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편 비슬나무

제 12 장

 

저녁해는 만경봉너머로 내려앉으며 하늘가득 붉은 노을을 피워올렸다. 마치도 거대한 붉은 기폭이 통채로 하늘을 뒤덮은듯 온통 붉은 노을천지다. 노을은 광복거리건설장 곳곳에 세워진 대형속보판들과 구호판들, 기발들, 경적을 울리며 줄을 지어 끊임없이 오고가는 자동차들의 차창들과 건설자들의 땀흐르는 얼굴들까지 모조리 붉은빛으로 물들이는듯싶다.

《먼저들 들어가세요. 난 애한테 좀 들렸다 가겠어요.》

지원자들속에 끼여 걸음을 옮기던 정옥은 칠골쪽에 이르자 함께 가던 부서사람들에게 량해를 구하고는 그들과 헤여졌다. 금요로동의 하루를 광복거리건설장에 나와 땀흘리며 보낸 정옥이였다.

저쪽 옆에 서있는 방송차에서는 우렁찬 노래소리가 울려나오고있었다.

 

천리마에 속도전 번개쳐 세월을 당기며

안아올린 시대의 기념비 누리에 빛발치네

 

정옥은 은경이네가 있는쪽으로 질러가려고 새로 일떠서기 시작한 고층아빠트뒤로 돌아갔다.

순간 《호르륵》하는 호각소리가 귀청을 쨌다.

와뜰 놀라 쳐다보니 하얀 안전모를 쓴 돌격대제복을 입은 사람이 손짓을 해댄다. 머리를 드니 기중기가 층막부재를 한창 들어올리고있었다. 그밑에 들어서지 말라는것이였다.

정옥은 하는수없이 돌아서서 가설건물옆에 있는 대형속보판쪽으로 향했다.

속보판에 나붙은 《우리 어머니》라는 글발이 얼핏 눈길을 끌었다. 돼지를 다섯마리나 싣고온 어느 어머니에 대한 소개였다.

그 속보를 읽으니 갑자기 진두일의 어머니 리정애녀성이 눈앞에 떠오른다. 그도 돼지를 여러마리나 길러 여기 광복거리건설장에 지원하였다고 했다.

리정애…

진두일의 실화가 출판되여나간 뒤 정옥은 몇번 그의 집에 찾아갔었다. 그리하여 료양소에서 돌아온 리정애를 만날수 있었다.

리정애는 여전히 몹시 미안해하고 괴로와하고 죄스러워하는듯 한 표정이 력연했었다.

정옥은 자기 어머니의 생활을 자세히 알려주어 고맙다고 사례를 하였지만 리정애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듣고 본 이야기를 그대로 적어놓은게 무슨 고마운 일이겠수. 오히려 너무 늦어 죄스러울뿐이우다.》

무엇인가 속에 맺혀있는듯 했다.

그게 과연 무엇일가.

인생의 황혼기에 이른 녀인이 아직도 그런 죄스러움을 안고산다는것은 얼마나 가슴아픈 일인가. 사람은 늙으면 추억속에 산다고 했다. 자기 삶의 갈피갈피를 추억해보며 때로는 긍지를, 때로는 행복을 느끼는것이 말년에 사는 재미가 아니겠는가.

긍지와 자부에 넘쳐 떳떳이 추억할수 있는 아름다운 삶을 지닌다는것은 얼마나 행복할것인가. 그러나 리정애녀성은 분명 인생의 말년까지도 괴로움을 주는 그런 불미스러운 과거를 가지고있는것 같다. 어디에 떳떳이 내놓을수 없는 그런것을…

인생길이란 한번 가면 그것으로 끝난다. 되돌아올수도 다시 걸을수도 없는것이 인생길이다. 그래서 먼 후날 지나온 길을 뒤돌아볼 때 불미스러운것이 없도록, 후회되는것이 없도록 오늘의 하루하루를 값있게 살아야 하는것이다.

갑자기 뒤에서 빵빵― 하는 자동차경적소리가 나는 바람에 정옥은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모래를 가득 실은 《자주호》가 와르릉거리며 다가오고있었다. 그러고보니 생각에 옴한김에 자기도 모르게 길복판에 들어선것이다.

정옥은 얼른 길옆으로 비켜섰다. 《자주호》가 부르릉 지나갔다. 목에 흰 수건을 걸친 운전사가 찔 눈을 흘기며 한손으로 제 머리를 툭툭 쳐보였다. 똑똑히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사고를 친다는 뜻 같았다. 적재함에는 모래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마치도 산이 움씰거리며 가는듯 했다.

그 《모래산》너머로 또 다른 기중기가 보인다.

그 기중기는 지금 한창 벽체블로크를 들고있다.

그뒤로 또 기중기, 기중기… 기중기들이 숲을 이루었다. 그아래로 이리저리 분주히 누비며 달리는 《자주호》들, 《승리―58》들, 《태백산》호들… 방송차들… 벌써 20층, 30층 하늘을 찌를듯 솟구쳐오르는 고층건물들이 시원히 뻗어나간 대통로좌우로 줄지어 늘어섰다. 휘날리는 기발형들, 진달래꽃잎같은 원통식묶음형들, 물결형들… 그우에서 용접불꽃이 꽃보라처럼 날아내린다.

