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편 비슬나무

제 11 장

 

글을 쓰는 사람들은 처음 보통종이에 초고를 썼을 때와 원고지에 옮겨놓았을 때 감정이 다르다더니 읽는 사람 역시 그런것 같았다.

정옥이 기자들이 원고지에 올려 가져온 실화를 보니 또 감정이 달랐다.

기자들은 실화원고를 진두일에게는 이미 보였다고 하면서 출판하기 전에 사실과 맞지 않거나 보충할것이 없겠는지 해서 가져왔다고 했다.

두일이네 가정에 대해 물으니 정애어머니는 둘째아들네 집에서 살면서 료양치료를 한다고 했다.

정옥은 기자들이 원고지에 올린것을 가방에 넣고다니며 짬짬이 읽어보기 시작했다.

이 실화원고는 진두일이가 쓴 글과 체계를 그대로 두면서 표현들만 부정확한것을 일부 고쳤다고 했다.

정옥은 오늘도 퇴근해오기 바쁘게 실화원고를 펼쳐들었다.

 

― 다섯번째 편지 ―

 

김정옥, 오늘은 설명절, 엄마의 축복을 받아요. 우리 정옥이가 세살이 되는 해예요. 좋지요?

우리 귀염둥이, 이 엄마랑 함께 나이를 세여보자요. 손가락으로 꼽자요. 요렇게, 하나, 둘, 셋.

호호호, 이제는 정옥이 혼자서 해봐요.

하나,… 호호, 그건 둘이예요. 요렇게 하나… 또 또… 요렇게… 호호호, 정옥인 욕심쟁이군요. 단번에 두살을 먹겠어요? 한살씩 먹자요. 하나, 둘, 셋. 호호호, 정옥인 이젠 세살, 정말 컸지요? 이젠 젖도 안 먹고… 이제부터는 할머니말씀 더 잘 들어야 해요. 에그, 요 귀염둥이…

정옥이, 오늘 이 엄마가 또 기쁜 소식을 전할게요. 우리 정옥이에게 보내는 설명절 선물이예요.

오늘 우리 후방밀영에 있는 병원으로 김일성장군님께서 찾아오시였댔어요.

설음식을 어떤걸 만들어 대접해올렸으면 좋을가요. 난생처음 내 손으로 지은 음식을 우리 장군님께 올리게 되였는데… 만반진수를 차려올린대도 모자라겠는데 글쎄 우리에겐 보리쌀과 강냉이, 산나물말린것 같은것들밖에 없으니…

이 엄마는 안타까와서 여기저기 분주히 돌아쳤어요. 이때 국수라도 해올릴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장군님께서 국수를 좋아하신다는데… 정옥이 아버지는 장군님께서 집에 오시면 꼭 국수를 해올리자고 말씀하시군 했는데… 글쎄 이런 깊은 산속이니 어떻게 하겠어요.

장군님께서 웃으시며 말씀하시였어요.

《계순동무는 뭘 그렇게 뛰여다니오? 작식대원두 아닌데… 일없소. 그저 동무들 먹는 그대로 가져오오. 난 그게 좋소.》하고 말이예요.

이때 송의사가 《계순동무는 치료만 받는것이 아니라 스스로 간병원일도 하고 작식일도 하면서 몸을 혹사시키고있습니다.》라고 말씀올리는게 아니겠어요?

아니, 장군님께 그런 말씀을 올리면 어떻게 해요. 그러지 않아도 걱정많으신 장군님이신데…

정옥이도 알지요? 이 엄마가 가만앉아서 치료만 받고있을수 없는 몸이라는걸…

일선에 나가 싸우지 못하는것만도 안타까운데 어떻게 환자노릇만 하겠어요.

장군님께서는 병원을 떠나시면서 이 엄마에게 딴 일에는 일체 손을 대지 말고 병을 떼는 일 하나에만 전심하라고 타이르시였어요.

그러지 않으면 병을 떼지 못한다고 엄포도 놓으시고… 그저 병치료를 하면서 학습만 하라나요.

정말 세상에 우리 장군님같이 인자하신분이 또 어디에 있을가요.…

 

정옥은 가슴속에 뜨거운것이 고여오르는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흥분을 진정하지 못해 방안을 거닐다가 창가로 다가갔다. 밤이 얼마나 깊었는지 아빠트창문들은 거의다 불이 꺼지고 여기저기 한두집들만이 여전히 자지 않고있는 사람들이 있는듯 불을 켜놓았다. 길가의 가로등도 하나건너 한개씩 불을 켜놓았다. 승용차며 뻐스들도 이따금 한두대씩 오갈뿐 거리가 한적하기 그지없다.

정옥은 자기도 모르게 박영순이네 집쪽을 바라보았다.

그 잊을수 없는 설날에 대한 이야기는 박영순이도 자주 들려주군 했었다.

병기창에서 박영순이네들이 장군님께 국수를 해올렸다는 소식을 어머니가 들은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서라고 한다.

 

리계순은 그 소식을 약품을 가지고온 전령병에게서 듣자 자책의 아픈 마음을 금할수가 없었다.

그길로 산너머에 있는 병기창을 찾아갔다. 통나무의자에 앉아 줄칼질을 하고있는 박영순의 손을 와락 잡으며 다짜고짜로 말했다.

《영순동지, 우리한테도 국수분틀을 하나 만들어주세요.》

《국수분틀?》

박영순은 밑도끝도 없는 말에 의아해서 계순을 돌아보았다.

《난 장군님께서 국수를 좋아하신다는걸 알면서도… 산속이니 어쩔수 없는것으로만… 이게 무슨 철없는 생각이예요. 난 모처럼 오신 장군님께 맨 보리밥만 해드렸으니… 아, 난… 난 어쩌면 좋아요.》

계순의 고운 눈엔 안타까움의 눈물이 가랑가랑 고여올랐다. 금시라도 주르륵 흘러내릴듯 함초롬히 고였다.

그 눈물을 보느라니 박영순은 갑자기 눈굽이 시큰해졌다. 가슴이 후더워올랐다.

《내가 미처 계순동무네 생각은 못했구만. 내가 장군님께서 국수를 좋아하신다는 말을 처음 들은것도 사실은 정옥이 아버지한테서였는데… 이 덜퉁한게 그만…》

《우리 정옥이 아버지한테서요?》

《그렇소. 1931년 겨울에 명월구에 가서 회의를 했는데 그때 리청산이네 집에서 국수를 눌렀댔다오. 리광동지가 국수꾸미를 하자구 꿩을 다섯마리나 가져왔댔다더군.

그때 장군님께서는 박훈이라는 사람이 세그릇씩이나 곱배기를 하자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는거요.

〈나도 국수를 좋아하는데 박훈동무는 나를 찜쪄먹겠소. 정말 국수대감이요.〉하고 말이요.

일환동지는 그러면서 앞으로 기회가 생기면 잊지 말고 국수를 해올리자고 하였댔지.》

계순은 그저 울고만싶었다. 불시에 남편 생각이 났던것이다.

그랬다. 남편은 국수가 생길 때마다 그런 말을 했었다. 그래서 농마가루나 메밀가루나 귀밀가루가 생기면 무조건 건사해두군 했었다. 앞으로 장군님을 집에 모시게 되면 꼭 국수를 해올리자면서…

그런데… 박영순은 그때 말을 잊지 않고 이 산속에서도 국수를 해올렸는데 난 산속이라고 그저 안타까와하기만 했으니…

정옥이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날 원망할가. 노해서 이렇게 꾸짖을것이다.

《당신은 그래 무슨 실수를 했소? 저 박포리는 깡통으로 국수분틀을 만들어서라도 국수를 해올렸는데 당신은… 그건 다 장군님을 모시는 마음이 뜨겁지 못하기때문이요.》

계순의 량볼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모처럼 오셨댔는데… 아, 이젠 언제 다시 그런 기회가 올수 있겠는가.

하지만 언제까지 후회만 하고있을수는 없었다. 그래서 박영순을 찾아온것이다.

계순은 더운 침을 꼴깍 넘겼다.

《영순동지, 어서 우리도 만들어줘요. 장군님께서 이제 언제 또 오실지 어떻게 알겠어요.》

박영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만들어줘야지. 장군님께서 부상병들때문에 늘 마음쓰시겠는데… 기회가 생기면 또 오실게야.》

《고마와요. 두번다시 그런 실수를 해서야 안되지요.》

박영순은 빈 깡통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맞춤한것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계순이도 따라가서 깡통들을 골랐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것이 있어 감회깊이 말했다.

《난 병기창을 생각하면 영순동지와 함께 손원금동지부터 떠오르군해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있는지.》

《정말 잊지못할 동무요. 그때 헤여질 때에는 금곡으로 가겠다고 했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어디에 가있든 변함이 없을게요. 지금 이 시각에두 바이올린을 타면서 무슨 연설을 하고있을지도 모르지. 락천적인 동무니까… 가만, 그 깡통이 좋을것 같구만. 그걸 달라구.》

박영순은 계순이에게서 깡통을 달래들고 이리저리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때… 처창즈근거지가 해산될 때 말이요. 우린 고동하기슭에 나란히 앉아 많은 말을 했더랬소. 작별인사를 나누자니 목이 다 메두만. 그러자 원금동문 웃으면서 〈걱정마시우. 이 손원금이한테는 바이올린만 있으면 되오다. 이거야말로 이 손원금의 둘도 없는 무기가 아니겠소.〉하더란 말이요.

