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 장 겨레의 얼
3
주석단에서 알리는 말이 넓은 운동장으로 울려갔다.
《여러분, 조용들 합시다. 곧 시작하겠습니다.》
소란스럽던 운동장이 잠잠해지면서 타는듯 한 눈길들이 연탁으로 쏠리였다.
군수가 연탁으로 나왔다. 그는 혼란상태인 땅문제를 해결하려고 《군정》의 특사가 내려왔다고 말한 후 모두가 명심해서 특사의 해설과 법적조치들을 귀담아들어야겠다고 강조하였다.
다음으로 모임의 주역인 《군정》의 특사가 등장하였다. 풍문으로 들어온 《군정》의 전권대표가 마침내 얼굴을 내민것이다. 특사는 짐작과는 달리 수수한 회색양복차림인데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하였다. 너부죽한 얼굴은 앓고났는지 피기가 없었고 훤칠한 이마에는 내천자가 깊숙이 지나갔다.
특사는 연탁에 문건들을 내려놓고 군중을 향하여 머리를 숙였는데 그의 소박하고 례절바른 행동거지가 청중의 주목을 끌었다.
《본인은 평생 사람들앞에서 연설을 해본적이 없습니다. 직업상 〈군정〉의 소임을 맡고 여기에 나서게 된것입니다.》
《특사》의 언행은 격식이 없고 침착하였다.
운동장에선 기침소리 한점 일지 않았다. 예민한 눈빛들이 말 한마디, 표정 하나 놓칠세라 현구를 지켜보고있었다.
《본인은 연설의 기본취지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문제를 상정시키자고 합니다. 철쇄에 묶이였던 나라도 해방되였는데 어찌하여 농군들이 낡은 토지소유관계에 그냥 매여있어야 하겠는가?》
《특사》는 인사말도, 정세개괄도 없이 초미의 관심사에로 문제를 끌고들어갔다. 청중에게로 향해진 《특사》의 표정은 자못 엄숙했다.
《그래, 농군들이 언제까지 이런 질곡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억울하게 살아야 하겠는가? 왜 이런 운명이 계속 강요되고있는것인가? 그것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불청객인 미군이 강토의 남쪽을 비법적으로 강점했기때문입니다. 〈미군정〉이 조선을 패전국이라면서 남쪽의 땅과 재부를 적대국재산으로 압수하여 저들의 리익에 맞게 재분배하자고 강도적으로 날치기때문입니다.》
《특사》는 놀랍게도 태연한 자세로 신성한 조국을 침해하는 미군의 강탈만행을 설득력있게 하나하나 까밝혀나갔다.
《우리모두 미군의 처사부터 따져봅시다.
여러분들도 아시는것처럼 미군은 총 한방 쏘지 않고도 자기들을 〈해방자〉로 자처하면서 조선을 부당하게도 전패국으로 취급하고있습니다.
그러면 미군의 이러한 주장이 사리에 맞고 정당한가?》
《특사》의 목소리는 갈수록 흥분되고 격동되였다.
《군정청》의 《특사》가 이와 같이 나오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였다. 그의 연설은 자신이 직접 보고 체험하고 판단한 그 모든것들을 조선사람의 정신으로 분석하고 집약한것으로 하여 더욱 감화력이 컸다.
반기를 든 현구의 대담무쌍한 민족적기개와 정의감은 사람들의 심장을 크게 울리였고 격동시키였다. 군중은 설레였다.
현구는 여러건의 문건을 내들어보였다.
《이건 모임에서 취급하라는 문건들입니다. 그럼 이 문건들은 도대체 어떤것들인가?
이건 이곳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상촌의 전치도지주의것들입니다. 자기의 소유지로 청원한 문건들에는 피맺힌 사연을 안고있는 개간지도 들어있고 도망친 왜놈들이 내놓은 수탈지들에다 부당하게도 값을 치르어준것들도 있습니다.…》
온 장내가 불맞은 벌둥지처럼 들끓었다. 상촌의 전치도로 말하면 얼마전에 고향의 피해자들에 의해 죄상들이 폭로되고 징벌을 받은 민족반역자인것이다.
