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편 달 비
제 3 장
3
방영순은 국수집에 들어온 첫날부터 누가 일자리를 뗄가봐 겁이라도 나는듯 물도 긷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설겆이도 하고… 앉아볼새없이 팽이처럼 돌아갔다. 늘 이마나 볼에 묻은 검댕이가 지워질 날이 없이 바쁘게 보냈다.
《복덩이야. 복덩이가 굴러들었어.》
이모는 좋아서 노상 벙글거렸다.
《선화야, 봐라. 녀자란 저렇게 부지런해야 돼. 저 미영이같은건 영순의 발뒤축에도 못 가.》
선화도 늘 미소를 머금고 잽싸게 일을 해제끼면서도 일한 뒤가 알뜰한 그 처녀가 마음에 들었다.
미영이는 이따금 곱게 차리고 시내구경을 나가고 (물론 국수물이나 꾸미만드는데 필요한 조미료 같은것을 사러 나가지만) 선화에게도 친절하게 때없이 말을 건네보군 하는데 선화에게는 그런 미영이보다 촌티가 나도 부지런하고 마음 착하면서도 가난한 영순이가 더 마음에 들었다. 하루에도 수십독이나 쓰는 물을 우물에서 길어온다는것만도 어디 쉬운 일인가.
선화는 방영순에게 동정이 갔지만 말은 건네보지도 않았다. 가슴에 상처입은 그로서는 모든것이 다 귀찮았다.
때로는 이렇게 살아서야 무슨 재미가 있는가 하는 허무한 생각까지 들군 하였다.
한때는 앞으로 녀류시인이 되겠노라고 동서방의 이름난 시인들의 시들도 외우고 창작을 해보느라 밤을 새우며 시상을 더듬기도 하던 선화였지만 이제는 사는것마저도 귀찮아졌다. 사랑이 없는 삶이란 꽃 없는 화분이요, 물이 말라버린 강이였다. 살아가는것자체가 이리도 고통스러울진대 살아서는 무엇하겠는가.
귀전에는 때없이 《유산자》, 《착취계급》, 《타도대상》이란 말이 마른 우뢰소리처럼 꾸르릉 꾸르릉 울리군 했다.
나는 왜 유산자의 집에서 태여났을가.
아버지는 왜 한때는 의병투쟁까지 했다면서 《착취계급》이 되였을가.
우리 집은 정말 《타도대상》인가.
리해가 되지 않았다. 그처럼 인자하고 살뜰하고 정다운 아버지, 어머니이다. 그런 아버지, 어머니가 《타도대상》이라니 이 얼마나 끔찍한일인가.
어느 책에선가 저울의 한쪽 접시에는 전세계를 놓고 다른 한쪽 접시에는 나의 어머니를 놓고 달아본다면 아마 전세계의 무게가 훨씬 가벼울것이라고 썼던것을 본 기억이 있다.
선화에게는 이 세상 전부를 준대도 아버지, 어머니 어느 한분도 그와 바꾸지 않을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런 험터구를 씌우는가.
철민씨는 정녕 그들편에 서야 할 사람인가.
그럼 나는 영영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잠이 오지 않는다. 그럴 때면 언제인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떠오른다.
눈앞에 선히 그려진다.
…눈, 눈… 함박눈이 내리는 아침이다.
마당에서는 꽁지를 동그랗게 말아올린 깜장강아지가 눈을 맞으며 좋아라 깡충깡충 뛰놀고있다.
하지만 완자창을 한 방안에서는 비분강개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나온다.
《아, 우리 8도 동포들아, 이 나라를 어찌 저 원쑤들에게 내맡기여 암흑의 생지옥으로 되게 하겠는가.…》
아래목에 올방자를 틀고앉은 40대의 장년이 울분에 찬 목소리로 《8도의 여러 고을 인민들에게 호소한다.》라는 격문을 읽고있었다. 웃목에는 아들인듯싶은 젊은 두 총각이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그들이 바로 마을에서 《과수원집》이라고 부르는 이 집의 아버지와 아들들이였다.
