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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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만주에서 혁명의 중심지, 전파지는 150여만의 조선사람들이 밀집되여있던 연길, 안도, 화룡, 왕청, 훈춘 5개 현을 포괄하는 동만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 조직령도하신 항일혁명투쟁의 불길속에서 남달리 혁명적으로 단련되고 정치적으로 각성되였던 이곳 인민들은 일제패망후에도 쏘련군의 철수와 더불어 시작된 장개석군대의 만주강점을 반대하여 각지에서 무장대오들을 조직하고 연변지구 방위에 떨쳐나섰다.

그 시기 조선청년들치고 거리와 마을에 남아있는 사람은 몇이 되지 않았다. 조직된 무장대오들은 한개 군으로 통합되여 길동군으로 편성되였는데 그 초기사령관은 다름아닌 강건이였다. 이렇게 조직된 길동군은 그후 전선에 나가 장춘공격전을 거쳐 동북지방을 해방하고 중국남쪽인 해남도에까지 진출함으로써 중국인민의 해방위업에 적극 기여하였다. 동북해방작전인 료심전역을 감당수행한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의 주력을 이루었던 제3, 4, 5, 12, 16사단은 바로 이러한 조선인사단들이였다.

그러나 림춘추가 김일성동지의 위임을 받고 동만으로 왔을 당시에는 아직 연변지구인 돈화계선에서 적들과의 치렬한 전투가 벌어지고있을 때였다. 연변지구는 동만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밀집되여 있었으며 비옥한 논과 밭이 많은 연길, 화룡, 왕청, 훈춘, 안도, 돈화현 등을 포괄하고있었다. 동만의 중심지인 연길에는 후퇴하여온 길림성당과 성정부가 있었고 연길현당, 현정부가 자리잡고있었다.

림춘추는 중국당과 길림성정부의 요청에 따라 길림성정부 연변독찰전원공서 전원(초기 직명은 민족사무청 청장이였으나 인차 기구개편되였다.)사업을 맡았다. 그리고 길림성당위원과 연변지구당위원회 부비서를 겸하였다. 그는 연변의 정세를 구체적으로 료해하는것으로부터 사업에 착수하였다. 당시 동만땅의 정세는 혼란된 상태에 처해있었다.

그것은 토지개혁을 둘러싸고 극좌적으로 진행된 일부 좌경분자들과 대오내 반동들의 책동으로부터 초래된것이였다.

중국당에서는 일제패망후 해방지구들에서 지체없이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혁명력량을 장성시키고 이에 기초하여 전중국에 대한 해방위업을 완성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연변지구의 토지혁명에서는 좌경분자들과 대오내에 잠입해있던 반동들의 책동으로 하여 이른바 빈고농로선을 만능으로 휘두르면서부터 이 사업에서 당의 령도가 무시되고 자연발생적인 현상이 벌어지게 되였다. 그들은《빈고농탄》(빈고농의 말은 절대적이다. 빈고농의 말은 곧 하늘의 법이다.)이라고 하면서 일제시기 사무원, 교원, 문화인 등 지식인들을 일제의 앞잡이로 거의모두를 청산대상으로 규정하고 가산을 몰수하여 내쫓았으며 농촌들에서는 조선인들이 가지고있던 토지를 극빈농을 제외하고는 모두 몰수하였다. 지어 소학교의 나어린 학생들이 자기 선생에게 고깔을 씌여가지고 끌고다니였으며 자식이나 남편들이 전선에서 싸우고있는 후방가족들까지 청산하였다. 이통에 하급중농, 농업로동자, 소작인들까지도 토지를 분배받지 못하였으며 일부 머슴군들까지도 지주의 앞잡이라고 하면서 토지분여대상에서 배제되였다.

빈고농위원회는 생사판결권까지 가지고있었는데 만일 이에 불만을 표시하거나 항거하면 체포하여 군중심판을 열고 처형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또한 일제가 오래전부터 뿌려놓은 민족리간정책의 후과를 교묘하게 리용하여 조선족학교들을 페쇄하고 저들이 차지하거나 조선족들이 운영하던 식당, 회관, 공공건물, 출판인쇄소들을 몰수하기도 하고 조선치마저고리를 입고다니는 사람들을 위협하거나 입지 못하게 하였다.

