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편 달 비
제 2 장
-《영생하는 삶》 중에서-
2
계순은 자기네 집에서 소작을 부치는 수수밭둔덕에 올라서서야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새벽어스름이 비낀 삽짝문밖에는 어머니가 아직도 서있는지 허여스름한 형체가 보였다.
계순은 별안간 눈굽이 시큰해와서 눈을 슴벅거렸다. 왜서인지 이제 다시는 집에 올것 같지 못한 예감이 드는것이 이상했다.
하긴 당분간은 오지 못할것이다.
화룡현소재지인 대립자로부터 15리도 되나마나한 곳에 있는 이 금곡땅엔 독립군출신들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화룡현당위원회가 있다는것을 낌새챘는지 왜놈경찰들과 특무들이 무시로 기여들군 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리하여 현당위원회와 공청지부를 앞으로 유격근거지로 될 어랑촌쪽으로 옮기기로 한것이다. 수리바위굴에 차려놓았던 병기창(무기수리소)은 이미 어랑촌으로 옮겨갔다.
《현당결정으로 우리 공청에서도 사람들을 보내기로 했다. 계순이 네가 먼저 떠나야겠다. 현당에서는 부녀회사업과 아동단사업을 맡아볼 사람을 보내라는데 우리 공청에서는 너를 적임자로 보았다. 현당 조직부장동지가 래일 떠나겠다는데 따라가거라. 당분간은 여기 오지 못할테니 가는 길에 얼핏 집에 들렸다가거라.》
금곡지구 공청책임자인 오빠 리지춘의 말이였다.
오빠네도 여기 일을 마무리하는 차제로 자리를 옮기겠다고 했다.…
(엄마가 또 마음을 못놓고 살겠구나.)
계순은 어머니의 심정을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 한생을 고생이란 고생은 다하며 살아온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이 딸이 빨리 시집을 가서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살기만을 바라고있는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는 살수없는 이 딸이니 결국 어머니의 그 소원은 언제까지건 소원으로만 남아있게 되는것이 아닐가.
계순은 입술을 옥물며 개울가로 내려섰다. 풀잎들에 내린 새벽이슬이 치마자락을 함뿍 적셨다. 그래도 계순은 총총히 걸었다.
해란강상류로 흘러드는 이 개울을 따라 한참 가면 수리바위굴이 있다. 수리개들이 아침이면 바위우의 창공을 유유히 날아예고 밤이면 바위틈마다 찾아든다고 하여 수리바위라고 부르는 이 날벼랑중턱에 자연동굴들이 있고 거기에 병기창이 자리잡았던 굴이 있는데 바로 그곳에서 김일환이가 기다리겠다고 한것이다.
어머니가 자꾸 무엇인가 알고싶어하는 사람, 만나기만 하면 자연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홧홧 달아오르게 되는 사람.…
언제부터였던가.
기억도 생생하다. 그것은 분명 여름날의 그밤부터였다.
그날 밤 이웃마을에 공청사업때문에 갔다가 늦게야 수리바위굴로 돌아온 계순은 머리를 감으려고 개울가로 내려갔었다.
검푸른 하늘에서는 얼레빗같은 상현달이 뭉게뭉게 떠있는 구름장들사이로 부지런히 헤염쳐가고있었다.
늘 머리를 감던 찔레덩굴뒤에 가서 아무 생각없이 머리태를 풀려던 계순은 문득 저아래쪽에서 잘박거리는 물소리를 들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들으니 빨래를 하는 소리였다.
(누가 이밤에 빨래를 하러 나왔을가?)
언뜻 병기창에서 일하는 손원금의 누이동생 손원숙이가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수도 있었다. 오빠와 함께 병기창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옷을 빨아주러 나왔을것이다. 병기창에서는 땀을 흘리며 숯을 다루다나니 옷이 하루가 멀다하게 덞어져 원숙이가 자주 올라와 빨래를 해주군 했었다.
갑자기 주위가 어둑어둑해져 고개를 들어보니 상현달이 앞을 가로막은 먹장구름속으로 막 자맥질해들어가고있었다.
계순의 입가에 장난군같은 미소가 새물새물 피여올랐다. 원숙이를 깜짝 놀래워주고싶었다.
계순은 살금살금 원숙이쪽으로 걸어갔다. 마침내 달이 구름속으로 쑥 들어가버린듯 사위가 먹물을 풀어놓은것처럼 캄캄해졌다.
