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장  처녀의 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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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구름이 낀 날씨가 선들바람을 일으키고있었다. 운동삼아 사랑방앞 꽃밭에서 잡초를 뽑아내던 수일은 대문두드리는 소리에 허리를다.

《혹시 아버지가?》

어머니는 이모댁으로, 수도 학교로 간 뒤여서 수일은 아버지를 먼저 생각했다. 자기의 출경위와 내막을 알고싶어 더구나 아버지를 기다리는 그였다. 했건만 대문 앞에는 아버지가 아니라 처녀가 서있었다.

《은실씨가 아니요? 우리 집을 어떻게 알구…》 수일은 뜻밖이여서 놀라는 동시에 무척 반기며 처녀한테로 다가갔다. 하지만 녀는 얼굴에 어설픈 웃음을 지으며 조용한 어조로 물었다.

《수일오빠, 저는 아버지를 만나보았어요.》

《우리 아버지를… 어디서?》

수일은 숨가쁘게 다그쳐물었다.

《우리 집에서 아니, 전대산의 집에서…》

《전대산이라면 총독부경찰하던 사람 아니요?》

《네, 지금은 경찰청에 다녀요.》

《그러니 그가 은실의 아버지였단 말이요?》

수일은 끓어오르는 분격을 터치듯 부르짖었다.

《그래요. 그는 해방전에 수많은 애국자들을 총살한 전치도의 아들로서 그 애비를 찜쪄먹을 매국역적이고 저를 미국인의 노리개로 섬겨바치려고 한 악마예요.》

은실은 여기까지 말하고 너무 분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 수일은 지금 자기앞에 서있는 은실의 신변에 심상 않은 일이 생겼다는것을 직감하면서 물었다.

《은실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보오.》

《전 스미스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 신세를 망번 했어요.…》 하고는 한동안 아래입술만 잘근잘근 씹다가 힘겹게 말을 끄집어냈다.

 

전대산의 아래웃에는 불빛이 환했다. 현관과 정원 외들이 널직한 뜨락안팎을 대낮같이 밝히고 문들이 번쩍거리였다.

초대연은 절정에 이르렀다.

은실이도 초대연에 참가했다. 그는 대산의 강박에 못이겨 야회복입고 스미스와 사교춤을 추었다. 자기의 장래를 약속해준 스미스에게 호감을 가졌고 미국에 대한 요란한 선전에 충격을 받은 그였다.

은실이와 춤을 추는 스미스의 숨결은 점차 이상스레 높아졌다. 은실이는 문득 가슴이 섬찍했다. 은실은 슬그머니 향란이와 교대하고 응접실을 했다. 2층으로 올라온 은실은 야회복을 벗어던지고 문가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아래방에선 여전히 주연이 계속되고있었다. 떠들썩한 말소리, 웃음소리, 자지러진 음악소리가 잡탕을 이루며 귀전을 때렸다. 그무렵에 향란이가 은실의 방으로 들어왔다. 향란은 술냄새를 풍기며 주절거렸다.

《은실이가 춤을 맵시있게 추니까 미국사람이 반한것 같애. 난 메스꺼워 죽겠어. 향수를 는데도 어쩌면 그렇게 냄새가 지독할가.》

은실에게 다가선 향란은 그의 고운 얼굴을 이윽히 여겨보면서 심중한 목소리로 귀했다.

《넌 깨끗한 몸이지. 나처럼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면 어서 빨리 여길 피하는게 좋겠다. 글쎄 령감이 이밤중에 나더러 밖에 나가서 산보 하자는게 아니겠니. 그럼 이 집에 누가 남게 되지?》

(나와 스미스… 그러니 아버진…)

번개처럼 머리를 는 생각에 은실의 등골에선 급작스레 랭기가 쭉 뻗쳐올랐다. 동시에 스미스의 환심을 사게 되면 이 집의 모든 일이 쭉 풀린다고 하던 전대산의 말마디가 귀전에서 살아났다. 가슴이 당장 터져나가는듯 무섭게 뛰였다.

