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장 땅은 말한다
미군용찦차는 서울을 향하여 촌길을 달리고있었다. 부지깽이마저 뛴다는 농번기치고는 어디라없이 한산하고 침체된 논밭들이였다. 저수지 또한 말라드는지 물도랑들이 바닥을 드러내였고 구릉밭의 늙은 농군의 주름살얼굴에는 시름이 깊었다. 메마른 논판에서 두렁을 짓던 두 농군이 가래장을 세운채 심란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있었다.
차의 등받이에 의지한 현구의 너부죽한 얼굴은 여느때없이 심각한 빛을 띠고있었다. 그는 지금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였다.
며칠전 군수는 전치도가 역적으로 단죄된 조건에서 그리고 그가 죽은 조건에서 모임대상을 바꾸어야 하지 않겠는가고 했었다. 현구는 마침 잘됐다고 생각하며 절골의 민지주를 대상으로 하자는 안을 우에 제기했는데 스미스는 그것을 부결하였다.
스미스는 그 리유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군정에서 비준한 계획은 곧 법이다. 우리에겐 그에 무조건 복종할 의무밖에 없다. 전치도사건은 조선내부의 문제로서 미군정청은 관여할바가 아니다. 그리고 그가 죽었다면 응당 그의 후손이 상속받도록 해야 할것이다.》
현구는 속이 울컥했다. 도저히 접수할수가 없었다. 바로 이무렵 그의 서기가 지급으로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공사의 중심국인 토지관리국이 농산국에 흡수된다는것이였다.
《지방에서 돌아온 황국장이 손수 작성한 기구개편안인데 그것이 〈군정〉의 승인을 받게 되면 관리국이 농산국의 한개 부서로 되고만다고 합니다.》
현구는 전날에도 그런 소문이 나돌았으나 그때에는 무관심했던것인데 이제 와서는 모든것이 명백해졌다.
서기는 편지에서 계속해 이렇게 썼다.
《존경하는 국장님, 빨리 돌아와서 수습해주십시오. 지금 토지관리국은 죽가마끓듯 합니다. 저는 서기편제가 없다면서 다른 직업을 구하라는 황국장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국장님, 지금같은 때에 제가 무슨 수로 일자리를 구하며 어린 자식들을 먹여살리겠습니까. 눈앞이 캄캄합니다.…》
현구는 자기가 없는 사이에 황국장이 스미스와 그 어떤 꿍꿍이를 한게 분명하다고 생각되였다.
자기와는 아무런 련계도 없이 불쑥 밀양에 도착한 황국장에게 인계를 할 때 놀아대던 그의 오만한 모습이 눈앞에 떠올라 피가 끓어올랐다.
그는 더 참을수가 없었다. 그를 단죄하자고 한 토지유령건들이 속에 쌓여있는 때에 역적의 토지를 끝끝내 모임대상으로 하라고 강요하고 사전통보도 없이 자기를 새 임지로 옮겨놓았을뿐만아니라 토지관리국을 농산국의 한개 부서로 전락시킨 스미스에 대한 불만과 항거의 감정이 걷잡을수 없게 솟구쳐올랐다. 그는 스미스에게 지급전화로 자기를 지체없이 만나줄것을 강경하게 요구했다. 스미스는 생각되는바가 있는지 거절하지 못했다.
《전화상으로 말할수 없는 문제들이라니 올라오시오.》
이렇게 되여 주원에 못박혀있어야 했던 현구가 서울로 가게 된것이였다.
《미군정청》에 도착한 현구는 출입수속을 마치고 2층대기실로 들어갔다. 널직한 방안에는 잡담을 하는 사람들, 긴 다리를 펴고 담배를 꼬나문 미국인들, 머리칼을 별나게 지져올린 녀인과 명주옷차림의 늙은이가 창밖을 내다보고있었다.
현구는 오래 기다릴수가 없어 풋낯이나 있는 서기에게로 갔다.
《얼마를 더 기다려야겠소?》
《글쎄올시다. 지시가 없는걸요.》
현구는 쓰겁게 입을 다시였다. 자기가 찾아왔다고 하면 즉시 달려나오군 한 그전날의 스미스가 아니였다.