정옥은 가슴이 부풀도록 큰숨을 들이그었다. 건설장에 나올 때마다 느끼게 되는 벅찬 감정이다. 나올 때마다 심장이 커지고 키가 크는것 같다.

정옥은 흐뭇한 눈길로 건설장을 둘러보았다.

옹근 하나의 도시와 맞먹는 새 거리가 일떠서고있었다. 그 이름은 가만히 불러만 보아도 가슴을 뭉클하게 해주는 《광복거리》이다. 《광복거리》!

아버지, 어머니들이 피흘려 찾은 이 땅에 자손들이 로동당시대의 새 건축물들을 일떠세우고있다. 만년대계로 온 세상에 소리쳐 자랑할수 있게…

머지않아 여기 평양에서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열리게 된다. 온 세상의 청년학생들이 모여든다. 선렬들이 찾아준 이 땅이 오늘은 온 세상에 자랑을 떨치게 되였다. 그래서 더더욱 이 건설을 다그치고있는것이다.

정옥은 창덕학교앞으로 해서 안골쪽으로 대통로를 가로질러 넘어갔다.

은경이네 대학생들이 그곳에서 기초파기를 하고있었던것이다.

은경이네 대학생들도 광복거리건설장에 지원나왔다. 정옥은 그들에게 주려고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 작업장갑을 가지고 나왔다.

며칠밤을 새우다싶이 하며 만든 장갑들이였다.

은경이가 집에 전화를 할 때마다 기초파기가 어떻게 《간고》하게 벌어지고있으며 자기네는 그 전투에서 단연 1등을 하기 위해 어떻게 하고있는데 어떤 지원을 바란다는 등 요구하는것들이 있어 드문히 나오게 되는 정옥이였다.

그 어린것이 이 광복거리에 자기의 땀을 바쳐 창조물을 일떠세운다는것이 대견하기 그지없었다. 정옥은 지휘부에 들려 은경이가 어디에 있는가고 물었다.

《은경동무네 학급은 오늘 낮교대여서 현장에 있습니다. 아마 지금은 작업을 뗐을겁니다.》

안면이 있는 참모는 마침 그리로 가는 길이라면서 《가십시다.》하며 정옥을 안내했다.

《그 보짐을 제가 들겠습니다.》

《괜찮아요. 가벼운걸요. 그런데 감탕이 그리도 애먹이는가요?》

정옥은 울퉁불퉁한 흙더미를 타고넘으며 걱정스런 어조로 물었다.

《예, 건설에서는 원래 암반이 나오면 제일 난공사라 한다지만 정작 맞다들리고보니 감탕이 더 야단이구만요. 처음엔 암반이 없는데라고 다들 좋다 했는데… 삽날이 쑥쑥 들어가는게 사기가 났댔지요. 그런데 글쎄 파구파구 또 파두 끝이 있어야지요. 도대체 밑바닥이 어디까지인지 알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렇다구 물렁물렁한 감탕우에 집을 지을수는 없구… 감탕을 파내고 기초를 한다는게 얼마나 힘든것인지 직접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잘 모를겝니다.》

그들은 이번엔 산더미같이 쌓아놓은 골재무지를 에돌아갔다.

《어쨌든 건물이 들어앉을 부분의 감탕을 다 들어내고 혼석을 채워 넣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반을 교체한 다음에야 기초를 해야 하는데… 끝이 없습니다. 이제는 어지간히 깊이 들어갔는데… 그러니 또 이젠 좌우의 감탕벽들이 무너져내리기까지 합니다. 파면 밀려내리고 무너지고… 한삽을 파면 두삽 세삽이 무너지고… 하루밤 자고나면 전날에 판 구뎅이가 다 메워지고맙니다. 지금은 장마철이라 더하지요. 오죽이나 안타까왔으면 은경동무가 감탕을 그러안고 〈이 괴물같은 놈아!〉하면서 감탕판에 주저앉아 몸부림을 쳤겠습니까.》

정옥은 가슴이 아릿해왔다. 온몸이 감탕투성이가 되여 주저앉아 울었을 딸애의 모습이 애처롭게 안겨왔다. 연약한 애였다. 앞으로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있는 애였다.

벌써 날이 어둑어둑해지고있었다.

은경이네 학급에 가니 그들은 현장천막식당에서 한창 식사를 하고있었다.

《은경동무!》

참모가 가까이 다가가며 소리쳐불렀다.

저 안쪽 식탁에서 식사를 하던 한 처녀가 일어서며 대답했다.

《은경동문 없습니다. 작업을 끝내기 바쁘게 어디 잠간 갔다오겠다고 하면서 갔는데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식사도 안하고 어딜 갔단 말이요?》

《굴착기를 좀 얻어보겠다구 갔어요.》

《굴착기? 굴착기가 어디에 있게…》

《모르겠어요. 어쨌든 은경동무야… 힘이 있잖아요.》

참모는 허― 하고 김빠진 소리를 냈다. 그는 정옥에게 고개를 돌리며 면구한 어조로 말했다.

《은경동무가 자리를 떴구만요.》

정옥은 왜서인지 얼굴이 화끈해옴을 느끼며 눈길을 돌렸다. 《힘이 있잖아요.》하는 소리가 별로 가슴을 쿡 찌르는것 같았다. 그 말이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되였던것이다.

정옥은 더 말을 안했다. 장갑을 참모에게 넘겨주고는 인차 돌아섰다. 은경이가 돌아오면 집으로 전화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대통로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느라니 어쩐지 마음이 허전해진다.

