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3
박유진은 물속을 헤염쳐가는듯 했다. 어떻게 문이 열리고 남일부수상이 먼저 무슨 말씀을 어떻게 올렸던지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렬차집무실의 밝은 전등이 강렬한 빛으로 눈을 때리던것과 그가 깊숙이 허리굽혀 인사올릴 때 수령님께서 밝게, 해빛처럼 환하게 웃으시던것만이 사진처럼 기억에 찍혀졌다.
《반갑소, 유진동무. 어서 이리 오시오.》
수령님의 음성은 묵직하면서도 한없이 따스하였다. 유진은 그렇듯 부드럽고 따스한 음성을 봄날의 빛처럼, 공기처럼 벅차게 호흡하였다.
《배에서 찍은 우리 유진동무 사진을 본게 언제였더라?》
이번에도 유진은 물고기처럼 입만 벙긋거렸다. 남일부수상이 그를 대신하여 말씀드렸다.
《지난해 7월이였습니다, 수령님. 제가 청진수산사업소 영예게시판에 붙어있던것을 가져다드렸댔습니다.》
《그랬지, 음… 그때 내 전화로 알아보니 모두들 우리 유진동무가 배사람이 다됐다고, 앞날의 영웅감이라고 굉장히 자랑한다는게 아니겠소. 김태규랑 김학순이랑 내가 늘 내세우고 자랑하는 동해의 영웅선장들이 바로 그렇게 보증하더라는거요. 그래서 남일부수상이 청진에 가는 기회에 그를 만나면 사진이라도 한장 찍어오라구 했더니, 하!… 유진인 원양에 나가구 없구 해서 영예게시판에 붙어있는걸 떼왔다는게 아니겠소, 핫하!…》
수령님께서는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렬차칸을 쩡쩡 울리는 그 호탕한 웃음에도 진정 친어버이의 웅심깊은 사랑과 믿음이 가득차있었다.
《그래 배에서 내리니 어떻소. 배사람들이 그립지 않소?》
《예, 그립습니다. 수령님! 맨날 그들이 생각나구 꿈속에서도 보이군 합니다.》
수령님께서는 다시 크게 웃으시였다.
《인젠 말씨까지도 같아졌소, 엉?!… 그래 좀 터놓구 말해보오. 배를 타면서 무얼 제일 크게 느꼈는지, 응?…》
《예, 수령님. 배를 타면서 전…》 박유진은 어언 어려움도 다 잊고 말씀드리고있었다. 《조선사람이 되자면 어떤 심장을 안구있어야 하는가를 실지 생활을 통하여 절실히 느끼구 배웠습니다. 이 땅에 태여났다구 해서 다 조선사람이 되는것은 아니였습니다. 무엇보다 조선의 넋을 가슴에 안구 그걸 귀중히 여길뿐아니라 목숨으로 지킬줄 알아야 한다는것을 새롭게 배우고…》
《허허… 이것보오, 남일동무. 우리가 유진동물 배에 태우기 정말 잘한것 같구만, 응?!》
《예, 그렇습니다. 수령님, 그새 정말 몰라보게 달라졌습니다. 배사람답게 걸걸하구 호방해지구…》
《우리의 미래요.》 하고 수령님께서 뜨거움에 젖어드는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고리타분한 봉건분내나 노린내 섞인 부르죠아향수에도 물젖지 않는 미래이지, 모든것을 자기 식으로 생각하고 자기 식으로 말하고 자기 식으로 실천하는 미래!… 내가 바란것이 바로 이것이란 말이요.》
수령님께서는 박유진의 어깨에 한손을 다정히 얹으시였다. 자애와 믿음이 천만근의 무게로 실려있는 손길이였다.
《난 동무가 앞으로 훌륭한 무역일군이 되여 조국에 크게 기여하길 바라오.》
박유진이 벌떡 일어서려 했으나 수령님께서는 그를 그냥 눌러앉히시였다.