조선사람들속에서는 불안과 공포가 심해지고있었으며 애매한 사람들이 수많이 청산되여 서로 울고불고 그 소식이 전선에까지 전해져 부대들에서 대원들을 파견하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성당과 현당의 간부들은 이러한 사태가 뻔히 잘못된것이라는걸 알면서도 수습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그저 이제 얼마후이면 질서가 정책대로 바로잡힐것이라는 막연한 소리만 하고있었다.

이러한 정황에서 림춘추는 좌경분자들의 책동으로부터 조선사람들의 권리와 리익을 지키기 위한 투쟁부터 벌리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길림성 성장인 주보중과의 긴밀한 련계밑에 강제로 빼앗긴 조선족들의 토지와 재산중에서 다시 찾을 대상을 정하고 조선족들의 소유였던 공공건물과 식당, 상점들도 다시 찾아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류소기, 주덕, 주은래를 비롯한 중앙의 간부들을 만나 연변지구의 조선족자치문제를 김일성동지의 뜻대로 해결하였다.

뿐만아니라 조중인민들사이에 쐐기를 박고 리간을 조성하여 분렬시키려는 반동분자들의 책동을 짓부시기 위한 투쟁도 벌려나갔는데 정체를 숨기고 연길현정부에 잠입해있던 현장을 비롯한 원쑤들의 죄상을 폭로하고 처단해버리였다. 동만에서의 그의 활동은 항시적인 위험을 동반하고있었다. 원쑤들은 연변전원공서 전원으로서 조선사람들을 조직화하고 조선사람들의 권리와 리익을 지키기 위한 그의 정력적인 사업을 두려워하면서 복수할 기회만을 노리고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국을 떠나올 때 김일성동지께서 주신 권총을 가슴에 품고 더 적극적으로 활동을 벌려나갔다. 연변의 동포들에게 김일성동지의 령도밑에 새 조국건설에서 자랑찬 성과를 이룩하고있는 조국소식을 제때에 알려주어 그들로 하여금 민족적긍지와 자신심에 넘쳐 살도록 하는데 큰 힘을 넣었으며 조중인민의 공동의 원쑤들을 격멸하는 투쟁에서 맺어진 친선과 우의를 귀중히 여기고 전선원호사업에 적극 떨쳐나서도록 조직동원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조선인소학교, 중학교들을 내오고 연변인민대학을 창설하였으며 조선사람들이 운영하는 큰 병원을 세우고 연변조선족가무단을 조직하고 《동북조선일보》를 발간하는 등 교육, 문화, 보건 모든 부문에 걸쳐 김일성동지께서 주신 과업을 빛나게 실현하여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것은 몇해후의 일이였다. 아직은 1947년 마가을이였던것이다.…

당시 연변지구의 그 복잡다단한 모든 사업을 밀고나가는 속에서도 림춘추는 동북에 있는 항일혁명렬사유자녀들을 모두 찾아 조국으로 보낼데 대한 김일성동지의 과업과 하늘땅끝에까지 가서라도 그들을 찾아내야 한다고 하신 김정숙동지의 당부를 한시도 잊지 않고있었다.

그는 연변전원공서 전원으로서의 그 드바쁘고 복잡다단한 속에서도 혁명가유자녀들을 찾아 학원에 보내기 위한 사업을 자신이 직접 장악하고 진행하였다. 그 사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대부분의 유가족들은 왜놈들의 탄압과 감시를 피해 그때 벌써 다른 고장이나 깊은 산속으로 숨어버렸고 돌볼 사람이 전혀 없는 고아들은 정해진 곳없이 떠돌아다니면서 남의 집 심부름이나 담배장사, 껌장사, 심한 경우에는 동냥질이나 소매치기를 하였다. 여기에다 좌경분자들의 극좌적인 토지개혁바람에 적지 않은 항일투쟁연고자가족들이 청산당하였으며 살길을 찾아 어디론가 떠나가버렸다.

림춘추가 간신히 선을 잡아 왕청현 석현에서 살고있다는 오태희로인일가를 찾아갔을 때는 이미 그들도 청산바람에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행처없이 숨어버린 뒤였다. 유가족들도 또 그들의 행처를 알만한 사람들을 찾아내기도 결코 헐치 않았다. 더우기 동북땅의 많은 지역을 장개석군대가 차지하고있고 연변계선에서 적들과의 치렬한 공방전이 벌어지고있던 당시의 조건에서 이것은 더욱더 어려운 문제로 제기되였다.