계순은 아래입술을 감쳐물고 어쩔가 잠시 생각하다가 이 깊은 밤에 너무 놀래우면 안될것 같아 그저 자그마한 돌멩이를 집어 그의 앞쪽에 던졌다.
《참방.》
그 순간에 달이 빠금히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새물거리며 원숙이에게 다가가던 계순은 그가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오히려 제가 깜짝 놀랐다.
일어선 사람은 몸매 작은 원숙이가 아니라 키가 훤칠한 남자였던것이다.
《게 누구요?》
총알같이 날아오는 날카로운 목소리.
《어마나!》
계순은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우며 그 자리에 폴싹 주저앉았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는 뜻밖에도 현당 조직부장 김일환이였다. 엄하기 그지없고 칼날같은 성격을 가진 간부여서 여느때는 인사를 하는것조차 어렵던 사람이였다.
마침내 주위가 환해졌다. 하얀 달이 깜박 속았지 하고 해시시 웃는것만 같았다. 계순은 그 달이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그게 계순동무가 아니요?》
계순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뚜지고 들어가고싶었다. 그는 울상이 되여 일어서며 떠듬떠듬 기여들어가는 소리를 했다.
《조직부장동지… 미안합니다.… 전… 원숙동무인줄 알구.…》
《허허허…》
김일환은 어이없는듯 껄껄 웃었다. 아마도 어쩔바를 몰라하는 계순의 옹색한 마음을 풀어주려고 그러는 모양이였다.
계순은 꾸밈이 없는 그 웃음소리를 듣자 한결 마음이 진정되는것을 느꼈다.
계순은 민망한 눈길로 김일환의 손에 들려있는 빨래감을 쳐다보았다. 한손에 뭉그려쥔 빨래감에서는 물이 주룩주룩 떨어지고있었다.
《아이, 그런데 부장동지가 어떻게 빨래까지.…》
《허, 이거 몰래 한다는게… 이렇게 들킬줄은 몰랐군. 제발 소문은 내지 마오.》
계순은 방긋 웃었다. 이 엄한 간부에게도 역시 이런 소박한 뒤생활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자기도 모르게 용기가 생겼다.
계순은 더운 침을 꼴깍 삼켰다. 얼른 그에게 다가가 무작정 손에 든것을 빼앗았다.
《이런건 우리 녀자들에게 맡기십시오.》
《뭐 잠간 하면 되겠는데… 남의 손까지 빌리겠소.》
계순은 수집은 미소를 지었다.
《아이참, 혁명동지가 뭐 남입니까.… 회의때랑… 늘 말씀하시면서두.…》
《허허허, 내 오늘 계순동무한테 한꼴 먹는구만.》
이럴 땐 조직부장도 무척 서글서글하고 순박해보였다. 운동선수들이 그렇다더니.… 이 조직부장은 한때 룡정일판에서 축구선수로 이름이 났었고 씨름도 판을 막았다고 했었다.
계순은 더욱 대담해졌다. 조직부장도 역시 상대해보니 이런 보통인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무랍이 없어졌다. 본래의 당돌하고 활발하고 명랑한 자기로 돌아왔다.
계순은 빨래를 물에 다시 헹구었다.
내물에 비꼈던 달그림자가 산산이 부서져나갔다.
계순은 빨래를 판돌우에 올려놓고 다시 비누칠을 하며 말했다.
《부장동지, 아주머니가 이걸 알면 우리를 얼마나 욕하겠습니까. 녀자들이 옆에 있으면서도 자기네 조직부장이 밤빨래까지 하게 한다고.…》
《허허허, 조직부장을 그렇게 생각해줄 녀성은 아직 없소. 계순동무가 처음이요.》
뒤에서 껄껄 웃으며 하는 소리에 놀라서 돌아보니 현당서기 최상동이 다가오고있었다. 아마 급한 일이 생겨 조직부장을 찾아나오던 길인듯 싶었다.
《어마, 난 그런줄도 모르고… 호호호.》
계순은 어이가 없어 호호호 웃었다.
개울물에는 쪼각쪼각 흩어졌던 달빛들이 한데 모여 길다란 얼굴이 되여 흔들흔들 따라웃었다. 개울옆 풀숲에서는 알지 못할 풀벌레들이 신이 나서 찌륵찌륵거렸다.
