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장  아버지와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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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대학야간학부에 다니는 리성아는 휴일날 촌에서 올라온 아버지를 데리고 남산길을 올라갔다. 성아가 보자기로 싼 망태기를 들었다. 그들은 도중에서 속이 빈 전대를 메고 현구댁을 찾는 촌로인을 만나 함께 걸었다. 통성을 한 장년의 리운학과 권준범로인은 같은 농군들로서 자기 지방의 농촌형편을 울분속에 개탄하면서 덩실한 저택의 정문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류랑아들과 걸인들의 무단출입을 단속하는 정원지기한테 걸려든것이다.

이사할 때의 면목으로 성아만 정문을 통과할 승인을 받았다. 얼마에 현구네 식솔이 마주 달려나왔다.

《권아버님! 원로에 찾아오셨군요!》

현구부부는 권준범의 팔을 부둥켜잡으며 기뻐 어쩔줄 몰라했다.

《아버님, 수고로이 찾아주셨군요.》

이번에는 수일이가 리운학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그다음 현구부부는 초면인 리운학에게도 정중히 인사하며 손님들을 응접실로 안내하였다.

촌늙은이들은 화려하고 으리으리한 응접실에 선뜻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현구내외가 로인들에게 쏘파를 가리키며 편히 앉으라고 권했다.

늙은이들은 서로 마주 보기만 하다가 권로인이 먼저 쏘파가 아니라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우리 농군들에게는 이런데가 제격이라니.》

두 농군의 갑작스런 행동에 현구부부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농군들이 실어온 흙냄새와 땀내가 화려한 응접실의 공기를 바꿔놓았다. 그들의 고달픈 인생자욱은 얼굴주름살들과 흙물이 오른 람루한 옷가지들에 슴배여있었다. 산간역에서 헤여진 권로인의 정상은 더한 한심해진것 같았다.

《현선생, 이 고래등같은 집이 선생의 이요?!》

권로인은 응접실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물었다.

《뭘 좀 해주었더니 이 집을 쓰라고 하더군요.》

현구는 어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거니, 그렇거니.》 권로인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였다.

《머리에 든것이 많으니 세월덕을 본셈이구려. 허-허-》

권로인은 무랍없이 대해주며 옛정을 소중해하는 현구네를 보고 긴장을 풀었다.

정녀가 수를 시켜 두 어른을 선선한 로대로 모시게 하고 현구방으로 이끌었다. 하고는 옷장에서 옷들을 꺼내놓았다.

《이걸 입으세요.》

《실내복이 어째서… 집안인데…》

《쏘파를 거절하는걸 보셨지요. 그분들이 어색해하지 않게 하자요.》

현구는 수긍된듯 황토물이 오른 옷을 받아입었다.

《이건 산에서 입던거로구만.…》

《권로인님이 그 옷을 보시면 산생활을 회상하시겠지요. 오죽이나 고마우신분이신가요!

어서 빨리 갈아입으세요. 난 로인님들에게 권할 음식들을 준비해야겠어요.》

정녀는 수와 함께 성의껏 만든 음식들을 로대로 날라왔다.

《별게 없어요. 많이들 드세요. 반가운분들을 만나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정녀가 권로인과 리운학의 앞으로 음식들을 당겨주었다.

식사가 시작되고 잔이 둬순배 돌았을 때였다. 권로인이 빈속에 술 마셔서인지 그 자리에 쓰러졌다. 권로인을 침대로 옮긴 현구는 운학이와 술잔을 나누었다.

《수일군의 춘부장어른, 잔을 받아주시오. 아드님의 원을 크게 받고도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운학은 감면회도 한번 못하였고 출옥한 수일에게도 오늘에야 찾아왔다면서 대단히 미안해하였다.

《무슨 말씀을… 이젠 다 지나간 일인데…》

《아니웨다. 이 집 아들 수일군이 우리 농군들에게 큰힘을 주었습니다.》

《됐습니다. 자, 잔이나 냅시다. 없는것들의 객기인데 뭘 자꾸 그러십니까?》

《인사가 늦어졌다고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량해하십시오. 땅문서에 목이 걸려 본의아니게 늦어졌지요.》

운학은 큰숨을 내쉬며 말을 계속했다.

