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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한 날씨여서 그런지 아직은 느지막한 오후였지만 집무실안은 벌써 어둑어둑한감이 들었다. 그러나 김일성동지께서는 전혀 그러한감을 느끼지 못하신채 방안에 빼곡이 들어앉은 일군들의 얼굴을 열정에 넘친 눈빛으로 바라보시였다.

김책, 안길, 남일, 리주연…

모두 학원창립준비위원회 성원들이다. 그들은 지금 정기적인 협의회에 참가한것이다. 당사업, 정권기관사업, 군대사업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있는 그들이였지만 또한 학원창립준비위원회 위원들로서의 사명과 본분을 다하기 위해 애쓰고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이미 여러차례에 걸쳐 그들이 맡고있는 혁명임무와 학원창립문제가 서로 별개의것이 아니라 자기 사업의 기초적이며 궁극적인 일로 된다는것을 옳게 인식하고 사업해나갈데 대하여 강조하시였던것이다.

《여기 모인 학원창립준비위원회 위원동지들의 성의있는 노력에 의하여 학원창립사업은 대단히 빠른 속도로 진척되고있습니다. 학원청사건설을 위한 지대정리도 장마철의 불리한 조건이지만 로동자동무들의 충만된 열의에 의하여 중단함이 없이 진행되고있고 새 교사설계도 마지막단계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학원제복문제도 사리원방직공장에서 생산하는 모직천을 국영 평양피복공장에 가져다줄수 있게 조직사업이 됨으로써 곧 생산에 착수할수 있게 되였습니다.》

그이께서는 잠시 동안을 두시였다가 약간 어조를 바꾸어 말씀을 이으시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성과에 절대로 만족을 느낄수 없습니다. 학원림시교사를 꾸리는 사업에서도 아직 불충분한 점들이 적지 않습니다. 교구비품들을 원만히 갖추어주지 못한 상태이고 모기장이 모자라서 대다수 침실들에선 쑥불을 피워 모기를 쫓고있는 형편입니다. 침대도 군대병영때 쓰던걸 그대로 들여놓았는데 당장은 새로 장만해주지 못한다고 해도 아이들의 키에 맞게 낮추어주고 도색을 다시 해주는것쯤이야 왜 관심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그이의 말씀에 일군들은 눈길을 떨구었다. 누구도 그런 소소한 문제때문에 마음써본적이 없었던것이다. 그저 만경대에는 청사건설, 간리에는 림시교사운영, 이렇게 큰 선에서만 제기되는 문제들을 풀기 위해 뛰여다녔던것이다. 사실 그들중에는 학원청사건설이 끝날 때까지 림시교사운영을 중지하던지 아니면 나라형편이 좀 펴일 때까지 림시교사운영에만 힘을 넣으면 좋지 않겠는가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일부 있었다. 학원은 하나인데 현재는 두개의 학원을 세우는 품이 들어야 했던것이다.

김일성동지께서도 일부 사람들속에 제기되는 의견을 모르는바가 아니였지만 절대로 동의할수가 없으시였다.

《동무들, 우리 언제나 그 애들의 친부모된 심정으로 자기가 맡은 과업들을 사소한것에 이르기까지 책임적으로 해나갑시다.》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새로운 각오로 충만된 일군들의 대답이였다.

《자, 이걸 보시오. 교육국에서 작성한 학원학제표와 교육과정안인데 다들 의견들을 말해보시오.》

김일성동지께서는 문건을 좌중에 돌리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리주연이 싱글싱글 웃으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이건 아직 세상에 없는 학제표입니다. 인민반 5년, 초급반 3년, 고급반 3년… 11년제가 아닙니까?! 대단합니다.》

《남일동무랑 유자녀들의 현실태와 우리의 의견을 충분히 참작하여 작성한것입니다.》

김일성동지께서 교육국 부국장 남일에게 눈길을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자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그런데 한가지 난문제가 있습니다. 현재까지 학원입학대상으로 등록된 학생수는 304명인데 일곱살짜리 어린 아이로부터 열일여덟살에 이르는 큰 아이들까지 다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이를 먹은 큰 애들속에 우리 글을 쓰고 읽을줄도 모르는, 말하자면 초보적인 교육조차 받지 못한 상태에 있는 아이들이 많다는겁니다. 나이로 봐선 고급반, 초급반학제에서 공부를 해야 할 아이들인데…》

《그래 남일동무생각엔 그런 애들이 고급반, 초급반과정안을 소화할수 있다고 봅니까? 좀 힘들긴 하겠지만 말이요.》

《그건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교육은 철저히 기초가 없이는…》

남일은 머리까지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교육자가 불가능하다면 달리 할수야 없지 않소?! 기초교육부터 시키는 수밖에.》

《그런데 인민반교육부터 받게 하기에는 그 애들의 나이가… 근 10년 나이차이를 가진 아이들이 한학년, 한학급에서 꽤 공부를 해내겠는지 그게 우려됩니다.》

남일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공감을 표시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시였다.

