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편 달 비

제 3 장

6

 

그것은 틀림없이 허영에 뜬 경박한 처녀의 차림새였다.

은회색양복치마에 새하얀 브라우스를 받쳐입고 하늘색양산을 뱅글뱅글 어깨우에서 돌리며 굽높은 흰구두로 먼지 오른 포석을 똑똑 찍어가는 처녀…

길좌우로 촘촘히 늘어선 료리점, 잡화점들에서 울려나오는 싸구려소리, 서로 욕질하는 소리, 소매치기들이 무엇을 쥐여들고 내뛰는지 째지는듯 한 녀인들의 아우성소리, 인력거 굴러가는 소리, 자동차경적소리, 양복에 가죽가방을 든 점잖은 신사, 베잠뱅이를 걸치고 지게를 진 늙은이, 때국이 흐르는 포단으로 애기를 둘러업고 가는 아주머니, 조선말, 중국말, 왜말… 부산스럽고 소란스러운 거리, 찌는듯 한 해볕에 뿌옇게 떠도는 먼지…

그 모든것을 경멸하듯 호똘호똘 걸어가는 처녀… 그가 바로 왜놈《토벌대》가 어랑촌근방으로 밀려가니 빨리 대책을 세우라는 긴급정보를 전달하고 오는 혁명조직성원이라는것을 사람들은 꿈에도 상상 못할것이다.

(그이가 오늘의 나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가?)

정선화는 마냥 가슴이 부풀어오르는것을 어찌할수가 없었다. 리계순의 지시로 은진중학교의 옛 스승을 만나러 갔다오는것처럼 하면서 련락장소에 비밀쪽지를 전달한 선화였다. 요즈음은 정말 사는 재미가 있었다. 그럴수록 계순이가 고마왔다.

빵빵- 자동차 한대가 경적을 요란스레 울리며 옆을 스쳐지나갔다. 운전칸에 앉은 왜놈장교가 눈을 흘깃거린다.

선화는 《흥.》하고 코웃음치며 입을 비쭉해보였다.

순간 선화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화, 주의해야겠어요. 아무래도 우리 주위에 누군가 있는것 같애…》

계순이가 조직성원들에게 각성을 높여야겠다고 강조하면서 선화에게 특별히 한 말이였다.

지하에 깊숙이 들어앉았던 공산당원들, 공청원들, 소년선봉대원들, 부녀회원들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자 왜놈들도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날뛰기 시작했다는것이다. 삐라가 계속 뿌려지고 《토벌대》가 룡정시를 거쳐 어디론가 가느라면 얼마 못가 유격대의 습격을 받고… 놈들이 가만 앉아있을리 없었다.

선화는 가슴이 후드득 떨리는것을 느꼈다.

저기 거들먹거리면서 마주오는 헌병놈은 나를 어떻게 볼가? 내앞에 다와서는 갑자기 목덜미를 움켜쥐며 《요년, 너 부녀회원이지? 련락갔다오는걸 내 모르는줄 알아?》 하고 붙잡지 않을가.

그놈은 다행하게도 그냥 옆으로 스쳐지나갔다. 오히려 선화를 보며 히죽이 웃기까지 했다. 그 눈길에 음험한 빛이 느껴진다. 선화는 본체만체 했다.

속으로 흥- 하고 또 코웃음쳤다. 네따위가 무슨 헌병이라구… 선화는 갑자기 속이 섬찍해서 주춤 서버렸다. 그놈이 금시 돌아서며 자기를 덮치는듯 한 환각을 느낀것이다. 선화는 짜릿한 전류같은것이 등골을 따라 흘러내리는것 같았다. 애써서 겨우 돌아보았다. 아닌게아니라 그놈이 자기를 돌아보고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놈은 또 히쭉 웃으며 한손을 쳐들어보였다. 잡으려는 눈치는 아니였다. 선화는 호- 하고 가늘게 숨을 내쉬며 못 본체 돌아섰다. 또 수상한 놈이 보인다. 중절모에 다부산자를 입고 미도리담배를 피우는 점잖아보이는 사람이 천가게매대에 팔굽을 얹고 서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쳐다보고있다. 저게 혹시 밀정은 아닐가? 왜 나를 유심히 살펴볼가.

