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7
렬차에서 내린 최봉호는 고원역에서 두시간남짓이 걸어서야 바다가마을 구룡리에 이르렀다. 여기까지 오가는 뻐스는 오전에만 있다고 하므로 날이 어둡기 전에 도착하려고 강행군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었다.
해질무렵이였다. 저 멀리 바다 한가운데로 길게 뻗어나간 호도반도가 시뻘건 노을속에 잠겨들고있는것이 바라보였다. 높고낮은 산봉우리들까지 점점 더 그 용암속에 서서히 녹아들고있었다.
그때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소년들이 저앞에서 왁작 떠들며 밀려오는것이 보였다. 남자애들은 네댓명씩 무리지어 최뚝에서 무엇을 잡느라고 뜀박질을 하거나 개울가의 징검돌우에서 물싸움을 벌리느라고 야단이였다. 하건만 처녀애들만은 한덩어리로 줄지어 오며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있다. 역시 처녀애들은 장난세찬 남자애들보다 더 빨리 인생의 봄을 꿈꾸는것 같다.
노을비낀 철길우에 젊은 기관사
기적소리 울리며 기차를 몰았네
포연을 헤쳐온 용감한 그 젊은이
준엄한 그날에도 굴하지 않았네
예술영화 《철길우에서》의 주제가이다. 세상에 나오자바람으로 최봉호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킨 예술영화였고 뜻깊은 영화주제가였다. 비록 영화의 주인공들은 장내에 불이 켜지는것과 동시에 영사막에서 사라져버렸지만 그들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어준 정서적여운까지 죄다 걷어안고 가버린것은 아니다. 영화의 저 노래와 더불어 그들은 지금도 변함없이 싸우고 사랑하고 노래하고있는것이다.
봉호는 마치 자기가 그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되는듯 했다. 변함없는 마음을 안고가는 공군상위… 노래하며 걸어오던 처녀애들은 길섶에 조금 비켜서는 공군상위에게 깍듯이 소년단경례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군관아저씨!》
《비행사구나.》
《공군상위야. 참 멋있지?》
《그래, 미남자다야, 잉?!》
사춘기에 이른 처녀애들이여서 바다가마을에 오래간만에 나타난 공군상위를 할끔할끔 치떠보며 저마끔 잰 말씨로 소곤거리고 입을 싸쥐고 키득거리기도 했다. 그래도 노래는 계속된다.
봉호는 그 애들에게 묻고싶은것이 있었으나 그들의 노래를 끊고싶지 않았다. 하여 손을 들어 거수경례로 인사를 받고는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처녀애들은 계속 웃음어린 눈빛을 그에게서 떼지 않으며 옆으로 지나갔다.
다행히 개울가에서 물싸움을 하던 남자애들이 그를 띄여보자 일시에 허리를 펴고 경례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군관동지!》
마침이였다.
《참 얘들아, 저기가 구룡중학교니?》
《예!》 장난꾸러기소년들이 일시에 입을 모아 합창을 했다.
《우리 학교예요, 우리 학교!》
《근데 누굴 찾아오셨나요, 아저씨?》
봉호가 되물었다.
《거기 한수희라는 녀선생이 새로 왔지?》
대번에 환성이 일어났다.
《예, 왔습니다!》
《곱게 생긴 선생님 말이지요?》
저저마끔 한마디씩은 다했다.
《우리 학급담임선생님이예요.》
《야! 그러니까 우리 선생님 찾아오셨네?》
《그럼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나만 따라오세요.》
봉호는 손을 홱 내젓고말았다.
《아니, 필요없다. 얘들아, 나 혼자 가도 된다.》
《체! 도와주겠다는데두.》
소년들은 그만 흥심을 잃었는지 입이 뚜해졌다.
《별난 군관동지구나야.》
《그러게 말이야. 괜히 골을 내면서…》
봉호는 그 애들의 뿔난 소리엔 아랑곳하지 않고 걸어갔다. 시간이 급했다. 마음도 급했다.
