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장 아버지와 아들
1
승용차는 산모퉁이를 감돌며 남산길을 달리고있었다. 울창한 수림속의 청신한 공기와 바람결에 실려오는 꽃향기가 명산의 유원지를 방불케 하였다.
현구는 승용차가 너무 느리게 달리는듯싶었다. 호화로운 저택에서 안해가 웃음짓고있는 모습을 한시바삐 보고싶었던것이다. 동시에 미국류학통지서를 내흔드는 아들의 기쁨에 넘친 모습도 눈앞에 그려보았다.
이윽고 승용차는 현관앞에 멎었다.
일전에 참관할적엔 웬 영문인가 싶었던 저택에 현구는 주인으로 들어섰다.
《주인님, 돌아오셨군요. 기다렸습니다.》
늙은 관리원과 중년의 정원지기부부가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하였다. 그다음 식료지함을 응접실로 날라갔다.
《부인님은 늦어서 오시군 한답니다.》
늙은 관리원이 배허벅에 두손을 모아붙이며 아뢰였다.
현구는 알겠다는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응접실로 들어갔다. 널직한 실내의 장식들과 가장집물들이 한결같이 정갈하고 윤택하였다.
현구는 이렇듯 큰 집을 차지하고보니 《장원급제》라도 하고 돌아온듯 했다. 조급한 마음으로 처자들이 어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그는 바람도 쏘이고 처자마중도 할겸 밖으로 나갔다.
어느덧 해가 지고 정원에는 저녁 어스름이 깃을 폈다. 락조의 여광마저 사라진 먼 하늘끝을 바라보며 정원을 거니는 현구의 심정은 뭐라 형용할수 없으리만치 감회가 깊었다. 그때 손에 불룩한 가방을 든 녀인이 길가의 보호책을 따라 올라오고있었다. 안해 정녀였다.
여름적삼에 깜장치마를 입은 안해는 발끝을 내려다보며 오고있었다. 그 모습은 남산길에 어울리지 않았다. 앞으로 안해의 옷차림에 마음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앞세우며 현구는 안해를 반겨맞았다.
《이제야 오우. 그동안 수고가 많았겠소.》
《아이, 당신이 돌아오셨군요.》 하며 반색하는 정녀의 눈에 물기가 핑 고여올랐다.
현구는 안해의 손에서 가방을 넘겨받으며 물었다.
《무슨 가방이 이리 무겁소?》
《교수안작성에 참고할 책들이예요.》
《건강도 좋지 못한데 앞으로는 무거운 짐을 들고 다니지 마오. 필요하면 승용차를 타고 다니오.》
《승용차라니요? 저같은 녀자가 어떻게 승용차까지 타고 다니겠어요. 》
《원 당신두, 사서 고생할게 있소. 우리도 호강해봅시다. 그건 그렇구, 집이 마음에 드오?》
정녀는 대답없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저녁식사준비는 정원지기녀인이 도와주었다. 둥근 식탁우에는 정녀가 만든 음식들과 함께 스미스가 보낸 지함속의 바나나와 귤도 올라있었다.
《대궐같은 집에다 진수성찬이라… 당신의 몸단장만 어울렸으면 그저 그만이겠소.》
현구는 안해가 부어주는 위스키를 마시며 기분이 들뜬 소리를 하였다. 《여보, 이걸 먹어보오. 우리 언제 이런걸 먹어보았소?》 하며 현구는 안해의 손에 바나나를 쥐여주었다.
《천천히 먹겠어요… 입안이 헐어서…》
《그럼 그렇게 하지.》
저녁식사를 마친 현구와 정녀는 응접실에 마주 앉았다. 선풍기가 돌아가며 더위를 가셔주었다.
《여보, 수일인 왜 아직 집에 오지 않소.》
현구는 담배를 피워물며 물었다.
《제 잘못이 커요.》
《당신 잘못이 크다는건?》
《수일인 공장에 나가서 오지 않아요.》
《응?!》
삽시에 현구의 두눈섭이 곤두섰다.