〈이 손원금이 가는 곳엔 언제나 노래가 있고 생활이 있다는걸 잊지 마시우.〉하고…》

박영순은 깡통을 들고와 자기가 앉았던 그 통나무의자에 앉았다. 그곳이 자기의 고정된 자리였던것이다.

박영순은 마른 수건으로 깡통안을 깨끗이 닦아내고는 못으로 촘촘히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계순은 눈시울이 뜨거워오르는것을 느끼며 조용히 감심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하군 해요. 내가 원금동지처럼 그렇게 두눈을 다 잃었다면… 나도 원금동지처럼 락천적으로 살수 있을가 하고 말이예요.》

《왜 계순동무가 그렇게 못산단 말이요. 계순동문 이미 너무도 큰 상처들을 입지 않았소. 오빠와 남편을 잃구 하나밖에 없는 피덩이같은 딸애와 생리별을 하구… 계순동문 그 모든걸 참구 이겨내면서…》

《아이참, 영순동지!》

계순은 황급히 박영순의 말을 막았다.

《그래, 그런 말은 더 하지 말자구. 참, 강위룡동무소식을 아나?》

계순은 도리머리를 했다.

《아뇨. 우리 후방병원은 외딴 곳에 있어서… 그래, 위룡동지는 어떻게 되였어요?》

《강동무는 경위중대로 갔다오. 장군님을 직접 모시고있지.》

《야, 위룡동지는 얼마나 좋을가.》

강위룡은 박영순, 손원금이와 함께 금곡의 수리바위에서부터 어랑촌유격근거지를 거쳐 처창즈유격근거지에 옮겨와서도 병기창에서 일했는데 처창즈병기창에서 일할 때 뜻하지 않은 폭발사고로 화상을 입고 《민생단》으로 몰렸었다. 그때 화상을 입은 강위룡을 치료해준 처녀가 김확실이였다. 그들사이에 사랑이 싹터 결혼을 하게 되였는데 《숙반》지도부에서는 그것이 《민생단》을 배가시키는 반혁명적행위라고 하면서 김확실을 왕바버즈로 추방시켜 서로 강제로 갈라놓았다. 북만원정에서 돌아오신 장군님께서는 이 사실을 아시고 못내 가슴아파하시면서 그들을 《민생단》혐의에서 벗겨주시고 뜻깊은 상봉을 마련해주시였으며 그들이 결혼등록만 하고 결혼식을 안했다는것을 아시고는 결혼식상까지 차려주시였다. 여기 백두산지구에 귀틀집을 짓게 하시고 그들이 신혼살림을 펴도록 해주시였다.

정말 누구도 상상 못했던 일이였다.

이렇게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고 오늘은 그를 경위대원으로 불러주신것이다.

정말 세상에 우리 장군님같으신분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계순은 가슴속에서 뜨거운것이 그들먹이 차오르는것을 느꼈다.

나도 어서빨리 병을 고치고 장군님을 찾아가자. 떼를 써서라도 꼭 장군님 친솔부대에서 싸우게 해달래야지.

계순은 박영순이 만들어준 국수분틀을 가지고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채 후방병원으로 돌아왔다.

 

그이후 후방병원에서 있은 일들에 대하여 정옥이가 들은것은 리두수에게서였다.

위대한 수령님 친솔부대인 7련대 4중대 중대장이였던 리두수가 홍두산전투에서 무릎에 관통상을 입고 후방병원으로 가게 된것은 1937년초 그 설명절이 갓 지난 어느날이였다.

그때 후방병원에는 다른 부대에서 생활하다가 장군님의 친솔부대로 소환되여오던중 부상을 당한 발에 동상까지 입은 군수부장 박순일, 역시 다리에 부상당한 나이 제일많은 《4련령감》, 손에 부상을 입었을뿐 비교적 젊고 건강한 왕동무와 리계순이가 있었다.

그러니 리두수까지 다섯명의 환자가 치료전투를 벌리게 되였다.

그들은 왕동무를 내놓고는 모두 중환자들이였지만 얼마나 락천적으로 생활하였던지 전나무수림속에 자리잡은 그 귀틀집 작은 뙤창으로는 늘 웃음소리, 노래소리가 흘러나오군 했다. 그때면 마당가에 심어놓은 단풍나무잎사귀들과 집뒤에 실실이 드리운 송라들은 가벼운 바람결에도 흐느적이며 춤을 추는듯 했다.

그 뙤창으로는 웃음소리와 노래소리만 흘러나오는것도 아니였다.

아침해가 부채살같은 해살을 밀림속으로 비쳐내릴 때면 그 해살 한가닥이 와닿는 뙤창에서는 어김없이 《무장투쟁을 국내에로 확대발전시키기 위하여》, 《유격구를 해산하고 광활한 지대에로 진출할데 대하여》,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억세게 싸워나가자》와 같은 장군님의 연설들과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학습하는 소리도 흘러나오고 《쏘련에서의 사회주의건설》, 《도이췰란드에서의 파시즘의 대두에 대하여》, 《일본에서의 〈2. 26사건〉과 군부파쑈집단》, 《중국에서의 국공합작의 전망》과 같은 국제정세를 론하는 열기띤 목소리도 튀여나왔으며 보천보전투, 구시산전투, 간삼봉전투 등 최근에 진행된 전투들의 성과와 경험을 토론하는 흥분된 목소리들도 울려나왔다.

어느날은 후방물자를 한짐 가득 지고 온 통신원이 장군님께서 친히 쓰신 편지를 읽어주는 감격에 젖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동무들, 전략상으로 우리 본부대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되오.… 몸이 편치 못한 동무들을 두고가자니 내 마음이 아프오.

…동무들, 하루빨리 병과 싸워이기고 건강한 몸들이 되시오. 한초남동무가 동무들을 보살펴줄것이요. 혁명을 위하여, 조국광복을 위하여 군수부장 박순일동무, 중대장 리두수동무, 리계순동무! 〈4련령감〉, 왕동무… 한초남동무와 협력하여 꼭 병과 싸워이기시오.…》

귀틀집안에서 그 목소리를 듣던 계순은 가슴이 뜨거워올랐다. 자기도 모르게 눈굽이 쩡해오더니 량볼을 타고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사람 한사람 이름들을 써가며 자기들의 모습들을 그려보시였을 장군님의 그 세심하고도 다심한 사랑과 육친의 정에 자꾸만 목이 메여올랐다.

모두들 편지를 돌려가며 보고 또 보았다.

계순은 자기한테로 넘어온 편지를 이윽토록 들여다보았다. 자꾸만 눈앞이 뿌옇게 흐려져 제대로 가려볼수가 없었다. 장군님의 그 귀중한 사랑의 친필을 처음보는 계순이였다. 눈굽을 훔치고 또 훔치며 자자구구 읽고 또 읽다가 가슴에 꼭 품어안았다. 가슴이 불덩이같이 달아오름을 느끼며 뙤창너머 멀리 장군님께서 계실 하늘가를 바라보았다.

(장군님! 장군님말씀대로 병과 꼭 싸워이기겠습니다. 더는 저희들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병과 싸워이기고… 동지들이 빨리 몸을 회복하도록 진심으로 돌봐주고… 그래서 모두 건강한 몸으로 장군님품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리움이 한껏 실린 그 고운 눈에 또다시 핑그르 눈물이 고여올랐다.

계순은 밖으로 나왔다. 천고의 수림을 울궈내며 한모라기 바람이 불어와 달아오른 얼굴을 쓰다듬는다. 머리를 드니 전나무가지들사이로 비쳐내리는 해빛이 눈시그럽게 안겨온다. 계순은 두주먹을 꼭 움켜쥐며 숨을 페부깊이 들이쉬였다.

(내 어떻게 하든 가을까지는 동지들의 병까지 꼭 고쳐놓으리라. 가을까지는…)

 

계순은 동상을 입은 두발이 때없이 저려들고 어떨 때는 송곳으로 찔러대는것처럼 쑤시는듯이 아프기도 했지만 늘 웃으며 밥도 짓고 빨래도 했다. 아침식사를 끝내고 거둠질을 하기 바쁘게 바구니를 들고나가 산판을 오르내리며 산나물과 약초들을 가득 캐왔고 송진을 뜯으러 나갔다가 저녁노을과 함께 삭정이단까지 머리우에 이고 들어왔으며 저녁밥을 먹은 다음에는 낮에 뜯어온 송진을 녹여 동지들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노래도 불러주었다. 줄곧 웃음과 노래로만 엮어지는듯 한 그의 생활속에는 그야말로 그 어떤 자그마한 고민도 우울증도 끼여들지 못할것 같았다. 그러나 누구든 랑만에 넘친 그의 마음속 문을 열고 조용히 들여다볼수만 있다면 대번에 눈이 커지고 가슴이 저릿해질것이다. 좀처럼 호전되지 않고있는 동지들의 상처들때문에 남몰래 울며 속을 태운 흔적들이, 타다타다 남은 그 까만 재무지들이 가득 쌓여있는것을 보게 될것이기때문이였다. 왜 이렇게 상처들이 낫지 않을가.…

어느날 산나물을 뜯어가지고 개울가로 나오던 계순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중대장 리두수가 짝다리를 짚고 너럭바위를 절뚝절뚝 에돌고있었다. 계순의 그 고운 눈에 환희가 활짝 피여올랐다. 그리도 소원하던 그 모습이였다.