한식경이 지나서야 나타난 이국풍의 녀통역관이 현구에게 고개를 까딱하고는 들어가라고 하였다.
《오우, 특사각하! 오래간만입니다. 몸은 건강합니까?》 스미스는 자리를 권하며 령남지대에서 수고가 많았겠다고 하는 말까지 했다.
현구는 그를 한참 지켜보다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관리국기구를 개편합니까?》
스미스의 파란 눈알이 묘하게 움직이였다.
《몸은 비록 귀빈각에 있어도 통신엔 대단히 밝군요.》
《국장을 동원시켜놓고 기구개편과 같은 중대사를 추진할수 있는가 말입니다.》
《오우, 알만 합니다. 불쾌하게 생각지 마시오. 차라리 시원하게된 셈이지요. 그만큼 짐이 덜어질테니까.》
스미스는 계속해서 중대모임을 성사시키고 돌아오면 영전의 자리가 그를 맞이할것이라고 지껄였다. 현구는 랭소를 금치 못했다. 이제는 그의 말이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곧이 들리지 않았다.
《그처럼 관심을 돌려주어 대단히 감사합니다. 하지만 참사관각하, 모임을 기어이 원안대로 해야겠는가요? 해방을 맞은 농군들은 어제날의 농군들이 아닙니다. 원안을 그대로 내밀었다간 격노한 농민군중의 항거에 부딪져서 모임자체를 성사시킬수 없다고 봅니다. 모임대상을 바꿔야 합니다.》
《노우- 당신 군정의 일군입니까 아니면 농민의 대변자입니까? 그따위 대안을 가지고 감히 군정의 계획을 흥정할수 있습니까?》
현구는 장교의 전달과 회신으로 표시되던 스미스의 강권행위를 직접 당하게 되자 온몸에서 피가 끓어올랐다.
《참사관각하, 심사숙고하길 바랍니다. 군정의 시책이 현실과는 지나치게 등진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성사시킬 대안을 모색하느라고 며칠밤을 새웠는지 아십니까?…》
《걷어치우시오- 그따위가 누구에게 소용된다는거요? 특사나리, 똑똑히 들으시오. 우리가 그런짓이나 하라고 당신에게 높은 대우와 막강한 권한을 주는게 아니요!》
스미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은 그사이에 우리의 우대를 받으며 자기의 처지를 잊은것 같소. 그래 우리가 해방지역에서 그쯤한 땅도 팔아치우지 못한단 말이요?… 당신은 우리를 비호할대신 신소자들과 맞장구를 치고 오늘에 와서는 군정에서 비준한 모임계획까지 변경시키려고 드니 이런 당신을 어떻게 봐야겠소.》
스미스는 침방울을 튕기며 현구를 무섭게 몰아댔다.
《우리에겐 그런 오그랑수가 필요없소. 그건 우리에 대한 무시이고 모욕이요. 앞으로는 삼가하시오. 본관이 이미 경고하지 않았소. 우리가 시키는 그대로만 하면 되오.》 스미스의 말속엔 현구를 말하는 도구로, 노예로 치부하려는 거만성이 깔려있었다. 현구는 그의 주둥아리를 쥐여박고싶은 심정을 누르며 같은 억양으로 말했다.
《참사관각하, 조상전래로 내려온 땅을 빼앗는 방법으로는 절대로 안된다고 봅니다. 각하도 온 나라 각지에서 벌어지는 친일파, 민족반역자숙정투쟁을 모르지 않겠지요?》
스미스는 현구의 말이 뜻밖의 반격으로 생각된듯 눈알이 꼿꼿해졌다.
《참사관각하, 한번 립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지 않겠소? 당신네라면 민족을 배신하고 반역한 주구들을 그냥 용서하고 우대하자고 하겠소?》
현구는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듯 흠칫하는 스미스에게 한마디 더했다.