《내가 없는새에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소? 말좀 해보구려.》
정녀는 눈을 내려깔며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입을 열었다.
얼마전에 산마루집으로 낯모를 두사람이 찾아왔다. 그들은 《미군정청》총무국에서 발급한 남산저택불하증을 정녀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면서 저택에는 가장집물과 실내가구들이 일식으로 구비되여있으니 애용품이나 가지고 이사를 하라고 하였다.
《갑자기 이사라니요?》 정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면서 남산저택구경이 우연한게 아니였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놀랍게도 달라진 남편의 처지가 느껴와 가슴이 울렁거렸다.
《저 미안하지만 주인이 돌아오신 다음에…》
《특혜인데 바쁜분을 기다릴게 있습니까. 래일 이사합시다.》 하고 두사람은 떠나갔다. 옆에 있던 수일이와 수희도 영문을 몰라 퀭한 눈길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어머니, 난 안 가겠어요!》
별안간 수일이가 격하게 소리쳤다.
《그러지 말아. 아버지가 출세한것 같은데 그러면 되겠니.》
어정쩡한 기분속에서도 정녀는 아들을 따뜻이 타일렀다.
《아무튼 난 싫어요. 어머닌 미국놈을 따라갈 생각이예요?》
《수일아, 너 별난 소리를 하는구나. 미국놈을 따라갈 생각이라는건 무슨 말이냐? 아무 말이나 망탕하면 안된다.》
《내 그럴줄 알았어요.》
수일은 이마살을 잔뜩 찌프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였다. 그는 김성렬선생의 부탁을 받고 쓴다는 아버지의 회상록을 보고 안심했던 자신이 분했다.
정녀는 마음이 그리 내키지 않았으나 주섬주섬 물건들을 싸기 시작했다. 시집올 때의 례장감인 놋주발과 토기시루 그리고 농짝의 옷가지들을 보자기에 쌌다. 수희가 조력을 했다. 수일은 제 방에서 무엇을 하는지 얼씬도 하지 않았다.
문득 건너방에 갔던 수희가 뜻밖의 말을 했다.
《어머니, 오빠가 안 보여요.》
《뭐라구?!》 정녀는 다급한 마음으로 수일의 방문을 열었다. 빈책꽂이만 책상우에 있고 책들은 하나도 없었다.
정녀는 대문밖으로 달려나가면서 아들을 원망하였다.
그는 자신을 걷잡지 못했다. 집이사와 아들 탈가는 가정이 생겨 처음으로 일어난 일이였다.…
《무슨 애가 그런지… 제가 이사차비를 하느라 놓쳤어요.》
《음!》 현구는 연방 군기침을 톺으며 침실로 넘어갔다. 오래간만에 차례진 안식처였다.
침대는 폭신하고 얇은 누비이불은 화려하고 가벼웠다. 하지만 현구의 마음은 무거웠다.
(그 앤 미국어른들이 일본쪽발이들과 다르다는걸 모르거던.)
현구는 이튿날 저녁 정녀를 조용히 불렀다.
《수일의 처사를 생각하면 섭섭하구만. 그래 당신은 날 어떻게 보오?》
정녀는 말이 없었다. 생활이 개선된건 기쁜 일이지만 기쁘게만 생각할수 없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던것이다.
《당신도 수일이처럼 나를 보는게 아니요.》
《…》
《미국인들은 나의 전문지식과 경험을 알아주었고 값높이 일러주었소. 그래 왜정때라면 생각이나 할수 있는 일이요. 수일은 그걸 모르거던.》
현구는 생각이 달라진듯 눈을 깜빡거리는 정녀에게 이런 소리도 하였다. 자기는 《미군정청》도 《일본총독부》와 같아서 처음엔 문서고에서 일할 생각이 없었다. 감옥면회를 주선한 전대산에게 인사차로 찾아간것이 계기로 되여 《군정》참사관과 알게 되였고 그후 문서고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혼란된 토지문건들을 수습하면서 왜정때의 강탈내막을 고발하여 바로잡도록 하는 한편 토지문제를 농군들의 리익에 맞게 해결해보자고 힘을 썼다. 그뿐아니라 그 일을 통하여 얻게 된 토지강탈자료들을 김성렬선생의 청탁으로 집필하던 일제의 죄상록에 인용하려고 생각하였다.
