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5
점심때 집에 들어서자 수금은 몹시 바빴다. 할아버지에게 간밤 깨끗이 다려두었던 와이샤쯔와 넥타이를 입히고 매드려야 했으며 자기 또한 이쁘게 단장해야 했다. 시간이 빠듯했다.
《아이구, 얘, 이 더위에 할아버지 숨막히시지 않겠니? 점잖지도 못하고.》
점심상을 치우던 어머니가 한창 발돋움하며 할아버지의 목에 넥타이를 거는 수금을 핀잔했다. 사실 밤새 내리던 비가 멎은 밖은 내리쬐는 여름볕에 한증탕 비슷했다.
그래도 수금은 어머니쪽에 대고 샐쭉 눈을 빨았을뿐 하던 일을 계속 했다. 할아버지가 제꺽 손녀를 두둔해주었다.
《수금이가 옳네라. 늙은 몸은 여름에두 시린 법이지. 항차 행사가 아니냐.》
늘 손녀편인 할아버지였다. 그럴만도 했다. 수금은 두 오빠와 언니를 둔 집안의 막냉이였는데 오빠들은 다 군관이 되였고 언니 또한 연상의 림업로동자한테 시집가버려 집안에서 유일하게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손녀로 남았던것이다. 게다가 아버지는 광산에서 제일 바쁘다는 수송직장 광석수송차 운전사여서 할아버지와 마주앉아볼 짬도 거의 못내는 형편이였다. 그래서 어머니가 집안의 잡다한 부담을 혼자 지고 돌아쳤다. 결국 할아버지시중은 물론 말동무구실도 다 수금의 차지가 되고말았다. 그만큼 수금은 할아버지의 취미와 기호를 누구보다 잘 알았고 할아버지 또한 매사에 흡족하게 그의 시중을 받으며 온갖 편역을 다 들어주는것이였다. 수금으로서는 온 광산의 존경을 받고계시는 할아버지를 돌보는것이 오히려 자랑스러웠다.
마침 가벼운 문기척과 함께 새 지배인 렴진욱이 쑥 들어섰다. 그는 눈을 찌긋해보이며 감탄을 터뜨렸다.
《로인님, 한 20년은 더 젊어보이십니다. 하하… 차를 가져왔으니 차비가 다되였으면 가십시다. 수금이 너도 가자.》
《아이, 전 아직…》
화장은 둘째고 옷조차 갈아입지 못한 그였다. 문을 열고 나서면 곧 직장인 광산에서는 작업복아닌 나들이옷을 입고 좀 먼 출근길을 걸어보는것이 처녀들의 한가지 소원이기도 했다. 하여 휴식일이면 없는 일거리라도 만들어 읍거리까지 나가 거니는 《행복》을 누려보는 처녀들이 적지 않았다. 수금은 별로 호들갑스러운 성미를 지닌 처녀가 아니여서 그런 축에 끼우지 않지만 행사로 마련된 기회까지 놓치고싶지는 않았다.
가벼이 분첩을 두드리다말고 수금은 거울속의 처녀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볼이 훌쭉하도록 여윈 얼굴에 두눈만 퀭한 볼품없는 처녀였다. 거기에 몸이며 팔은 왜 저리 회초리같담, 그 주제에 저 처년 아직 한번 말도 건네보지 못한 멋쟁이총각이 맘들어 가슴마저 울렁거리고있지, 누가 저같은걸 왼눈으로도 쳐다보기나 하겠다고, 바보!…
그러면서도 수금은 짧은 샤쯔밑에 드러난 하얀 팔목에 손수건을 곱게 매느라고 또 몇분을 지체했다. 자기도 기억나지 않는 무척 어린시절에 끓는 가마옆에서 장난치다가 그만 데여 농구알 세개만 한 허물이 생겨났던것이다. 그걸 가리워야 했다. 처녀가 일단 자그마한 흠이라도 잡히면 그것이 굉장히 보태여져 총각들의 시비거리로 된다는거야 뻔하지 않는가.
수금이 달려갔을 때 광산문화회관은 이미 초만원이였다. 십여개의 갱과 직장들, 수십여개의 행정부서, 단위의 청년들 몇백명에 호기심많은 아이들, 지어 가두아낙네들까지 명절같이 흥성거리며 쓸어든것이였다. 하도 도시와 멀리 떨어진 나라의 한끝벽지여서 무슨 예술단공연같은 구경이란 좀 드물게 보는 연하사람들이였다. 그래서 아주 정숙한 회의가 열려도 경사라도 난듯 호기심을 보이며 모여들기가 일쑤였다.
회관안은 랭풍기가 쉬임없이 돌아갔으나 숨막히도록 더웠다. 다행히 수금은 운수가 좋았다. 같은 실험공인 윤희라는 처녀가 그를 위해 자리를 잡아놓고 기다려준것이였다.
《하마트면 언니자릴 떼울번 했지요 뭐.》
《수고했어.》
막 자리에 앉는 순간 수금은 심장이 뚝 멎는것 같았다. 공교롭게도 바로 옆자리에 자기가 그리도 잘 보이고싶어했던 채광갱책임기사 김청주가 떡 앉아있는것이 아닌가. 균형잡힌 호리호리한 몸매에 얄미울 정도로 아름답게 생긴 얼굴의 청년이였다. 그 얼굴의 희맑은 살갗은 처녀들조차 시샘낼만 한것이였다. 처녀들의 속삭임을 통하여 수금은 이 청년이 두뇌는 비상하지만 그지없이 거만하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래서 자기가 어떤 두려움마저 품게 되는지 몰랐다.