남일의 우려가 공연한것이 아니였던것이다. 막내동생벌이나 지어 조카벌이 될 코흘리개들과 한책상에서 공부하라고 하면 큰 애들이 얼마나 부끄러워하겠는가?…

그렇다고 아무런 기초교육도 받지 못한 그들을 자기 나이의 학제에서 배우게 할수도 없는 일이였다.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학원학생들속에는 지난날 빌어먹으며 떠돌아다니던 아이들도 있고 탄광, 광산에서 소년로동을 하였거나 농촌에서 농사짓던 아이들도 있으며 담배장사나 물감장사 같은것을 하던 아이들도 많습니다. 그러니 언제 교육이라는것을 받아보았겠습니까?! 일제놈들은 혁명가의 자식들이 학교에 입학조차 못하게 하고 갖은 탄압을 다 했습니다. 공부를 못한것은 결코 그 애들의 탓이 아닙니다. 이걸 그 애들에게 잘 인식시킵시다. 그리고 그 애들의 심정을 잘 고려해서 학원인민반을 인민반이라고 하지 말고 특별반이라고 합시다.》

《특별반이요?》

《그렇소. 말그대로 특수한 사정을 가진 아이들의 집단이 아니요. 특별반에서 기초교육을 받게 하고 나이를 먹은 아이들은 그 수준정도에 따라 해수에 관계없이 자기 나이의 학제까지 제꺽제꺽 올라가게 합시다.》

《아닌게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고 11년제교육을 다 받게 하였다가는 그 애들이 서른살이 될 때까지 공부를 해야 할겝니다.》

김책이 그이의 말씀에 수긍하며 이렇게 말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가볍게 웃으시며 말씀을 이으시였다.

《교육과정안에 군사학이 예견되여있지 않는데 그건 앞으로 안길동무와 더 토론해봅시다. 내 생각에는 고급반학생들의 과정안에 군사학강의와 군사훈련시간을 포함시켜주어야 할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자면 현재 창립준비위원회에서 작성하고있는 학원조직편제도 다시 검토해봐야 할것입니다.》

그이께서는 김책과 안길이쪽을 바라보시였다.

《학생들을 글만 아는 선비가 아니라 부모들의 뒤를 이을 혁명가로 키워야 하는것만큼 학원에 정치부원장직제를 내오고 군사교관들도 두어야 합니다. 학원조직체계를 군사체계로 만들어 학급을 소대로 편성하고 군사교관들이 한개 소대씩 맡아서 지도하게 하면 학생들을 규률성있게 키우는데서나 또 그들의 생활을 돌봐주는데서나 유리할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김책동무.》

《그렇게 되면 교원들은 강의에 집중하게 되고 일과생활과 개체생활은 군사교관들이 돌봐주게 되므로 임무분담이 명백하고 각자가 더 구체적으로 학생들에게 관심할수 있다고 봅니다. 절대찬성입니다.》

그뒤를 따라 창립준비위원회 성원들모두가 전적인 찬성을 표시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미더운 눈길로 그들을 둘러보시고나서 협의회를 결속하시였다.

《학원기발과 원가를 만드는 사업에 대해서는 다음번 협의회에서 토론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합시다.》

벌써 창밖은 어둠에 묻혀버렸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어둠에 묻힌 창밖을 잠시 내다보시고나서 따로 불러 남게 하신 안길에게로 돌아서시였다.

그전보다 더 수척해진 그의 모습이 아프게 가슴을 찌른다. 안해가 사망한 이후로 더 눈에 뜨이게 못쓰게 되는것 같다. 하긴 인제는 아예 집에 들어가지조차 않고 보안간부훈련대대부와 중앙보안간부학교, 보안간부훈련소들에 나가산다고 한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애써 가슴아픔을 누르시며 천천히 말씀을 떼시였다.