선화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앞을 지나쳤다. 한참 가다 돌아보니 《중절모》는 저쪽 반대켠쪽으로 걸어간다.

선화는 호- 하고 긴숨을 내그었다.

문득 계순이가 일러주던 말이 생각났다.

선화는 거리를 구경하는것처럼 흔들흔들 더 걸어가다가 갑자기 무엇을 잊은듯 급히 돌아섰다. 도로 걸어갔다. 유심히 살펴보았으나 누가 따라오는 기미는 없었다.

선화는 방그레 웃었다.

(내가 너무 긴장해졌구나. 아무 일도 없는걸…)

선화는 이모네 집으로 향했다.

《륭회식당》앞을 돌아서 골목길로 질러나갔다.

그러다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뜻밖에도 《륭회식당》옆 으슥한 곳에서 은회색치포를 입은 한미영《어멈》이 양파와 파가 가득 담긴 저자구럭을 한팔에 걸친채 캡을 쓴 어떤 사나이와 만나 무슨 이야기인가 하고있었던것이다. 한미영은 갑자기 자기앞에 나타난 정선화를 보자 일순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이어 호들갑스럽게 웃었다.

《아유, 아씨한테 봄이 찾아왔나봐. 옷차림이 정말 멋있네.》

선화는 어줍게 웃으며 그와 마주서있는 사나이를 보다가 뱀이라도 본듯 소스라치게 놀랐다. 은진중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 번개치듯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학교마당에 갑자기 들이닥친 자동차… 뛰여내려 교원실로, 교실로 달려드는 경찰놈들… 잡혀가는 교원 세명과 학생 다섯명… 그때 운전칸에서는 바로 저 사나이가 독기어린 눈길로 잡혀가는 《공산당》들을 한명한명 《점검》하고있었다. 선화는 신발이 벗겨진 명의조 력사교원에게 달려가다가 저 사나이를 보았었다. 선화의 손에는 명의조선생의 구두 한짝이 들려있었다. 명의조선생은 여섯달만에 페인처럼 되여 풀려나왔었다.

(그런데 저 형사놈이 어떻게 《어멈》을 알고?…)

선화는 황황히 돌아섰다. 그 형사는 한눈을 가느스름히 쪼프리며 독기어린 눈초리로 선화를 쳐다보는데 무슨 기억을 더듬는듯 했다. 가슴이 후드득 떨렸다.

《아씨, 곧장 집에 가겠어?》

한미영이가 수선스럽게 묻는다.

《예, 그런데… 파를 사러 나왔어요?》

목소리도 제대로 나가지 않았다.

《응, 나왔던김에 여기 〈륭회식당〉료리를 좀 보구갈가 하구. 이분이 여기 〈륭회식당〉료리사라누나.》

선화는 당장이라도 도망을 치고싶었지만 한미영이가 자꾸 붙잡는통에 그럴수도 없어 한마디 퉁명스레 말했다.

《우리 국수집이야 조선료리이고 여기는 중국료리인데 뭐 배울거나 있겠어요?》

《글쎄 어떨지 해서… 그래도 이 식당이야 소문난 식당이 아니야.》

그 말은 옳았다. 이 《륭회식당》은 룡정에서 중국료리로는 세손가락안에 꼽히는 이름난 식당이다.

《그럼 보고오지요 뭐.…》

《그럴가? 그럼 가서 이모나 주방칸에 좀 말해줘. 내가 조금 늦어질수도 있다구.》

《알겠어요.》

다행이였다. 황황히 그 자리를 떠났다. 그의 뒤에서는 이런 말이 오갔다.

《저년이 뭔가 눈치챈것 같애요.》

《어디서 꼭 본듯 한 년인데… 가만… 어디서 보았을가… 가만… 가만… 아… 이제야 생각나는구만, 은진중학교 명의조한테 벗겨졌던 구두 한짝을 집어다주던 년…》

《저년이 당신을 알아본 모양이군요.》

《그런것 같소. 내가 형사라는걸 아는 이상 미영씨의 정체도…》

《나야 당신이 〈륭회식당〉료리사라면서 꼬이기에 그런줄 알고 만났댔다면 그만인거고… 아니, 어쨌든 좋지 않아. 내 정체를 알면 공산당이 가만 있지 않을거야. 없애치우세요. 당장… 쥐도새도 모르게…》

《알겠소. 우리〈아이〉들을 시켜야지. 오늘 밤중으로 처리할테니 걱정마오.》

 

정선화는 정신없이 이모네 집으로 돌아왔다.