방금 한 녀자와 행복의 꿈을 그리기 시작하자마자 그들 사이를 갈라놓으며 가정성분이라는 이름의 감탕물이 세차게 굽이쳐갔다. 다행히 거기엔 징검돌들이 놓여있었다. 그는 뒤뚝거리는 징검돌들을 하나하나 발을 구르듯 힘있게 짚어가며 저편기슭으로 껑충거리며 뛰여갔다.
8
그 시각 수희는 교무실에서 교수안을 정리하고있었다. 하루수업이 끝난 뒤여서 시간은 넉넉했다. 집에서 기다려줄 사람도 없으므로 서두를 필요도 없다. 그러나 뜻하지 않던 괴로움때문에 그는 이를 앙다물고있었다. 이마에 진땀이 송골송골 내돋을 정도였다. 아까부터 심한 구토감이 때없이 올리밀고 밑배에서부터 뻐근한 아픔이 가슴노리까지 허비고있었다. 빨리 리병원으로 가지 않으면 안될것 같았다. 엊그제도 그러다 무난히 지나갔었는데 오늘은 별스레 더 참기 어려워 은연중 무서운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오늘도 병원에 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는 한손으로 구토감이 나는 목을 누르고 다른 손으로는 교수안을 썼다. 그 종이장우에 불그레한 노을빛이 얼씬하더니 곧 사라지고말았다. 날이 어둡기 시작하는것이다.
그때 누군가 그가 쓰는 종이장을 손으로 덮어놓았다. 하얗고 자그마한, 분필가루가 묻어있는 앙증스러운 손이였다. 머리를 들어보니 몸매작은 음악교원이였다. 풍금을 탈 때마다 갓난아기의 그것처럼 작고 깜찍한 손이 옥타브를 채 짚지 못해 뜀뛰듯 훌쩍훌쩍 건반을 뛰여건느지 않으면 안되는,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매 걸음걸음을 착실히 짚어가는 성실하고 알뜰한 처녀교원이다.
《수희선생, 자요. 사랑의 쪽지편지!…》
수희는 웃어넘기려 했다.
《아니, 뭐 나한테?》
《아이, 수희선생. 언제까지 숨박곡질을 할 작정이세요, 예?!》
《채선생,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어서 읽어보라니까요.》 음악교원은 해들해들 웃으며 한손을 머리우로 높이 쳐들었다. 《저 푸른 하늘에서 울려오는 사랑의 도레미화쏠!…》
하늘에서 울려오는 도레미화쏠?… 가슴이 후두둑했다. 이상한 예감에 눈귀가 떨리고 입술이 타들었다. 후들거리는 손으로 쪽지를 펴들었다. 아니, 이건?!… 그리도 눈에 익은 글씨, 만년필로 막 휘갈겨쓴 굵다란 글자들이 배로 커지고 두드러지며 소리치는듯 했다.
당장 바다가 도래굽이로 나올것!
최봉호
수희는 목언저리를 누르고있던 손을 금시 터질것만 같은 가슴에 대고 꼭 눌렀다. 언젠가는 오고야말 그것이 끝내 찾아온것이다.
《수희선생!》 부지중 음악교원이 겁에 질린 얼굴로 새되게 부르짖었다. 《아니, 갑자기 어디가 아프세요. 예?!》
글쪽지를 구겨쥐고있는 수희의 얼굴이 마치 죽은 사람처럼 해쓱해졌던것이다.
《아니, 괜찮아요.》 수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말이예요, 일없어… 걱정말아요.》
수희는 마치 채머리를 떠는 늙은이처럼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어 어마지두 놀라서 쳐다보는 음악교원의 옆을 지나 출입문께로 걸어갔다. 그러나 문앞에서 주춤 걸음을 멈추고 방안을 휘둘러보았다. 무엇인가 잊은것이 있는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마침 벽에 걸린 낡은 거울이 눈에 띄였다. 수희는 그앞으로 다가갔다. 군데군데 수은칠이 벗겨져있는 곳들이 적지 않았으나 지금 시커먼 고민에 휩싸여있는 수희의 수심에 찬 모습을 비쳐주기엔 충분했다.