《내가… 안길동무를 따로 만나자고 한건 그… 학원문제때문이요. 아무래도 정치부원장과 군사교관들은 중앙보안간부학교에서 선발해야 할것 같소.》

《중앙보안간부학교에서 말입니까?》

한사람한사람 알알이 골라서 품들여 키우고있는 그곳 사람들을 내놓기 아쉬워하는 표정이였다.

《그렇소. 정치부원장은 교원들중에서 성품이 좋은 사람으로 한 동무 선발하고 군사교관들은 올해 첫 졸업생들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군관들로 뽑아주시오. 아이들과 잘 어울릴수 있고 그들의 생활을 다심하게 돌봐줄수 있는 젊고 인정미있는 사람들로 말이요.》

《…》

안길은 인차 대답을 못하고 고개만 숙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러는 그의 심정이 충분히 리해되시였다.

그래서 더 재촉을 하지 않으시고 그 침묵을 묵묵히 받으시였다. 하긴 자신께서도 중앙보안간부학교의 제1기 졸업생들중의 우수한 군관들을 군대에로가 아니라 학원으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알찌근해지시였다. 그들 한사람한사람을 자신께서도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품들여 키우시였던가. 학교에 자주 나가시여 그들에게 작전전술적안목을 틔워주기 위한 강의는 얼마나 하시였으며 훈련에도 자주 참가하시여 얼마나 그들의 군사적성장을 걸음걸음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던가.…

더우기 이제 오래지 않아 정규군으로 대폭 확대강화해야 할 군대안에서 사실 그들 한사람한사람은 그 무엇보다 귀중하였고 절실히 필요한 존재들이였다. 이것을 그 누구보다도 절감하고있는 사람이 바로 다름아닌 안길이였다.

절감하고있을뿐아니라 자신의 온넋을 다 바쳐 그들을 유능한 군사지휘관으로 키우기 위해 그 누구보다도 심혈을 기울여왔다.

그렇기때문에 김일성동지께서는 자신의 심정이나 안길의 심정이 다를바 없을것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계신것이다.

《저…》

안길도 불시에 찾아든 침묵을 깨보려고 무진애를 쓰고있었다.

《사실 지금 우리 군대안에 정규교육을 받은 소대장, 중대장들이 얼마 없습니다. 이제 당장이라도 부대들을 증편해야겠는데 파견할 군관들은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하지만… 학원사업이 중요한것만큼 장군님의 가르치심대로 하겠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마음속으로 안길은 역시 안길이로구나!― 하고 생각하시였다.

군대사업, 정규군건설… 이것은 해방된 조국땅에서 안길이 넋과 심혈을 깡그리 다 바치고있는 인생의 전부와도 같은것이였다.

더우기 남조선을 가로타고앉은 미제가 리승만괴뢰들을 부추겨 38°선에서 모험적인 무장도발행위를 빈번히 벌리고있는 오늘의 긴장한 정세하에서 그의 온 정신은 군대강화에 가있었다.

총대가 약해 침략자들의 발굽밑에서 망국노의 노예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그 피눈물나는 력사를 어찌 되풀이할수 있으며 항일의 피어린 수십성상 불바다만리, 눈보라만리를 헤치고 장군님 찾아주신 조국, 인민의 새 세상을 어찌 한치인들 원쑤들에게 짓밟히게 할수 있으랴. 귀중한 조국을 지키기 위해, 민족의 운명이신 김일성장군님을 굳건히 옹위하기 위해 하루라도 한시라도 빨리 정규군건설을 다그쳐야 한다는것이 안길의 신념이였고 의지였으며 삶의 목표였던것이다. 그는 희생된 전우들도 이러한 자신을 리해해주리라 믿었고 지지해주리라 의심치 않았다.…

《안길동무가 힘들게 대답하누만. 동무의 그 심정을 내 모르는바도 아니고 오늘의 정세와 정규군건설사업의 중요성을 모르는바도 아니요. 더없이 긴박하고 중요한 사업이지.》

김일성동지께서는 천천히 창문가로 돌아서시였다.