《선생은 아시는게 많겠는데 말씀 좀 해주시오. 세상에 이런 법도 있습니까. 북의 농군들은 소원을 성취하고 만복을 누리는데 여기서는 예나 다름없이 땅의 머슴으로 되고있으니 이런게 미국법인가요. 예- 》

현구는 말을 못했다. 아들도 북을 동경하며 미국을 했는데 운학이 역시 같은 소리를 하는것이였다. 내가 정말 잘못 생각하고있는것이 아닌가. 아니, 그렇게만 생각할게 아니다. 미국사람들이 지난날 토지문건들을 수복정리하고있는것은 바로 토지문제를 바로잡기 위해서 아니겠는가. 그러니 여기 남쪽에서도 불원간 농군들의 리익에 맞게 토지문제가 해결되게 될것이다.

운학은 술잔을 들지 않고 말을 그냥 했다.

《선생, 우리네 하촌바닥의 기막힌 사연을 좀 들어보시소.》 하고는 자기네가 다섯해나 굶주리며 개간한 진땅에서 소작을 살고있다고, 그 과정에 년로한 아버지를 잃었다고 비분에 넘쳐 이야기하였다.

현구는 화제를 돌리려다가 수건을 벗어 땀을 씻는 운학의 이마에서 상처자리를 발견하였다. 갈구리같은 상처는 몹시 이 익었다.

《성아 아버님, 이마상처가 그때 상처가 아닙니까?》

《예?! 선생이 그걸 아시는가요?》

《알아도 잘 알고있지요.》

팔년전의 일이다. 현구는 쯔시마처장을 따라 주원군 하촌바닥의 개간지를 측량하러 갔었다. 바닥마앞으론 장마철마다 물에 잠기는 각시진펄이 널려있었다. 진펄에 류별난 이름이 붙게 된데에는 이런 전설이 전해지고있었다. 이 고장으로 시집온 새각시가 술만 마시면 행질을 하는 랑군이 무서워 야밤도주하다가 진펄에 빠져죽었다는 전설이였다.

마을에서는 각시진에 배수로들을 째고 강을 돌려서 근 20정보의 논밭을 일쿠었다. 다섯해에 걸치는 공사과정에 여러사람들이 비명에 죽어갔다.

《총독부》가 개간지를 《국토》로 몰수해서는 지주에게 팔아넘긴것이다.

측량하는 날, 싸움이 붙었고 항의하는 젊은 농군에게 지주가 박달나무지팽이를 휘둘렀다. 젊은 농민은 그 자리에 쓰러졌고 어린 소녀가 그옆에서 울며 발버둥을 쳤다. 현구는 그 참상을 목격하고 지주에게 당신도 사람인가고 단죄하며 따지고들었다. 오늘날 《미군정》하에 와서도 지주가 그 개간지를 끼고 내놓지 않는다는것이다.

현구는 생각이 깊었다.

순박하고 근면한 농군들이 당하고있는 가혹한 피해와 고통이 가슴 아프게 했다.

불시에 운학은 무릎을 다.

《자, 이거… 이 미련한 놈이 미처 알아보지 못했군요. 그때 측량대를 걷어쥐고 지주놈을 닦아세운 측량기사가 바로 선생이신걸.》 하고 현구에게 잔을 내밀었다.

《선생, 받아주시오. 오늘날에도 우리곁에 그런분이 있어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운학은 이러고나서 《동척》을 대신한 신한공사와 지주들이 땅을 몽땅 지하다나니 농군들은 허리를 펴지 못한다고 통탄했다.

(신한공사와 지주들이?… 그런데 난 신한공사의 토지담당 국장이 아닌가?)