《무역을 단순한 장사일로만 생각해선 안돼. 옛적에도 장사일엔 상도 즉 장사의 도리가 있어야 한다며 상도이자 인도라구 했소. 장사의 도리는 돈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살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지. 그러면 우리 사회주의조선의 무역일군은 어떤 좌우명을 가져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조국과 민족의 존엄, 자존심을 근본으로 삼는거요. 비굴하고 구차스럽지 말고 야박하거나 표리부동하지 말며 의리를 중히 여기되 조국과 인민의 리익이 침해당하지 않도록 몸바쳐 일해야 한다는 말이요.》
《알겠습니다, 수령님! 그 말씀을 한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힘껏 일하겠습니다.》
《그러리라고 믿소, 믿어. 그럼 유진동문 이제부터 꾸바와 윁남을 비롯한 반제반미투쟁에 나선 나라들과의 무역 및 지원사업을 위주로 맡아봐야겠소.》
《?!…》
박유진은 숨을 죽이고있었다. 수령님께서 지금 특별히 중대한 과업을 주신다는 생각에서였다.
수령님께서 계속하시였다.
《특히 꾸바와 윁남과의 사업을 잘해야 돼. 재삼 말하지만 무역일군이라고 해서 절대 무슨 돈벌이를 위한 거래로 생각할게 아니라 지원이라는것을 잊지 마시오. 우리와 한전호속에서 피흘리며 싸우는 전우들에게 주는 정신적 및 물질적지원!…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예, 수령님! 잘 알겠습니다.》
그 순간 꽤액!― 하고 기적소리가 울렸다. 길게 목청껏 웨치는 소리였다.
4
장정환은 아바나항공역으로 차를 달렸다. 모스크바에서 리륙하여 아일랜드의 쉐논비행장을 거쳐 대서양을 횡단하기까지 무려 14시간동안이나 날아오는 쏘련의 《일―19》형국제려객기가 아침 8시 35분에 도착하게 되여있는것이다. 그 비행기에는 지금 5명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업기술대표단 성원들이 타고있다.
항공역에 도착한 장정환은 역사의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박한 단층건물이였다. 대기실도 조금 비좁고 복잡했는데 랭풍장치만은 훌륭했다.
마침 대기하고있던 항공역사의 갈색미인인 안내원이 장정환을 건물 서쪽에로 낸 복도를 따라 안내하였다.
《대사선생, 저쪽귀빈실로 가셔야겠습니다.》
장정환이 의아해하며 통역도 겸하고있는 대사관 문화참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 비행기도착시간이 달라졌다오?》
《아닙니다. 저기 귀빈실에서 엔리께 로뻬스공업상이 대사동지를 기다리고있다고 합니다.》
《엔리께공업상이?…》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한 나라의 상이 직접 외국의 보통공업기술대표단을 마중한다는것은 외교관례에서 매우 이례적인것이다. 특히 엔리께 로뻬스는 꾸바혁명정부내에서 체 게바라이후 공업부문사업을 맡아보는 권위있는 인물이였다.
엔리께는 장정환이 들어서자 급히 자리를 차고 일어나 반갑게 마주나왔다. 서로 너무도 잘 아는 사이여서 공식적인 인사말은 필요없었다.
《대사선생.》 하고 엔리께는 그의 손을 잡고 가볍게 두드리며 말하였다. 《먼저 한가지 알려드릴것이 있습니다. 좀전에 피델 까스뜨로수상이 나더러 귀국의 기술대표단을 직접 맞이할데 대한 지시를 주었습니다.》
《예―그렇습니까?》
《그뿐이 아닙니다. 피델은 저녁에 까삐똘리오에서 간단한 환영모임을 준비하라고 하였습니다. 피델수상자신도 꼭 시간을 내겠다면서…》
《까삐똘리오에서 말입니까?…》
장정환은 그제서야 벌어진 사태를 짐작할수 있었다. 그렇다면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피델 까스뜨로가 무시로 장정환을 찾군 하여 아바나에서는 세계 여러 나라의 외교관들중 조선대사야말로 피델수상과 같이 한피줄을 타고난 형제처럼 제일 절친한 사이로 소문났기때문이다. 뿐더러 피델수상은 조선에서 오는 대표단이라면 그 급수에 관계없이 모두 자신이 직접 만나주군 했다.