《여보, 어떻소. 나와 같은 실력을 가진 사람만이 할수 있는 처사라고 생각되지 않소. 물론 그렇게 함으로써 수일을 석방시켜준 스미스에게 보답하려는 마음도 없지 않았소. 하지만 내 본심이야 어디 가겠소. 스미스는 왜정때 잘못된 그 모든것들을 바로잡고 조선정부가 서게 되면 미군이 철수한다고 했소. 그럼 이 땅엔 그 어떤 외부세력도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오. 완전한 우리 세상이요.》
정녀는 얼굴빛이 다소 부드러워졌다.
《저는 당신의 그런 마음은 전혀 모르고있었어요. 남조선의 토지관계가 왜정때와 같이 된다는 소문이 돌더라니…》
《그랬을거요. 어쨌든 수일을 빨리 집에 데려오기요.》
《알겠어요. 제가 데려오겠으니 잘 타일러주세요. 이젠 나이가 들었다고 제 밸대로예요.》 하고 정녀는 수일의 몸을 빨리 추세워서 대학공부를 시킬 속심을 내비쳤다. 현구는 몹시 기뻤다.
《나도 당신과 같은 생각이요. 그 앨 대학공부를 시키면 집안도 편안하고 앞날도 더 활짝 열리게 될거요.》
2
수일의 공장을 찾아간 정녀는 깊은 생각에 잠겨 합숙방에 혼자 앉아있었다.
지식을 중시하는 그에겐 공장의 모든것이 어수선하고 거칠어보였다. 일전에 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번에는 수희와 함께 찾아왔는데 오늘도 수일을 데려갈 승산이 보이지 않았다.
수일은 만나자마자 성을 내며 훌쩍 뛰쳐나갔는데 뒤따라간 수희한테선 아직 소식이 없었다.
합숙은 창고를 내고 꾸렸는데 수일이가 거처하는 마지막방은 비여있었다. 모두 모임들에 갔는지 아니면 정녀에게 자리를 내주었는지 알수 없었다. 벽에 걸려있는 옷가지들에선 땀내가 코를 찔렀다. 저녁노을이 방안을 붉게 물들이고있었다. 낮일을 끝낸 기계들은 멎어있었으나 공장안의 공기는 팽팽했다.
투박한 구두발소리가 구내에 울리고 이따금 멱따는것 같은 악청이 귀청을 때리였다. 합숙의 안벽에는 찢어버린 벽보우에 다른 벽보들이 덧붙여있었다. 한쪽에서 붙이면 다른쪽에서 떼여버리는 싸움이 승벽내기로 벌어지고있는것 같았다.
점차 공장의 격렬한 분위기에 잠겨든 정녀의 가슴은 자기도 모르게 두근거렸다. 학교들의 반미구국투쟁에 비하여 공장의 기세는 일층 공개적이고 활동적인것으로 느껴졌다.
당시 남조선의 공장, 기업소들은 도망친 왜놈들의 피해로 하여 거의 페쇄상태에 있었다. 공장들이 파괴된데다 자재, 원료난, 판로난, 북과의 생산적련계의 단절 등으로 굴뚝들에 거미줄이 앉은지가 오래되였다.
그런데 《유한상공》서울공장만이 유독 움직이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두말할것 없이 《미군정》의 후원때문이였다.
《군정》의 줄을 타고 들어앉은 사장은 공장의 모든 력량을 각지 미군기지건설용 설비들과 군용차량수리정비에 집중하고있었다.
공장에 조직된 로조에서는 그것을 완강히 반대하였다. 로조는 해방된 조국의 민족산업을 시급히 복구하고 정비발전시키기 위하여 본래부터 해오던 광산설비제작과 광산기관차생산을 주장해나섰던것이다.
또한 임금인상과 8시간로동제, 해고반대와 로동안전시설들과 쌀을 달라고 요구하였다.
