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편 달 비

제 3 장

8

 

목에다 두른것은 붉은넥타이

등에다 짐을 지고서 훈련을 나간다

장하다 그의 이름 아동단 아동단 아동단

세상이 모두다 칭찬한다 아동단 아동단

 

맑고 푸른 하늘가로 랑랑한 아이들의 노래소리가 울려퍼진다. 아이들이 붉은넥타이를 날리며 줄을 지어 오고있다.

예지골에 가서 학교에 땔나무들을 한짐씩 해지고오는 길이다. 아동단에서는 학교에 땔나무 같은것은 어른들에게 페를 끼치지 말고 자체로 보장하기로 한것이다.

스물대여섯명 되는 아이들의 대렬옆으로는 까만 치마에 흰저고리를 받쳐입은 아동단학교 선생이 활짝 웃으며 걸어온다. 갸름한 얼굴, 뒤로 빗어넘겨 갈라꽁진 제비초리같은 쌍태머리, 기쁨이 넘쳐나는 눈…

그가 바로 얼마전에 어랑촌유격근거지로 들어온 정선화였다. 엊그제 아동단학교 선생으로 임명되였다.

정선화는 걸으면서도 혹시 알만 한 사람들이 없는가 살펴보군 했다.

리계순이며 지철민이며…

그들이 내가 이렇게 아동단학교 선생이 된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기뻐하랴.

리계순이네는 선화가 어랑촌으로 오기 전에 벌써 처창즈로 떠나갔다. 지철민이도 어디에 가있는지 알수가 없다. 선화는 당장이라도 지철민이 있는 곳을 알아내여 찾아가고싶었지만… 입술을 깨물며 도리머리를 했다.

결별을 선언하는 편지를 썼댔는데 고지식한 그가 선화 자기를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있는가 하는것도 알수가 없는 문제였다. 자기한테 대상자가 있다고 쓴 그 편지를 그대로 믿고있는것은 아닌지.

어쨌든 지철민이앞에 떳떳한 모습으로 나서고싶었다. 그것만이 사랑을 되찾는 길이라 믿어졌다.

근거지의 생활은 즐겁고도 보람찼다.

아동단학교 선생이 된 선화는 아침 일찍 학교에 나가 마당을 쓰는것으로부터 하루 일과를 시작하군 했다. 그럴 때면 조무래기들이 달려와 서로 마당비를 빼앗으려 싱갱이를 부리고… 딸랑딸랑 종을 울리면 마을의 여기저기서 책보를 든 아이들이 학교로 달려왔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손을 번쩍 올려 아동단경례를 한다. 또랑또랑 활기에 넘친 그 목소리들…

글을 배우고 창가를 배울 때는 또 그 목소리들이 얼마나 랑랑한가.

 

나는나는 될터이다 음악가가 될터이다

옳다옳다 네가 네가 음악가가 될터이다

 

학교문만 나서면 마을어른들까지 인사를 한다.

《선생님 안녕하슈, 내 금돌이 할애비웨다. 그녀석 오늘 늦잠을 자서 좀 늦었는데 내 래일부터는 단단히 신칙하리다.》

색다른 음식이 있으면 저마다 들고오고 생일이나 무슨 좋은 일이 있으면 저마다 집에 초청한다. 자기가 굉장한 인물이라도 되는듯 마음을 툭 터놓고 애들의 장래일을 의논한다.

밤이면 한때 리계순이 들어있었다던 정금이 엄마네 집 웃방에 누워 천정을 올려다보며 별의별 공상을 다하군 했다.

그 공상은 주로 지철민이와 어떻게 만나는가 하는것들이였다.

한때 정선화는 녀동무들속에서 《공상가》로 불리웠었다.

은진중학교때도 명의조 력사교원으로부터 력대녀류시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기도 앞으로 유명한 녀류시인이 되리라 꿈꾸군 했었다.

허란설헌이며 황진이며 최솔성당과 같은 우리 나라 녀류시인들의 시는 물론 외국의 이름난 시인들의 시까지 빠짐없이 수첩에 써가지고 다니며 암송하군 하였다.

 

정다워라 저 배꽃 나를 위해 피였는가

님은 아직 안 왔으나 봄은 벌써 돌아오니

처마밑에 오가는 수많은 제비들은

노을 담뿍 몸에 받고 쌍지어 날아도네

 

저녁, 달밝은 밤. 내물은 수얼수얼 노래하며 흐르고 달빛은 은실금실 흘러내려 내물에서 반짝반짝 부서져 빛나고…

사랑하는 그이와 함께 내가를 거니는 재미는 또 얼마나 감미로울가.

