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장  바람에 실려, 구름에 실려

 

3

 

《속도를 한껏 높이게.-》

유종은 운전사에게 다급히 재촉하였다.

《군정청》 벗어난 승용차가 인적없는 대통로를 질풍같이 내달렸다. 시가지의 건물들이 담벽처럼 밀려왔다간 물러나고 전주대들이 언듯언듯 스쳐지났다.

《더 빨리 갈수 없나?》

《최속입니다. 기관에서 열이 납니다.》

촉박해난 유종은 상반신을 꼿꼿이 세우고있었다. 그의 두눈에는 불안과 위구심이 짙게 어려있었다.

지금은 새벽 5시였다.

지난밤 유종이네 집에서는 흥겨운 주연이 벌어졌다. 별스레 유쾌해진 스미스의 희떠운 롱소리와 유종부부의 행복스런 웃음이 방안을 채웠다. 만의 분위기가 한 고조되였을 때 뜻밖의 글지가 날아들었다. 양유종이 미국무성으로 발송할 중요문건을 번역하는데 즉시 동원되라는 지령이였다.

자기는 통역관이지 번역원은 아니였다. 더구나 조선말을 영문으로 번역한적은 한번도 없었다.

스미스도 의견이 있어하였다. 통신원은 떠나가고 의논해데도 없었다. 쪽지에 표기된 《미국무성》과 《중요문건》이란 표현이 과업의 무게와 책임성을 강조해줄따름이였다.

《모를 일이군. 전문가들을 둬두고 하필이면 나를 불러낼게 뭐람.》

유종의 이 말에 스미스도 유감스러워했다.

《본관의 승인도 없이 동원시키다니? 내 항의하겠소.》 스미스는 파탄된 주연이 아쉬워 감로를 집었다놓고 일어서려 하였다.

사님도 떠나시겠습니까?!》

양유종부부는 다같이 어쨌으면 좋을지 몰라했다.

바야로 자기네 원을 비보려던 시각이였던것이다. 유종과 정애의 눈길이 마주다.

《여보, 오래 걸릴가요?》

정애의 눈빛이 이렇게 묻고있었다.

《여기서야 그걸 알겠소?》

유종이도 눈빛으로 대답했다.

《문건이니 길진 않겠지요 뭐. 빨리 돌아오세요. 그때까지 제가 사관을 모시고있겠어요.》

정애는 두번째로 마련된 이번 기회를 놓고싶지 않아했다.

《그럼 참사관이 떠나지 않게 하오. 내 인 돌아오겠소.》

스미스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들의 의논을 눈치 같았다.

《본관은 두분의 호의에 매우 감동됐습니다. 어서 내 차를 리용하시오. 내 짐작에도 오래 걸릴것 같지는 않소.》

《각하, 그럼 기다려주겠습니까?》

스미스는 색이 밝아지는 유종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한잔 하고 가시오. 본관은 언제나 현선생의 복무태도를 높이 가하오. 양선생은 그를 부러워하는 눈치인데 바라는것이 무엇인지 말해보오.》 유종은 이렇게 물어주는것이 감지덕지했다.

그래서 인차 말이 나가지 않았다.

《농장주요? 아니면 기업가? 고급관직? 하긴 어느것이나 대단하지만 일단일장이 있소. 경험에 의하면 그중 랑패가 적고 파멸당할 우려가 없는건 토지요. 토지는 자본의 순환과 소득이 굼뜨고 단순한 약점은 있소. 해마다 어김없이 리득을 주는 젖소와 같은 부동산이요. 양선생, 어느쪽이든 선택하시오. 최상의것으로 해주겠소.》 스미스는 당장 황금소나기를 안겨줄듯이 흰소릴 쳤다. 정애는 황경에 잠겨들었다. 고급주택의 녀주인으로 등장할 날이 손에 잡힐듯이 가깝게 느껴졌다.

유종은 눈을 내리깔고 술잔만 내려다보고있었다. 스미스가 아무 보상도 없이 한자리를 내여줄 위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갈마든것이였다.