마침 활주로에 내린 비행기가 항공역사가까이 미끄러져오는것이 벽을 통채로 덮은 창유리로 내다보였다. 장정환은 엔리께일행과 같이 급히 밖으로 나갔다.
비행기사다리로 내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보통 수수한 려객들이였다. 그중에서 꼭같은 옷차림을 한 동양인들 몇사람이 유표하게 눈에 띄였다.
장정환은 문화참사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그가 급히 달려가 그들과 인사를 나누더니 곧장 엔리께가 기다리고있는 특별출구쪽으로 데리고왔다. 그는 엔리께에게 5명의 대표단성원들을 차례로 소개하였다.
《상동지, 이분은 대표단단장인 박유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무역성 국장입니다. 그리고 이분은 뜨락또르공장 부기사장동지, 또 이분은…》
엔리께가 먼저 박유진과 기타 대표단성원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정환은 마치 기록영화의 화면에서 걸어나오는 사람들을 쳐다보듯 입을 벌린채 굳어져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매부 아니, 대사동지.》
박유진이 반갑게, 눈이 보이지 않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장정환은 얼결에 손을 쑥 내밀긴 했으나 입을 열수가 없었다. 너무도 뜻밖이여서 그를 어떻게 불러야 할는지도 알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도 좀 뒤늦게야 통성을 했다. 기양뜨락또르공장의 부기사장과 2월5일공장의 기술준비실 실장, 룡성기계공장의 책임기사를 비롯한 우리 나라 기계제작공업의 여러 부문 기업소의 일군들이였다.
엔리께가 빨리 차에 타라고 재촉해서야 그는 유진에게 가만히 귀띔했다.
《자넨 내 차에 타게.》
장정환의 승용차는 엔리께공업상의 《라바》형은 물론 조선공업기술대표단을 위해 나온 정부대기차들보다 훨씬 급이 높았다. 박유진이 놀라와하는 눈길로 두리번거리는데 장정환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도 아바나적으로 단 두대밖에 없는 차일세.》
《예?!…》
《이 차는 피델 까스뜨로수상이 직접 이전 홍동철대사에게 선물하였지. 그러니 다른 차 한대는 누가 타겠는지 어디 한번 짐작해보게.》 그는 차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박유진을 옆으로 바싹 잡아끌었다. 《빨리 문을 닫게.》
차안은 고급승용차답게 랭풍장치가 잘되여 서늘하였다. 장정환은 운전사에게 엔리께공업상의 차를 앞세우라고 지시하고나서 하던 말을 계속했다.
《사실 이 승용차 하나만 놓고보아도 피델을 비롯한 꾸바인민들이 우리를 얼마나 높이 일러주고 존경하는지 잘 알수가 있지. 뭐, 이전 홍동철대사나 이 장정환이가 남보다 잘나서 그랬겠나? 아니야. 그건 바로 피델 까스뜨로와 꾸바인민들이 우리 수령님을 진심으로 흠모하고 존경하기때문이네. 이걸 알아야 해.》
《예.》
항공역사에서 아바나시 중심부에까지 가려면 약 20분남짓이 차를 달려야 한다. 열대지방의 특이한 풍치를 돋구는 빨마라고 하는 야자나무 비슷한 가로수들이 길좌우에 키높이 줄지어 늘어서있는것이 이채로왔다. 그 나무들사이로 드문드문 낡고 키낮은 독립가옥들이 동서남북 가림없이 되는대로 들어앉아 문을 열어놓고있는것이 보였다. 시꺼먼 입을 쩍 벌린것 같은 집들이 많았다. 혁명이전의 자취를 가시지 못한 가난과 빈궁의 때묻은 모습이였다.
장정환이 또 뭐라고 한것 같았다. 유진이 머리를 돌리자 그는 쓰거운듯 말했다.
