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편 비슬나무
제 13 장
이튿날, 참으로 놀라운 일이 생겼다.
진두일의 실화가 출판되여나간지도 5년이 넘었는데 뜻밖에도 당력사연구소로 국제우편이 날아든것이다.
멀리 중국 상해에서 보낸 편지였다.
《동지들… 장백현에서 사는 저의 친척이 가져온 실화 〈영생하는 삶〉을 보고 이 편지를 씁니다.
이 책을 가져온분은 저더러 직접 편지를 쓰라고 하더군요.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항일의 전구에 꽃다운 청춘을 바치고 돌아오지 못한 항일투사들의 유해들을 찾는 문제를 두고 그리도 마음쓰고 계신다고 하면서 그곳 당력사연구소 간부동지들이 우리 장백현 사람들에게도 요청하였다더군요. 1938년 1월 항일투사 리계순동지가 희생될 당시 그곳 주변마을에 살고있었던 사람들을 료해해서 렬사의 유해를 찾을수 없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현사람들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모시고 싸운 투사들의 유해를 모두 찾아 혁명렬사릉에 안장하려는 친애하는 김정일동지의 숭고한 도덕관에 감동되여 몇해째 그때 살던 사람들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곳에 며칠밖에 가있지 않은 저에게까지 선이 닿았군요. 사실 저는 그곳에서 눌러 산적은 없습니다. 베이징대학에 다니던 때인데 방학이 되여 장백에서 홀로 사는 병약한 외할머니에게 며칠 가있었을뿐이였습니다. 외할머니는 내가 그곳에 갔다온 다음 인차 세상을 떠나시였습니다. 이제는 어느덧 50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는데 그때 얼핏 장백땅에 갔다온 나를 용케 알아내고 여기까지 〈추적〉해왔다고 웃으며 말하니 친척되는분은 이렇게 말해주더군요.
조국에서 간부들이 몇차례나 왔다갔다고… 그 의리심에 감동되여 이렇게 〈수사〉를 상해에까지 뻗치게 되였다고…
동지들, 저는 이 실화를 보고 리계순렬사가 틀림없이 제가 최후를 목격한 그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의 시신을 안장할 때 품속에서는 바로 실화에 있는것과 꼭같이 꽁다리연필과 단추 한개가 나왔습니다.
시신은 원쑤놈들이 후에라도 나쁜짓을 할가봐 제가 다른 곳에 아무도 모르게 안장하였습니다.
바로 그 단추와 꽁다리연필도 유지로 잘 싸서 함께 묻었으니 남아있을수도 있습니다.
세월은 많이도 흘러 강산은 다섯번이나 변하였겠지만 아직도 그때 일이 눈에 선합니다.…
시신도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을 산골짜기 깊은 곳에 안치했으니 그대로 있을것입니다. 나만 알게 표적을 해놓았으니 안전할것입니다. 본인이 이제는 70고령인데다가 건강이 좋지 못하여 지금 당장은 그 장백땅으로 가지 못하고 편지부터 쓰는것이니 용서해주십시오. 저도 조선사람입니다. 여기 병원에서는 달반동안만 집중치료를 하면 움직일수 있다고 하니 그때 현지에 가보고 다시 편지를 하겠습니다.…》
이 편지내용은 곧 친애하는 김정일동지께 보고되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매우 기뻐하시며 즉시 해당 일군들을 중국으로 파견하도록 하시였다.
×
며칠후 김정옥은 흥분된 마음을 안고 리정애를 찾아떠났다.
중국에 가있는 대표단 단장으로부터 기쁜 소식을 받은것이다.
어제 저녁 직장에서 돌아와 막 저녁동자질을 하려는데 당력사연구소 부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그는 대표단단장으로 중국에 가있었다.
《정옥동무, 기쁜 소식을 알려주자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정옥은 무엇인가 쿵― 하고 흉벽을 치는것을 느꼈다. 마침내 어머니를 찾은 모양이구나.
《친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는… 》
《예?》
정옥은 저으기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두손으로 정중히 송수화기를 받쳐들었다.
《친애하는 그이께서는 우리 대표단의 사업정형을 보고받으시고 빨리 정옥동무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려주라고 하시였습니다.