채가성을 가진 처녀음악교원은 어리둥절하여 굳어져있었다. 생활의 모든것을 음악적으로, 화성적으로 분석하는데 습관된 처녀… 아마 여느때 같으면 《사랑의 도레미화쏠》도 화성학적으로 분석하면서 쉴새없이 웃고 떠들었으련만 지금은 눈이 올롱하여 가만히 지켜보기만 한다.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처녀가 머리빗을 꺼내였다.
《수희선생, 머리부터 빗으세요. 오늘따라 참, 그게 뭐예요?…》
수희는 묻는듯 한 눈빛으로 처녀를 바라보고는 아무말없이 빗을 받아 정성껏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하건만 거울안에서는 여전히 낯선 녀인의 생기잃은 두눈이 미심쩍게 그를 내다보고있었다.
《어디 말해봐, 정 가고싶어? 그를 꼭 만나고싶어?》
수희는 저도 모르게 머리를 끄덕이였다.
《그래, 가고싶다, 가고싶어!…》
웬일인지 마음껏 소리쳐 울음을 터뜨리고싶은 마음이였다. 그래도 참아야만 했다. 아무튼 올것이 왔으니 그것을 맞받아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그것을 피해 숨을 곳은 없는것이다.
×
…수많은 발자국들이 모래불에 찍혀있었다. 그 발자국들은 누군가의 비틀거리는 인생길처럼 비뚤비뚤 좌로 우로 어긋나게 찍혀졌는가 하면 때로는 이미 찍은 발자국을 되는대로 짓밟으며 곧추 멀리까지 뻗어간것도 있었다.
그 한끝에 최봉호가 반대쪽으로 몸을 돌리고 서있었다. 사랑하는 남녀청춘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도래굽이, 대자연이 마련해준 사연많은 바다가도래굽이에 그가 있는것이다.
모래불을 밟는 수희의 미약한 발걸음소리에 바싹 귀를 강구고있은듯 그가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는 거칠게, 숨찬 소리로 불렀다.
《수희!》
수희는 몸을 떨었다. 그가 달려올 때까지, 가쁜숨소리가 귀전에 퍼부어질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있었다.
봉호가 씨근벌떡거리며 따져물었다.
《수희, 난 정말 이렇게까지 나올줄은 몰랐어. 인생이 뭐 놀음놀이인가? 어쩌자구 이런다는거야, 응? 나하군 한마디 의논두 없이 이렇게 도망치면… 어데루 간다는거야? 그래 그까짓 친아버지가 무슨 상관이야. 〈치안대〉를 했으면 어떻구 월남했으면 어떻다는거야? 수희를 키워준 고마운 당과 한초 아버지, 어머니가 있잖아? 그런데두 한생의 언약까지 깨구 여기 와 숨어있으면 어쩐다는거야?!…》
《…》
수희는 여전히 입을 옥물고있었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그토록 무섭게 생각되던 그 일이 인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것이 이상했다. 봉호가 분노로 몸을 떨며 소리치면 칠수록 마음은 점점 더 가라앉기 시작했다. 불현듯 이제 자기가 어떻게 처신하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는지 명백해졌다. 그토록 모지름쓰던 끝에 번개불이 펑끗! 머리속에 번쩍인것처럼 방도가 찾아진것이다.
《수희, 왜 말이 없어?》 결이 난 봉호가 또 어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래 이런데 와서 숨으면 내가 찾아내지 못할줄 알구?… 그래 이 최봉호가 무슨 일이 있어도 기어이 찾아오리라는걸 정말 몰랐어?》
《알았어요.》
낮고도 침착한 목소리였다. 어쩌면 랭담하게 울리는것 같은 그 억양에 봉호는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무슨 소리야, 그건?…》
《알았어요.》 수희가 조용히 다시 반복했다. 《그리구 이렇게 찾아오길… 기다리구있었어요.》
파도소리가 세차졌다. 두사람은 비로소 기슭을 씻는 그 파도소리를 처음으로 듣는듯 했다.