《내 말은 듣지도 않는군, 응?!》
《아, 그런게 아니라…》
《그럴수 있지, 처음 보는 열대풍경이니까.》 하고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여 입에 물었다. 《그새 난 처남이 바다에 나가 배를 타면서 어떻게 살며 일했는지 다 알아보았네. 얼마전엔 우리 대사들이 조국에 가서 당대표자회결정관철을 위한 강습까지 받았으니 왜 모르겠나. 헌데 이번일만은 정말 깜짝이네. 도대체 무슨 구름을 탔기에 이렇게 높이 대표단 단장까지 되여 날아왔나, 응?!…》
《저, 그건…》
유진은 말을 더듬었다. 그것을 어떻게 몇마디의 말로 다 이야기할수 있으랴. 그는 눈시울을 떨며 얼마전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뵙던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장정환은 묵묵히 귀를 강구고있었다. 커다란 감동이 그의 둥실한 얼굴에 파문짓고있었다.
《음… 우리 수령님 아니고서야 누가 그렇게 죄진 자식을 품어주겠나. 일을 잘해야 돼. 수령님의 은덕을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잊지 말아야 해.》
그는 흥분을 이길수 없어 불이 꺼지지 않은 담배를 힘껏 빨았다.
알싸한, 목이 타드는듯 한 독한 연기가 뿜어나왔다. 참지 못하고 박유진은 줄기침을 터뜨렸다.
《원, 바다사람이 다 됐다더니만…》
장정환은 담배불을 껐다.
마침 승용차는 시내중심을 달리고있었다.
《앞에 보이는것이 호쎄 마르띠혁명광장이네.》 장정환이 설명했다. 《저 높은 탑밑에 화강석상이 있지? 그게 바로 꾸바의 민족적영웅 호쎄 마르띠일세.》
호쎄 마르띠혁명광장에서 말레꽁해안거리에 있는 우리 대사관까지는 멀지 않았다. 장정환이 대사관을 손으로 가리켜보였다.
《우리 대사관일세.》
그때 앞에서 달리던 엔리께의 차가 갑자기 삐―익! 하고 아츠러운 소리를 내며 멎었다.
장정환이 통역을 겸한 문화참사를 돌아보며 빨리 가서 알아보라고 했다. 그가 차에서 내려 그쪽으로 달려가니 반쯤 문을 열고 나서던 엔리께가 무슨 말을 했다. 문화참사가 머리를 돌렸다.
《호텔로 곧장 가겠는가 대사관에 들리겠는가고 묻습니다.》
《대사관부터 먼저 들려야지.》 장정환이 큰소리로 말했다.
《제집에도 안 들리고 호텔부터 갈수야 없지, 응?!》
《예, 옳습니다.》
문화참사가 앞차에 가서 말하자 엔리께는 차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흔들었다. 호텔로 먼저 가겠다는 의미같았다.
장정환이 유진이에게 말했다.
《대사관에 들어가서 우리 사람들과 인사도 하구… 그담 처남에게 아니, 단장에게 보여줄것이 또 있네. 자넬 잊지 못해하던 동창생이 남긴걸세.》
《예?!》
《아다 미헬쏜 말일세.》
별안간 유진은 숨이 꺽 막히는듯 했다. 아까부터 묻고싶었던 아다 미헬쏜에 대한 이야기가 불쑥 튀여나온것이다. 비록 매부인 장정환은 지나가는 소리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했을수도 있지만 박유진은 그 어떤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타고 칼날같이 스쳐가는것을 느끼고있었다.…
×
피델 까스뜨로가 간단한 환영모임장소로 정한 까삐똘리오는 미국백악관과 꼭같은 모양을 가진 건물이다. 1920년대에 10년이나 걸려 건설한 국회청사로서 지금은 민족박물관으로 리용되고있다고 한다.
엔리께상을 따라 원형지붕으로 높이 솟구친 대리석원주들사이를 걸어가느라니 대형구리초대들과 녀신상도 눈에 띄였다. (녀신상은 꾸바의 자주독립과 평화를 상징한다고 한다.)
피델 까스뜨로는 3층의 국회회의실(지금은 외국대표단들과의 면담실 및 회의실)에서 장정환대사와 박유진일행을 만났다. 거구의 체격에 지칠줄 모르는 열정과 활달한 손짓, 몸짓을 배합하여 수십만청중의 마음을 깡그리, 송두리채 틀어잡는것으로 유명한 피델이였다. 그래서인지 그가 한 첫인사말도 매우 인상적이였다.