은경이는 전화를 할 때마다 자기네 학급은 경쟁에서 늘 이기군 한다고 했었다. 이겨야 한다고 했었다. 자기는 다른 사람들과 처지가 같지 않다는것이였다.

정옥이도 그에는 공감했었다. 투사의 후손이 응당 경쟁에서도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보니 이기는것도 어떻게 이기는가가 문제인것 같다.

《힘》이 있다는 말이 귀에 거슬린다.

정옥이가 알건대 은경이는 자주 투사들의 자녀들을 찾아다닌다고 했었다. 건설지휘부에도 누가 있을수 있었다. 그에게 가서 떼를 쓰면 굴착기쯤은 돌려줄수도 있을것이다. 그렇게 굴착기를 돌리면 그 굴착기를 당금 써야 할 건설장은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이 광복거리건설장은 옹근 하나의 대도시와 맞먹는 거창한 건설장이라 기계수단들이 총동원되다싶이 하여 굴착기 한두대쯤 돌리는것은 문제도 아닐것이다. 문제는 은경이가 감탕과 싸우느라 지치고 맥이 빠지자 자기의 그 《힘》을 쓰려고 나서지 않았는가 하는것이였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

정옥은 자기가 은경이를 막내딸이라고 너무 어루만지며 키우지 않았는가 하는 불안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밥을 먹자 별로 마음이 싱숭생숭해져 은경의 전화가 오기를 기다리며 또다시 실화책을 펼쳤다. 이제는 책으로 인쇄된 실화였다. 출판된지 5년이 넘어 벌써 몇번째 읽어본 실화책…

 

1

 

《얘 선화야, 혹시 요즈음… 네 오빠한테 무슨 일이 있은건 아니냐?》

아래목에 이불을 덮고 누운 이모가 화로에 약탕관을 올려놓고 약을 달이는 정선화를 쳐다보며 조심스레 묻는 말이였다.

선화는 부저가락으로 숯불을 헤집어 약탕관밑굽에 알불을 모아놓으며 도리머리를 했다.

《그런 일은 없었어요.》

《그럼 참 이상한 일이구나. 전엔 술이란걸 입에 대지도 않던 사람인데…》

걱정이 짙은 눈길로 선화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이모가 후― 하고 긴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원래 서씨집안엔 대대로 술하는 사람이 없었단다. 저 사람 아버지네형제들도 그렇구… 할아버지네두 기껏해야 두석잔씩이였지.… 증조할아버지가 진사벼슬을 했는데 량반가문이라 탁배기 같은건 입에 대지도 않았댔어. 명절때나 생일때나 손님이 왔을 때만 찹쌀이 동동 뜨는 약주를 조금씩 하였지. 증조할아버지는 술통제가 이만저만이 아니였어, 술이 아까운 사람을 잡았다구.… 글쎄 어떤 사람이 술에 취한김에 말을 잘못해서 개화파인 자기 스승이 잡혀죽게 하였다는거지. 조정에선 그 스승뿐이 아니라 가족들까지 멸족시켰어. 그 스승과 가족들의 시체를 몰래 묻어준 사실이 드러나 증조할아버지는 류배살이를 떠나게 되였는데… 그때부터 우리 집안도 기울어지기 시작했다고 말들을 하더구나. 우린 간도로 건너가서 농사를 짓댔는데 전염병이 돌아서… 다 죽구… 나와 봉삼이 저 사람만 남게 되였지. 종가가 망해도 향로 향합은 남는다더니 서씨 종가네가 다행히 저 봉삼이 한사람 남은셈이지. 그런데 저 사람이, 술이 그렇게 나쁘다는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사람이 왜 그럴가. 결국 집안이 이꼴이 된것두 따지고보면 그 술때문인데…》

선화는 눈을 내리깔고 그 말을 듣다가 호― 하고 가늘게 한숨을 내쉬였다.

오늘 저녁에는 오빠를 찾아나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빠가 왜서 요즈음 매일 저녁 그렇게 만취되여 들어오군 하는지 불안스럽기 그지 없었다. 혹시 자기때문은 아닌지…

선화는 그에게 죄스러움을 느끼지 않을수가 없었다.

사람의 정이란 참으로 이상했다.

며칠전, 그러니 서봉삼이가 술을 마시는 일이 생기기 하루전의 일이였다.

그날 서봉삼은 점심상을 물리자 웃방으로 선화를 불러들이더니 다짜고짜로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내 오늘 저녁 한 총각을 데리고 올테니 그런줄 알고 준비를 좀 하고있어라. 물론 우리 조선사람이지. 둘째(서봉삼은 여기 장백땅에 오자 마음맞는 친구들로 결의형제를 무었었다.)네 옆집에 사는 늙은이의 외손자라는데 사람이 괜찮다더라. 베이징대학에 다니는데 외할머니 혼자 산다고 방학때마다 와서 나무도 해주구 집도 수리해주구 하면서 도와주군 한다더라. 지금도 겨울방학이 되여 와있는데… 얼마 멀지도 않다. 이도강쪽으로 한 10리쯤 될가… 》

선화는 대뜸에 두손을 내흔들었다.

《아유 됐어요. 그런 말 더 듣지도 않겠어요. 대학이 아니라 천하에 없는델 다니구 사람이 세상 좋다 해두 난 싫어요.》

서봉삼이 안타까운 어조로 설복했다.