최상동은 김일환을 한쪽으로 불러내더니 동만특위요, 순시원이요 뭐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계순은 저고리고름을 어깨뒤로 넘기고 걸싸게 빨래를 비벼댔다. 지금껏 조직부장을 가정을 가진 사람으로 알고있은것이 어처구니없었다. 그가 아직 총각이라는 사실이 별로 성수가 나게 하는듯싶었다. 그에 대한 야릇한 호기심이 생긴다. 정말 조직부장에게 그런 녀성이 없을가? 애인도 없고?…
개울물은 쑤얼쑤얼 자꾸만 쑤군거린다. 달빛은 젖빛으로 무르녹아내리며 계순의 반듯한 이마와 상큼한 코등에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들이 보석처럼 반짝이게 해준다.
왜 아직 그런 녀성이 없을가? 눈이 너무 높아서일가? 하긴 그렇게 높은 간부에 인물도 인격도 나무랄데가 없으니 그럴만도 했다.
한참 무엇인가 의논하던 최상동이 자리를 뜨려다 계순을 돌아보았다.
《계순동무, 이제부터는 동무가 이 조직부장을 좀 관심해주오. 글쎄 나이가 몇이게 아직도 외토리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있으니 참… 이럴땐 궁색스러워 못 봐주겠거던.…》
《아이참, 제가 어떻게…》
《왜 자신이 없소?》
《아, 아닙니다. 저희들이 미처…》
《그럼 됐소. 난 그럼 먼저 들어가겠소.》
최상동은 호탕하게 웃으며 한손을 쳐들었다.
《도쓰비다냐!》
계순은 손등으로 입을 가리우며 즐겁게 웃었다.
연해주에서 나서자라 10월혁명을 겪고 반일혁명을 하러 간도로 나온 그는 마음이 상쾌할 때면 쏘련사람들식으로 인사를 하군 했다.
최상동은 올 때처럼 급한 걸음으로 어둠속에 스며들었다.
그날부터 계순은 조직부장의 옷차림에 남다른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옷이 덞지는 않았는가, 어디 혼솔이 터지지는 않았는가, 단추가 떨어지지는 않았는가, 기워야 할것은 없는가.…
계순은 최상동이가 조직부장에게 관심을 돌리라고 한것을 현당서기가 한 공청원에게 주는 과업으로 받아들인것이다.
현당 조직부장이면 여간만 바쁜 사람이 아니다. 사람들앞에 나설 일도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런데 그 중요한 사업을 하는 사람이 언제 제 옷차림에까지 신경을 쓸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에게는 반드시 녀성다운 섬세한 눈과 손길이 필요한것이다.
날이 점점 감에 따라 사람들은 계순이와 김일환의 관계를 조직부장과 공청원과의 관계가 아니라 처녀와 총각의 남다른 이성관계로 보기 시작했다.
그러거나말거나 계순은 전혀 그런 내색이 없이 그저 현당서기가 준《과업》을 착실히 수행해나갔다.
현당 조직부장이면 어떤 지위에 있는 사람인데 감히 나같은걸 거기에 견준단 말인가.
계순이에게는 그가 그저 아득한 높이에 서있는 상급일뿐이였다. 녀자의 눈으로 본다 해도 그는 자기같은 처녀는 왼눈으로도 거들떠보지 않을 진짜 사내답게 생긴 미남이였다. 학력만 보아도 자기는 소학교도 졸업 못했는데 그는 동흥중학교를 졸업하고 정당촌과 태성촌, 밀안현에서 교원까지 했다.
맑스요, 레닌이요, 손문이요 모르는것이 없다. 언제인가 맑스의 《자본론》을 열다섯번이나 읽어 정통하다싶이했다는 《엠엘파》의 거두와 론쟁을 했는데 그 사람은 몇마디안팎에 얼굴이 수수떡같이 되여 꽁무니를 빼였다고 한다.
계순은 사람들이 색다른 눈길로 볼 때면 가벼운 웃음으로 흘려넘기군 했다.
계순은 그저 김일환이가 사람들앞에 나설 때 옷차림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게 그래서 빨래나 바느질같은 소소한 사생활에 구애됨이 없이 혁명사업에 전심할수 있게 해주는것이 혁명에도 리롭다고 여길뿐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계순이가 옷을 빨아 깨끗이 손질해가지고 현당위원회가 있는 《갑산집》에 찾아가니 김일환이 옷을 받아놓고 어줍은 표정을 지으며 이런 말을 하는것이였다.
《계순동무, 미안하지만 이제부터는 이런 수고를 안해도 되겠소.》
계순은 놀란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말이 섭섭하게 들렸던것이다.