《난 선화가 이렇게 어랑촌에까지 찾아올줄은 정말 몰랐구만.》

철민의 놀라와하면서도 흥분한듯 한 목소리.

《어느 책에선가 이런 글을 본 생각이 나는군요.

〈내 사랑을 위해서는 목숨도 서슴지 않으리라…〉 호호호, 계순언니가 일깨워주더군요. 사랑은 쟁취해야 한다구…》

《그러니 선화는 사랑을 찾아 예까지 왔다는거요?》

《나야 철민씨를 찾아왔지요.》

《고맙소, 선화. 난 그때 선화의 그 편지를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댔소. 선화는 어느때든지 꼭 내 품에 다시 돌아오리라고 말이요. 대상자가 있다는것두 다 내가 자기때문에 피해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해 우정 그런거라구… 나를 사랑하기때문에 헤여질 결심을 한것이라구 말이요. 내 생각이 맞았지?》

잊을수 없는 사람, 불같이 뜨거운 사람…

꿈도 아름다왔다. 이제 그이를 만나게 되면…

그럴수록 선화는 자기를 구원해주고 사랑을 되찾을수 있게 하여준 계순이가 못 견디게 그리워지군 하였다. 한시라도 빨리 만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싶었다. 하지만… 그를 만날 일이 두려워지기도 하는 정선화였다.

드디여 그날이 왔다.

정선화는 지금 고동하기슭을 따라 타박타박 처창즈로 가고있었다. 현정부의 지시로 김일환이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유격근거지를 처창즈로 언제쯤 옮길수 있겠는지 알아보고 오라는것이다. 계순이와의 남다른 관계를 생각해서 우정 자기에게 이 과업을 주었겠지만 그리고 이제 가면 그처럼 보고싶던 리계순언니를 만나게 되겠지만… 그의 입에서는 때없이 한숨소리가 새여나오군 했다.

고동하물결우로는 시퍼런 얼음장들이 둥둥 떠내려오고 오른쪽산골짜기들에는 흰눈무지들이 웅크리고앉아 독을 쓰고있었지만 강기슭 버들개지들은 통통 부풀어올라 봄을 부르고있었다. 불어오는 마파람에도 훈훈한 봄기운이 느껴진다.

정선화는 여늬때 같으면 버들개지를 꺾어 봄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골짜기 얼음밑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시상을 고르기도 하고 길가의 봇나무를 휘여잡고 한창 부풀어오르는 신비한 움을 볼에 비비며 환희에 차서 야들야들한 그 싹과 봄을 속삭여보기도 하였겠지만 지금은 그럴 경황이 없었다. 자기의 생활이 벅차고 보람차질수록 어쩐지 계순이에게 죄스러운감이 드는것을 막을 길이 없었던 정선화였다.

(계순언니가 지금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고있을가.)

언제인가 정금이 엄마가 망돌로 수수쌀을 타개며 울분에 차서 하던 말이 흉벽을 두드린다.

《부녀부장은 시집갈 때까지 임자가 사는 그 웃방에서 살았다네. 그 아까운 머리태를 자른것두 그 방이였구… 시집가는 날 머리단장, 옷단장두 바루 그 방에서 하였지. 난 잘 알아. 우리 부녀부장이 어떤 사람이구 현당서기가 어떤 사람인지…》

정선화는 그때 함께 망손을 맞잡고 망돌을 돌리며 그 가슴아픈 소리를 들었었다.

《원칙이 있구 그러면서두 소탈하구 쾌활하구… 사람들이 다들 좋아했지. 그 현당서기를 말이네.… 색다른 음식은 물론이구 그가 지나가는걸 보면 죽물이라두 같이 들자구 끌어들이군 했어. 아이들은 또 얼마나 사랑했다구… 그런데 조아범이가… 자기가 현당서기자리를 차지하려구 김일환서기의 〈결함보따리〉를 만들었다는 말들이 쉬쉬하며 돌아가더군… 뭐? 조용히 말하라구? 아니, 난 숨길게 없어. 난 보면 본대루 말하는 사람이야. 어쨌든 그 김일환서기를 해임시키려구 모모한 사람들이 작당을 한다는 말이 돌았어. 그런데 글쎄 어느날 아침 동만특위에서 조아범을 현당서기로 임명했다는 소리가 들려오질 않겠나. 김일환서기는 리계순부녀부장과 함께 멀리 처창즈로 보내고… 그게 무슨 청천벽력같은 소리냐 하구 부녀부장네 집으로 달려갔지.

