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돌아오다
4
목욕탕안에는 따끈한 젖빛수증기가 피여올랐다. 룡산기슭의 양옥채들에는 응접실 외에도 부엌옆으로 목욕탕이 달려있었다.
정애는 옷을 벗고 욕탕에 몸을 잠그었다. 더운물의 감촉에 뼈마디가 풀리며 두눈이 스르르 감기였다. 독탕맛이 그저그만이라고 하더니 이렇게까지 쾌감을 주는줄은 정말 몰랐다. 수희네 집을 빌려써야했던 그전날의 가난과 빈궁에 비하면 이것은 천당맞잡이였다. 모든것이 유족하고 편리했다.
하지만 수일이 오누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했다. 요즘 그 애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산으로 들어갔다는 아저씨와 언니는 돌아왔는지… 정애는 이런 생각이 북받치자 더는 욕탕속에 앉아있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목욕을 채 끝내지 못한채 욕탕에서 나오고말았다.
남편 양유종은 쏘파에 몸을 기대고 책을 보고있었다.
《왜 벌써 나오우?》
《몸에 익지 않아서…》
정애는 적당히 얼버무리고나서 남편앞에 맥주병과 왕새우를 담은 쟁반을 가져왔다.
《목욕후에 맥주라…》
유종은 흡족해하며 안해를 여겨보다가 탄성을 올렸다.
《이런, 당신이 새색시가 됐구만.》
홍조가 핀 정애의 환한 얼굴과 흰 목은 유별나게 싱싱하고 탐스러웠다.
《원, 당신두… 제가 언젠 헌 색시였나요.》
정애는 생긋이 웃었다. 잃어버린 맏이까지 쳐서 세 아이의 어머니지만 남편의 그 소리가 싫지 않았던것이다.
《아니요. 당신이 이렇듯 미인인줄은 내 미처 몰랐소.》 하며 유종은 거품이 부글거리는 맥주잔을 기분좋게 마시였다.
《당신은 어떻구요. 정거장에서 인부노릇을 했다면 곧이들을 사람이 있겠어요?》
유종은 회심에 찬 미소를 지었다. 줄무늬실내옷사이로 살이 찐 장딴지가 드러나있었다.
《여보, 당신도 한잔 드오.》
《녀자가 무슨 술을 하겠어요.》
《이건 술이 아니라 맥주요. 외국녀자들은 물대신 이 맥주를 마신다오. 》
《저야 외국녀자인가요. 언니가 알면 욕하겠어요.》
《하긴 그렇소. 그런데 형님네한테선 무슨 소식이 없었소?》
《아직은 없어요. 래일은 꼭 가볼가 해요.》
《그렇게 하오. 애들도 마음에 걸리지만 형님과 형수가 마음놓이지 않는구려 . 》
《저도 그래요. 수일이가 옥살이한다는걸 알면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요. 여보, 그 앨 어떻게 빼낼수 없겠어요?》
《생각중이요. 참사관의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는데 수일이가 <미군정>의 지시를 거역하는 주민들의 투쟁에 앞장섰다니 들어줄것 같지 않구만.》
《참사관님께 한번 말씀드려보세요. 젊은 혈기에 모르고 그래본거라고 하면 될수도 있지 않을가요?》
《당신은 수일이라면 제 자식이상이라니까. 그건 좋은 일이지… 아무튼 내 기회를 보아서 손써보겠소.》
《난 당신을 믿겠어요. 꼭 힘써주세요.》 정애는 남편의 빈잔에 또 맥주를 부으면서 말머리를 돌렸다.