《우리의 친근한 장정환대사선생 그리고 혁명적인 조선에서 온 귀중한 벗들, 여러분! 내가 오늘 여기 까삐똘리오에서 당신들을 만나기로 한것은 이 집이 악명높은 미국의 백악관과 꼭같은 건물이기때문입니다. 그런즉 당신들, 세계에서 처음 미제를 때려부시고 무릎꿇게 한 영웅적조선의 대표들이 미국의 백악관을 타고앉는것이야 응당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런 의미에서 여기 아바나에 호화호텔들도 없지 않지만 바로 많은 사람들이 미국식으로 〈호와이드 하우스〉라 부르는 이 건물에서 당신들과 마주앉기로 했던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혹시 건물이 구식이라 해서 불만스러워하는분들은 없는지?…》
구리초대들에서는 굵은 초들이 경쟁적으로 빛을 발산하고있었다.
천정에 무리등들도 많았지만 그것들은 켜지 않았다. 초불이 더 친근하고 온화한 분위기를 마련해준다고 피델이 말했던것이다.
담화는 세시간나마 계속되였다. 피델은 조선의 자립적민족경제건설과 그 성과들에 대하여 일일이 구체적으로 료해하면서 기계부문과 외국어에도 능통한 박유진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구성에 대해서도 커다란 만족을 표시했다. 이어 그는 빈터나 다름없는 자기 나라의 기계제작공업의 실태와 조선기술자들에 대한 커다란 기대감도 솔직히 터놓았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여기엔 쏘련의 군사고문들과 기술자들이 절대다수였습니다.》 하고 피델은 꾸바의 유명한 려송연이며 레몬차, 파이내풀 등을 대표들에게 손수 권하며 흥분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까리브해의 위기때 흐루쑈브가 미싸일과 중폭격기들을 철수해간 다음 쏘련사람들은 하나, 둘 다 빠져나가고 대신 조선동지들이 와있습니다. 귀국의 영명한 수령이신 김일성동지께서 진심으로 우릴 도와주시려고 보내주신 사람들입니다.》
그는 접대원이 바꾸어놓는 차와 커피를 거의 습관처럼 조금씩 입술에 대여 맛보고는 그대로 놓고말았다. 마치 순간이라도 지체하면 류창한 열변의 물결이 여울에 걸려 떠질가봐 저어하는듯 한 표정이였다.
《사실 김일성동지께선 우리 꾸바혁명을 보위하기 위해 10만정의 자동보총과 수많은 무기, 전투기술기재들을 보내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마련된 무기들입니까. 나는 언젠가 체 게바라동지가 귀국을 방문했을 때 가져온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체는 그 책에 자기는 강물속에 빠져 죽으면서도 권총 한자루를 동지들에게 던져주는 렬사의 이야기도 있다면서 얼마나 감동적으로 말했는지 모릅니다. 사실 우리도 일곱자루의 보총을 가지고 혁명을 시작했으므로 총 한자루, 한자루에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스며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귀한 무기와 전투기술기재를 김일성동지께서는 우리 꾸바에 아낌없이 보내주셨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귀국에선 우리 나라에 갖가지 기계설비들과 지어 축구와 권투, 녀자배구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체육고문들, 사탕수수수확을 돕는 청년지원대까지 보내주고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꾸바사람들은 우리의 가장 진실한 벗이며 스승이신 김일성동지를 무한히 존경하고 따르고있는것입니다.》
열정적인 피델!… 박유진은 그의 장대한 체구와 그에 어울리게 거뭇하니 자란 유명한 구레나룻이며 재빠른 손세를 홀린듯이 바라보았다. 소탈하고 쟁쟁한 그의 목소리를 호흡하듯이 빨아들이며 어느 한순간 저도 모르게 바르르 눈시울을 떨기까지 했다.
불현듯 아다 미헬쏜이 상기되였다. 아까 매부인 장정환대사가 슬그머니 꺼내준 그의 편지에 씌여져있던 비탄의 글줄들이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고통과 비애에 찬 흐느낌을 털어놓던 아다 미헬쏜, 그의 눈물에 젖은 목소리가 귀전을 허비고 가슴을 저미였다.