정말 그 사람들이 이사짐을 싸고있더군.

난 억이 막혔네. 눈물이 나와 견딜수가 없었어. 〈이게 무슨 일인가. 부녀부장, 이 일을 어디다 하소하면 좋나, 응? 어딜 찾아가야 이 일을 바로잡을수 있느냐 말이야.〉 하고 부녀부장의 손을 잡고 소리쳤지.

부녀부장이 웃으며 말하더군.

〈정금이 엄마, 너무 마음쓰지 말아요. 우린 처창즈에 유격근거지를 창설하기 위해 가는거예요.〉

난 도리머리를 했지. 울분을 터뜨렸어.

〈그럼 왜 서기자리에서 뗐겠나. 지금 무슨 말들이 돌고있는지 아나? 처창즈가 중요하면 그 사람 자기네들이 갈게지 왜 부녀부장넬 그 험지에 보낸단 말인가.〉

부녀부장은 또 웃더군.

〈아이참, 정금이 엄만 그것도 몰라요? 그건 우리가 누구보다 그 일에 적합하기때문이란 말이예요. 다른데 마음쓰지 말구… 건강해서 일을 잘하세요. 헤여졌다 만나면 정은 더 깊어진대요. 호호호.〉

난 또 눈물이 나왔네.

부녀부장은 그렇게 떠나갔지. 아무런 다른 내색도 없이 웃으면서… 하지만 속이야 오죽했겠나.

그 깊디깊은 산골에 가서 지금 어떻게나 지내고있는지…》

선화는 계순의 체취가 구석구석 그 어디나 다 슴배여있는 정금이 엄마네 집 웃방에 누워 억울하게 쫓겨간 그들을 생각하며 때없이 눈물을 짓군 했었다.

선화는 호- 하고 또 한숨을 내쉬였다.

이제 가면 계순언니를 만날수 있다는 기쁨과 함께 억울한 일을 당한 그를 어떻게 위로해줄가 하는 가슴아픈 생각에 발걸음은 연추라도 매단듯 무거웠다. 계순언니도 이 선화를 만나기가 무척 따분하고 옹색할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길은 고동하기슭에서 오른쪽골짜기를 향해 꺾어들었다. 크지 않은 개울을 따라 구불구불 뻗어올라갔다. 개울에 덮인 눈얼음밑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좔좔 기세차게 들려온다.

선화는 그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올라갔다.

처창즈가 가까와진다는 생각이 들자 발걸음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마음은 더욱 괴로와졌으며 한숨은 더 자주 쏟아져나왔다.

처창즈는 안도현 황구령에서 남쪽으로 50여리 나가 안도현과 화룡현 경계에 있는 산간지대로서 옛날에 달구지를 만들던 곳이라고 한다.

처창즈에는 이미전부터 박덕산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파견되여 근거지를 꾸리기 위한 사업을 하고있었다.

원래부터 어랑촌유격근거지는 앞으로의 이동을 전제로 하고 꾸리였었다. 처창즈는 대밀림지대여서 이모저모로 유리했다.

선화가 처창즈에 도착한것은 석양이 깃들무렵이였다.

리계순이네 집은 동남차라고 하는 깊은 골짜기에 자리잡고있었다.

김일환은 마당에서 텅텅 장작을 패고 계순은 옆에서 장작을 차근차근 가려놓고있었다.

《안녕하세요?》

선화는 마음을 다잡으며 마당에 들어섰다. 계순이가 장작개비를 떨어뜨리며 벌떡 일어났다.

《아니, 이게 누구야? 선화동무가 어떻게 예까지 왔어요?》

반겨 달려나와 손을 잡아흔든다.

김일환이도 허리를 펴며 목에 걸쳤던 수건으로 이마와 목덜미의 땀을 훔쳤다.

《전번에 어랑촌에 갔을 때 만났던 동무로구만. 멀리서 오느라 고생했겠소.》

선화는 괜히 눈물이 쑥 나오는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선화동무가 아동단학교선생이 되였다는 말은 들었댔어요. 어때요, 재미가 나요? 힘들지요?》

선화는 눈을 슴벅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랑촌에서야 뭐… 힘들것도 없지요 뭐.… 그런데… 언니가 여기서 얼마나 고생을 해요?》

계순은 밝게 웃었다. 희고 가쯘한 이가 반짝이며 그 웃음을 더 밝게 해주었다.