아들들은 열일곱, 열다섯 한창나이 혈기왕성한 장부들이였다.
지금 온 나라 곳곳에서는 왜놈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의병들을 일으키고 있었다. 의병투쟁은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민비학살을 계기로 더욱 확대되였다. 그런 속에 위정척사론자의 대표적인물인 류린석이 충청도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격문을 발표한것이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의분으로 하여 떨리고있었다.
《…오랑캐군사들에게 백성이 살해되는것을 어찌 앉아서 보겠느냐. 하여 감히 이처럼 먼저 의병을 일으키고 8도에 그 뜻을 포고한다.…》
어질게 생긴 녀인이 부엌에서 가슴을 조이며 남편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격문을 다 읽은 남편이 분노한 어조로 말했다.
《격문에도 있는것처럼 저 불구대천의 원쑤 왜적들은 지금 이 땅을 암흑의 생지옥으로 만들고있다. 백주에 궁성에 뛰여들어 국모까지 살해하는 귀축같은 놈들이니 어찌 그냥 둘소냐. 이 땅에 태를 묻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라를 위해 〈죽을 사〉 이 한글자만을 지켜야 한다고 했거늘… 금수가 아닌 이상에야 어찌 피끓지 않겠느냐. 그러니 너희들은 이 길로 의병대로 떠나거라. 나도 인차 너희들을 따라가겠다.》
그렇게 씩씩하게 집을 나섰던 남편과 맏아들은 전장에서 피흘리며 쓰러져 돌아오지 못했다. 둘째도 의병대가 해산되기 전에 왜놈들의 산탄에 맞아 온몸이 만신창이 되여 담가에 실려왔다.
녀인은 억이 막혔다. 하늘같이 믿고살던 남편과 생떼같은 맏아들을 잃고 둘째마저 이렇게 되였으니 말그대로 하늘이 통채로 무너져내린듯 눈앞이 캄캄해졌다. 녀인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정신없이 뛰여다녔다. 의원에게도 보이고 무당과 점쟁이까지 찾아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관청에서 의병에 나갔던 사람들을 잡아들이라는 령이 내렸다는 소문을 듣게 되였다.
녀인은 친척들의 도움으로 가산을 정리해가지고 황황히 솔가도주하였다.
가다가다 눌러앉은것이 옥계동이였다. 조선에서는 《의병가담자》꼬리가 붙어 살수가 없었던것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고 피를 흘린 집안을 바로 나라에서 멸족시키겠다고 한다. 억이 막 막혔다. 나라가 종내 왜놈들에게 통채로 먹히우고말았다.
녀인은 아들을 살리려고 필사의 노력을 다 경주했다. 마침 마음 어진 의원을 만나 목숨은 건질수가 있었다.
녀인은 조선으로 나가 과수원을 판 돈을 가져왔다. 친정집에서 보태준 돈까지 합쳐 자그마한 정미소를 샀다. 아들은 늘 골골 앓았다. 그러다나니 서른이 넘어서야 장가를 들수 있었다.
그들이 바로 정선화의 할머니와 아버지였다.
그처럼 이악하게 아들을 살리고 가산을 일떠세운 할머니는 선화가 세살났을 때 그만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말았다.
할머니는 운명하면서 이런 유언을 남겼다.
《선화 애비야. 애애비도 당해봤지만 이 애 할아버지와 큰아버지는 나라를 지키겠다구 나섰다가 오히려 목숨만 잃었다. 이젠 나라도 잃구… 난 그저 선화 애비가 나라는 못 지켰어두 이 정씨집안만이라도 지켜주기를 바란다. 이 한 집안만이라도…》
하지만 아버지는 부상당한 후과로 너무도 자주 자리에 눕게 되였다. 대신 정씨집안의 짐은 어머니에게 고스란히 짊어지워졌다. 결국은 어머니가 정미소주인이 된셈이였다.
