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장  찬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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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끝이 쌀쌀한데도 겨울옷을 입고다니는 사람은 없다. 서대문네거리에 이른 현구는 고서점을 향하여 전차길을 건너갔다. 갖가지 영업간판들이 줄지은 거리에서 고서점이 유표하게 드러났다. 건물고와 장식이 요란해서가 아니였다. 양복점이나 미장원은 물론 농산물상점까지도 간판들에 영문자를 써놓았지만 유독 《백의 고서점》만은 구태의연했다. 그닥 크지 않은 자에 약간 흘려쓴 글체는 예나 변함이 없었다. 어찌 보면 세월의 변천에 지나칠 정도로 둔감해보였다. 빈지를 제껴놓은 서점안에는 각종 책들이 그전보다 더 많이 쌓여있었다. 세상이 바뀌면서 끌어들인 책자들인지 벽면책장들과 진렬대를 채우고도 남아서 구석쪽에 무둑히 쌓여있었다. 서점에는 본래 고금동서의 원전들을 비롯하여 자연과학과 사회학분야의 책자들이 많이 구비되여있어 구독자들에게 유익한 도움을 주고있었다. 현구도 이 책방 덕으로 측량학과 관련된 전문지식을 습득했고 마음씨 무던한 주인내외의 신세도 많이 졌다. 책방주인은 환갑나이의 력사학자로서 지조가 있는 우국지사였다.

책들을 돌아본 현구는 서점뒤채를 차지한 주인으로 걸음을 옮겼다. 경무국지하실에서 풀려나온 현구가 선생에서 안정치료를 받은지 네해만에 찾아오는 곳이였다. 익은 대문과 구새먹은 추녀는 현구의 가슴을 쩌릿하게 해주었다.

(선생내외가 철직추방처분을 당했던 나의 그 소식을 오죽이나 알고싶어하였겠는가? 인사불성이지, 인사불성이야.)

세월이 바뀐 오늘날까지 아직 인사를 올리지 못한 자신이 깊이 뉘우쳐졌다. 그러한 자책감은 그들의 도움을 받았던 지난날들이 상기되면서 더욱 커졌다.

당시 현구는 노상 제기되는 각지의 측량작업에 몰리여 공부할 시간이 부족했지만 그보다 더 큰 애로는 책값이 모자라는것이였다.

그날도 고서점을 찾은 현구는 주머니를 털어서 고서 한권을 사고 다른 책은 책방구석에서 정신없이 읽어나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코에 안경을 건 점원이 이젠 책을 달라고 했으나 책에 심취된 현구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젊은이, 오늘은 그만 보고 래일에 다시 오구려.…》

점원이 두번째로 독촉해서야 현구는 간절한 어조로 량해를 구했다.

《이제 령남지방으로 내려가면 언제 올지 몰라서 그럽니다. 조금만 실례합시다. 》

점원은 은체도 하지 않았다.

《허허, 그렇게 필요하다면 가져다봐야지.》

서가옆 안방에서 웬사람이 나오면서 하는 말이였다. 책방주인이였다. 책방주인은 현구를 찬찬히 여겨보았다. 그리고는 방안으로 데리고들어가 차까지 권하면서 현구의 직업과 포부를 친절히 물었다.

현구의 대답에 깊이 감심된 책방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독학으로 대학과정안과 맞먹는 공부를 하겠다? 그건 말처럼 쉽지 않을거네. 결심과 각오는 대단히 훌륭하오. 나도 젊은이를 도와주겠네. 이제부터는 책걱정은 하지 말게. 여기 우리 고서점에 있는 책들은 값을 물지 말고 제것처럼 마음대로 가져다보게.…》

첫순간 자기 귀를 의심했다. 인심이 야박한 세월에 이런 사람도 있다는것은 놀라운 일이였다. 그날 현구는 눈굽이 확 달아오르고 목이 메여 고마운 책방주인에게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책방주인의 관심은 그에만 그치지 않았다. 약속대로 책들을 무상으로 제공하였으며 검정시험이 한과목씩 끝날 때마다 따뜻한 흰밥에 소고기국까지 려주었다.

책방주인 김성렬은 력사학자로서 그간 료수집과 고적들의 탐방에 시간을 바쳐오다가 왜놈들이 《씨개명》을 강박하는통에 세상 등지고 오직 학문연구에 전념하고있는 지체높은 사람이였다.

선생의 부인은 현구가 장가갈 때 새색시 첫날옷감까지 마련해주었다. 정말 잊지 못할 고마운분들이였다.

