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문서고
1
《아버지, 이걸 꼭 전하라고 해서 가져왔어요.》
학교에서 돌아온 수희가 현구에게 사각봉투를 내밀었다. 현구는 의아한 표정으로 속지를 끄집어냈다.
뜻밖에도 전대산이 보낸 초대장이였다. 자기의 생애에서 의의있는 날을 맞게 되여 특별히 현형을 초청한다는것이였다.
(흥, 의의있는 날? 나를 막역한 친지로 여기고있는게 아니야?)
현구는 랭소를 지었다. 대산이란 이름만 들어도 기분이 상하고 묵은 상처가 쑤셔났다.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선 이상한 감정이 머리를 쳐들었다. 아들과의 감옥면회를 힘써준 인사만은 해야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였다. 아무리 혐오스러워도 그의 수고마저 차버린다면 자기도 같은 놈으로 될수 있다는 자격지심에 사로잡혀 망설이던 현구는 안방문을 열었다. 정녀는 해쓱해진 얼굴에 애써 웃음을 지으며 남편을 반겼다.
《좀 어떻소?》
《다 나았어요. 전 할일이 많아서 죽지 못하겠어요. 여보, 우리가 전생에 무슨 죄를 졌기에 이다지도 시름을 벗지 못하는가요.》
정녀의 말은 대중이 없었다.
《여보, 정애의 남편한테서는 기별이 없는가요?》
병석에서도 아들이 걱정되여서 하는 말이였다.
《…》
《당신이 나서기 무엇하면 제가 말하겠어요. 그가 통역관이라는데 우리에 비하겠어요.》
《나도 생각이 있소. 당신은 마음놓고 병이나 고치오.》
《알겠어요. 수희가 그러는데 요즘 글을 쓰신다지요. 시국이 혼란된만치 조심하세요.》
현구는 오늘따라 별로 말이 많은 정녀를 바라보며 전대산의 초청문제를 의논해보려고 맘먹었다.
그때 밖에서 주인을 찾는 소리가 났다.
《누가 오지 않았어요? 나가보세요.》
현구는 성렬선생이 또 힘들게 걸음을 했는가싶어 급히 방을 나섰다.
《마침 계셨군요. 초대장을 받았겠지요?》
뜻밖에도 전대산이 문밖에서 서성거리고있었다. 현구는 대뜸 그가 찾아온 까닭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좋은 말로 사양하였다.
《집사람의 병이 심해놔서…》
《잠간만이라도 시간을 내주십시오.》
《사정이 딱해서 그러니 후날에 좀 생각해보기요.》
《너무 그러지 마시오. 오늘 저녁이 현형에게도 행운으로 될지 알겠소.》
대산은 희떠운 소리를 하며 현구의 손을 잡아끌었다.
사실 대산은 간신히 찾아낸 현구한테서 랭대를 받았던만치 면회건만 아니면 아직도 벙어리 랭가슴앓듯 할번 하였다. 그역시 현구의 뿌리깊은 원한과 맺힌 감정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쯔시마처장이 현구를 찾아달라고 부탁했기에 발벗고 나선것이다. 더우기 스미스참사관이 현구같은 인물을 물색하고있다는것을 전대산은 알고있었다. 참사관을 초청한 자리에 이름난 토지측량전문가를 내세운다면 이거야말로 안성맞춤이 아닌가! 한때 《총독부》소속 《토지조사실》실장 경력자를 스미스가 중시하면 소개자인 자기 앞날도 동시에 열릴수 있는것이다. 그래서 전전긍긍하는 제 애비에게 이렇게 편지까지 써보냈다.
《아버지, 조금만 참으세요. 왜정때보다 더 좋은 경사가 날지 알겠어요? 소작인들이 이제 분수없이 날친 값을 록록히 치르게 될겁니다.》
현구는 전대산이 하도 지꿎게 달라붙는 바람에 별로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승용차에 올랐다. 서울역앞거리에서 승용차는 남산쪽으로 꺾어들었다. 포장된 언덕길 좌우에는 고급주택들이 수림을 끼고 서있었다.
