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편 달 비
제 1 장
젖빛안개가 뽀얗게 서린 저아래 산기슭에 희미한 사람의 형체가 하나 나타났다. 아직은 이른새벽이여서 채 가셔지지 않은 어둠과 짙은 안개때문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볼수는 없었지만 녀성인것만은 틀림없었다.
혁명렬사릉 교양마당 한끝에 서서 릉대문쪽을 내려다보던 김정옥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후드득 뛰는것을 느꼈다.
(혹시 저 녀자가 아닐가?)
정옥은 두눈을 가느스름히 쪼프리며 주의깊게 내려다보았다. 녀인은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었는데 젖빛안개가 치마자락에 굼실굼실 휘감기며 따라오르는것이 마치도 구름을 타고다니는 옛말속의 신선이 아닌가싶다.
그는 점점 조급해지는 정옥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한걸음, 두걸음 퍼그나 느리게 올라오고있었다. 그 한걸음 한걸음에 그 어떤 의미라도 부여하는듯…
첫 지하전동차를 타고온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바쁜 걸음을 한 사람치고는 행동이 너무도 굼떴다. 혹시 몸이 불편한 녀자는 아닌지.…
정옥은 그가 릉대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투사들의 군상쪽으로 자리를 피했다. 자기가 지금껏 만나려고 기다리던 사람이 맞는지 당장이라도 마주내려가 확인하고싶은 조급증은 불같이 일었지만 이처럼 첫 새벽에 남먼저 혁명렬사릉에 찾아오는 그의 순결하고도 뜨거운 감정세계를 고이 지켜주고 존중해주고싶은 마음이 그보다 더 커졌던것이다.
녀인은 향기 그윽한 꽃다발을 가슴에 안고있었다. 그가 자기앞을 지나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의 반신상이 모셔진 렬사릉 상단으로 올라갈 때에야 정옥은 비로소 그의 발걸음이 왜 그리도 굼뜬지 알게 되였다. 그의 머리엔 흰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얼굴에는 오랜 세월이 그어놓은 주름살들이 가득 얽혀있었다.
(혹시 우리 어머니의 전우가 아닐가?)
정옥은 그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서둘러 기억의 문을 열었다. 어머니와 함께 싸운 항일의 녀투사들은 물론 그 연고자들까지 거의다 알고있는 정옥이였다.
정옥은 고개를 기웃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저 늙은이의 표상은 어느 구석에도 없었다. 정옥은 기대와 실망감이 뒤섞인 숨을 호― 내그으며 자기도 모르게 어머니 리계순의 반신상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머니!》하고 나직이 불러보았다.
중발머리를 단정히 빗어넘긴 어머니는 정겨운 눈길로 정옥이 자기를 마주보고있는듯 했다. 아니, 어딘가 더 멀리를 바라보고있다. 밝은 미소를 머금고…
어머니가 환희에 차서 바라보고있는 곳은 그 어디일가.
불시에 눈굽이 쩌릿해졌다. 정옥은 눈을 슴벅였다.
오늘이 바로 어머니의 생일날인것이다.
해마다 이날이 오면 정옥은 가족들과 함께 아침일찍 이 혁명렬사릉에 찾아오군 하였는데 그때마다 이상하게도 어머니의 반신상앞 정갈한 대돌우엔 평양에서는 흔히 볼수 없는 보라색부채붓꽃 한송이가 놓여있군 했었다.
정옥은 처음엔 이슬을 함뿍 머금은 그 꽃을 보며 자기보다 앞서 렬사릉에 올랐던 참관자들중 한사람이 오늘이 어머니의 생일날이라는것을 비문에서 보고 들고왔던 꽃다발에서 한송이 뽑아놓은것이리라 범상하게 생각했었다.
흔치 않은 그 부채붓꽃이 다음해에도 또 그 다음해에도 정옥이가 들고오는 꽃보다 먼저 대돌우에 놓여있는것을 보게 되자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부채붓꽃이 사연이 있는 꽃이구나.)