《특사》는 치를 떠는 군중의 격노한 분위기에 서슴없이 자기의 목소리를 합치였다.
《그렇습니다. 전치도는 여느 지주들처럼 범상히 대할수 없습니다. 그놈이 고향의 유가족들의 고발로써 처단되였는데 그건 천백번 옳은 처벌입니다. 하지만 제가 여기서 하자는 말의 본심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민족의 원쑤로서 타도될 반역자가 어떻게 되여 해방된 강산에서 네활개를 치며 거들먹거릴수 있었는가 하는 그것입니다.
본인은 여기로 오면서 스미스의 지령을 받았습니다. 스미스는 모임을 자기네의 뜻대로 잘 성사시키면 본인에게 고위급의 관직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본인을 꼭두각시처럼 만들어 써먹자는데 불과한것이였습니다.
본인을 〈군정장관〉과 짜고 〈군정〉의 〈특사〉로 이 자리에 내세운 까닭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농촌의 친미지반을 꾸리는데 필요한 토지법을 실시하는데 본인을 리용하자는것이였습니다.
여러분, 〈군정〉이 실시하려는 토지법이란 어떤것인지 아십니까? 그건 한마디로 왜놈때의 강도적인 토지소유제도를 그대로 유지하자는것입니다. 그러니 그 누가 부당한 토지법을 접수하자고 하겠습니까. 본인은 뒤늦게야 〈군정〉의 이 검은 속심을 간파했습니다.》
현구는 자신을 통탄하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군정〉은 본인이 토지법을 발표하게 되면 어떻게 된다는것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군정〉은 본인이 격노한 농민군중의 뭇매에 걸려들어도 토지법만은 공포하게 하자는것이였습니다. 그래서 농촌의 악질지주들과 불순분자들을 규합함으로써 친미지반을 꾸리자는 목적을 이루자는것이였습니다.》
현구의 피타는 고백과 규탄에 군중의 눈빛이 용암처럼 이글거리면서 불꽃을 튕기였다. 미군의 침략과 《미군정》의 영구강점책동을 여실히 폭로단죄하는 현구의 용단과 자신을 회계하고 반기를 든 희생적인 행동에서 받아안은 사람들의 충격은 이를데없이 크고 강했다. 미제는 《해방자》의 탈을 쓴 악독하고 교활한 침략자, 강점자, 략탈자라는것을 똑똑히 알게 되였던것이다. 현구의 말이 계속되였다.
《여러분, 본인은 조선사람으로서의 면목을 잃은 사람입니다. 앞으로 모임에서 취급될 문건의 임자인 전가네가 어떤 놈들인가 하는건 이미 말했습니다. 그놈들은 우리 집과 나자신의 원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해방된 오늘에 와서도 이렇다할 복수도 하지 못하고 이렇게 그자들이 사취한 토지를 법적으로 고착시키려는 〈미군정〉의 〈특사〉노릇을 하게까지 되였습니다.》
현구는 자신을 진심으로 속죄하면서 절규하였다.
《여러분, 험한 세월일수록 조선사람된 본분을 잊지 말고 지켜야 합니다. 외세의존은 자멸의 길, 망국의 길입니다. 하지만 본인은 우리가 약소민족이니 좋든말든 렬강의 도움을 받아야 일어설수 있다고 여기면서 일정한 기간 미국에 의존해야 하며 또한 미국의 요구대로 하면 나라의 독립도 성취되고 낡은 토지소유관계도 청산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어리석기 그지없었습니다. 토지들을 〈적산〉의 명목으로 몰수한 사실과 신한공사토지를 밭갈이하는 농군들이 아니라 친미적인 투기업자들과 모리간상배들에게 팔아치운 사실 등을 뒤늦게야 알게 되였습니다. 더우기 미국이 이 땅에 영원히 틀고앉아 우리들을 식민지노예로 예속시키려고 한다는것도 깨닫게 되였습니다. 그런것만큼 본인은 지금까지 미국의 하수인노릇을 해왔습니다.》
현구의 숨김없는 참회를 통해 미국이 결코 벗이 아님을 똑똑히 알게 된 군중은 격랑처럼 무섭게 설레였다.