어머니도 할머니 못지 않게 이악했다. 끝내 정미소를 지켜냈고 형제들을 도와 생활밑천도 잡아주고 막내동생을 위해서는 룡정에 국수집을 차려놓기까지 했다. 그러다 병을 만나 때없이 앓기는 해도 자리에 누웠다가도 이를 사려물고 일어서군 하였다. 어머니가 있어 이 딸도 중학공부까지 할수 있었고 두 이모네들도 먹고 살수 있는 생활터전을 잡을수 있게 되였다. 그것은 할머니와 아버지와 어머니의 뼈를 깎아내는 고심참담한 노력의 열매였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타도대상》이 될수 있단 말인가.
이런 아버지, 어머니가 어떻게 《착취계급》이 될수 있단 말인가.
혁명이란 그렇게도 가혹한것인가.
정선화는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리해할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해볼 동무도 없으니 괴롭기만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이렇게 무위도식하기만 할수는 없지 않는가.
저 방영순이처럼 일감이 많다면 차라리 이처럼 생활이 허무하지는 않겠는데 하는 생각까지 들어 선화는 괴롭게 한숨을 몰아쉬였다.
×
어느날 새벽 세면수건을 어깨에 걸치고 밖으로 나오던 선화는 마당을 쓸고있는 영순에게 다가가며 동정어린 어조로 이렇게 권했다.
《이젠 좀 쉬고 해요, 새벽에 물을 긷기도 힘들텐데.…》
영순은 량볼에 보조개를 띠우며 겸양의 소리를 했다.
《고마와요. 하지만… 이젠 습관이 돼서 괜찮아요.》
마당을 쓸던 그가 갑자기 생각난듯 허리를 펴고 선화를 돌아보았다.
《주인마님의 조카이지요?》
《예, 정선화라고 해요.》
《난 영순이라고 해요, 방영순.》
선화는 어쩐지 그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일이 무척 힘들지요?》
《괜찮아요. 그런데… 한가지 묻고싶은게 있어요.》
선화는 의아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게 뭔데요?》
《여기 방아간이 어디쯤에 있어요?》
《저 강건너에 있는데… 헌데 그건 왜 물어요?》
《방아를 찧어왔으면 해서…》
《왜… 여기에 가루를 팔러오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제분소에 가서 가루를 봏아와도 되구…》
《사람들 말을 들으니 그건 비싸대요. 그걸 살게없이 저리 내가 방아간에 가서 가루를 봏아왔으면 해서…》
《그래요?》
《그러면 돈도 절약할것 같아서…》
《그렇게 하자면 힘들거예요.》
《힘든거야 뭐라나요. 난 여기 오기 전에 방아간에도 다녀봐서 일없어요. 주인마님께서 저를 받아들여 살아갈수 있게 해주었는데… 나도 조금이라도 리익이 되게 하고싶어서… 마님께 좀 여쭈어주세요.》
《아이참, 그런 걱정은 마세요.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팽이처럼 돌아가는데 그거면 밥값은 되고도 남아요. 우리 이모는 절대로 린색하지 않아요.
이제 보라요. 거기서 이제 달마다 얼마만큼 보수를 받게 되나…》
《그렇다면 더 일을 잘해야겠군요. 어쨌든 마님께 꼭 여쭈어주세요.》
《거기 생각이 정 그렇다면 내 말은 해보겠어요.》
《정말 고마와요.》
이모는 대뜸 찬성했다. 가루가 낟알보다 한배반이상이나 더 비싸기때문이였다.
그 방영순이가 바로 현당에서 파견한 리계순이였다.
방아간은 녀인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계순은 이렇게 주인집에도 리익을 주면서 사람들과 자유롭게 접촉할수 있는 기회를 만든것이다. 계순은 방아간에 가서도 네일내일 가리지 않고 성의껏 도와주어 사람들과 인차 친숙해졌고 국수집 《마님》에게까지 그에 대한 칭찬의 목소리들이 울려오게 하였다. 《마님》은 만족해하였다.