현구의 마음은 괴로왔다. 제딴엔 토지문서들을 수복정리하면 지난날 잘못된 토지소유관계가 달라지리라 생각했고 바로 그래서 그 일에 정열을 쏟아부은것이였다. 그러나 일은 생각처럼 되고있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건 잘못된 처사이니 바로 잡히게 될것입니다.》 현구는 이렇게 말했지만 왜서인지 그것이 막연해보였다. 그만큼 어깨가 무거웠다. 운학은 머리수건을 고쳐쓰고 로대를 나서며 딸 성아에게 물었다.

《이 야, 아버지가 가져온건 어떻게 했느냐?》

운학은 사모님이 손질하기로 했다는 딸의 대답을 듣자 선생이 언제 그런걸 해보았겠느냐면서 원으로 나갔다. 털을 말끔히 뜯어낸 검정닭에 찹쌀과 만삼을 재웠다.

그것을 지켜보는 수일의 마음은 뜨거워올랐다. 구차한 살림인데도 자기 건강을 념려하여 제 손으로 보약을 만드는 운학은 순박하고 직심스런 실농군으로서 남다른데가 없지 않는 사람이였다. 남존녀비관념이 우심한 촌에서 아들도 아닌 딸자식을 대학공부까지 시키는가 하면 해방에는 이전처럼 눌리워 살아서는 안된다고 투쟁에 앞장서고있는데서 나타났다.

운학은 닭곰을 밀봉한 오지단지를 정녀에게 넘겨주고는 수일에게 말을 건네였다.

《수일군, 빨리 몸을 회복하게. 동생인 심종안군이 우리 군 청년부장으로 활동하고있네.》

《종안이가요?!》 수일의 두눈이 번쩍거렸다.

《그 샌님이 군의 청년부장이라구요!》

수일의 눈앞에 해사하고 색시처럼 곱게 생긴 종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친구 제법인데, 보고싶군요.》

《청년부장은 그새 잡혀갔다왔지만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네.》

《그렇습니까! 샌님이 단련되는군요. 저의 인사를 꼭 전해주십시오.

그무렵에 성아가 달려왔다.

《수오빠, 아버님께 저의 인사를 말씀해주세요. 글쎄 저에게 농촌처녀의 꿈을 꽃워주겠다면서 주간학부로 돌려주겠다고 하시지 않겠어요. 》

《그렇소! 고마운 일이구만. 내 말하겠소.》

한편 응접실에서는 쓰러졌던 권로인이 깨여나자 활기를 띠였다. 정녀는 로인을 달래여 팔걸이의자에다 앉히였고 수는 식탁우에 갖가지 음식을 차리였다.

《아버님, 제 집처럼 생각하시고 많이 드세요. 저희들은 아버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있습니다.》 정녀가 하는 말이였다.

현구는 로인에게 은제품술잔을 권했다. 그들은 시련에 찼던 산생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음식들을 축내였다.

《아버님, 이 기름튀기도 맛보세요.》 정녀가 음식그릇을 권로인 앞으로 옮겨놓으며 친정아버지를 대하듯 공대했다.

현구는 그런 안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로인님, 십여년만에 고향을 찾아온 감회가 대단했겠습니다. 그새 많이도 변했겠지요.》

《뭐라고 해야 할지…》

권로인은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었다.

권준범로인의 고향은 령남밀양지방에서도 동쪽으로 치우친 심심산골이였다. 마을뒤 소소리높은 천황산을 주봉으로 산골짜기들과 릉선들을 따라 뙈기밭들과 뙈기논들이 널려있었다. 골이 깊고 수림이 울해서 한해잡고 드나드는 길손들도 드물었다. 그러하던 산간촌락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것은 천황산에서 솟는 령험한 약수의 덕이였다.

늙은 애비가 약수를 쓰고 마누라를 얻게 되였다느니, 아이없던 부인이 떡돌같은 아들을 보았다느니 하는 소문이 퍼지면서 각지의 사람들을 불러들이였다.

그것이 마을의 재난으로 될줄 그 누가 알았으랴.