현구의 목소리가 다시 울리였다.
《여러분, 명백히 말한다면 본인은 일시적이나마 조선사람의 넋과 얼을 잃고 살아왔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군중이 숨을 죽이고 현구에게 눈길을 모았다.
악에 받친 전대산은 교실창문안에서 혀를 깨물고 피진 눈알을 희번득이였다.
《운동장에 모인 각계각층의 여러분!》 현구의 음성은 전과 달리 고르롭고 기운찼다.
《한강토에서 살고있는 북과 남의 토지제도가 서로 상반되여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그걸 허용한다는건 민족의 불행과 나라의 영구분렬을 기정사실화하는 반역행위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온 겨레가 한결같이 따라야 할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민족의 구세주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 밝히신 토지개혁방침을 따르는 거기에 농민들의 세기적인 숙원을 성취하며 나라의 통일과 부강조국을 일떠세우는 광명한 길이 있습니다.》
신념과 확신, 긍지에 넘친 현구의 호소가 운동장을 환희와 격정으로 들끓게 했다.
《옳소, 그 길만이 민족의 재생과 새 조국을 건설하는 광명의 길이요! 영명하신 김일성장군 만세!》
《만세!-》
《미군은 침략자다. 이 땅에서 당장 물러가라!》
인산인해를 이룬 군중은 모두 떨쳐 일어나며 주먹을 내흔들었다.
하촌바닥 대렬에 있던 수일은 가슴이 벅차고 온몸에 힘이 넘쳐났다. 아버지가 고마왔다.
《아버지!》
수일은 목메여 부르짖으며 아버지에게 달려가 안기려고 했다.
연탁주위에선 경찰과 종안이네 자위대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고있었다. 거기에 반동무리들까지 뛰여들자 이번에는 로동자들과 청년학생들 그리고 농조원들이 함성을 지르며 종안이네 자위대를 지원했다.
문득 대기를 찢으며 총소리가 울리였다. 그 순간 현구가 가슴을 움켜쥐였다. 그의 가슴팍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어느 놈이야, 총을 쏜게!》
《전대산이다.…》
《그놈을 족치자.》
종안이가 이렇게 웨치며 자위대원들과 함께 교사안으로 짓쳐들어갔다. 한편 운학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현구를 부축했다.
《아버지!》
《여보!》
수일이가 달려오고 그뒤로 정녀와 수희도 소리치며 달음쳐왔다.
현구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사랑하는 처자들을 눈여겨보았다.
《나때문에 마음고생들이 컸지. 난 죄많은 놈이였소.》
《아버지, 그러지 마세요. 아버진 정의로운분이예요.》
《그래요. 아버진 죽어선 안돼요.》
수희와 수일은 아버지를 안타깝게 잡아흔들며 목멘 소리로 웨쳤다. 정녀는 너무 억이 막혀 말을 못했다. 그때 수일이가 현구의 가슴에서 피에 젖은 종이장을 꺼냈다.
그것은 집회장을 격동시킨 연설원고였다. 수일은 세찬 충격과 자책감을 이겨낼수 없어 아버지를 품에 안고 울음을 삼켰다. 아버지의 고심참담한 회오의 심정과 비상한 각오가 수일의 페부를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유종을 비롯한 기자들이 피묻은 원고를 사진에 담고 몇줄씩 수첩에다 옮기였다. 정녀가 수희에게 원고를 정히 간수하라고 일렀다.
이때 《이 사람! 현구!》 하는 비분강개한 성렬로인의 갈린 목소리가 울리였다. 현구는 그를 겨우 알아보았다.
《선생님!… 용서를 빌지 못하고 가는가 했습니다. 배은망덕한 저틀 꾸짖어주세요.…》
《이 사람, 무슨 소릴 하나- 자네는 역시 우리 사람이였네. 누구도 대신할수 없는 그런 결단을 내린 자네가 아닌가.》 성렬은 눈물로 두볼을 적시며 현구를 끌어안았다.