(다리가 좀 낫는 모양이구나. 걷는 련습을 하는걸 보니… 아침까지만도 차도를 보이지 않더니…)

한걸음 두걸음 바위를 에돌아가는 리두수의 군복잔등이 땀으로 화락하니 젖었다. 이를 사려문 얼굴에서는 땀이 철철 흘러내린다.

불시에 그 어떤 예감이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혹시?) 가슴이 섬찍해진다. 아닌게아니라 바위를 에돌아나오던 리두수가 갑자기 《아!》하고 비명을 지르며 몸중심을 잡지 못하고 쾅 넘어졌다.

《중대장동지!》

리계순은 황황히 리두수에게로 달려갔다. 리두수의 얼굴은 벌겋게 상혈되고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여있었다. 그는 화가 난듯 무릎에 감았던 붕대를 와락와락 풀다가 갑자기 나타난 계순을 놀란 눈길로 올려다보았다. 어줍게 웃으며 상처를 감추려는듯 슬며시 몸을 돌린다.

《어디 좀 보자요.》

계순은 급히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붕대를 마저 풀었다.

순간 계순은 손을 흠칫했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상처는 낫는게 아니라 오히려 시퍼렇게 더 독을 쓰고있었다. 억이 막혔다.

《아니? 어쩌자고 이런 발로 걷는 련습을 해요?》

계순이 속상해서 이렇게 노여운 소리를 하자 리두수는 주눅이 든듯 우물우물하다가 괴롭게 숨을 몰아쉬며 한탄하듯 말했다.

《너무 안타까와서 그러오. 이 상처가 왜 이렇게 말썽을 부리는지 모르겠단 말이요.》

《이게 무슨 중대장동지가 안타까와한다고 저절로 낫겠어요? 좀 가만있어요. 움직거리지 말고… 자꾸 이러면 상처가 더 독을 쓴단 말예요.》

계순은 기가 막혀 오히려 더 험해진 부상자리를 조심조심 어루쓸며 나무잎으로 피고름을 훔쳐내고 옆으로 밀린 송진덩이를 바로 대주었다. 가슴이 무엇에 눌리운듯 답답해왔다. 상처가 호전되지 못하고있는것이 마치 계순이 자기의 잘못처럼 여겨지며 리두수에게 죄스러운 생각까지 들었다. 계순은 리두수에게 아픔을 줄세라 정성스레 붕대를 다시 감았다. 그 관통상을 입은 자리우에 푸릿푸릿하고 번들번들해진 험상한 상처자리가 또 하나 있었다. 환자의 주의를 다른데로 돌리면 아픔을 덜 느낀다는 생각이 피뜩 들어 계순은 우정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언제부터 묻자던건데… 이건 언제 부상당한 자리예요?》

리두수는 그 상처자리를 내려다보더니 허―하고 허거프게 웃었다.

《그건 왜놈의 개한테 물어뜯긴 자리요.》

계순은 의아해서 눈길을 들었다.

《개라니, 특무말이예요?》

리두수는 쓰겁게 웃으며 도리머리를 했다.

《아니, 진짜 개, 왜놈의 세빠드에게 물리웠지. 이렇게 말같이 큰놈한테…》

리두수가 손으로 형용까지 해보이자 계순은 금시 그런 큰 세빠드가 왕― 하고 달려들어 그 연하디연한 허벅다리살을 뭉청 물어뜯는 광경이 떠올라 진저리를 떨었다.

《그건 어쩌다 그렇게 되였어요?》

리계순이 아픈 눈길로 그 푸릿하고도 번들번들한 상처자리를 다시 내려다보는데 리두수는 씁쓸히 웃었다.

《왜놈의 집 애새끼가 장난삼아 그랬다고 할가. 피를 즐기는 흡혈귀족속들의 본능이라고 할가. 그저 왜놈의 집앞을 지나다가 애꿎게 그런 봉변을 당하였소.》

리두수는 그때를 생각하니 갑자기 분노가 솟구쳐오르는듯 손으로 그 상처자리를 꾹꾹 누르다가 갈린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 일이요. 노상 죽으로 끼니를 에우던 때인데… 집에는 소금까지 떨어져서 죽가마에 소금 한숟가락 못 넣고있었소. 그래 산에 올라가 푸나무 석단을 해왔지. 그걸 장에 내다 팔고 소금 한되를 샀소. 내가 장만한 소금을 지게꼭대기에 매달고 집으로 돌아오자니 사기가 났소. 이제 집에 가면 〈아이구, 우리 손자가 그저 제일이다.〉하면서 내 엉뎅이를 두드려줄 할머니를 생각하니 저절로 어깨가 으쓱해지고 의기가 양양해졌소. 그래서 코노래까지 흥얼흥얼하며 오댔는데 아, 글쎄 왜놈의 집앞에서 갑자기 말같은 세빠드가 달려드는게 아니겠소.》

계순은 가슴이 섬찍해서 또다시 진저리를 쳤다.

《그 집 대문에서는 그 집 애새끼가 깔깔거리면서 〈잘해, 물어, 물어제끼라는데…〉하고 계속 부추기더군. 개새끼는 잡아먹을것처럼 길길이 날뛰더니 마침내 내 허벅다리살을 한입 뭉청 물어뜯었소. 그렇게 물어메치고는 이번에는 내 가슴우에 두발을 올려놓고 내 목줄기를 물어뜯으려고 했소. 마침 지나가던 마을사람들이 구원해주었으니 망정이지 난 그 세빠드한테 갈기갈기 찢기워 죽고말았을거요.》

《세상에… 그런 끔찍한 봉변을 다 당하다니… 그래, 그다음엔 어떻게 되였어요. 그 개새끼랑 아이새끼랑 그냥 두었어요?》

《그냥두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소. 왜놈들 세상인데…

어쨌든… 마을사람들은 피투성이가 된 나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소. 사람들이 여사여사해서 이렇게 되였노라고 사연을 이야기하면서 사정을 하니 입원을 시켜주더군. 그때부터 입원치료를 받기 시작했는데… 상처는 둘째치고 흰쌀밥을 먹으니 좋더군. 죽물에 신물이 나댔는데… 상처가 빨리 아물가봐 걱정스럽기까지 했댔소. 그때는 나두 그렇구 우리 집에서두 모두 치료비를 개주인놈이 보상하는줄로만 알고있었던거요. 마음을 놓았댔지. 그런데 상처가 좀 아물어가기 시작하자 병원에서는 당장 입원비부터 내라는것이 아니겠소. 자그만치 20원씩이나 말이요. 아, 한달에 20전씩 되는 월사금도 물지 못해서 이 사랑받이 손자가 소학교 1학년을 석달밖에 못다니고 퇴학당했는데 그런 뭉치돈이 어디서 나온단 말이요.》

리두수는 그때의 억울함이 되살아나는듯 옆에서 한들대는 이름모를 잡관목가지를 저도 모르게 뚝 꺾었다. 그의 가슴이 눈에 뜨이게 오르내렸다.

《세상에 이런 원통한 일이 어디 있느냐면서 할아버지랑 아버지랑 형님이랑 번갈아 개주인집과 경찰서와 병원에 부지런히 드나들면서 사정도 하고 항의도 하고 제소도 하였지만…

그놈들이 우리 조선사람편을 들어줄리가 만무지. 글쎄 왜 개한테 물리웠느냐면서 개한테 물린 책임이 바로 당사자인 나한테 있다는거요. 이런 날강도론리가 또 어디에 있겠소. 그래 그 20원이 통채로 우리 집 빚으로 되였는데 그게 새끼는 또 얼마나 빨리 치는지 이태후엔 조상대대로 내려오던 집까지 팔구… 그래도 안돼서 할수없이 알거지가 되여 고향 춘천땅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소.

왜놈들한테 나라를 빼앗기고 집도 고향도 마지막가산까지 다 뺏기우고 태묻은 고국땅을 떠나면서 사무치게 깨달은것이 뭔지 아오?

저 섬나라 오랑캐놈들과는 절대로 한하늘을 이고 같이 살수 없다는것이였소. 난 그때 두주먹을 꽉 부르쥐면서 이렇게 맹세했소.

〈이놈들, 내 이제 어른만 되여봐라. 이 땅에 왜놈은 물론이구 왜놈의 개 한마리, 고양이새끼 한마리 얼씬도 못하게 할테다. 몽땅 잡아치울테다.〉하고 말이요. 난 이젠 진짜 어른이 되였소. 원쑤 일제놈들을 때려부실수 있는 힘이 생겼단 말이요. 그래서 총을 잡았는데…》

리두수는 허―하고 김빠진 소리를 내더니 입을 쩝쩝 다셨다. 생각하기 조차 쓰거운 모양이였다.

《왜… 무슨 일이 있었어요?》

리두수는 주먹같은것을 꿀꺽 삼켰다. 갑자기 울분이 가슴밑바닥에서부터 욱 치솟아오르는 모양 얼굴이 불깃불깃 달아올랐다.

《그 〈숙반〉것들이 글쎄 날보구 〈민생단〉이라는거요. 〈민생단〉…》

계순은 놀랐다. 《민생단》이라는 말과 《숙반》이라는 소리를 듣자 생리적인 거부감이라도 생긴듯 속이 메슥메슥해지기까지 했다.