《여보, 뒤울안에 과일나무를 심는게 어때요? 아이들도 생신한 과일을 따먹을수 있게 말이예요. 원래 당신도 나무와 꽃을 좋아하지 않나요?》
《내 벌써 촌에다 나무모를 부탁해놨소.》
《그래요. 그럼 한번 당신의 고향마을에 가야겠군요. 부모님께 인사도 올릴겸 아이들을 데리고가자요.》
《그럽시다. 고향에 다녀온지도 퍽 오래니…》
유종은 《미국안내서》 라는 선전물에서 눈길을 떼고 뜨락으로 나왔다. 강바람이 꽃잎이 내돋은 화단을 스치며 저녁기운을 몰아왔다.
더운물목욕에 맥주까지 몇조끼 마신 양유종은 기분이 무척 좋았다.
망울을 터치기 시작한 꽃밭에 물을 주는데 대문을 열고 웬 사람이 뜨락에 들어섰다. 허름한 밤색춘추외투를 걸쳤는데 키는 약간 큰편이고 얼굴은 검실검실하였다. 양유종은 첫순간에 동서인 현구를 알아보지 못했다. 몇초 지나서야 그의 입에서 환성이 터져나왔다.
《아니, 현구형님이 아니시오!》
《동서, 그간 잘 지냈소?》 현구는 입가에 엷은 웃음을 떠올리며 양유종의 손을 잡아주었다.
《범이 제 소리를 하면 온다구 하더니 우리도 방금 형님네 말을 했소.》 하고 양유종은 부엌에 대고 소리쳤다.
《여보, 형님이 오셨소.》
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정애가 달려나왔다. 애들도 웃방에서 뛰여나와 현구의 품에 저마다 안기였다. 감격적인 상봉은 한동안 계속되였다.
정애는 너무 반갑고 기뻐서 연신 눈굽을 훔치며 두서없는 말을 자꾸만 쏟아놓았다. 이윽하여 정애가 현구를 방안으로 이끌었다. 집안에 들어온 현구는 방들을 둘러보고 양유종과 함께 서재로 들어갔다.
정애는 오래간만에 만난 아저씨를 대접하려고 부엌으로 내려가고 애들은 안방으로 들어갔다.
《형님, 편히 앉으십시오. 그새 귀밑머리가 다 희여졌군요.》
유종은 나무등걸같은 현구의 손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며 두눈을 슴벅거리였다.
《어쩔수 없는게 세월이 아닌가. 그 사이에 처지가 달라졌다니 반갑네. 》
《수희 어머닌 건강한가요?》
《씨원치 않네. 산에서 여간 고생하지 않았네.》
《상상이 됩니다. 곧 찾아가서 만나보겠습니다.》
양유종은 그간 현구네 집을 쓰며 신세를 진데 대하여 단단히 사의틀 표시하였다.
《신세는 무슨 신세겠나, 남남도 아닌데. 이젠 자네가 허리를 펴게 되였으니 다행일세.》 하며 현구는 응접실의 비품들을 둘러보았다. 안방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무겁고 침울한 자기 집에 비하면 너무나도 판이한 집이였다.
《외국어를 배워둔게 이번엔 은을 낸것 같습니다.》
유종이가 양담배를 권하며 옆에 앉아 그간의 생활경위를 말해주었다.
영어수업의 페지와 함께 교단에서 밀려난 유종의 처지는 갑자기 땅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당장 먹을것이 걸리고 땔나무가 없었다. 아직 일자리도 얻지 못했는데 집주인은 집세독촉을 불같이 해댔다. 설상가상으로 이미전부터 앓던 맏이까지 잃게 되여 집안에는 절망의 그림자가 짙어갔다. 유종은 할수없이 화물역인부가 되여 간신히 목에 풀칠을 해나갔다. 그런만치 그들이 쓰게 된 현구네 집은 구원의 손길과도 같았다. 유종의 비참한 생활은 왜놈이 망한 후에도 얼마간 지속되였다.
