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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동지께서는 며칠전 중국공산당으로부터 동만일대에는 조선사람이 80%이상 차지하고있으므로 항일무장투쟁시기부터 투쟁하여온 우리 나라의 로간부들을 파견하여달라는 요청을 받으시였다.
중국공산당이 이러한 요청을 해온데는 그럴만 한 사정이 있었다. 당시 중국혁명은 력사의 갈림길에서 준엄한 시련을 겪고있었다. 쏘련군대에 의한 동북해방은 중국혁명을 위한 중국공산당의 활동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여주었지만 쏘중회담결정에 따라 쏘련군대가 철수한 후 장개석도당의 동북해방지구에 대한 전면공격으로 간고한 싸움을 벌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만주를 혁명근거지로 만들고 여기서 쏘련군이 넘겨준 무장으로 해방군을 개편보강하며 중국본토해방을 수행할 목적으로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부를 연안으로부터 서만주로 이동시킨 중국공산당에 있어서 동북을 차지하는가 못하는가 하는것은 혁명승패의 관건적문제였다. 그러나 장개석은 미제가 준 60억딸라어치의 군사장비로 무장해가지고 미륙군대장 웨이드마이어의 지휘밑에 진행된 력사상 최대규모의 《공수 및 해운작전》으로 동북싸움에서 일시적인 주도권을 장악하고있었다.
장개석의 정예부대인 3개의 기계화군단을 주력으로 하는 수십만명의 병력이 심양을 이미 차지했으며 장춘, 길림을 점령하고 연변계선인 돈화에까지 침입하였다. 그리하여 길림성당기관들까지 모두 후퇴하여 연변에 집결되여있었고 또 연변땅에서도 후퇴준비를 하고있었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연변지구는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놓여있었다. 그런데 그 시기 동만에서는 좌경분자들의 빈고농로선이 그대로 집행되여 인민들속에서 불안과 공포가 심해지고있었으며 애매한 사람들이 수많이 청산되여 서로 울고불고 지어는 전선에 나간 후방가족들까지 청산하여 전선부대들에서 전사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현상까지 나타나고있었다. 한편으로는 숨어있던 반동들이 무기를 가지고 후방에서 민심을 소란시키면서 살인과 방화, 략탈만행을 끊임없이 저지르고있었으며 조중인민의 사이를 리간시키기 위하여 음흉하고도 악랄하게 책동하고있었다. 동만땅에 조성된 혼란된 상태를 하루빨리 수습하고 혁명력량을 제때에 준비하지 않는다면 이곳의 불리한 군사정세를 바로잡을수 없었다. 하여 중국공산당에서는 이러한 실태를 파악하고 김일성동지께 도와줄것을 요청하여왔던것이다.
그들의 요청을 들어줄 결심이시였다. 지난 시기 만주광야에서 생사운명을 같이하여온 혁명전우로서 중국동지들이 겪고있는 곤난을 그냥 보고만 있을수 없으시였다. 이미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회의에서 그이께서는 동북해방은 중국혁명을 도와주는 견지에서, 우리 혁명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데서 매우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강건, 박락권, 최광을 비롯한 지휘관들에게 연변일대를 비롯한 동만땅을 동북해방을 위한 기지로 꾸릴데 대한 과업을 주시였었다.
해방직후에는 모택동의 친서를 가지고 찾아온 중국공산당 조직부장 진운을 통하여 해방군에게 화약과 일제에게서 빼앗은 10만정의 보총, 다량의 탄약, 식량과 피복 그외 각종 포부대장비들을 모두 무상으로 보내주시였다. 그리고 료동반도에서 국민당군에 의해 포위된 수십만명의 해방군을 구원해달라는 중국당의 요청을 받고 서해기슭의 배들을 총동원하여 우리 나라의 평북도와 신의주에 대피시켰다가 력량을 재수습하여가지고 동북해방전투에 참가하도록 도와주시였다.
1945년 11월에는 몸소 전투가 벌어지고있는 중국 단동에까지 들어가시여 작전토의까지 해주시였다. 항일의 불길속에서 피로써 맺어진 두 나라 혁명가들과 인민들의 전통적인 친선과 단결은 해방된 오늘에도 빛나게 이어져야 한다는것이 김일성동지의 확고부동한 의지였고 결심이시였다.