《하긴 당신네야말로 원주민들을 없애치우고 세운 이주민들의 나라인것만큼 그럴수도 있을거요. 그러나 우리 조선은 그렇지 않소. 반만년의 오랜 력사를 가진 단일민족국가요. 각하도 문명인일진대 그쯤한 리치도 분별 못하겠소?》
《닥치시오! 감히 미국을 헐뜯으려 들다니? 아니요! 미국은 세계최강자요. 이 땅을 독점한 지배자요. 사회적정의도 진리도 온갖 법도 강자의것이요. 우리가 벽을 문이라고 하면 당신은 무조건 〈예.〉 하고 공손히 응해야 하오. 그걸 어기면 그때에는 종말밖에 차례질게 없소.》
스미스는 약육강식의 동물철학을 발광적으로 짖어대며 야수의 본성을 드러냈다. 《종말!》 현구는 그 말을 입안으로 외웠다. 그의 본심이 어떤것인가를 더욱 똑똑히 알게 된것이다.
그는 자기의 립장을 명백히 했다.
《나는 〈군정〉의 시책이 잘되기를 바랄뿐이요.》
현구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밀양의 권로인의 토지복귀문제를 말했다.
《농군들에게 복귀? 그건 안되오. 포고령위반으로 되오.》
스미스는 단마디로 일축하였다.
《아니, 포고령에도 수탈지는 주인에게 반환하게 되여있지 않소?》 현구는 땅을 치는 권로인의 불쌍한 모습이 눈앞에 얼른거려 따지고들었다.
《포고령, 그건 우리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지는것이요.》 스미스는 뻔뻔스레 지껄인 후 그것으로도 성차지 않은지 더 짖어댔다.
《특사나리, 상기시켜줄게 있소. 우리에게 필요되는건 숭미사상이요. 그가 친일을 했건, 주구노릇을 했건 그건 우리가 관계할바가 아니요. 우리 미국을 위하여 공헌만 하면 그에 맞게 벼슬도 주고, 땅도 주는게 우리 미국이요. 군정에는 당신처럼 우대를 받은 사환군들이 많소. 다른 생각 말고 돌아가서 우리가 비준한 모임을 그대로 어김없이 집행하시오.》 스미스는 이 말을 남기고 내실로 통하는 작은 문을 밀었다.
현구는 그냥 돌아설수 없었다.
《잠간만!》
현구는 스미스를 멈춰세웠다.
《한가지 청이 있소. 중대사를 맡고보니 내 능력이 어방없이 딸린다는걸 알게 되였소.》
《그래서 보조원을 붙여달라는거요?》
《나보다 황국장을 내려보내는것이 나을것 같아 하는 소리요.》
《황국장? 도대체 생각해보고 하는 소리요? 후과가 두렵지 않으면 마음대로 하오.》
스미스는 성을 내며 긴 팔을 내젓고 나가버렸다. 녀통역관이 그의 뒤를 총총히 따라나갔다.
담배를 피워물고 생각에 잠겼던 현구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때 방안문이 제껴지며 스미스와 녀통역관이 다시 방에 들어왔다. 녀통역관은 탁자안에서 병을 꺼내여 원탁의 고뿌에 술을 따랐다.
《특사님, 잔을 받으세요. 참사관각하가 드리는겁니다. 여기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는것 같습니다.》
현구는 잔을 받을 대신 통역을 쳐다보았다.
《현선생, 잔을 드시오.》
스미스는 자기절로 술을 따랐다. 살기를 띠고 뛰쳐나갔던 방금전의 스미스가 아니였다.
《우린 한배를 탄 사람들이 아니요. 마지막까지 무사하길 바래서, 우리의 우의와 친선을 위해서, 모임의 성공을 위해서.》
스미스는 잔을 추켜들며 좀전에는 지나치게 굴었는데 량해하라구, 자기의 성미를 잘 알지 않는가고 간사스레 지껄였다.
그는 현구의 해임요청에 속이 뒤집혔었다. 뜻밖의 반격을 당한 그는 화가 치받쳐 방을 뛰쳐나와선 미친듯이 돌아갔다. 그러다 흥분이 가라앉자 이번에는 머리가 팽이처럼 돌면서 마력을 내였다. 현구틀 처리하는건 식은죽먹기였다. 하지만 주원에서 계획한 일을 성사시키자면 그가 가장 적중한 인물이였다.
