대로 둬둘상싶니?》
《그런 사람들이야 거의다 여기루 오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한데 공산당때문에 쫓겨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38따라지〉라고 업수임 받으면서 그냥 있을상 싶으냐. 벌써 그러루한 사람들이 토지개혁을 하여 저들의 땅을 농민들에게 나눠준 북의 공산당을 때려없앨 원쑤루 윽벼르고있다.》
《그럼 가지 않겠다는겁니까?》
《허, 수륙 몇만리길을 톺아온 너한테 어찌 못 가겠다는 소리야 하겠니. 그건 좀더 생각해보기루 하고 우선 목욕부터 하고 옷이랑 갈아 입어야겠다.
여하간 너한텐 정말 미안하구나.》
태민은 성민의 얼굴을 측은히 보다가 일어섰다. 목욕실까지 성민을 데리고 간 태민은 자기것이 분명한 흰눈같이 깨끗한 모달리내의와 밤색제낀양복을 놓고 나갔다. 성민이 목욕을 끝내고 나오자 태민은 무척 대견해하는 얼굴이였다.
《네가 이젠 완전한 미장부로 되였구나.》
《처녀들이 줄을 지어 따른답니다.》
《거참, 멋지구나. 한데 려아네 뒤소식은 더 모르니?》
《못 알아봤습니다. 어머니의 친정이 있는 삼봉으로 갔다는것밖에는―》
《그애 아버지쪽은 다 여기 서울에서 산다고 했지?》
《네, 그렇긴 하지만 려아의 어머니와 갈라진 뒤부터는 남남사이로 되였답니다.》
《그래도 려아넨 일루 오는게 나았을게다.》
《건 무엇때문에요?》
《지금 북에 있던 예수쟁이들이 거의나 다 이리루 쓸어오고있다. 너도 사회주의자들이 종교를 부정한다는건 알겠지. 지금 북에서는 친일파와 지주, 자본가 다음에는 예수쟁이들을 타도대상으로 한다더라. 그러니 려아네가 그 동란에서 벗어날수 있겠니.》
《그건 모를 소립니다. 그전날 외삼촌한테서 들을라니 김일성장군님은 종교인들까지 반일혁명에 뭉쳐 세운다고 했습니다.》
《정치란 그렇게 단순한것이 아니다. 글쎄 그렇게 되면 오죽 좋으랴만―》
옥영이가 나타남으로써 이야기는 여기서 끊어졌다. 손님들이 온것같다고 했다.
《너무 눈부신걸.…》
옥영을 보는 태민의 눈에는 만족과 긍지감이 넘쳐있었다.
몸에 착 달라붙게 지어입은 까만 비로도달린옷은 옥영의 호리호리한 몸매를 더 돋보이게 했고 삼각으로 파진 가슴팍에서 하느적거리는 청보석목걸이는 그의 희디흰 살결을 눈부시게 했다.
《오늘의 손님접대는 임자가 기본이니 먼저 나가보라구.》
《형님은 저런 차림으로 내세우는것이 좋습니까?》
검박과 검소를 우선시하던 형님이 그동안 크게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건 그동안 칼과 총밖에 모르던 사람들께 새시대가 왔음을 알리자는거다.》
손님들이란 피난민구제소에서 보았던 사람들과 택규와 함께 끌려갔던 그전날 일본군장교출신들이였다. 심사를 받는다던 그들도 어느 사이에 멀끔하게 리발도 했고 비록 새것은 아니지만 어지간히 값비싼 신사복들을 입고있었다.
응접실 겸 소연회실로 쓴다고 하는 너렁청한 방에는 앉은뱅이밥상들을 1렬로 모아 붙여놓았는데 거기에는 성민으로도 놀랄 정도의 진수성찬이 가득 차려있었다.
태민이 미리 준비해둔듯 짧으면서도 의미심장한 인사말을 했다.
《저는 여러분들과 새시대의 역군이 될 초지를 더욱 굳게 하기를 바래 이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일제하의 비애와 울분, 고뇌와 눈물과의 결별을 축하해서 또 여러 선배님들과 제관들의 밝은 앞날을 기원하여 건배를 제의합니다.》
술잔들이 오고갔다. 취하는 속도가 빨랐다. 술도 술이지만 옥영의 발랄한 웃음과 미색이 위력한 주정으로 되는것 같았다. 혀들이 꼬부라지자 걸죽한 롱담들속에 별의별 말이 다 쏟아져나왔다.
몇사람의 입에서 일본노래까지 터져나오자 태민이 엄하게 막았다.
《여긴 료리점이 아닙니다.》
태민의 이 한마디 말에 모두가 기신거리는 몰골이 되였다.
성민은 더 앉아있을수가 없었다. 몸이 오슬오슬해지며 열이 났다.
이날 밤부터 성민은 한달가까이 열병으로 신고했다. 이통에 집소리는 두번다시 꺼낼수 없었다. 태민이도 일체 그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
5월에 접어들어 얼마간 걸음을 하게 되였을 때 다시 그 뜻을 비추자 태민은 조금더 기다려보자고 하였다.