《현형, 감옥엔 갔댔소? 전옥이 몹시 까다롭게 굴지 않습디까?》
전대산이 넌지시 묻는 말이였다.
《수고해준 덕분에 아들을 만나보았소.》
《공판을 했답디까?》
아직 미정이라고 머리를 흔들자 대산은 자기가 검찰과 교섭해보겠노라고 했다.
침묵으로 대답했다. 미구에 승용차는 대산의 집앞에서 멈춰섰다. 차에서 먼저 내린 대산은 현구에게 잠시 정원에서 산보하라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정문을 들어서는 딸을 띄여보고는 다소 역증을 냈다.
《은실아, 넌 어딜 싸다니다 이제 오느냐, 엉!》 은실은 주눅이 들어 주춤거리다가 꽃밭옆으로 비켜섰다.
《너도 요즘 빨갱이물이 드는게 아니냐? 너희 대학에서도 모임이 잦다더구나. 왜 이렇게 늦느냐?》
《책을 빌려오느라구…》
《책을 빌려온다구? 이 애비앞에서 거짓말을 했다간 봉변을 당할줄 알아라.
좌우간 빨리 방에 들어가서 손님맞을 준비를 해라. 야회복을 꼭 입어야 한다. 그리고 네가 통역하거라, 알았지. 오늘이 집안에 대통운이 트는 날이다.》
대산은 흥이 나서 당부했다.
은실은 볼이 부어 현관으로 들어갔다.
현구는 정원을 거닐었다. 정원 꽃밭에는 갖가지 꽃들이 만발하고 련못의 검푸른 물결우엔 저녁노을빛이 아롱졌다. 정원길우에는 락엽 한잎 없었다.
(누가 오길래 나까지 끌어들이며 야단일가?)
현구는 고개를 기웃거렸다.
문득 정문밖에서 승용차경적소리가 울렸다. 대산은 문밖으로 바삐 달려나갔다. 그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현관문으로 은실이가 나왔다.
그는 현구에게 공손히 절을 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수일씨와 잘 아는 사이랍니다. 수일씨때문에 얼마나 괴로우시겠습니까.》
검정치마에 밤빛춘추쎄타를 입은 은실의 차림새는 단아하고 소박하였다. 은실은 얼마전에야 수일의 소식을 듣고 감옥에 찾아갔지만 면회를 못했노라고 몹시 안타까와하였다. 하면서 집이 어디인가고 물었다. 《집은 알아서 뭘 하겠나.》 현구는 대답을 피했다. 대산의 딸이 아들과 잘 아는 사이라는 말에 속이 언짢았던것이다.
《아버님, 말씀해주세요. 전 수일씨의 보살핌을 잊지 못하겠어요. 수일씨는 저에게 있어서 오빠와 다름없어요.》
현구는 간절한 그 요구에 못이겨 집주소를 대주었다.
전대산이 이방인을 데리고 정원으로 들어왔다. 이방인은 대산이보다도 키가 컸다. 암갈색머리카락에 눈동자는 유리알처럼 파르스름했다.
이방인의 몸가짐과 걸음씨는 눈에 거슬릴 정도로 도고하였다. 뜻밖에도 그의 뒤로 양유종이 따라왔다. 현구는 이방인이 다름아닌 스미스라는 《군정청》의 경제담당참사관이라는것을 짐작했다. 유종은 현구에게 눈인사를 보내고는 그의 옆을 그냥 지나갔다.
몸에 비단옷을 걸친 향란이가 손님들을 집안으로 맞아들이였다. 대산은 평소의 옷차림인 은실을 무섭게 흘겨보고는 현구의 손을 잡으며 어서 방으로 들어가자고 이끌었다.
《난 임자가 우리 아들 면회를 시켜준 인사나 하려고 왔네. 손님들이 왔는데 나까지 들어가서 뭘 하겠나?》
《현형,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현형도 귀한 손님인데 어서 들어갑시다. 저 손님들과 안면을 익히는것은 현형한테도 손해될것이 없을거웨다.》 하며 대산은 무작정 현구를 방안으로 떠밀었다. 그 바람에 현구는 이번에도 어쩔수없이 방안으로 들어가지 않을수 없었다.