주원에서 모임만 잘하게 되면 농촌의 지주들과 반동들의 지지를 얻어서 친미지반을 꾸리자는 《군정》의 모략이 실현되는만치 상급의 평가는 먹어놓은 당상인것이다.
그래서 은밀히 주둔군과 경찰들을 동원시켜 포위망을 더 든든히 치고 눈이 뒤집힐 특전으로 현구를 현혹시키면서 다른 길로는 빠지지 못하게 하자는것이 그의 계략이였다. 일단 모임에서 《군정》의 의도가 선포되면 그때엔 현구가 농군들의 뭇매를 맞고 죽든말든 상관할것이 없었다. 이를테면 현구를 희생시켜 일거에 이득, 삼득을 얻자는것이였다. 그러면 상급의 칭찬도 받고 이곳에 머물러있자는 야심도 충족시키게 될것이였다. 다른 미국인들은 처자들이 기다리는 본국소환을 고대했지만 그는 달랐다. 그는 이 땅의 재부를 배가 터지도록 처먹고 떠나자는것이였다.
《현선생, 잔을 내시오. 본관은 선생의 은혜를 항상 잊지 않고있소. 노염을 푸시오. 그걸 모른다면 무슨 사람이겠소. 모임후에 우리 이야기를 계속합시다. 모든걸 만족스럽게 해주겠소.》 스미스는 현구를 안심시키느라 입에 침발린 소리를 늘어놓았다.
현구는 자기대로 생각하는바가 있어 일단 잔을 들었다.
술은 사약처럼 역스럽고 독하였다.
잠시후 스미스참사관의 미소어린 배웅을 받으며 현구는 아래층현관으로 내려왔다.
계단앞에 멎어있는 찦차앞에서 뜻밖에도 밀양으로 나왔던 주원주둔군 미군중위가 거수경례를 붙이였다.
《특사각하, 이번길에도 본관이 각하를 모셔가게 되였습니다. 차에 오르십시오.》
현구는 차의 뒤좌석을 차지하였다. 차는 곧 떠났다. 현구는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 태평로로 들어서는 차를 소서문쪽으로 돌리라고 하였다. 그는 은사 김성렬의 조언을 받고싶었던것이다.
장교는 명령을 받지 못했다고 하면서 응하지 않았다.
《장교, 특사의 지시를 못 들었소?》
《안됩니다. 공무중에는 개인용무를 허락할수 없습니다.》
《누가 당신에게 그런 권한을 주었소?》
《그건 말할수 없습니다.》
《좋소, 가는 길에 집에 잠간 들려야겠으니 그리로 차를 돌리시오.》
《자꾸 그러지 마십시오, 임무를 수행하기 전엔 안됩니다.》
장교는 딱 잘라떼였다.
삼각지를 넘어선 차는 강안거리로 접어들었다. 현구는 장교의 오만무례한 행동을 보면서 스미스가 그런 지령을 준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현구는 주원으로 가는 길에서 반미구호들을 웨치며 거리거리에 떨쳐나선 로동자들의 투쟁모습을 목격하였다.
(우리 수일이도 반미항전에 나서서 싸우고있지. 나는 스미스에게 속는줄도 모르고 우린 약소민족이니 렬강의 도움을 받아야 일어설수 있다고 생각했지. 사대와 숭미… 내 왜 이렇게 얼간망둥이처럼 생각하며 행동했는가? 그것이 외세의존이고 외세의존은 자신도 나라도 망치는 길이라는걸 왜 진작 알아차리지 못했단 말인가.)
현구는 스미스의 검은 속심을 간파한 오늘에 와서야 이걸 깨닫는 자신을 개탄해마지 않았다.
주원에 도착한 현구는 차에서 내리는 길로 귀빈각 응접대에서 목추김을 하였다.
전화종이 다급히 울리였다. 현구는 송수화기를 들었다.