《야 선화야, 너 나이 지금 몇살이가. 이젠 가야 해. 너 아버지, 어머니가 얼마나 걱정하는줄 알기나 하니? 네 이모와 나한테 신신당부했어. 엊그제 온 편지를 너도 보았지? 두말말고 선을 보자. 새파란 처녀가… 아무리 정이 들었댔다 해두 그렇지, 벌써 몇년째가. 정말 궁색스러워 못보겠다.》

《오빤 내 걱정 말구 형님이나 빨리 맞아들이라요. 이모 생각두 해야할게 아니예요.》

《야, 네가 눈이 시퍼래서 앉아있는데 내가 어떻게 장가든단 말이냐. 네가 시집가기 전엔 안 가.》

《그럼 내가 이 집에서 나가면 될게 아니예요.》

선화가 냉큼 일어서려 하자 서봉삼이 성을 내며 팔을 잡아 앉혔다.

《너 지금 제정신 있는 소리가? 절대 다른 생각 말구 그저 이 오빠가 시키는대로 해라. 넌 지금 하루라도 빨리 사는 환경을 바꿔야 해. 그대로 있다가는 밤낮 그 사람 생각밖에 나는게 없어. 간 사람은 간 사람이구 살아있는 사람이야 살아야 할게 아니냐.》

《됐어요, 오빠. 그런 말 더 하지 말자요.》

선화는 새파래져서 아래방으로 내려왔다. 이모가 아연한 눈길로 바라보는것을 느끼자 그 걸음으로 부엌에 내려갔다. 왱강쟁강 그릇들을 가시기 시작했다.

가슴이 매맞은것처럼 얼얼해왔다.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서봉삼이며 이모며 가까운 사람들은 이제는 시집을 가야 한다고 자꾸 든장질을 하는데 선화는 그것이 싫었다.

눈앞에는 아직도 때없이 지철민의 모습이 떠오르군 하였다. 그처럼 어질고 순박하고 혁명밖에 모르던 사람, 그런 사람이 어처구니없게도 《제사람》들에게 죽었는데 억울하고도 원통한 그 죽음을 세월이 흐른다고 어찌 잊을수가 있겠는가.

녀성은 사랑을 위해 태여나고 사랑을 위해 산다고 선화는 생각해왔었다. 앞으로 사랑만을 노래하는 녀류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있었다. 사랑도 남보란듯이 꽃피우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 모든것을 지철민이와 함께 다 잃었다. 지철민이가 다 걷어안고 가버린듯…

선화는 모든것을 포기해버렸다. 아무런 뜻도 목적도 없었다. 사는 의미를 잃었다. 모든것을 체념했다. 그는 그저 살고있을뿐이였다. 아무런 즙도 향기도 없이…

있다면 지철민이와 사랑을 꽃피우던 그 나날들을 추억하는것뿐이였다. 미래는 없었다. 오직 추억뿐이였다.

쏟아지는 비줄기, 꾸르릉 꾸르릉 머리우를 굴러다니던 천둥소리, 옥계동으로 비를 맞으며 가던 그 밤길… 해란강뚝을 거닐며 물새우는 소리를 듣던 산보길, 지철민이가 있는 어랑촌유격근거지로 가던 일…

그와 함께 계순언니를 찾아가던 일, 부채붓꽃, 앓는 대원의 입맛을 돋구겠다고 고동하의 찬물속에 들어가 반두로 강기슭의 풀섶을 더듬으며 산천어를 잡던 일… 초롱불을 켜들고 그를 따라가며 감기들겠다고 걱정하던 일… 그다음엔…

선화는 소스라쳤다. 그다음엔 추억하기도 몸서리치는 악몽같은 일들이였다. 추억은 끝났다. 두팔을 묶이운채 나무밑에 서서 몸부림치던 지철민의 모습은 눈에 흙이 들어간대도 잊지 못할것이다.

서봉삼이며 이모며 아버지, 어머니는 이제는 그만 잊어버리라고 권하건만 심장은 자기 고유의 론리대로 살며 숨쉬고있었다.

심장에는 그 어떤 명령도 요구도 통하지 않는다.

《야, 선화야. 너무 옥생각만 하지 말어라. 녀자란 때가 있는 법이야. 한늬 이렇게 살수야 없지 않느냐. 빨리 마음을 돌려야 해.…》

일을 나가면서 서봉삼이가 부엌문가에 나타나 속상해서 한 말이였다.

그날 저녁에 서봉삼은 술에 만취되여 들어왔었다.

선화는 놀랐지만 다 말구어놓았던 혼사일이 튀는 바람에 화가 나서 술을 마셨으리라 생각하고 그저 한숨만 내쉬고말았었다. 이모도 그렇게 생각한듯 했다.

그런데 그것이 오늘까지 벌써 며칠째 계속되는것이다. 집에 들어와서 다시는 혼사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선화는 괴로왔다. 그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요구에 (시집을 가라는) 응할수는 없는 선화였다.

혁명을 하겠다고 뛰여다니다가 억울하게 잘못된 사람인데 그를 추억해 줄 사람마저 없다면 그의 죽음이 얼마나 허무한것으로 되겠는가. 물론 시집을 가서도 그를 종종 추억해줄수는 있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선화의 심장이 움직여주지 않는것이다.

