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장  겨레의 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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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구는 창문이 요란스레 흔들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여났다. 돌개바람같기도 하고 땅울림같기도 하였다.

방안은 아침해빛이 흘러들어 환했다. 밖에선 새들이 지저귀고있었다. 잔뜩 흐렸던 날씨가 말끔히 개인 모양이다.

장밤 안해와 아들딸, 김성렬을 그리며 하많은 사연들을 생각하다가 깜빡 잠들었던 현구였다. 그는 서두르는 기색없이 세면을 하고 아침식사를 한 뒤 책상에 마주앉았다. 책상우에는 오늘 모임에서 리용할 참고문서들과 아들이 보내준 《토지개혁》에 대한 문건이 놓여있었다. 현구는 북반부에서 진행한 토지개혁에 대한 법령에서 오래동안 눈길을 떼지 못하였다.

거리쪽의 소음이 점점 커지고 앞집 경찰서뜨락에서 집회장경비에로 경관들을 내모는 구령소리가 울려왔다.

문건들을 쥐여당기던 현구는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특사님, 밤새 무고하셨습니까. 군수올시다. 언제쯤 나오겠습니까. 주석단준비는 거의 끝나가고있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인차 떠나자고 합니다.》

현구가 응답하고 송수화기를 놓는데 전대산이 들어와 쏘파에 앉으며 이마의 땀을 씻었다.

《에잇, 며칠밤을 돌아쳤더니 힘이 드는군. 현형, 경비는 그만하면 빈틈이 없게 된것 같소. 마음놓고 미군정의 토지법을 해설해도 되겠소.》

대산은 현구의 기분상태를 가늠하듯 한참 바라보다가 뒤를 이었다.

《현형, 대사를 앞두고 안됐소만 말을 안할수가 없구려. 우리가 예측한대로 수일이가 나타났시다.

아직 확인은 못했지만 외지의 젊은이를 발견했다니 그게 누구겠소. 현형, 우리가 딱해지지 않게 해주오. 우리도 현형을 봐서 모르쇠는 하지 않겠소.》

현구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한듯 제 할일, 나갈 준비만 했다.

《현형, 결정적인 시각에 옳게 처신하길 바라오. 그럼 난 나가보겠소.》

대산은 동침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구는 아들이 무사하길 바라며 만약의 경우를 생각했다. 이때 수발원이 군정의 통지문을 가져왔다.

《존경하는 현선생, 모임에서 뛰여난 수완을 발휘하십시오. 약속한 영전의 자리가 선생을 기다리고있소. 당신의 친근한 벗 스미스.》

그에게 가해지는 최후의 압력이였다.

(아무렴, 수완을 보여야지. 이런 기회가 또다시 있을라구…)

잠시후 귀빈각을 나선 현구는 경호대의 차를 타고 군소재지에서 멀지 않은 촌소학교로 갔다.

그는 학교현관에서 군청관리들의 인사를 받으며 대기실로 정해진 교장실에 들어갔다.

원탁의 지구의와 교편물들이 눈을 끄는 소박한 방이였다. 그는 침착성을 유지하며 걸상에 점잖게 걸터앉았다. 이제 신호가 오면 집회장의 막이 오르게 될것이였다.

굳게 닫긴 교장실문밖은 몹시 소란스러웠다.

두명의 문전보초가 특사와의 면담을 요구하는 기자들과 옥신각신하고있었다. 문득 귀에 익은 목소리가 가늠되였다.

《면담도 취재도 아니요. 집에 사정이 생겨서 특사인 동서에게 알리자는거요. 잠간이면 되오.》

현구는 주저없이 문을 열었다.

《형님, 나요, 양유종이요.》

《들어오우.》

현구는 보초가 어쩔새없이 유종의 팔을 방안으로 잡아끌었다.

《이게 얼마만이요. 이런데서 만나다니…》

현구는 유종의 모습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량반집 도련님처럼 호강하던 유종이는 영 딴사람의 모습이였다. 적갈색으로 변한 얼굴이며 높이 쳐올린 머리는 활동력과 패기에 넘쳐있었다.

《형님, 몸은 일없소? 뒤늦게야 형님의 소식을 듣고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유종은 최상의 대우를 받는다는 현구의 신색이 의외에도 초췌해서 몹시 놀랐다.