응접실 넓은 식탁에는 특별히 주문한 서양료리와 조선음식이 한가득 차려져있었다. 진한 분내를 풍기며 향란이가 손님들의 잔에 술을 부었다. 대산은 존경하는 참사관각하의 자기 집방문을 더없는 영광으로 간주하노라고 하면서 은실에게 통역하라고 눈짓을 했다. 은실은 유종이를 쳐다보면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자 유종이가 통역을 했다.
《오우! 성대한 연회입니다. 감사합니다. 대단히 감동됩니다.》
스미스는 만족한듯 잔을 들었다. 스미스와 맞잔을 한 대산은 이번에는 유종에게 잔을 내밀며 그와 처음으로 만나보았던 인천부두의 밤을 상기시키였다. 갖가지 음식과 향란의 솜씨있는 교태가 좌석의 취흥을 돋구었다.
대산은 향란에게 전축의 음량을 낮추라고 이르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스미스참사관각하! 저분의 명함은 현구라고 부릅니다.》 하고 현구의 경력을 소개하였다. 스미스의 파르스름한 눈알이 반짝거렸다.
《그렇습니까! 미스터 현구씨, 이렇게 알게 되여 대단히 반갑습니다.》 하며 현구와 잔을 찧었다. 그리고 새잔을 추켜들면서 말을 이었다.
《자-우리 미국에 충실한 전대산씨와 존귀하신 부인 그리고 조선의 봄처럼 매혹적인 따님을 위하여 듭시다.》 분위기는 각일각 고조되였다.
스미스가 문득 현구쪽으로 상반신을 약간 기울이며 몹시 친근한 어조로 말했다.
《존경하는 기사선생, 우리 손잡고 조선을 위해 일합시다. 후진국들에서는 토지문제가 기본입니다. 조선에서는 유감스럽게도 이 문제가 혼란되여있습니다.》
스미스는 술좌석을 개의치 않고 실무적인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현구는 마른 기침을 했다.
《기사선생, 선생과 같은 고명한분이 협력에 응해주신다면 우리로선 더없이 고맙겠습니다.》
현구는 자기는 그럴만한 재목이 못되거니와 토지와 관련된 과거를 수치스럽게 여기노라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한가지 묻고싶다고 했다. 스미스는 불쾌감이 컸으나 그에 응했다.
《좋습니다. 무엇이든…》 현구는 《미군정청》이 남조선의 모든 내막을 구체적으로 조사장악한다는데 그게 사실인가? 사실이라면 그 까닭이 어디 있는가고 물었다. 이러한 질문은 누구나 하고싶었던것이지만 미국인이 두려워 내놓고 하지 못한것이였다. 불시에 응접실분위기가 랭랭해졌다.
《현형, 벌써 취했소?!》 대산은 등골이 오싹해서 두눈을 흡떴다.
스미스를 노엽혔다간 만사가 수포로 될뿐아니라 현구를 소개한 자신도 졸경을 치를수 있는것이였다. 스미스의 고약한 성미를 잘 아는 양유종이 누구보다도 긴장되였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경제계의 고위급 리사진을 꾸릴 때였다. 협의회집행자가 난색을 지었다. 후보자들모두가 친일경력자들인데 어떻게 하겠는가? 전범자들은 일체 공직에서 제외하라는 《군정》의 지령을 참작하면서 추천하라고 조심스레 말하였다. 한식경이 되도록 말이 없었다. 그것이 뜻밖에도 스미스를 노엽혔다. 《그렇게도 군정의 의도를 간파 못하겠는가? 새로운 통치자로 군림한 미국에 대한 충실성이 기본이 아닌가.》 스미스는 집행자를 가리키며 모임을 사회할 자격이 없다고 선언하였다. 즉석에서 파직된 집행자가 손이야 발이야 빌었으나 숭미사상이 모자란다고 끝내 내쫓고말았다. 유종은 터무니없었던 그때의 장면이 상기되여 현구의 운명이 몹시 걱정되였다.《아니, 왜들 그러오?! 당자를 만난김에 묻지 않고 어디 가서 묻겠소.》 현구는 자기도 모르게 배심있는 소리를 했다. 《야참, 두말 말고 취소하오. 눈치가 소발통같구려.》
대산은 울상되여 사정했다.