부채붓꽃은 고산지대의 습한 땅에서 자라는 붓꽃과식물로서 7~8월경에 꽃을 피운다. 이렇게 초겨울에 부채붓꽃을 보자면 식물원이나 온실신세를 져야 할것이다. 어머니와 부채붓꽃, 가족들보다 먼저 어머니를 찾아오는 그 부채붓꽃의 주인…
처창즈시절 어머니와 인연이 깊었던 김명화는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부채붓꽃은 처창즈에 많이 피던 꽃인데…》 하며 의아해하였었다.
정옥은 지금껏 이에 무관심했던 자신을 후회하였다. 어머니의 생일날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오늘 이처럼 이른새벽에 혁명렬사릉에 올라왔다.…
초겨울의 새벽이라 대기는 몹시 쌀쌀했다. 량볼을 바늘로 꼭꼭 찔러대는듯싶다.
정옥은 산기슭쪽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안개만 여전히 굼실대고있을뿐 아직 이쪽으로 올라오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 녀인은 누구일가?)
정옥은 이미 올라간 그 녀인의 눈에 뜨일세라 조심하며 투사들의 반신상쪽으로 향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피여오른다. 혹시, 혹시, 혹시…
마침내 그 녀인이 계단을 따라 천천히 내려왔다.
아― 정옥은 불시에 숨이 꺽 막혔다. 녀인의 가슴에 모아쥔 손엔 부채붓꽃 한송이가 들려있었다. 가슴이 후드득 뛰였다.
녀인은 곧장 어머니의 반신상이 있는 쪽으로 주춤주춤 다가가더니 손에 들고있던 부채붓꽃을 대돌우에 정히 내려놓고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는 한동안 움직일줄을 모른다.
정옥은 그만 코허리가 시큰해지고 눈굽이 쩡해졌다. 밀물처럼 가슴 그들먹이 뜨거운것이 차오르는것을 느끼며 조심스레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가 놀랄세라 발자국소리를 냈다.
녀인은 인기척을 느꼈는지 허리를 펴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한때는 무척 예뻤을 동그스름한 얼굴엔 흘러온 세월의 년륜인듯 굵고 가는 주름살이 얼기설기 얽혔는데 아직 추억에서 헤여나오지 못한 모양 가느스름히 쪼프린채 마주보는 그의 눈가엔 물기가 축축히 어려있었다. 그러던 그의 눈이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의혹과 놀라움과 반가움이 한데 섞인듯 한 소리가 잔주름이 부채살모양으로 모인 작은 입에서 튀여나왔다.
《아니?! 리… 계순?》
놀란 사람으로 말하면 정옥이가 더했다. 정옥은 반색을 했다. 가슴은 환희로 꽉 차올랐다.
어머니를 아는 사람은 정옥이를 보며 이렇게 혀를 차군 했다.
《정옥인 신통히두 어머니를 빼물었어.》
어느 화가는 정옥이를 보고 어머니 리계순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녀인은 정옥이를 순간적으로 어머니와 착각한듯싶었다. 어머니를 잘 알고 어머니와 어지간히 깊은 관계가 있지 않아가지고서는 이럴수가 없었다. 정옥은 너무도 기뻐 와락 그의 손을 잡았다.
《안녕하세요? 제가 바로 리계순의 딸 김정옥이랍니다. 이렇게 만나 꼭 인사를 드리고싶었어요. 어머님은 우리 어머니를 잘 아시는가부지요?》
순간 정옥은 말끝을 채 맺지 못한채 그대로 굳어졌다. 늙은 녀인의 얼굴색이 갑자기 하얘지며 경악에 가까운 표정으로 변했기때문이였다.
《그… 그럼… 임자는… 아이구, 내 이 무슨 실수를…》
그는 눈길을 어디에 줄지 몰라 허둥이며 당황해하였다. 황황히 정옥이에게서 손을 뽑고 자리를 피하려는듯 얼른 몸을 돌렸다. 발을 헛짚어 몸을 비칠하기까지 했다.
정옥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채 얼른 그를 부축해주었다.
