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돌아오다

 

5

 

간신히 중학공부를 마친 현구는 줄곧 측량대를 메고 다니였다.

그해에는 황해도의 산간지대와 농경지를 측량하게 되여있었다. 현구가 속한 측량대는 엄동설한을 무쓰고 구월산의 험한 산발과 골짜기들을 수없이 넘나들었다.

하야시대장은 나고야태생으로서 나비수염을 기른 난쟁이였다. 그는 탐사망를 호신부처럼 쥐고 다녔는데 성미가 조하고 변덕이 심한 폭군이였다. 자기는 늦도록 지주가 섬겨준 계집을 끼고 놀면서도 대원들을 무섭게 몰아댔다. 측량대의 사업전반과 일정계획이 그의 기분상태에 따라 좌우되였고 질서와 상벌이 그의 손에 의존되였다.

하루는 저녁실사에서 사고가 났다. 공구들중에서 현구의 조수인 쯔시마가 쓰던 접이자가 없어진것이다. 대원들은 대장이 두려워 보고도 못하고 전전긍긍해하였다.

현구는 난색을 짓고 쯔시마조수에게 물어보았다. 쯔시마는 눈망울만 디룩거릴뿐 대답을 못하였다. 접이자를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 그도 도무지 알수 없었던것이다.

《짐작도 못해! 에잇.》 현구는 주먹이 나가는걸 겨우 고 밖으로 뛰여나갔다. 하야시의 표독스런 새눈이 두렵고 행악질이 불안스러웠다. 하지만 당자인 쯔시마는 현구를 따라나서거나 죄책감을 느낄줄도 몰랐다. 조선남해의 대마도에서 건너온 거류민인 쯔시마는 어릴 때부터 좀도적질과 주색에 빠진데다 제 이름조차 쓸줄 모르는 알짜무식쟁이였다. 그래서 사무라이족속들까지 그를 바보로 취급하면서 멸시하였다.

그런 쯔시마를 현구가 불쌍히 여겨 기회가 있을 때마다 셈세는 법과 글자를 배워주어 까막눈을 틔워주고있었다.

현구는 혹한에도 불구하고 아까 낮에 일하던 곳들을 샅샅이 훑어나갔다. 눈속에 떨어진 접이자를 찾기란 모래판에서 바늘을 얻자는노릇과 사했다. 퍼렇게 얼어든 손으로 눈무지를 헤나가던 현구는 마침내 락엽속에서 접이자를 감촉했다. 쯔시마가 구뎅이에 빠졌던 자리였다.

현구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해저문 고개길에 눈보라가 기승을 부렸다. 눈의 장막이 앞을 막아선데다 휘몰아치는 서북풍이 나무가지를 사정없이 들었다. 허기진 그의 몸은 추위와 피곤에 떨리였고 걸음도 제대로 옮길수 없었다. 미끄러지고 어푸러지면서 길을 던 그는 발을 잘못 내짚는 바람에 벼랑밑으로 나딩굴었다. 나무가지에 옷이 찢어지고 바위에 머리를 짓쪼은 현구는 정신을 잃고 골짜기에 쓰러졌다. 펑펑 쏟아지는 눈에 그의 몸체가 묻히고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현구는 온몸으로 더워진 감촉을 받았다. 바람기도 없고 기운도 사라졌다. 땅밑으로 잦아드는 몸우에는 두툼한 이불이 덮여있는듯 했다. 눈을 뜨니 주위가 안개속같이 침침하고 리멍텅했다. 차츰 사방이 환해진 순간 현구는 자기를 지켜보는 눈길과 마주쳤다. 교복을 입은 녀학생이 보조개가 이도록 입술 꼭 다물고 지켜보고있었다.

《깨여났군요! 정신이 들었어요?》

녀학생의 맑은 눈이 빛발치듯 반짝였다.

현구는 응답하려고 했으나 입술이 놀지 않았다.

《가만 누워계세요. 이젠 됐어요, 아버지!》

녀학생의 격한 음성에 이어 오소리털조끼를 걸친 중늙은이가 뚝배기를 들고 들어왔다. 중늙은이는 녀학생에게 뚝배기를 넘겨주고 차근히 현구의 신색을 가늠해보았다. 현구의 넓은 이마와 숱진 눈섭, 땀기가 도는 네모진 얼굴을 살피고는 희끗한 머리를 끄덕였다.

