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인생은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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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구는 아침 일찍 사무실에 나왔다. 《군정》에서 나온 역원이 깍듯이 인사를 하면서 책상우에 사무용품들을 내놓았다. 그는 현구에게 공식 직위는 아직 없으나 임무에 해당되는 대우는 받게 될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잠시후 쯔시마가 서류철들을 부둥켜안고 찾아왔다. 서류철들을 책상우에 펼쳐놓고 진행중과 완결된 문건을 따로 구분하는 쯔시마의 손놀림은 가벼웠고 입가에 웃음까지 실려있었다. 철조망을 벗어나 무사히 귀국하게 되였다는 안도감과 기쁨이 흥분시킨것 같았다. 실상은 이 땅에 더 있을 필요가 없어 쫓겨가는 신세라는것을 현구는 알고있었다. 어제 스미스는 현구를 만난 자리에서 왜놈들을 숙청하자는 국민들의 요구와 또 조선정부를 세우기 위해서 일본인들을 귀국시킨다고 하였다. 그 말이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현구의 눈앞에는 왜놈들이 깨끗이 청산되고 미군도 철수할 그날이 보이는것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스미스의 말에 더 믿음이 갔다.
《현선생…》
쯔시마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겪은 신고와 번민을 말해주듯 두볼이 푹 꺼졌다.
《어느 철학가가 인생은 허무하다고 했다지요?》
터갈라진 입술을 실룩거리는 쯔시마의 두눈에 물기가 내배였다. 아무리 목숨을 건져가지고 제 나라로 간다고 해도 패전국국민의 수치는 면할수 없었던 모양이였다. 현구는 쯔시마에게 눈총을 쏘았다.
《쯔시마, 이 땅을 떠나면서 생각되는것이 고작 허무감뿐인가?》
《?!》
쯔시마는 당황한 기색으로 두손을 모아잡고 머리를 갑삭거렸다. 현구가 일을 도와준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니 그럴만도 했다.
《현선생의 은혜를 내 어찌 잊겠습니까. 혈육이상으로 나를 아껴준 현선생의 넓은 도량에는 노상 감복하고있습니다.》
《말같잖은 소린 걷어치우게. 난 도와준적도 동정한적도 없네.》 현구는 자기가 원쑤를 도와준것처럼 들려 쯔시마의 말을 일축해버렸다.
《그래 내 말의 뜻을 모르겠는가? 옛지위를 빼앗긴것이 그렇게도 절통하고 야망을 못채운게 악이 나서 인생을 허무하게 본다는 말이지?!…》 현구의 추궁은 칼날처럼 무자비하였다.
강도일제의 패망은 다르게는 될수 없는 필연적인 징벌이였다. 남을 해친자들이 무사할수 없다는건 력사의 진리였다. 그 진리를 놈은 아직 모르고있는것 같았다.
현구는 쯔시마와 더는 말을 하고싶지 않았다. 지금은 기가 죽어있지만 때가 되면 또다시 침략의 칼을 쳐들 섬오랑캐족속들이였다.
쯔시마는 쩔쩔 매면서도 나머지 문건들을 마저 가져오라는가고 물었다.
《여긴 창고가 아니네. 둬두고 나가게.》
현구는 그를 내쫓아버렸다. 그런데 저녁식사를 마친 현구가 침대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는데 숙소 방문이 조용히 열리였다.
《쉬는 중입니까.》하면서 쯔시마가 방안에 들어섰다. 사무실에서 무안을 당했던 사람같지 않게 얼굴엔 희색이 만면하였다. 원탁옆 걸상을 당겨 앉은 그는 안주머니에서 큼직한 봉투를 꺼내였다. 토지문서였다. 자그만치 12정보나 되는 일본인소유지를 1944년 7월 30일에 현구가 매입했다는 증서와 쯔시마처장의 확인서가 첨부된 문서였다. 본래는 평북도의 《불이농장》옥답을 선택했었는데 38도선이 쉽게 열릴것 같지 않아 호남벌의 전답으로 바꾼것이다.