그이께서는 지금 동북으로 누구를 파견하겠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고심하고계시였다. 자신의 명의로 동북에 파견되는 특사는 중국인민의 동북해방을 위한 싸움에 동만의 조선사람들을 조직동원할수 있는 조직자적능력이 있어야 하고 그곳에서 조성된 민족적대립을 해소하고 조선사람자체의 민족자결권을 해결할수 있는 정치적수완이 있어야 했다. 솔직히 말하여 그 적임자도 역시 림춘추였다. 그는 연변지방에서 태여나 성장하였고 일찌기 청년시절부터 연변지구에서 지하공작을 하였으며 동만의 유격구에서도 사업하였고 그후에는 북만에서 독립려단 당서기, 남만에서 경위련대 당서기, 8련대, 7련대 당서기, 동만당공작위원회 책임자,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 위원의 직책을 력임하면서 항일대전의 불길을 헤쳐온 단련되고 세련된 능숙한 정치활동가였다. 특히 김일성동지께서 림춘추를 적임자라고 생각하신것은 그가 동북의 조선인혁명가들의 투쟁에 대하여 그 누구보다 더 구체적으로 알고있다는 점에서였다. 그것은 또한 그의 사업상관계에 기인된것도 있지만 보다는 그가 우리의 항일혁명투쟁의 력사를 갈피갈피 단편적이나마 매일 《비망록》에 적어온 남다른 지향과 정열때문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중국당의 요청을 받아들이던 그 순간에 벌써 특사가 공식적인 자격으로 오래동안 동북에 나가 사업하게 된 이 기회에 그곳에 널려있는 희생된 혁명렬사들의 유자녀들을 찾아 조국으로 데려오실 결심을 굳히시였다. 우정이라도 림춘추를 보내여 그들을 찾아오실 생각이였는데 때마침 유리한 조건이 마련되였던것이다. 해방직후부터 혁명가유자녀들을 찾는 사업을 맡고있는 림춘추야말로 어느모로 보나 둘도 없는 적임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고심하고계시는것은 멀리 까자흐스딴에 있는 그의 아들문제때문이였다. 아버지를 찾아달라는 어린 아들의 그 간절한 부탁을 자신께서는 아직 들어주지 못하시였던것이다. 쏘련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다. 시일이 걸려야 할 형편에서 림춘추를 개인자격으로라도 아들을 찾아 보냈어야 했으나 보내지 못하셨다. 본인이 완강하게 거절하기도 하였지만 사실 보낼 형편도 못되였다. 투사들의 거의 모두가 정규군건설사업에 참가하고있는 형편에서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평양이 있는 평안남도당사업을 맡고있는 그마저 떼여낼수가 없었던것이다. 그만큼 나라의 정세가 복잡다단하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크게 마음먹고 그를 떼여낸다는것이 아들에게로가 아니라 딴곳으로 보내야 하니, 그것도 많은 사업부담과 함께 다른 사람들의 자식들을 찾으러 보내야 하니 어쩐지 그들부자에게 죄스러운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거우시였다. 림춘추라고 어찌 아들이 보고싶지 않고 데려오고싶지 않으랴. 본인은 앞에서 그런 내색조차 하지 않고 그 비슷한 말조차 꺼내려 하지 않고있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생각이 많고 가슴이 쓰리랴. 그 웅심깊고 인정많은 사람이…
해방직후 김정숙을 비롯한 녀투사들 일행이 평양에 오던 때의 일이 생각난다. 함경북도에 나가있던 안길이로부터 그들이 렬차편으로 평양역에 도착한다는 전화련락을 받고 김책, 최용진을 비롯한 평양에 떨어져있는 몇 안되는 전우들이 마중나갈 차비를 하고있는데 정작 떠나자고보니 방금전까지 있던 림춘추가 간다온다 소리없이 어데론가 사라졌다. 여러 사람이 그의 행방을 찾아헤맸으나 통 알 재간이 없었다. 이렇게 행방불명이 되였던 그는 12월의 짧은 겨울해가 사그라져갈무렵에야 나타났는데 그의 손에는 여러마리의 숭어꿰미와 먹음직스러운 조선사과가 든 구럭이 들리여있었다. 자신께서도 그때에야 림춘추가 고기그물을 얻어들고 대동강에 나가 얼음을 까고 동지달의 강물속에서 해종일 떨며 한마리, 두마리 숭어를 건져냈다는것을 알게 되시였다. 그것도 성차지 않아 그는 돌아오는 길에 시장에 들려 사과까지 사가지고 이렇게 나타난것이였다.