《귀바퀴가 큰게 명은 짧지 않겠군.》

늙은이는 현구의 소생이 다행스러웠던지 롱말을 했다.

《젊은이, 내 목소리가 들리나?》

현구는 의문이 실린 눈빛으로 대답했다. 도대체 어떻게 되여 자기가 여기에 누워있는가? 령길을 걷던 생각은 났지만 그의 일은 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녀야, 뚝배기를 이리 다오.》

박춘권은 현구에게 꿀물을 내밀었다.

《마시게. 어혈을 빼는데도 좋고 몸보신에도 좋거네. 마시고 쉬게. 몸조리만 하면 인차 일어날거네.》

춘권은 현구를 안심시키고는 그의 의혹을 풀어주었다.

해저물녘에 정녀가 산전막으로 저녁을 가져오다가 발견한 현구춘권령감이 눈속에서 업어다 침을 놓아 응급처치를 했던것이다.

《여긴 겨울사냥때 쓰는 산전막일세. 딸애가 불을 때서 구들이 뜨끈뜨끈할거네. 》

춘권은 이렇게 이르고는 정녀에게 집의 닭도 한마리 잡고 조찹쌀죽 쒀오라고 했다.

현구는 북받치는 격정을 누를길 없었다. 춘권부녀가 아니라면 자기는 틀림없이 객사했을 운명이였다.

《아버님, 고맙습니다. 저를 살려주어 정말 고맙습니다.》 현구의 두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음날 정녀를 따라 개털조끼를 걸친 쯔시마가 산전막에 올라왔다. 그는 어앉아 몇번이고 큰절을 하면서 용서를 빌었다. 자기는 배가 고파서 접이자를 찾아 길떠날 생각을 못했노라고 솔직히 고백했다.

현구는 된욕을 퍼부으려고 하려다 참았다. 그대신 나직한 음성으로 타일렀다.

《사람이 자기의 잘못도 모르고 의리도 모르면 그건 짐승만도 못하네. 난 자네가 셈이 드는것 같아 고생한 보람을 느끼네.》 하고 현구는 접이자를 넘겨주며 대장이 알지 못하게 공구함에 건사하라고 했다.

쯔시마는 송구스러이 접이자를 받아쥐더니 괴춤에서 장부책을 꺼냈다.

《형님, 대장님이 여기다…》 쯔시마는 뒤말을 얼버무렸다. 현구는 장부책을 보고 화가 나서 나꿔다. 장부에다 오늘의 실적을 적고 래일의 작업계획을 세우라는것이다. 현구는 벽에 몸을 기대고 거칠게 숨을 내쉬였다. 아무런 연고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경에서 구출한데 비하면 대장의 처사는 너무도 가혹하고 파렴치했다.

현구가 장부를 펼치는데 약봉지를 든 춘권령감이 들어섰다.

《젊은이, 뭘하나? 무리해선 안되겠네.》

춘권은 중상자를 부려먹으려는 하야시대장놈의 처사를 알게 되자 분통을 터치였다. 《악독한 놈들, 찢어죽여도 성이 차지 않겠다니까… 언제 가서 속이 련하게 앙갚음을 하겠는지.》 춘권은 사무친 원한을 참을수 없었던지 뒤를 가리지 않고 욕을 퍼부었다.

쯔시마가 놀란 눈길로 춘권과 현구를 번갈아보면서 대장이 위독하면 입원하라고 말했노라고 했다.

《입원?…》 현구는 반문할뿐 동의하지 못했다. 병석에 있는 고향의 아버지에게 약값조차 넉넉히 보내지 못하는 그가 어떻게 입원료틀 받을수 있단 말인가.

《이 사람이 뭐라구 하는가?》

춘권령감이 왜말을 번역해듣고 화를 내였다.

《입원하라구? , 고양이 쥐생각같은 소릴 하는군.》

춘권은 상처가 도질수 있으니 움직이지 말라고 당부하고는 산속의 옹노를 보러 나갔다.

쯔시마도 측량대로 내려갔다. 약을 먹고 한동안 자고난 현구는 손에 책을 쥐였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앞이 아물거리긴 해도 시간이 아까왔다. 그에겐 아버지의 간곡한 당부가 있었다. 무식한탓으로 땅 떼운 아버지는 병중에도 자식이 공부하길 바랐다.