김일환의 얼굴은 왜서인지 불그레해보였다. 눈길을 어디에 줄지 몰라 허둥거렸다.
계순은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다가 허전한 어조로 물었다.
《그럼… 이제부터는 다른 동무가 해줍니까?》
《그… 그렇소. 다른… 동무요. 그 동무가 해주기로 했소.》
일환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황황히 대답했다.
계순은 그처럼 열정적이고 쾌활하고 숱한 군중앞에서도 막힘이 없이 열변을 토하기도 하고 공청회의를 맵짜게 지도하기도 하던 현당 조직부장이 이렇게 쪼꼬만 처녀앞에서 《쩔쩔매는것》이 이상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그 동무가 누굽니까. 제가 알면 안됩니까?》
《뭐요?》
김일환은 아연해서 계순을 쳐다보았다.
순간 계순은 이 순박하고 고지식한 조직부장이 무엇때문에 자기에게 그런 말을 했는가 하는것을 깨달았다.
계순은 자기도 모르게 손등으로 입을 가리우며 깔깔깔 웃었다.
《알만 합니다, 조직부장동지. 그 동무에게 방해되지 않을테니 걱정마십시오. 전 그저 현당서기동지가 준 과업을 집행할따름입니다.》
왜서인지 바로 그날부터, 자기는 전혀 다른 생각이 없다고 말한 그날부터 오히려 계순의 마음속엔 이상한것이 슬그머니 머리를 쳐들기 시작했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때없이 그 어줍어하던 모습을 그려보게 되고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이면서 호흡이 빨라지고… 얼굴이 달아오르군 하는것이였다.
내가 왜 이럴가. 이게 남들이 말하는것처럼 그 사랑이라는것일가? 설마… 내가 어떻게 그런 사람을… 아니, 아니야. 난 그런 재목이 못돼.
《계순동무요?》
누구인가 앞에서 조용히 묻는 소리가 나서야 계순은 상념에서 깨여났다.
벌써 수리바위밑에 다 왔는데 버들숲을 헤치며 김일환이 마주 걸어오고있었다.
《아이, 조직부장동지! 오래 기다렸습니까?》
계순은 자기가 늦은것 같아 미안한감을 느끼며 콩콩 뛰여갔다. 조직부장이 동굴에서 기다리다가 너무 지체되니 마주오는 모양이였다.
《나도 동굴에서 방금 내려오는 길이요. 집에서는 모두 무고하오?》
《예.》
《하루밤도 변변히 쉬지 못했겠구만. 오래간만에 어머니랑 만났겠는데…》
《일없습니다. 그 배낭을 주십시오. 제가 지겠습니다.》
계순은 그가 한쪽어깨에 걸멘 배낭을 받아지려고 손을 내밀었다.
《괜찮소. 어서 가기요. 비가 올것 같은데.…》
일환은 계순의 손을 가볍게 밀어놓으며 발을 옮겨놓았다. 계순은 따라가며 그의 배낭끈을 잡았다. 무엇이 들었는지 묵직했다.
《주십시오. 조직부장동지가 위신없이 이런 배낭을 지고 다니겠습니까?》
《위신?》
일환은 계순을 돌아보더니 즐겁게 웃었다.
《조직부장이 뭐 이런 배낭을 지면 위신이 떨어지는가?》
《그렇지 않으믄요.》하면서 계순이도 따라웃었다.
《계순동무가 지고가면 공청원의 위신이 안 떨어지구?》
《공청원의 위신이야 더 올라가지요.》
《허허허, 그거 그럴듯한 론리이구만. 하지만 난 조직부장이기 전에 우선 남자요. 힘센 남자는 이런걸 져야 제격이지만 처녀야 어디 그렇소? 맵시를 봐야 할 처녀에게 이런 배낭을 지우고 남자라는게 조직부장이랍시구 거들거들 빈몸으로 다녀보오. 사람들이 그걸 보고 뭐라 하겠소. 그야말로 위신문제거던. 안 그렇소?》
《아이참, 무슨 배낭 하나 가지구 그렇게 심각하게 말씀하십니까. 누가 보지도 않는데… 그럼 같이 듭시다.》
《동문 참…》
배낭 하나를 놓고 가벼이 싱갱이질을 하던 그들은 끝내 둘이서 맞들고 가기로 락착지었다.