하지만 사장을 두목으로 한 관리측은 이구실저구실 대면서 공장이 번성해진 다음에 보자는 식으로 묵살하고있었다.
량자간의 대결은 나날이 치렬해갔다.
로조는 총파업을 선포하였으며 관리측에선 어용로조인 《대한로총》과 함께 로조를 란동집단으로 몰아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위협해나섰다. 고된 로동과 기아에 직면한 로동자들은 결사적으로 맞서고있었다.
한동안 그린듯이 홀로 앉아있던 정녀는 방안을 거두기 시작했다.
불현듯 좀전에 수일이가 분격에 차서 웨치던 말이 귀전에서 쟁쟁히 울렸다.
《어머니! 제가 역적의 자식이 되기를 바라시는가요.》
《이 자식아, 아버지를 그렇게만 보면 안된다. 사람은 겉만 봐선 모른다. 어서 집으로 가자.》
《난 안 갈래요. 남산집이 미국놈의 소굴같아 못 가겠어요.》
《너 말이면 다하는줄 아느냐. 세상에 그런 불효막심한 자식이 어디 있느냐.》
정녀는 아들을 호되게 닦아세웠다. 수일은 돌아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정녀의 입에선 신음소리가 새여나왔다. 똑똑하고 례절바른 아들이 이렇게까지 험하게 나올줄은 몰랐다. 방안에 어스름이 깃들기 시작했다.
(수희는 왜 돌아오지 않을가…)
방안을 거두고난 정녀는 안절부절 못했다. 바로 이때 방문이 열리였다.
체구가 듬직한 장년이 성큼 방안에 들어서며 전등부터 켰다.
《수일동무 어머님께 문안드립니다. 작업반장 리평택입니다.》 하고 인사를 하는 장년뒤로 수일이와 수희가 들어왔다.
《내인이 이렇게 공장에까지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미안한건 우립니다. 어머니가 속을 태우고있는것도 모르고있었으니 정말 미안합니다.》
평택의 소탈하고 겸양한 태도에 정녀는 깊이 감심되였다. 버릇도 없이 막되여먹은게 로동자인줄 알았는데 마주해보니 그런게 아니였다. 로동자들을 천시하는 낡은 사회의 페풍에 물젖은 정녀로서는 얼굴이 뜨거웠다.
《어머님, 수일동무를 데리고 가십시오.》
《아니, 이 애가 가겠다고 하던가요.》 정녀는 자기의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어머님이 몸소 오셨는데 안 가면 됩니까. 수일동무는 아버님에게도 사죄를 할겁니다.》
《…》
평택의 그 말에 정녀는 저고리고름끝으로 눈굽을 눌렀다. 정말 고마운 사람이였다. 아마 이 사람이 타일러서 수일이가 마음을 돌려세운것이 분명하였다.
정녀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평택은 공장구내길에서 자기 오빠를 소리쳐 부르며 뛰여오는 수희를 만났다. 수희한테서 자상한 이야기를 듣고난 평택은 수일이를 멈춰세웠다.
《집안일에 쓸데없이 간섭한다고 고까워하지 말라구. 이건 로동계급의 품성에도 관계되는 문제야.》
평택은 첫마디부터 심중하게 말했다. 그는 작업반장을 하면서 공장로조책임자로 활동하고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그런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그런 아버지의 자식이 되고싶지 않습니다.》
《뭐라구? 그런 자식이 되고싶어 되는 자식이 어디에 있겠나. 그게 모두 험한 세월탓이야. 그런만치 자식된 도리도 깊이 생각해야지. 그래 수일이가 집을 뛰쳐나오면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될것 같애? 맏자식이 무엄하게도 부모와 의절하고 집안의 안정을 파괴하다니…》
《어쨌든 전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수일의 반발도 컸다.
불현듯 부리부리한 평택의 눈빛이 엄해졌다. 그는 내친 성미대로 다몰아치지 않았다. 씨름판에서 적수를 솜씨있게 멨다치군 하던 상씨름군의 재간이 이런데서도 발휘되는듯싶었다.