캄캄한 창밖 그 어디에선가 먼 우뢰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난 어쩐지 그 사업이 우리가 혁명가유자녀들을 키우는 사업과 별개의 문제처럼 생각되지 않누만. 생각 좀 해보오. 이제 그 애들속에서 소대장, 중대장정도가 아니라 련대장, 사단장 아니, 군단장도 나온다고 말이요. 어디 그뿐인가, 당일군도 나오고 인민위원장, 상, 과학자, 문화인… 말하자면 당과 국가, 군대 아니, 나라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를 떠메고나갈 기둥감들이 나온다고 말이요. 물론 아직은 먼 후날의 일이지.

하지만 우린 그 애들을 꼭 그렇게 키워야 하는거요. 왜냐하면 희생된 동지들이 바로 그 애들의 그 밝은 미래를 위해서 서슴없이 목숨을 바쳤기때문에! 그런데 그 미래를 품들이지 않고 가꿀수 있는가. 한자식을 키우는데만도 오만자루의 공수가 든다고 했는데 혁명동지들의 그 귀중한 자식들을 키우는데 우리가 과연 백만자루, 천만자루의 품을 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요.》

그이의 목소리는 절절하게 울렸다.

안길은 여전히 말없이 서있었다.

다만 또다시 먼 우뢰소리가 들려올뿐…

《안길동문 우리가 그 애들을 찾아서 거두어주는것으로써 먼저 간 동지들에게 의리를 지키는것으로 생각하는것 같은데 난 생각을 달리하오.

우리가 얼마나 아깝고 귀중한 수많은 동지들을 잃었소.

그 귀중함을, 그 애석함을 과연 무엇으로 메꿀수 있겠소?

그들을 다시 우리곁에 일으켜세워야 하는거요. 바로 그들의 자식들을 그들과 꼭같은 귀중한 혁명동지로 키우는거요.

난 혁명가유자녀들을 찾아냈다는 보고를 받을 때마다 우리가 혁명투쟁을 할 때 한명의 동지를 얻기 위하여 생명의 위험도 무릅쓰고 어려운 싸움을 벌리던 일이 자꾸만 떠오르군 하오.

안길동무도 그 심정을 절감해온 사람이 아니요.》

안길은 머리를 들었다.

그러나 말은 없었다. 다만 어두운 그의 눈빛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싶어했다.

《우리가 혁명가유자녀들을 단순히 그 어떤 동정이나 의무감에서만 대한다면 그건 진정한 동지적의리라고 말할수 없고 그런 의리심에는 기필코 한계가 있기마련이요.

안길동무! 집에 들어가 한번 자식들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오.

그 눈동자속에 비껴있는 자식들의 지향과 념원, 그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란 말이요. 그 맑은 눈동자속에 비낀 그 애들의 미래를 보게 되면 아마 그 애들을 위해서는 그 무엇도 아까울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거요.》

따뜻하고 정에 넘친 그 말씀, 절절하고 확신에 찬 그 음성.

《장군님!…》

안길은 나직하나 격한 목소리로 그이를 불렀다.

그이의 믿음에 찬 눈빛이 눈부신 해빛과도 같이 안길의 마음을 포근히 감싸안았다.

더는 먼 우뢰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

별, 밤하늘에 하나둘 별들이 돋기 시작하였다.

금방 미역이라도 감고 나온듯 별들은 유난스레 반짝거린다.

장마가 걷힌 저 하늘에서 이밤 오래간만에 보게 되는 별들이다.

안길이도 그 별들처럼 오래간만에 집으로 들어왔다.

아들 영호와 영환이 그리고 외동딸 옥순이가 뜻밖에 집에 들어온 아버지를 보고 당황하여 어쩔줄을 몰라했다.

이미 저희들끼리 있는대로 저녁밥을 먼저 먹어버렸던것이다.

안해가 살아있을 때에는 그가 집에 들어오건말건 언제나 밤늦게까지 가마목에 밥사발이 덥혀있군 하였다.

안해는 그를 기다리는데서 지칠줄을 몰랐다.

하긴 안길이 일찌기 혁명에 나선 그날부터 기다림은 그 녀자의 한생으로 되여버렸었다. 이제는 이 집안에서 그를 기다림이, 가마목의 그 따끈한 밥그릇이 자취를 감추고말았다.

보나마나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대충대충 끼니를 때군 할것이다.

누가 그 애들에게 각근하게 더운밥과 맛있는 찬을 만들어주랴. 아마 그 애들에게는 아버지가 저 멀리 어딘가 딴 세계의 사람이거나 지나가다 잠간 들린 길손처럼 생각될지도 모른다.