《여보, 그 잡부로 들어온 영순이란 처녀 있잖아요?》
앉은뱅이책상에 마주앉아 장부책을 놓고 수판알을 튕기던 이모부가 고개를 돌리고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이모를 돋보기너머로 쳐다보았다.
《왜 그러우?》
《그 처녀가 일 잘한다구 사람들이 다들 말합디다. 마음씨 곱구 부지런하구 일한 뒤가 깨끗하다구… 그 처녀를 국수배달시키는게 어떻수?》
이모부가 눈을 꺼벅거리며 고개를 기웃했다.
《글쎄… 꽤 해내겠나?…》
《할거예요, 그런 고운 처녀가 국수를 가져다주면 오히려 더 좋아할거우다. 주문이 더 많이 들어올수도 있지요.》
룡정에서 돈냥이나 있고 권세가 있는자들은 집안에 앉아서 국수를 주문해다 먹군 하는데 그 값이 또한 약차하다. 더우기 그 처녀는 공짜로력이나 같은것이다. 새물새물 웃는 얼굴은 또 얼마나 고운가?
국수배달부로서는 제격이다. 이모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건 당신 좋을대루 하구려.》
목판에 국수와 육수물을 따로따로 담아이고 하루에도 수십리걸음을 한다는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였다. 계순은 8월의 그 무더위속에서 온몸이 땀에 흠뻑 떠가지고서도 늘 총총걸음으로 시내를 누벼다녔다. 합법적으로 밖에 나다닐수 있는 이런 기회에 시간을 쟁취하여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봐야 하는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목판에 국수와 육수물, 꾸미그릇들을 담아이고 국수를 주문해온 우전국 국장의 집으로 바삐 걸어가던 계순은 앞에서 왜놈경찰의 자동차가 미친듯이 마주 달려오는 바람에 황황히 길옆으로 비껴섰다. 다행히도 목판은 떨구지 않았다.
안도의 숨을 호- 내쉬며 지나치는 자동차를 괘씸해서 흘낏 쏘아보던 계순은 갑자기 몸을 흠칫했다. 독사를 본듯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운전칸에 앉아 자기를 내다보는 안경낀 놈이 분명 남양평경찰분서 분서장 오가사하라놈이였던것이다. 오빠를 죽였다던 그놈이였다. 먼저번에 파견되여왔던 박파를 죽인 놈도 저놈이였다. 계순이가 기어이 복수하고말리라 벼르고 또 벼르던 놈… 자기도 모르게 머리우에서 목판이 미끄러지고 국수며 육수물이며 꾸미그릇들이 포석우에 떨어져내렸다. 왱가당 쨍강 그릇들이 포석에 부딪쳐 단번에 박산이 났다. 그러나 계순의 황황 타번지는 눈길은 깨여진 그릇들이 아니라 먼지를 일쿠며 달려가는 자동차만 쏘아보고있었다. 심장이 화득화득 뛰였다.
(저놈을 어떻게 하면 복수할수 있을가. 저 원쑤놈을…)
계순은 치를 떨었다. 깨여진 그릇들을 무의식적으로 목판에 주어담으면서도 그 생각밖에 없었다. 가슴이 활랑거려 좀처럼 진정할수가 없었다.
군도에 맞아 피가 흘러내리는 얼굴, 총에 맞아 쓰러지면서도 나라를 독립하기 위해 떨쳐나서자고 불같이 호소하던 오빠, 타오르는 불길, 불길…
너털웃음을 치는 오가사하라… 기절해서 쓰러진 어머니…
열두시를 알리는 고동소리가 음울히 울려퍼졌지만 계순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강가에 나가 자그마한 돌우에 한정없이 걸터앉아있었다. 소리치며 흘러가는 강물만 이윽토록 쏘아보고있었다.