집안에서는 머리수건을 쓴 부인이 서재 퇴마루에 무둑히 쌓인 책자들을 정리하고있었다. 서점으로 통하는 자그만 사이문과 뜨락의 화분대며 안의 모습은 예나 다름이 없었다. 부엌앞에 놓인 약탕에선 약냄새가 풍기고있었다.

《사모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불손한 현구가 왔습니다.》

현구는 깊숙이 머리를 숙이였다. 부인은 두눈을 슴벅이더니

《이게 누구시오. 현선생이 아니시오.》 하며 책을 놓고 달려와 현구의 팔을 덥석 잡았다.

《어디에 가있었기에 이제야 오시오. 그간 집식구들은 모두 무사하오?》

부인은 검고 광대뼈가 두드러진 현구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현구는 산에 들어가살던 이야기를 간단히 했다.

《그러니 고생인들 오죽했겠소. 우린 그런줄도 모르고 이 고서점잊었는가 했지요.》

부인은 머리수건밑으로 흘러내린 자분치를 쓸어올리면서 기뻐 어쩔줄 몰라했다.

《령감이 곧 올거웨다. 얼마나 선생을 기다렸다구요.》

《선생님이 바깥출입을 하시는게지요?》

《그렇다우. 해방이 되자 영 사람이 달라졌다오. 집에 붙어있는 날이 드물어졌지요.》 하고 부인은 그동안 사연을 들려주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입성하신다는 희소식을 들은 령감은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당시 역전거리는 김일성장군님환영준비로 들끓었다. 서울역사와 앞광장은 오색기로 장식되고 《위대한 김일성장군 만세!》,《조선독립만세!》의 구호들이 번듯하게 꾸린 가설무대를 단장하였다. 대학생들과 로동자들, 지식인들이 크게 내젓는 대형붉은기폭들이 펄럭거리고 각지에서 달려온 군중의 물결이 드넓은 광장을 메우고있었다.

《그런데 글쎄 그날도 늦어서야 돌아온 령감이 마루끝에 앉아 담배만 우는게 아니겠소. 내가 조심스레 물어보니 장군님께서 부득이한 사정으로 못 오시게 됐다면서 서울시민들에게 인사를 보내셨다고 그러지 않겠소. 령감은 얼마나 락심천만했던지 식사도 못하셨다오. 그래서 나는 령감이 또 왜놈때처럼 바깥출입을 안할가봐 걱정했지요. 그런데 영 딴판이 아니겠소. 신설대학에 나가 강의도 하고 학자들의 모임에도 참석한다오. 그뿐인줄 아시우. 밤에는 출판물에 낼 글까지 쓰고있지요.…》

《그렇습니까?》

해방전과는 너무나도 판이한 김성렬의 생활은 현구를 몹시 기쁘게 해주는 동시에 년로한 몸이 걱정되였다.

《사모님, 선생님이 너무 무리하는게 아닙니까? 그러다 가뜩이나 건강치 못한 몸이…》

현구는 말끝을 맺지 못하며 얼굴에 그늘을 지었다.

《몸은 약으로 유지하고있지요. 헌데 경찰들때문에 근심이라오.》

《경찰이라니요? 이젠 씨개명이나 <내선일체>를 거부한다고 시비할 사람이 없겠는데요.》

《낸들 알겠소, 연설을 어떻게 했는지 그게 경찰의 비위를 거슬렸다지 않겠소. 해방이 되여도 말은 함부로 못하는가 보외다.》

부인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책구리를 잡았다. 현구도 책구리나르다가 부인에게 밀리워 서재로 들어갔다. 해빛이 흘러든 방안은 밝고 아늑했다. 큰 책상우에는 고문서와 신문, 잡지들과 원고지들이 쌓여있었고 벽면에는 두폭의 족자와 조선이라고 굵게 쓴 대형지도가 걸려있었다. 고조선과 고구려시기 광대한 령역과 강대성이 한눈에 안겨오는 옛 지도였다. 책상우에는 집필의뢰서들도 있었다. 한권은《조선력사의 유구성과 겨레의 얼에 대하여》였고 다른 권은 일제의 토지수탈정책과 죄악상을 구체적으로 밝혀달라는 청탁서였다. 력사학자인 선생이 토지문제에도 관여하는가? 현구는 강한 의혹에 청탁서에서 한동안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때 문득 뜨락에서 김성렬선생의 음성과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현구는 다급한 마음으로 방문을 열었다. 그 순간 김선생의 헌헌한 모습이 시선을 잡아당겼다. 더부룩한 수염에 늘 울적했던 그전의 모습이 아니였다. 턱수염을 밀어버리고 진한 밤색양복차림을 한 그의 모습은 10년은 더 젊어보였다.