…그랬어요. 남편 표도르 꿀리꼬브는 군사기술고문으로, 난 기계기술자로서 여기 꾸바에서 행복한 살림을 폈건만… 이렇듯 무서운 불행이 겹칠줄이야…
난 비록 유태인이지만 나를 키워주고 공부시켜준 위대한 쏘련을 사랑했고 진정한 나의 조국이라고 지금껏 믿어의심치 않았어요. 하지만 그들, 흐루쑈브와 그의 비겁한 권력의 하수인들은 여기서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미싸일과 비행기들을 철수해가면서 나의 꿈과 사랑, 위대한 쏘련공민의 존엄까지 다 걷어안고 가버렸어요.
남편도 제일 먼저 떠나가게 되였어요. 그런데 이게 도대체 웬일이겠어요. 그는 차라리 잘되였다고, 미싸일을 안고있다가 제일 선참 불고기가 될번 했는데 인젠 정든 로씨야로 돌아가 행복한 살림을 펴게 되였다고 기뻐하는게 아니겠어요. 그는 꾸바사람들이 지금 우릴 내놓고 경멸하며 속으로 침을 뱉고있지만 그들이 미싸일이 무언지, 핵탄두가 무언지, 그 후과가 얼마나 무서운것인지 알기나 하는가고, 그런 미개한 종족들을 위해 내가 목숨까지 바쳐야 할 리유가 무엇인가고 하면서…
아, 아! 나의 표도르! 그가 어떤 사람이였던가요. 늘 자기는 제2의 피델이라고(로어로는 표도르이지만 에스빠냐어로는 피델이라는것을 아시지요?) 으시대던 사람, 그렇듯 긍지높고 존엄높던 쏘련군사과학아까데미야의 한 성원이였던 표도르가 미국의 군함과 비행기들이 날아들며 위협공갈을 들이대자 그렇듯 비겁하고 치사한 졸장부가 될줄이야 어찌 상상인들 했겠나요. 나는 그만 환멸을 느끼고말았어요. 우리도 조선사람들처럼 꾸바를 돕자고 하는 말에 그는 남겠으면 남아있으라, 막지 않겠다. 인젠 당신도 내겐 필요없다면서… 아, 아! 그렇듯 달라진 그를 보면서, 그렇듯 비렬해진 그를 보면서 내가 지금껏 사랑해온 모든것이 허울이라는걸 알게 됐어요. 결국 표도르가 나를 서슴없이 버렸듯이 내가 그처럼 믿어왔고 사랑해온 조국도 이 가엾은 나 아다를 가차없이 차버렸다는것을 말예요. 그래서 목놓아울어요. 얼마전 귀여운 딸애를 잃었을 때처럼(내가 보내준 사진들을 보셨지요?) 너무도 기가 막혀 땅을 허비고 가슴을 쥐여뜯으며 울고 또 울었어요.…
장정환이 그의 무릎을 건드리는통에 유진은 아다의 눈물어린 호소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피델의 부관이 들어와 무어라고 가만히 속삭이고있었다. 피델의 활기에 넘쳐있던 얼굴에 일순 어두운 그림자가 비꼈다.
《아, 여러분, 대단히 미안하게 됐습니다.》 피델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급한 일이 제기돼서 나는 먼저 자리를 떠야 할가봅니다. 미국의 저 검질긴 양키제씨들이 잠시도 쉴새없이 우릴 들볶아대니 어쩌는 수가 없군요. 부디 량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의 긴 연설때문에 지금껏 배를 곯았을수도 있겠는데 이제는 맘놓고 드셔도 되겠습니다.》
그는 부관을 따라 출입문쪽으로 가다가 불쑥 장정환을 돌아보며 《대사선생, 나 좀…》 하고 가만히 손짓하는것이였다. 장정환이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웃으며 물었다.