《오빠.》
마침내 수희가 그를 불렀다. 그러자 이번엔 봉호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무슨 소리요?》 갑자기 봉호는 지금까지 써오던 해라조의 말투를 바꾸며 숨차게 계속했다. 《그 오빠란 소리 인젠 딱 질색이요. 한수희!… 나도 이제부턴 그냥 동생을 대하는것처럼 하대하지 않기로 했소. 그러니 제발 그 오빠라는 소린 싹 집어치우란 말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예요.》 여전히 랭담한 목소리로 수희는 계속했다. 《오빤 그냥 오빠로 남아있어야 해요. 난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어요.》
《안돼!》
봉호는 마치 수희가 달아날가봐 겁내듯이 그를 붙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수희는 훌쩍 뒤로 물러섰다. 하여 기슭으로 밀려든 파도가 그의 발뒤꿈치의 모래를 파헤치며 제대로 서있지 못하게 했다.
《한수희!》
봉호가 또 잡으려 했으나 수희는 그냥 파도속으로 뒤걸음쳐갔다.
《아니예요. 오빤… 늘 하늘의 복수자가 된다구 했지요? 또 지금은 하늘의 결사대라 자랑하고있구…》
수희는 비로소 애써 견지해오던 랭담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런데 〈치안대〉완장을 끼구 만행을 한데다가 월남도주한 아버지를 둔 내가, 이 수희가 오빠곁에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이런걸 한번이나 생각을 해봤어요? 아니, 아니예요, 그래선 안돼요.》
《한수희! 난 이미 이 문젤 부대정치부에 다 내놓고 토론을 했더랬소. 수흰 지금 아주 협애하게 생각하고있단 말이요. 부대정치부에선…》
《아니, 됐어요. 더 말하지 마세요. 오빠두 여직껏 잊지 않구있겠지요? 전쟁때 〈치안대〉완장을 끼고 와서 오빠를 죽도록 패주던 그 오기택이란 놈을… 난 잊지 않아요. 잊을래야 잊을수 없는 나란 말이예요.》
《아니, 그놈하구야 무슨…》
봉호는 소리치려 했으나 말끝을 맺지 못했다. 대신 수희가 처절하게 부르짖었다.
《그런 〈치안대〉에 월남을 한 아버지라니… 아―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려요. 말도 안되는 소리. 그런 〈치안대〉월남자가 오빠한테 그림자처럼 붙어있게 할순 없어요. 아니, 안돼. 죽어두 그것만은, 그것만은 안돼요!》
《수희!》
마침내 봉호는 성깔사나운 자기의 성미그대로 수희에게 달려들더니 세괃게 끌어당겼다.
《난 결심하면 기어이 해내는 사람이요. 그런줄 알지? 절대 놔주지 않아!》
《아니, 안돼요!》
이번에도 수희는 악을 쓰며 한사코 그에게서 빠져나왔다. 봉호가 한발자국 앞으로 내짚으면 두걸음, 세걸음 더 뒤로 물러서군 하였다. 어느덧 파도속에 무릎이 잠기고 허리까지 물결이 휘감기 시작했다.
《다가오지 마세요. 정 그러면 난… 바다물에 빠져죽구말겠어. 정말이예요.》
《아니 뭐, 뭐라구?!…》
진한 어둠속에서 파도의 물갈기가 점점 더 높아지고 사나와지기 시작했다. 기슭으로 쏴!― 소리치며 밀려들던 파도가 그들의 온몸에 들씌워졌다. 한순간 수희는 어쩔새없이 파도에 휘감겨 저만치로 허궁 떠실려갔다. 다급해난 봉호가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다가왔지만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수희가 푸―푸 짠물을 내뿜으며 새되게 부르짖었다.
《오지 마세요, 제발 빌어요!…》
비장한 부르짖음… 그것은 자신의 모든것을 다 아낌없이 내던지려는 차디찬 의지와 결단의 웨침이였다.
봉호가 헐썩거리며 멎어섰다. 퍼릿한 별빛에 비쳐진 그의 모습은 처절했다.