《이건 재등록할 때 내가 명예변경시킨 토지증서입니다.》
쯔시마는 눈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고생을 많이 하셨으니 앞으론 복을 누리십시오. 현형의 청렴하고 겸허한 성품을 고려해서 열둬정보로 했는데 그 땅이면 유족하게 지낼수 있을겁니다.》
《…》
현구는 일체 말이 없었다. 그러자 쯔시마는 자기가 참사관에게 현선생에 대하여 좋은 말을 했다는 소리까지 하였다. 하면서 그만한 땅에 벼슬까지 얻게 되면 현선생은 더 부러울게 없을거라고 주절댔다.
불현듯 현구의 눈에서 불이 일었다. 그는 문건을 원탁에 놓고 만족해서 방을 나가는 쯔시마에게 소리쳤다.
《자넨 누구의 땅을 가지고 선심을 쓰자는건가?》
현구의 서리찬 눈길이 쯔시마의 얼굴에 못박혔다.
《쯔시마, 임자가 고향을 떠날 때 뭘 가지고 이 땅에 왔나? 맨손뿐이였지. 그런데 어데서 어떻게 땅이 생겨나서 이짓인가? 아직도 조선땅을 제멋대로 처분할수 있다고 여기는건 아닌가?》
쯔시마는 얼굴이 꺼멓게 질리였다.
《현선생, 오해하지 마십시오. 망한놈이 무슨 체면에 그러겠습니까? 일본인 재산을 <미군정>이 몰수하기때문에 그중에서 얼마간 떼여낸겁니다. 》
쯔시마는 중언부언했다.
《우리를 패배자인 왜놈족속으로 아는가?》
현구는 호되게 꾸짖었다.
그의 도고하고 강직한 성품앞에서 쯔시마는 몸둘바를 몰라하였다.
《현선생, 내 생각이 짧았습니다. 나로선 진심으로 보답하느라고 한 짓입니다. 정말입니다.》
쯔시마는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처지가 이 지경으로 되여 그렇지 자갈밭 한뙈기라도 남에게 주자고 할 쯔시마가 아니였다. 돌이켜보면 대마도 들개와 같은 목동이 조선의 흰쌀로 배를 불리우고 나비넥타이를 목에 걸게 된 그였지만 은인이며 스승인 현구에게 신발 한컬레 공짜로 준적이 없었다. 보답은커녕 저수지사건때처럼 은사를 박해하고 차버렸던것이다.
《잘못을 뉘우치자고 한 노릇인데 그렇게 됐습니다. 이 죄많은 놈을 더 꾸짖어주십시오.》
《자넨 평생 가도 깨닫지 못할거네.》
《현선생, 제발 믿어주십시오.》
《뭘 믿으라는건가?》
현구는 표리부동하고 역스러운 쯔시마를 쏘아보았다. 그가 자기 죄틀 어느 정도라도 느꼈다면 문건들을 원상복구하는데 그칠게 아니라 비법적인 사실들을 밝혀냈어야 했을것이다. 어느 일본인이 어느때 어느곳의 땅을 어떤 수법으로 얼마만치 략취하였는가를 구체적으로 비고란에 명기했어야 옳을것이다. 그런 토지문건은 단 한건도 없었다.
말문이 막힌 쯔시마는 현구의 무릎앞에 엎드렸다.
《이놈은 현선생의 발치에도 못 갈것 같습니다. 현형, 조언을 주시오. 어디에서도 현형과 같은 성인을 다시 못 만날것 같아 그럽니다.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겠습니다.》
현구는 쯔시마가 노는 꼴이 하도 메스꺼워 상대조차 하기 싫었다.
신의도 의리도 없는 섬태생의 쪽발이…
《쯔시마, 따로 기회가 없을것 같아 몇마디 해두겠네. 자네도 력사책들을 들춰보았겠지?》
현구는 가슴속에 늘 품고있던 말을 꺼냈다.
《력사적으로 내려오면서 일본의 문물제도와 개명에 기여한 조선의 특출한 공로와 업적들은 일본사서의 갈피마다에도 명백히 기록되여있네.