《그럼 중대장동지도 〈민생단〉에 몰렸댔단 말이예요?》

리두수는 대답하기조차 괴로운듯 얼굴을 찌프렸다.

어디선가 딱따그르르 딱따그르르 하고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아대는 소리가 수림속을 꿰지르며 들려왔다.

저기 푸른 전나무들사이로 마른 강대나무 한대가 서있는것이 보였다. 푸른 잎대신 털실같은 마른 송라만 줄줄이 드리운 재빛강대나무에 딱따구리 한마리가 빳빳한 꽁지로 뒤를 받치고 붙어 맹렬하게 쪼아대고있다. 그속에서 서식하는 벌레들을 모조리 잡아내려는 모양이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보는 딱따구리였다.

이 땅에 기여든 왜놈들도 그리고 우리 대오안에 기여든 나쁜놈들도 저렇게 모조리 잡아낼수만 있다면…

리두수는 물끄러미 그쪽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였소. 장군님만 아니시였다면 우린 다 죽고말았을거요. 장군님께서 〈민생단〉에 몰려 처분만 기다리는 우리들에게 찾아오시여 믿음을 주시고 그 저주로운 〈민생단〉보따리에 불을 지르시였소. 삼포밀영귀틀집 앞마당에서 〈민생단〉문서장들이 활활 타번질 때 우린 서로서로 붙잡고 목놓아울었소. 그야말로 울음바다가 펼쳐졌댔소. 장군님께서는 우리모두를 주력부대에 받아주시구 나에겐 중대장이라는 크나큰 신임을 안겨주시였소.

정말 이 사랑과 신임에 무엇으로 다 보답한단 말이요. 이 목숨을 깡그리 다 바친다 한들 어떻게 다 보답한단 말이요. 그래 정말 잘 싸워보자고 했는데 이렇게 덜컥 부상까지 당했으니 이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어디에 있겠소.》

리계순은 가슴이 금시 갈라지는듯 뻐근해지면서 윽 하고 목이 메여 올랐다. 리두수의 심정이 너무도 잘 리해되였다. 그의 심정도 자기와 다를바 없었다. 오죽 안타까왔으면 이렇게 숲속에 홀로 나와 걷는 련습을 해보느라 모지름을 쓰겠는가 하는 생각에 코안이 쩡 매워왔다.

이 중대장뿐이 아니였다.

군수부장인 박순일이도 장군님 친솔부대에서 싸우게 되였다고 그리도 기뻐하며 장군님을 찾아오다가 부상을 당했으니 그의 마음도 지금 막 불붙는듯 할것이다. 《4련령감》도 왕동무도… 그런데 나에겐 그들을 도와줄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으니… 죄스러웠다. 잘못은 모두 계순이 자기에게 있는것만 같았다. 밥이랑 반찬이랑 더 맛나게 지어서 동지들의 영양상태가 좋아졌으면 병이 한결 나아졌을지도 모른다. 치료도 더 정성스레 하였다면… 정성이 지극하면 돌우에도 꽃을 피운다는데…

계순은 가슴이 미여지는듯 한 아픔을 어찌할수가 없어 붕대를 감은 리두수의 무릎에서 풀잎사귀를 뜯어내며 목갈린 소리를 했다.

《저를 용서해주세요. 다 저의 정성이 부족해서…》

리두수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무슨 말을 그렇게?…》

《됐어요. 내 혼자소리예요. 하지만 자꾸 이렇게 움직이지는 말아요. 제발 부탁이예요. 자꾸 이러면 상처가 더 도질거예요. 여기서 땀을 좀 들이세요. 내 제꺽 산나물을 씻어가지고 올게요. 그때 함께 들어가자요.》

계순은 얼른 산나물바구니를 들고 개울가로 내려갔다. 내가에 쪼그리고앉아 산나물을 다듬으려니 가슴밑굽에서부터 매운 연기가 피여올라 눈을 쓰리게 해준다.

지금 병원에는 식량도 떨어져가고있다. 약품도 바닥이 났다. 그래서 어제는 한초남이 식량과 약품을 구해보겠다고 밀영을 떠나갔다. 그는 언제쯤 돌아올수 있을가. 이럴 때 송의사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가. 그는 지금 부대와 함께 행동하고있다. 전투현장에서 직접 치료를 하기 위해서이다. 그가 언제 이 병원에 올지는 알수가 없다. 어떻게 하든 계순이 자기의 힘으로 이 병원의 식량난도 극복하고 병치료도 해야 한다.

계순은 다 다듬은 나물을 내물에 담그고 헹구기 시작했다. 해야 할 일은 명백한데 방도는 떠오르지 않는다. 안타깝기 그지없다.

장군님께서는 우리들을 두고 그리도 걱정많으시겠는데… 난 이러고만 있으니…

장군님께서 이런 나를 보시면 얼마나 서운해하실가.

괴로왔다. 눈굽이 자꾸만 쓰려났다.

무슨 방법이 없을가?

계순은 나물을 헹구던 손을 멈추고 물끄러미 흘러가는 내물을 쳐다보았다.

내 이 몸을 다 바쳐서라도 동지들의 병을 고칠수만 있다면…

내물은 수얼수얼 자꾸만 무엇을 속삭이는듯싶다. 혹시 동지들의 병을 완쾌시킬 그 비방을 알려주려는것은 아닐가.… 그런데 나는 그 말을 알아들을수 없으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바로 이때 숲속 저쪽에서 《동무들!》하고 찾는 소리가 났다.

《중대장동무! 계순동무!》

계순은 의아해서 몸을 일으켰다. 밀영보초를 서군 하는 왕동무의 목소리였다.

《나 여기 있어요. 왜 그래요?》

왕동무가 헤덤벼치며 이쪽으로 달려왔다.

《계순동무! 장군님께서 의사를 보내주시였소. 송의사말이요. 후방물자랑 약품이랑 가득 지고 지금 막 도착하는 길이요.》

《뭐예요?》

계순은 환성이라도 올리고싶었다. 동지들의 병이 완쾌되지 않아 그처럼 안타까와하는 때에 바로 송의사가 찾아온것이다. 제일 의사손이 필요한 때에 장군님께서 그를 보내주신것이다.

(아, 장군님… 어쩌면… 어쩌면…)

마치도 장군님께서 여기 실태를 낱낱이 다 알고계시는듯싶었다. 계순이가 의사의 손길을 그리워하는 심정도 다 알고계시는듯싶었다.

계순의 눈가에 자기도 모르게 핑그르 눈물이 고여올랐다.

계순은 얼른 산나물을 씻어들고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리두수는 왕동무가 부축하고 들어갔다.

계순이 병실앞에 이르니 송의사는 벌써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박순일의 다리에 감은 붕대를 풀고있었다. 배낭을 내려놓기 바쁘게 치료전투를 시작한것이다.

계순은 갑자기 코안이 매워나는것을 어찌할수가 없었다. (고마와요, 송동지!)

자기도 모르게 눈앞에서 살랑이는 푸른 단풍잎사귀를 잡아 코끝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별로 생신한 냄새가 났다. 계순의 눈가엔 불시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젠 됐구나, 이젠…

계순은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푸른 하늘가엔 목화송이같은 흰구름이 한송이 떠있었다.

 

계순이 그때 생신한 냄새를 맡아보던 단풍나무가 점점 울긋불긋한 색동옷으로 단장하기 시작했다. 송의사가 온지도 벌써 20여일이 되여오고있었다.

그날 계순은 옆구리에 보리쌀을 담은 소랭이를 끼고 개울가로 나오고있었다. 버들잎같은 입에서는 노래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천만의 조선동포 총동원하여

반일혁명 통일전선 굳게 다지고

 

앞에 조가비만 한 돌이 보였다. 계순은 생긋 웃었다. 금시 어린애가 된듯 한 심정이였다.

계순은 소랭이를 옆에 낀채 왼발을 들고 오른발로 콩콩 뛰며 《망차기》를 했다. 그 돌이 풀숲으로 떼굴떼굴 굴러가자 호호호 웃었다.

마음은 마냥 즐겁기만 했다.

오늘 리두수중대장의 붕대를 풀었는데 퍼렇게 독을 쓰던것이 한결 기가 꺾인게 계순의 눈에도 알릴 정도였다. 송의사의 옆에서 지금껏 일손을 거들어주며 치료방법을 하나하나 익혀온 계순이라 이젠 그만한것쯤은 대뜸 알아볼수가 있었다.

왕동무의 손도 아물기 시작했다.

역시 의사의 손이 다르구나.…

이제 조금만 더 치료하면 군수부장의 발도, 《4련령감》의 발도 차도를 보일것이다.

계순은 내가에 도착하자 먼저 소랭이를 들고 조금 웃쪽의 바위가 웅크리고있는 으슥진 곳으로 갔다. 소랭이를 내려놓고는 바위아래에서 자그마한 자루를 꺼냈다. 자루를 들여다보고는 눈앞에 들어보았다. 자루안에는 서너되박이 됨직한 보리쌀이 들어있었다. 계순이가 만일을 예견하여 남모르게 저축하고있는 쌀이였다. 비상미자루에 소랭이에서 떠낸 보리쌀 한홉을 넣고 다시 꽁꽁 졸라맨 계순은 그것을 바위밑에 보이지 않게 묻어놓았다.

내가로 다시 내려간 계순은 쪽박으로 소랭이에 물을 퍼담았다. 걸싸게 보리쌀을 씻었다.

