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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저택마당가에서 뛰여놀던 아이들이 대문가로 들어서시는 김정숙동지를 발견하고 좋아라 소리치며 달려왔다.
그이의 팔소매며 치마자락에 매여달린 아이들은 새끼제비들같이 얄팍한 입술을 나풀거리며 저저마끔 오구작작 떠들었다.
석달전 혜산에서 데려온 바로 그 아이들이였다.
처음 데려왔을 때만 해도 새죽지같이 여윈 두어깨사이로 가느다란 목을 움츠리고 눈치만 살피던 아이들이 이제는 제법 토실토실 살이 오르고 온 마당이 좁다하게 뛰여논다.
《그래 너희들 점심밥은 먹었니?》
김정숙동지께서는 허리를 굽히고 아이들의 등을 어루쓸며 다정히 물으시였다.
《예, 먹었어요. 영실아지미랑 같이.》
처녀애가 다른 두 사내애들을 앞질러 잽싸게 대답했다.
아마 그렇게 함으로써 늘 계집애라고 자기를 깔보는 그 애들앞에서 자기도 무시할수 없는 당당한 이 집 식솔임을 나타내고싶었던 모양이였다.
《그런데 순옥이 얼굴엔 웬 눈물자국이냐? 동일이, 봉호, 너희들 또 순옥일 울린게로구나.》
《피― 우리가 울렸나요 뭐. 군사놀이에서 대장과 한편이 못되구 우리와 한편이 되였다구 저 혼자 울었지요.》
《맞아요, 순옥인 울보예요.》
동일이와 봉호가 그 애에게 눈을 찔 빨며 투덜거렸다.
《원, 녀석들두. 그럼 편을 가르지 말구 다 한편이 될게지.》
《돌가보를 해서 편을 갈랐는데 어떻게 그렇게 되나요 뭐?》
봉호가 시무룩해서 볼부은 소리를 했다.
이때 김영실이가 바삐 마주나왔다.
《형님, 신새벽에 가셨다가 인제야 오시는군요.》
《영실이가 아이들시중을 들래 수고 많았겠구나.》
김정숙동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그를 정겹게 바라보시였다.
올해 열여섯살, 한창 처녀꼴이 잡히기 시작한 사촌시누이다. 조선혁명군 무장소조를 이끌고 풍산, 북청, 홍원 일대에서 정치군사활동을 벌리다가 파발리주재소습격사건이후 체포되여 드세찬 옥중투쟁으로 왜놈들을 전률케 하던 김형권동지의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 그래서 그런지 사촌시누이라기보다 친동생처럼 정이 가고 더욱 사랑해주시고싶은 그다.
《그런데 우리 정일인 왜 안 보이니? 대장이라면야 다 함께 데리고 놀게지.》
《그러면 뭐 진짜군사놀이맛이 안 난다나요. 아마 자기 편 대원들을 데리구 훈련을 주고있을거예요.》
영실의 말에 김정숙동지께서는 가볍게 웃으시며 아이들에게 말씀하시였다.
《자, 너희들도 모두 가서 함께 놀아라. 이 어머니가 너희들을 대장부대에 추천해보냈다고 말해라. 그래도 한편으로 안 받으면 어머니에게 와서 알려라.》
《예.》
아이들은 와― 환성을 지르며 대문밖으로 달려나갔다. 아이들의 뒤모습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시는 김정숙동지의 마음속에 한줄기 전류같은 애틋한 정이 찌르르 흘렀다.
저 순진하고 깨끗한 동심에 한점 그늘도 없이 마음껏 웃으며 뛰노는 모습을 먼저 간 저 애 부모들이 볼수만 있다면…
《저… 형님안색을 보니 몹시 피곤하신것 같애요. 내 자리를 펴드릴테니 좀 쉬세요.》
영실의 걱정이 스민 목소리였다.
아닌게아니라 김정숙동지께서는 몹시 피곤하시였다.