《선생님!》

현구는 상봉의 기쁨과 격정에 목이 메여 인사말도 제대로 못했다.

《보고싶었소, 현구선생. 해방이 되니 이렇게 만나는구만.》

김성렬은 량팔로 현구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한동안의 감격적인 상봉뒤끝에 김성렬은 안에 들어가서 실내옷인 조선바지저고리를 입고 나오면서 물었다.

《산중에 들어가있었다구.…》 하며 김성렬은 마디가 굵어지고 투박해진 현구의 손을 잡고 쓰다듬었다. 《태백산오지라면 심산치고도 무서운 심산이지.》

그의 희끗한 머리가 의미있게 들렸다. 예로부터 조정의 미움을 샀거나 정사에 뜻이 맞지 않는 지사들이 속세를 떠나 은둔생활을 했던 곳이다.

이윽고 부인이 주안상을 들여왔다.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성의로 알고 많이 드세요.》

부인의 말과는 달리 주안상은 손색이 없었다. 육붙이와 분탕볶음, 대사에서나 쓰는 도라지나물 등 녀주인의 성의가 극진하였다.

빈손으로 스승을 찾아온 처지여서 현구는 몸둘바를 몰라했다.

《어서 나앉으시오. 기다리던 선생을 맞아서 차린 모양인데 지내 소박하구만.》하며 김성렬은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 제가 뭐라구 이렇게까지 환대하십니까.》

《무슨 말씀을… 선생은 왜놈의 세상에 등을 돌려댄분이 아니요.》

《아닙니다. 조선사람고 누군들 그러지 않고 견디였겠습니까.》

현구는 자기가 당했던 억울하고 분했던 경위를 이야기했다.

《우린 료를 받고 떠난 로 소식이 없어서 별 생각을 다 했소. 이렇게 만나 선생의 소식을 듣고보니 리해되오. 왜놈세상이 미워서 산속으로 들어간 그 용단이 대단하오. 없는 애들까지 슬하에서 떨구어놓고…》 하며 성렬은 자기 부인에게 현구의 잔에 먼저 술을 부으라고 권했다.

《선생, 받으세요. 동부인했더라면 더 좋았겠는데 날 꼭 함께 찾아주세요. 부인이 오죽이나 고생을 했겠어요.》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저를 생각해주는 고마운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꼭 같으시군요.》

현구는 가슴이 더웠다. 사실 자기로서는 참을수 없어 산으로 들어갔는데 그것을 조선사람다운 행동으로 높이 사주니 남달리 감격이 컸다. 동시에 오늘에야 비로소 찾아온 자신이 회되였다. 돌아오자마자 부닥치게 된 불길한 일들이 경악스러운데다 아들을 출옥시킬 길마저 막연하여 스승의 조언을 받자고 오늘에야 찾아왔던것이다.

《현선생, 오늘은 뒤골방에서 이러지만 미구에 성대하게 잔을 나눌 날이 올게요.》 하며 김성렬은 현구와 맞잔을 하였다. 하고는 처음보는 사람처럼 현구를 다시 눈여겨 바라보았다.

그는 여러해동안 현구의 행방을 수소문했었다.

김성렬은 자기가 그처럼 믿고 아끼는 현구가 《총독부》토지조사실 실장으로 승격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아연실색하였다. 왜놈하에서 살아가자니 그런 어용관리로 승격했으리라 생각되긴 했지만 그것이 동족을 해치는 일로 된다는것을 그가 과연 알지 못하고있었단 말인가.

성렬은 현구에게 어떤 환경에서도 민족정신과 관념을 잊지 않도록 깨우주지 못한 자기 불을 느끼고 그를 만나보려고 하였다. 현구의 발걸음이 뜸해져 좀처럼 만날수 없었다. 노엽기 그지없었다. 저수지사건에서 비싼 대가를 치르고서야 정신을 차린 현구를 보고 다소마음을 놓았었다. 헌데 집에서 료를 마치고 떠난 로 또다시 그의 종적이 없어진것이다. 그사이 세월은 흘러 나라가 해방되였다. 시국이 악화된 조건에서 소리없이 사라진 현구가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걱정되는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선생, 나는 선생을 만나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소.》

성렬은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선생님, 저 역시… 산속에서 갓 나오다보니 모르는것도 많구 답답한것도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성렬은 바깥세상과 담을 쌓았던 현구의 처지가 리해되여 조성된 정세를 개해주었다.