《나야 건강하지. 그래, 어디에서 지내나?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았나?》

《고향길은 단념했습니다. 민족신문사에 들어가 미군정과 관련된 글을 씁니다.》

《그런가.…》 현구는 큰 충격을 받았다. 《군정》의 통역관이 다른 신문도 아닌 민족신문의 기자로 되다니? 사람이 그렇게 방향전환을 할수도 있는가. 그래, 지금은 모두 그래야 해.

현구는 마음을 굳게 다지였다.

《형님, 긴 말을 할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온것은 토지문제의 권위자가 주관하는 모임인만치 신문들이 대서특필하자고 해서입니다.》

(대서특필?)

현구는 마침이라고 생각했다. 온몸에서 피가 끓어올랐다.

《수고하겠네. 우리 집소식은 아는것이 없나?》

《왜 없겠습니까. 여기로 오는 길에 학교로 가서 형수님을 만났습니다.》

유종은 주원모임소집소식과 그 말을 듣고 몹시 놀라던 정녀의 말을 꺼냈다.

《참, 정애는 어떻게 됐나? 찾았겠지?》

《네, 한강에서 어부들이 건져냈더군요.》

《그게 무슨 소린가, 어부들이 건져내다니? 그럼 한강에?…》

현구는 가슴이 섬찍해서 다급히 물었다.

《그후에 알아낸것이지만 스미스란 그 호색한이 우리 처를… 정애는 양키에게 더럽혀진 몸으로 나를 볼 면목이 없다고 그렇게…》

양유종은 억이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현구도 말이 나가지 않았다. 처제로만 아니라 누이동생처럼 생각되기도 했던 정애, 이런 정애를 스미스 네놈이?… 이제는 양유종이가 통역관에서 해임된 리유도, 집을 떼우게 된 까닭도 알만했다. 승냥이같은 놈들. 아니, 스미스 네놈도 두발가진 승냥이이고 미국도 승냥이이다! 내 어찌 이런 스미스, 이런 미국을 용납하랴! 현구는 두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였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보초병이 뛰여들었다.

《기자선생, 보초를 속이면 되오? 빨리 나가시오, 내겐 목숨이 하나밖에 없소.》

《그렇게 목숨이 아깝거든 제 자리에 나가있소. 여기서 경을 치기 전에.》

분노로 온몸을 치떨던 현구는 보초병에게 불호령을 내렸다. 보초병은 비실비실 밖으로 쫓겨나왔다.

(미국승냥이들도 결단코 저렇게 내쫓아야 한다.)

현구는 그것을 확신하며 동서를 위로했다.

동서가 나간 다음 현구는 창가로 다가갔다.

소학교운동장은 갖가지 꽃들이 만발한 화단을 끼고 드넓게 열려져있었다.

각 도에서 올라온 토지관계자들과 주원군내의 모모한 인사들은 앞쪽의 연탁좌우로 걸상을 차지하고있었고 그들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면단위로 농민군중이 늘어섰는데 방청으로 참석한 로동자대오와 청년학생들이 그 좌우에 서있었다. 해설이나 하자는 장소치고는 지내 요란스러워 마치도 성대한 군중집회장을 련상시키였다. 완장을 두른 기자들이 집회장에 대고 사진을 찍는가 하면 취재를 하느라 분주스레 돌아간다. 연탁주변과 교사의 요소요소에 배치된 정사복의 경찰들과 행동대원들이 사람들을 살펴보고있었다.

현구는 구름처럼 모여드는 군중을 관심어린 눈길로 주시하였다. 정말 수일이가 저속에 있는가 그 모습이라도 보고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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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람들이 운동장에 모여들었다. 농군들과 아낙네들, 늙은이들과 지나가던 출장원들까지 별로 크지 않은 학교운동장으로 걸음을 다그쳤다.

해가 높이 떠올랐다. 요소요소에 배치된 경비원들이 긴장한 눈길로 운동장에 운집한 사람들을 주시하고있었다.

미군정특사라니까 양코배기겠지?》

《양코배기일게 뭔가, 앞잡이겠지. 귀빈각에서 오늘에야 얼굴을 내밀겠군.》

《속이 양놈이면 우리 사람이라 할수 없지.》

경비원을 흘끔흘끔 곁눈질하며 두 장정이 이죽거리였다.

《어머니, 여기가 성아언니의 고향이라지요?》

어머니와 함께 오늘 아침 이곳 주원에 도착한 수희는 운동장에 가득 모인 사람들과 낯선 고장을 둘러보며 물었다.