그런데 일본은 우리 조선에 대하여 어떤 태도로 대해왔는가?… 번번이 략탈과 침략, 배신으로 대답해오지 않았는가. 임진년의 왜란과 범죄적인 조선강점과 파쑈통치가 그러하지 않았는가!
쯔시마, 명심하라구. 이것이 바로 은인에게 감행한 일본의 천인공노할 만행이라는걸. 우리 조선사람들은 대를 이어가며 한시도 잊지 않는다는걸…》
《지당한 말씀입니다. 나도 력사적사실들을 좀 알고있습니다. 일본의 문화발전에 공헌한 조선의 사적들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전습되고 있습니다. 》
쯔시마는 생활에서 일본화된 조선의것들을 들자면 끝이 없다고 하였다. 특히 자기네 대마도는 본토에 비하여 몇배나 더 후한 조선의 혜택과 성원을 받아왔다고 솔직히 인정하였다.
《력사를 믿는다니까 더 말하지 않겠네. 자네의 말대로 대마도의 안정과 평화는 전적으로 조선의 선린우호정책의 덕택이네. 조선이 힘이 없어서 계속 로략질하는 대마도를 징벌하지 않았겠는가?》
현구는 말이 난김에 력점을 찍어가며 준절하게 말했다.
《배은망덕해도 분수가 있지. 다시한번 말하는데 왜놈들에 대한 골수에 사무친 우리의 원한을 똑똑히 알아두게. 쫓아다니며 조선을 해치는 악착스런 원쑤놈들을 우리가 어떻게 잊겠는가.》
현구는 쯔시마를 줄곧 사납게 몰아댔다.
《예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력사에 피로 얼룩진 죄목들인데 외면한다고 지워지겠습니까.》
쯔시마가 사죄하고 용서를 빌었지만 현구의 태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말이 중요한게 아니야. 어느 때에 가서든 모든 죄과들을 허심하게 인정하고 그에 맞게 사죄하고 보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로 용서치 않을거네.》
쯔시마의 낮색이 하얗게 질리였다. 그는 작별을 앞둔 시각에 무슨 변이라도 날가봐 겁이 더럭 났다.
판결을 기다리는 피고인양 숨을 죽이고있던 쯔시마는 슬그머니 물러가려고 하였다.
《쯔시마! 이걸 그냥 둬두겠나-》 현구는 손가락으로 원탁우의 토지문건을 가리켰다.
쯔시마는 불에 덴 놈처럼 황급히 합숙으로 문건을 가져왔으나 장밤 눈을 붙이지 못하였다. 그의 가슴속 한복판에선 이 땅에서 쫓겨난 원통함과 언젠가는 또다시 가로타고 앉아 주인행세를 하고야말 야심이 그 어느때보다도 끓어올랐다.
4
문서고를 떠난 승용차는 옛성터를 돌아서 번화한 시가지로 들어섰다. 차창밖으로 고층건물들과 길나무들이 여름옷차림의 사람들과 함께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피곤한 몸을 등받이에 붙인 현구의 얼굴에는 느슨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인생이란 요지경속이라더니 정말 꿈같구나…)
두시간전, 사업을 결속하고있던 현구는 스미스참사관의 전화를 받고 《군정청》의 2층 소회의실로 건너갔었다. 크지 않은 회의실에는 열댓명가량의 사람들이 모였는데 머리가 흰 로년층은 드물고 풍채좋은 중년들과 나비넥타이를 맨 관리층의 인물들이 많았다. 그들은 너나없이 까닭모를 흥분과 기대에 휩싸여있었다.
현구는 안면이 있는가 해서 두루 살피다가 창가의 개별의자를 차지하였다.
탁상용 미국기발이 꽂혀있는 집행석은 비여있었다. 항용 그러하듯이 모임전의 잡담이 벌어지고있었다.
《아니?! 잘못됐다는 소릴 들었는데 여기서 만나는구만.》
가운데줄의 상고머리가 목덜미 불깃불깃한 뚱보에게 건늬는 소리였다.