머리우에서는 삐쬬르르 삐삐 끼꼬유―하고 이름모를 산새가 지저귄다.

쌀을 일던 계순은 머리를 들고 손등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등너머로 쓸어넘기며 방긋이 웃었다.

(너희들도 기쁜게로구나. 아무렴, 그래야지. 송의사는 내 발도 인차 나을거라고 했단다. 박순일동지도 《4련령감》도 꼭 고치겠다고 했어. 그럼 우리는 장군님께로 간단다. 뭐? 너희들도 따라가겠다구? 호호호, 좋아, 우리 같이 가자. 너희들도 가서 우리 장군님께 노래를 불러드려야지?)

계순은 멀리 북쪽하늘가를 바라보았다. 구름 한점없이 푸르게 높아진 하늘이다. 바로 저 하늘아래 어딘가에 장군님께서 계실것이다.

장군님께서는 부대를 이끄시고 몽강방면으로 진출하시였다고 한다.

계순은 장군님께로 찾아갈 날이 금시라도 다가오는듯 흥에 겨워 쌀을 일었다.

쌀을 다 일고 내물에 제모습을 비추어보며 머리칼을 곱게 비다듬어 넘긴 계순은 이윽해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병실쪽으로 향하던 계순은 갑자기 앞에서 두런두런하는 말소리가 들려와서 주춤 그 자리에 멈춰섰다.

저앞에 크지 않은 너럭바위가 웅크리고있는데 말소리는 바로 그뒤에서 들려오고있었다.

《?》

의아해서 고개를 기웃하고 귀를 기울이던 계순은 점점 눈이 커졌다. 말이 담고있는 의미가 심상치 않았던것이다.

《물론 부대에 의사의 손이 더 필요하다는것을 모르는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송동무!…》

그것은 군수부장 박순일의 목소리였다. 왜서인지 그의 목소리는 좀 격해있었다.

《난 내 병상태를 잘 아오. 인차 낫지도 않을건 뻔한데 부대에 누구보다 더 필요한 송동무가 여기 계속 있으면 어떻게 하우? 부대에 돌아가 싸움판에서 전우들을 치료하는것이 혁명에 더 리롭지 않겠나 말이요.》

《하지만 박동지는 누구보다도 더 치료를 받아야 할 몸인데…》

《송동무, 우리 서로 숨박곡질을 하지 맙시다. 그래, 송동무한텐 내 이 두발이 진짜 나을것 같소?》

《아니, 그건 무슨 소리요?》

계순이도 바싹 긴장해졌다. 숨소리마저 죽이고 귀를 강구었으나 다음 말소리들은 왜서인지 더 들리지 않았다.

계순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박순일이 송의사를 떠나보내려는 그 마음은 눈물겨운것이였다. 자기보다 동지들을, 부대를, 혁명을 먼저 생각하는 그였다.

하지만 자기의 두발이 진짜 나을것 같은가고, 서로 숨박곡질은 하지 말자고 하는 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것인가.

《동무들! 병이란게 약절반 마음절반이란 말이 있소. 내가 요까짓것한테 진단 말인가? 하고 달라붙으면 이기는것이고 내 병을 과연 고쳐낼수 있을가 하고 근심하면 지고마는거요. 우리 이밤엔 노래나 부릅시다. 우리 장군님께서 지으신 노래 있잖소. 〈조국광복회10대강령가〉.》하며 제 먼저 노래를 부르던 박순일군수부장, 늘 싱글싱글 웃으며 우스개소리도 잘하던 그가 자기 병에는 신심을 못 가지다니…

리해가 되지 않았다.

다음날 송의사는 부대로 돌아갔다.

《박동지! 내 돌아가서 꼭 치료방도를 세워보겠습니다. 신심을 가지고 기다려주십시오.》

송의사가 박순일의 손을 으스러지게 틀어잡고 남긴 말이였다.

다음날부터 박순일은 짬만 있으면 들창밑에서 통졸임통을 오려내서 두드리군 했다. 장군님께서 보천보전투에서 로획하시여 보내주신 후방물자들속에 들어있던 통졸임통이였다.

계순은 박순일이가 통졸임통을 뚝딱뚝딱 두드려 펴는 소리가 가슴을 파고들며 눈물을 퍼올리는것을 어찌할수가 없었다.

(동통이 더 심해지는 모양이구나. 아픔을 잊어보려고 그러는게 분명해…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저렇게까지…)

계순은 눈물을 머금고 그 자리를 뜨군 했다.

다음다음날 아침.

계순은 식사한 그릇들을 거두다가 박순일이 심중해서 말하는 바람에 손을 멈칫했다.

《동무들! 난 이 자리에서 당원들의 회의를 열것을 제의하오.》

금시 자리를 일어 밖으로 나가려던 리두수가 그를 돌아보았다.

《이제 말입니까?》

《그렇소.》

《4련령감》이 놀라서 물었다.

《무슨 문제로 말입니까?》

《이렇게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것이 아니라 살아서 끝까지 혁명을 하자는 문제를 가지고 하자는거요.》

계순은 온몸이 긴장해지는것을 느꼈다. 얼른 음식그릇들을 치우고 자리에 올라와 앉았다.

모두들 정색해서 박순일을 쳐다보았다.

《동무들, 동무들도 알다싶이 내 발은 이젠 더는 가망이 없게 되였소. 이 두발을 다 자르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다는것은 불보듯 명백하오.》

모두들 몸서리를 쳤다. 계순은 가슴이 쿵당쿵당 세차게 뛰는것을 느꼈다.

(발을 자르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다니… 설마…)

계순은 겁질린 눈으로 그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두발은 붕대로 둘둘 감아 살이 보이지 않았다.

《두발을 잘라야 한다는것은 송의사도 인정하였소. 송의사가 안타까와 한것은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잘라야 하는가 하는 방책이 서지 않아서였소. 난 결심했소. 난 이걸로 내 발을 자르자는거요.》

박순일은 이러며 뒤에서 무엇인가 꺼내였다. 순간 사람들은 와뜰 놀랐다. 눈을 흡떴다.

그것은 바로 양철을 두드려 만든 톱이였던것이다.

계순은 몸을 떨었다. 그러니 박동지는 지금껏 아픔을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발을 자를 톱을 만들었구나. 어쩌면… 어쩌면… 그런 모진 생각을…

리두수가 도리머리를 하며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그건 안됩니다. 난 동의할수 없습니다. 아무리 발을 잘라야 한다 해도 아무런 경험과 의료기구도 없이 양철로 만든 이런 톱으로 어떻게 자른단 말입니까? 마취제도 없이… 절대 안됩니다.》

《발을 자르지 않으면 난 죽을게요. 그건 왜놈들이나 바라는거요. 하지만 난 살아서 혁명을 해야겠단 말이요. 가만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수는 없소. 두발이 없다 해두 살기만 하면 혁명을 계속할수가 있지 않겠소.》

《4련령감》이 뚝하게 한마디했다.

《저런 양철톱으로는 불가능하오. 저게 무슨 톱이요? 방법을 더 연구해봅시다.》

《그래요. 고쳐생각해주세요. 다 제 정성이 부족해서 그래요. 제 어떻게든 노력해볼테니 제발 발을 자르는것만은…》

계순은 눈물을 머금고 간절히 하소했다.

박순일은 계순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장군님께서는 우리가 하루빨리 병을 고치고 부대로 돌아올것을 기다리고계시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병과의 투쟁을 소극적으로 해왔소. 이것은 혁명가의 태도가 아니요. 병과의 투쟁― 이것은 우리의 혁명과업이요. 주저할수가 없단 말이요. 하루이틀 주저하다가 죽으면 그땐 무엇으로 보상하겠소. 물론 의사도 아닌 내가 이런 톱으로 발을 자른다는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걸 나도 잘 알고있소. 어떤 곤난이 닥쳐올지도 짐작하기 어렵지 않소. 그러나 이 회의에서 나의 결의를 지지만 해준다면 난 그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해낼수 있소. 동지들, 당원동지들, 날 믿어주시오.》

계순은 그만 《흐윽―》하는 소리를 내며 급기야 두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어깨를 떨었다. 누구도 박순일을 만류할 생각을 못하는듯 했다. 박순일은 동지들에게 지지를, 믿음을, 힘을 요구하고있는것이다.

아,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가. 제 손으로 마취제도 없이 제발을 자르다니… 그것도 양철로… 자작 만든 톱으로…

아니, 그럴수는 없다. 그렇게는 못해… 어떻게 마취제도 없이 제 손으로… 저 양철톱으로…

계순은 박순일을 말리려고 두손을 내리웠다. 다음순간 계순은 전류에라도 닿은듯 또다시 몸을 떨었다. 어느새 발의 붕대를 푼 박순일이 양철톱을 앞에 놓고 동무들을 둘러보며 미소를 짓고있었던것이다.

《내 몸을 좀 잡아주오.》

계순은 아무말도 할수가 없었다. 눈을 흡뜬채 박순일의 등뒤로 돌아가 그의 몸을 잡는 리두수와 《4련령감》과 왕동무를 쳐다보기만 했다.

박순일이 한번 심호흡을 하고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톱을 들었다.