그런 어느날 태민은 또 한번 연회를 차렸다. 이때에도 그전에 왔던 택규의 패들이 거의 다 밀려왔다. 거기에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몇명의 사복쟁이들이 왔는데 그중에 한사람이 무척 인상적이였다.
표표한 얼굴에 눈빛이 무척 날카로왔다. 남들이 말하는 사이에도 연방 술잔을 기울이는데 까뭇하게 보이던 얼굴색이 조금 희여졌을뿐 눈빛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태민이가 그와 인사를 시킬 때 《아, 군이 성민인가.》하며 무척 반색해했었다. 술잔들이 오가는 속에서 박정희라고 불리우는 이 사람과 그와 함께 새로 나타난 중국관내의 일본군복무자들의 귀환을 축하하는 연회임을 알게 되였다.
《성민군, 이리 오라구.》
다들 거나하게 취했을 때 그가 성민을 찾았다. 새침할 정도로 웃음이 없던 그의 눈에 은근하면서도 따뜻한 미소가 피여올랐다.
《왜 술을 마시지 않지?》
《전 마실줄 모릅니다.》
《허, 태민군을 닮았으면 모든데서 형님과 같아야지.》
《그 앤 일찌기 우리 아버님앞에서 술을 안 마시기로 맹세했답니다.》
태민이 례입을 써 말하자 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런가, 장하구만.》
그는 또 한잔의 술을 물붓듯 입에 털어넣고는 성민의 어깨를 툭 쳤다.
《이봐, 그 맹세를 꼭 지키라구. 우린 얼룩점이 많은지라 술로 그걸 씻지. 그래서 이렇게 마시는거구. 임잔 티없는 청년이니 그 맹세를 꼭 지키라구. 맹세! 사내의 맹세란 귀중한거야.》
그도 전혀 취하지 않는 사람은 아닌것 같았다. 택규가 앉은쪽에서 군대가 어떻소, 정국이 어떻소 하는 말을 듣자 술상을 쾅 내리쳤다.
《여, 생도!》
성민이와 말할 때 하고 판 다른 쩡쩡한 웨침에 군대가 정국을 바로잡아야 한다던 택규는 물론 다른 사람들도 움찔린 자세로 긴장되였다.
박정희는 비양거리는 눈길로 택규를 견줘보며 말했다.
《이봐, 자네 하는 말 랑설이야. 정치도 뭣도 다 군대가?!… 이거야말로 어불성설이지. 그래 일본이 왜 망했는가. 니뽄도밖에 모르는 사무라이들이 내각이요, 뭐요 다 틀어쥐고 날쳤으니 개죽을 쑨게 아닌가.》
《중위님, 지금 적색세력이 들고 나서는판에 우리같은 군인들이 나서지 않으면 이 땅이 어찌 됩니까?》
《적색이면 어떻고 백색이면 어떤가. 군대는 민중의 편을 따르면 그만이야. 민중이 좋다는 정부, 민중이 세우는 국가의 파수군으로 되는것, 여기에 군대의 사명이 있고 생명이 있는거야.》
《박군, 취하지 않았나. 지나친 탈선일세.》
누군가의 말에 박정희는 코웃음을 쳤다.
《탈선?! 지당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난 오늘에 와서 볼 때 과거와의 결별이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미국군대를 보십시오. 그네들은 창군 첫날부터 오늘까지 정치와는 무관계한 표대를 세우고 오직 민중과 국가에 헌신하는걸 자기들의 본분으로 삼음으로써 세계의 최강군으로 선위를 떨치는것입니다.》
다들 어리둥절해하는 기색이였다. 분위기도 서먹해졌다. 몇몇 사람들이 채 모르겠다는 식으로 고개를 젓는것을 보자 한결 겸양스런 태도로 말을 이었다.
《내 말하자는건 지금의 복잡한 시국에 실수가 있을가 념려되여 하는 소립니다. 지금은 우리로서 관망하는 시기라고 봐야 합니다. 여기선 조상들의 중용지도를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중용지도는 태민군의 지론이기도 하지요.》
박정희는 벌씬 웃으며 태민을 돌아보고는 한손을 높이 쳐들었다.
《긴급제의가 있습니다. 태민군과 옥영씨의 노래를!… 반대 없습니까?》
요란한 박수가 터졌다.
성민은 박정희라는 사람이 분위기조절에도 능숙한것에 감탄했다.
정치론담으로부터 오락회로 넘어간 환영연은 밤이 깊어서야 끝났다. 다들 만족한 기분으로 떠나갈 때도 박정희는 성민이에게 남다른 친절을 보였다.
《이제부턴 여기 저 사람들보다 군과 같은 새 사람들이 떨쳐날 시대일세. 그래 인차 돌아갈텐가.》
《네.》
박정희는 실눈이 되여 웃으며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고 했다.