리계순은 부엌문앞에서 풋배추를 다듬고있었다.

말복을 보낸지도 열흘이 잘되건만 아직도 더위는 물러가지 않아 주방칸에서는 열기가 확확 풍겨나오고있었다.

리계순은 정선화의 눈짓을 받자 얼른 뒤뜰안으로 향했다.

이윽고 계순을 따라 뒤뜰안으로 들어온 선화는 와락 그의 손을 잡았다.

《언니, 〈어멈〉이 형사놈과 만나고있어요.》

《뭐? 〈어멈〉이?》

정선화는 가쁜숨을 톺으며 방금전 《륭회식당》옆에서 본 이야기를 자초지종 알려주었다.

리계순은 긴장해져서 급히 물었다.

《그 형사놈이 선화를 알아보았어요?》

《글쎄요, 안것 같기두 하구.… 그저 날 자세히 보기만 하더군요.》

《어쨌든 주의해야겠어요. 그 〈어멈〉두…》

선화는 눈이 둥그래졌다.

《〈어멈〉이 진짜 나쁜 녀자일가요? 그 형사놈에게 속히우고있는건 아닐가요? 그놈이 자기가 료리사라면서 〈어멈〉을 꼬여가지고…》

계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것 같지 않아요. 저자를 보러 간 사람이 〈륭회식당〉까지 갔다는게… 아무래두… 그리고 그의 료리솜씨야 뻔하지 않아요.》

계순의 말은 옳았다. 그의 료리솜씨는 신통치 못했다. 그래서 여기 국수집에서도 국수물과 료리는 황모라는 료리사가 하고 미영은 감을 준비해주기만 하는 조리사로 일하고있었다. 늘 함께 일하는 황씨한테서도 배우지 못하는 료리기술을 《륭회식당》에 가서 배운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한미영은 너무 당황한탓에 실수를 한것이다.

한미영은 서울에서 사상운동을 하다가 체포령장을 받고 도망친 남편을 찾아 룡정까지 왔다가 로자가 떨어져 할수없이 선화 이모네 국수집에 들어왔다고 했지만 사실은 룡암일대에서 《불여우》로 소문났던 친일지주 한희문의 양딸 한경옥이였다.…

약삭바른 한희문은 룡정에 《조선통감부간도파출소》가 생겼을 때 처음으로 뢰물보따리를 들고가 《협력》을 약속하였는데 그후 파출소부소장이 아이를 하나 키워달라고 부탁한것이 바로 이 한경옥이였다. 한경옥은 자기 아버지가 바로 일본정계에서 무시할수 없는 인물이고 어머니도 도꾜의 요염하기 그지없는 기녀라는것을 전혀 모르고 한희문의 《막내딸》이 되여 부럼없이 자랐다.

기녀인 어머니를 닮아 얼굴이 쪽 빠지고 속은 사무라이후예인 아버지의 야수적인 기질을 물려받은 한경옥은 지금 이때까지도 자기를 일본녀자가 아니라 조선녀자로 알고있었다. 한희문의 남다른 《사랑》속에서 일본에까지 건너가 류학생활을 할 때 한경옥은 자기의 일거일동이 그 누군가의 시야속에 들어있다는것을 전혀 몰랐었다.

한경옥은 자기대로의 꿈이 있었다. 그것은 보통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그런 꿈이였다.

한경옥은 도서관에 양귀비요, 서태후요, 민비요 하는 녀인들의 자료들도 많았지만 오직 무측천에 대해서만 파고들었다. 한갖 상인출신의 계집으로서 황제로까지 된 무측천. 그가 성공할수 있은 비결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에 대한 자료들은 파고들면 들수록 허영과 야심을 더욱 북돋아주었다.