이래저래 심란해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선화였다. 사람들의 말처럼 자기가 계속 이대로 살수 있겠는지, 이게 옳은 처사인지는 생각도 안 해본 그였다.

갑자기 약탕관에서 보글보글 약이 끓는 소리가 났다. 방안에는 쌉쓰레하고도 향긋한 약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선화야,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구나. 약은 내가 달여먹을테니 오빠한테 좀 가보려무나. 이젠 퇴근할 때도 되였는데… 도대체 무엇때문에 그러는지… 》

선화는 아래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잠시 생각을 고루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어요.》

선화는 솜옷을 입고 목도리를 둘렀다.

《든든히 입고 가거라. 날씨도 찬데…》

선화는 이모의 다심한 사랑을 새삼스레 느끼며 《걱정마세요. 인차 갔다와요.》하고는 밖으로 나섰다.

밖에서는 눈송이가 풀풀 날리고있었다.

선화는 얼굴을 다소곳이 숙인채 총총히 우동집을 에돌아갔다.

생각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오빠가 정말 나때문에 그런다면… 난 어찌해야 하나. 아니, 오빠가 아무리 요구한다 해도 난 절대로 그럴수는 없어. 그렇다면?…

오빠는 며칠째 어느 하루도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이 없었다. 잠자리에 누워도 깊은 잠에 들지 못하고 자주 몸을 뒤척이는것 같다. 때없이 후― 하고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가만… 오빠가 혹시 경찰서에서 무슨 된욕을 먹어 그러는것은 아닐가. 그것도 아니면 그《토비》놈들이 나타나거나…)

분명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긴것 같았다.

선화는 풀끝에 앉은 새처럼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마음이 편할리가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선화는 서봉삼이라는 오빠의 《나무》에 《둥지를 튼》 새인데 그 《나무》가 꺼꾸러지면 《둥지》도 풍지박산이 나고말것이다.

눈송이가 점점 더 커졌다. 애기주먹만 한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온 공간엔 눈송이들이 꽉 찼다. 서로 부딪치며 내리며 무엇이라 속삭이는듯 싶다.

선화는 경찰서 정문앞에서 조금 떨어진 천가게 추녀밑에 들어서서 목도리와 어깨의 눈을 털었다.

《천을 사러 왔수?》

가게문으로 호두알처럼 주름살이 조골조골한 주인로파가 내다보며 물었다.

《아니예요.》

선화는 어줍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살래살래 저었다.

《눈이 너무 와서 잠간 그어가려구…》

《오…》

로파는 쓰거운듯 입을 다시며 가게문을 닫았다.

얼핏 그 로파의 얼굴을 보고 다시 고개를 돌리던 선화는 별안간 어머니 생각이 나서 눈을 슴벅거렸다. 그 로파의 모상이 어머니의 모습과 비슷해보였던것이다.

(어머니는 지금 어떻게 살고계실가, 아버지는?…)

너무 멀리 있다나니 1년이 넘도록 아직 가보지도 못하고있다. 자주 앓던 아버지의 건강은 어떠한지… 편지엔 다 일없다고 무고하다면서 이 딸에 대해서만 걱정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 딸이 집에 대해 근심할가봐 그랬을것이다.

불시에 아버지,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목이 메여오른다. 이 딸은 다 자라서도 아버지, 어머니에게 근심만 끼치고있구나 하는 자책감에 가슴이 미여지는듯 하다. 아직도 《토비》 비슷한 놈들이 집주변에서 어슬렁거리군 한다니 집에 가볼수도 없고… 난 정녕 어쩌면 좋을가.…

갑자기 경찰서 정문으로 까만 옷을 입은 정복쟁이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회색작업복을 입은 오빠는 맨뒤에서 고개를 수굿한채 걸어나왔다. 선화는 잠시 자리를 피할가 하다가 그대로 서있었다. 오빠가 오기를 기다렸다.

오빠는 왜서인지 집쪽이 아니라 저쪽 반대켠으로 스적스적 걸어갔다.

선화는 의아해서 그를 따라가려다가 경찰들이 왁자지껄 떠들면서 마주오는 바람에 잠시 그 자리에서 지체를 했다.

눈은 여전히 펑펑 쏟아져내린다. 마치 하늘이 통채로 무너져내리는듯 하다.

선화는 몸을 반쯤 돌려 경찰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오빠가 간쪽으로 종종 걸음을 놓았다. 오빠는 어디로 갔는지 벌써 보이지 않았다. 어느 객주집이나 술집, 식당에 들어갔을것이다.

선화는 거리 첫탁에 있는 돈있는자들이나 경찰들이 자주 드나든다는 사꾸라료정에 들려보았다. 퍼라 마셔라 왜가리소리를 질러대는 그 료정에는 오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오빠가 이런데 들어올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화는 간드러진 왜녀인의 웃음소리와 사람을 홀리는듯 한 간사한 노래소리에 쫓기듯 밖으로 뛰쳐나왔다. 욕지기가 일었다. 눈과 함께 찬공기를 정신없이 들이마셨다.

이번엔 객주집을 찾아갔다. 언덕길로 한동안 올라가다가 봇나무가 한그루 서있는 곳에 객주집이 자리잡고있었다. 오빠는 객주집에도 없었다.

(어디로 갔을가?)

선화는 다시 언덕길을 내려왔다.