《해방이 됐지만 나라의 독립문제는 대단히 엄중한 난관에 직면하고있소. 미제의 남조선강점책동으로 하여 분렬의 위기가 조성되고있소. 또한 이런 기회에 형형색색의 당파들이 세력확장에 돌아치고 거리로는 양풍이 홍수처럼 밀려들고있소.

지금 시국형편은 조석을 가늠할수 없게 란되고있소. 이 복잡다단한 정세를 우린 옳게 투시해야 하오.》

성렬의 조언에서 현구는 직장문제에 대한 유종의 집요한 권고가 무엇에 기인되고있는가를 어렴풋이 깨닫게 되였지만 그보다 더한 감정에 압도되여 숨길이 꺽 막히였다. 왜놈이 미워서 떠났다가 돌아오니 이번에는 미군이 남쪽을 타고앉으려 한다는것이다.

《그러니 선생님, 해방이란 그저 명색뿐이 아닙니까.》

《아니요. 왜놈이 패망하고 나라가 해방된건 사실이요. 문제는 미군이 기여들어 주인처럼 행세하려 하고있는게요.》

성렬은 속이 타는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그는 벽면을 넓게 차지한 대형지도를 가리켰다. 자신이 직접 그린 조선력사지도였다.

《우리 나라는 반만년의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소. 그런고로 장구한 력사적기간에 무슨 사변인들 없었겠소.…》

성렬은 우여곡절에 찬 조선력사를 길게 이야기하였다.

《오늘처럼 북과 남이 두쪽으로 갈라진적은 없었소.》

성렬은 말을 마치며 통분해마지 않았다.

로인이 가슴아파하는 그것이 마치도 허리를 조이는 동아줄같기도 하고 몸에 박힌 칼날같기도 하여 현구는 술잔을 더 들지 못했다.

이윽해서 그들은 서재를 나섰다.

집밖의 등성이에는 봄풀싹들이 파랗게 내돋고 물오른 백양나무너머로는 인왕산의 거연한 웅자가 솟아있었다. 현구와 김성렬은 봄기운이 서린 언덕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국형편도 그렇고 이야기를 더 나눠봐야 할 문제들이 있었던것이다.

부인이 뒤따라오면서 령감에게 약을 먹고 모임에 떠날 시간이 됐다고 알려주었다.

1

2

 

《현선생, 전날엔 내가 말을 너무 길게 늘어놓지 않았소?》

낮은 책상을 마주한 성렬은 현구를 마주보며 물었다.

《아닙니다. 저는 많은것을 배웠고 또 알게 되였습니다.》

성렬은 머리를 끄덕이였다. 현구와 헤여진 그날 김성렬은 력사가들의 모임에 참석했던 인상이 지금도 강하게 남아있었다.

그날 서울시내 력사학자들이 모여 신설대학용 조선력사교수요강을 토의했었다. 그런데 과정이 순탄치 못했다. 우리 나라와 미국과의 관계에 대한 력사적고찰에서 두가지 견해가 상되였다. 우리 나라와 미국과의 관계를 우호적인것으로 제한 어용학자가 나타난것이다. 토론회에 참가한 많은 학자들이 그자에게 조소와 비난의 화살을 부었다. 그자는 당치않게도 자기 견해를 고집했고 미국을 해방자로 보는 몇몇 학자들이 그의 주장을 지지했다. 결국 그날 토론회는지부지되고말았다.

김성렬은 역겨운 그자의 몰골을 눈앞에 그려보면서 개탄하였다.

괘씸한 놈이거던. 신통히도 왜놈의 주구를 닮았단 말이요.》

바람새가 어지러운 밖을 내다보는 로학자의 안색은 신중해졌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 나라와 미국과의 관계는 애초부터 순탄치 못했소. 함대를 끌어다놓고 문호를 개방하라니 이게 도리에 맞고 국제관례에 맞는 처사겠소? 오늘에 와서보면 그때의 포함외교정도가 아니란 말이외다. 자기네를 해방자, 원조자로 광고하지만 미국의 속통을 보면 음흉하기가 짝이 없소.》 성렬은 쓰겁게 입맛을 다시였다.