한경옥이 추측컨대 무측천은 뛰여나게 곱지는 못해도 그렇다고 못생긴 편도 아닌 평범한 녀자였다. 무측천은 교태어린 미소와 뭇사내들의 눈길을 끌수 있는 약간 서글픈듯 한 표정과 싱싱한 처녀다운 체취와 은근한 추파를 머금은 눈매와 질좋은 화장품으로 품들여 몸을 가꾸는 그 꾸준한 노력의 도움을 받아 끝내는 자기보다 네살 아래인 당태종의 아들 당고종 리치와 눈을 맞추는데 성공했고 다음에는 대담하게 그리고 서슴없이 그에게 자기몸을 맡기는 결단을 내리였다. 당고종의 몸을 솜씨있게 다뤄주어 어디 가든 자기를 못 잊게 했다. 하여 당태종이 죽게 되자 관례대로 삭발을 한채 감업사의 녀승으로 쫓겨가게 되였으나 새로 황제가 된 당고종이 끝내 다시 데려오게 하였으며 마침내는 자기의 야심대로 중국력사상 유일한 녀성황제로까지 되였다.

문벌을 중시하는 봉건사회에서 리주도독이라는 한미한 관직밖에 더 오르지 못하는 아버지를 두고 참을수 없는 고통을 느끼던 평범한 상인의 딸이 일약 황제로까지 뛰여오를줄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무측천은 기어이 해냈다. 목표를 높이 걸고 그 어떤 실패에도 주저앉지 않고 기회를 놓치지 말며 맹렬히 돌진하는것, 이것이 성공의 열쇠가 아니겠는가. 남자는 세상을 통치하지만 녀자는 그 남자를 통치한다고 했다. 녀자의 치마폭에 담지 못할 사내는 없는것이다.

이 한경옥이라고 가만 앉아있을수야 없지 않는가.

인생이란 한번밖에 없는것인데 할바엔 목표를 높이 걸고 뜀뛰기를 해볼판이다.

상인의 딸과 《지주의 딸》… 뭐가 다르단 말인가.

한경옥은 대학내에서 《대본영》에 믿음직한 줄이 있는 대상들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학을 마치였을 때 그를 데려간것은 《대본영》이 아니라 왕청같이 어느 첩보기관이였다. 《황궁》이 아니라 첩보기관에 가게 된 한경옥은 처음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여서 아연해하고 당황해하였지만 얼마 안되여 바로 이 길이 자기의 남다른 꿈을 실현할수 있는 유일한 무지개길이 될수 있다고 판단하게 되였다. 1년간 일본본토에서 특수훈련을 받을 때 한경옥은 뜻밖에도 양아버지인 한희문이가 1931년 추수투쟁 때 시위군중에 의해 처단되였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대대로 사무라이피를 이어 받아와서인지 물어뜯기 좋아하는 기질인 한경옥은 이 소식을 듣자 이를 갈았다. 《막냉이》라고 누구보다 사랑해주며 일본류학까지 보내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서슴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훈련을 마친 한경옥은 《간도총령사관》으로 건너왔다. 이름도 한미영으로 바꾸었다.

령사관의 령사까지도 조심스레 대하는 흑막속의 인물인 다나까의 직속부하로 된 한미영은 그의 지시로 국수집에 들어가 막일을 시작했다. 리계순이 들어오기 전에 희생된 《어멈》의 정체를 밝혀낸것이 바로 이 한미영이였다.

한미영은 《어멈》의 뒤를 밟아 지하조직을 들추어내는데도 큰 《공》을 세웠다.

한미영은 국수집에서 일하기가 구질구질하고 이제는 깊이 박혀있던 《공산당》도 잡아냈으니 다른 곳으로 옮겨달라고 제기했지만 그의 속심을 알리없는 다나까는 승인하지 않았다.

《조선속담에 우물도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이 있지. 분명히 새 공작원이 올터이니 인내성있게 기다려야 해.》

다나까의 말이였다. 룡정의 곳곳에 《협조회》, 《특별공작반》, 《선무반》을 비롯한 특무외곽조직들과 경찰, 헌병, 특무, 변절자들을 그물망처럼 펼쳐놓고있는 조건에서 각자가 자기 맡은 대상만 잘 지키면 된다는것이였다.

조선사람이 대다수인 룡정에서 조선음식인 국수를 전문하는 식당에 조선사람이 많이 모여드는것은 사실이고 그러니 그만큼 공산당이 발을 붙일 조건이 많다는것이고 그것이 또한 이 한미영이 계속 눌러앉아있어야 하는 리유로 된다는것이다.