계순은 더는 그대로 앉아있을수가 없었다. 차마 눈을 뜨고는 볼수가 없었던것이다.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솨솨― 밀림이 설레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계순은 이깔나무줄기에 몸을 콱 실었다.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아니, 그것은 피눈물이였다. 계순은 몸부림을 쳤다. 아― 정녕 박동지를 내 힘으로 완쾌시킬수는 없단 말인가. 아― 나는 왜 그런 힘이 없는가. 분하구나.… 내 정성이 모자라 이런 일까지 생기는구나.

계순은 뼈갈리는 소리가 예까지 날아오는듯 해서 두손으로 귀를 막고 몸을 흠칫흠칫 떨었다.

입술을 옥물고 톱질을 하는 박순일의 모습이 눈앞에서 자꾸만 얼른 거린다. 땀이 비오듯 하는 얼굴, 땀에 푹 젖은 몸, 그 무서운 고통을 웃으며 맞받아나가는 그의 입에서 알릴락말락 노래소리가 울려나온다.

 

동무들아 준비하라 손에다 든 무장

제국주의 침략자를 때려부시고

용진용진 나아가세 용감스럽게

억천만번 죽더라도 원쑤를 치자

 

박순일은 너무도 모진 고통에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가도 다시 투지를 가다듬고 일어나 발을 잘랐다. 며칠후에는 《4련령감》이 도끼로 썩어문드러진 자기의 다섯발가락을 잘랐다.

계순은 박순일군수부장과 《4련령감》의 발에 붕대를 감아줄 때마다 가슴이 뻐근해지는것을 느끼군 했다. 가슴이, 심장이 부쩍 커지는듯 했다.

(이 얼마나 훌륭한 동지들인가. 혁명을 위하여 병과 싸워이기라고 하신 장군님의 말씀만을 늘 심장에 새기고 그대로만 사는 사람들, 불같은 사람들… 강철의 의지를 지닌 사람들…)

이 동지들에 비하면 자기가 겪어온건 아직 시련의 첫걸음에 불과하다고 여겨졌다.

(내 언제나 이들처럼 살리라. 억세게… 그 어떤 고난에 부닥쳐도 굴하지 않으리라.)

리계순은 이때부터 힘들고 어려울 때면 양철로 자작 만든 톱을 들고 자기 발을 자기 손으로 자르던 박순일의 그 모습을 먼저 생각하며 일떠서군 했다. 그러면 자신도 억제 못할 격렬한 감정이 온몸으로 뻗쳐나가면서 동상입은 발의 동통도 가뭇 잊게 해주는것이였다.

사람들이 잠든 깊은 밤에라도 방안에 랭기가 돌면 아무리 발이 쑤셔와도 그때일을 생각하며 일어나 아궁에 불을 지피였고 상처가 아파 잠못이루는 《4련령감》의 머리맡에서는 찬물수건을 얹어주며 밤을 꼬박 밝히기도 하였다. 때로는 책도 읽어주고 재미나는 이야기도 들려주고… 소곤소곤 노래도 불러주고…

강냉이와 보리쌀을 가지고도 구미에 맞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푹 삶아서 말리워두었던 산나물을 섞어 비빔밥을 만들기도 하고 닦아서 양철통에 넣고 찧어 가루처럼 봏아서는 《떡》을 만들기도 했다.

상처에 붙일 송진을 긁어오기 위해 생눈길을 헤치며 밀림속을 누비기도 했고 언땅을 파고 약초뿌리를 캐느라 손을 빨갛게 얼구기도 했다. 밤이면 송진을 녹이고 약초를 두들겨 상처에 붙였다.

(어떻게 하나 내 힘으로 동지들의 병을 완쾌시키리라.)

어느날 나무를 하러 등성이를 넘어갔던 계순은 뜻밖에도 잣나무를 발견했다. 우듬지쪽에 잣이 서너송이 달려 바람에 흔들리고있었다.

계순은 흥분한 눈길로 잣송이들을 올려다보았다.

저 잣을 딸수만 있다면… 새살이 돋는데는 잣죽이 좋다고 했는데…

키가 갑자기 쑥 커져서 손으로 뚝 딸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싶었다. 바람에 우듬지가 꺾어지거나 잣송이가 떨어질수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눈보라에 우듬지가 꺾어질듯 휘여들군 하는데도, 그렇게 바람에 부대끼면서도 잣송이들은 끈질기게 붙어있었다. 마치 누가 이기는가 겨루어보자는것 같다. 한참이나 잣송이들을 올려다보던 계순은 갑자기 생각되는것이 있어 부랴부랴 잣나무밑 눈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이해따라 눈은 어찌나 많이 왔는지 잣나무밑에는 허리를 치게 눈이 쌓였다.

바람은 휘유―우우―하고 휘파람소리를 지르며 눈가루를 몰아왔다. 그래도 계속 파헤쳤다. 솜장갑도 시끄러워 맨손으로 마구 파헤쳤다. 여기저기 더듬었다. 마침내 잣송이 하나를 발견했다. 얼른 들어 살펴보니 한절반은 씨가 박혀있었다.

됐구나.

계순은 방싯 웃었다. 이 잣나무밑의 눈을 다 헤집으면 몇송이는 얻을수 있을것 같다. 한참 부리나케 눈을 파헤치던 계순은 너무도 허리가 끊어지는것처럼 뻐근해와 할수없이 일어서서 발로 찬찬히 더듬어나갔다. 이제부터는 잣나무들을 찾아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이 밀림속에도 잣나무가 있을수 있다는걸 생각 못했을가. 하루에 이런 잣송이를 대여섯개씩만 얻으면… 상처자리에서 새살이 돋아나 기뻐서 어쩔줄 몰라할 박순일과 《4련령감》의 모습이 떠오르며 새힘이 솟구친다.

또 주먹같은것이 발끝에 밟히는것을 느꼈다. 얼른 눈을 파헤치고 발밑을 더듬었다. 짜릿한 환희가 온몸을 휘감는다. 역시 잣송이였던것이다. 땅에 얼어붙은것을 가까스로 잡아뜯었다. 이번것은 잣씨가 몇알 붙어있지 않았다. 아수했지만 그래도 괜찮다. 잣알 한알이 생긴다 해도 물러설수 없는 계순이였다.

계순은 시간이 가는줄도 모르고 잣나무밑의 눈을 몽땅 파제꼈다. 잣은 세송이밖에 얻지 못했다. 산짐승들이 다 《수확》해간 모양이였다.

아수했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저 잣송이를 따지는 못할가. 저 나무끝에 올라갈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계순은 여기저기 둘러보며 장대기가 될만 한것이 없는가 살펴보았다. 맞춤한것이 보이지 않았다. 돌팔매질이라도 해보고싶지만 눈이 강산같은 산판에서 더구나 꽝꽝 얼어붙은 이 눈판에서 돌멩이 한개 찾기가 쉽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쳐드는데 바람에 꺾일듯 뒤채기는 우듬지가 석양에 물들어 불깃하게 보인다. 그러고보니 벌써 주위가 어둑어둑해졌다.

밀림속의 밤은 빨리도 찾아온다.

(늦었구나.)

계순은 황황히 병실쪽으로 향했다. 허둥지둥 뛰여걸으면서도 잣송이들은 꼭 안고걸었다. 우―우― 눈보라는 태질을 하면서 사정없이 덮쳐든다. 전나무, 이깔나무, 분비나무들이 서로 맞부딪치며 엉켜들며 몸부림을 친다. 어디선가 승냥이울음소리도 들려온다.

(동지들이 걱정하겠구나. 빨리 가서 저녁을 지어야겠는데…)

계순은 등성이를 내려서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채여 허궁 나가 넘어지고말았다. 잣송이를 떨구어 손더듬을 하여 어둠속에서 겨우 찾아쥐였다.

잣알들만 까서 건사할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아까는 잣송이를 하나라도 더 찾을가 해서 그랬지만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이렇게 들고다니고 넘어지고 할 때 잣알들이 빠져나가지 않겠는지 걱정된다. 이 아까운 잣알이 한알이라도 빠져나가면…

계순은 주저없이 웃솜옷을 벗어 잣송이들을 쌌다. 안에 여름군복을 입었다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대번에 랭기가 온몸을 싸늘게 얼구었다. 여름군복을 벗어 잣송이를 싸고 솜옷은 입을가 하다가 그러새에 꽁꽁 얼어버릴것 같아 그런대로 허둥지둥 걸었다.

《계순동무―》

어디선가 리두수의 목소리가 간간이 들려온다.

《계순동―무―!》

왕동무의 목소리도 끊길락말락 눈보라를 타고 들려온다.

(나를 찾아나왔구나.)

계순은 갑자기 눈물이 쿡 솟구치는것을 어쩌지 못했다. 계순이 리두수와 왕동무와 함께 병실에 들어서자 박순일과 《4련령감》은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아니, 그건 뭐요? 솜옷을 왜 벗었소?》

그제야 리두수도 왕동무도 계순이가 한겹 여름군복만 입은것을 알아보고 놀라서 눈을 치떴다.

《그건 도대체 뭐요?》

계순은 웃으려고 했다.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입이며 볼이며가 꽁꽁 얼어 말이 되지 않았다.

《자―아―스―을…》

리두수가 솜옷꾸레미를 얼른 받아 노전우에 펼쳤다. 순간 모두들 몸을 흠칫 떨었다. 솜옷우에 잣알이 몇알씩밖에 남지 않은 잣송이 세개가 동그랗게 놓여있었다.