《수일이, 동무는 그동안 박용구동지한테서 뭘 배웠나? 얼마간 감옥에 가있더니 벌써 잊었나?》
그 소리에 상사말같던 수일이 수그러들었다.
《그래 동무는 아버지와 터놓고 진심을 나누어보기나 했나?》
《뭘 진심으로 터놓는단 말입니까? 모든것이 명백한데.》
《어랍쇼. 이야기도 해보지 않고 사람의 속을 다 안다? 이제보니 동무는 대단한 인걸인걸.》
더 쏟아지려는 호방하고 걸직한 롱말을 삼킨 평택은 진지한 어조로 타일렀다. 때가 때니만치 절대로 사람을 겉만 보고 속단하지 말라, 사람마다 처지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지 않은가, 만약 동무생각처럼 아버지가 정말로 잘못된 길로 나간다면 옳은 길로 돌려세울 생각을 해야지, 로동계급답게!…
평택은 잠시 동안을 두었다가 보다 부드러운 어조로 타일렀다.
《빨리 가서 어머님께 사죄하고 집으로 돌아가라구. 나도 함께 가서 사죄하겠네.》 하고 평택은 어지간히 수그러든 수일의 손목을 잡고 합숙방으로 찾아왔던것이다.
《공장어른, 정말 감사합니다.》
정녀의 목소리는 물기에 젖어 갈리였다. 바쁜 시간을 내여 수일을 납득시킴으로써 집안의 우환거리가 풀리였으니 정녀로선 가슴이 달아오르지 않을수 없었다.
수일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정녀는 저녁식사준비를 다그쳤다. 그는 몇해만에 온 집안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여앉는것만큼 온갖 성의를 다하여 밥을 짓고 갖가지 반찬을 만들어 푸짐한 상을 차렸다. 했건만 상앞에 마주 앉은 식구들의 얼굴빛은 밝지 못했다. 수희가 웃기도 하고 롱말도 하였지만 어수선한 방안의 분위기는 좀처럼 가셔지지 않았다. 그것이 수일이때문이라는걸 잘 알고있는 정녀는 식사가 끝나자 아들을 남편의 서재로 떠밀었다.
아버지 서재에 처음 들어와보는 수일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서재가 너무 요란하였던것이다. 측량부문 서적들외에도 문예, 과학기술도서들, 각종 사전류들이 책장들을 가득 채웠고 벽에는 세계지도와 세계명화가 걸려있었다. 수일은 쏘파에 부자연스럽게 쭈그리고 앉았다.
《편안하게 앉거라.》 실내옷을 걸친 현구의 말씨는 부드러웠다.
《산에서 돌아오신 아버지에게 아직껏 제대로 인사도 못드려 죄송합니다.》 수일은 용서를 빌었다.
《이 아버지는 더 길게 말하지 않겠다. 어머니한테서 들었겠지만 아버지는 너희들이 더는 고생하지 않도록 해주자고 애쓰고있다.》
현구는 심중한 눈길로 수일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감옥에 찾아갔을 때도 내가 말했지만 이제부턴 절대로 어른들의 일사에 비치지 말아라. 세상이 바뀐것만큼 매사에 생활과 행동을 조심하고 달리해야 한다. 너도 아는것처럼 우리 집 밑천은 재산이나 벼슬이 아니라 두뇌다. 아버지는 맏이 너만은 나처럼 고학을 시키지 않겠다. 네가 원한다면 세계일등급의 나라에서 부러운것 없이 류학공부도 시켜주겠다. 빨리 몸을 춰세우고 학습에 전념하여라.》
수일은 머리를 숙인채 말이 없었다.
《왜 말이 없느냐. 아버지가 하는 말이 믿어지지 않아서 그러느냐. 아버지는 빈말을 하지 않는다. 래일부터 당장 너를 공장에서 데려다 공부를 시키자고 한다.》
수일의 낯색이 급작스레 굳어졌다. 그러자 현구는 보다 엄한 목소리로 침을 놓았다.