정옥동무, 동무 어머니의 분묘를 찾았습니다. 그 편지에 썼던 그대로 꽁다리연필과 단추도 함께 묻혀있었습니다. 유지로 어찌나 잘 쌌는지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장백사람들도 얼마나 적극적인지 모릅니다. 그 사람들은 어머니가 희생될 때 함께 총탄에 맞은 그 비슬나무를 영웅나무라고 부르고있습니다. 이번에 장백사람들은 어머니의 분묘를 찾게 되자 다시 크게 봉분을 만들고 묘비도 크게 해세우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보고를 받으신 친애하는 그이께서는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해달라고 하시고는 어머니의 유해를 빨리 조국에 내다가 혁명렬사릉에 안치해야 한다고 하시였습니다.》
정옥은 갑자기 눈굽이 시큰해오는것을 어찌할수가 없었다. 두손으로 송수화기를 받쳐든채 오래도록 서있었다. 뜨거운 두줄기의 눈물이 량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이의 다심하신 사랑이 목메이게 안겨왔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드디여 어머니의 유해를 찾아오게 되였다.
정옥은 끓어오르는 격정을 금할수가 없었다.
이제는 세상을 떠난지 50년이 넘었는데도 잊지 않으시고 이국의 산야에 묻혀있는 전사들을 모두 찾아와야 한다시며 그리도 마음쓰시는 친애하는 그이의 은정속에 마침내 어머니도 그이의 품을 찾아오게 된것이다.
이 사실을 김일이나 박영순, 김명화처럼 어머니와 함께 싸운분들이 알면 얼마나 좋아하랴.
애석하게도 이 몇년어간에 그분들도 세상을 떠나갔다.
그래서 정옥은 지금 리정애를 찾아가고있는중이였다.
리정애와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싶었다.
결국은 리정애가 어머니의 최후를 더 잘 알게 해주고 유해도 찾을수 있게 길안내를 해준셈이다. 고마왔다, 정선화도 리정애도…
리정애는 집에 없었다. 광복거리건설에 동원된 돌격대원들에게 자기가 마련한 원호물자를 가지고 갔다는것이다.
정옥은 진두일에게 어머니의 유해를 찾게 된 이야기를 해주며 리정애어머니가 오면 알려주라고 하고는 돌아왔다. 집으로 향한 그의 눈앞엔 실화에서 본 어머니와 정선화에 대한 이야기가 현실처럼 생동하게 그려지고있었다.
1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정선화는 갑자기 속이 메슥메슥해와 모지름을 쓰다가 끝내 속의것을 다 토해버리고말았다. 겨우 웃방으로 들어가 옷입은채로 꼬꾸라졌다.
리계순의 피투성이된 처절한 모습이 자꾸만 눈에 얼른거린다. 온통 찢기고 터지고 멍이 든 그 모습, 피비린내가 꽉 찬 고문장…
《죽어라, 죽어!》
악을 쓰며 그 애어린것을 마구 때리던 악마들.… 그렇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계순언니의 절규대로 짐승보다도 못한 악마들이였다. 젖살이 보동보동한 네댓살짜리 애리애리한 철부지에게 손을 댄다는것이 상상이나 할 일인가.
선화의 눈앞에는 피투성이가 되여 대굴대굴 굴던 그 애의 모습이 떠나지 않는다.
계순언니의 가슴은 얼마나 찢어지는듯 아팠을가. 그리도 애들을 사랑하고 미래를 귀중히 여기던 언니였다. 그래서 더더욱 계순언니의 가슴을 찢고 가혹한 아픔을 주려고, 죽음보다도 더한 최대의 고통과 아픔을 주려고 계순언니의 앞에서 그 애를 그리도 모질게 때린것이리라.
선화는 몸서리를 쳤다.
인간의 가장 고상하고 아름답고 순결한 감정을 역리용하려는것은 인간자체에 대한 모독이다. 세상에 이런데도 있는가, 짐승, 야만…
그래서 오빠가 나를 계순언니에게로 데려갈수 없다고 도리머리를 했었구나.
오빠의 심정이 리해되였다. 보기만 해도 욕지기가 나서 견딜수가 없는 피비린내가 꽉 들어찬 고문장… 피물이 고인 콩크리트바닥, 물고문때 쓰는 배불뚝이물주전자, 벽에 주런이 걸려있는 피와 살점이 그대로 엉켜붙어있는 각목이며 집게며 불갈구리며 채찍들, 천정에서 데룽데룽 내리드리운 올가미, 화독에서 뱀의 혀바닥처럼 날름거리며 피여오르는 파란 불길, 거기에 꽂혀있는 부저가락…
오빠가 바로 그런데서 일하고있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레 들자 선화는 오한이 난듯 몸을 떨었다.