《아니요, 난 알아야겠소.》
《현형, 정 이러겠소. 손님으로 왔으면 남의 잔치를 훼방할게 아니라 손님답게 처신해야 옳지 않소.》
《손님이라…》 현구는 슬며시 스미스를 건너다보았다. 담배를 피워문 스미스는 한손으로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올리고있었다. 《기사선생, 선생은 군사통치에 무슨 의견이 있습니까?》 스미스의 눈빛은 날카로왔다.
《나의 의견은 다른게 아닙니다. 앞으로 조선정부가 하게 될 일거리들을 <미군정>이 맡아서 수고할게 있겠는가 해서 해본 소리입니다. 》
《오우- 그래서입니까!》 스미스의 날카롭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본관은 우리의 노력과 수고를 충심으로 리해하려는 선생의 심정에 공감합니다. 우리 미국은 어디까지나 조선을 도와주자고 합니다. 》
스미스는 미국과 같이 유족하고 강대한 나라가 작고 가난한 나라를 탐내서 무엇하겠는가고 크게 웃으며 물었다.
《선생, 현재상태에서 조선이 자립할수 있다고 봅니까?》
《…》
《선생도 동의하기 어려운 모양이군요. 바로 그래서 우리 미국은 38도선 이남지역에서, 쏘련은 그 이북지역에서 선진국을 따라서도록 조선을 돕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선생에게 청하는것도 그런 취지에서 출발한겁니다.》
현구는 식민지의 후과로 경제가 기형화되고 퇴보된 조건에서 일정한 기간 외국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잘 알았습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는 은혜에는 보답이 따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은혜가 진실이라면 보답도 진심으로 될겁니다.》
《오우-매우 훌륭한 격언입니다. 현선생, 우리를 믿으십시오. 우리 미군이 설사 철수하게 된다 해도 농촌의 혼란상을 유감없이 정리해주고 떠나자는겁니다.》
스미스는 미군철수와 같은 절박한 관심사를 내대면서 현구를 유심히 바라보며 말을 그냥 했다.
《그러니 복잡한 농지문제를 해결해주자는 군정의 노력에 합세하는것이 조선사람으로서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현구는 스미스의 심정이 어느 정도 공감되였다. 해방과 함께 토지소유관계가 흔들리면서 한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피투성싸움이 벌어지고있는것이 지금의 농촌 현실태였다. 현구는 그러한 혼란상을 야기시킨 책임이 자기에게도 적지 않다고 반성하는터였다. 때문에 그처럼 복잡하고 치렬한 토지분쟁문제를 맡아나선 《군정》의 《용단》에 마음이 끌렸다. 토지문제는 건당으로 막강한 배경들이 작용하고 관계자들이 머리를 싸매고 날치는 문제여서 좀해서는 접어들기가 어려운것이였다.
《이야기된것처럼 남조선의 토지관계는 뒤죽박죽입니다. 우리 군정은 만난을 무릅쓰고 미군이 철수하기 전에 빨리 해결해주자고 합니다. 현선생, 우리의 이러한 호의적인 립장이 고맙게 생각되지 않습니까?》
현구의 너부죽한 얼굴에는 심중한 빛이 떠돌았다. 그는 감동된 어조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참사관각하께서 하시는 요청의 참뜻에는 리해가 됩니다. 저는 그처럼 힘든 과제를 손수 안고 나선 군정의 노력에 깊이 감동됩니다. 더구나 토지문제해결이 미군의 철수와도 관계된다고 하니 소홀히 대할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립장을 좀더 랭정하게 회계하여보자고 합니다.》
《현형, 뭘 그러시오. 토지측량전문가인 현형으로서야 군정의 은혜로운 지원을 고맙게 받아물고 나서야 하지 않겠소.》
대산이 황황히 끼여들었다.