문득 어디선가 축음기의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적에

 

애절한 녀인의 노래소리는 끊길락말락하면서 선화의 가슴을 긁어내리는듯 했다.

《봉선화》술집에서 나는 축음기소리가 분명했다.

조선사람들이 많이 찾아든다는 눅거리술집이다. 선화는 급히 그쪽으로 향했다.

노래소리는 점점 커졌다.

 

어언간에 여름 가고 가을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락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가슴을 저며내는듯 한 서글픔과 서러움, 울분이 눈내리는 하늘가에서 몸부림치며 배회한다. 선화는 자기 신세가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량볼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것을 어찌할수가 없었다. 일제가 《금곡》령을 내린 노래이지만 술집에서만은 눈을 감아주는지도 모른다. 조선사람들이 모두 주정뱅이가 되여 비애와 한탄과 피눈물로 시들어가기를 바라서인지… 실지 이 노래만 울리면 사람들은 가슴을 쥐여뜯으며 술을 더 찾군 한다고 한다. 매상고는 계속 올라가고… 노래도 돈벌이수단으로 되는 세월이였다.

선화는 잠시 밖에 서서 마음을 가다듬고나서 술집문을 열었다. 조선식으로 온돌방을 한 술집인데 온통 담배연기와 술내와 음식타는 냄새로 혼탁되여 숨쉬기가 가쁠 정도였다. 저기 웃방쪽에 몸이 뚱뚱한 주인이 바지저고리를 입고 앉아 축음기판에 한손을 집고 한손으로는 레코드판들을 고르고있었다. 그 아래로부터 쪽상들이 여기저기 놓여있는데 사람들이 두세명씩 모여앉아 벅작 떠들면서 술을 마시고있었다.

선화의 눈길은 아래켠 구석쪽에 가서 멎었다.

오빠가 쪽상을 앞에 놓고 앉아있었다. 쪽상우에는 한되들이 청주병과 보시기와 산나물 한접시가 놓여있었다. 청주병엔 술이 밑굽에 조금 남았는데 보시기엔 술이 남실거렸다. 산나물접시엔 저가락이 한번도 가지 않은듯 했다. 고사리같은데 모독하니 담긴 그대로였다. 오빠는 물끄러미 보시기의 술을 들여다보더니 또다시 쭉 들이켰다. 술잔도 아니고 보시기로 마시는 판이다.

선화는 놀라서 얼른 오빠에게로 다가갔다.

《오빠!》

봉삼은 술보시기의 밑굽을 다 내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두눈은 벌써 초점을 잃은듯 게슴츠레해졌다.

《아… 너 선화로구나, 어떻게… 왔니?》

서봉삼은 딸꾹질을 한번 하더니 보시기에 또 청주병을 기울였다. 마지막까지 다 기울였으나 보시기에 채 차지 않는다. 봉삼은 주인에게 소리쳤다.

《여보시오, 술… 더 가져오시오, 술…》

선화는 얼른 술병을 뺏아쥐였다. 빈병이였다. 선화는 서봉삼이가 술보시기를 또 쥐려 하자 얼른 그것을 붙잡았다.

《안돼요. 이제 더 하시면…》

《안되긴 왜 안돼? 난 마셔야겠다. 취해야겠단 말이다.》

《오빠는 벌써 취하셨어요. 이젠 집에 가시자요, 예?》

《아니, 아니. 난 안 가겠어. 술을 마시고야… 가겠어.》

《오빠!》

선화는 눈물이 가랑가랑해서 애타게 오빠를 쳐다보았다.

《집에서… 이모가 얼마나 걱정하시는지 몰라요. 어서 가시자요.》

《어머니가?》

봉삼은 멍하니 선화를 쳐다보더니 욱―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떨구었다.

두손으로 술상을 그러잡고 한참 그린듯이 앉아있더니 움쭉 일어났다.

《어머님이 기다린다면야… 가야지.…》

뒤에서는 노래소리가 애절히 따라오고있었다.

 

북풍설한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눈송이는 점점 성글어지고있었다.

 

선화는 저녁상을 물리고 설겆이까지 끝내자 인차 웃방으로 올라갔다.

서봉삼은 바람벽에 등을 기댄채 눈을 꾹 감고있었다.

선화는 이모가 들을세라 사이문을 꼭 닫고는 속삭이듯 애절히 물었다.

《오빠, 무슨 일이 있는지 말을 좀 해주세요. 이모가 요즈음 마음을 못놓으시고 노상 걱정속에 살고있어요. 오늘도 그래서 나를 보냈던거예요. 무슨 일이예요. 나때문에 그래요? 아니면?… 제가 알면 안되는 일인가요?》

서봉삼은 대답을 안했다. 고통스러운듯 미간만 더 찌프릴따름이였다.

어느새 눈이 멎고 바람이 터졌는지 문풍지가 붕붕 울었다.

《오빠!》

서봉삼은 대답을 안했다.

여전히 눈을 감고있었다. 마치 잠을 자는듯 했다.

선화는 그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발을 가볍게 잡아흔들었다.

《오빠!》

갑자기 서봉삼의 울대뼈가 꿀꺽 하고 오르내리더니 퉁명스러운 소리가 새여나왔다.