요 며칠새 장군님과 함께 다니며 그이의 사업을 보좌해드리시느라 드바삐 보내셨던것이다.
며칠전에는 만경대에 나가시여 김보현할아버님과 김형록삼촌을 모시고 장군님께서 잡아주신 학원터전자리를 다시 돌아보시였고 어제는 남포 지울리에 있는 평양학원에 가시였었다. 오늘은 또 강서군 성암면 대안리에 있는 중앙보안간부학교에 나가 학생들의 생활과 교원가족들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돌보아주고 돌아오시는 길이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자리를 펴드리겠다고 하는 김영실을 만류하시고 방안으로 들어가시였다.
생각같아서는 좀 쉬고싶으셨으나 어째서인지 아이들의 그 모습에서 련련히 밟혀오는 추억의 실꾸리가 끊기지 않고 자꾸만 풀어졌다.
그이께서는 자신도 모르게 장농문을 열고 빨간 천으로 정히 싼것을 꺼내시였다. 한겹두겹 천을 헤치니 그리 크지 않은 가지색수첩이 드러났다.
벌써 십여년째 몸의 한부분처럼 소중히 간수하고계시는 가지색수첩이였다. 그것을 요즘은 여느때보다 더 자주 꺼내보게 되신다. 그 수첩에는 일제와의 싸움에서 희생된 전우들의 이름과 그들의 고향, 살던 곳, 자녀들의 이름이 빠짐없이 적혀있었다. 이제는 그것을 펴보지 않고도 환히 통달하고계시였는데 때없이 자주 들여다보게 되는것은 바로 거기에 실오리만 한것일지언정 그들의 자녀들 행처를 찾을수 있는 가능성들이 기록되여있기때문이였다. 누구는 어디에서 가족과 마지막으로 헤여졌고 또 누구의 아들에게는 멀지 않은 곳에 이모가 살고있었으니 혹시 거기에 얹혔을수 있다는것, 누구는 이름자도 외우지 못하는 자기 자식을 남의 집에 맡기고 유격대에 들어올 때 저고리고름을 잘라 주머니를 만들고 거기에 이름 석자를 적어넣어 목에 걸어주었다는둥 짤막짤막한 기록들이 빼곡이 적혀있는 이 수첩이야말로 유자녀들을 찾을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였다.
그이께서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추억깊은 마음으로 수첩의 첫장을 펼치시였다. 거기에는 김일성장군님께서 민족배타주의자들과 좌경기회주의자들에 의해 헐벗고 굶주리며 짓밟히고있던 마안산의 아동단원들의 정상을 보시고 너무도 가슴이 아프시여 준절히 하신 말씀사상이 또박또박 적혀있었다.
…우리가 무엇때문에 혁명을 시작했고 지금도 무엇때문에 만난을 무릅쓰고 혁명을 계속하고있는가. 온갖 불의와 페습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고 인간적인것을 옹호하며 인간이 창조해낸 모든 부와 아름다움을 지켜내기 위하여 우리모두가 이 저주로운 세상을 향해 반기를 든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혁명가들인 우리가 어떻게 아이들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가만 내버려둘수 있겠는가. 후대들은 계급의 꽃이고 민족의 꽃이며 인류의 꽃이다. 이 꽃을 잘 가꾸는것은 혁명가들의 신성한 임무이다. 후대들을 어떻게 키우는가에 따라 혁명의 장래가 결정된다. 혁명은 한 세대에 끝나는것이 아니라 여러대를 두고 완성되게 된다. 오늘은 우리가 혁명을 담당한 주인으로 되고있지만 래일은 저 애들이 자라서 혁명을 떠메고나가는 주력군으로 될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선혁명에 끝까지 충실하기 위해서는 혁명의 피줄기를 이어갈 후대를 튼튼히 키워야 한다. 더구나 저애들은 우리의 전우들이 남기고 간 유자녀들이 아닌가. 우리는 그 전우들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도 저 아이들을 아끼고 따뜻이 돌봐주어야 한다.…
그때 마안산에서 하신 장군님의 말씀을 전해듣고 크나큰 충격에 겨워 마련하신것이 바로 이 가지색수첩이였다.