안길은 자기가 자식들에게 너무도 무관심했음을 가슴저리게 깨달았다.

옥순이가 아버지의 저녁밥을 지으려고 부엌으로 다급히 내려갔다.

안길은 그러는 딸에게 나직이 말했다.

《그만둬라, 저녁밥은 먹고왔다.》

혼자서야 무슨 재미로 밥을 먹으랴.…

요사이엔 웬일인지 통 밥맛도 없었다.

《그래도…》

옥순이가 쌀바가지를 손에 든채 아버지를 바라보며 간청한다.

《어서 올라오너라, 어서.》

딸애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방안으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고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버지의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았다. 거의 두달만에 집에 들어온 그 모습이 낯설어보였던지 아니면 래일 또 집을 나가면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그 모습을 실컷 눈에 익혀두고싶어서였던지…

그러는 딸의 볼을 손가락으로 살짝 튕겨주며 안길은 빙그레 웃었다. 그제서야 옥순이도 박속같이 하얀 이를 살짝 드러내며 생긋 웃었다.

《아버지…》

딸애는 살풋이 아버지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어머니없이 사는 자식들에게 아버지로서의 한쪼각 사랑마저 안겨주지 못한 죄스러움이 다시금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 애들이 얼마나 아버지의 사랑을 그리워하랴.

어릴 때부터 혁명가인 아버지를 둔 죄아닌 죄로 하여 이 애들이 겪어야 했던 고생은 그 얼마이며 덮쳐든 죽음의 그림자는 또 얼마였던가.…

왕청유격구가 해산된 후 그의 가족은 왜놈들의 탄압을 피해 훈춘현 대황구로 옮겨가 황무지를 뚜지며 생계를 이어갔었다.

안해는 그속에서도 남편의 뜻대로 자식들을 공부시키려고 온갖 고생을 다해가며 그들을 학교에 입학시켰으나 끝내 월사금때문에 쫓겨나 그 고사리같은 여린 손들에 호미를 쥐여주지 않으면 안되였다.

거기에다 안길의 가족을 찾는 왜놈들의 마수가 그곳까지 뻗쳐와 열흘이 멀다하게 경찰서에 불리워가 남편과 아버지가 오지 않았댔느냐는 취조를 받아야 했다. 어떤 때는 놈들의 군화발에 채우고 뭇매질에 쓰러져 들것에 실려 집으로 돌아오군 하였었다.

그때의 그 후과로 하여 안해는 제 명을 다 살지 못하고 이렇게 먼저 이 세상을 떠나갔던것이다.

하루는 왜놈들이 갑자기 집에 달려들어 안해와 아이들을 주런이 세워놓고 차례차례 사진을 찍더니 씨물씨물 웃으며 돌아가버렸다. 패망을 눈앞에 둔 일제놈들은 여차하면 안길의 가족을 멸살시키려고 이런 비렬한짓까지 했던것이다.

다음날 깊은 밤 경찰서에서 잡부로 있던 량심적인 사람이 달려와 조용히 놈들의 흉계를 알려주어 안해는 아이들을 데리고 깊고깊은 산속으로 달아났다. 만일 그때 왜놈들이 빨리 망하지 않았더라면 그 가족사진을 놓고 모두 찾아내여 죽여버렸을것이다.

깊고깊은 산속에서 그의 가족은 왜놈들이 망한것도 모르고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우려먹으며 살다가 빈사상태에 놓인것을 사냥군들이 구원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김일성장군님께서 안길의 가족을 찾기 위해 여러차례나 사람들을 보내시여 끝끝내 그들을 데려오셨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된 사연들이였다.

안길은 딸의 머리카락을 다정히 내리쓸었다.

영호와 영환이는 한쪽구석에 서서 슬금슬금 아버지의 눈치만을 살피고있었다. 딸은 역시 딸이여서 그런지 다 자라서 아버지를 만나고도 스스럼없이 곧잘 품에 안겨들었지만 아들녀석들은 그저 어려워만 하고 묻는 말에나 겨우 대답하군 한다. 다 자란 아들들이 무척 대견하긴 했지만 품안에 안겨드는 막내며 외동딸인 옥순에게 어쩐지 정이 더 갔다. 그래서인지 아들들은 그가 어쩌다 집에 들어오면 슬그머니 누이동생을 시켜 자기들의 부탁을 이야기하게 하군 하였다.