오빠가 고문장은 아니라 해도 리계순언니처럼 마음곱고 선량하기 그지없는 녀성이, 애기어머니가 갇혀있는 그 경찰서에서 일하고있다는것이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선화는 장거리에 나갔을 때 녀인들이 자기를 보고 《까마귀네 년》이라고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리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들이 입심이 사나워 그러는 모양이라고 자기 위안을 했었다. 하지만…
몸서리가 쳐졌다. 그러니 그 《까마귀네 년》이라는 말속에 얼마나 무서운 증오와 분노와 절규와 규탄의 감정이 응축되여있는것인가.
선화는 무서웠다.
오빠가 저녁마다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것이 죄다 리해되였다.
그럼 우리는 이제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당장이라도 경찰서일을 그만두게 하고 어딘가 멀리로 가고싶었다.
저녁이 되여 오빠가 집에 들어왔지만 선화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봉삼은 선화가 감방에 갔던 뒤일이 궁금해서 술집에도 가지 않고 곧장 들어온 모양이였다.
오빠는 걱정스러운듯 머리맡에 와 앉더니 슬며시 이불을 들치고 손을 이마우에 얹는다. 열이 나지 않는가 가늠하는듯싶다.
《좀 어떻니?》
《…》
선화는 대답을 못했다.
서봉삼은 꺼지게 한숨을 내쉬였다.
《감방에 괜히 갔댔어. 녀자들은 그걸 보구 견디지 못한다니까…》
정선화는 와락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앉았다.
《오빠, 계순언니를 살려주세요. 예? 구원해주세요.》
서봉삼은 멍하니 선화를 마주보다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암담한 표정이였다. 후― 하고 한숨까지 몰아쉰다.
《그건… 힘든… 일이야. 섶을 지고… 불속에 뛰여드는 격이야.》
《그래두… 무슨 수가 있겠지요. 오빠는 지금껏 날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아끼지 않았지요. 날 보면 자꾸 봉숙언니부터 생각난다면서… 친동생보다 더 위해주었지요. 오빠, 계순언니를 꼭 구원해주세요, 네?》
서봉삼은 입을 꾹 다문채 모두숨을 쉬였다. 대답을 못했다.
선화는 안타까왔다.
《오빠한텐… 그 〈결의형제〉들이 있잖아요. 빌어요, 예?》
《됐다. 어머니가 밥을 다 차려놓은것 같은데… 내려가 식사나 하자.》
《싫어요. 난 못하겠어요.》
선화는 다시 이불을 쓰고 자리에 누웠다.
《그러지 말라는데… 내 오죽하면 그러겠니, 어서 식사나 하자.》
《먹으면 또 토할것 같아요. 어서 내려가 하세요.》
《너를 내놓고 어떻게 우리 둘이만 하겠니. 자, 어서. 이모가 기다리는데…》
선화는 할수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무둑히 담은 하얀 쌀밥과 김이 문문나는 호박국과 반찬들을 보자 또다시 계순이 생각이 나서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쥐며 웃방으로 올라오고말았다.
자리에 누웠으나 이밤 계순언니가 감방에서 어떻게 보내고있을가 생각하니 이부자리 펴고 누운것이 죄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는 온밤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
(저 리계순을 어떻게 하면 좋을가, 선화년은 왜 아직 나타나지 않는가.)
한미영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한미영은 두팔굽을 원탁우에 올려놓고앉아 물고뿌에 부은 술을 쫄금쫄금 마시며 앞에 세워놓은 그 담배갑과 라이타를 애달픈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옆에서는 초불이 타오르며 담배갑과 라이타를 얼찐얼찐 비치고있었다.
경찰서장과 고등계주임이 그처럼 신기해하고 부러워하던 담배갑과 라이타였다. 부러워할만도 했다. 사꾸라꽃을 정교하게 은세공한 이런 귀물을 저런 촌것들이 언제 가져보았으랴. 닭의 소원은 기껏해야 쌀겨라는 말도 있듯이 저들의 인생은 그저 그렇게 흘러가고말것이다. 그런자들과 시야비야하고있는 자신이 가련하기도 했다.
내가 과연 이렇게 시골에 묻히고만단 말인가.
한미영은 속이 달아오름을 느끼며 또 한모금 쭉 술을 들이켰다.
룡정의 비밀료정에서 다나까와 함께 보내던 그밤이 떠오른다. 20여년간을 고이 지켜온 처녀의 그것을 통채로 바치던 그밤…
다나까는 만족해서 바로 저것을 꺼내놓았었다.