《아니, 그럼 이 잣 몇알때문에?》

박순일이 억이 막혀 계순을 쳐다보다가 놀라서 소리쳤다. 계순이 얼굴에 하얗게 얼음꽃이 내돋치는것을 보았던것이다.

《빨리… 빨리 찬물에 얼굴을 담그오. 얼음을 뽑아야겠소. 빨리!》

왕동무가 황황히 소랭이에 찬물을 떠왔다. 계순은 고맙다고 눈인사를 하며 찬물에 얼굴을 잠그었다. 얼굴이 매맞은것처럼 얼얼했다.

《동문 어쩌면…》

박순일이 모든것이 짐작되는듯 목메인 소리를 하며 돌아앉았다. 모두들 눈을 슴벅이며 찬물에 얼굴을 잠그고 손으로 비벼대는 계순이와 잣세송이를 갈마보았다.

계순은 얼굴이 좀 훈훈해지는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잣이 새살이 돋는데는 그렇게 좋다는데… 겨우 요것밖에 못 얻었어요.》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돌렸다. 목들이 꽉 메여올라 더 말을 못하고 주먹으로 눈굽을 닦기만 했다. 《4련령감》이 눈이 불깃해서 물먹은 소리를 했다.

《계순동무, 다시는 이러지 마오. 계순동무가 쓰러지면 우린… 견디지 못하오.》

계순은 두손으로 머리를 비다듬어 넘기고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호호호 웃었다.

《아이참, 내가 뭐 어쨌다구들 이래요. 대장부들이 이쯤한걸 가지구… 시장들 하시겠는데 조금만 참으세요. 내 얼른 저녁을 지을게요.》

계순은 소랭이의 물을 쏟아버리고 잣송이를 담고는 솜옷을 입다가 방긋 웃었다. 이 옹색한 분위기를 빨리 돌려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저녁을 먹고는 오락회를 하자요. 누가 노래를 제일 많이 알고있는가 내기를 하자요. 지는분은 래일 아침 밥차림당번… 어때요?》

처음에는 모두들 인츰 답변을 못했다. 너무도 급작스러운 변화여서 눈들만 꺼벅거렸다.

계순은 우정 한사람한사람 따져물었다.

《중대장동지는 어때요? 반대예요?》

리두수는 눈을 슴벅이면서 얼결에 대답했다.

《나야 뭐… 반대 없소.》

《왕동무는?》

《난 찬성이요.》

《군수부장동지는요?》

《난… 계순동무가 좋다면야…》

그 순간 《4련령감》이 《어이쿠.》하며 뒤로 벌렁 나가누웠다.

《래일 아침 밥차림당번은 영낙없이 나로구나.》

《4련령감》의 우는 소리에 모두들 즐겁게 웃었다.

《오늘 저녁 내기에는 절대루 융화묵과가 없어요.》

계순은 신이 나서 동자질을 시작했다.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노래소리가 흘러나왔다.

 

권리를 박탈한 자본사회에

 

어느날 아침 박순일의 상처에 송진을 갈아붙여주던 계순은 갑자기 손을 흠칫 했다. 온몸이 긴장해지는것을 느끼며 상처자리를 유심히 뜯어보았다. 별안간 가슴이 오르내리며 숨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눈앞이 핑 흐려져서 황급히 손등으로 눈굽을 훔치고 다시 자세히 들여다본다. 그 고운 입술이 파르르 떨리더니 속삭이는듯 한, 눈물에 젖은듯 한 목소리가 가늘게 띄염띄염 새여나왔다.

《박동지! 새살이… 새살이… 나오는것… 같아요.》

《뭐요?》

계순의 행동이 이상해서 상처자리와 반듯한 그의 이마를 번갈아 내려다보고있던 박순일이 전률하듯 몸을 떨었다.

《그게… 그게 사실이요?》

《예… 이것 보세요. 여기… 여기에…》

《그렇단 말이지.… 글쎄 어쩐지… 상처자리가 근질근질해온다 했더니…》

박순일이 너무 좋아 어쩔줄을 몰라한다.

《어디… 어디?…》

리두수며 《4련령감》이며 왕동무가 저마다 와서 들여다보다가 환성을 올렸다.

《옳소, 새살이요. 새살이 나오기 시작했소.》

박순일은 믿어지지 않는듯 다시 상처를 들여다보다가 불시에 계순의 두손을 꽉 잡았다.

《고맙소, 계순동무!》

그러는 그의 눈굽에서 물기가 번쩍거렸다. 그의 목소리도 물기에 푹 젖어있었다. 강철같은 사나이의 눈에서 처음으로 보는 눈물이였다.

《동문… 정말…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구만. 내 친누이라고 해야 할지 어머니라 해야 할지… 아니, 난 그 모든 정을 다 느끼고있소. 동문 정말 우리들의 어머니고 누이요.》

《옳소, 어머니요.》

《친누이요.》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감격해서 웨친다.

《어마, 어마 제가 무슨…》

계순은 손등으로 입을 가리우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그 얼굴에서는 행복의 미소가 피여오르고있었다.

계순은 처치를 끝내자 밖으로 나왔다. 가슴은 한껏 부풀어올랐다. 밖에서는 눈이 펑펑 쏟아져내리고있었다. 계순은 두손을 벌려 눈을 받아보았다. 마치도 자기네들을 축복해주는 눈 같았다. 머지않아 병이 완쾌되여 장군님을 찾아가게 될 날이 꼭 올것이라는 확신이 온몸을 뜨겁게 달구어주었다.

벌써 리두수중대장과 왕동무는 땔나무를 하러 다닐 정도로 완쾌되였다. 《4련령감》도 병세가 한결 호전되였고 오늘은 그처럼 애를 먹이던 군수부장의 상처에서까지 새살이 돋아나기 시작한것이다.

계순은 자기도 모르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정이월 다가고 삼월이라네

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오며는

 

손바닥에 내려앉은 눈이 녹으며 축축한 물기가 손가락짬으로 스며내린다.

함박눈은 여전히 하염없이 내린다. 이처럼 내리는 눈을 맞으려니 문득 이해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해가 다가오고있다. 양력설이 멀지 않았다.

지난 설명절때엔 장군님께서 몸소 우리 병원에 오시여 내가 만든 설음식을 달게 드시였지.

장군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실가. 지금도 그이께서는 우리 후방병원의 전사들을 생각하시며 근심하고계실지도 모른다.

불시에 목이 메여오른다. 그이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에 눈앞이 자꾸만 흐려지군 한다.

장군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어떤 일이 있어도 동지들을 꼭 완치시키고 장군님께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날부터 계순이에겐 하나의 일감이 또 생겨났다. 양력설준비를 해야 하는것이다. 가정에서는 명절음식준비를 가정주부가 의례히 맡아하는 법이다. 병원의 작식일을 스스로 책임진 계순이 역시 이 설준비를 응당한 자기의 일로 받아들이였다. 천고밀림속이라고 그냥 속수무책으로 앉아있을수도 없었다. 후방병원에 남아있는것은 얼마간의 보리와 통강냉이, 감자 대여섯되와 말린 산나물 한포대, 소금 서너되뿐이였다.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더 맛있고 특색이 있는 설음식을 만들수 있을가. 아무래도 짬을 내여 산판을 더 돌아봐야겠다. 도토리나 찔광이나 잣나무도 더 찾아보고… 비상미로 저축했던 보리쌀도 조금 갈라내서 써야겠어.

설날엔 어떻게 생활조직을 할가. 이번 오락회때는 각자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제일 기뻤던 일을 추억하게 해야지… 자기가 제일 념원하는 기쁜일은 무엇인가도 이야기하게 하고…

동자질을 하는 계순의 입에서는 저절로 흥얼흥얼 코노래가 흘러나왔다.

들창문을 손질하던 박순일이 방바닥에 틀고앉은 《4련령감》을 흘낏 쳐다보고는 싱긋 웃었다. 리두수와 왕동무는 땔나무를 하러 가고 병실에는 이들 셋만 남아있었다.

《계순동무, 이번 설날엔 무엇을 할가. 전번 노래경기는 승부가 난것이구… 가만 〈4련령감〉을 또 한번 혼내줄가?》

박순일이 《4련령감》쪽을 눈짓하며 한눈을 찡긋하자 계순은 손등으로 입을 가리우며 새물새물 웃었다.

《이번엔 4련아바이가 이길걸로 하자요.》

전번에 노래 몇마디밖에 몰라 땀을 뽑았던 《4련령감》이 방바닥에 퍼더앉아 약초말린것들을 가려놓다가 귀가 버룩해서 끼여들었다.

《계순동무 말이 옳소. 전번 노래경기는 너무 불공평했단 말이요. 가만, 계순동무, 그건 어떤거요? 거 머사니… 내가 이길수 있는게 말이요.》

《4련령감》이 박순일이쪽을 흘끔 돌아보고는 계순이쪽으로 한걸음 앉은걸음으로 다가앉으며 수군수군 물었다. 호기심이 굴뚝같이 일어서는 모양이다.

계순은 방싯 웃었다.

《그건 지금껏 살아오면서 제일 기뻤던 이야기, 가령 아바이가 장가들던 이야기나 아주머니와 서로 사랑하던 이야기…》

계순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4련령감》이 무릎을 탁 쳤다.

