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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송은 사무실책상 건너편 의자에 지꿎게 눌러앉아 자기를 쳐다보는 라성환부위원장의 시선을 외면해버렸다.

애국투사후원회의 같은 부위원장이긴 하지만 상무부위원장격인 선생이 무슨 대책을 내놓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끈질긴 물음이 그 시선에 비껴있었던것이다. 월송은 그의 눈길을 의식하지 못한듯 아니, 그의 존재자체를 아예 잊은듯 지그시 두눈을 감아버렸다.

안경을 낀 갱핏한 그의 얼굴에는 복잡다단하고도 기나긴 인생행로를 말해주듯 뒤엉킨 실오리같은 주름발들이 얼기설기 새겨져있었다.

그 수많은 주름발들의 흰 뿌리인듯싶은, 아니면 얼굴에는 더 새길 자리가 없어 주름발들이 턱밑으로 오리오리 뻗어내린듯싶은 흰 수염채가 그의 무거운 고뇌처럼 드리워져있었다.

아닌게아니라 지금 월송은 새삼스럽게 자신의 늙음을 자탄하고있었다. 사람의 나이 일흔이면 고목임이 틀림없으련만 엊그제까지만도 그는 전혀 자기의 늙음을 잊고 살았던것이다.

김일성장군님께서 지난해 중국 할빈땅에까지 몸소 사람을 보내시여 그를 평양으로 불러주시고 애국투사후원회 부위원장의 중임까지 맡겨주신 그날부터 월송은 말그대로 갱소년되여 살아왔었다. 그런데 모쁘르요 뭐요 하는 허가이와 라부위원장의 장단에 춤을 추면서 애국미문제를 놓고 장군님의 뜻과는 달리 처신하였으니 이 아니 망녕이라 하겠는가.

(이젠 늙었어.…)

월송은 점점 더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그의 본명은 김형식이였다. 19세기 말엽 경상북도 안동의 봉건량반가문에서 태여나 자란 그는 출세와 부귀영달의 길을 찾은것이 아니라 일찍부터 의병투쟁의 길에 나섰다. 일제가 조선땅에 기여들어 제집뜨락처럼 싸다니며 조선사람들을 멸시하고 민족적풍속까지 더럽히는것을 보고만 있을수 없었던것이다. 민생과 민족의 운명을 바로 잡는 이 길에서 일생을 달처럼 밝고 정갈하게, 소나무처럼 푸르싱싱하게 살리라 마음먹고 자기의 호를 월송이라고 달았다.

청춘시절 홍범도의병대에 들어가 화승총을 잡고 왜적들과의 싸움에서 적지 않은 피도 흘렸으나 옳바른 투쟁방략과 변변한 무장을 갖추지 못했던 의병투쟁은 끝내 마가을의 락엽처럼 운명을 고하고 그는 정든 고국산천을 눈물속에 하직하고말았다. 제 나라, 제땅을 두고 왜놈들에게 쫓겨가야만 하는 그 억울하고 절통한 심정이 그의 눈물속에 응축되여 흘러내렸다.

 

우습고도 비통하다 무국지인 된단 말인가

칼도 창도 못 써보고 이 지경 된단 말인가

나라 빼앗긴 백성은 살아도 죽은 몸이라

그렇다고 어찌 그저 죽으랴!

 

가슴속에 끓어넘치는 울분을 이 《분통가》에 담아 읊으며 그는 나라의 지경밖을 나설 때까지 10여일간이나 물을 마시지 않고 가랑잎에 맺힌 이슬로 갈증을 이겨냈다. 누군가가 그 사연을 물었을 때 그는 《내가 겪는 갈증도 다 왜놈들때문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갈증을 참고견디면 왜놈과 싸워서 이기는거라고 생각한다네. 그렇게 해서라도 쾌재를 부르고싶네.》라고 말해주었다. 월송은 그때부터 이국땅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한 운동에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쳐나갔다. 조선사람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는 사업에 참여했고 군사강습소를 설립하고 독립군지휘관양성에도 앞장섰으며 상해림시정부사업에도 관여하였다. 그러나 파벌싸움과 권력다툼으로 쇠퇴해가는 독립운동의 앞날을 개탄하며 종당에는 림정과 결별하고말았다.

그가 만일 이 시기에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신 김형직선생님을 만나뵙지 못하였더라면 희망을 잃고 목숨을 버리고말았을것이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독립운동의 선배로 따뜻이 불러주시며 그의 높은 애국열의와 깨끗하고 대바른 성격을 존중해주시였다.