《특사님, 수고하셨습니다. 군수올시다.》
군수는 몹시 기다렸다면서 오전까지 각 도의 농업부문 관계자들과 신한공사지사 책임자들이 전부 당도했다는것과 모임을 취재하려고 기자들까지 찾아오고있다고 말했다.
《특사님, 모임은 언제쯤 예견합니까? 시책과 관련한 연설을 먼저 하시겠지요. 기자들은 아는것 같은데 군청에도 대주십시오. 접대사업과 회의장준비때문에 그럽니다.》
《좀 기다리시오. 련락이 오면 알리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다른것이 없으면 그만합시다.》 하고 현구가 먼저 송수화기를 놓았다. 드디여 문제의 모임이 림박했다. 저녁녘에 모임을 이번주일내로 하라는 지령이 내려왔다.
창밖에선 비가 내리고있었다.
번개불이 번쩍하더니 천지를 진감하는 우뢰소리가 귀청을 때리였다.
현구는 그것이 그 어떤 무서운 경고처럼 생각되여 지꿎게 담배를 피워댔다. 자기의 요구를 다 잘라버리고 김성렬에겐 물론 집에도 들려보지 못하게 뒤에서 조종한 스미스, 그는 오직 모임 그 하나만을 생각하며 개인토지소유지문제를 저희들의 목적에 맞게 종결하려 하고있었다. (내 그 속심을 아는 이상 가만있을줄 아는가.) 현구는 문득 전대산의 집앞에서 있었던 일이 상기되였다. 연회장이 수라장이 되고 전치도가 병원으로 실려갔을 때 현구는 대문밖에서 담배를 피워물었다. 그때 체격이 단단해보이는 신사차림의 한 중년사나이가 담배가치를 꺼내들고 그에게로 다가왔다.
《미안하지만 담배불 좀 얻을수 있습니까?》
현구는 라이타를 내밀었다. 중년사나이는 라이타를 받아들며 《수일이 아버님이 옳지요.》 하고 나직이 물었다.
《거긴 뉘신지?》
《리평택이라구 수일이와 한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인데 성렬선생의 부탁이 있어서…》
(성렬선생?)
《성렬선생은 지금 어떻게 됐소?》
《서울시민단체들과 군중의 항의에 못이겨 경찰청에서 마지못해 석방시켰습니다. 선생은 현재 입원치료를 받고있습니다.》
(아, 스미스의 힘을 빌어 출옥시키자고 시도했던 성렬선생, 나의 그 시도는 헛물을 켰지. 그런데 시민단체들과 군중은 그를 구출해냈다. 이건 뭘 말해주는가. 미국에 대한 기대와 미련이 아니라 오직 투쟁만이 우리 민족이 살아갈 길이라는걸 말해주는것이 아닌가.)
현구의 충격은 컸다.
《그래, 성렬선생이 부탁했다는건?…》
《아버님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조선사람의 근본을 잊지 말아 달라는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더 하려던 리평택은 경찰들이 탄 군용승용차가 급하게 달려오는것을 보고 얼른 담배에 불을 붙였다.
《미국놈들에게 속지 마십시오, 성렬선생이 바라는건 이것입니다.》
그는 태연스레 억양이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담배에 불을 붙이게 해주어 고맙습니다. 그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유유히 마을골목길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현구는 속으로 개탄하였다.
《선생님, 제 하마트면 미국의 개가 될번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귀전에서 《미군정》참사관이 자기를 데려다가 쓰려고 한다고 했을 때 들려준 은사의 말이 쟁쟁히 되살아났다.
《그렇다면 일단 들어가놓고 보는게 어떻겠는지… 거기에 들어간다고 해서 다 나쁜 사람으로 되겠소, 제정신만 있다면야…》
그때 현구는 그 말뜻을 깊이 헤아리지 못했었다. 이제는 똑똑히 알수 있었다.