현구는 마음을 다잡고 고서점에서 구한 책을 펼다. 측량전문가의 자격을 얻기 위하여 검정시험을 준비하는 중이였다. 그는 하루일이 끝나면 곤을 무릅쓰고 밤늦게 공부하였고 낮시간 쉴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독서에 골몰하던 현구는 느닷없이 태스런 자신의 태도에 주의가 미치였다. 남의 신세를 지면서도 제볼장만 보고있으니 도리가 되였는가 하는 자격지심이였다. 그는 상처입은 다리를 움직여보고 어깨도 만져보았다. 하고는 대담하게 일어섰다. 장딴지가 켕기고 무릎부위가 시큰거려 오래 서있을수 없었다. 밖으로 나온 그는 지팽이를 만들어짚고 걸음을 옮겨보았다. 이날에는 좀더 멀리 언덕을 내리였다.

《어딜 가세요! 서세요, 아이.》

정녀가 먼발치에서 달려왔다. 그는 정녀의 부축을 받으며 산전막으로 와 닭곰을 대접받았고 학습방조도 받았다. 이틀전에 측량학과 검정시험에 필요한 도서목록을 적어주었더니 처녀는 어느새 벌써 그 책들까지 구해가지고 왔던것이다.

《정녀씨, 정말 감사합니다. 아버님과 정녀씨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

현구는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는 산전막에 오래있지 못했다. 하야시대장의 야멸 지시가 떨어졌던것이다. 입원을 안해도 되는 정도라면 일을 하라, 안하면 중국동북지방개척반으로 보내겠다는 협박이 왔다.

현구는 지팽이에 의지하여 측량대로 돌아왔고 고역과 굴욕감을 아내며 이악스레 자습을 계속했다. 이듬해 여름에는 시험차로 서울에 갔다가 빌려본 참고서들을 정녀에게 넘겨주고 새책들을 받았다.

현구는 그런 나날속에서 정녀의 살뜰한 손길과 관심이 자신에게 커다란 힘과 고무를 주고있음을 더욱 깊이 절감했다. 고달픈 로동과 왜놈의 천대, 줄 한지에서 진행되는 측량작업은 힘겨운 육체적부담을 강요하였고 따라서 동요와 불만이 뒤따랐다. 인적없는 수림지대에서 눈비를 맞고나면 따뜻한 온돌방이 그리워나면서 만사가 귀찮았다. 숙소에 도착하면 여느 사람들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잠자리에 눕거나 투전판을 벌려놓고 왁작 떠들어댔다. 현구도 언몸을 녹이고 노름 끼여들고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정녀의 사심없는 지성이 상기되여 책을 쳤다.

동시에 현구는 처녀에게로 쏠리는 사모의 정도 억제해나갔다. 소작인의 자식인데다 학식도 없는 가난뱅이로서 녀학생을 넘겨다볼수도 없거니와 그것은 은인에 대한 불손한 행위로 여겨졌다. 물론 정녀는 뛰여난 미모의 처녀도 아니였다. 그저 복스런 얼굴에 눈망울이 맑았으며 자그만 입술은 언제나 꽃잎처럼 발그레했다. 처녀의 미는 단아하고 듬직한 외모에서보다 고결하고 아름다운 마음씨와 자기딴의 생활신념에 있는듯싶었다. 수난자를 동정하는 인간애와 사람들의 지향과 노력을 귀중히 대해주는 처녀의 성품은 누구에게나 있는것이 아니였던것이다.

현구는 수시로 변동되는 작업대상을 구실로 지를 끊었고 인편으로 전해진 여러건의 지를 받고도 굳이 회신을 삼가했다. 시일이 가고 그러한 과정이 반복되느라면 그쪽에서도 짐작할것이고 그에 따라 자기의 앞날도 보람있게 개척하리라 믿었다.

(날 지성껏 보답도 하고 용서도 빌자.)

현구는 은인의 갸륵한 정신을 훼손시키거나 악용할수 없다고 자신 설복하고 욕망을 억제하였다.

세월은 흘러 달이 가고 겨울도 지나 봄이 왔다. 정녀의 편지도 더는 오지 않았다. 그사이에 녀학교를 마친 정녀는 희망대로 교편을 잡았것이다. 현구도 검정시험을 두과목이나 더 치르었고 바람꼴이 매운 여기 개마고원을 측량하고있었다.