스미스는 현구의 내심을 꿰뚫어보려는듯 그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전대산처장, 곡절이 많았을 기사선생의 의사인데 존중해야 하지 않겠소.》
양유종은 통역을 하면서 시종 스미스의 동향을 주시하였다. 예상밖에도 불쾌감이 아니라 관용을 베푸는 스미스의 언행에서 어떻게 하나 현구를 나꾸려는 그의 속심을 알아차렸다.
대산이 향란을 시켜 가져온 약주잔을 스미스에게 내밀었다.
《참사관각하, 드십시오. 찹쌀로 담근 이름있는 조선약주입니다.》
스미스는 노란색이 도는 맑고 감칠맛이 있는 술을 처음에는 음미하듯 입술에 대보다가 단숨에 쭉 마셔버렸다.
《현형도 한잔 받소. 주연석에서 제발 제 발등 찍는것과 같은 미련한 생각을 그만두오. 옆에서 어디 견디겠소.》
《연회》의 분위기를 한껏 돋구라는 대산의 눈짓을 받고 향란이가 탁자옆 전축을 틀었다. 경쾌한 무도곡이였다. 처음 스미스와 사교춤을 추던 향란이가 얼마 지나서 물러났다. 향란은 쏘파에 몸을 던지며 코를 찡그렸다.
(아유, 지독해라. 어쩌면 사람한테서 그런 냄새가 날가? 메스꺼워 죽겠네.)
향란은 과실즙을 마시며 연신 종알댔다. 향란이가 물러가자 스미스는 이번에는 은실을 상대자로 했다. 은실의 맵시나고 정확한 률동과 수집은 자태가 스미스의 마음을 대번에 끌어당겼다. 스미스는 단김을 내뿜으며 속삭이듯 물었다.
《은실양의 동작은 무용수같습니다. 어느 부문을 전공합니까?》
《영어과입니다.》
《아주 좋습니다. 영어는 국제공용어입니다. 우리가 영어로 통하고있지 않습니까.》
스미스는 은실의 날씬한 허리를 당기며 원을 그리였다.
《대학에서 류학추천이 끝났습니까?》
《아직은…》 은실은 수집음에 찬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은실양이 바란다면 제가 은실양의 미국류학문제를 특별히 힘써보겠습니다.》
은실의 긴눈섭이 물결치듯 설레였다. 은실은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였으나 너무도 유혹이 강해서 스미스가 이끄는대로 정신없이 돌아갔다.
쏘파에 비스듬히 몸을 제낀 대산은 내흉스런 웃음을 짓고있었다.
왜놈이나 양놈이나 호색동물이란 점에서는 짝이 기울지 않았다. 스미스는 정욕에 넘쳐 은실을 바싹 당기는가 하면 큰손으로 처녀의 어깨를 덮치듯이 그러쥐였다간 놓아주었다.
대산은 전축판을 갈아대며 속으로 쾌재를 올렸다. 첫 《연회》치고는 어느모로 보나 성공이였다. 다소 부족점이 있었다면 은실이가 야회복을 안 입은것인데 그것도 다음번 장식을 위해서는 눈감아줄수 있는 약점이였다. 이제 은실의 화려한 차림새를 보게 되면 스미스가 미쳐날것은 뻔했다.
얼마후 대산은 정문밖에서 스미스일행을 바래웠다.
기분이 붕 뜬 스미스가 승용차에 오르면서 이런 말을 남기였다.
《대단히 만족했소. 우린 유익하고 즐거운 <연회> 를 매우 좋아하오. 현구기사와 따로 상면할 날자를 인차 알리오.》
대산은 믿음에 감복하여 두눈을 슴벅거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이어 그는 떠나려는 현구를 쏘파에 눌러앉히였다.