《자넨 〈군정〉의 머슴이 아니였네. 자네는 〈군정〉의 검은 속심을 속속들이 파헤쳤네. 자네의 웨침은 짧고 간단했지만 그 여운은 길이길이 사람들을 깨우치게 될거네.》
현구의 화석같은 얼굴에 한가닥의 홍조가 피여났다. 홍조는 인차 사라졌다. 동시에 그의 눈이 감기면서 머리가 슬그머니 옆으로 기울어졌다. 혈육들과 친지들이 현구를 부여잡고 깨여나라고 소리쳤다.
《현선생! 바닥네의 우리 농군들을 두고 가면 안되오다.》
운학이가 비통한 어조로 하는 말이였다. 그 순간 뜻밖에도 현구의 두눈이 떠졌다. 함께 무슨 말을 하려는듯 입술이 알릴듯말듯 움직이였다. 그러나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한채 또다시 실신상태에 빠졌다.
뒤늦게 달려온 성아와 은실이가 현구를 치료대담가에 조심스레 옮기였다.
운학이가 앞채를 잡고 성아와 은실이가 뒤채를 들었다. 그 순간 교사의 중앙현관문짝이 소란스레 열리였다. 종안이와 자위대 젊은이들이 밖으로 쏟아져나왔다. 젊은이들의 모습은 방금 육박전을 치르고난 기상이였다.
그들은 전대산을 개처럼 질질 끌고 계단을 내려왔다.
《이놈이 총질을 한 살인자다-》
《친일역적 전치도의 아들놈이다. 농군들의 땅까지 빼앗으려든 놈!》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자 농군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전대산을 조겨댔다. 전대산은 만신창이 되였다. 수하 졸개들은 그 꼴을 보면서도 감히 구원할 엄두를 못냈다.
죽을판에 든 전대산은 현구의 담가에로 기여들었다.
《현형, 제발 목숨만 살려주오. 내 재산을 팔아서 현형을 구원하겠소.》
《에잇, 야차같은 놈!》
수일은 쌓이고쌓인 원한과 분노, 복수심에 못이겨 전대산의 머리를 마구 짓밟았다.
군용차를 타고 불시에 들이닥친 미군병사들이 엠완총과 카빙총을 꼬나들고 전대산을 구출하려들었다.
《이놈은 살인자다. 역적이다. 간섭말라-》
종안이네 일행이 항의했다.
《노우, 우린 저 사람 구원하라는 상관의 명령을 받았소.》 미군 하사가 떠벌였다.
《미군이 애국자를 살해한 역적을 구원하겠다구?!》
미군병사들은 그 소린 들은척도 하지 않고 전대산을 끌어다가 차에 실었다.
현구는 지체없이 의원집으로 옮겨졌다.
잠시후 모임에 뒤이어 소집하게 된 농민집회장소를 학교운동장으로부터 군정앞마당으로 옮긴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농조가 격앙된 분위기를 고려하여 모임장소를 이동하고 군소재지에로의 위력시위를 벌리기로 한것이다.
그것은 농촌의 식민지화를 노리는 《군정》의 흉계를 전면 매장해버리자는 농민들의 사생결단의 의지이기도 했다.
《미군은 강탈자, 살인자다! 당장 철수하라!》
《토지는 밭갈이하는 농민들것이다. 민주주의적토지개혁을 실시하라!》, 《민족통일정부를 수립하자!》
격노한 군중의 물결이 크고작은 길목들을 메웠다.
이 투쟁에는 리평택이 인솔하는 로조대표단 성원들도 끼여있었다.
이튿날.
서울과 각지의 조간신문들이 주원사건을 특기할 중대사변으로 취급하였다. 당국의 간섭이 엄했지만 사건의 경이적인 내용과 격렬했던 반미시위와 집회소식을 왜소화할수가 없었다. 그것은 주원에서 모임소식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려고 언론계를 동원시킨 까닭에 더욱 크게 세상에 알려지게 되였다.
신문들은 눈에 띄게 설정한 중간제목들에 현장사진들을 배합해가며 널리 보도하였다. 특히 《군정》이 파견한 특사의 방향전환소식과 《군정》의 영구강점음모 내막폭로에 방점을 찍었으며 경찰이 감행한 특사에 대한 비렬한 사살사건과 살인자를 탈환하려 한 미군의 만행을 폭로하였다.