월송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이께 몸과 마음이 끌리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자기 힘을 믿고 자력으로 나라의 독립을 이룩해야 한다는 심원한 진리와 대를 이어가며 싸워서라도 기어이 나라의 독립을 이룩해야 한다는 지원의 사상, 저마끔 뿔뿔이 흩어져 산발적으로 활동하던 독립군부대들을 하나로 묶어세워나가시는 뛰여난 지도력, 자기의 보잘것없는 경력도 크게 여겨주시며 한품에 안아주시는 넓으신 포옹력, 고결한 인품과 따뜻한 인정미…

그날부터 월송은 지원의 사상을 받들고 독립운동의 새 출발을 시작하였다. 그는 정의부의 요직에 있으면서 때없이 김형직선생님을 찾아가 귀중한 가르치심을 받군 하였으며 자그마한 전투성과도 남먼저 달려가 알려드리군 하였다.

강반석녀사께서도 그가 찾아올적마다 독립운동을 위해 가정도 이루지 않고 뛰여다니는 그의 수고를 조금이라도 덜어주시려고 옷가지도 빨아주고 끼니도 끓여주시였으며 넉넉치 못한 살림속에서도 지성을 다하여 도중식사와 로자까지 마련해주군 하시였다. 그럴 때마다 월송은 김형직선생님과 강반석녀사의 은정에 감동을 금치 못하며 나라가 독립된 다음 꼭 은혜를 갚아드리겠노라고 진정으로 말하군 하였다. 그러던 그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김형직선생님께서 서거하시였다는 비보였다. 그의 눈앞은 캄캄해졌다.

(이제 누가 조선의 독립운동을 이끌어줄수 있단 말인가. 아, 하늘도 무심하구나!)

그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일제의 극악한 《토벌》공세앞에서 독립운동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졌고 독립운동자들은 세력다툼이나 하면서 군자금을 거두어들이는데만 몰두하였다. 한생을 통해 파쟁을 질시해 온 그로서는 어디에도 갈데가 없었다. 물론 월송은 김일성장군님께서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시고 새 세대 청년공산주의자들을 핵심으로 손에 무장을 잡고 일제와의 전면적인 대전을 선포하시였다는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주의주장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그 투쟁에 용약 뛰여들지는 못하였다.

그는 만주사변을 전후하여 일제의 《토벌》공세에 독립군부대들이 사방으로 흩어져갈 때 이루지 못한 뜻을 가슴에 품은채 반일독립의 총을 놓고 은신했다. 혼자만이라도 파쟁에 말려들지 않고 깨끗이 살고싶었던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은거생활은 조국이 해방된 이듬해까지 계속되였다.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자기 운명의 구세주로, 삶의 은인으로 우러르던 김형직선생님의 자제분께서 그를 해방된 조국땅으로 불러주시였다. 이제는 성 쌓다 남은 돌처럼 그 누구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늙은이의 민족적량심과 애국적지조를 귀중히 여겨주시는 김일성장군님의 고매한 덕망앞에서 월송은 흘러가버린 그 시절의 김형직선생님의 체취를 다시금 느끼였다.

그는 황황히 길을 떠났다. 민족주의자로서의 체면도 가리지 않았다.

그저 김형직선생님의 자제분이 계시는 평양, 김일성장군님께서 정사를 펴시는 평양만을 생각했다.

해방조국의 격동적인 현실은 그의 가슴에 재생의 환희와 열망을 안겨주었다. 더우기 북조선애국투사후원회 부위원장의 중임을 맡은 후로는 밤잠도 잊어가며 한사람의 유가족이라도 더 찾아내기 위해 뛰여다녔다. 그러면서도 자기에게 어떻게 그런 기력이, 넘쳐나는 왕성한 기력이 있었는가 하고 스스로 놀라군 하였다.

하긴 장군님께서 늙은 몸에 일을 하자면 힘에 부칠것이라고 나라에 몇대밖에 안되는 승용차까지 전용으로 배려해주시였으니 어찌 그것을 자신의 기력으로 렴치없이 생각할수 있으랴.

어쨌든 자신의 미약한 힘이나마 아낌없이 바치는것이 못 잊을 그 시절 김형직선생님과 강반석녀사께 나라가 독립된 다음 꼭 은혜를 갚겠노라고 다졌던 그 맹세를 조금이나마 지키는 길이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그런데 이번 일만은…

자기딴에는 희생된 렬사들을 그리도 잊지 못해하시는 장군님의 그 마음을 풀어드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던노릇이 그만 늙은이의 주책머리없는 짧은 생각이였을줄이야! 생각해볼수록 분명 잘못된 생각이였다.

하루이틀, 한두끼 잘 먹여준다고 유가족들의 운명이 조금도 달라질수 없다는거야 삼척동자도 내다볼 자명한 리치가 아니였던가.

장군님께서는 혁명렬사들의 유지를 이어 그의 자녀들모두를 나라에서 맡아키울 큰 학원을 세울 결심을 하셨는데 자기는 그것도 모르고 기둥뽑아 이쑤시개로나 쓸 그런 허망한 생각을 하였으니…

(정말 늙었어! 장군님의 큰뜻을 받들기에는 너무 늙었어. 하긴 지원의 뜻을 지니셨던 김형직선생, 그분의 자제분이 아니고서야 그 어느 누가 그런 용단을 내리실수 있으랴! 그런데도 그분께서는 이 늙은것의 소견을 나무람할대신 오히려 유가족들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고맙다고 치하해주시였지.…)

월송은 흰 수염채를 한손으로 꽈악 그러잡았다.