불로장생의 보약으로, 난의 병도 고친다는 신묘한 특로 하여 약수가 마을에 행운이 아니라 참담한 불행을 가져다주었던것이다. 처음에는 왜놈들이 숲속에 천막을 쳤고 얼마에는 돌아가며 시추기들 박더니 산속에서 약수말고도 온천지를 찾아내였다. 하루는 숱한 관리들이 쓸어나와 황산일대를 왜놈들의 전용료양지로, 별장구역으로 선포하고 구역안의 원주민들을 추방하였다. 생벼락을 맞은 마을에서는 아우성이 터졌고 싸움이 붙었으나 적수공권의 농군들은 얻어맞고 잡혀갔으며 죽어갔다.

졸지에 대대로 살아오던 고향산천을 지게 된 농군들이 줄줄이 류랑걸식의 길에 올랐다. 왜놈경찰에게 맏자식을 빼앗긴 권로인은 울분 참을길 없어 유복자를 가진 며느리를 데리고 중부조선산간오지에 발을 붙이게 되였던것이다.

때문에 나라가 해방되자 맏자식의 복수도 하고 강탈당했던 땅도 찾으려고 고향으로 달려간 권로인이였다. 세상은 바뀌였지만 달라진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살던 집이 별장구역의 경비진에 막히였는데 다른데 거처할 곳도 없었다. 밭은 혈육들은 모두 별세하였고 먼 척들도 초근목피로 근근히 그날그날을 연명해가고있었다. 로인은 고향땅에 엎드려 몸부림을 다. 그러다가 친척집에 자리를 잡은 그는 차고온 도끼를 틀어쥐고 토지분쟁에 뛰여들었다. 마을에서 쫓겨난 농군들이 그동안 부치던 왜놈의 소작지를 대토로 차지하자고 나섰던것이다.

헌데 이번에는 또 다른 강탈자들과 맞다들었다. 이자들은 왜놈들의 수탈지들도 《동척》의 소유지들과 함께 신한공사의 관리로 이관됐다면서 농군들이 얼씬하지 못하게 했다.

권로인은 분쟁이 오래 걸릴것 같아 산의 가족부터 데려오려고 했으나 그 길마저 38선에 의해 차단됐줄 어이 알았으랴. 로인은 할수없이 돌아서 가는길에 현구네 집에 들린것이다.

권로인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였다.

현구와 정녀도 한동안 로인의 기구한 운명과 가엾은 정상에 눌려 입을 열지 못하였다.

로인은 고생스러워도 가족들을 데리고 떠났걸 잘못했다고 회했다.

《할아버지, 그렇게까지 길이 봉쇄되였는가요?》

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물었다.

권로인은 말도 말라는듯 흰머리를 들었다.

북행길은 전면적으로 차단되였다. 차길이고 인도이고 배길이고 모조리 국경이상으로 단절되였다. 곳곳에 조망이 설되고 미군순찰병들이 뻔질나게 돌아다.

통로는 오직 월남해오는 도주자들에게만 열려있었다. 일본이나 남방에서 돌아가는 귀향자들에게도 용수가 없었다. 놈들은 월북자들을 미군용막에 죄인처럼 가두었다가 화물자동와 렬차에 실어 남쪽으로 추방하였다. 조상제사에 왔던 자손들과 친척방문자들도 오도가도 못하고 한지에 나앉아있었다.

《할아버지, 기운을 내십시오. 가족들은 북에 있으니 복을 누릴겁니다.》

수일이가 눈물을 닦으며 말하였다.

《옳거니. 이 늙은이도 알고있네. 북에 있는 그 애들이라도 복을 누려야지.》

가슴이 더워난 로인이 현구에게 눈길을 돌리였다.

《선생, 미군이 언제면 나가게 되나?》

권로인은 이렇게 묻고나서 미군이 어째서 이 땅에 기여들어 주인들 못살게 구는지 왜놈들 못지 않다고 욕질을 해댔다.