《설마 아버지가…》

, 아버지? 그런 사람도 아버지야? 령감태긴 네 미모를 이런 때 써먹자고 너를 양딸로 삼은거야.》

《?!》

불의에 뒤통수를 되게 얻어맞은 때처럼 은실은 머리가 뗑하고 눈앞이 아찔하였다.

(더러운 놈, 내 미모를 써먹자고 양딸로 삼았다구.… 나를 스미스에게 섬겨바치자고 야회복이요, 통역이요 하면서 소란을 피웠구나.)

한동안 부르르 몸을 떨고만 있던 은실은 가까스레 숨을 몰아쉬면서 자신을 겨우 다잡았다. 그의 눈에선 섬광같은것이 타끓었다.

《알겠어요. 작은어머닌 어떻게 하실래요?》

《나에겐 궁냥이 있어. 돈푼이나 든든히 걷어쥐면 되니까.》

향란은 자기 걱정은 말고 제 할바나 하라는듯 깔깔 웃었다.

은실은 곧 집을 나섰다.

그는 산기슭 포장도로를 따라 걸었다. 남산의 나무숲이 괴물처럼 우중충하고 이따금 서있는 가로등이 뿌연빛을 던지였다. 분격에 온몸 불사르는듯 했다. 몸서리치는 참변을 겪을번 하고서야 미국인과 전대산의 검은 속심과 자기의 암둔성을 통감한 자신이 한스러웠다.

밤길을 내처 걷기만 하던 은실의 걸음이 갑자기 떠지며 입에서 시름겨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디로 간다?)

갈곳이 없었다. 혈육도 친척도 없는 외로움이 모질게 가슴을 허비였다. 말그대로 혈혈단신인 천애고아였다. 불쌍한 그를 무자비하게 짓밟은 악한들은 있어도 자애로운 손길은 그 어디에도 없는상싶었다. 험악한 이 세상에서 과연 내가 살아갈수 있겠는가?

(어머니-)

절망에 잠긴 은실의 입에서 부르짖음이 흘러나왔다. 어머니는 왜 나를 낳아서 수치와 고통속에 허덕이게 하는가 하는 원망이고 비탄이였다.

돌이켜보면 은실은 이 세상에 애당초 태여나지 말았어야 할 생명이고 인생이였다. 고고성을 터친 그날로부터 부모의 사랑과 애무를 몰랐고 남의 눈치밥으로 자랐으며 기구한 처지에서 벗어나보려고 크게 기대했던 모든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이제 어떻게 자신을 유지할수 있단 말인가? 거렁뱅이 아니면 매소부로 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럴바에는 차라리 목숨을 끊는 편이 나것 같았다. 황량한 들판에 로 떨어진 작은 새가 무슨 힘으로 광포한 비바람을 이겨내며 살을 에이는 혹한과 기아, 가시돋힌 덤불길을 헤내겠는가. 산길 걷는 은실의 두눈에선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시꺼먼 수림속에서 괴물이 뛰쳐나와 당장 덮치는듯싶었다. 겁에 질린 은실은 이밤 동무네 집에서 보내고 마지막으로 현수일을 만나리라 마음먹고 시내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기 심정을 알아줄 사람은 현수일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수오빠, 전 세상이 무서워 못살겠어요. 막 겁이 나요.》

은실의 색은 하얗게 변하고 두볼엔 경련이 일었다.

수일은 무슨 말로 그를 달래고 위안할지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덤덤히 서있기만 했다.

해방이 된 오늘에도 짐승보다 못한 전대산이와 같은 인간이 활개를 치고있다니… 끓어오르는 분격과 함께 그런자에게 지금까지 속아 살아온 은실이가 더없이 가엾고 불쌍하게 여겨졌다.

《수오빠, 그 사람은 앞으로 저를 찾아내면 가만두지 않을거예요. 그는 제 애비를 닮아서 사람 죽이는것을 식은죽먹기로 알아요.…》 하고는 고아전이던 전치도가 경상도 지리산지방에서 저지른 역적행위와 자기의 정체를 숨기려고 주원으로 옮겨간 사실을 말했다.

《음- 전가족속들은 정말 만고역적당이군. 릉지처해도 씨원치 않을 놈들.》

수일은 눈에서 불이 일었다.