한미영은 기가 막혔다. 자기를 저 거리에 득실득실하는 그런 보잘것없는 밀정이나 특무의 한사람으로 취급하는 다나까가 야속하기도 하고 약이 오르기도 하였다. 남들이 알면 눈이 둥그래서 혀를 털 그런 꿈을 안고있는 한미영으로서는 다나까가 얄밉기 그지없었지만 어쨌든 직속상관이라 복종하는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다나까부터 삶아놓아야 했다.

한미영은 이러저러한 경로를 통해 다나까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다나까는 분명 한미영이가 꿈을 실현하는데 다리를 놓아줄수 있는 인물이였다.

한미영은 서슴없이 그 사나이에게 자기의 몸을 맡겼다. 한미영의 타산은 정확했다. 결정적인 순간이 하루하루 다가오고있었다. 꿈을 실현할수 있는 그날이…

한미영은 다시 마음안착을 가지고 《인내성》있게 공작원을 기다렸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한미영의 시야에 처음 들어온것은 정선화였다. 신소설책이나 뒤적거리며 타락한 녀자처럼 안방에만 붙박혀있던 정선화가 생기를 띠고 자주 나다니기 시작했던것이다.

정선화를 거쳐서 비쳐들어온것이 바로 방영순이였다.

한미영은 처음엔 설마 했지만 하루이틀 지나기 시작하자 점점 방영순에게 시선이 집중되는것을 어찌할수가 없었다. 아무리 보아야 방영순은 행동거지가 떠돌아다니던 거지같지는 않았고 말 한마디한마디가 헤실바실하지 않고 씨가 있었다. 한미영은 이제는 정선화가 아니라 방영순을 목표로 정했다. 정선화는 분명 방영순의 영향을 받고있었다.

한미영은 다나까에게 급히 첩자를 보내줄것을 요구했다. 방영순은 국수배달을 하느라 늘 나가돌아가다싶이 하고 한미영은 주방안에서만 맴돌아야 하기때문에 좀처럼 미행을 할수가 없었던것이다.

한미영은 오늘 약속대로 《륭회식당》으로 가서 다나까가 보낸 첩자를 만났다. 영순이를 미행하기 위한 방법을 한창 토의하는데 뜻밖에도 정선화의 눈에 뜨이였다.

한미영은 혀를 깨물었다. 그래, 정선화가 우릴 알아보았으니 당장 처리해야 해. 정선화가 없어지면 방영순이가 놀라서 움직일것이다. 방영순이를 목표로 정한 이상 이제는 선화가 필요없어.

 

×

 

날이 어둑어둑해질무렵 한 사나이가 정선화를 찾아왔다. 뱁새눈을 한 자였다.

《정선화씨이지요? 은진중학교 명의조선생이 급한 일이 있다면서 빨리 데려오라고 해서 왔수다.》

《그래요? 무슨 일이랍니까?》

명의조선생이라는 말에 정선화는 미소를 지으며 흔연히 되물었다.

《글쎄요, 그저 급히 의논할 일이 있다더군요.》

명의조는 선화가 학교에 다닐 때 그처럼 따르고 존경하던 스승이였다. 학교를 졸업하고서도 자주 책을 빌리러 다니군 했었다.

아까 련락임무를 받고 갈 때 명의조선생에게 빌렸던 책을 가져다주러 간다고 명분을 세웠던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였다.

(무슨 일일가?)

아까는 명의조선생이 강의에 들어간 뒤여서 그저 책만 두고 왔었다. 기다려서라도 만나고왔어야 할걸…

좀해서는 부르지 않던 선생이 이렇게 사람까지 보낸것을 보면 여간 급한 일이 생긴것 같지 않다.

《학교에서 찾아요?》

《아니, 집에서…》

《알겠어요. 인차 옷을 갈아입고 나오겠어요.》

계순이가 국수배달하러 나간 뒤여서 그에게 알릴 겨를도 없었다.

은진중학교 력사교원 명의조는 일본제국대학 졸업생으로서 상해에 자리잡고있는 《림시정부》국무총리 김구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있는 사람이였다. 그는 김구의 파견을 받고 룡정에 와 은진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조선력사를 가르치면서 반일운동에도 관여하고있었다. 명의조는 1938년 가을 일제에게 체포되여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정선화가 이 모든것을 알게 된것은 썩 후의 일이였다. 지금은 그저 량심적인 력사교원으로만 알고있었다.