《수희, 왜 그래? 왜 그렇게 갑자기 변했소?》
수희도 헐떡이였다. 손바닥으로 짠물이 흐르는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숨찬 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변했어요. 아―니, 본래부터 난 나쁜 녀자였어요.》
《수희!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제발 내 말을 꺾지 마세요, 제발!… 빌어요.》 언제부터였는지 수희의 목소리는 아픔에 갈리고있었다. 《그래요. 난 정말 나쁜 녀자예요. 솔직히 말해서 아버진 아버지구… 그것두 그런데다가 난 인제야 비로소 나를 알구 오빠와 헤여지지 않으면 안된다는것두 알게됐어요. 그래서… 고민했어요. 그래요. 정말이지 이 말만은 안하려구 했지만… 어찌겠어요. 솔직히 말해서… 난 싫어졌어요, 오빠가!…》
《듣기 싫소. 무슨 오그랑수를 또 쓰려구?》
《제발 마저 들어주세요. 그래요, 싫어졌어요. 점점 기다려지는 마음두 적어지구 따르던 정도 식어지구… 이전엔 다 좋게 보이던 드센 성미랑 옹고집이랑 인젠 다 진저리가 나면서… 싫어지는걸 어떻게 해요? 첨엔 눈이 멀었댔나봐요. 사랑이 뭔지두 모르구 시작했다가 그만…》
시꺼먼 어둠속에서 거센 파도가 처절썩이였다. 저 멀리 바위츠렁에 밀려가 사납게 부딪치고 산산이 부서지는 파도의 물보라가 린광같은것을 휘뿌리였다.
갑자기 봉호가 벼락치듯 무섭게 소리쳤다.
《허튼소린 그만해! 안돼. 내가 그따위 거짓말에 넘어갈것 같애서?… 한수희, 똑똑히 들으라구. 수흰 절대 나한테서 벗어나지 못해! 죽어도 놔주지 않아! 알겠소?…》
수희는 아무 대답없이 다시금 밀려드는 파도에 떠밀리듯 기슭으로 움직여갔다. 봉호가 또 다급한 소리를 내질렀다.
《한수희! 어데로 가는거야? 엉?!…》
마치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듯 수희는 몸을 홱 돌렸다. 다음순간 바다물에 젖은 머리를 손으로 대충 빗질해넘기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기로서도 뜻밖의 아주 차겁고 또렷한 목소리였다.
《좋도록 생각하세요, 아무렇게나… 하지만 한가지만 꼭 알아주세요. 내 솔직히 말하는데 오늘 나의 한생에 다시 없을 그런 무서운 말을 했어요, 제일 힘들고 무서운 말을!… 용서하세요.》
말을 마치자 힘들게 물결을 헤가르며 기슭으로 나갔다.
바람이 세찼다. 파도가 더 사나와졌다. 봉호는 물가에 말뚝처럼 박혀선채 온몸을 부르르 떨고있을뿐 까딱 움직이지 못했다.
…수희는 오래도록 밤을 헤매였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쑤시는듯 한, 비트는듯 한 모진 아픔에 꺽꺽 숨이 막혀 신음하고 비틀거리군 했다. 새벽녘엔 짜디짠 바다물을 삼킨탓인지 심한 구토까지 겹치여 가물가물 의식이 흐려지기까지 했었다. 마침내 그는 더이상 몸을 가누지 못하고 맥없이 쓰러지고말았다. 하숙집이 멀리 내려다보이는 등성이우의 너럭바위기슭이였다.
이상하게도 밤새껏 주절대며 흐르던 시내물소리조차 더는 들려오지 않는듯 했다. 모든것이 끝나버리고말았는가?… 그의 앳되고 순진한 마음속에 한뜸한뜸 수놓아오던 사랑과 행복의 꽃송이는 제 모양새도 갖추기 전에 지고말았다. 짜디짠 눈물과 한숨에 수놓이바늘에 녹이 쓸고 가느다란 수실마저 끊어져버린것이다.
눈물만이 하염없이 솟구쳤다. 억지로 참고견디여보려 했으나 허사였다. 그는 자주 힘없이 띠염띠염 흐느껴울었다. 가슴을 에이는듯 한 모진 아픔에 울고 자기의 신상에 닥친 불행과 슬픔에 울고 또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