한 구간을 끝낸 현구가 양지바른 바위에 앉아 한숨 돌리는데 마을로 갔던 조수가 숨가삐 달려왔다.

《조장님, 서울에서 멋쟁이처녀가 왔어요!》

애젊은 조수가 소리치며 제쪽에서 싱글벙글거리였다. 쯔시마가 일본족의 우대를 받고 본토로 공부하러 가서 새로 용된 조수였다.

《서울처녀가 여기로 왔다구?! 분명히 나를 찾던가?》

현구는 착오같아 되물었다.

《조장님이 아니면 누구겠어요. 선녀같이 고운 처녀예요.》

조수가 현구의 숙소로 처녀를 보냈다면서 빨리 가보라고 등을 떠밀었다.

《?!…》 크게 놀란 현구의 눈앞에 고산지대의 산발과 천리수해가 밟혀왔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조수에게 측량도구를 맡긴 현구는 개울건너 기와장을 올린 마을로 내달렸다. 이 시각 그는 정녀를 단념해온 자신의 태도가 거짓이였음을 통감했다.

하숙집토방에는 먼지오른 자그마한 편리화가 놓여있었다. 개마고원은 조만해서 찾아오기 어려운 하늘아래 첫동네였다. 기차와 산간뻐스를 갈아타고도 인가없는 령길을 며칠이고 걸어야 했다. 그러니 연약한 녀자의 몸으로 얼마나 많은 간난신고를 겪었겠는가? 현구는 정녀의 수고가 헤아려지자 즐거운 상봉에 앞서 명치끝이 찔렸다. 진작 자기의 결심을 알려주었더라면 정녀가 멀고 험한 길을 걷지 않았 아닌가. 송구스럽고 민망스러워 현구는 선듯 방문을 열지 못했다. 숨 죽이고 조심스레 문고리를 쥐였다.

《정녀…》 현구는 뒤말을 잇지 못하며 문을 열었다.

정녀는 양복치마자락을 당길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둥그스름한 얼굴은 빨갛게 익었고 내려뜬 눈길에는 피곤이 실린듯 했다. 전날의 녀학생복을 양장차림으로 바꾼 그의 세련된 자태가 새로운 인상 주었다.

《여기가 어디라구 이렇게 왔습니까!》

현구는 말소리를 더듬었다. 사정은 여하간에 답신을 하지 않아서 수천리길을 걷게 만들었던것이다.

《편지는 받으셨겠지요? 어쩌…》

하고는 회답이 없어서 별의별 생각을 다 했노라고 덧붙였다.

현구는 한숨을 쉬는 정녀를 대하기가 거북스러워 자기로서도 일이 이렇게 될줄은 몰랐다고 실토했다.

《아이참, 에돌지 말고 말씀하세요. 무슨 일이 있었는가요. 혹시 제가 잘못 온게 아닌가요?》

정녀의 긴 눈섭이 가게 떨리였다.

현구는 불원천리 자기를 아온 처녀에게 더이상 속마음을 숨겨둘수가 없었다.

현구의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듣고난 정녀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혼자소리처럼 말하였다.

《어쩌면… 자기의 힘을 믿고 살아오는 현구씨가 남을 믿는데선 그렇게도 린색한가요.》

정녀는 몸둘바를 몰라하는 현구에게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이젠 어찌겠어요. 현구씨는 저를 위해 자신을 억제했다지요. 그런데 제가 여기 세상 한끝까지 왔으니 말예요. 그래도 량심에 걸리는가요?》

말소리는 유순했으나 그속에는 처녀의 결단이 자리잡고있었다. 현구는 그앞에서 다른 말을 찾을수 없었다. 오직 숨막힐듯 한 환희와 행복감만이 전신을 휘감았다.

《정녀!》 한순간 두 젊은이의 열기띤 눈길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뜨락의 가래나무에서 산까치들이 떼를 지어 귀따겁게 울어댔지만 이 시각 그들의 심장은 세차게 높뛰였다.…

두 청춘의 사랑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현구는 충실하고 현숙한 정녀를 더없이 행복하게 해주리라 마음다지였다. 하지만 그들에겐 남들과 같은 단란한 가정생활이 차례지지 않았다.