김일환이와 배낭끈을 하나씩 쥐고 새벽길을 걷자니 계순은 사뭇 마음이 즐거워졌다. 마주쥔 배낭끈을 통해 그 무엇인가 뜨거운것이 쩌릿쩌릿 오가는듯싶었다.
날은 점점 훤히 들리기 시작했다. 잠을 깬 산새들이 누기찬 숲속 여기저기서 포릉 포르릉 날아예며 꺄꺄각, 삘리 꼬삐오유 삘리리, 호리호리 삐유 하고 목청들을 가다듬고있었다. 종일토록 노래부를 준비들을 하는듯싶었다.
엷은 해살이 나무잎들사이로 부채살처럼 비쳐내리는듯 하더니 한줄기 서느러운 바람과 함께 황급히 그 빛들을 거두어들였다. 습기찬 바람이 선들선들 불어왔다. 비가 올 징조였다.
그러나 일환이와 나란히 숲속길 가는 계순은 마냥 가슴이 부풀어오르기만 했다.
계순은 크지 않은 바위를 에돌자 흘끔흘끔 곁눈질로 일환이를 훔쳐보다가 마침내 참지 못하겠다는듯 새물거리며 웃었다.
《조직부장동지! 하나 물어보랍니까?》
《뭔데?》
일환이 의아해서 눈길을 돌렸다.
《조직부장동지를 돌봐준다던 그 동무 말입니다. 아직두… 비밀입니까?》
일환은 그제야 생각나는듯 어줍게 웃더니 시치미를 뗐다.
《그렇소, 비밀이요.》
《언제까지요?》
《글쎄… 비밀이야 영원한것이지. 말그대로 〈비밀〉이니까.…》
《호호호, 알만 해요.》
《뭐가?》
《조직부장동지를…》
《나를?》
《예.…》
《내가 어떻다는거요?》
《어떻긴요, 그저… 남자라는거지요.》
《뭐요? 허참, 그럼 뭐 내가 남자가 아니면 녀자겠소?》
《조직부장동지로만 생각했지요.》
《조직부장? 허허허, 동문 참… 가만, 이게 뭐야?》
일환이 껄껄 웃다가 갑자기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며 흘낏 하늘을 쳐다보았다.
계순이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콩알만 한 비방울 하나가 뚤렁 왼쪽볼에 떨어졌다.
《어마, 비방울이군요.》
《많이 오겠나?》
희뿌연 하늘을 눈빗질하던 일환이 고개를 기웃했다.
《이 근방엔 비를 그을만 한데가 없겠는데.…》
《까짓거, 비가 오면 맞아야지요 뭐.》
계순은 그게 무슨 대수냐는듯 웃으며 눈앞에 가로 드리운 참나무가지를 머리우로 들어넘겼다.
《참, 이제 어랑촌이 유격근거지로 되면 완전히 우리 세상처럼 된다는거지요?》
김일환은 큰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우리 세상으로 꾸린다는거요. 작년 겨울 명월구회의때 김일성장군님께서 다 가르쳐주시였소. 왜놈도 지주도 없는 우리의 새세상, 거기엔 인민혁명정부가 서게 되오. 인민들의 생활을 돌봐주고 이끌어주는 정부요. 우리 나라 력사에 전혀 있어본적 없는 그런 인민의 정부요. 아동단학교에선 아이들이 돈 한푼 안 내고 마음껏 배우며 뛰놀게 될게요. 병원에선 무료로 치료를 받게 되고… 농민들은 무상으로 땅을 분여받게 될게요. 제땅에서 마음껏 농사를 지어봤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하는 우리 농민들의 세기적숙망이 풀리게 된단 말이요.》
일환의 숨소리가 높아졌다. 계순이도 가슴이 마냥 부풀어오르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아이들이 줄을 지어 노래를 부르며 학교로 가는 모습이 금시 눈앞에 떠오른다. 분여받은 땅을 그러안고 엎디여우는 농민들의 모습도 떠오른다. 인민혁명정부 지붕우에서 펄럭이는 붉은 기발이 해빛을 받아 더 선명하게 빛난다.
이제 어랑촌에는 얼마나 멋있는 생활이 펼쳐지게 되는가.
《이제 가서 할일이 많소. 우선 계순동무는 모든 녀성들을 다 부녀회조직에 묶어세워야 하오. 서로 돕고 이끌면서 일제를 반대하는 싸움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서도록 해야 하오. 아버지와 오빠와 남편들을 도와 그들이 원쑤와의 싸움에 전념할수 있게 해주고 연예대 같은것을 조직해서 유격대와 자위대, 반일부대들을 고무해주고.…》
솨― 바람에 숲이 소리치며 설레이기 시작했다. 계순은 심호흡을 한번했다.