정선화는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자그마한 외면경대앞에 앉아 머리를 비다듬어넘기며 옷매무시를 잠간 살펴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미영이가 주방에서 내다보며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아씬 정말 바쁜 모양이지? 잘 다녀와요.》

정선화는 쓰거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밖으로 나왔다.

명의조선생네 집으로 가려면 전매국쪽으로 해서 뒤길로 한창 올라가야 한다.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길가엔 사람들이 뜨음해졌다.

《선생네 집에서 누구 앓는분은 없어요?》

《글쎄요.》

《왜 부를가?》

정선화가 고개를 기웃거리는데 그 사나이가 갑자기 팔을 건드렸다.

정선화는 걸으면서 그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요?》

《잠간 들려갈데가 있어서… 이리로 갑시다.》

《그게 어딘데요?》

《가보면 알게 될게요.》

정선화는 그가 가리키는 골목길을 쳐다보았다. 해란강가로 나가는 골목길이였다. 그쪽에는 집도 몇채 없었다. 모기 한마리가 앵하고 눈앞을 날아지났다.

선화는 잠시 망설이였다.

사위가 어둑어둑해지고있는것이 별로 불안감을 자아냈다. 하루살이떼가 눈앞에서 왕왕 떠돌았다.

문득 리계순이가 매사에 각성을 높여야겠다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머리칼이 쭈빗 일어서는듯 했다.

컹- 컹-

방금 지나온 뒤쪽에서 개짖는 소리가 났다.

선화는 뒤로 돌아섰다.

《왜 그럽니까?》

《난 안 가겠어요. 곧장 명의조선생한테…》

《잠간만 들렸다가기요.》

그 사나이는 무작정 선화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이게 무슨 짓이예요, 소리치겠어요.》

《소리?》

그 사나이는 피끗 돌아보더니 다른 팔로 정선화의 목을 휘감았다. 눈깜박할사이에 입에 헝겊을 틀어막고 두팔을 묶었다. 기다리고있었던 듯 앞에서 또 한놈이 달려오더니 선화를 머리끝에서부터 자루를 들씌웠다. 미처 소리지를새도 없었다.

《빨리… 빨리…》

놈들은 선화를 자루채로 둘러메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두손을 뒤로 묶이운채 입까지 틀어막히우고 자루속에 들어박힌 정선화는 숨이 막히고 가슴이 터지는것만 같았다.

이놈들은 도대체 어떤 놈들인가, 날 어떻게 하자는건가.

수얼수얼 물소리가 들린다. 해란강가가 분명하다.

《여기가 조용한것 같구만. 여기서 해치우지 않겠나?》

선화 자기를 둘러멘 놈이 씩씩 가쁜숨을 몰아쉬며 내뱉는 말이였다.

정선화는 까무라치게 놀랐다.

이놈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나를… 아, 나는 어쩌면 좋은가.

《조금만 더 올라가자구.》

《그까짓 힘들일게 있나. 제꺽 목을 따구 강물에 처넣으면 될텐데…》

《아까와서 그래. 그냥 죽이기가 아쉽단 말일세.》

《아쉽다니…》

《이보라구. 이 계집은 스무살도 채 안된 숫처녀야, 이걸 우리한테 통채루 맡겼는데 그냥 죽이겠어? 죽일바에야 실컷 데리고 놀다가 죽여야지, 너무 아깝지 않아.》

《하긴 그래, 그냥 죽이긴 너무 아까와. 계집이 꽤나 곱던데…》

정선화는 억이 막혔다. 내가 이렇게 죽다니… 이런 치욕을 당하고 죽다니… 심장이 터질것만 같았다. 정말 당장 심장이 터졌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런 치욕을 당하지 않고 죽을것이다. 아, 내가 왜 이렇게 되였는가.

꿈도 많던 선화였다. 요즈음에 와서야 비로소 사는 멋을 느끼던 선화였다. 삐라를 뿌리고 련락을 다니고… 이제야 사는것 같았었다. 신소설이나 보며 한숨속에 눈물짓던 내가 당당한 부녀회원이 되였다는것을 알면 그 지철민동무는 얼마나 놀랄가 하는 생각을 할 때면 혼자서도 방그레 웃군 하였다.