현구는 그 욕이 자기에 대한 타매로도 생각되였다. 스미스의 말을 빌면 북에서는 쏘련이, 남에서는 미국이 조선을 도와준다고 했다. 도와준다는것은 저희들이 통치한다는것이 아니라 도움을 받는 사람들자신이 주인이 되여 제할바를 다하도록 한다는것을 의미할것이다. 북에 대한 소식들을 들어보면 거기에선 확실히 그렇게 되고있는것 같다. 여기 남쪽에선 《미군정》이 권력을 틀어쥐고있는것이다. 그렇다면 《미군정》의 신임을 받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고관이 되고 《군정》이 시키는 일에 몸을 적신 나에 대해선 어떻게 봐야 하는가? 일신상의 문제와 집안의 골치거리들이 해결되자 미국에 유혹된게 아닌가? 정녕 그렇다면 나도 미국과 함께 타매되여야 할 놈이 아닌가?

한동안 가슴저린 생각에 잠겼던 현구는 내심 머리를 저었다. 여기는 북에서와 달리 혼란된것이 너무도 많은것 같다. 그걸 수습하지 않고서야 그 어떤 렬강이든 용빼는 수가 있으랴. 토지문제 하나만 놓고봐도 얼마나 란되여있는가. 나는 빨리 이걸 수습해서 권로인과 같은 사람들이 제땅을 찾아가지고 마음껏 농사를 짓도록 해야 한다.

《로인님, 고정하십시오. 여기 남쪽은 아직 몹시 란된 상태입니다. 이걸 수습하자면 시간이 걸려야 합니다.》

권로인은 현구의 말은 들은둥만둥 제 할 소리만 했다.

《그것들은 왜 들어와가지구.… 왜놈이구 미국놈이구 그것들이 있으면 우린 죽은 목숨이웨다.》 하며 권로인은 몸서리를 쳤다. 침묵이 흘렀다. 현구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로인님, 올라오신김에 로독도 푸시면서 서울구경이나 하고 내려가십시오. 》

는 자기가 로인을 모시고 경원과 동물원도 구경시키고 한강 배놀이도 시키겠다고 하였다.

《고마우이, 고마우이. 내겐 겨를이 없네. 땅이 없는 농군에게 무슨 생활이 있고 락이 있겠나.》

로인은 토지분쟁에 자기가 빠질수 없다고, 땅을 찾고 꼭 다시 오겠다면서 떠나려 하였다.

정녀가 로인의 팔을 잡으며 만류하였다. 하고는 친정아버지용으로 준비했던 천을 꺼내여 밤새 로인의 옷을 지었다.

다음날 정녀는 푸짐하게 꾸린 도중식사를 현구에게 들려주었다.

《수고스럽지만 당신이 역에 나가서 바래드리세요.》

《그러지.》

정녀는 새옷을 입은 로인과 헤여지는것을 몹시 아쉬워했다.

《아버님, 오자마자 떠나시니까 마음이 좋지 않군요. 먼길에 몸조심하세요.》

정녀는 눈굽을 닦았다. 꼭 친정아버지와 헤여지는 심정이였다. 가정도 없고 땅도 없고 집도 없는 로인이 장차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험한 세월에 그 누가 늙은 몸을 부양하겠다고 하겠는가?

《아버님, 정 형편이 어려우면 우리 집으로 올라오세요. 제가 모시겠어요.》

정녀는 진심으로 말했다.

《선생! 다 늙은 내가 뭐라구…》

권로인은 끝내 눈물을 흘리였다. 현구는 불룩해진 전대와 꾸레미를 든 아들딸과 함께 역전까지 나가 권로인을 바래주었다.

1

4

 

안락의자에 몸을 잠근 현구는 책을 펴놓은 명상에 잠겨있었다.

편안히 앉아 벽면을 채운 책장들과 장식용그림들을 바라보느라면 자기 모르게 떠오르는 환상세계에 자주 잠겨드는 현구였다. 원시림속으로 피신했던 몸이 일약 남산저택의 주인으로 둔갑하고보니 지금 생활에 쉽게 익숙되지 않아 그런것 같았다.

