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편 달 비

제 3 장

7

 

정선화와 그를 죽이려던 놈들까지 행방불명되자 적들의 신경은 칼끝같이 날카로와졌다.

리계순이가 놈들의 감시대상에 들었다는것을 안 조직에서는 즉시 철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젠 조직들을 다 복구해놓았으니 속히 돌아와 다른 임무를 수행하라는것이였다.

11월 어느날이였다.

계순은 사업을 인계하려고 《주인마님》에게 장을 좀 보러 갔다오겠다고 하고는 국수집을 나섰다. 이젠 남편과 시어머니가 있는 유격근거지로 가게 되였다고 생각하니 마음은 마냥 부풀어올랐다.

한미영이 뒤를 밟는것이 알리였으나 계순은 모르는척 쑥 장마당으로 들어갔다.

그날은 장날이여서 여간만 복잡하지 않았다. 인산인해를 이룬 장마당은 싸구려소리, 값을 흥정하는 소리, 서로 찾고 대답하는 소리로 떠나갈듯 했다. 계순은 어렵지 않게 한미영을 따돌렸다.

한미영은 리계순이 설마 오늘 도망치기야 하겠는가 하며 돌아섰는지도 모른다.

리계순은 장거리에서 잡화장사를 하는 공작원에게 값을 흥정하는척 하면서 사업을 인계하였다.

뒤끝에 이렇게 덧붙였다.

《정선화동무는 몸이 좀 추서고 마음이 안정되면 어랑촌근거지로 들여보내세요. 그리고… 밀정들을 특히 주의하세요.》

《알겠어요. 이젠 어서 떠나세요. 벌써 파장이 시작되였는데.…》

계순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더운 눈길로 인사를 나누고는 붐비는 사람들에게 밀리는척 하면서 자리를 떴다. 마음이 가벼웠다. 룡정공작임무를 성과적으로 끝낸것이다.

파장해서 돌아가는 사람들속에 끼인 계순은 석양노을이 붉게 물든 해란강다리를 단숨에 가로질러 이도구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한참 걷다가 둔덕진 곳에 올라 어스름이 밀려들고있는 룡정거리를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룡정동지들, 부디 잘 싸워주세요.》

계순은 돌아섰다. 이제는 노래라도 부르고싶다.

정다운 얼굴들이 웃으며 다가온다. 남편의 얼굴에도 시어머니의 얼굴에도 온통 웃음꽃이 폈다.

헤여진지 다섯달… 어느 한시도 잊어본적 없는 사람들이다. 힘겨울 때마다 어려울 때마다 힘을 주던 사람들… 정금이 엄마의 얼굴도 떠오른다. 부녀회원들, 소년선봉대원들, 아동단원들…

얼마나 벅차고 즐거운 생활이 나를 기다리고있는가.

발걸음도 날듯이 가벼웠다. 계순은 속으로 노래를 부르며 걸음을 다그쳤다. 어둠이 깃드는 산굽이를 돌아섰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옆에서 《야, 너 어디로 가는 년이야?》 하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왔다.

계순은 자기도 모르게 와뜰 놀라 그 자리에 멈춰섰다. 돌아보니 키가 꺽두룩한 자위단놈이 양포를 앞에 내댄채 다가오고있었다.

계순은 가슴이 섬찍했다. 흥분은 대번에 가라앉았다.

(왜놈의 개로구나. 여기도… 개가 있구나.)

얼핏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둠이 깃든 길가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말그대로 1 대 1이였다. 하지만 맨손으로 총을 겨눈 억대우같은 사내놈과 무턱대고 맞서 싸운다는것은 도저히 승산이 없는 일이였다.

어쨌든 저놈이 총부터 내리우게 한 다음 무슨 수를 쓰든 마련을 봐야했다.

계순은 후드득 뛰는 가슴우에 손을 모아쥐며 우정 토라진 소리를 했다.