《이건 대본영에 바치려고 우리 아버지가 특별주문해서 만들었던거요. 대본영에도 이런 담배곽과 라이타를 가진 사람이 몇명 안돼.…》
한미영이 바란것은 이런 물건짝이 아니였다. 이런 물건들이 향하는 바로 그 길이였다.
다나까를 거쳐 일본의 손꼽히는 재벌인 그의 아버지를 거쳐 그가 자주 만나는 《대본영》의 그 《천황》의 측근을 거쳐… 사무라이후예인 아버지와 도꾜의 요염한 기녀인 어머니의 기질을 다같이 물려받은 한미영은 이발을 사려물었다.
한미영의 앞길에 처음으로 차단봉을 가로지르고 골탕을 먹인것이 바로 저 리계순이였다.
룡정국수집에서의 그 일들을 한미영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것이다.
한미영은 그때 먼저 잡혀간 《어멈》의 자리에 또다시 공산당파견원이 들어와 앉을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었다. 그것은 첩보활동의 초보에 초보도 모르는 어리석은짓이라는것이 보통사람들의 견해에도 불보듯 명백한것이기때문이였다. 그래서 리계순을 정말로 떠돌이를 하던 녀자로만 보았던것이다. 리계순은 《초보에 초보도 모르는 어리석은짓》을 보기 좋게 다시 뒤집어엎었다.
리계순이가 의심스러워 그에게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을 때에는 벌써 행차뒤 나발이였다. 리계순이며 정선화까지 놓치고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신세가 되고말았다. 자기 사람까지 둘씩이나 죽이고… 그 죽은자의 삼촌이 수기치료를 전문하는 룡정에서도 이름난 의원인데 령사도 그의 치료를 받고있었다. 그리하여 줄줄이 내리추궁이 시작되였는데 다나까에게서까지 욕을 먹은 미영은 그날 밤 화김에 빼주를 한병이나 마셨다. 번열이 나서 이불을 차던지고 자는 바람에 다음날엔 감기까지 걸렸다.
바로 그때 일본에서 《천황》의 특사가 령사관에 왔다갔다.
열이 39~40도를 오르내리는 속에서 《천황》특사의 방문소식을 들은 한미영은 가슴을 쥐여뜯었다. 인생길에 다시는 찾아올것 같지 않은 절호의 기회를 놓친것이다. 죽고싶도록 원통했다.
사실 다나까는 며칠전부터 일본에서 인차 《천황》의 특사가 오는데 어떻게 하든 그를 만날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었다. 한미영이를 그 특사의 잠자리에 들이밀어 주물러놓자는 속심이였다. 다나까는 자기대로의 목적이 있어서일테지만 한미영은 또 한미영이대로 이것이 자기의 꿈을 실현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 특사와 하루밤만 같이 보낼수 있다면…
한미영은 자신이 있었다. 남자를 다루는 솜씨는 누구도 자기를 따르지 못하리라 장담하고있는 한미영이였다.
룡정지하조직망을 들추어내는데 한몫 단단히 한 공에다가 미모 또한 이 룡정일판에서는 손가락에 꼽힐 처녀이고 대학공부까지 한 자기를 그 특사도 창녀처럼은 생각하지 않을것이다.
하루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했다.
그 특사의 눈에만 든다면… 당고종이 무측천을 못 잊듯이 그 특사가 일본에 가서도 나를 못 잊게 그의 마음을 틀어잡는다면… 그 줄을 타고 일본에 건너간 다음에는…
길이 열릴수도 있었다.
그래서 봄하늘의 구름처럼 붕 떠서 손꼽아 그날을 기다려왔는데… 감기라니…
억이 막혔다. 천번중 아니, 만번중에도 단 한번 있을가말가 한 인생전환의 그 좋은 기회를 놓쳤다.
바로 저 리계순이때문에… 정말 찢어발겨도 시원치 않을년이였다. 저년을 놓친것때문에 추궁을 받고 그래서 화김에 술을 마시고 그래서 감기에 걸려 인생을 망치게 되였으니… 나의 앞길을 가로막은건 결국 저 리계순이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녀자의 그 기회란 언제나 생기는것이 아니다.
꽃도 한철, 녀자도 한철이라고 아무리 처녀라도 생신함을 잃기 시작하면 남자들은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제 언제 다시 그런 기회를 만날수 있단 말인가. 이제는 벌써 눈언저리에 주름살까지 생기기 시작하는데… 생각할수록 분했다.