그날도 유종은 역구내에서 미군짐짝들을 군용화물자동차에 옮겨실었다. 유종이가 땀을 흘리며 무거운 궤짝을 져나르는데 미군장교가 현장에 나타났다. 키가 후리후리하고 눈알이 파란 고급장교였다. 차림새를 미루어보아 후방근무성원같았다. 장교는 화물을 배정한대로 싣지 않는다고 성을 냈다. 하급장교들은 인부들이 말을 몰라서 별수가 없다고 투덜거렸다. 고급장교는 납득이 되는지 난색을 짓고 짐 싣는 형편을 돌아보았다.
이때 유종이가 이마의 땀을 씻으며 넌지시 한마디 했다.
《장교나리, 내가 도와주면 안되겠습니까.》
유종의 영어발음은 교과서처럼 정확했다.
고급장교는 놀라운듯 유종을 뚫어지게 훑어보았다. 막벌이군속에 영어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게 신기했던 모양이였다.
《인부, 미국말을 아는가?》
《얼마간 할수 있습니다.》
《어디에서 배웠소? 우리 미국에서 살았소?》
《영어학원을 졸업하고 중학교 교원을 하다가 왜놈에게 쫓겨났습니다.》 유종은 간명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오우, 미국말때문에 철직됐습니까? 알만합니다. 나는 우리 미국말하는 사람을 만나 매우 반갑습니다.》
장교는 유종의 손을 약간 다쳐주었다.
유종은 그 자리에서 인부들의 감독 겸 통역원으로 제발되였다. 유종은 며칠후 고급장교를 다시 만났는데 그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꾸어놓았다.
《미스터 양, 차를 타시오. 미국말하는 사람 막로동해서는 안됩니다. 》
고급장교는 유종을 미군사령부의 통역원으로 끌어갔고 얼마후에는 장교가 《군정청》의 경제담당참사관이 되자 유종을 데려다 통역관으로 승격시켰다.
《지금 스미스참사관을 따라다니지요.》
유종은 이야기끝에 이런 주석을 달았다.
《타국사람의 시중을 들자니까 비위에 거슬리는 때가 적지 않습니다. 어찌나 변덕이 심한지 기분을 맞출 재간이 없군요.》
유종은 수시로 당하는 불쾌감을 참아내야 하는 통역관신세를 개탄하였다.
현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연하게 탄 커피를 천천히 마시였다. 신색이 멀끔해진 유종과 방안의 가장집물들, 양식화되여가는 생활이 현구의 눈길을 끌었다. 통역이나 하는 사람치곤 지나친 우대를 받는듯싶었다.
《여보게, 우리 수일이 소식은 알겠지. 무슨 죄를 짓고 감옥에 갇혔나. 법에 어긋나는 란폭한짓이라도 했는가?》
유종은 자기도 수희가 와서 알려주기에 수소문해보니 포고령위반에 걸렸더라고 대답하였다.
《포고령위반이라구? 포고령의 내용은 대체 어떤것인가?》
《다른건 그만두구 수일이가 관계한 땅문제로 말하면 일제시기와 같이 처분한다는것이지요.》
《그러니 <미군정> 이라는것두…》
《그렇게 생각할건 없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치안유지를 위해 일시적으로 취한 조치입니다. 앞으로 조선정부가 서면 <미군정> 은 없어질것입니다. 》
(조선정부? 그럼 땅문제도 달라진단 말이지.)
현구는 그렇다면 두고볼판이라고 생각했다. 정애가 음식상을 차려가지고 들어왔다.
《아저씨, 반찬은 별로 없지만 많이 드세요.》 하며 정애는 현구와 유종의 잔에 술을 부었다. 그리고는 아직 채 만들지 못한 반찬때문에 부엌으로 다시 내려갔다. 술잔이 몇순배 돌자 약간 거나해진 유종이가 《총독부》경무국에서 신소과장을 했다는 전대산을 아는가고 물었다.
《전대산?…》 현구의 신경은 한순간에 곤두섰다. 저수지이설문제틀 란동으로 조직한자가 바로 그였던것이다.