《현형, 감상이 어떠하오?》
《정작 대면해보니 쪽발이들과 다르구만.》
《그렇소? 그렇다면 오늘을 기념해서 축배잔을 냅시다.》
대산은 자기도 참사관이 범같이 사납고 변덕이 심하다는 소릴 들었는데 그렇지 않다는것, 아무튼 당신을 초대한 보람을 느낀다고 역설했다. 자기의 수고를 알아달라는 소리였다.
《자, 맞잔을 합시다. 현형의 행운과 우리의 행운을 위하여.》 대산은 마음속으로 자기의 앞날이 현구를 통하여 활짝 열리게 되였다고 쾌재를 올리였다.
현구는 잔을 내고 대산이 주는 양담배를 받아물었다. 실로 미국인과의 상면은 전혀 예상밖이였다. 좌석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물음을 두고 불안해했으나 스미스만은 리해해주었던것이다.
(스미스참사관, 미국…) 담배연기를 삼키면서 현구는 한동안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 생각이 깊어갈수록 그의 머리속에선 스미스의 권고대로 토지문제에 협력하는것이 유익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면 일제시기에 잘못 처분되고 또 지금에 와선 혼란상태에 처해있는 토지문제를 바로잡을수 있고 직업문제도 해결될수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에 자신을 걷잡을수 없었다.
《현형,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오. 앞으로 참사관과의 관계에서 옥중에 있는 아들이 장애로 될가봐 그러시오?》 대산이 싱글벙글 웃으며 물었다. 현구는 그런 생각도 없지 않았다. 앞으로 참사관이 접근해온다면 아들문제가 암적존재로 될수 있을것이다.
《현형, 너무 상심마시오. 참사관과 인연을 맺아준 내가 현형을 궁지에 빠지게 하겠소.》 대산은 오늘 저녁 참사관의 그 모든 언행을 미루어보아 이제부터 현구를 단단히 거머쥐여야겠다는 속심에서 덧침을 쳤다.
《하긴 댁의 아들을 돌봐준다는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긴 하지요. 감방에서 지하조직을 꾸리고 반란을 추동하여 엄한 처벌을 받고도 개심하지 않고 지금도 지하공작을 계속하고있으니 말입니다.》
현구의 낯색이 금시 꺼멓게 죽어갔다. 이미 감옥전옥한테서도 들은 말이여서 그는 가슴이 조여들어 숨도 제대로 쉴수 없었다.
《현형, 너무 고심하지 마시우. 몸에 해롭겠수다. 내가 힘자라는껏 도와주겠수다. 》
《아무리 힘써준다 해도 원체 단순치 않은 일이여서?…》 현구는 억이 막혀 뒤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두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요. 이제 두고보시오. 내 아들을 현형앞에 데려오겠으니 맘 놓으시우다.》 대산의 흰소리에 고마운 감정도 없지 않았지만 그와 못지 않게 걱정이 앞섰다. 결코 대산이가 모종의 리득을 내다보지 않고서는 힘써주지 않을것이다.
현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벌써 일어나시우? 내가 미덥지 못해 그러오?》
《아니요, 집사람의 병이 걱정되여서…》
《그럼 잘 살펴가시오. 일간 반가운 소식을 가지고 찾아가겠소.》 반가운 소식이라는 말에 대산은 방점을 찍었다. 현구는 서두르며 밖으로 나왔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성렬선생의 집을 먼저 찾아갔다. 스미스에게 끌리는 자기 심정을 두고 그의 조언을 듣고싶었던것이다.
현구의 말을 주의깊게 다 듣고난 김성렬은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있다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선생의 고충이 리해되오. 스미스가 그런 권고를 했다면 일단 <군정>에 들어가놓고 보는게 어떻겠는지, 거기에 들어간다고 다 나쁜 사람이 되겠소. 언젠가도 내가 말했지만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간에 조선사람의 넋과 존엄을 버리지 않고 살면 되지 않겠소.…》 김성렬의 말뜻을 깊이 새겨보지 못한 현구는 자못 기분이 맑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