《박정희라는 사람이 여간치 않은 인물같던데요.》 손님들을 바래주고 방에 들어설 때 성민은 그에 대해서부터 물었다. 태민은 의당한 말이라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치 않은 사람이다. 한데 넌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다 받아들였니?》
《그가 한 말을 따져보면 좀 분명치 않은데도 있고 모순된 점도 있어요.》
《어떤 면에서?》
《군대가 정치와 무관계해야 한다는건 공뜬 소리가 아닙니까. 물론 유미렬강들에서는 군대와 정치의 무관계를 표방한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스츄어가 아니겠습니까.》
《건 옳은 말이다. 하지만 현재의 시점에서 우리한텐 정치와 군대의 무관계가 절박한 문제다.》
《그럼 형님은 어떤 정치를 하던 관계없이 그에 복무한다는것입니까?》
랭수 한사발을 다 들이키고난 태민은 꼿꼿이 굳어진 성민의 눈길을 보자 눈섭을 찌프렸다.
《네가 이런 문세엔 백지로구나. 내가 말하는 정치와의 무관계는 지금의 혼란속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철리라고 할수 있다. 만약 군대라고 하는, 그것도 각양각색의 림정의 광복군이요, 우리같은 친일총대잡이요 하는 팀들이 제마끔의 정강을 떠드는 정객들과 발맞춰 이편저편 이길내기에 끼워들면 이 땅이 어떻게 될테니, 서로 죽일내기를 하는 내란이. 그 내란속에 피주검만 가득 쌓일것 아니냐. 그래서 무관계설을 내세우는거다. 아까 박정희도 관망이구 중용지도구 한것도 다 나와 의합이 되여 한 소린데 지금은 그런 정치싸움속의 류혈이 없게 하는것이 급선무다. 하지만 그도 나도 어떤 정치를 폈으면 하는 꿈은 버리지 않고있다.》
《그럼 박정희라는 사람은 어느 편입니까?》
《거야 그 사람 말대로 민중이 가자는 편이지.》
《그럼 그는 민중이 사회주의를 따른다면 거기에 발맞춘다는것입니까?》
《그렇다.》
태민은 생각깊은 눈길로 성민을 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지금 여기 남쪽에도 적색이라고 하는 공산당세력이 제일 드세다. 때문에 나도 그렇지만 박정희이라는 사람 역시 거기 동조하는 립장이다.》
《그러니 그도 원래부터 사회주의를 따랐는가요?》
《아니, 그런것 같지도 않다. 그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륙사시절 나의 1년선배였는데 야마도 1주의와 반공에서는 한다하는 일본인들도 혀를 두를 지경이였다.
그의 손에는 숱한 팔로군과 중국공산당원들의 피가 발려있고…》
《그렇다면… 종잡을수 없는 사람이군요.》
《문제는 과거가 아니고 현재와 미래다. 사실 그는 특등일본인이라고 칭찬을 받을 지경으로 일본에 충실한 군인이였다.》
《그런데 형님과는 무척 가까운 사이같던데요.》
《가깝다. 그는 원래 남에게 속을 주기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왜서인지 나한테는 형제지간의 믿음을 가지고 대했구나 역시 그 사람이 범상치 않다는데서 그와 가까이했다.》
《택규라는 사람도 형님과 무척 가까운 사이라 하더군요.》
《그것두 사실이다.》
《제 보기엔 신통치 않아 보이던데요.》
《얼핏 보면 그렇지, 가볍고 사설이 많고… 사방팔방 잘 삐치고… 하지만 그 사람 배속엔 구렝이가 틀고있다. 서울에서 순사질을 하다가 봉천군관학교엘 왔는데 학년적인 성적에서 괜찮은 축이였다.》
《형님은 경망한 사람이라면 아예 질색하지 않았습니까?》
《경망한것이 하나의 위장물로 될 때면 다르다. 그와 박정희는 전혀 다른 류형인데 박정희로 말하면 말이 없는 속에 조용히 대세를 살피다가 결정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고 택규는 군사설과 얼벙치기로 사람들의 경계감을 무장해제시키며 슬금슬금 제 안속을 채우는 사람이라고 할수 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자.》
태민은 파랗게 서려오르는 담배연기를 날려버리며 성민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넌 여전히 내가 꼭 가야 한다는거겠지.》
《거야 더 말할것이 있습니까.》
성민은 펄쩍 뛰여오를만치 기뻤다. 태민은 싱그레 웃었다.
《그럼 가자. 사실 난 네가 여기 온다는 소식이 오기 전부터 가려고 마음먹었다.
우선 부모님들과 친척들 있는데서 성례도 치러야 하는것이구… 다음으로는 그쪽 정치를 알아보구 거기 영 눌러살자는 결심을 한거다.
오늘 그간 동료들을 우리 집에 청한것도 여길 떠나기 위한 송별식을 겸한것이다. 거기 가서 보고… 여기 사람들도 오게 하자는 생각도 했구―》
《형님!》
성민은 훌쩍 일어나며 태민의 어깨를 와락 그러안았다.
《됐다, 이젠 그만 자자.》
태민은 옥영이 펴놓은 이부자리우에 두개의 베개를 맞붙여놓았다.
그리고는 싱글벙글 웃고있는 성민에게 한눈을 찡긋해보였다.
《우리 옛날처럼 자보자.》
짜개바지시절부터 성민은 이 태민형과 늘 함께 자군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