그와 손잡고 들꽃핀 언덕길을 나란히 걸어가는 그 모습을 눈앞에 그려보며 잠 못들던 밤은 또 얼마였던가.

그런데 이렇게 죽다니… 분했다. 원통했다.

살고싶었다. 철민동무를 한번만이라도 보고싶었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도… 아버지, 어머니는 이 외동딸이 잘못되였다는것을 알면 얼마나 가슴아파할가. 아, 아버지, 엄마…

갑자기 선화는 땅에 쿵 떨어졌다.

자기를 메고오던 놈이 자루를 내려놓은것이다.

《이쯤 왔으면 됐네. 여기서 마련을 보세.》

이제는 마지막이였다. 더는 살아날 방도가 없었다. 살 가망이 없다면 빨리 죽고싶었다. 놈들에게 치욕을 당하기 전에…

그러나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입에 자갈을 물리우고 두팔을 뒤로 묶이운데다가 자루속에 있다나니 몸을 움직일수가 없고 손을 쓸수가 없는것이다. 엄마, 난 이젠 어쩌면 좋아요.

《자 아가씨, 이젠 상면을 좀 해볼가요?》

메고온 놈이 자루끈을 풀며 지껄이는 말이였다.

《달이 밝았으면 좋겠다. 좀 보면서 메사니하게, 히히히.》

한놈이 자루를 벗겼다.

선화는 몸서리를 쳤다. 앞에 해란강의 검푸른 물이 흘러가는것이 보였다. 하늘에서는 초생달이 푸릿한 빛을 뿌려주고있었다.

이젠 끝장이구나. 선화는 눈을 감았다.

바로 그때였다.

어디선가 멀리에서 갑자기 《사람 살려요.》 하는 녀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화에게 달려들던 놈들이 주춤 멈춰섰다.

《어랍쇼. 이건 또 어떤 년이야? 재수없이…》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주세요.》

선화도 놈들도 자기도 모르게 소리나는쪽을 돌아보았다. 한 녀자가 웬 남자들에게 쫓기여 강변으로 달려나오고있었다. 남자는 둘인데 따라잡을듯말듯 녀자에게 바투 따라가고 녀자는 기를 쓰며 내뛰고있었다. 저쪽강가로 향하다가 안되겠는지 획 돌아서서 이쪽으로 또 달려온다.

《어쩐다! 해치울가?》

《뒤따르는 놈들이 어떤자들인지 알아야 할게 아닌가?》

《그럼 가까이 온 다음에… 보고 손을 쓰세. 그년은 자루를 다시 씌워놓으라구…》

놈들이 선화에게 자루를 씌우기도 전에 그 녀자가 달려들었다.

《사람 살려주세요, 저 사람들이 나를 막…》

그를 본 선화는 한길이나 뛸듯 놀랐다. 그 녀자는 뜻밖에도 리계순이였던것이다. 선화는 몸서리를 쳤다.

(아니 그럼 언니까지?)

계순이를 따라오던 사람들이 우뚝우뚝 멈춰섰다. 칼을 뽑아든 이쪽놈들을 본 모양이였다.

《야, 너희들은 대체 어떤 놈이냐?》

선화를 데리러 왔던 《뱁새눈》이 한걸음 나서며 꽥 소리쳤다. 숨이 턱에 닿아 달려온 계순이가 《글쎄, 저 사람들이… 나를 막…》 하며 그자의 앞에 어푸러졌다.

 

×

 

국수를 배달하러 나갔던 계순은 그때 국수집으로 돌아오고있었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아 총총히 걸음을 다그쳤다. 한미영이가 나쁜 녀자라면 선화를 가만둘것 같지 않았기때문이였다.

아니나다를가 대성중학교 담장을 에돌아 막 큰길에 나서는데 최성근이라는 소년선봉대원이 달려왔다.

《야단났어요. 웬 사람이 선화누나를 데리고나갔어요. 만길형님이 빨리 알리라고 해서…》

계순은 가슴이 후드득 뛰는것을 느끼며 급히 물었다.

《어디루 가던? 만길형님은?…》

이 성근이와 만길은 국수집을 지키던 소년선봉대원과 공청원이였다. 계순은 만일을 예견하여 소년선봉대와 공청에서 교대로 선화에게 어떤 놈들이 붙는가 살피게 하였었다.