《한심하고 위험한것은 그러한 력사를 진실 그대로 믿지 않으려는 얼간둥이들이 생겨나는거요. 그런자들은 미국을 제 할애비처럼 섬기려고 력사를 외곡하고 엄연한 사실들을 제멋대로 날조하고 과장하고 있지요.… 바로 이런 놈들이 지난날 왜놈들에게 나라를 팔아먹었소. 량심있는 우리 학자들이 어떻게 그런 놈들을 용서할수 있겠소.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그러한 주구들이 활개를 치지 못하게 즉시에 타격 주고 진압해버려야 하오.》

현구는 생각이 깊어졌다. 성렬선생은 미군을 침략자로, 또한 미국에 빌붙는자들을 주구로 치부하고있었던것이다.

부인의 권고대로 탕약을 마신 김성렬은 화제를 돌리였다.

《현구선생, 시간도 퍼그나 지났는데 미국에 대한 론의는 에 하기로 하고 내 청을 들어주오.》

이라니요? 어서 말씀하십시오.》 하며 현구는 머리를 기웃거렸다.

《선생만이 할수 있어서 그러오.》 성렬은 책상의 집필의뢰서를 가리키며 말했다.

《사람들이 내가 요즘 강연도 하고 글도 좀 쓰니까 무엇이든 다 안다고 여기는것 같소. 하지만 력사나 여느 사회학문제라면 몰라도 나는 토지문제를 잘 알지 못하고있소. 그런데 ××잡지사가 나한테 일제시기 토지수탈문제를 가지고 글을 써달라고 청탁해왔소. 처음엔 거절했다가 하도 요구가 간곡해서 할수없이 접수하였소. 현구선생, 좀 도와주오. 이건 단순한 청탁이 아니요. 지금 사회적으로 심중하게 제기되고있는 토지문제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 절박한 청탁이요.》

《…》

현구는 흥분하였다. 자기 죄스런 경력도 참고로 되는 측면이 있다니? 왜놈들의 토지수탈내막을 자기처럼 아는 사람도 치 않을것이다. 또한 토지문제에 한해서는 무관심할수가 없었다. 현구는 낮으나 저력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저도 농군의 자식이 아닙니까. 제 과거를 소급하는 일이라면 한번 해보겠습니다. 다만 걱정되는건 제가 꽤 잡지에 낼만 한 글 써내겠는가 하는겁니다.》

《나도 현구선생이 그렇게 나오리라고 믿었소. 글을 쓴다는것이 별게 아니요. 보고 체험하고 느낀바 그대로 쓰시오. 우리가 정리해서 잡지사에 보내주겠소.》

성렬은 한시름 놓인듯 얼굴에 회색을 띠며 몹시 기뻐하였다.

《허, 이젠 마음이 다 거뜬해지는군. 자, 그럼 우리 한잔 합시다.》하며 현구를 부인이 이미 주안상을 려놓은 아래방으로 이끌었다.

술이 몇순배 돌자 거나해진 김성렬은 앞으로 무슨 일을 할 생각인가고 현구에게 묻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지금같은 세월에 일자리를 얻기가 조련 않을거요. 현구선생의 전문지식을 쓰자고 할데가 있을것 같지 못해 걱정스럽구만.…》

《그러지 않아도 선생님한테 한번 문의하려고 했습니다. 한곳이 나서긴 했는데 마음이 들지 않아서 망설이고있는중입니다.》

《어떤데요?》

<군정청> 같은 기관입니다.》

현구는 미《군정청》의 통역관인 양유종과 나누었던 말을 자초지종 다하였다.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김성렬은 입속말로 뇌이였다.

《 <군정청> 같은 기관이라…》 하고 다시 골똘한 생각에 파묻혀있던 김성렬은 심없는 어조로 물었다.

《거기에선 선생에게 무슨 일을 시키겠다고 한답니까?》

《토지측량일을 맡길것 같습니다.》

《토지측량…》 하며 뭔가 석연지 못한 표정을 짓고있던 김성렬은 천히 말깃을 달았다.

《현구선생이야 그 분야의 권위있는 전문가인것만치 취직시킬수 있을거요. 하지만 이 자리에서 내가 꼭 하고싶은 말은 어데서 무슨 일 하든지 조선사람의 정신과 존엄을 잃지 말라는것이요. 내 말을 꼭 명심하길 바라오.》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의 뜻을 알겠습니다.》

《…》

그다음 두사람은 침묵속에서 술잔을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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