《고생은 무슨… 우리 하는 일이야 늘 그렇지요 뭐. 힘들수록 보람이 있는것이고…》

계순의 그 얼굴에는 단 한점의 그늘도 없었다.

(어쩌면 이 언니는…)

《그래 선화동문 무슨 일때문에 왔어요?》

선화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것을 느꼈다.

《회장아바이가 근거지 이동준비가 어떻게 되였는지 알아보고 오라고 해서… 아마 근거지를 인차 옮기려나봐요.》

김일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우선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속도로 나가면 금년말부터는 사람들을 받을수 있을것 같소. 구체적인건 후에 이야기하고… 우선 좀 쉬오.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집사람과 이야기나 하면서…》

김일환은 다시 힝힝 코김을 불며 장작을 팼다. 한아름이나 되는 나무통들이 도끼질 한번에 쩍쩍 갈라져나갔다. 선화는 자기 가슴속에 서리서리 엉켜돌던 불안하고 옹색하던 감정도 그렇게 다 깨여져나가는듯 했다.

《서기동지가… 저렇게 나무까지 팰줄은 몰랐군요.》

선화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거의 경의에 가까운 눈길로 김일환을 쳐다보자 계순은 방그레 웃었다.

《집에서야 남편구실, 세대주구실을 해야 할게 아니예요. 그리구 이젠 서기동지라 부르지 말아요. 서기에서 해임된지가 언제인데…》

선화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지금 어랑촌에선 다들 얼마나 말이 많은지 몰라요. 일 잘하구 원칙있구 마음고운 사람을 해임시켰다구… 웃사람들이 사람을 잘못 본다구…》

《그런 말은 말아요. 어디서 무슨 일을 하건 그게 문제가 아니예요. 무엇이 혁명에 더 리로운가 하는게 문제이지.》

《혁명에 리로운건 아저씨가 계속 현당서기를 하는게 아니겠어요.》

《그런 말은 그만하자요. 참, 그 동문 만났어요? 지철민… 동무라고 했던가?》

선화는 수집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왜? 그 동무가 어랑촌에 없어요?》

《예… 어디 무슨 공작나갔다는것 같아요.》

선화는 지나가는 소리처럼 말하고는 장작을 패는 김일환을 홀린듯 쳐다보았다.

《아저씨는 정말 운동선수체격이예요. 아저씨가 룡정일판에서는 한다하는 축구공격수로 소문이 자자했댔지요.》

계순은 선화를 돌아보았다.

《선화가 학교 다닐 때도 그런 말이 돌았어요?》

《예, 동흥중학교 축구선수들에 대한 소문은 룡정시내 학교들에서 늘 화제거리가 되군 했답니다. 제가 소학교에 갓 들어갔을 때도 아저씨네는 이미 졸업을 한 뒤였지만 소문이 자자했어요. 축구는 그때처럼 해야 한다구…》

《글쎄 축구를 해서 황소를 탄 사람이라구 소문은 났댔지만 난 내 눈으로는 한번도 보지 못한걸요.》

계순은 이렇게 웃으며 일환에게 다정히 말했다.

《도끼질을 좀 슬금슬금 하시라요. 밤에 또 공작나가셔야 할텐데.…》

일환은 해가늠을 해보고는 여전히 도끼질을 멈추지 않았다.

《톱질해놓은것이나 마저 팹시다. 당신은 얘기나 나누오, 저녁에 늦지나 않게 해주고…》

계순은 미더운 눈길로 남편을 쳐다보았다.

《어제 밤엔 구국군부대의 대원 하나가 앓는다구 약을 가지러 황구령까지 넘어갔다 왔다우. 그러구두 온종일… 저녁엔 또 그 약을 가지고 구국군부대엘 가야 하는데…》

남편에 대한 한없는 사랑과 념려와 보살핌과 긍지가 깃든 말이였다. 인정이 푹푹 풍기는 어조였다.

저녁식사를 끝내자 김일환은 첩약꾸레미를 들고 구국군부대로 떠나갔다.

설겆이를 끝내고 들어온 계순은 행주치마를 벗으며 미안한 어조로 말했다.

《어쩔가, 난 웃마을에 갔다와야겠는데… 선화는 좀 쉬라요. 먼길을 왔는데… 내 제꺽 자리를 펴줄게…》

선화는 모처럼 찾아온 자기를 두고 집을 뜨려는 계순이가 어쩐지 섭섭했다. 가슴이 허전해짐을 느끼며 시틋이 물었다.