《혁명을 한다는 사람이 대낮에 고기그물을 메고다니는것도 한심하지만 이 추위에 얼어죽자고 강물속에서 해를 보낸단 말이요?》
《장군님, 혁명규률을 위반한건 잘못되였지만 아, 정숙동지랑 어리신 우리 장군이 오신다는데 가만있을수는 없지 않습니까. 장군님께서 산에서 싸울 때 이제 나라가 해방되면 대동강의 숭어국을 푸짐하게 대접하겠다고 늘 말씀하시군 했는데 오늘같은 날에야 그 약속을 지켜야 할게 아닙니까.》
입술이 시퍼렇게 질려가지고도 능청스러운 말로 넘기려 하던 림춘추…
아, 그때의 그 고맙고도 격했던 심정이 지금도 때없이 온몸에 젖어들군 한다. 그런데 자신께서는 그의 가장 큰 마음속 아픔 하나 풀어주지 못하고있다. 그저 《영일》이라는 아들의 이름밖에 지어준것이 없다.
(영일아, 내가 너에게 죄를 짓는구나. 지금도 아버지를 부르고부르는 너의 그 목소리가 귀전에 쟁쟁하다만 난 아버지를 너에게로 보낼수가 없구나. 불러볼 아버지조차 없는 불쌍한 수많은 아이들이 저 동북땅에서 네 아버지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있단다. 네 아버지가 아니면 그들을 다 찾아낼수가 없구나. 날 용서해라.…)
×
그날 밤 림춘추는 잠들수가 없었다. 동북에 파견되여 사업할데 대한 그 임무가 얼마나 무겁고 중대한것인지를 몰라서가 아니였고 또 장군님께서 얼마나 괴롭고 힘들게 자기를 보낼 결심을 내리셨는가를 몰라서도 아니였다.
장군님의 그 크나큰 믿음과 각별한 사랑이 가슴에 젖어들수록 맡은 사업을 책임적으로 수행하여야 하겠다는 결심은 굳어졌지만 그 사업이 장군님곁을 멀리 떠나 진행되는것임을 생각할 때는 마음이 천근만근으로 무거워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것도 하루이틀, 한두달정도가 아니라 몇해를 두고 진행하여야 할 사업인것으로 하여 림춘추는 더욱 안타깝고 괴로왔다. 이렇게 훌쩍 장군님의 곁을 멀리 떠나버리고나면 수령의 위대한 혁명투쟁사를 력사의 갈피갈피에 새겨넣어야 할 그 성스러운 사업은 어찌한단 말인가. 더우기 정규군건설과 공화국창건과 같은 민족사적인 사변들이 바야흐로 도래하고있는 이 격동적인 시기에!…
일찌기 조양천의 잊지 못할 그밤부터 김일성동지에 의해 개척되고 전진하는 조선혁명의 새로운 력사를 후손만대에 길이 전하는것을 민족이 자기에게 맡겨준 숭고한 사명으로 간직하고있는 림춘추에게 있어서 이것은 그 무엇으로써도 메꿀수 없는 손실이였으며 아쉬움이였다.
장군님께서 《림춘추동무는 당분간 평남도당사업을 다른 동무에게 인계하고 중국의 동만지방에로 들어가서 사업하여야 하겠소.》라고 말씀하실 때 림춘추의 머리속에 제일먼저 떠오른것이 바로 이것이였다.
그러나 장군님의 명령을 받은 전사가 어떻게 그 무슨 사정을 운운할수 있으랴. 림춘추는 장농속에 깊숙이 건사해두었던 배낭을 꺼내였다. 배낭아구리를 헤치고 하나둘 《비망록》수첩들을 꺼내노라니 물씬물씬 초목냄새가 풍겼다. 《비망록》수첩들가운데는 봇나무껍질로 만든것이 많았던것이다. 밀림속에서 종이 한장을 구한다는것은 식량이나 소금을 구하는것보다 더 어려웠다. 종종 종이가 떨어지면 봇나무껍질을 벗겨 대신하군 했는데 봇나무껍질이 매끈히 일게 하기 위하여 그 한쪽 모서리를 비비여 증기에 쪄냈다. 그러면 얇은 껍질이 한까풀씩 잘 떨어졌는데 그것들을 그늘에 말리워 수첩을 매서 썼던것이다. 남패자회의, 소할바령회의에서 하신 장군님의 력사적인 연설도 다 이 봇나무껍질수첩속에 기록되여있었다. 그는 그 수첩들에 자기식으로 창안한 독특한 속기법으로 깨알같이 글을 써놓았는데 그것으로 하여 내용의 구체적기록과 함께 비밀담보, 종이절약 등의 현실적인 난문제들이 적지 않게 해결되였다. 그자신이 아니고는 《비망록》을 읽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비물이나 물속에서도 젖지 않게 봇나무껍질로 꼼꼼히 덧씌운 《비망록》들의 표지를 소중히 쓸어만졌다.