《선생님, 조선사람의 근본을 잊지 않겠습니다. 지금까진 약소민족이니 렬강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미국에 기대를 가졌댔지만 지금은 그것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참된 길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현구는 자신을 꾸짖으며 이제부터 해야 할바를 생각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성렬선생이 더욱 그리웠다. 그한테서 가슴속의 뼈저린 진통을 털어놓고 조언도 받고싶었다. 그는 귀빈각에서 마음대로 나갈수 없는 몸이였다. 스스로 결심하고 행동하는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현구는 그 길을 모색하며 한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날이 밝았다. 조용한 정원으로 난데없이 한대의 뻐스가 들어와 멎었다. 귀빈각이 삽시에 장마당처럼 소란스러워졌다. 이국풍의 젊은 녀인들이 꽃밭으로 밀려가며 재잘거렸다.
전혀 뜻밖의 광경이였다.
그때 2층 방문이 열리며 전대산이 나타났다.
《특사각하, 중대사에 매우 다망하겠습니다. 잠시 머리를 쉬십시오. 참사관각하께서 친히 각하에게 위문대를 보내왔습니다.》 하며 대산은 특별히 선발한 서울 명배우들이라고 소개하였다.
잠간사이에 넓은 방안이 현구를 위한 소연회장으로 꾸려졌다. 식탁을 대신한 탁자에는 준비해온 여러가지 서양료리들로 가득차고 군의 모모한 인물들이 걸상에 주런이 앉았다.
다섯명의 배우들이 양식으로 무릎을 까딱거리였고 그중 한 배우가 인사말을 한 다음 간드러진 노래를 불렀다. 그뒤를 이어 입술과 손톱들이 새빨간 무용수가 좁은 공간을 리용하며 춤을 추었다.
대산은 현구에 대한 참사관의 신의와 존경을 부러워하는척 했다.
현구의 입술은 한일자로 다물려있었다. 자기를 안심시키고 모임을 무사히 치르려는 스미스의 위선적인 연극이 참으로 역겨웠다.
전대산과 배우일행이 돌아간 다음 한동안 정원을 거닐던 현구는 담배를 피우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방바닥을 닦아내고 가구들을 정리하던 관리원이 바깥동정을 살피면서 현구에게 쪽지편지를 전해주었다.
《한 손님이 특사님에게 전해달라고 해서…》
현구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 펼치였다. 관리원은 방에서 나가며 문을 꼭 닫았다.
《아버지, 이 아들의 인사를 받아주십시오. 저와 우리 동지들은 아버지가 겪고있는 고충을 잘 압니다. 스미스는 아버지를 적절히 써먹고 해치려는 독사이며 미국은 일제를 대신해서 이 땅을 집어삼키려는 흡혈귀입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의 근본을 믿습니다. 주원에서의 모임은 파탄을 면치 못할것입니다. 모임장소를 운동장으로 해주십시오. 부탁입니다. 그리고 함께 보내는 문건은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께서 몸소 발포하신 〈토지개혁법령〉입니다. 아버지에게 도움이 될것입니다. 지난날 불손했던 이 아들은 후에 용서를 빌겠습니다.》
글씨로 보아 틀림없는 수일의 편지였다. 전대산이 그를 여기 주원에서 봤다더니 그가 속한 로조에서도 이곳 농조를 도와 놈들의 모략에 대처할 준비를 하고있는것이 틀림없었다. 아들의 편지를 다시한번 읽어보며 현구는 자기가 결코 고립무원하지 않다는 기쁨을 느끼였다. 동시에 자기를 리해해주는 아들이 못내 고마왔다.
《네가 옳았다. 양키는 쪽발이처럼 한하늘을 이고 같이 살수 없는 원쑤이다.》
속으로 이렇게 부르짖던 현구는 핀뜩 뇌리를 치는것이 있어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래, 그것을 만천하에 고발하자, 나는 조선사람이다. 성렬선생이 바라고 겨레가 바라는 사람, 조선사람의 근본을 지켜 투쟁의 마당에 나서자! 현구의 심장은 세차게 높뛰였다.
이날 밤 현구는 자기를 괴롭히던 일들을 하나하나 머리속에 새기고 또 새기였다.
그는 그것을 종이에 써서 품속에 건사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날이 밝기 바쁘게 군수에게 전화를 걸어 모임장소를 학교운동장으로 바꿀데 대해 명령조로 지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