《아이, 정말 깜짝 놀랐네. 사람을 그렇게 놀래우는 법이 어디 있어요. 내 참… 난 저 웃마을에 가는데… 아저씬 도대체 누구예요?》

《그래? 나도 웃마을에 사는데… 누구네 집으로 가는거야?》

계순은 그만 아연해지고말았다. 이놈이 정말 웃마을에서 살가? 그럴수도 있다. 그렇다면… 서뿔리 말하다가는 대번에 탄로날수가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대답은 하여야 했다.

계순은 우정 반색을 했다.

《그래요? 정말 잘 만났네. 어두워서 귀신같은게 나타날가봐 무섭던참인데… 같이 가자요.》

자위단원놈은 젊은 녀자의 상냥한 말씨에 그만 노긋노긋해지고말았다.

하지만 경계심은 늦추지 않았다.

《앞서 걸어. 내 동무해주지.》

계순은 할수없이 그놈의 앞에서 걷기 시작했다. 말은 천연스럽게 했지만 신경은 바늘끝처럼 예리해졌다. 이제는 어떻게 하면 좋을가.

이놈을 어떻게 하면 따돌릴수 있을가.

《그런데 넌 어디서 무슨 일로 와?》

계순은 걸음을 빨리하며 생각나는대로 대답했다.

《난 저 연길쪽에서 와요. 외할머니 집을 찾아서…》

《외할머니가 어디에 있기에?》

《요 웃마을에서 산다고 하잖았어요. 아저씬 거기서 오래 살았어요?》

《오래 살았지. 그곳 사람들은 다 알아. 외할머니가 누구야?》

간단치 않게 끈덕진 놈이였다.

《아이참, 외할머니가 누구긴 누구겠어요. 외할머니지, 정말 웃기네. 아이쿠 발이야.》

계순은 금시 발이 욱질리운듯 그 자리에 폴싹 주저앉았다. 그놈은 우뚝 서더니 《왜 그래?》 하며 곁으로 다가왔다.

《발이 욱질렸어요.》

《그래?》

그놈은 곁에 와서 내려다보더니 슬쩍 계순의 팔을 잡았다.

계순은 와뜰 놀라며 후닥닥 일어섰다.

《다치지 말아요.》

《히히, 누가 어쩐다구 그래… 걸을수 있겠어?》

놈의 목소리엔 벌써 음탕한 색갈이 끼여들었다.

《걷지 않구요, 다가서지 말아요.》

계순은 맵짜게 쏘아붙이고는 우정 절뚝절뚝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그놈이 말을 못 걸게 자꾸 신음소리를 냈다. 놈의 속심이 빤드름히 들여다보이자 속으로는 코웃음이 나갔다. 흘끔흘끔 뒤를 몰래 곁눈질하노라니 불쑥 놈의 어깨에 매달려 거들거리는 총이 눈길을 휙 잡아끈다. 아, 총! 총이로구나. 속이 두근거려진다. 숨이 가빠진다. 저놈의 총을 어떻게 빼앗지 못할가? 욕심이 생긴다. 근거지에서는 총 한자루 한자루가 그렇게도 귀한데… 장군님께서는 적의 무기를 빼앗아 자체로 무장해야 한다고 하셨다던데… 어떻게 하면 좋을가.

남편이 들려주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강가, 빨래하는 두 부녀회원, 왜놈순사 한놈이 나타나 빨리 업어 건늬라고 호통친다. 못 견디는척 하며 왜놈순사를 업고 강복판에 이른 그들은 놈을 물속에 처박고 빨래방치로 두드려팼다. 총을 빼앗아냈다.…

이놈은 어떻게 하면 좋을가.

문득 저 앞마을에서 개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한 불빛들이 어스름속에 비쳐나왔다. 마을이 가까와오고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총은커녕 방금 한 말까지 탄로나겠는데… 어떻게 할가.

나지막한 둔덕을 내려갔다. 쑤얼쑤얼 물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도구와 이도구사이로 흐르는 강이였다. 강은 그리 넓지 않으나 대신 깊다는것을 계순은 알고있었다. 싸늘한 강바람이 불어왔다.