(내 어떻게 하든 기어이 오빠의 원쑤를 갚을테다, 기어이…)
계순은 두주먹을 꽉 부르쥐였다. 목판이 손에 꼭 잡혔다. 무심히 목판을 내려다보던 계순은 그제야 정신이 펄쩍 들었다.
(아니, 내가 왜 이러고있는가?)
계순은 자리에서 뛰쳐일어났다.
계순은 황황히 국수집으로 달려왔다. 국수는 이미 다 나간 뒤였다. 계순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때 우전국장네 집에서는 바로 선화의 이모부가 국장과 마주앉아 바둑을 두고있었다.
《여보, 점심고동소리가 났는데 왜 아직 안 올가요, 내가 가보고 올가요?》
국장의 안해가 바둑을 두는 제 남편에게 들어와 소곤거렸다.
《그만두시우, 내가 오늘 여기서 함께 점심을 하겠다고 했으니까 틀림없이 옵니다. 새로 들어온 우리 배달원체네가 여간 바지런하지 않습네다.》
선화의 이모부가 흰바둑알을 놓으며 자랑하듯 안심시켰다.
《조금만 더 기다립시다. 틀림없이 온다니까요.》
허지만 바둑을 세판씩이나 두도록 계순은 오지 않았다.
눈이 까매서 기다리던 선화 이모부는 성이 독같이 나서 국수집으로 달려왔다.
그때에야 국수집에서는 우전국장의 집으로 가져갈 국수를 한창 누르고 있었다. 김이 뽀얗게 서린 주방칸에 들어온 그는 발까지 굴러가며 노발대발했다. 그 욕은 주인《마님》에게까지 번져졌다.
《당신은 잘한다 잘한다 칭찬만 하더니 이 무슨 망신이요? 황아장사 망신은 고불통이 시킨다더니… 당장 다른 일을 시키라구, 주방에서 잡부노릇이나 시켜.》
계순이 조심스레 용서를 빌었으나 사연을 알리가 없는 그는 듣지도 않고 문을 쾅 소리나게 닫으며 나가버렸다.
또다시 주방칸에서의 팽이돌이가 시작되였다. 물긷기, 청소, 빨래, 그릇닦기, 남새다듬기, 오물버리기…
계순은 이를 사려물고 땀을 빨빨 흘리며 일했다. 누구를 원망할것도 없었다. 다 자기탓이였다. 이 얼마나 엄중한 과오를 저질렀는가. 그 오가사하라 한놈이 뭐라고… 나에겐 중대한 혁명임무가 있지 않는가.
이제 겨우 부녀회와 소년선봉대를 복구하기 시작한 계순이였다. 왜놈들의 검거선풍으로 파괴된 당조직선도 하루빨리 찾아 복구해놓아야 했다. 그런데 합법적으로 나다닐수 있는 국수배달원자리를 떼웠으니 그야말로 돌이킬수 없는 과오가 아닌가.
계순은 랭정히, 사정없이 자기를 타매했다. 힘들어도 쉴념을 않고 무섭게 자기를 채찍질했다. 이것이야말로 죽음으로써도 보상할수 없는 과오였다.
조직을 복구하는것이 하루라도 늦어지면 그만큼 원쑤들과의 싸움에서 빈공간이 생기게 되고 유격대나 유격근거지에 돌이킬수 없는 피해를 줄수 있는것이다. 이것을 어찌 그 오가사하라 한놈을 죽이고 살리고 하는 문제와 나란히 놓을수 있단 말인가. 그이가 이런 나를 보면 얼마나 실망할것인가. 믿고 이런 힘든 임무를 맡겨주었는데…
울고싶었다. 그러나 운다고 될 일도 아니였다.
계순은 오늘도 영업이 끝나자 목판을 들고 뒤뜨락으로 나갔다.