낮에 룡산의 동서네가 다녀갔었다.

《형님, 집이 그때 돌아볼 때보다 더 훌륭하군요.》

유종이가 소리없는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만시름을 놓게 됐습니다. 신한공사국장까지 되였으니 정말 기쁜 일입니다.》

진심어린 그 말에 현구의 마음도 사뭇 기뻤고 감회가 새로왔다. 해방이 고생많던 그에게 복을 안겨주었던것이다. 그러나 며칠전 가슴에 깊은 적을 남기고 간 운학이와 권준범로인을 생각하면 결코 기뻐만할수 없었다. 농군들에게 기쁨이 없는데 토지관계국장인 자기에게 무슨 참된 기쁨이 있는가. 그들의 비참한 처지를 생각하면 오히려 꼭 죄 짓고 사는것만 같았다.

도대체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그리고 스미스와 신한공사는?

현구는 자꾸만 깊어지는 의혹과 함께 자신을 반성하였다.

나에게도 잘못이 많다. 나는 토지문서들을 수복정리하는데만 신경 쓰며 노력을 바쳤을뿐 토지문제가 해방을 맞이한 농군들의 리익에 맞게 해결되고있는지 알아보려조차 하지 않았던것이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현구는 이제 곧 구체적인 현지실태를 료해하고 대책안 만들어 스미스에게 제기해야겠다고 속다짐했다.

언제 들어왔는지 안해가 곁으로 다가왔다.

《여보, 김성렬선생님의 소식을 들으셨어요?》

(김성렬선생?…)

은사을 방문한지가 오래된데다 선생이 부탁한 일제의 토지수탈죄상록 집필도 중단한 까닭에 현구의 두눈은 갑자기 크게 떠졌다.

《들은게 없소. 무슨 소식이요?》

《저도 부인한테서 들었는데 경찰청에서 선생님을 끌어갔대요. 벌써 열흘이 지났는데도 감감 무소식이라는군요.》

《선생님께서 경찰청으로? 무슨 일로?》

가슴이 철렁하여 현구는 뒤말을 하지 못했다.

《미군철수를 주장하셨고 북을 양하셨대요.》

《북을 찬양한게 무슨 죄가 된다구.… 경찰청에서 일을 잘못했구만.》

《한번 가보세요. 경찰청에 아는 사람도 있지 않아요.》

《아는 사람? 그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나 하고 그런 말을 하오?!》

현구는 버럭 성을 냈다.

《그럼 모르는척 할수 없지 않아요? 정말 뜻밖이군요?》

정녀는 이 말을 남기고 서재에서 나갔다.

(전대산이, 그도 스미스와 밀착된게 분명한데 그에게 말하느니 차라리 스미스에게 부탁하는편이 낫지.)

현구는 기회를 보다가 스미스에게 부탁하리라고 맘먹었다.

가슴이 아프고 머리가 어지러워진 현구는 이날 정원의 꽃밭으로 나갔다. 그가 한동안 만발한 초밭에서 풀을 뽑는데 아들이 다가왔다.

《아버지 나오셨어요.》

《약은 먹느냐?》

《예. 좋은 약 같애요. 눈에 띄게 알려요.》

수일은 웃는 으로 말한 운학에게서 들은 전치도의 죄행을 이야기했다.

《음, 넌 나보다 더 자세히 알고있었구나. 지리산에 한번 가보긴 해야겠는데…》

《혹시 김성렬선생님때문에…》

《너도 그 선생을 아느냐?》

《유명한 력사학자이신데 왜 모르겠어요. 선생님의 론문도 몇 읽었어요. 나는 앞으로 그 선생님한테서 력사를 배우려고 해요.》

현구의 미간에 굵은 고랑이 이였다. 아들이 력사학을 공부하면 자연히 민족문제에 관여하게 되는데 그것이 매우 심중한 문제로 제기될수 있었던것이다. 현구는 머리를 저었다. 하면서도 선생이 경서에서 한시바삐 풀려나오도록 손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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