《갑자기 그건 왜 묻나. 왜놈에게 붙어서 숱한 사람을 해친 경찰이였네. 》
《그런 놈인가요?…》
유종은 자기가 묻는 의도와 달라서인지 멋적어했다.
《그놈은 이번통에 살아남지 못했을거네.》
유종의 대답은 현구의 판단을 뒤집어버렸다. 관청들에 왜놈시절의 관리들이 수두룩할뿐만아니라 지난 2월과 3월에는 본국으로 도망쳤던 왜놈관리들과 전문가들까지 수백명이나 비밀리에 데려왔다고 귀띔했다. 얼마전에 유종은 스미스와 같이 깊은 밤 인천부두에서 경찰들의 호위속에 왜놈들을 접수했던것이다.
《처음에는 좀 세여보다가 너무 많아서 그만두고말았습니다. 어쩌면 <총독부> 관리들이 몽땅 되돌아온것 같았습니다. 아마 그중에는 형님과 면식있는 관리들도 적지 않을것입니다.》
유종은 그저 이상스럽다는 어조로 말했지만 현구의 신경은 대번에 날카로와졌다. 이제 곧 조선정부를 내온다면서 무엇때문에 왜놈관리들을 무리로 끌어들인단 말인가, 그것도 경찰들의 호위속에…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현구의 얼굴색을 여겨보며 유종이가 빙긋이 웃었다.
《형님, 그런 일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정사는 정치가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제 볼장이나 봅시다.》하며 유종은 현구의 잔에 술을 부으면서 수일의 문제나 의논하자고 권했다. 그는 수원에서 검거된 수일이를 서울 경찰청에서 압송해다가 특별수사실에서 취조를 했는데 그 부서의 책임자가 전대산이라고 말했다. 그런것만큼 한번 찾아가서 만나보라고, 과거의 불미스러운 관계가 두려워서도 형님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것이라고 하였다.
《자네 무슨 소릴 하나? 난 그자를 만나면 회계부터 해야겠네. 그런 놈을 가만둬?》
현구는 가슴속에서 불뭉치같은것이 울컥 치밀어올라 단숨에 잔을 비웠다. 그의 얼굴은 당장 일을 칠것처럼 험하게 이지러졌다.
자기의 타산이 틀어지자 유종은 다시 술을 부으면서 화제를 바꾸었다.
《형님, 일자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일자리… 살아가자면 구해야지. 헌데 요즘같은 세월에 내 기술이 어데 소용되겠나? 토지측량을 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젠 그 일에 애당초 손대고싶지 않네.》
《아니?! 형님은 조선에서 이름난 토지측량부문의 권위자가 아닙니까? 지금 <군정>에서 형님같은 전문가를 구하지 못해서 골머리를 앓고있습니다. 》
유종은 현구를 움직여보려고 접어들었다. 그러지 않아도 요즘 항간에서는 《군정》이 몰수한 《적산》과 벼슬자리를 노리고 어중이떠중이들이 날치고 또한 《군정》을 끼고 얻어쓴 벼락감투들과 벼락부자들이 쉬파리처럼 생겨나고있었다.
《형님, 내가 주선해볼가요? <군정>의 몸이 되면 수일의 문제를 해결하는데도 도움이 될겁니다.》
이지러졌던 현구의 안색이 어느 정도 풀리였다. 일자리도 얻고 아들도 구한다는 동서의 말에 바싹 구미가 동했던것이다. 무엇보다도 아들 수일이를 감옥에서 빼내여 학교에 보내는것이 가장 큰 급선무였다.