밤하늘에서는 얼레빗같은 반달이 어슴푸레한 빛을 뿌려주고있었다. 모기새끼들은 기다렸다는듯 앵앵하고 날아다녔다. 물어뜯을 기회를 엿보려는것이였다.
계순은 주방칸쪽 모서리에 가서 이미 모아놓았던 사발통만 한 둥그런 돌멩이 여섯개를 목판에 담았다. 조심히 머리우에 올려놓으니 돌이 목판우에서 데구루루 굴러서 앞으로 쏟아지려고 한다. 계순은 앞을 약간 들었다. 그러자 돌들이 이번에는 뒤쪽으로 데구루루 몰린다. 계순은 또 뒤쪽을 약간 들어 균형을 잡으며 조심히 무릎을 폈다. 머리우에서 돌들이 자꾸 이쪽으로 몰리고 저쪽으로 쏠리고 하면서 구르릉 구르릉 목판우를 굴러다니는 소리를 냈다. 머리가 통채로 지릉지릉 울린다.
이마며 볼이며 코등에 진땀이 뽀질뽀질 돋았다. 계순은 조심조심 발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가슴팍으로, 등골로 땀이 쭈르륵 쭈르륵 흘러내린다. 그래도 걷고 또 걸었다. 벌써 닷새째 이렇게 목판에 돌을 담아이고 걷는련습을 해오는 계순이였다. 처음엔 세발자국안팎에 돌이 와르르 쏟아져내렸는데 오늘은 뒤마당을 세바퀴나 돌았다. 이제는 다리맥이 매시시한게 막 주저앉고만싶다. 계순은 입술을 피나게 깨물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왜놈들이 유격근거지를 《토벌》하겠다고 어랑촌으로 출동하고있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런데 나는 이렇게 국수집주방칸에 매여있으니 전혀 그 동태를 알아낼수가 없다. 나의 과오때문에 숱한 근거지인민들이 피해를 입을수 있다. 그러니 어떻게 힘들다고 쉴수가 있는가. 난 이미 그런 권리를 상실한 녀자다. 기어이 다시 조직들과 련계를 취할수 있는 일자리를 얻어야 한다.
계순은 이번엔 외나무다리를 건느는 련습을 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돌다리도 건너보고…
국수집뒤뜨락에는 기둥감으로 쓸 통나무를 대여섯통 쌓아놓은것이 있었다. 계순은 그 통나무를 굴려 내리워놓고 넙적넙적한 돌들도 주어다가 그앞에 드문드문 놓았다. 외나무다리와 돌다리를 만들어놓은셈이다.
안깐힘을 쓰며 돌을 담은 목판을 이고 《외나무다리》우에 올라섰다. 순간 몸이 휘뚤하며 왼쪽으로 쏠렸다. 그바람에 목판우의 돌들이 걷잡을새없이 와르륵 땅에 떨어져내렸다. 계순은 또다시 돌을 담아이고 조심히 통나무우에 올라섰다. 이번엔 세발자국도 못 가 몸이 오른쪽으로 쏠렸다. 황급히 왼쪽으로 몸을 가누려는데 이미 쏠리기 시작한 목판우의 돌들을 멈춰세울 재간이 없었다. 돌들은 와르륵 오른쪽으로 떨어져 떼굴떼굴 굴러갔다.
계순은 아래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야속한 눈길로 굴러가는 돌을 쳐다보다가 또다시 목판을 내려놓았다. 돌들을 날라다 목판에 담았다. 그러는 사이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모기새끼들은 사람이 가만 앉아있기를 기다리다가는 굶어죽겠다고 판단하였는지 계순에게 기를 쓰고 달라붙어 볼이며 이마며 목이며 손등이며를 사정없이 쏘아댔다.
얼레빗같은 반달은 모기와 싸우고 돌과 싸우고 《외나무다리》와 싸우는 녀자를 이상한듯이 계속 내려다보고있었다.
밤은 벌써 자정을 넘어서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