《원 녀석들두, 아버지가 그렇게 무섭니? 그러지 말고 너희들도 어서 여기 오너라. 오래간만에 너희들과 이야기나 좀 해보자.》

안길이 그들에게 한팔을 벌리며 이렇게 불러서야 영호와 영환이는 벙글벙글 웃으며 다가왔다.

《참, 우리 오락회를 해볼가? 빨찌산에선 이 시간이면 빙 둘러앉아 밀림속 오락회를 하군 했단다.》

《오락회요? 야, 그거 정말 재미있었겠네.》

옥순이가 사뭇 신바람이 나서 손벽까지 쳐댔다.

《그러구보니 아버지가 너희들의 노래소리 한번 못 들어봤구나.》

《우리도 아버지노랠 아직 못 들어봤어요.

어머닌 늘 아버지가 풍금도 잘 치고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췄다고 말씀하군 했는데…》

옥순이가 이렇게 말하며 어머니의 그 말이 정말이나 하고 묻기라도 하듯 아버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것뿐이겠니?! 아버진 나팔도 잘 불었단다. 한번 보겠니?》

안길은 두손을 오무려 입술에 대고나서 유격대신호나팔을 한곡조 흉내내여 불어댔다.

옥순이는 죽겠다고 배를 그러쥐고 웃고 영호와 영환이도 변성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소리내여 웃었다.

자식들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느라니 마음이 훈훈해왔다.

문득 오늘 저녁 집무실에서 《안길동무, 집에 들어가 한번 자식들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오. 그 눈동자속에 비껴있는 자식들의 지향과 념원, 그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란 말이요. 그 맑은 눈동자속에 비낀 그 애들의 미래를 보게 되면 아마 그 애들을 위해서는 그 무엇도 아까울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거요.》라고 하시던 장군님의 그 절절한 음성이 다시금 귀전에서 울렸다.

그는 자석에 끌리듯 저도모르게 아이들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아, 티없이 맑은 그 눈동자…

마치 고요한 숲속에서 찰랑이는 정가로운 샘물을 보는듯싶었다. 마치 가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을 보는듯싶었다. 아니, 용암처럼 이글거리는 불길을 보는듯싶었다.

그 숲이 지켜주는 한 샘물은 언제까지나 정가로울것이고 그 푸르름을 잃지 않는 한 하늘은 영원히 가없이 넓을것이며 불씨가 살아있는 한 그 불길은 꺼짐을 모르고 세차게 활활 타오를것이라는 신비한 생각이 안길의 뇌리를 쳤다.

《아버지, 어서 노래를 불러주세요.》

맏아들 영호가 아버지의 팔굽을 슬며시 잡아흔든다.

《어서요. 아버지가 안 부르면 우리도 노랠 안할래요.》

옥순이가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맞장구를 친다.

《허허… 그래그래, 부르자꾸나. 가만, 그런데 무슨 노랠 부른다?…》

《그거 있잖아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자주 불러주군 했다는 노래…》

옥순이의 말이다. 아마 안해가 딸에게만은 많은 이야기를 하군 한 모양이다.

《오,〈반월가〉!…》

안길은 천천히 창가로 다가갔다.

별들이 더 많아졌다. 밤하늘의 보석들이 은하수를 타고 어디론가로 흘러간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창밖에서 조무래기들이 부르는 노래소리가 간간이 들려온다.

그는 밤하늘가에서 눈길을 떼고 자식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두눈을 끔뻑 해보였다.

사뭇 호기심과 기대가 한껏 어린 그 애들의 눈길앞에 어쩐지 당황스러워지는 자신을 그대로 비쳐보이기가 두려웠던것이다.

그 눈길이 단순히 자기 자식들의 눈길이라고만 생각되지 않았다.

희생된 전우들의 눈길, 그들이 남긴 수많은 유자녀들의 눈길처럼 생각되였다.

안길은 지그시 두눈을 감았다.

노래를 불렀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나무 토끼 한마리

 

그가 부르는 노래소리는 은하수에 실려 밤하늘가 저 멀리로 조용히 흘러갔다. 사랑하는 자식들의 마음에 실려 희망의 기슭에로 끝없이 흘러갔다.

 

멀리서 반짝반짝 비추이는건

새별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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