장군님께서 가르쳐주신 근거지를 꾸리는 일에 자기도 한몫 맡아안았다는 긍지와 자부가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다. 계순은 주먹을 꼭 움켜쥐였다.
후둑― 후둑―
비방울이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계순은 야속한 눈길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콩알보다 굵은 비방울들이 후드득 얼굴에 떨어져내렸다.
《이거 안되겠군. 우리 저 나무밑에라도 들어가기요.》
주위를 둘러보던 일환이 저앞에 있는 아름드리 물황철나무를 가리켰다. 둘은 배낭끈을 하나씩 갈라쥔채 황철나무밑으로 뛰여갔다. 아름드리나무밑에 바싹 등을 대고 붙어섰다. 황이 든 잎사귀들이 하나, 둘 비방울에 맞아 펄럭거리며 떨어져내렸다.
비는 점점 더 억수로 쏟아졌다.
《어… 이거 다 젖는군. 가을비는 장인의 나룻밑에서 굿는다고 했는데 이건…》
《장인이 아직 없으니 그러는거겠지요.》
계순이 새물새물 웃으며 한마디 하자 일환이도 그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그럴가? 그럼 아직 총각이라고 벌을 내리는 모양이군, 허허허.》
《호호호.》
둘은 비에 홀딱 젖어가지고도 마주보며 즐겁게 웃었다.
《아무래도 다 젖은바에야 가지 않겠소?》
《이 배낭은 젖어도 일없어요?》
《그안의것들은 다 유지에 쌌으니까…》
《그럼 가자요.》
그들은 다시 길에 나섰다. 비바람이 엇비스듬히 불어치며 차디찬 비방울을 마구 휘뿌렸다.
계순은 얼굴에 줄줄 흘러내리는 비물을 손등으로 연신 훔치면서도 새물새물 피여오르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차거운 비가 온몸을 적셔도 마음은 즐겁기만 했다. 장군님께서 구상하신 유격근거지라는 새세상을 꾸리러 가는 길이다. 얼마나 가슴벅찬 이 길인가. 그것도 그처럼 자기의 모든것을 다 의탁하고싶은 사람과 함께 가는 길인데 이따위 비가 대수랴싶었다. 불비가 쏟아진대도 기꺼이 웃으며 걸으리라.
둘은 비내리는 숲속길을 꿰질러나갔다.
계순은 그와 함께 걷는것이 흥겨우면서도 난처하고 부끄러운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비에 옷이 홀딱 젖어버리자 봉긋한 앞가슴이 자꾸 자기모양을 드러내며 부풀어오르는 그것이였다. 그걸 일환이가 볼세라 잔뜩 어깨를 움츠리며 걷지 않을수 없었다.
하지만 뜻깊은 길이였다. 현당 조직부장과 공청원으로서만이 아니라 처녀와 총각으로서 더욱 가까와진 사연깊은 길이였다.
후에 리계순은 자기들의 사랑은 아마도 이 비오는 숲속길에서 시작되였는지도 모른다고 했었다.
×
참으로 놀라운 일이였다.
어머니에 대한 실화를 읽던 정옥은 자기도 모르게 움쭉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팔을 앞가슴우에 엇겯고 흥분해서 책상주위를 거닐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이 어떻게 시작되였는지 처음 알게 된 정옥이였다. 외할머니도 친할머니도 함께 싸운 투사들도 몰랐던 이야기…
어머니가 자기 사랑담까지 말해줄 정도로 친했던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누가 이 글을 썼는가.
정옥은 피뜩 뇌리를 치는것이 있어 급히 책상으로 다가가 학습장들을 쌌던 소포천을 펼쳐보았다. 어느 체신소에서 보냈는지 그 납부인을 보려는것이였다. 있었다, 서성이라 찍혀있었다. 날자는 바로 어제 3월 16일이라 씌여있었다.
정옥은 생각깊은 눈길로 납부인을 쳐다보았다. 서성구역체신소에 가면 소포를 보낸 사람을 알수 있을것이다. 그러면 이 글을 쓴 사람도…
정옥은 은근히 가슴이 들레이는것을 느끼며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이 출근할 시간이 거의 되였다. 정옥은 오후에 체신소에 가보리라 생각하며 서둘러 책상에 다시 마주앉았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몇장이라도 더 보고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