그는 우선 신문에 광고문을 내기로 하였다.

《혁명가유자녀들을 찾습니다.

부모이름 ×××

나 이 ××

고 향 ×××××

전 주 소 ×××××

상기분들의 가족들이거나 혹시 행처를 아시는분들은 연변전원공서림전원을 찾아오시기 바람.》

신문을 매일 보지 못할수도 있다는것을 타산하여 광고문을 주기적으로 다시 내군 하였다. 사람들을 보내여《길림일보》에도 내고 남만과 북만의 신문들에도 냈다. 이것은 막대한 자금지출을 동반하는 사업이기도 했다. 그는 한편으로 무역회사를 내오고 혁명가유자녀들을 찾아 조국에 내보내는 사업과 학교운영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일도 벌려나갔다.

언제한번 편히 앉아있을 시간조차 얻기 힘들었다. 성당과 성정부를 비롯한 중국간부들과의 사업, 시, 현정부와 당조직들에 조선인간부진영을 꾸리는 사업, 전선원호사업과 민족교육준비사업…

일감들은 산더미처럼 쌓이고 시간은 사정없이 흘러갔다.

조국에서 10월 12일에 학원개원식을 진행하였다는 소식이 왔다.

감격과 기쁨의 순간에 뒤이어 죄스러움과 자책감이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

그날 그는 안주머니에 소중히 건사하고 다니던 수첩을 또다시 꺼내놓고 밤새 깊은 생각에 잠겨 잠들지 못하였다. 평양을 떠나올 때 김정숙동지께서 혁명가유자녀들을 찾는데 도움이 될거라면서 보여주신 가지색수첩의 내용을 그대로 베껴넣은 수첩이였다.

수첩의 글줄들을 하나하나 다시 뜯어보느라니 하늘땅끝에라도 가서 유자녀들을 찾아내겠다는 각오를 가져야 한다고 하신 김정숙동지의 그 절절한 당부가 심장에 마쳐왔다.

(너무도 실무적으로만 생각했어. 그들이 제발로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있었으니…

장군님께서 얼마나 근심하며 애타게 기다리고계시겠는가. 유자녀들을 다 찾을 때까지는 밤잠조차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실텐데…)

림춘추의 눈에는 개원식장에서 아직 오지 못한 동북의 유자녀들을 생각하시며 무거운 마음으로 서계셨을 장군님의 모습이 보이는듯싶었다.

속이 끓어번졌다. 밖에 나가 목청껏 소리라도 치고싶었다.

―얘들아! 너희들 어디에 있느냐? 당장 나타나거라, 장군님께서 기다리신다!―

연길의 심병윤의 가족, 박길의 아들, 현용태의 가족, 왕청의 오태희일가… 그들모두의 행처가 아직은 묘연하다. 그들뿐만아니라 수많은 유자녀들의 소식도 아직은 알수 없다.

림춘추는 사연깊은 수첩을 손에 꼭 쥐였다.

김정숙동지의 절절한 당부가 그 수첩에서 다시금 울려오는듯싶었다.

《하늘땅끝에 가서라도… 하늘땅끝에 가서라도…》

(내 꼭 동만땅을 다 뒤져서라도 아니, 온 만주땅을 다 뒤져서라도 유자녀들을 다 찾아내고야말겠습니다.)

그는 몇번이고 이렇게 속다짐을 하였다.

래일은 왕청현으로 나가야 하였다. 조선사람들의 피해가 제일 혹심한데가 왕청이였던것이다. 그곳 실태를 바로잡으러 나가는 기회에 오태희로인일가의 행처와 아울러서 오중화와 함께 싸우다 희생된 연희상의 유가족에 대해서도 알아보려고 생각하였다.

연희상이라는 이름은 조국에 있을 때 장군님께서 전창철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그의 영웅적인 최후에 대하여 말씀하시는것을 듣고 새겨두었던 이름이였다. 그가 희생된것은 1933년이라고 했었다.

사실 그는 그 시기의 왕청사람들을 연길이나 안도, 훈춘사람들처럼 잘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알아야 하였다. 그리하여 이번 길에 1930년대 초시기 왕청에서 희생된 혁명가들에 대해 빠짐없이 장악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는 수첩을 소중히 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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