《대사선생, 헤니일은 왜 데리고오지 않습니까.》
《아, 우리 현일이 말입니까?》
《나야 그 애와 친구지간이 아닙니까. 일없습니다, 통역겸 데리고와도 됩니다.》
《예, 하지만 우리 앤 원체 잠꾸러기가 돼놔서…》
《핫하하… 귀여운 녀석!》 피델은 소리내여 웃더니 뒤를 돌아보며 사람들모두에게 손을 들어 군대식으로, 손바닥이 앞으로 보이게 거수경례를 보냈다. 《여러분, 안녕히! 래일 광장에서 다시 만납시다.》
부관이 아까부터 문을 열고 기다리고있었다. 피델은 또 한번 손을 들어 인사하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그를 바라보면서 유진은 불시로 눈시울이 사뭇 떨리는것을 느꼈다. 피델 까스뜨로!… 소탈하고 정의롭고 락천적인 꾸바혁명의 령도자, 하기에 아다 미헬쏜도 저 피델수상에게 자기의 마음속 진정을 털어놓으려 하지 않았던가!…
오래 생각던 끝에 나는 피델 까스뜨로수상에게 편지를 쓸가 하고도 생각했댔어요. 하지만… 내가 무슨 명분으로 그분께 편지를 쓰겠나요. 표도르를 대신해서 또 흐루쑈브를 대신해서 사죄를 하겠나요? 과연 나같은게 뭐라고?…
결국 따와리쉬 박을 찾게 되였어요. 귀국의 친절하고도 엄엄한 장정환대사도 만났구요. 그의 권고로 난 여기 남기로 했어요. 조선사람들처럼 몸바쳐 꾸바를 도우며 여기서 나의 새 조국을, 새로운 련모의 대상을 찾고싶었어요. 헌데 그만 이렇게 병상에 몸져누울줄이야…
중병에 걸리고보니 이 아다 미헬쏜이 얼마나 불행한가를, 얼마나 가련한 인생인가를 절감하게 되는군요. 그래요, 지금 나에겐 미래가 없어요. 왜 이리 비참하게 됐을가요? 한땐 박유진 당신과 같이 수재로 인정받던 내가, 앞날이 창창하다고 만사람이 축복해주던 내가 왜 이렇게 됐을가요, 예?!…
이 편지도 병상에서 쓰고있어요.
사실 난 지난날 쏘련이라는 존엄높은 대국을 나의 진정한 조국으로 삼고 마음속으로 끝없이 사랑했어요. 하지만 내게 차례진것은 과연 어떤 운명이였던가요? 지금 나에겐 사랑도 남편도 자식도 없고 조국도 없어요. 이 세상 어디에 과연 나를 건져주고 지켜줄 참된 사랑의 품이 있을가요?… 말 좀 해보세요, 따와리쉬 박. 이게 도대체 누구의탓인가요. 무엇때문에, 누구때문에 이런 불행을 겪어야만 하는가요?…
까삐똘리오에서의 환영모임이 끝난 뒤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장정환이 먼저 유진에게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아다의 편지를 보구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나도 좀 알면 안되겠나?》
유진은 잠시 생각하고나서 이렇게 되물었다.
《제가 편지를 읽어드릴가요?》
《아니, 필요없네. 그 녀자가 편지내용을 다 말해줬으니까.》
《그래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번엔 박유진이 먼저 물었다.
《그 녀자를, 아다 미헬쏜… 좀 만나볼수 없습니까?》
《?…》
장정환은 웬일인지 입을 꾹 다물고 눈시울만 흠칫거리고있었다. 잠시후엔 머리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옮기고말았다. 그 순간 유진은 첨부터 아다를 질색하던 매부였으므로 끝내 대답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아닐세라 그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승용차는 해안가에 난 도로를 달리고있었다. 습한 무더위로 하여 진득진득한 느낌에 진저리나는 열대의 밤이였다. 도로의 우측에서는 세찬 파도가 희끗거리며 어둠을 휘젓고 기슭의 방파제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지는것이 내다보였다.
그렇게 한동안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승용차는 호쎄 마르띠호텔정문앞에 이르렀다. 박유진은 차에서 내리며 정중히 인사했다.
《대사동지,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장정환은 인츰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입귀를 잔뜩 찡기고있더니 무뚝뚝하게 말했다.
《래일 우리 나라 지원물자증정식이 끝난 다음… 만나보자구.》
《아니, 무슨 말씀인지?…》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아다를 만나보고싶다구.》
장정환은 손을 들어보이고 차문을 닫았다.