늘 기분좋게 쓰다듬군 하던 그 허연것이 오늘처럼 이렇게 민망스러워보이기는 처음이였다.

《월송선생님이 애국미문제를 다시 말씀드리기 정 난처하면 나라도 찾아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월송의 오랜 침묵을 자기나름대로 짐작한 라부위원장이 더 참지 못하고 내쏘듯 던지는 말이였다.

《어찌겠습니까. 우리의 계획이 소문이 나서 지방의 애투(애국투사후원회의 략칭)들에서도 대단한 기대를 걸고있는데 인제와서 맨손바닥을 펴보일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리구 쏘련의 모쁘르사람들에겐 또 뭐라고 하겠습니까?!》

라부위원장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 행동이 꼭 허가이의 모양을 보는것 같아 월송은 쓰거운 입맛을 다셨다.

라성환은 한때 함남도당의 오기섭이밑에서 도애국투사후원회사업을 맡아보았다고 한다. 그후 그의 추천으로 평양에 올라왔는데 이즈음에 와서는 허가이쪽에 더 극성이라고 한다. 그렇다더라 하고봐서 그런지 라부위원장의 말투며 행동거지도 다 그를 방불히 닮아가는것 같았다.

월송은 언짢은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라부위원장은 공연한 안달을 하시우. 아무래도 우리가 해야 할 사업이니 응당 하면 될게 아니겠소.》

《아니, 뭘 가지구 어떻게 한다는겁니까?》

《걱정마시오. 장군님께서는 우리 애투에 많은 생산기업장들을 배속시키도록 대책을 취해주시였소. 거기서 얻어지는 수입을 가지고 후원사업을 할수 있도록 말이요.》

《생산… 기업장들을요?》

《그렇소. 정말이지 난 그저 죄송스러운 생각뿐이요. 우리가 그분의 뜻과는 너무도 다른 생각을 했거던.》

《글쎄, 그렇긴 합니다만… 사실 아직 너무 이르지 않을가요?》

월송은 조심스럽게 내비치는 그의 의뭉스러운 말에 눈길을 들었다.

《글쎄 우리한테 장악된 혁명가유자녀들이 한 300명정도밖에 안되는데 그때문에 큰 학원을 세운다니 말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월송은 실눈을 짓고있는 라부위원장의 뾰족스러운 얼굴을 놀랍게 바라보았다.

《아직 찾지 못한 유자녀들이 얼마나 많게 그런 소리요. 저 동북땅에만 해도…》

《남의 땅에 흩어진 아이들까지야 어떻게 다 찾아오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일이지요. 그거야 대포쏘아 참새잡는 격이 아닙니까. 올해 사회주의10월혁명승리 서른돐이 되는 저 쏘련에서도 겨우 3~4년전에야 학원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야 해방된지 이제 1년 5개월밖에 더 됩니까.》

《그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고 해서 우리도 그래야 한다는 법이야 없지 않소.》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혁명이라는건 일정한 시일이 흘러가야 유자녀문제가 국가적인 난문제로 제기되는 법이지요. 혁명투쟁은 역시 희생을 동반하기마련이니까요.》

라부위원장이 담배를 피워물었다. 풀풀 내불리는 담배연기가 가뜩이나 불쾌해진 월송의 심기를 더욱 자극했다.

《그러나 우린 아직 국가도 세우지 못한 형편이 아닙니까. 이런 형편에서 학원창립은 앞으로의 국가창건에서 복잡한 문제들을 산생시킬수 있는 예민한 정치적요소로 될수 있습니다. 지금 허가이동지도 바로 이 문제를 제일 우려하고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신경을 쓰든 김일성장군님께서 유자녀학원부터 세우실 결심을 하셨을 때에야 그것이 제일 절박하고 중대한 건국사업이기때문이 아니겠소. 난 민족이 낳은 애국자들을 귀중히 여기고 인간의 의리를 제일로 내세우는 그런 나라를 세우실 의지가 장군님의 그 결심에 담겨있다고 생각하오.

내 그 뜻에 감복했고 그 뜻을 늦게나마 깨달았기에 더더욱 자신의 미련함이 한스러울뿐이요.》

월송의 마디마디 격한 어조에 라부위원장의 얼굴이 표표해졌다.

아니, 그렇게 느껴졌다.

《난 월송선생님이 그러한 립장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고루한 민족주의자라는 좋지 못한 평판을 듣지 않겠는지 걱정됩니다.》

라부위원장이 미묘한 어조를 남기고 나갔다.

열려진 방문으로 차거운 바람이 쓸어들어왔다.

월송은 수염발을 날리며 오래도록 한자리에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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