아마 이 세상에서 제일 귀중한 보물이 무엇이냐고 그 누가 묻는다면 림춘추는 서슴없이 이 봇나무껍질뚜껑의 수첩들을 내놓을것이였다. 그 수첩들에는 항일무장투쟁시기 주요회의들에서 하신 장군님의 연설들을 비롯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이 진행한 대소전투들과 갖가지 일화들이 기록되여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빨찌산의 대백과사전이라고 할수 있었다. 림춘추는 《후―》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였다.
과연 이 대백과사전이 세상에 빛을 보이게 될 날은 과연 언제일지.
자신의 온넋이 바쳐진, 그 누구도 대신할수 없는 이 일을 남겨두고 떠나자니 눈물이 나도록 서운했다.
해방된 조국땅에서 아직까지 장군님의 혁명투쟁사 하나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또 이렇게 장군님의 곁을 멀리 떠난다는것을 먼저 간 동지들이 안다면 뭐라고 하겠는가. 경위련대 당서기시절 남만밀영에서 동만당 특위서기였던 위증민이 하던 말이 귀전에 울려왔다.
《항일무장대오에는 림춘추밖에는 조선의 현대력사를 쓸 사람이 없소. 동무는 젊고 문필능력과 지식도 있고 공부도 한 사람이니 전도가 유망하오. 김일성동지가 지닌 위대한 풍모는 우리 중국혁명가들이 반드시 따라배워야 할 귀감이며 모범으로 되고있소. 림춘추, 무장대오에서 동무가 할 일은 여느사람들과는 달라. 자네는 김일성동지의 혁명투쟁사를 력사앞에 남겨야 해!》
이것은 비단 중국혁명가 위증민의 당부만이 아니였다. 《3. 1월간》주필이였던 대통령감 리동백이 양목정자밀영에 불의에 달려든 일제《토벌》대와의 전투에서 희생되면서 전우들에게 남긴 유언은 더 절절하였다.
《내가 죽고 자네들이 다 죽어도 림춘추만은 살아야 하네. 그가 죽으면 우리 사령관동지의 혁명력사와 조선빨찌산의 력사가 묻혀버리고말아. 내가 살아서 그가 하는 일을 끝까지 돕자고 했는데 이젠 글렀어. 그러니 자네들이 내 말을 명심해 듣고 림춘추를 아끼고 잘 건사해주게.》
하지만 그는 이미 오래전에 곁을 떠나갔다. 자신이 하고싶었고 또 자신이 해오던 그 일을 다름아닌 림춘추 혼자에게만 맡겨놓고 그리도 귀중히 보관해왔던 자료보따리들과 함께 육신마저 불속에서 종적도 없이 타버리고말았다.
림춘추는 《후―》 하고 다시한번 긴숨을 내쉬고나서 수첩들을 배낭속에 넣기 시작했다. 비록 더없이 안타깝고 마음이 괴로왔지만 장군님께서 걸머지신 그 무거운 부담을 뻔히 알면서도 한가지라도 그 짐을 덜어드려야 한다는 의욕심이 자기를 다잡게 하였던것이다. 가자, 떠나자! 이왕지사 일이 이렇게 된바에는 한시라도 하루빨리 그곳 일을 결속하고 돌아오자. 우리가 산에서 싸울 때 조선인민혁명군 대오안에 그 무슨 문필가, 력사가라는 직책이 있어 내 이 일을 해왔더냐. 아무런 직책상의무도 또 그 누가 시켜서 한 일도 아닌 내스스로 해온 일이 아니던가. 비록 나라가 해방은 되였지만 지금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때처럼 살아야 한다. 그때처럼 일하고 그때처럼 써야 한다.
림춘추, 어서 배낭을 메라! 이 배낭을 메고 항일전의 그 나날처럼 우리 장군님의 건국로정을 따라가라! 붓으로써만이 아니라 피와 땀으로 혁명의 력사를 새겨가라!…
그는 배낭끈을 잡은 두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