《수오빠, 어떻게 되여 해방이 됐는데도 역적들이 을 쳐들고 다닐가요? 죄상이 밝혀지지 않아서 그럴가요?》

《…》

수일은 통분을 금치 못하며 머리칼을 쥐여뜯었다.

갑자기 하늘이 어둠속에 잠겨드는듯싶었다.

망울을 갓 터진 등판의 아카시아들이 눈가루처럼 날렸다. 수일은 몸을 우둘우둘 떨었다.

《수오빠, 전 이젠 어떻게 했으면 좋아요?》

《지금 당장은 우리 집에 있소. 앞으로 살아갈 방도는 에 차차로 의논해봅시다. 내 생각에는 은실씨는 서울바닥에서 더 있을 형편이 못되오. 전대산 그놈이 은실씨를 가만두지 않을거요.》

1

2

 

수일이가 책을 읽고있는데 문에서 뭔가 얼른거리였다.

어머니와 수가 등교한 틈을 타서 기여든 낮도적같아 수일은 요란스레 문을 열어제끼며 소리쳤다.

《누구요? 기척도 없이.》

《불러도 응답이 없더구만.》 뜻밖에도 전대산이였다.

불길한 예감에 수일은 급히 마루로 나갔다.

《신색이 아직 나쁘구만. 내 출시키고도 와보지 못해 안됐네.》

전대산은 수일의 앞으로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보고싶겠지. 곧 돌아오실거네. 그래 공장은 어떻게 됐나? 차라리 이번 기회에 대학으로 가지 않겠나.》 하며 감면회와 석방을 시켜준 자기가 대학입학까지 힘써주겠노라고 하면서 수일구슬렸다.

수일은 그가 문병이나 하자고 도적고양이처럼 찾아온것이 아님을 알고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수일의 경계심은 결코 헛된것이 아니였다.

대산이가 오늘 이렇게 수일이네 집을 찾아온 까닭은 다른데 있지 않았다. 요즘 그는 바늘방석에 앉은신세로 굴러떨어졌다. 그것은 손쉽게 얻자던 횡재가 그만 제 덫에 걸려든 불행한 처지에 빠지고말았던것이다. 밤마다 꿈자리가 사납고 낮은 낮대로 간이 졸아들었다. 은실이로 해서 랭담해진 스미스도 겁이 났지만 그와 함께 집안비밀이 탄로날가봐 잠시도 안정할수 없었다. 은실이가 불미스러운 그 사실을 폭로하면 온 집안이 거덜이 날것은 더 말할것 없고 목숨조차 구원하기 힘든 이였다.

벙어리 랭가슴 앓듯 머리카락만 쥐여뜯던 전대산은 한시바삐 은실이를 찾아내여 그의 입을 틀어막아야겠다고 마음을 도사려먹고 집을 나섰다. 그 첫걸음으로 수일이네 집을 찾아왔다. 어쩐지 은실이가 수일이네 집에 숨어있을것 같은 느낌에 내탐하러 왔다. 그는 언젠가 은실의 일기장을 춰보다가 흠칫 놀란적이 있었다. 일기장에 수일이에 대한 이야기가 적지 않게 씌여있었던것이다.

《그간 돌봐 고맙습니다.》

수일은 천연스레 속에 없는 말을 하였다.

《뭐 그런 인사를 릴건 없구. 지금 집엔 혼자 있니?》

《병보석으로 감옥에서 나온 나같은것한테 찾아올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렇단 말이지.… 그럼 료를 잘하라구.》

전대산은 집안의 동정을 엿본 슬며시 물러갔다. 수일은 은실이 속히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야겠다고 생각하였다. 한편으론 기회만 생기면 자기에게 야수처럼 덤벼들 전대산을 처단할 방도를 찾아내야겠다고 속다짐하였다.

(빨리 조직과 협의한 지리산으로 가자.)

전가네의 고향으로 직접 가서 은실에게서 들은 역적들의 과거죄행 낱낱이 확인하자는것이였다.

그는 집안으로 들어가 가슴을 조이며 숨어있는 은실에게 곧 주원으로 떠날 비를 하라고 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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