그날부터 그이께서는 이 수첩을 어느 하루도 품에서 떼놓으신적이 없으시였고 날을 따라 수첩에는 더 많은 동지들의 이름이 적혀지게 되였다.
해방된 조국땅에 와서 그 수첩에는 그이께서만이 알수 있는 표식이 새로 그려지게 되였다. 그것은 찾아낸 전우들의 자녀들과 아직 찾지 못한 유자녀들에 대한 표식이였다. 찾지 못한 유자녀들이 더 많았다. 그래서 더더욱 이 수첩을 손에서 놓을수 없고 그래서 더더욱 이 수첩을 자주 펼치군 하신다.
오중흡동지에게는 딸이 있었는데… 정일권동무에게도 자식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행처도 이름도 생사여부도 모르는 유자녀들은 또 얼마이랴…
추억은 바닥없이 깊어만 간다. 생각은 천갈래, 만갈래로 뻗어간다. 마음은 천근만근으로 무거워만진다. 자신의 심정이 이러할진대 장군님의 심중은 그 얼마나 괴롭고 아프시랴. 오죽하면 장군님께서 벌써 몇차례씩이나 학원터전을 확정하시려 만경대에 나가셨으랴.
(얘들아! 너희들은 지금 다들 어디에 가있느냐? 도대체 살았느냐 죽었느냐? 살아있다면 왜 해방된 조국땅에, 장군님앞에 제발로 찾아와 내가 누구의 자식이라고 선뜻 나서지들 못하느냐.)
김정숙동지께서는 끝내 자리에서 일어서시였다. 답답해오는 가슴을 달래려 방문을 열고 뜨락으로 나서시였다. 마당가의 한그루 느티나무가 날려오는 미풍에 연록빛잎사귀들을 소리없이 흔들고있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천천히 그곳으로 다가가시였다. 굵은 나무가지에 한손을 얹고 그 우듬지를 향해 눈길을 드시였다. 흔들리는 잎새사이로 봄날의 해빛이 금빛채광마냥 언뜻언뜻 쏟아져내린다. 마치 숨박곡질하는 귀여운 장난꾸러기들처럼 요리조리 나무잎에 숨었다가는 어느결에 벌써 재빨리 잎새사이를 헤집고 나타나 눈이 시려웁도록 반짝반짝 웃는다.
불쑥 이름할수 없는 그 어떤 따뜻한 정이 온몸을 휩싸안았다.
어쩐지 하느적이는 나무잎 하나하나가 가지색수첩에 적혀있는 그 애들의 얼굴처럼 생각되였고 나무잎사이로 잠간잠간 부서져내리는 따뜻한 해빛은 그 애들의 사랑스런 웃음발처럼 느껴졌다.
아, 정녕 한나무가지에 생을 얹고사는 저 무수한 잎사귀들처럼 그 애들모두가 이 뜨락에서 그렇듯 다정하게, 그렇듯 아름답게, 그렇듯 창창하게 자랄수만 있다면! 그럴수만 있다면 이 몸이 그대로 그 햇잎들을 모두 품어안고 자래우는 줄기가 되련만 아니, 뿌리가 되련만…
김정숙동지께서는 잊지 못할 타향의 봄날이 생각키우시였다. 비겁분자들이 적들의 품으로 달아나고있을 때 김일성장군님께서는 결코 한두대에 끝나지 않을 혁명의 장구한 앞날을 내다보시였다.
뜻깊은 사진을 남기신 그날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말씀하시였다.
《우리 아버님께서 지으신 〈남산의 푸른 소나무〉라는 글이 생각나오. 이 한몸 싸우다 쓰러지며는 대를 이어 싸워서라도 금수강산 삼천리에 반드시 조국광복의 새봄을 안아오시겠다는 아버님의 그 결심을 다시금 새겨안게 되는 준엄한 나날이요. 미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결코 신념이 있을수 없는것이요.》
장군님께서는 이것으로 한생의 언약을 대신하시였고 그 다음해 소백수 백두밀영귀틀집에서는 마침내 백두광명성이 탄생하였다.