《여보게, <군정>에서 내같은 토지측량전문가를 찾는 까닭은 무엇인가? 혹시 왜놈들이 강탈한 땅의 내용을 알자는건 아닐가? 일제시기 잘못된 토지문서를 시정하자고 그런다면 나도 외면하지 않겠네.》
《그 진속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그 까닭이야 어쨌든간에 일자리를 잡고 알아보면 될게 아닙니까. 별치 않은것들이 다 둔갑하는데 그 좋은 기술과 밑천을 가지고 이럴 때 한몫 봐야지요.》
유종은 자기네가 얻어썼던 신세갚음뿐아니라 동서가 《군정》에 들어가 일하면 그 힘을 빌어 과수원이나 얻어보려고 하였다. 선생노릇을 하던 체면에 양인의 통역이나 하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렬등감도 금할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고향의 아버지 부탁대로 과수원을 《적산》으로 불하받아서 그 일이나 하자는 속타산을 품고있었다.
현구는 아직 파악이 없는 《군정》에 별로 마음이 끌리지 않고 더군다나 토지문제에 손댔다가 또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아직은 여유틀 두자고 맘먹었다.
《대접을 잘 받았네. 직장문제는 내 좀더 생각해보겠네.》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애가 따라서면서 언니의 몸보신에 뭘 좀 보내겠으니 수희를 보내달라고 하였다.
알겠다는 말을 남긴 현구는 밖으로 나왔다. 어둠이 내린 거리에는 가로등이 흰빛을 던지였다.
전차를 갈아타고 마을에 도착한 현구는 딸의 마중을 받았다.
《아버지, 이제 오세요. 내가 알려준대로 집을 찾았어요?》
《힘들이지 않고 찾았다.》
현구는 팔에 매달리는 수희와 함께 안해가 누워있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수고하셨어요. 그새 동생네는 무사하던가요?》
《잘 지내고있더구만.》
《그래 어떻게 됐어요? 수일이 문제를 힘써주겠대요?》
안해의 그 물음에 선뜻 대답을 못했다. 그는 쓰겁게 입을 다시였다. 그만치 그의 머리가 산만하고 착잡했던것이다.
《아버지, 오빠때문에 이모네가 겁나하지 않아요?》
어딘가 모르게 빈정거리는 수희의 말에 그러면 못쓴다고 핀잔을 주었다. 했으나 화를 입을가봐 이모네는 오빠를 외면한다고, 그게 무슨 친척인가고 수희는 불만을 토했다.
《입을 다물지 못하겠니?》 정녀가 다소 엄하게 딸을 책망하였다. 그리고는 《당신은 그냥 돌아오신 모양이군요. 래일 제가 가보겠어요.》 하며 몹시 섭섭해하였다.
《그러지 마오. 머리가 떨떨하다나니 그렇게 된것 같소. 내가 수습하겠소. 》
가장으로서 면목이 없게 된 현구는 이튿날 검찰소를 찾아갔다. 그러나 수일을 담당한 검사가 부산으로 출장가서 언제 올지 모른다고 하였다. 현구는 맥이 풀렸다. 그렇다 해서 유종의 권고대로 전대산을 찾아가고싶은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었다. 현구는 그래도 인척간이 낫겠다는 생각에 유종을 다시 만나보려고 그의 집을 찾아갔다. 저녁늦게야 퇴근한 유종에게 현구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
《이보게 동서, 수일이때문에 또 왔네. 어쨌든 자넨 <군정>의 사람이 아닌가. 지금 수일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그리고 장차 사법기관에서 그 애를 어떻게 처리하려고 하는지 좀 알아봐주게. 손을 써주면 더 고맙겠네.》
현구의 부탁에 유종은 선선히 동의했다. 하면서 또다시 전대산이도 만나보라고 권고했다. 그 사람이 지금 경찰청 특별수사실 실장으로 일한다고, 모름지기 전대산이가 수일이도 심문했을것이라고… 수일이가 검찰소로 넘어가긴 했지만 경찰측에서 힘을 쓰면 용수가 없지 않다고, 더구나 형님과의 불미스러운 과거를 생각해서도 전대산이 가만있지 못할것이라고 했다.