《양선생, 생각이 많아져서 그러오? 하다면 돌아온 다음 진지하게 협의합시다. 현선생 못지 않게 신세갚음을 하자는것이 본관의 진심이요.》

《알겠습니다.》

유종은 몸을 일으켰다.

정애가 밖으로 따라나왔다.

눅눅하고 찬 밤공기에 어깨를 옹송그린 정애는 못내 유감스러워했다.

《여보, 말이라도 해놓고 가실걸 그러시지 않아요?》

《글쎄, 왜서인지 말이 나가지 않더구만. 그럼 갔다오겠소.》 하고 유종은 에 올랐다.

정애는 남편을 바래주고 돌아섰다.

응접실에서 헛기소리가 났다. 답답하다는 신호같았다. 정애는 마음을 다잡고 쌀알이 둥둥 뜨는 식혜를 가져갔다.

스미스는 대접채로 마시고는 두팔을 쩍 벌리였다.

《좋습니다. 달고 상큼합니다. 코카-콜라이상입니다.》 몇마디 조선말을 옮기던 그는 이번에는 식혜를 거절하고 위스키를 요구하였다.

정애는 위스키를 따라주고 축음기를 틀어놓은 다음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나왔다. 축음기에서는 은근한 애상곡이 끝나고 녀가수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야음을 들었다.

정애가 무심결에 고개를 드니 스미스가 부엌문가에 서있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술내가 물씬 풍기고 파란 눈알이 반디불처럼 타고있었다.

유종이 탄 차는 바람을 일쿠며 인적없는 대통로를 달리였다.

둬시간전 밤중에 호출되여나온 유종은 《군정》의 과제를 받았다. 여유가 없어서 인원을 추가했다고 하나 동원된 통역원은 유종이뿐이였다.

그런데다 제기된 과제도 역번역과제이다.

그는 불쾌감을 애써 누르며 배당된 40매가량의 문서를 대충 훑어보고 급히 번역에 착수하려 하였다.

불쾌감이 자꾸만 앞서는데다 조선말을 영문으로 옮기는 역번역이여서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할수없이 그는 다른것들을 가져다 내용전반을 료해했다. 문건은 정기적으로 미국무성에 보내는 《미군정》처의 사업보고서였다.

유종은 그것을 보면서 《군정》의 현행실태와 제기되는 사항들을 알게 되였다.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가슴이 답답해났다. 줄 들어오면서도 외면해온 불길한 소식들을 공식문건에서 제 눈으로 직접 보고난것이다. 보고서의 내용과 조항들은 모두가 나라의 남쪽을 조속히 강점하기 위한 《군정》의 맹렬한 책동들로 가득차있었다. 더는 모르쇠할수 없게 된 그의 두눈이 사납게 곤두섰다. 어느 대목에서나 강점을 다그려는 《군정》의 계와 모략이 로골적으로 강조되고있었다.

그것은 남조선의 모든 재산을 《적산》으로 강탈해서 경제의 기간부문들을 미국재벌들에게 예속시키는 한편 그중의 일부를 《불하》해서 앞잡이들을 어용기관기업소들에 인입시키는데서도 표현되고있었다. 《군정》은 남에도 마 자주권이 행사되는듯이 가장하려고 괴뢰정권을 조작하고있는데 그것이 각종 파벌들과 야심가들의 준동으로 진통을 겪고있었지만 검질기게 진척시키고있었다. 또한 《군정》과 군부가 전략적요충지들에 북침을 위한 군사기지들을 거미줄처럼 늘이는 동시에 군사기지촌주민들에게 불량품들인 밀가루와 통졸임들 강매하면서 환심을 사려고 날치고있는것이다. 결국 미국은 《해방자》의 탈을 쓴 흉악한 침략자, 잔악무도한 강점자였다.

(나는 어째서 이제 비로소 미국의 정체를 알게 되는가?)

문득 그동안의 자기 생활이 더듬어졌다.

교단에서 내쫓기고 화물역인부로 전락되였던 비참한 처지, 그러다 졸지에 《미군정》의 통역관으로 된 《행운》, 그 과정에 소시민적인 야욕이 움트고 남의 덕으로 횡재하려는 탐한으로 변질되였던것이다. 그러니 이런 자기로서 세상일을 어떻게 바로 수가 있었으랴.