《하촌바닥이라니 앞산너머쯤 되겠지요? 어머니, 성아언니가 오지 않았을가요?》

《서울학생이 어떻게 알고 오겠니.》

정녀는 다소 겁질린 얼굴빛으로 주위를 살펴보며 대답했다.

《땅문제인데 소문이 나지 않았을가요. 어머니, 나 오빠를 찾아보겠어요.》

《그만둬라, 김성렬선생님도 찾다가 그만 돌아오시지 않았느냐.》

《오빠는 여기 어디에 꼭 있을거예요.》

《이 숱한 사람들속에서 어떻게 오빠를 찾는다고 그러니.…》 정녀가 수희의 팔을 잡으며 귀속말로 타일렀다.

《오빠는 소문을 내고 다니지 않아, 너나 들키지 않게 주의해-》

《어머닌 왜 자꾸 그러세요. 아버지가 군정에서 일한다구 양인으로 되겠어요. 아버진 조선사람이예요-》

정녀가 생각깊은 눈길로 수희를 바라보는데 성렬로인이 모녀의 말에 끼여들었다.

《수희의 말에 일리가 있소. 이제 두고봅시다.》

로인의 목소리는 웅글었다. 정녀는 이런 로인을 보기가 괴로왔다. 로인댁을 찾아갔던 일이 생각되였던것이다. 로학자는 정녀한테서 유종의 말을 전해듣더니 한동안 말이 없다가 서재를 나와서는 뜨락의 화분들에 물을 주었는데 손이 가볍게 떨리고있었다. 정녀는 앉아있기가 거북하였다. 경찰서류치장 고초로 병세가 위태로와진 선생이 병원으로 실려갔지만 남편은 병문안도 하지 못했던것이다.

정녀는 그 일이 가슴에 찔려 일어서려고 하였다.

그런참에 부인이 과실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겨울난 사과인데 맛보시오. 령감은 이제 곧 들어올거웨다.》

부인은 이렇게 권하고 《령감, 화분의 물은 아침에 내가 주었어요.》

군말없이 하던 일을 그만두고 서재로 돌아온 로인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였다.

《부인, 그래 언제 내려갈 작정이요?》

정녀는 조언이나 받자던 참이여서 금시 눈을 크게 떴다.

《이 사람도 가겠소. 동행합시다.》

《선생님, 그만두세요. 길이 먼데다 험한걸요. 가셔도 만나지는 못할겁니다.》

로인의 흰머리가 고집스레 흔들렸다.

《선생님, 제발 고정하십시오. 제가 갔다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녀는 근 백리길을 들춰대는 차에 시달리고나면 가뜩이나 허약한 선생님이 견딜수 없다면서 만류했다.

《부인, 길을 탓하고 몸을 탓하게 됐소?》

로인의 어조는 강경하였다.

《현구 그 사람과 마지막일수도 있는데 어떻게 보지 않고 참아내겠소.》

《선생님, 가슴아프지만 이젠 판이 난것 같습니다. 제발 헛걸음을 하지 마십시오. 제가 딸애를 데리고 가보겠습니다.》

김성렬은 그 말은 들은듯만듯 정녀에게 빨리 가서 차비를 하고 래일 새벽 지방행뻐스가 다니는 정거장으로 나오라고 일렀다.…

정녀옆에 앉은 수희는 운동장을 살피였다. 오빠와 성아언니가 꼭 와있을것으로 믿고있었던것이다. 운동장에 모인 사람들 거의 모두가 농군들차림새여서 제대로 가려볼수 없었다.

수희가 찾고있는 하촌바닥농군들은 연탁앞 가까이에 있었다. 수건으로 이마를 동인 운학이가 대오를 통솔하는 동시에 수일을 지키고있었다. 훌렁한 농민복에 허줄한 농립모를 쓴 수일은 여느 농군들과 다를바가 없었다. 앞사람너머로 연탁을 주시하는 현수일은 몹시 긴장된 상태였다.

아버지가 자기의 편지를 보았는지… 보았다면 이젠 어떻게 나오겠는지…

자기가 바라던바대로 나온다면 다행이지만 반대의 경우로 나오면 모임을 파탄시키기 위한 투쟁으로 넘어가야 했다. 이때문에 그자신도 운학이도, 종안이도 그리고 그들의 영향을 받으며 종학의 친척집에서 살고있는 은실이도 모임장소에 와있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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