11월 마가을이라 뼈속까지 스며드는 바람이였다.

강물도 얼음같이 찰것이다.

강을 가로지르며 외나무다리가 건너갔다. 그것을 보자 룡정에서 국수목판에 돌을 담아이고 밤에 외나무다리를 건느는 련습을 하던 일이 떠올랐다. 이따위 외나무다리쯤은 문제도 아니였다. 피뜩 한가지 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

계순은 힐끗 그놈을 돌아보았다.

《저… 아저씨, 먼저 건느세요. 난… 캄캄하고… 무섭구… 또 발이 아파서 기여건느겠어요.》

《기여서 건느겠다구?》

계순을 한참 바라보던 그놈은 흐흐 웃었다.

《그럼 내 옷을 단단히 잡아.》

그놈은 먼저 외나무다리에 성큼 올라섰다. 이 다리로 많이 다닌 모양 익숙된 걸음새였다. 계순은 우정 겁을 먹은듯 주저주저하며 그놈의 옷자락을 잡고 외나무다리에 들어섰다. 놈은 자기 몸에 닿은 젊은 녀성의 손길을 느끼자 총을 쥐였던 손으로 슬며시 계순의 손을 움켜쥐였다.

《어마나, 이거 왜 이래요?》

《가만 있어, 잡구 건너가는게 더 안전해.》

징그러운 목소리, 높아진 숨소리… 놈은 이제 강만 건느면 어째보자고 할 심산 같았다.

《호, 아저씨두 참…》

계순은 못 견디는척 했다. 이제는 빨리 수를 써야겠는데… 계순은 자기도 숨소리가 높아지는것을 느꼈다. 총은 여전히 그놈의 어깨에 걸린채 건들거렸다. 눈길은 자꾸 총에로만 향했다. 이걸 어떻게… 벗겨야겠는데…

《아이 그렇게 꽉 잡으니 막 아파요. 내가 그냥 아저씨 옷만 잡고 건느자요.》

《그… 그럼… 그렇게 하라구.》

그놈은 손을 놓았다. 어찌나 꽉 쥐였댔는지 팔목이 다 얼얼했다.

계순은 이번엔 자기가 그놈의 허리춤을 잡았다. 그놈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그러는새에 어느덧 강복판에 이르렀다. 이제는 죽든살든 해봐야 하였다. 좋다, 해볼테면 해보자. 네깐놈에게 질 내가 아니다. 계순은 입술을 옥물었다. 숨을 들이그었다가 갑자기 《아야!》 하고 발을 헛디딘것처럼 비칠하며 총끈있는데로 손을 휘저었다. 총끈을 벗기는것과 동시에 이번엔 또 반대쪽으로 발을 헛디딘듯 《어마!》 하며 그놈에게 몸이 쏠리는것을 어쩌지 못하는것처럼 콱 밀었다.

그놈은 《억!》 하고 외마디소리를 치며 허양 강물속에 곤두박혔다. 강물은 물살이 여간만 빠르지 않았다. 놈은 한번 구불떡하더니 그대로 밑으로 떠내려갔다.

계순은 가까스로 자기 몸을 가누었다. 순간 불덩이 같은것이 가슴 한복판으로 확 날아들었다. 오른팔굽에 총끈이 걸려있는것이다.

(성공했구나.)

계순은 와락 총을 움켜잡았다. 환희, 기쁨…

계순은 한달음으로 외나무다리를 건너갔다.

마을에서 개들이 짖어댔다. 계순은 마을어귀에서 길을 버리고 산에 들어섰다. 캄캄한 밤길이지만 총까지 메고 정든 사람들에게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기쁘기만 했다. 밤바람이 우수수 불며 이마의 땀을 식혀주었다.

 이전페지  차례  다음페지 
되돌이 목록
감 상 글 쓰 기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22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