《저는 이 혁명렬사릉이 건립되여 몇년째 우리 어머니 생일때마다 가족들보다도 먼저 어머니를 찾아오는분이 누구인지 몹시 알고싶었댔어요. 왜 꼭 부채붓꽃을 가지고오시는지도… 무슨 깊은 사연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어디에 좀 앉아 얘기를 할가요? 저, 강사들의 방에 가시지 않겠어요? 여긴… 추워서…》
《아니… 난 괜찮수다. 그럼… 난 좀…》
그는 채머리를 흔들면서 서둘러 발을 내짚었다. 그의 호흡이 별로 거칠고 빨라진듯싶었다. 정옥은 의문이 점점 더 커지였지만 하는수없이 그를 부축한채 그가 발을 옮기는대로 계단을 내리기 시작했다. 불안한 예감이 가슴밑바닥에서부터 연기처럼 피여올랐다.
이 어머니가 왜 이리도 당황해할가, 왜 만나자바람으로 가겠다고 할가.
정옥은 슬며시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창백해진 얼굴엔 분명 고통스러워하는 빛이 짙게 어려있었다. 그 어떤 커다란 심리적충격을 받은것 같았다. 단순히 몸이 불편해서만 그런것 같지는 않았다.
《저… 몸이 몹시 불편해하시는것 같은데… 제가 집에까지 모셔다드릴가요?》
《아니… 나 혼자 가겠수다. 날 제발 혼자 가게 해주시우.》
정옥은 마음이 허전해졌다.
그는 경황이 없는듯 했다. 발을 자꾸 헛짚었다.
《조심하세요. 저 그럼… 어디서 사시는지 그것만이라도 알려주세요. 제가 후에 찾아뵙겠어요. 어디서 사는 누구이신지…》
《아니… 내 후에… 이제 다 아시게 될거우다. 바쁘실텐데… 어서 일을 보러 가시우.》
그는 애원하다싶이 했다. 자기 혼자 가고싶어했다. 정옥이 자기와 함께 있는것자체를 무척 괴로와하고있었다.
그런대로 지하철도역까지 내려왔다.
지하철도역앞은 벌써 출근길에 오른 사람들로 붐비고있었다. 까만 외투를 입은 사람들, 봄가을외투를 입은 처녀들, 애기를 업은 아주머니들, 삼면가방을 든 점잖은 사람들, 대학생복을 입은 청년들…
더운 김이 연기처럼 확확 뿜어나오는 나들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들어가고나오고 했다.
《난 그럼 가보겠수다. 몸성히 계시우.》
그는 정옥에게 애매한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황황히 사람들속으로 걸어갔다.
《아니, 저… 어머님!》
정옥은 몇걸음 따라가다가 우뚝 서버리고말았다. 그가 어찌나 서두르는지 벌써 사람들의 무리속에 섞여들었던것이다. 대학생들인듯 한 처녀들이 까르르 웃으며 그뒤로 밀려들어간다. 그뒤로는 또…
정옥은 맥이 풀려 물끄러미 그가 사라진쪽을 쳐다보았다. 벼르고벼르다가 모처럼 만났댔는데 주소성명도 모르고 헤여졌으니 맹랑하기 그지없었다. 자꾸 자기를 피하려 하는데 무작정 따라갈수도 없는 일이였다.
분명 어머니에게 무슨 큰죄를 지은 사람같다. 그렇지 않다면야 날 만난것을 그리도 괴로와하랴. 그런 사람이라면 부득부득 찾기보다는 그가 스스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것이 옳은 일같기도 했다. 후에 다 말하겠다고… 후에 다 알게 될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궁금증은 더욱 커진다. 어머니에게 죄를 졌다면 그게 어떤것일가?
문득 《엄마!》하는 챙챙한 부름소리가 들려왔다. 지하철도역안에서 꽃다발을 든 막내딸 은경이가 콩콩 뛰여나왔다. 맵시를 보느라 이 추운 때도 닭알빛봄가을외투를 입고다니는 은경이뒤로 그 애 언니와 오빠 그리고 그 애 아버지가 따라나왔다.
출근하기 전에 혁명렬사릉에 들렸다 가려는것이였다.