《그리 바쁜 일인가요?》

《오늘 밤엔 그곳 마을녀인들에게 노래를 배워주기로 계획했댔어요. 부녀회조직을 더 늘구려구… 어찌겠어요, 갔다 와서 밤을 새우며 이야기를 하자요.》

온몸이 나른했지만 계순이가 없는데 혼자 집에 누워있을수도 없었다. 선화는 몸을 일으켰다.

《그럼 함께 가자요. 혼자 무슨 멋에 있겠어요.》

《피곤할텐데… 누워있어요.》

《일없어요. 어쩌다 만났는데… 함께 있고싶어요.》

계순은 반색을 했다.

《그럼 함께 갔다오자요.》

둘은 문밖을 나섰다. 서로 팔을 끼고 웃마을로 향했다. 누가 보건말건 누가 신임해주건 의심하건 그런것은 애당초 념두에도 두지 않는것 같은 계순이네의 마음이 선화는 잘 리해되지 않았다.

아무도 보지 않는 이런 외진 곳에서도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남편은 구국군부대일에, 안해는 부녀회사업에 사적인 모든것을 다바치는 이들…

문득 정금이 엄마가 하던 말이 떠올라 선화는 분개한 어조로 말했다.

《언니넨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하고서도 정말 아무런 내색도 안하는군요. 사실 지금도 어랑촌사람들은 언니네 일을 두고…》

《가만!》

계순은 얼른 팔을 끼지 않은 다른 손으로 선화의 입을 가볍게 막았다.

《그런 말은 말아요. 우린 일없어요. 오히려 여기 와있으니 생활이 얼마나 아기자기하다구요. 낮엔 밭에 나가 함께 일하구 점심때 들어와선 대톱을 마주잡고앉아 땔나무도 썰고… 저녁에 밥상에 마주앉아서는 서로 밥도 권하구, 반찬이 짜졌다, 국이 싱거워졌다 투정질도 하구… 호호호. 우습지요?》

계순은 말해놓고보니 자기도 우스운지 명랑하게 웃었다.

선화는 그럴수록 더 억울했다.

《그런데도 동만특위에서는… 이런 언니네를 믿지 않구…》

《선화!》

계순은 정색한 어조로 부르며 옆에 낀 팔에 힘을 꼭 주었다.

《혁명은 누가 믿으면 하구 믿지 않으면 안해도 되는 그런 흥정거리가 아니야. 혁명은 량심으로 하는거야.》

《량심?》

선화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래요. 어디서 무슨 일을 하건 혁명에 자기의 모든것을 다바칠줄 아는 그런 량심 말이예요.》

무엇인가 가슴을 세차게 쿵 두드렸다. 뜨거운것이 목을 메우며 욱 솟구쳐올랐다.

마을녀인들이 마중나와 기다리고있었다. 계순은 그들에게 둘러싸여 고콜불을 켜놓은 귀틀집안으로 들어간다. 우리 녀성들도 왜놈들을 반대하여 싸워야 한다고 알기 쉽게 해설해준다. 무슨 말을 했는지 까르르 웃음소리도 터져오른다.

뒤이어 계순의 노래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를 따라 부르는 마을녀인들의 목소리…

정선화는 밖에 서서 흥분된 가슴을 안고 이윽토록 방문에 비낀 불빛을 바라보고있었다.

 

권리를 박탈한 자본사회에

청춘의 붉은 꽃 못 피운 원한

아느냐 그대여 녀성동무들

 

정말 리계순이야말로 불같은 녀자라는 생각이 뇌리를 휘감는다.

그 어떤 고난도 웃으며 디디고 일어서서 자신만만하게, 생활을 보다 억세게, 아름답게 꾸려나가고있는 계순이… 머리가 숙어진다. 저 언니의 가슴속엔 과연 무엇이 끓고있을가. 어쩌면 저리도 밝게 웃을수 있을가. 저힘과 열정은 어디서부터 나오는걸가.

계순이가 또박또박 정색해서 하던 말이 다시금 가슴을 쾅쾅 두드린다.

《혁명은 량심으로 하는거야.》

나는 과연 그렇게 살수 있을가.

선화는 고개를 들었다. 검푸른 밤하늘에서는 수억만 별들이 반짝반짝 무엇인가 열심히 속삭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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