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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의 방천길.
이제 겨우 중소줄에 잡힐상싶은 누렁소 한마리가 한가로이 새김질을 하고있다. 량옆으로 배가 축 늘어진것을 보아 기껏 풀을 뜯어먹은 모양이다. 누렁소는 천천히 새김질을 하다말고 방뚝밑을 넘겨다보며 《음메―》 하고 애절한 소리를 지른다. 이맘때면 밭에 나갔던 어미소가 외양간에 돌아오군 할 때이라 빨리 집으로 가고싶은 모양이다.
그러나 박송봉은 누렁소의 그 재촉소리를 못 들은듯 방뚝밑에 앉아 흘러가는 강물만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온종일 주인집의 크고작은 일들을 붙어안고 연자방아돌듯 하다가 젖떼기송아지에게 풀을 먹이는 이 저녁무렵이야말로 그에게는 겨우 다리쉼이나마 할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였던것이다. 그 시간에는 주인(그는 중국인이였다.)의 짜증섞인 잔소리도 없었고 허기진 배를 못 견디게 쓰리게 하는 주인집의 진한 기름냄새도 없어 송봉은 못 먹고 못 입은 서글픔에서 벗어나 마음껏 자기의 생각에 잠길수 있었다.
《음메―》
누렁소가 큰 눈을 슴벅거리며 또다시 애처롭게 울었다.
송봉은 물기가 어려보이는 누렁소의 큰 눈을 보지 않으려고 애써 눈길을 떨구었다. 어쩐지 그 눈이 불쌍하기는 하였으나 아무리 짐승이래도 너무 제 생각만 하는것 같아 괘씸한 생각이 들었기때문이다.
난 힘들어도 좋단 말이지? 저만 제 어미에게 매달려 애무를 받으면 그만이란 말이지?… 서글퍼졌다. 누렁소보다 못한 자기의 처지가 눈물겹도록 쓸쓸해졌다. 너무도 일찌기 이 세상에 자기만을 남겨두고 떠나간 아버지, 어머니… 송봉에게는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마저 떠오르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떻게 생겼댔을가? 또 어머니는?…
할머니는 송봉에게 눈우는 아버지를 닮고 눈아래는 어머니를 닮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 어머니생각이 날적마다 뚝밑에 쭈그리고앉아 흘러가는 물결우에 제모습을 비추어보군 했다. 그러나 무심한 물결은 송봉에게 부모에 대한 아무러한 련상도 안겨주지 않은채 늠실늠실 가버리군 한다. 지금도 그는 무심하게만 흘러가는 물결과 철없이 갈길을 재촉하는 누렁소의 애된 영각소리로 하여 더더욱 울적해지는 마음으로 앉아있었다.
송봉은 아버지의 얼굴을 모른다. 그가 세살나던 해 아버지 박길(박윤형)은 《민생단》으로 몰려 죽었던것이다.
송봉은 지금도 《민생단》이 뭔지 잘 알지 못한다. 할머니도 그에 대해서는 좀처럼 말해주려 하지 않는다.
《민생단》이란 도대체 무엇이기에 유격대정치위원이였다던 아버지가 그렇게 죽어야 했는가.
《송봉아, 난 네 아버지가 남들이 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걸 잘 안다. 자고로 우리 박씨문중에서는 역적이 나와본적이 없으니까.
허지만… 네 애비가 왜놈쪽발이들과 싸우다 전장에서 죽지 못하구 제편 손에 죽었으니… 어디 가서 하소할데가 없구나.》
이것이 아버지에 대해 무엇인가 자꾸만 알고싶어하는 송봉이에게 할머니가 말해준 총평이였다. 제편 사람들 손에 죽은 아버지…
어쩐지 아버지에 대해 생각하기가 겁났다. 그 누가 아버지에 대해 물을가봐 두려웠다.
(나에게 어머니라도 있었더라면…)
아버지가 돌아갈무렵 어머니는 지하공작을 나갔다가 일제경찰에 체포되여 화형을 당했다고 한다.
그래도 송봉에게 있어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아버지에 비하면 조금이나마 남아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어디론가 끝없이 달려가던 마차… 그 마차우에서 졸다가 깨여나보니 어둑스레한 어느 집 허청간… 웬 낯모를 녀인이 그를 꼭 품어주며 사탕 한봉지를 쥐여주던 일…
왜놈들이 망한 다음에야 송봉을 데리고 왕청현 백초구로 갔던 삼촌이 《그때 그 녀인이 바로 너의 어머니였단다.》라고 말해주었다. 일제놈들의 탄압과 감시가 심하여 송봉은 삼촌의 아들로 호적등록하고 그 집에서 할머니와 살고있었던것이다. 삼촌의 말을 들은 다음부터 애써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보군 했으나 왜서인지 손에 쥐여주던, 난생처음 먹어본 사탕밖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사탕 한봉지가 어머니에 대한 표상의 전부인셈이다. 송봉은 흘러가는 저 강물처럼 다시는 자기곁으로 돌아올수 없는 아버지, 어머니의 그 품, 그 모습, 그 사랑이 못 견디게 그리웠다. 또한 고아의 설음과 슬픔속에서 잔뼈가 굵어갈수록 거치른 이 땅에 자기를 두고 먼저 가버린 부모들에 대한 원망도 쌓여갔다. 할머니는 늙고 병들었고 삼촌네는 식솔이 너무 많아 굶기를 밥먹듯 하기가 일쑤다. 밥술을 하나 덜고 집안살림살이를 조금이라도 보태자면 삯일을 해야 했다. 벌써 몇년째… 송봉은 조양촌 룡포동에 있는 중국인의 집에서 머슴을 살고있었다.
손자애의 애처로운 정상이 가슴에 걸려 송기떡이라도 생기면 할머니가 그것을 싸들고 대문밖에 찾아오군 하지만 그를 집으로 데려갈 엄두는 내지도 못했다. 집에서 굶기느니 차라리 찬밥이라도 얻어먹을수 있는 남의집살이가 더 나았던것이다.…
《음메―》
누렁소가 또다시 울었다. 그 애처로움, 그 간절함…
송봉은 가슴을 파고드는 동정심에 움쭉 자리에서 일어섰다. 글쎄 자기야 정답게 맞아주고 품어줄 품이 없어 그런다지만 제 어미가 있는 저 누렁소야 왜 슬프게 한단 말이냐, 이런다고 내 슬픔이 덜어질리 만무하고 또 누렁소가 내 슬픔을 알아줄리 만무한것 아니냐, 가자, 누렁소야, 네 어미품으로 가자, 그러니 다신 내앞에서 행복한 투정질은 하지 말아, 막 시샘이 난다, 네가 부러워죽겠어!…
송봉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며 방뚝우에 올라섰다. 방천길에는 저녁노을이 짙게 어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