《너도 집안이 망하길 바라지는 않겠지. 네가 다시한번 일을 쳤다간 집안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사회활동을 해도 대학공부를 마친 후에 하여라. 그때엔 아버지도 간섭하지 않겠다.》
《…》
수일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다과쟁반을 들고 들어선 정녀가 방안의 어색한 공기를 느끼며 수일의 옆에 앉았다.
《이 애야, 왜 그러느냐?》 정녀는 가슴을 조이며 나직이 물었다.
《나도 대학공부를 하고싶어요. 그러나 공장에서 나오지 않겠어요.》
《무슨 소릴 하는거냐?!》
현구가 목청을 높이며 아들을 지켜봤다.
《그러지 않아도 말씀드리자고 했어요.》
흥분한 수일이가 아버지에게 은실이라는 대학생이 기억되는가고 물었다.
《은실이?… 내가 대산의 집에 갔을 때 네 소식을 묻던 그 처녀가 은실이라고 한것 같은데…》
《맞아요. 그 은실이 말이예요.》
《그래 그 은실이가 어쨌다는거냐?》
《그는 나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었어요.》하고 수일은 은실이를 《군정》참사관에게 섬겨바치려고 한 전대산의 행위와 수많은 애국자들을 밀고하여 죽게 한 전가네 집안의 음페된 반역죄를 자상히 말했다.
현구와 정녀는 얼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아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한가지 더 알아둘게 있어요. 전 완전석방이 아니라 병보석이야요. 몸이 회복되면 검찰이 데려갈거예요. 제가 나올 때 전옥이 그렇게 말했어요.》
《병보석이라구?…》
현구의 표정이 대뜸 굳어졌다. 자신은 그런줄도 모르고 스미스를 고맙게 생각지 않았던가. 한방망이 맞은듯싶었다.
《내 스미스를 만나보겠다.》
현구는 이 말밖에 더 할수가 없었다.
《아버지, 전대산인 어떻게 하겠어요. 그런 역적을 내버려둘수 없지 않아요.》 수일은 분격에 넘쳐 말했다.
《음.》 현구는 목에 가시가 걸린 소리를 내였다. 온 나라가 달라붙고있는 친일역적청산문제인것이다.
《네 말이 옳다. 나도 가만있지 않겠다. 다만 시간이 있겠는지 념려될뿐이다. 정 기회가 없으면 이모부에게라도 말해서라도…》
《이모부라니요?! 이모부야 〈미군정〉사람이 아니예요.》
《그게 어쨌다는게냐. 이모부는 〈군정〉에 있다고 친일역적도 눈감아줄 사람이 아니야.》
《난 모르겠어요. 왜들 미국을 좋게 생각하는지.》
《미국은 일본을 패망시킨 전승국이 아니냐? 우릴 도와주고있는 나라이구.》
《도와준다구요? 그건 빛갈좋은 말뿐이예요. 인민정권기관들을 파괴하고 민주주의와 생존을 위한 로동자들의 투쟁을 탄압하구 농민들을 불공정한 토지소유관계에 얽매두고있는것도 도와주는건가요? 북에는 인민들의 리익과 의사를 대표하는 인민정권이 세워졌구 산업국유화가 실시되여 로동자들이 공장의 주인이 됐어요. 땅 없던 농민들은 무상으로 땅을 분여받아 땅의 주인이 됐구요. 미국은 북조선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면서 이 땅도 그렇게 될가봐 떨고있어요. 아버진 이걸 알아야 해요.》
수일의 말은 현구의 가슴을 크게 울렸다. 하지만 너무 꿈같은 소리였고 또 북에 가보지 못한 아들의 말이여서 믿음이 가지 않았다.
《네가 알면 뭘 안다구… 마치 북에 가보기라도 한것처럼 말하느냐?》
《꼭 가봐야만 아는가요? 북의 신문과 방송 그리구 들려오는 소문…》
《됐다. 난 미국의 신세를 지고있으니 그리 알아라.》
현구는 아들의 입을 막아버리면서 그루를 박듯 말했다.
그로부터 며칠후 아침 까치가 울더니 현구네 집으로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