조선에 대통운이 텄다고, 혁명의 미래는 창창하다고 울고웃으며 밀영주변의 나무들에 구호들을 새기던 전우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였다.
미래!…
김정숙동지께서는 끝없이 갈마드는 생각에 잠기여 오래도록 느티나무가지우를 바라보시였다.
아마도 대문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만 아니였더라면 그이께서는 도저히 그 상념에서 깨여나지 못하셨을는지도 모른다.
《제발 부탁이예요. 꼭 좀 만나뵙게 해주세요, 예?》
《야, 지금은 정말 안돼요. 어쩌다 겨우 쉬실 시간을 내셨는데… 후에 다시 오면 안되겠어요?》
저으기 당돌하면서도 아직 애티가 느껴지는 저 목소리는 분명 영실이의것이다. 그런데 북관지방의 억양이 다분히 풍기는 저 녀자목소리는 누구의것인가.
그이께서는 저도 모르게 귀를 강구시였다.
《우린 저… 무산에서 왔어요. 1년나마 벼르고벼르다가 찾아왔답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더 듣고계실수만 없어 대문가로 다가가 문을 여시였다. 문가에서 조금 떨어져 영실이와 마주선 처녀의 모습이 언뜻 비껴들었다. 그옆에는 열서너살정도 나보이는 총각애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영실이, 그렇게 말하면 되나?!》
김정숙동지께서는 영실이를 가볍게 나무라고나서 다소 긴장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들에게로 눈길을 돌리시였다.
《머나먼 북변땅에서 불원천리하고 찾아왔는데 이렇게 문밖에 세워두어서 정말 안됐어요. 자, 어서 들어들 와요.》
김정숙동지의 말씀은 더없이 친절하였으나 그들은 여전히 긴장감을 풀지 못하고 조심조심 대문안으로 들어섰다.
김영실이 뒤따라들어서며 재빨리 그이께 귀속말로 속살거렸다.
《저 녀잔 소학교교원인데 꼭 형님을 만나뵙겠대요. 그리고 저 사내앤 그의 동생이래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좀 데면데면한 성격인 그가 당사자들을 옆에 두고 이런 말을 하는것이 민망스러워 얼른 그의 등을 떠미시였다.
《됐어, 영실인 어서 들어가 공부나 하렴.》
김영실은 입술을 쫑깃해보이고나서 집안으로가 아니라 문밖으로 달려나갔다. 지난해 문맹퇴치는 겨우 하였지만 아직 공부에 그닥 재미를 붙이지 못하고있는 그다. 장군님께서는 그래서 그를 공부시키자고 댁으로 데려오셨던것이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그를 불러세울가 하다가 그저 빙그레 웃음을 짓고마시였다. 그리고는 영실이가 교원이라고 귀띔해준 처녀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시였다. 나이는 한 스물두세살가량 되였을가. 닭알형의 맑고 부드러운 얼굴은 까만 치마저고리와의 대조속에 옥같이 유난스러웠고 흰 동정깃을 살풋이 내리덮은 흑단같은 중발머리는 날씬한 몸매와 조화를 이루었다.
《나를 만나러 왔다지요?》
《?…》
처녀의 온몸이 굳어졌다. 이어 그의 눈동자에 불길같은것이 확 지펴졌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 불길은 스르르 사그라져버렸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처녀의 눈빛에서 그 짧은 한순간에 교차되는 놀라움, 선망 그리고 죄스러움의 감정을 느끼시며 서둘러 말씀을 이으시였다.
《자, 우리 방안에 들어가서 이야길 하자요. 어서요.》
그러나 처녀는 못박힌듯 그냥 서있었다. 그의 크고 아름다운 두눈에 가랑가랑 눈물이 차올랐다.