《덕분에 무사했네. 감옥이라는것도 소문과는 다릅데. 뭘 좀 집어주니 간수들이 제 집의 종보다 더 충실합데.》
《그래도 감옥이겠지 별장이겠나.》
《모르는 소리. 말이 감방이지 술까지 마시면서 몸을 풀었네. 그저 한가지가 모자라서 섭섭하더군. 그대신 몸을 낸셈이지 허허.》
뚱보의 번들거리는 얼굴에 희열이 어리였다.
《감옥에서 호강을 했다는것이 믿어지지 않는구만.》
《나도 처음엔 속이 한줌만 했었네. 죽었구나 했지… 미국어른들이 아니면 세상구경을 다시 할수 없었을거네.》
뚱보의 두눈이 슴벅거리였다.
《그쪽에선 그간에 단단히 한몫 봤다면서. 언제보나 한수 더 뜬다니까. 옛정을 생각해서 못본체 말게.》 뚱보가 몹시 부러워했다.
《원 사람두, 내가 어떻게 임자를 못본체 할수 있겠나?》
상고머리가 실눈을 짓고 입귀를 실룩거리였다.
그러는 가운데 옆문으로 나온 정사복 미국인고관들이 집행석을 차지하였다.
연탁으로 나선 미군소좌가 군정장관이 비준한 인사명단을 발표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지명받은 인물들이 벌떡벌떡 일어나선 깊숙이 절을 하고 앉았다.
앞줄 번대머리는 서울시청 부시장으로, 뚱보는 군정청 경제산업국 부국장으로 발령되였다.
《다음으로 측량기사 현구선생…》
《예.》 현구는 걸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미군소좌를 쳐다보았다.
《선생은 사업상 공적을 평가하여 군정청 농산국 참사로, 신한공사의 토지관리국장으로 임명되였습니다.》
소좌의 발표에 이어 집행석에서 관례에도 없는 박수소리가 토닥토닥 울렸다.
《?!》
현구는 어안이 벙벙해지고말았다. 그는 자기가 남조선의 농지관계틀 총괄하는 인물로 일약 등용된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미국인들이 집행석에서 퇴장하며 현구에게 눈인사를 보냈다. 번대머리와 뚱보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호기심과 존경어린 눈길로 현구를 바라보았다.
너무 엄청나고 뜻밖이여서 현구는 어떻게 회의실을 나와 스미스방으로 들어섰는지도 몰랐다.
《오우, 어서 오십시오. 본관은 충심으로 선생의 영전을 축하합니다.》
정중히 현구의 손을 잡아준 스미스는 축배잔까지 권했다.
현구는 코마루가 쩡했다.
《현선생, 우리는 고관이 된 선생의 신분에 어울리게 부인을 교장이나 교육부문 간부로 등용하고 아들은 몸이 회복되는 차로 미국에 류학을 보내자고 합니다.》
《!》
현구는 자꾸만 덧쌓이는 아름찬 《혜택》에 몸을 제대로 지탱할수 없었다. 현훈증이 커갈수록 현구는 미국이야말로 쪽발이 일본과는 전혀 다른 나라라는 생각에 눈시울이 젖어올랐다.
스미스는 또다시 현구와 잔을 찧으며 말을 이었다.
《현국장각하.》 스미스는 현구를 고관의 직함으로 불렀다.
《그동안 수고가 많으셨는데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가족들과 같이 즐겁게 휴가를 보내기를 바랍니다. 차후 행동문제는 후에 의논합시다.》
현구는 목이 메여 끝내 인사도 변변히 못하고 참사관실을 나왔다.
유종이가 현구를 현관으로 안내하였다.
《형님, 대통운이 텄습니다. 부럽습니다. 나를 촌으로 안보낸 형님의 속내를 이젠 알만합니다.》
현관계단앞으로 하늘색고급승용차가 와서 멎었다.
《형님, 타십시오. 국장의 전용차입니다.》
유종은 어색해하는 현구를 차안으로 떠밀었다.
문서고로 돌아온 현구는 일을 마감짓고 승용차를 타고 집을 향해 떠났다. 스미스가 보내온 식료지함이 차에 실려있었다.
고관으로 둔갑하고 승용차에 몸이 실려 남산저택으로 가는 현구의 마음은 풍선마냥 붕-떴다. 그처럼 간절하게 소원하던 밝은 세상에 들어선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