유종은 미국에 대한 미련과 유혹의 함정에 깊이 빠진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불현듯 안해생각이 났다. 자기처럼 미련과 유혹의 함정에 빠진 안해였다. 유종은 한시바삐 안해에게 그것을 깨우쳐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유종은 서둘러 일을 끝내고 집으로 향했다. 주연상은 음식그릇들이 널려있는 그대로인데 안해가 보이지 않았다. 스미스도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생각에 마음이 황황해진 유종은 이곳저곳 둘러보다가 옆방에서 자고있는 애들을 깨웠다.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던 애들은 안해가 어디 있는지, 스미스가 언제 돌아갔는지 전혀 모르고있었다.

(대체 이 밤중에 어디로 간것인가?)

양유종은 불길한 생각이 가슴깊이 스며드는 바람에 안절부절 못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그는 동틀무렵 혹시나 해서 처형을 찾아 집을 나섰다. 아침밥을 짓던 정녀는 그의 말을 듣고나서 아연해마지 않았다.

《우리 정애는 어디에도 찾아다닐 사람이 아닌데… 스미스에겐 알아봤어요?》

《아직… 이제 집에 다시 가보구 안해가 돌아오지 않았으면 스미스에게 찾아가겠습니다.》

양유종은 발길을 돌리였다. 집에는 부모를 기다리는 아이들뿐 정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양유종은 아이들에게 어제 남은 음식으로 식사를 하라고 이른 《군정》으로 달려갔다.

《오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내가 돌아올 때 부인이 나를 바래주었는데…》

스미스는 이상하다느니 안됐다느니 하는 소리까지 했다. 자기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어조였다.

《참사관각하, 내 오늘은 아무래도 시간을 좀 받아야 하겠습니다. 안해의 행처를 도무지 알수 없으니…》

《그렇게 하시오.》

시간을 받아낸 양유종은 안해의 행처를 찾아 온종일 집에 자주 들어가보군 하며 이 거리, 저 거리 샅샅이 훑었으나 헛물만 켰다. 녹초가 된 그는 날이 어두워졌을 때 《군정청》으로 무거운 발길을 돌리였다.

통역관실 젊은 서기가 그의 앞을 막았다.

《선생은 들어갈수 없습니다.》 《그건 무슨 소리요?》

《선생은 통역관직에서 해임되였습니다.》

《뭐라구?!》

《미국무성으로 보낼 문건에서 엄중한 정치적오역이 발견되였기때문입니다.》

《오역? 사관한테선 무슨 말이 없었는가?》

사관님은 선생이 오면 돌려보내라고 명령했습니다.》

《명령했다.》 유종은 솟구치는 분노로 온몸을 떨었다.

《유종선생, 진정하고 들으십시오. 지금 쓰고있는 집을 닷새안으로 내놓아야겠습니다. 미국에서 건너온 세대가 들게 되여있습니다.》

《뭐, 집까지…》

《선생은 나가서도 명심할게 있습니다. 군정내부의 비밀을 엄수해야 합니다. 선생도 서약한 규정인만치 더 강조하지 않겠습니다.》

유종은 더 듣고만 있을수 없었다. 그는 서기실을 뛰쳐나갔다. 출입증이고 뭐고 스미스의 방에 올라가서 그에게 따지고들 생각이였다.

하루도 안되는 사이에 너무나도 심한 타격과 충격을 받은 유종은 현관보초의 단속을 요행히 넘기였으나 마주 달려나온 두명의 미군헌병에게 걸려 강타를 당하였다. 헌병들은 유종의 늘어진 팔을 비틀어잡고 밖으로 끌어다 내던지였다.

《다시 그러면 헌병대맛을 보이겠소.》 한놈의 헌병이 권총집을 탁탁 며 위협하였다.

유종은 길바닥에 넝마짝처럼 쓰러졌다. 뿌연 먼지가 옷가지를 더럽히고 벗겨진 구두 한짝이 저만치에서 나딩굴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군정청》 앞거리에 쓰러진 신사복차림의 유종이를 놀람과 의혹에 눈길로 여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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