석간지들에서는 《군정》의 스미스경제참사관이 주원사건을 책임지고 파면되여 본국의 처벌을 받기 위하여 추방된다는 짤막한 보도를 실었다.
종 장
날씨는 흐렸다.
봄철이면 세차지던 바람세도 숙어들면서 인왕산의 무성해가는 신록이 가볍게 설레였다.
소복단장한 정녀가 오누이를 거느리고 산길을 걷고있었다. 비감에 잠긴 정녀의 낯색은 재빛하늘보다 더 무겁고 침통하였다.
정녀는 지금 남편의 령구를 주원에서 서울교외로 옮겨온지 삼일만에 제사를 하러 가는 길이였다. 원체 현구의 총상은 치명적이여서 명의와 주원사람들이 온갖 성의를 다했으나 끝내 소생시키지 못했다.
현구의 시신은 곧 서울로 올라왔다. 김성렬학자가 솔선 교외에 현구의 장지를 정하고 삼일전에 엄숙한 장례식을 하였다. 장례식을 치른 그날 밤 정녀네 집식구들은 고서점 건너방으로 남몰래 이사하였다. 《군정》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갑자기 거처지까지 옮긴 정녀의 심회는 이를데없이 슬프고 막막하였다. 정녀는 뼈를 깎는 상실감에만 잠겨있지 않았다.
(그이가 그런분이였던가.…) 운동장을 진감시킨 그이의 성토는 그 한마디, 한마디가 뜻이 깊고 불씨처럼 사람들의 심장에 파고든것들이여서 언제가도 잊혀질것 같지 않았다. 산 체험이 비낀 그이의 충심으로 된 내면실토와 참회, 《군정》의 모략과 흑막상에 대한 가차없는 탄핵은 얼마나 진실하고 적라라했던가!… 생각할수록 정녀는 남편이 놀라왔고 그만큼 자랑스러웠다.
정녀는 신록이 우거지는 잡관목들을 헤쳐나갔다.
불현듯 광덕산을 내리던 때가 정녀의 뇌리를 스치였다.
벼랑끝으로 밀리는 달구지를 남편이 몸으로 막으며 하던 말도 귀전에 쟁쟁하였다.
《여보, 겁내지 마오. 내가 있지 않소. 이 고생도 버림받은 인생길도 이젠 끝장이 났소. 나는 산을 내리는 길로 측량기를 잡자고 하오. 새 나라를 세우자면 측량할 대상들이 오죽이나 많겠소. 배운 지식을 못써보는가 했는데 이제야 때를 만나는것 같소. 당신도 새로운 기분으로 제 나라의 인재들을 마음껏 키우게 됐구려!》
정녀는 갱생의 기쁨에 도취된 남편의 얼굴모습과 말마디들이 자꾸만 떠올라 발길이 나가지 않았다. 그처럼 열망하던 소원을 끝내 풀어보지 못하고 영영 가버렸으니…
《어머니, 나무뿌리에 걸치겠어요. 조심하세요.》
수희의 념려에 정녀가 응답하였다.
《안다. 이런데를 한두번 다녀본 어머니가 아니다.》
《어머니, 경찰이 제사도 못하게 방해할가요?》
《경찰?…》 정녀는 뒤말을 잇지 못하였다.
《경찰이 달려든다 해도 제사를 지내야 해요. 삼일제가 아닌가요.》 수일이가 틀어쥔 주먹으로 허공을 내리치며 한마디 했다.
《어머니, 북에선 지식인들을 우대한다지요. 우리도 그런 곳에서 살아보았으면 좋겠네!》 수희의 큰 눈망울에는 선망의 빛이 함뿍 실리였다. 지식인가정의 자식으로서 겪게 된 재난과 불행이 그러한 간절한 욕망을 키질하는것 같았다.
《어머니도 같은 심정이다-》 정녀는 뜨거운것을 삼키였다.
《어머니, 이모부가 쓰러지지 않았을가요. 지내 과로하시는것 같애요.》 수일의 말에 정녀는 머리를 들었다.