현구는 한해 잡고 모두 합해서 백날을 안해와 함께 살지 못하였다. 첫아들을 낳은 소식은 함경도에서 받았고 딸의 출생은 바다건너 제주도에서 전해들었다. 가정과 아이들의 양육은 전적으로 교편을 잡은 안해에게 지워졌다. 마을에서는 현구네를 가리켜 세대주가 없는 집이라고 하였다.

정녀는 장기출장에서 돌아온 현구를 예나 다름없이 반겨맞았으며 자신의 부담보다도 객지에서 수고한 남편을 따뜻이 위로하고 애무했다. 현구는 처가의 마을에서 저수지건설부지문제가 제기됐을 때 무척 흥분했었다. 현구는 이 시기 《총독부》직속 측량사업소의 토지조사실 실장이였다. 조선사람에겐 해당되지도 않는 직책을 쯔시마가 주선했던것이다. 일본에 공부하러 갔다가 와서 여러해만에 농림국 토지관리처 처장이 된 쯔시마로서는 자기의 무능을 위장하기 위해 경험과 기능도 높은 현구와 같은 실력자가 필요했던것이다.

현구는 쯔시마의 승낙을 얻고 장인이 사는 황해도의 절골과 이웃골짜기를 현지답사했다. 그 과정에 저수지의 적지는 도청이 설정한 절골이 아니라 마너머 뒤산골짜기임을 확인했다. 그곳은 골안이 깊었고 물자원도 풍부했다. 현구는 지체없이 서울에 올라와서 쯔시마에게 두 지대의 지형조건과 실태를 설명하고 자기의 제안에 대한 약속 받아냈다.

일은 뜻밖에도 그와 같이 되지 않았다. 놀랍게도 현구의 제안이 일본인사냥터에 대한 비법적인 침해로, 전시식량계획을 방해하는 범죄행위로 락인됐던것이다. 현구는 불시로 경무국경찰인 전대산의 호송 받았다. 당시 전대산은 신소과장으로 일하고있었다. 그는 일본족으로 태여나지 못한걸 평생 회하는자였다.

《실장님, 가십시다. 제가 실장님을 호송하게 되여 송구스럽군요.》

전대산은 큰 키를 겁석거리며 왜말을 썼다. 그는 제 애비가 쯔시마 끼고 수탈한 땅을 현구가 측량했다는것을 알고있었기때문에 될수록 공손히 대했다.

현구는 전대산과 그의 애비 전도를 애당초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있었다. 비지땀을 쏟으며 개간한 땅을 부치게 해달라는 젊은 농군을 지팽이로 려치고도 시원치 않아 구두발로 짓밟는 전치도를 현장에서 목격한 현구였다. 그때 이마에 를 흘리며 쓰러진 농군의 옷자락을 잡고 몸부림던 애어린 계집애의 울음소리가 지금도 귀전 때렸다.

호송도중에 전대산은 그저 용서를 비는게 상수라고 현구에게 조언 주었다. 경무국의 사이또경감은 주로 정치범들을 상대로 하는데 그의 손탁에 걸려서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다는것이다.

현구는 쓰겁게 웃었다. 자기를 징벌하려는 죄목들이 하나도 리치에 닿지 않았던것이다.

, 일이 별나게 됐더군요. 실장님이 주장한 골짜기가 누구의것인지 모르지요? 그게 바로 사이또의 장인네 소유지랍니다. 허허, 그러니까 결국 두집 사위들이 맞붙은셈이 아닙니까. 그렇지만 조선사람이 백번 정당하다 해도 일본어른을 당해내겠습니까.》

대산은 쓸개빠진 소릴 해가며 현구를 에 태워 보초가 선 건물안의 경찰에게 넘겨주었다.

현구는 그곳 경의 뒤를 따라 지하계단을 내려갔다. 물기가 도는 벽체에는 곰이가 끼고 찬 기운이 감돌았다. 계단을 내려간 현구는 이번에는 갱도처럼 침침한 복도를 거쳐 철문을 넘어섰다. 그안에 감방들이 있었다. 현구가 들어선 심문실에는 각종 형구들이 칠갑한 벽면에 걸려있었다. 고문용 전기기구와 쇠사슬이 달린 갈구리, 피묻은 바줄과 몽둥이들…

스산하고 전률스러운 지하고문실이였다. 옆감방들에서 신음소리와 악형으로 죽어간 시신을 들어내는 소음이 신경을 압박했다.