성근은 손을 들어 국수집의 반대방향인 전매국쪽을 가리켰다.

《저기 전매국쪽으로 갔어요. 무슨 명의조선생소리를 하면서…》

《얼마쯤 갔을것 같니?》

《얼마 안되였어요. 지금 한창 갈거예요.》

《알겠다. 넌 빨리 가서 유철형님을 오라고 해라, 요앞 지짐집에 있을게다.》

그도 역시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대기시켜놓았던 공청원이였다. 곳곳에 아무때나 비상동원할수 있게 조직원들을 배치하여 놓았었다.

계순은 마음이 급했다. 국수나르는 목판을 길옆 우물이 있는 집에 맡겨두고 뛰여나왔다. 어디로 갔을가.

계순은 전매국쪽으로 달렸다. 다행하게도 날이 어둑어둑해서 사람들의 의심을 살 우려는 적었다. 전매국은 해란강을 옆에 끼고 한참 올라가야 했다.

선화를 데려간자는 어떤 놈일가, 무엇때문에 데려갈가, 죽이기 위해서? 비밀을 뽑아내기 위해서?

뒤에서 누구인가 달려오는 발자국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허우대가 큰 유철이였다.

《어딥니까?》

《전매국쪽이예요. 만길동무가 뒤따른다니… 빨리 가자요.》

만길은 해란강가로 나가는 골목에서 기다리고있었다.

《놈들이 저기로 나갔습니다. 선화동무를 마대에 넣어 둘러메고… 방금 내려놓았는데… 급합니다. 뛰여오는 소리만 들리지 않았어두… 나 혼자서라두… 어떻게 손을 써보려던참이였습니다.》

계순은 호- 하고 숨을 몰아쉬였다. 지금껏 정신없이 뛰여와서 숨이 턱에 닿았다. 목에서는 쇠비린내가 났다. 계순은 가쁜숨을 헉헉 몰아쉬며 토막토막 급히 말했다.

《다행이예요. 이렇게… 하자요. 내가 먼저… 사람 살리라고 소리치면서 뛰여…나갈테니… 날 따라오세요. 날 잡아 어째려는것처럼… 바투… 따라오세요. 저놈들은… 내가… 눈을 멀게… 해줄테니… 동무들이… 처리하세요. 그럼…》

계순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지만 뛰여나가며 있는 힘껏 소리쳤다.

《사람 살려요.》

이렇게 되여 정선화가 있는 곳까지 오게 된 계순이였다. 그 《뱁새눈》앞에 어푸러졌을 때 (사실은 쪼그리고 앉았었다.)는 정말로 가슴이 터져나갈듯 숨이 차고 지쳐있었다. 계순이를 내려다보던 《뱁새눈》이 그를 따라온 유철이와 만길에게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품에서 고추가루봉지를 꺼낸 계순이 《아저씨!》 하고 불렀다. 그자가 다급히 고개를 돌리는 찰나 계순은 그의 면상에 고추가루를 확 뿌렸다. 그놈이 《어이쿠》 하며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였다.

이쪽놈이 놀라서 돌아보자 계순은 그자의 얼굴에도 고추가루를 뿌렸다. 유격근거지에서 부녀회원들과 아동단원들이 늘 품고다니는 《고추가루폭탄》이였다. 계순이도 적구에서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 품에 간수하고 다니였는데 오늘 참으로 요긴하게 쓰게 된것이다.

유철이와 만길이가 지체없이 놈들을 덮쳤다.

리계순은 얼른 선화의 입에서 헝겊을 뽑고 팔다리를 묶은 포승줄을 풀었다.

《언니!》

선화는 목메여 부르며 계순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는 정신을 잃었다.

계순은 놈들의 시체들을 강가에 처넣고 돌아온 공청원들에게 급히 말했다.

《선화동무를 빨리 리동무네 집으로 데려가세요. 너무 놀라서 안정을 좀 해야 될거예요.》

《공작원동무는?…》

《난 빨리 돌아가야 해요. 국수배달한 집들에서 빈그릇들을 날라가야 하니깐… 동무들은 아까 토의한대로 곧장 어랑촌으로 가세요.》

계순은 돌아서서 어둠속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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