《이모부는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다.》 정녀는 힘주어 대답했다.
《어머니, 주원사건에 대한 기사를 이모부가 참 잘 썼지요. 미군은 조선의 암이다, 미군이 남아있는 한 겨레의 불행과 재난은 가셔지지 않는다. 미군은 해방자도 원조자도 아니다. 주원사건을 보라! 모두가 〈군정〉의 기만선전에 속지 말고 반미구국항전으로 떨쳐나서라!》
《그런 구절도 있느냐!》 깊이 감동된 정녀는 머리를 끄덕이며 오누이에게 빨리 가서 아버지묘지를 손질하자고 하였다.
《어머니, 벌써 누가 먼저 온것 같애요. 저기.》
수희가 애솔밭너머로 손짓을 하였다. 웬 장년과 다른 두사람이 봉분을 손질하고있었다.
《이모부같애요! 옆의 분은 학자선생님이시구요.》
금시 정녀의 눈시울이 화끈 달아올랐다.
수일이와 수희가 달려가며 먼저 세사람에게 인사를 하였다.
뒤따라온 정녀는 갈린 목소리로 김성렬에게 인사를 올렸다.
《선생님, 장례식피곤도 아직 못 푸셨겠는데 또… 저희들은 가족끼리 간단히 제사를 지내자고 했는데 또 이렇게 수고로이 찾아와주셨군요.》
《가족끼리라니요? 어쩜 그런 말을 할수 있소?》
《경찰의 눈에 걸리면 화를 당할수 있지 않습니까?》
《무슨 말. 놈들이 두려워 우리가 오지 않으면 되오.》
《고맙습니다.》 정녀는 솟구치는 눈물을 걷잡지 못하였다.
《부인, 고정하십시오. 현구, 그 사람의 성토는 자신이 겪은 뼈에 사무친 웨침이였습니다.…》
성렬은 사람이 옳바르게 사는것도 중요하지만 인생의 마무리를 잘하는것도 그에 못지 않다고 자기의 심회를 실토하였다.
《부인도 슬픔을 딛고 일어서십시오. 우린 그 사람의 의로운 최후가 또 다른 현구를 나오게 할수 있다고 믿고있습니다.》
성렬은 복잡다단하고 엄혹한 시국속에서도 유구한 겨레의 얼은 절대로 굽어들지 않을거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때 제물보자기를 든 사람들이 언덕을 오르고있다.
(아니?! 그 먼데서…) 예상밖의 광경에 정녀는 깜짝 놀라며 마주 내려갔다. 주원지방의 군농조와 민주단체역원들 그리고 하촌바닥 리운학농민, 수일의 친구들인 김종안과 성아였다.
그뒤를 이어 이번에는 수일의 공장로조위원장인 리평택이 오랜 로동자들과 같이 도착하였다. 그들은 분묘에 조의를 표시하고 유가족들을 위안하였다. 장골이던 평택은 그사이에 옥고를 치른듯 몸이 몹시 축가고 얼굴이 핼쑥하였다. 평택은 정녀와 수희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고 수일을 따로 불러냈다. 기상이 엄숙해진 평택은 수일의 손을 잡고 무엇인가 중대한 지시를 알려주는것 같았다.
삼일제에 의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참가하게 되였다. 양지바른 산중턱에 자리잡은 봉분은 애솔들에 빙 둘리우고 묘앞의 상석도 양유종이 주문해온 대리석으로 품위있게 놓이였다. 분묘의 아래쪽으로는 해묵은 소나무가 거연한 자태를 드러내고있었다. 성렬학자가 좋은 곳에 자리를 잡은것이 분명하였다.
조객들은 봉분의 제단에 제주를 바치고 경건한 마음으로 고인의 명복을 빈 다음 유가족들과 잠시 앉았다가 산을 내리였다. 제비들이 저녁비를 예고하듯 나무우듬지를 스치며 날아옜다.
남편의 봉분을 떠나는 정녀의 마음은 허전한감이 없지 않았으나 든든했다. 그는 조직의 지시를 받고 성아와 함께 지리산으로 찾아가는 아들을 뜨겁고 미더운 눈길로 바래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