얼마 코수염쟁이 사이또가 와이샤쯔바람으로 나타났다. 사이또는 현구를 표독스레 흘겨보더니 무턱대고 시말서를 쓰라고 다.

《난 반성할게 없소.》 하고 현구는 저수지자리이설타당성과 유익성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벼락같이 구두발이 면상으로 날아들었다. 대번에 현구의 코와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립장을 굽히지 않았다.

《한사람때문에 온 마을과 논밭이 물에 잠기게 할수는 없소.》

《조선사람인 주제에 감히 제국의 령을 거역해! 네놈들은 우리의 노복이야. 내놓고 말해야 알겠어.》

사이또의 관심사는 진실이 아니라 살려달라고 빌붙는 비명소리였다.

현구는 반성문을 거절했다. 그래서 무자비한 고문끝에 의식까지 잃었다. 그 이날에 의식을 린 현구는 상처의 아픔보다도 여지없이 짓밟힌 조선사람의 존엄과 인격이 억울하고 통분했다. 난생 처음 겪는 고통이였고 무서운 타격이였다. 그동안 왜놈들의 잔인성과 포악성 여러번 보면서 치를 떨었고 저주도 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목격자의 체험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는 자신이 직접 당한혹한 봉변을 통하여 나라잃은 백성의 비극적운명과 가련한 처지를 뼈에 사무치게 절감했다.

현구는 끈질기게 강박하는 반성문을 끝까지 거절하였다. 협박과 고문이 두려워서 조선사람의 량심마저 더럽힐수는 없었던것이다.

현구는 현직에서 철직되여 지방으로 나가라는 추방령을 받았다.

그는 《총독부》사를 떠나면서 쯔시마를 만나보려고 맘먹었다가을 뱉으며 돌아섰다. 쯔시마 역시 일본놈이였고 또한 그가 현구에게 반성문을 쓰라고 몇번씩 강요했던것이다. 그것은 분명 은인에 대한 배신행위였다. 교활하고 표리부동한자에게 한가닥 기대를 건 자신이 오히려 부끄럽고 모멸스러웠다.

현관문을 나서는 현구한테로 쯔시마가 달려왔다.

《현형, 일이 안됐군요. 종이장에 반성문을 몇자 쓰면 무사했겠는데 현형이…》

쯔시마는 상스러운 에 짐짓 난처한 기색을 지으며 말을 더듬었다. 현구는 그를 외면하였다. 그러자 몇달만 참고있으면 제가 다시 올려오겠노라고 횡설수설하였다.

《쯔시마, 그만하라구.》

현구는 무섭게 쏘아보면서 말을 이었다.

《나를 데려오겠다구? 나는 더이상 자네와 상종하지 않겠네.》

《…》

《난 사람이 되라구 자네를 도와준걸 회하지는 않네. 그건 사람으로서 도리를 했기때문이네.》

《제가 죽은들 그 은혜를 잊겠습니까.…》

《쯔시마.》 현구는 그의 간사스런 소릴 중둥무이했다.

《우리 조선사람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검은것은 검다고 하지 절대로 희다고 하지 않네. 이건 자네도 잘 알거네. 사회생활에서 정의와 량심을 귀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그건 벌써 인간이 아닐세. 인두겁을 쓴 짐승이란 말일세. 난 자넬 키운 사람으로서 이 말만은 똑똑히 해주고싶네. 》

《저는 현형의 고결한 지조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쯔시마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자기도 총독을 만나 진상을 말하려고 했는데 이번 저수지사건은 장소문제보다도 그것을 계기로 반일감정 선동한데 엄중성이 있다고 전대산이가 사이또경감에게 귀하는 바람에 일이 더 크게 번져졌다고 말했다.

《뭐라구? 전대산이가? 그게 사실인가?》

《제가 어떻게 현형앞에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쯔시마는 어떻게 하나 면목을 세우려고 전대산이 조작한 내용을 낱낱이 알려주었다.

현구는 분통이 터져 주먹을 틀어쥐였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매한가지였다. 공적을 올리자고 사건을 날조한 전대산이나 그것을 게삼아 옳은것을 짓밟는 왜놈들이나 한바리에 실어서 조금도 기울게 없었다.