《아니, 왜 그래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녀사님! 사실 전, 우리들은 녀사님께 죄를 지은 몸입니다. 방안에는커녕 감히 녀사님을 만나뵈올 면목도 없는 죄인들입니다.》
《무슨 말인지… 도대체 리해할수가 없군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정말이지 영문을 알수 없으시였다.
전혀 초면인 그들에게서 밑도 끝도 없이 죄인임을 자인하는 고백을 듣는것이 놀라우실뿐이였다.
이때 그 처녀가 무엇인가를 손에 들고 정히 내여밀었다.
만년필이였다. 의아한 심정으로 그 만년필을 받아쥐던 김정숙동지께서는 부지중 《아!―》하고 가볍게 놀라시였다.
오래동안 자신께서 쓰던 그 물건을 이내 알아보셨던것이다.
《이 만년필이 어떻게 동무에게?…》
이렇게 물으시던 그이께서는 문득 뇌리를 치는 생각이 있어 처녀의 곁에 머리를 푹 수그리고 서있는 사내애에게로 눈길을 돌리시였다.
《아니, 그럼 이 애가?…》
그이께서 비로소 사연을 짐작하셨다는것을 가늠했던지 처녀는 자기 동생에게 엄하게 일렀다.
《백산아, 녀사님께 무릎을 꿇어라. 어서!》
백산이라고 불리운 사내애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어린아이의 뜻밖의 행동에 당황해지신 김정숙동지께서는 황황히 그의 팔을 잡아일으키셨다. 그러나 사내애의 고집도 보통이 아니여서 그냥 무릎을 땅에 꿇고 일어설념을 안했다.
《어서 일어나거라. 이러면 못쓴다. 그때 이미 널 용서하질 않았니?! 이 만년필을 전해준 아저씨가 너에게 그 말을 안해주더냐?》
김정숙동지께서는 소년의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시였다.
어쩐지 그 어린 가슴에 멍이 든것 같아 가슴이 아프시였다.
《차영진동지에게서 녀사님께서 무엇때문에 이 만년필을 보내셨는지 그 사연을 다 들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다름아닌 김정숙녀사님께 지은 죄야 어떻게…》
처녀는 끝내 《흑.》 하고 눈물을 쏟았다.
사연인즉 이러하였다. 1945년 11월 조국에 개선하시여 근 한달동안 함경북도일대에서 사업하시던 김정숙동지께서는 위대한 장군님의 부르심을 받고 렬차로 평양을 향해 떠나시였다. 조국이 갓 해방된 때여서 변변한 려객렬차도 부족하였고 렬차운행도 정해진 시간표가 따로 없었다.
12월의 그 추위속에서 난로 하나를 놓고 여드레동안이나 화차방통을 타고 고생고생하며 오다나니 모두들 지칠대로 지쳤다. 사달은 평양역에 다 이르러서 일어났다. 혼잡속에서 몇개의 물건이 없어졌는데 그속에는 김정숙동지의 배낭도 들어있었던것이다. 사실 배낭속에는 군용밥통을 비롯한 일부 생활용품밖에 없는지라 크게 아까울건 없었지만 문제는 바로 그 가지색수첩이였다. 그게 어떤 수첩인가.
그 귀중한걸 잃다니…
김정숙동지께서는 너무도 안타깝고 괴로우시여 며칠밤을 잠들지 못하시였다. 행여나 하여 그 주변을 샅샅이 훑고 또 훑었다. 혹시나 하여 화물역 사람들을 만나 여러차례 알아보았다.
《아니, 아주머니 또 왔소? 아, 그까짓 배낭 하나가 뭐라구 매일 와서 이 성화요?》
늙스그레한 화물역원은 버럭 짜증을 냈다. 김정숙동지이심을 알아볼수 없었던 그로서는 별치 않은 물건을 찾겠다고 애를 쓰는 평범한 녀인으로밖에 달리 생각지 않았던것이다. 그옆에 있던 조수인듯 한 젊은 청년도 한마디했다.