《엄마! 오늘은 만났댔어요?》
은경이가 달려와 손을 잡으며 묻는 말이였다.
정옥은 허구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경이 반색을 했다.
《누구예요? 어떤 사람이예요?》
정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늙은 어머니인데… 잘 알아보지는 못했구나.》
은경의 눈이 올롱해졌다.
《만났댔다면서도요? 어디서 사는 누구인지… 그건 알아봤겠지요?》
정옥은 또 도리머리를 했다.
《그럼 주소도 물어보지 못했단 말이예요?》
《…》
《엄만 정말 한심하네. 그럼 도대체 만나서 뭘했어요?》
어느 가정에서나 막내동이들은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제왕》처럼 행세하기마련이다. 교육위원회(당시)의 사람들모두가 존엄있게 대해주는 부국장 정옥이지만 이 《제왕》만은 사정이 없다. 올해에 사로청(당시)에 가맹한 그 애는 이제는 모든걸 자기 식의 자를 가지고 재여보고 재단하고 결론해치우군 한다. 그는 분해서 쌔근거렸다.
《에참… 내가 일찍 나와야 하는건데… 날 왜 깨우지 않았어요?》
그는 밤늦게까지 숙제를 하느라 늦잠을 잔것을 후회하고있었다. 혁명렬사릉에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까지도 계속 토돌토돌거렸다.
정옥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였다. 딸을 탓하고싶은 생각도 없었다. 머리속에는 온통 그 녀인에 대한 생각뿐이였다.
혁명렬사릉에서 돌아와 직장에 나간 정옥은 어머니와 함께 싸운 김일, 박영순, 리두수, 김명화들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들도 말만 듣고서는 그 녀인에 대해 딱히 알수 없노라고 했다. 아무리 생김새에 대해 설명해주어도 기억을 살려내지 못했다. 그럴수도 있었다. 어머니가 희생된 때로부터 얼마나 아득한 세월이 흘러갔는가. 그 세월은 기억해둘 필요가 없는 사람들은 모조리 망각의 바다로 띄워보내고마는 법이다.
그때로부터 몇달후.
정옥이 출근하여 청사로 들어가는데 접수에서 소포꾸레미를 내놓았다.
《부국장동지에게 온 소포입니다.》
《소포? 나한테요?》
정옥은 의아해서 소포꾸레미를 받아들었다. 겉에 《교육위원회… 김정옥동지 앞.》하고 씌여있었다. 정옥은 고개를 기웃거렸다. 소포에는 받을 사람 주소만 있고 보내는 사람은 주소는 물론 이름조차 없었다.
정옥은 사무실에 들어오자 소포꾸레미를 책상우에 놓고 방청소를 시작했다. 책상우를 물걸레로 닦고 바닥을 밀대로 청소하면서도 생각은 그 소포에 가있었다. 누가 보낸걸가? 왜 이름을 안 썼을가.
청소를 다 끝내고야 정옥은 의문을 금치 못한채 꾸레미를 풀었다.
정히 싼 포장천을 푸니 그안에서는 부피두툼한 학습장이 다섯권이나 나왔다. 표지엔 《영생하는 삶》이라는 제명이 씌여있었다.
얼핏 책장들을 번져보니 깨알같은 글씨로 다섯권을 가득 채워놓았다. 소설인지 실화인지도 밝히지 않고 필자이름도 쓰지 않았다. 무엇때문에 그것을 보낸다는 글조차 없었다. 의문은 더욱 커졌다.
(《영생하는 삶》…)
정옥은 제목글을 혼자소리로 되뇌이며 첫장을 번졌다. 첫장에 쓴 글은 좀 큼직큼직했다.
《이 글은 항일혁명투사인 리계순동지와 그의 어머니, 그와 함께 싸운 투사들, 그의 친척들 그리고 그가 살며 싸우던 마을사람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옮긴것입니다.》
그러니 실화인것이다.
정옥은 놀랐다. 우리 어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라니 그리고 우리 외할머니까지?…
정옥은 서둘러 글줄을 더듬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