…호쎄 마르띠혁명광장에서 수만군중이 참가한 가운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보내온 지원물자증정식이 끝난 후 박유진은 다시 장정환대사의 승용차에 올랐다. 이미 장정환의 지시를 받은 모양 운전사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바나교외의 남쪽수림지대로 차를 몰아갔다.
아름다운 열대풍경이 차창너머로 끝없이 흘러가고있었다. 그곳은 《엑스뽀 데 꾸바》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유원지로서 레닌공원, 식물원, 동물원, 꾸바경제성과전시장들이 있고 여러 휴양소, 료양소건물들도 숲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있다고 한다.
승용차는 어느 한 작은 공지를 앞에 두고 멎었다.
차에서 내린 장정환이 먼저 앞에서 걷고 한손에 백합꽃송이를 든 박유진은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키낮은 떨기나무들이 암팡스레 둘러앉아있는 곳에 크지 않은 새까만 대리석비석이 눕혀져있었다. 그 대리석판우에는 그 누군가가 쓴 글이 또렷이 새겨져있었다.
아다 미헬쏜 (1932. 4. 9. - 1966. 11. 13.)
그것이 전부였다. 고향도 자식도 밝혀있지 않는 고독한 묘비… 박유진은 거기에 백합꽃송이를 놓고 머리를 숙이였다. 조용히 묵도했다. 정적… 바람소리조차 없다. 마음속에서는 아다의 편지구절들이 오열에 떨리는 목소리로 끝없이 울리고있었다.
지금 나에겐 사랑도 남편도 자식도 없고 조국도 없어요.…
따와리쉬 박, 이 세상 어디에 과연 나를 건져주고 지켜줄 참된 사랑의 품이 있을가요?… 말 좀 해보세요, 따와리쉬 박. 이게 도대체 누구의탓인가요. 무엇때문에, 누구때문에 이런 불행을 겪어야만 하는가요?…
장정환이 다가오더니 음울한 어조로 말했다.
《그 녀자는 자기를 이스라엘에 보내주는것도 바라지 않았네. 세계에서, 특히 중동에서 침략자로 악명을 떨치고있는 이스라엘을 자기의 조국이라고 부를수 없다면서… 차라리 기계공학자로서 자기의 피땀도 스며있는 여기 꾸바에서 눈을 감겠다고 고집했다네. 그 사정을 내가 엔리께공업상에게 말했더니 그는 또 어느 기회에 피델 까스뜨로수상에게 보고했더구만. 피델도 무척 감동되였다네. 그렇지만 어쩌겠나. 너무 늦었으니… 그래서 뒤늦게나마 그 녀자의 장례를 잘 치르어주도록 했지.…》
유진은 불이라도 삼킨것처럼 헉― 하고나서 힘들게 물었다.
《그가 나한테 무슨 부탁을… 더 남긴건 없습니까?》
장정환은 머리를 저었다.
《없네, 편질 꼭 전해달라는것밖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유진에게는 너무도 참기 어려운 침묵이였다.
박유진 자기와 이상야릇한 운명의 쌍곡선을 그리며 살아온 아다 미헬쏜, 그의 마지막소원은 무엇이였을가?…
장정환이 그를 눈여겨보고있었다. 그의 마음속 생각을 낱낱이 읽고있는듯… 드디여 그는 두손을 맞잡고 손가락마디를 딱딱 소리내여 꺾으며 나직이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체 게바라의 국제유격대를 부러워했네.》
《체 게바라의 뭐라구요? 무슨 국제유격대?!…》
《응, 그런 유격부대가 있네. 이제 곧 온 세상이 다 알게 돼. 그건 그렇구…》 장정환은 버릇처럼 담배를 꺼내들었으나 입에 물지는 않았다. 《그 녀잔 체 게바라의 국제유격대에 대해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는가고 나에게 울면서 하소연하더군.》
《그럼 거기에 갈수도 있었습니까?…》
《아니, 그저 해보는 소리지. 아마 그 녀자가 체 게바라를 따라갔더라면 전투장에서 제2의 조국을 부르며 마음편히 눈을 감았을수도 있었으련만… 참 불쌍한 녀자일세.》
그들은 천천히 숲속의 작은 공지를 떠났다. 두사람은 더이상 아무 말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