그때부터 다나까도 자기를 대하는 눈치가 달랐다. 룡정시내에 삐라사건들이 자주 터지고 룡정을 거쳐간 일본군들이 유격대의 습격을 빈번히 당하고 유격구로 가던 《토벌대》가 도중에서 불벼락을 맞고 밀정들과 친일지주, 자본가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단된것이 모두 리계순이 한 일이니 그와 함께 자고 일해온 한미영이 다 책임을 지라는 격이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흰쌀밥도 늘 먹으면 물린다는 격인지 정부도 다른 녀자를 택한 모양이다. 이따금 만나도 《그 일》은 하지 않는다.
원통했지만 꾹 참고 다시 어떤 기회가 오기를 기다릴수밖에 없었다. 정부로서가 아니라 상부로서의 다나까의 지시를 고분고분 집행하면서…
한미영은 자기를 이런 처지에 몰아넣은 계순을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그래, 내 이 일을 계속하는 한은 네년과 끝까지 해볼테다. 이 세상 끝에까지 따라가서라도 기어이 결산을 할테다.)
한미영은 처창즈에서 정선화가 도망쳐나오고 리계순과 그의 남편이 《민생단》에 몰렸을 때 그를 끌어내오려 했었다. 리계순이만 끌어당기면 큰 소득을 얻을수 있다고 타산했다.
그때도 리계순은 끄떡 안했다.
처창즈가 해산되자 한미영은 리계순의 집을 감시하는것을 잊지 않았다. 어느때건 그가 나타나리라고 믿었다. 애기를 가진 녀자가 어디로 가랴 생각했었다.
계순은 자기 집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날 집을 감시하던자들로부터 웬 로친이 젖먹이애를 안고와서 마당에서 하루밤 자고갔다는 보고를 받은 한미영은 노발대발하였었다.
그 젖먹이가 리계순의 딸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던것이다.
조선인민혁명군사령부가 백두산지구에 근거지를 정하고 틀고앉은것 같다는 정보를 쥐게 된 관동군사령부에서는 첩보계통의 모든 력량을 장백지구로 집중시켰다.
그래서 한미영이도 여기 장백지구로 나오게 되였는데 이곳에서 리계순이와 맞다들게 될줄이야…
이제는 드디여 계순이와 결판을 내게 되였다.
한미영은 또 한모금 술을 들이켰다.
눈을 쪼프리고 세워놓은 담배갑과 라이타를 또 쳐다보았다.
(다나까씨, 당신은 도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있어요. 그래 처녀의 순정을 바친 대가가 저 담배갑과 라이타가 전부는 아니겠지요? 두고보세요. 내 저 계순이를 어떻게 굴복시키고 복수하는가를…)
한미영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훅― 초불을 불어 껐다.
×
정선화는 다음날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아침에 뜻밖에도 한미영이 찾아왔다. 경찰서에서는 래일 당장 리계순이를 총살하겠다는데 소 닭보듯 이렇게 난 관련이 없어하구 누워만 있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것이였다.
정선화는 깜짝 놀라 화닥닥 일어났다.
《그를 총살하다니요. 그건 안돼요. 어쩌면 그 언니를…》
한미영은 부러 한숨까지 내쉬였다.
《그럼… 무슨 방도가 있어야 할게 아니야. 오늘이 마지막밤인데… 선화가 가서 좀 설복을 해봐. 오늘 밤만 지나면 끝장이야. 그땐 후회를 해도 필요가 없어.》
정선화는 몸서리를 쳤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내가… 내가 설복을 하겠으니… 그것만은… 좀 미루게 해줘요, 예?》
한미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간은 오늘 밤밖에 없어. 글쎄 래일이라도… 반성연설을 한마디라도 하겠다면… 그땐 다 돼. 내가 담보한다니까.》
《알겠어요. 내가 가겠어요.》
《오늘이 마지막날이라는것만은 잊지 않게 해줘.》
《그래도… 며칠간만이라도…》
《그건 안돼. 오늘 하루밤만이야. 래일이면 끝이야. 오늘 밤은 새우겠으면 새우고… 마음대로 하라구.》
《알겠어요.》
《준비를 좀 해가지구 가라구. 감방이 랭방이야.》
정선화는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계순이를 얼마나 더 가슴아프게 해주게 되겠는가 하는데 대해서는 상상도 못했다. 래일 그를 총살한다는 말에 너무 놀라 깊이 생각해볼 경황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