《아, 요즘에야 구석구석에 소매치기, 홀치기군들이 수두룩한데 배낭 같은걸 어디서 찾겠어요. 차라리 그 불쌍한 애녀석들이 쓰라고 내버리는게 낫지. 혹시 그 배낭에 황금이라도 들어있는건 아니겠지요?!》
《그 배낭엔 황금보다 더 귀중한것이 들어있어요.》
이것은 그이의 진심이였다. 청년의 두눈이 둥그래졌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 보통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가 꼭 찾겠노라고 나섰다. 사실 그는 역주변에서 방랑하며 좀도적질로 살아가는 아이들을 거의나 다 알고있었던것이다. 그 청년은 하루만에 끝내 배낭을 찾아냈다. 그리고는 싱글벙글 웃으며 배낭을 김정숙동지앞에 내놓았다.
《이 배낭을 훔친 녀석은 무산에서 집을 뛰쳐나온 앤데 여간 밸통머리가 세지 않더군요. 자긴 뭐 훔친게 아니라 철길에서 얻었다나요. 내 그래서 뒤덜밀 끌고 올가하다가 그만두었수다. 하긴 뭐 그녀석만을 탓할것도 아니지요. 먹고 살자니 그 어린것들이 별다른 수단이 있겠습니까.》
그 청년은 그저 보통아주머니로 생각했던 녀인이 다름아닌 항일의 전설적녀장군 김정숙동지이심을 알게 되였다. 그것을 알고는 본래의 태도를 버리고 당장 가서 그 도적놈을 붙들어오겠다고 펄펄 뛰였다.
알고 그랬건 모르고 그랬건 그런 놈은 리유여하를 불문하고 용서할수 없다는것이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그때 그를 만류하시며 그 소년에게는 죄가 없다, 그것은 일제식민지통치하에서 살래야 살수 없는 막바지인생길에 내몰린 노예살이의 후과이다, 나라가 해방되였으니 이제 멀지 않아 그런 애들도 마음껏 공부하며 행복하게 살 날이 꼭 온다고 하나하나 일깨워주시였다.
그러시면서도 자신께서 쓰시던 만년필과 얼마간의 돈을 그의 손에 쥐여주면서 그 소년에게 주라고, 꼭 집으로 돌아가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학생이 되길 바란다고 전해주기를 부탁하시였다.
김정숙동지의 그날의 그 당부를 안고 찾아갔던 그 청년이 화물역 조수였던 차영진이였다. 그는 지금 중앙보안간부학교 학생이다.
그러니 그때 차영진이 말하던, 자신께서 보내신 그 만년필을 받았던 소년이 다름아닌 지금의 이 백산인것이다.
참, 사람의 인연이란…
김정숙동지께서는 다시한번 그들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시였다.
백산이는 이마가 도도록한게 옹골차게 생겼다.
차영진의 말처럼 여간 밸통있고 자존심이 강할것 같지 않았다.
처녀는 소학교 교원이라고 했지. 보기에도 진중한 처녀라는것이 알린다. 교양있는 기품과 무게있는 지성미가 느껴진다. 마음씨는 또 얼마나 결곡한가.
1년도 지난 오늘까지 어린 동생의 잘못을 두고 괴로와하고 수천리 머나먼 길을 떠나 이렇게 죄를 자청하러 찾아온것만 보아도 그의 깨끗한 성정과 인간미를 알수 있다.
정말 겉도 속도 다 같이 아름다운 처녀다. 그런데 그 눈빛에는 어딘가 모르게 고독이 비껴있다.
고뇌, 고심… 어쩐지 그 아름다운 눈에는 어울리지 않아.
김정숙동지께서는 심중에 파고드는 이런 생각을 애써 털어버리며 웃음어린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자, 우리 서로 알고지내자요. 동무의 이름은 뭐예요?》
처녀는 고개를 솔곳이 숙이며 나직이 대답하였다.
《김춘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