《옳거니, 흐흐흐, 그거야 내가 자신있지.》

《4련령감》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엉치까지 들썩거렸다. 《내가 장가들던 얘기를 하면 계순동무는 아예 허리가 끊어질게야.… 흐흐흐.》

군수부장이 호기심이 나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장가를 들었게요?》

《4련령감》은 계순을 보고 눈을 끔벅이고는 보란듯이 수염 내리씻는 흉내를 냈다.

《에헴, 그건 〈절대비밀〉이웨다. 설날까지…》

계순이 방글거리며 그 말을 받았다.

《그건 옳아요. 이제 그 말을 듣다가 내 허리가 끊어지면 다들 설음식도 못 먹을수 있어요.》

계순이 《4련령감》의 편역을 들자 박순일은 우정 시틋해서 도리머리를 했다.

《〈령감님〉의 〈허리가 끊어질 일〉이란게 뻔하지. 계순동무, 거기엔 흥미가질게 하나도 없소. 다음엔 또 계획한게 없소?》

계순은 입을 삐죽 내미는 《4련령감》쪽을 띄여보며 웃으며 말했다.

《그다음엔 일생에서 제일 기쁠 때가 어떤 때일가 하는 이야기…》

《그 말두 내가 하는 말이 1등일거요.》

《4련령감》이 군수부장이 말할세라 얼른 나섰다.

《그건 또 뭐요?》

《그것은 우리가 다 나아 장군님께로 가는 날이지요. 그때 저 계순동무를 둥둥 떠받들구 가잔 말이우다. 가마에 척 태워서…》

《어마나!》

군수부장이 또 손등으로 입을 가리우며 웃는 계순을 보고 껄껄 웃었다.

《〈령감님〉의 그 말만은 만점이요. 허허허, 이젠 그날이 눈앞에 선히 보이오. 이런 속도로 새살이 돋으면 한두달후에는 문제가 없을거요.》

죽가마가 풀떡풀떡 기세차게 끓었다. 푸푸 하얀 김을 뿜어올리며 온 병실안에 고소한 잣죽냄새를 가득 채운다.

박순일의 목소리는 더욱 흥을 돋군다.

《저 죽가마랑은 내가 질수 있소. 군수부장이 아니요. 가마뿐이겠소? 후방물자는 내가 다 맡지.》

《어마나, 난 그럼 뭘하구요?》

《계순동무야 노래를 불러야지… 우리가 둥둥 떠받들고가겠으니 노래만 불러달란 말이요.》

《호호호, 그럼 난 매미처럼 되게요?》

《그게 무슨 소리요? 매미라니…》

《4련령감》이 큰일이나 난듯 말했다.

《지금껏 우리를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소. 이 산속에서 이 엄동설한에 매일 한끼이상 잣죽을 보장하구 그리구 또…》

《4련령감》은 말끝을 맺지 못했다. 계순이 급히 그의 말을 막았던것이다.

《아유, 무슨 그런 말씀을… 또…》

《자, 이런… 자꾸 말을 막지 말라는데… 좋소. 그럼 우리 그날 일만을 얘기해보자구. 군수부장동문 방금 자기 말로 죽가마랑 책임지겠다고 했으니 그것만 지고가라고 합시다. 그래도 후방물자까지는 힘들게요. 후방물자들은 저 중대장동무더러 맡으라고 합시다.…》

《아니, 아바인 뭐길래 제가 다 조직사업까지 하는거요?》

박순일이 참지 못하고 끼여들려 하자 《4련령감》이 말하지 말라고 성급히 손을 내저었다. 성수가 나서 말을 이었다.

《그러면 결국 나와 왕동무가 남는데 우린 뭘 하는가. 우린 꽃으로 가마를 곱게 꾸며서 그 가마를 어깨에 메고간단 말이요. 말하자면 교군군인셈이지. 우리가 둥둥 떠메고가는 그 꽃가마안에는 누가 타고있는가. 바로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제일 마음곱고 인정많고 살뜰하고 명랑하고 이악하고 기지있고 아름답다고 인정하고있는 우리의 친누이인 리계순…》

《어마어마! 아바인 도대체 무슨 그런 말을… 자꾸 그런 말만 하면 성을 낼래요.》

리계순이 짐짓 눈을 흘기자 《4련령감》이 두손을 쩍 벌렸다.

《계순동무는 성을 낼수록 더욱 고와진다네. 하하하.》

《4련령감》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자 《그 말도 맞구…》하며 박순일도 따라웃는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밖에서 《땅!》하는 총소리가 들려왔다.

《아바인 정말…》하며 숨듯이 아궁이앞에 쪼그리고앉아 밑불을 조절하려던 계순은 와뜰 놀라 자리를 차고 튕겨일어났다. 급히 부엌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던 계순은 대번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것 같았다.

자욱한 눈보라속으로 시누런 군복을 입은 왜놈《토벌대》가 이리떼처럼 밀려오는것이 나무들사이로 보였다.

계순은 급히 문을 닫고 돌아섰다. 숨가삐 말했다.

《놈들이 밀려오고있어요. 피하자요, 빨리 뒤문으로…》

계순은 방으로 뛰여올라오며 군수부장과 《4련령감》을 재촉했다.

먼저 학습하던 책들과 학습장들을 모두 걷어다 황황 타번지는 아궁안의 장작불우에 밀어넣고 뒤문으로 빠져나가던 계순은 앞에서 《4련령감》이 비칠거리자 얼른 어깨를 들이댔다. 그 순간 피뜩 뇌리를 치는것이 있어 계순은 황급히 박순일쪽에 눈길을 돌렸다. 아, 군수부장동지는 두발이 없는데… 어쩌면 좋은가.

계순은 갑자기 몸을 흠칫했다. 박순일이 짝다리를 짚고 벌떡 일어서서 앞으로 내닫다가 획 돌아섰던것이다.

《안되겠소. 뒤에도 적이요. 포위되였소. 계순동무, 〈4련령감〉과 함께 어떻게 하든 빠져나가보시오.》

《그럼 군수부장동지는?…》

박순일군수부장은 대답이 없었다. 대신 놀랍게도 짝다리를 짚고 놈들을 맞받아나갔다.

《이놈들아, 군수부장이 여기 있다.》

왜놈들은 일시 주춤하더니 그에게로 돌아섰다. 박순일은 왜놈들을 끌고 밀림속을 내달렸다. 짝다리로 나무들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50메터쯤 떨어져있는 벼랑쪽으로 놈들을 유인했다. 계순은 《4련령감》을 부축하고 뛰면서도 박순일에게서 눈길을 뗄수가 없었다. 두발을 자르고도 동지들을 구원하겠다고 놈들을 달고 내달리는 군수부장, 과연 상상이나 해볼수 있었던 일인가.

계순은 심장이 쾅쾅 울리고 피줄을 따라 온몸에 더운 피가 쫙쫙 퍼져나가는것을 느꼈다.

저런 초인간적인 힘의 폭발은 어떻게 생기는것인가. 불굴의 인간… 인간의 힘은 과연 얼마나 위대한것인가.

마침내 박순일은 벼랑에 이르렀다. 스무길도 넘는 벼랑이였다. 박순일은 벼랑을 등지고 획 돌아섰다. 두발을 자른 그였지만 다리를 뻗치고 선 그는 마치 천연암반에 뿌리를 내리고 우뚝 서있는 거목처럼 보였다.

놈들은 그를 생포하려고 헛총질을 하며 몰려들었다.

박순일은 코웃음을 쳤다.

《이놈들아, 내가 살아서 네놈들에게 잡힐줄 아느냐. 어림도 없다.》

박순일은 앞에서 달려드는 놈을 허궁 들어 벼랑밑으로 던졌다.

급해맞은 놈들이 총질을 해댔다. 그가 흉탄에 맞아 비칠거리자 또다시 와 몰려들었다.

박순일은 《김일성장군 만세!》, 《조선혁명 만세!》하고 두손을 번쩍 쳐들며 만세를 목청껏 웨치고는 다가드는 한놈을 붙안고 벼랑으로 몸을 던졌다.

 

《그때 너의 어머니는 끝내 〈4련령감〉과 함께 놈들에게 잡혀가고 나만 눈구뎅이속에 빠진 덕에 살아날수 있었단다. 산에 나무하러 갔던 왕동무도 붙들리고…

왜놈들은 병원을 불태우고 그안에 있던 모든것을 다 들부셔버렸단다.》

리두수가 해준 말이였다.

재더미속에 홀로 남은 그는 그 험한 산중에서 굶주림과 추위와 싸워야 했다.

《이듬해 2월쯤 되였을 때 난 개울가에서 반말이나 되는 보리쌀을 발견했다. 그게 바로 너의 어머니가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묻어둔 비상미였어. 그걸 보니 습격받기 전날밤 너의 어머니가 〈양력설이 다 되였는데 어떻게 준비하면 좋을가요?〉하고 묻던 모습이 떠오르면서 목이 꽉 메더구나. 결국 너의 어머니가 날 살려주었지. 그 쌀이 없었다면 난 굶어죽고말았을거야.》

리두수는 이 말을 두고두고 외우군 했었다.…

 

실화를 마지막까지 읽어본 정옥은 눈을 슴벅거리며 원고들을 간종그렸다. 이만하면 나무랄데가 없는것 같다. 이 실화를 김일이나 박영순이나 리두수나 어머니와 함께 싸운 투사들이 보게 되면 얼마나 기뻐할가. 명화어머니는 막 울지도 모른다.

(정애어머니, 정말 고마와요.)

정옥은 인차 그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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