《내려가 자기나 해라. 넌 알 필요가 없는 일이야.》

《아니, 난 알아야겠어요. 혹시 그 〈토비〉들과 관련된 일은 아니예요?》

《아니란데두… 자, 어서…》

《못 내려가겠어요. 사연을 알기 전엔… 나때문이라면… 난 가겠어요. 이대로는 불안해서 못살겠어요.》

선화는 앵돌아져서 팩 돌아앉았다.

서봉삼은 물끄러미 선화를 쳐다보더니 벽에 잔등을 기댄채 또다시 스르르 눈을 감았다. 한참이나 무슨 생각을 하다가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네가 정 알겠다니 이야기를 하자. 난 솔직히 요즘처럼 마음이 괴롭고 자신이 저주스러워본적은 없다. 내가 왜 그때 너의 말을 듣지 않고 경찰서에 발을 들여놓았는지… 정말 가슴이 터지는것만 같구나.》

선화는 가슴이 섬찍해지는것을 느끼며 몸을 천천히 돌려 오빠를 쳐다보았다.

《그건… 무슨 말이예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난 처음엔 경찰서라니 그저 강도질이나 도적질을 하다 잡힌 그러루한 잡범들을 다루는 곳인줄 알았댔다. 경찰서에 들어가면 그 〈토비〉들도 더는 어쩌지 못하리라 생각했고… 우리 작은 가정 하나는 유지되리라 생각했었지. 그러나 지금 경찰서감방엔 그런 잡범보다 정치범들이 더 많다. 우리가 재작년겨울 여기 장백으로 나올 때 려인숙에서 만났던 그 녀자가 있지 않니. 그 녀자가 바로 우리 경찰서에 잡혀와있다.》

《뭐예요?》

선화는 그만 한길이나 뛰여오를번 했다.

《려인숙에서 만났던 녀자라니… 아니, 그럼 계순언니가?》

《그렇다. 벌써 며칠째 그 랭방에서… 고문을 받으면서… 차마 눈뜨고는 볼수 없구나. 어찌나 가혹하게 고문을 들이대는지…세상에 녀성을 어떻게 그렇게…》

선화는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그 언니가 어떻게 여기엘?…》

《유격대후방밀영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토벌〉에 걸렸다는구나.》

억이 막혔다. 계순언니가 왜놈들에게 잡히다니…

문득 주막집에서 만났을 때 자기는 살길을 찾아 떠돌아다닌다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그때도 예감은 했었지만 역시 계순언니는 지금껏 인민혁명군에 들어가 싸우고있었던 모양이였다.

《계순언니 혼자 잡혀왔어요?》

《아니, 남자 두명이 더 있었는데… 그들은 이미 죽었다. 마지막까지 굴하지 않고 고문을 이겨내다가… 고문장에서 쓰러진채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정말이지 그런 불굴의 인간들을 난 처음 보았다. 그들이야말로 진짜혁명가, 진짜 공산당이 아니겠니.》

《계순언니는 어떻게 하고있어요?》

《그 녀자도 지금까지는 이겨내고있는데… 고문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맞서고있다. 왜놈들은 사령부가 어디에 있는가 대라면서 피를 본 승냥이들처럼 더 악착스레 달려들고… 물고문, 불고문… 정말 말로 옮기기가 힘들 지경이다. 그래도 꿋꿋이 이겨내고있다. 그 녀자는 나에게서 그걸 알아낼 꿈도 꾸지 말라면서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기에 이제 너희 일제놈들은 꼭 망하고 조국은 광복되고야만다는것이다.

난 생각했다. 정말 공산당이 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이번에 여기 경찰서에 잡혀들어왔던 그런 빨찌산들이라면 일제를 꼭 멸망시키고야말리라는것을 말이다. 그 녀자는 나를 보고도 이런 말을 하더구나. 〈당신은 조선사람같은데 왜놈들을 위해서 일할것이 아니라 왜놈들을 반대해서 싸워야 한다.〉고 말이다. 이제 나라가 해방되면 어떻게 얼굴을 쳐들고 살겠는가고… 오늘이 아니라 래일을 생각하라면서…》

정선화는 가슴이 쿡 마쳐오는것을 느꼈다. 계순의 말이 바로 자기를 두고 하는 말처럼 생각되였던것이다.

5년전 잊을수 없는 그밤에 룡정의 이모네 국수집 뒤마당에서 일제놈들이 좋은가고 묻던 말이 새삼스레 가슴을 허비고든다.

정선화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심장이 뒤틀리우는듯 한 아픔을 느꼈다.

《계순언니가 오빠를 알아보았어요?》

서봉삼은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아니… 그런것 같지는 않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려인숙에서도 사람들이 자기 얼굴을 볼가봐 털모자를 푹 눌러쓰고있었으니 계순이가 오빠의 얼굴을 자세히는 보지 못했을것이다.

(계순언니가 나를 보면 무엇이라 말할가. 이렇게 경찰서일을 하는 오빠네 집에 들어박혀 빈둥대고있다는것을 알면?…)

남편이 《민생단》에 몰려 억울하게 죽고 또 자신까지 《민생단》에 몰렸지만 변함없이 그 한길만을 꿋꿋이 걷고있는 계순이다. 분명 아이까지 어딘가 떼두고 유격대로 들어갔다. 이렇게 왜놈들에게 잡혀서도 굴하지 않고있는 계순이다. 그런데 나는 …

정선화는 얼굴에 모닥불을 들쓴것만 같았다.

(오빠도 그래서 그리도 괴로와하군 하였구나.)