전대산을 찾아가보라는 말에 현구는 쓰거워서 움쭉 일어났다. 그러자 유종은 팔을 잡으며 말을 잇댔다.
《형님, 나도 수일이때문에 애가 탑니다. 기회를 봐서 노력하겠습니다.》하고는 일전에 상정된 문제를 또 내비치였다.
《형님, 살아갈 길도 찾아봐야지요. 내가 전에 말한대로 <군정>에서 일해볼 생각이 없습니까? 그래야 수일의 문제도 쉽게 풀릴수 있습니다. 》
현구는 기분이 나빴다.
《자네도 알겠지만 나야 왜놈 <총독부>의 밥을 얻어먹다가 된욕올 본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미군정청>이라…》
《원 형님두, 미국사람들을 왜놈들과 같이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건 오해입니다.》
《그럴수도 있겠지.》
현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서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하였다.
《형님, 그럼 내가 미군참사관에게 한번 말해볼가요? 좋은 자리를 떼울가봐 그럽니다. 형님, 내 말대로 하십시오. 나는 하찮은 통역이지만 형님이야 <군정>에 적만 붙이면 나같은것에 비하겠습니까?》
현구는 깊은 생각에 잠겨 한동안 앉아있다가 동서네 집을 나섰다.
어째서인지 동뚝우로 몰아치는 강바람도 시원한줄 몰랐다. 동서 유종이가 감옥에 갇혀있는 수일이때문에 그 어떤 피해를 입을가봐 겁을 먹고있는것이 분명하였다. (집안을 해친 전대산을 찾아가서 머리를 숙이라구?) 현구는 연방 입술을 짓씹었다. 아직도 신소과장이였던 전대산의 밀고로 사이또경감의 고문을 당한 상처자리가 뚜렷이 남아있었다. 날이 저물었는데도 가로등밑에는 장사군들, 지게군들, 멜바틀 든 짐군들이 몰켜있었다. 대통로로 달리는 군용차에서 미군들이 그들을 손가락질해대며 휘파람을 불어댔다.
집으로 돌아온 현구는 마루끝에 걸터앉았다. 하늘에는 검은구름이 덮이고 뜨락은 고요했다.
방안의 정녀가 분명 인기척을 들었겠으나 반응이 없었다. 현구의 시름겨운 걸음걸이에서 그 어떤 불길한 징조를 감촉한것 같았다. 앓음소리가 불없는 방안에서 간간이 새여나왔다.
현구는 안해의 문병도 하고 위로도 해야겠으나 마음뿐 발길이 나가지 않았다. 담배를 문 현구의 얼굴에 착잡하고 고뇌에 찬 그림자가 비끼고 땅에 떨어진 눈길은 덧쌓이는 의혹과 불안, 초조감에 짓눌린듯 빛을 잃고있었다.
《아들이 돌아와야 안해도 일어서겠는데.》 하고 입속말을 뇌이던 현구의 기색이 불시에 딴사람처럼 변하였다. 그 누구도 아닌 전대산이 경찰청의 특별수사실 실장으로서 아들을 심문했을지도 모른다고 하던 양유종의 말이 귀전에 되살아났던것이다. 조갈이 든 그의 입에서 거칠고 메마른 한숨이 흘러나왔다. 세상이 바뀌여도 끝장이 나지 않은 집안의 기구한 운명이 개탄스러웠다.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하여 그러한 수난이 겹치고 사라지지 않는지 그로선 그 원인을 찾아볼길이 없었다. 자기가 집에 남아서 아들을 통제하고 교양했더라면 무사하였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화근을 막는 근본대책으로 됐겠는지 자신이 없었다. 폰란된 세상에 부닥치고보니 통분스럽고 기가 막혀 말이 나가지 않았다.
하다면 그것이 팔자소관이란 말인가?
담배연기가 서리는 그의 침통한 눈앞으로 지나간 나날의 생활토막들이 언뜻언뜻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