쯔시마와 헤여진 현구는 병원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선 고문상처부터 처받아야 했다. 병원에서 다리와 이마상처를 처치받은 그는 집으로 가기가 난처했다. 상처도 그렇지만 장인이 부탁한 저수지문제 두고 안해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눈앞이 캄캄하였다. 절골에 저수지가 서면 처가집은 물론 부락전체와 논밭이 물속에 잠기게 되는것이다.

아무리 마음을 크게 먹어도 현구는 집으로 돌아갈수 없었다. 소서문거리 《백의 고서점》댁으로 찾아가 선량한 주인부부의 보살핌을 받으며 상처와 마음을 어느 정도 진정시킨 에야 한주일만에 집으로 들어섰다.

집안의 재난은 현구의 고문상처와 철직추방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고향에 찾아가서 경찰서에서 모진 매를 맞은 친정아버지를 만나본 안해는 눈물속에서 남편을 기다리고있었다. 그런데다 며칠후에는 나어린 아들의 비난까지 받게 되였다.

며칠동안 뜬눈으로 밤을 새운 현구는 어느날 아이들이 잠든 밤에 안해와 마주앉았다. 《여보, 용서하오. 장인과 당신앞에 정말 면목이 없소. 나는 지금껏 속아 살아왔소. 일본놈들이 을 치는 이 세상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간다는것은 개울에서 룡을 낚겠다고 하는것보다 더 어리석은짓이요. 나는 이번에 저수지사건을 통하여 그것을 통절히 깨달았소.》

뇌에 잠긴 현구의 얼굴에는 침통한 빛이 짙게 비꼈다. 그는 한숨 내쉬며 말을 잇댔다.

《수일의 말이 옳소. 나는 지금껏 일본놈들의 주구노릇을 해왔소. 본의는 아니더라도 왜놈들의 지시에 따라 우리 나라 땅을 측량하였고 나중에는 토지조사국 실장까지 했으니 지각있는 조선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증오하였겠소. 정말 부끄럽고 역스럽소. 나는 이 세상을 지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 부대기를 일쿠면서 살아갈 결심인데 당신생각은 어떻소?》

《?!》

청천벽력과도 같은 남편의 말에 정녀는 그만 아연실색하였다. 그는 시간이 퍼그나 지나서야 자신을 수습하면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당신의 심정은 나도 리해해요. 나라잃은 사람은 상가집 개보다 못하다고 하지 않나요. 천대받고 수모를 당하면서 사는것보다 차라리 당신말대로 산속에 들어가는것이 나거예요. 나도 교단에서 깨닫고 느낀것이 많아요. 하지만 애들은 어떻게 하겠어요. 애들까지 산사람으로 만들수 없지 않아요!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애들만은 공부 시켜야 하지 않겠나요?》

《 …》

현구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안해의 말이 옳았다. 애들까지 산사람으로 만들수 없었다. 더구나 지난날 자신의 처지를 봐서라도 자식들은 꼭 공부를 시켜야 했다. 하지만 현구는 이 세상을 등지려고 한 자기 결심을 굽히고싶지 않았다. 며칠동안 전전긍긍하던 현구내외는 가산을 아 교외에 집 한채를 사서 수일이와 수에게 넘겨주고 험준한 중부산악지대로 들어갔던것이다.…

안해의 신음소리에 현구는 깊은 생각에서 깨여났다. 뜨락은 짙은 어둠에 잠기고 하늘에는 별빛 한점 보이지 않았다. 거리의 각종 소음과 저 멀리에서 명멸하던 전빛도 하나둘 사라졌다.

현구는 마냥 앉아있을수 없어 마루에서 일어났다. 세월이 바뀌여도 이밤의 어둠처럼 앞날이 잘 보이지 않아 가슴이 답답했다. 길게 한숨 내쉰 현구는 안해에게 잠자는 약이라도 먹여서 편히 쉬우고싶었다. 자기의 심정이 이토록 괴로울진대 안해의 마음인들 오죽하겠는가? 집안살이가 암담하고 불행하고 초조해날수록 동서네의 새생활이 부러웠다. 자기들도 그들처럼 무슨 방도를 찾아내야지 이대로는 더는 지해나갈수 없을것 같았다.

현구는 조심스럽게 안방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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