《왜놈들은 벌써 며칠째나 악형을 들이대지만 그는 언제 한번 숙어든적이 없었다.》

엊그제는 잔인하기로 소문난 고등계주임이 자기가 직접 심문하겠다면서 리계순을 끌어오라고 호통쳤다고 한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리계순은 제 발로 걸어서 고문실로 들어섰다. 마른 명태처럼 빼빼 마르고 돼지주둥이처럼 입이 삐여져나온 고등계주임은 삵의 눈으로 리계순을 쏘아보았다.

《흥, 네가 리계순이냐? 우리 아이들이 〈도무지 손댈수 없는 녀자〉라고 한다면서?… 하지만 나한테는 안돼. 나한테는 꼭 한마디만 하면 된다. 그래 너희네 사령부가 어느 방면에 있느냐?》

리계순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른다? 그래 살고싶지도 않느냐?》

《살고싶다. 살아서 네놈들이 망하는걸 꼭 보고싶다.》

《그렇다, 그렇다면 말을 해야지.》

계순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 할수 없지. 야, 그걸 가져와.》

고등계주임이 밖에 대고 소리치자 경찰 두놈이 나무상자를 맞들고 들어왔다.

《자, 봐라. 너도 이렇게 되지 않으려거든…》

순간 리계순이 몸을 흠칫했다.

상자안에는 두사람의 머리가 들어있었던것이다.

그것은 《4련령감》과 왕동무의 머리였다.

리계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등계주임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리계순이 놀라는것이 자기의 계획대로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였다.

《이젠 알만해? 자꾸 뻗대다가 저런 신세가 되지 말구 한마디만 하란말이야. 그래 사령부가 어디 있어?》

순간 리계순의 두눈에서는 번개가 이는듯 했다.

《이 승냥이같은 놈들아, 네놈들이 우리 동지들을 어떻게 죽였느냐. 이 살인마들아, 네놈들이 그런다고 내 두려워할줄 아느냐. 좋다, 내 오늘 똑똑히 말해주마. 우리 사령부는 저기, 저 하늘에 있다. 우리 장군님은 저하늘의 태양이시야. 버럭지같은 네놈들이 그걸 알면 어쩐단 말이냐. 네놈들은 이제 천벌을 받고야말것이다.》

리계순은 펄펄 뛰며 놈들을 규탄했다. 그러자 그처럼 태연자약해보이던 고등계주임놈도 더 참지 못하고 가죽채찍을 마구 휘둘러댔다.

《이년, 네년이 정말 보통이 아니로구나. 좋다, 어디 죽어봐라. 죽어보란 말이다.》

고등계주임은 입에 게거품을 물고 달려들었다.

마침내 계순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서봉삼은 진저리를 떨었다.

《지금 그 녀자의 몸은 성한데가 하나도 없다. 매일처럼 고문을 들이대는데 쇠덩이인들 견디겠니? 더구나 어제부터는 간도총령사관에 있다는 놈들까지 왔는데… 그속에 있던 계집년이 살통이나 만난듯이 날뛰고있다.》

서봉삼이 말한 《그 계집년》이란 바로 간도총령사관의 비밀요원 한미영이였다.

당시 일제는 보천보와 구시산, 간삼봉들에서 무리로 녹아나게 되자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토벌》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그 사령부의 행처를 찾아내기 위해 특무기관들을 백두산지구에로 집중시켰다.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가 백두산지구에 틀고앉았다고 간파한것이다. 한미영이도 다나까의 지시로 장백지구로 나오게 되였는데 뜻밖에도 녀자빨찌산을 체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장백경찰서로 달려온것이다.그러나 선화는 계순에 대한 걱정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돌릴수가 없었다. 선화는 진저리를 쳤다.

그처럼 믿고 따르던 계순언니가 사경에 처했는데 그가 오빠를 알아보지 못한것을 다행이라 생각했던 자기가 저주스럽기까지 했다. 자기에 대한 환멸을 느꼈다.

선화는 그를 만나 사죄라도 하고싶었다.

선화는 더운것을 꼴깍 삼키고나서 조심히 오빠를 쳐다보았다.

《저… 내가… 그 계순언니를 한번 만나볼수 없을가요?》

서봉삼은 뜻밖이라는듯 선화를 마주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무슨 소리를 하니? 너같은 사람은 들여놓지도 않겠거니와 만나지도 못해. 넌 보기만 해도 까무라치고말게다.》

《그래도… 오빠가 노력하면 … 잠간만이라도 …》

《내가?》

《그 〈동생〉들도 있잖아요.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 될수도 있지 않을가요?》

간수들중에는 서봉삼이가 《결의형제》를 무은 마음 맞는 사람도 있었다.

서봉삼은 선화를 쳐다보며 무엇인가 잠시 타산해보는듯싶더니 완강히 도리머리를 했다.

《아니, 안돼. 절대로 안돼. 지금 감방경비가 얼마나 철통같은지 아니? 그리고 난… 설사 그 기회가 생긴다 해도 너에게만은 그 광경을 보여주지 못하겠다. 너는 그걸 보면… 너무 끔찍해서 견디질 못해.…》

서봉삼은 선화에게 빨리 내려가 자기나 하라고 독촉했다. 자기도 좀 자야겠다면서…

할수없이 선화는 오빠의 이불을 펴주고 아래방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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