수금은 가슴이 호독거리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몸은 왜 이리 자꾸 옹송그려지는것인지, 무엇보다 팔목에 감은 손수건이 비뚤어질가봐 손도 마음대로 움직일수 없었다. 아이참, 나같이 못난 처녀를 거들떠나 보겠다고 이렇게 안절부절한담?
아닐세라 김청주는 턱을 꼿꼿이 쳐든채 쌀쌀하게 앞만 굽어볼뿐 누구하고 이야기도 건네지 않았다. 수금이쪽을 곁눈질하지 않은것은 두말할것도 없었다. 수금이에게는 그의 몸에서 싸늘한 랭기가 흘러나오는것 같았다.
마침내 렴지배인과 청년동맹비서를 대동한 할아버지가 주석단에 나오고 소개말끝에 할아버지가 마이크앞에 나섰다. 수금은 할아버지가 진땀나고 불편한 자기를 구원해준듯싶어 막혔던 숨을 호― 내뿜었다.
《자고로…》 하고 할아버지가 느릿하면서도 분명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부처님 살찌우고 패리게 만들기는 석수쟁이에게 달렸다고 했네. 헌데 요새 임자네들은 이 광산을 뼈심들여 살찌울 궁리는 하지 않구 실컷 빨아먹구는 훌훌 떠나가구들 있지, 훌훌!… 이게 어떤 땅이기에, 응?…》
지그시 눈을 감고있던 할아버지의 입에서 느닷없이 노래가락이 청청하게 흘러나왔다.
보루에 칼짚고 섰네
압록수 흘러흘러도
네우에 비낀 이 모습
천년코 지워낼손가
수금은 처음 머리카락이 오싹 곤두섰다. 할아버지가 그만 정신이 헛갈려 이야기꼬리를 놓치고 왕청같은 실수를 저지르누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아뜩해졌던것이다. 회관안을 뒤흔드는 웅성거리는 소리와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그 느낌을 더욱 강조해주었다.
그러나 노래음조의 어딘가 비분강개함이 즉시 수금을 휘여잡았다. 장내도 인차 숙연한 정적속에 잠겨들었다. 옛시조를 노래로 옮긴듯 한 가사내용이 특히 장쾌한 그 무엇인가를 떠올려 모두들 숨마저 딱 멈춘듯했다.
노래가 끝난지 이윽해서야 눈을 뜬 할아버지는 갈린 목을 가다듬으며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임자네들두 저 채굴장앞 방수직장부근에 딩구는 돌무지들을 봤을거네. 다들 그걸 압록강이 기슭을 파먹지 못하게 쌓은 제방이 허물어진것이라고 알고있는데 그게 바루 옛날 이 연하땅에 세워졌던 보루의 잔해야!》
또다시 장내가 웅성거렸다. 이번에는 새로운 깨달음에서 오는 감탄과 경건한 속삭임이였다.
어느사이 수금은 청주의 존재따위는 까맣게 잊고 열심히 할아버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하여 그는 처음으로 옥가성을 가진 자기의 먼 옛 조상이 정배살이하러 이 연하땅에 끌려와 자리를 잡았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 정배군들과 수자리살러 나온 병졸들이 이 나라의 최북단에 피땀을 흘려가며 첫 국경보루―성벽을 쌓은것이였다. 세종15년때의 일이라고 했다. 모름지기 그때 그 보루의 장수가 성우에 칼짚고 높이 올라 압록강을 굽어보며 나라의 이 국경이 후손만대 지켜질것이라는것을 엄숙히 선언했을것이다.
《…헌데 그 보루가 세월의 흐름속에 어떤 경난을 겪었나? 하나, 둘 허물어지구 이끼와 덤불속에 파묻히구… 왜놈들은 그걸 밑뿌리까지 파헤치려 들었지. 그걸 우리 수령님께서 되찾아주셨으니망정이지 흔적도 남지 못할번 하잖았나! 임자네들두 다 알다싶이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 멀고 험한 나라의 최북단에까지 몸소 찾아오시여 우리 광산을 개발해주셨네. 그 옛날의 보루가 더 굳건하구 천년토록 부흥하라구 보배기둥을 깊이 박아주셨단 말일세.… 헌데 어제 우리 앞집 은별이네는 그걸 버렸네. 그전엔 건너편집 진수네가 떠나가구. 그래, 모두들 이렇게 도망치면 나라의 중요한 이 전초보루가 무슨 꼴이 되겠나, 응?》
우뢰와 같은 함성이 터져올랐다.
《절대로 그럴수 없습니다!》
《나라의 전초보루를 끝까지 지키고 빛내이자!》
《광산을 무조건 일떠세웁시다!―》
열띤 토론들이 시작되였다. 광산을 떠나간 사람들을 초소를 버린 도피자로 락인하는 서슬푸른 규탄, 한몸이 그대로 착암기가 되고 마광기가 되여서라도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깊이 박아주신 보배기둥을 굳건히 받들고 빛내이자는 불같은 호소…
수금은 목이 칵 메였다. 장하신 우리 할아버지, 할아버지야말로 《보루에 칼짚고 선》 옛 장수그대로야, 엄한 호령 한마디로 수천장병을 일떠세우시였어.
수금은 언제 모임이 끝나고 자기가 어떻게 밖으로 나왔는지 알지 못했다. 누구인지 어깨를 슬쩍 건드리는 감촉을 받았을 때에야 그는 펀뜻 정신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전률과도 같은 짜릿한 파동이 전신을 휘감았다.
상대는 다름아닌 바로 김청주였다. 청년은 조금도 거만한 빛이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진지한 호기심속에 수금을 유심히 굽어보고있었다.
《동무가 〈자고로〉〈코바지〉의 손녀라고 하던데… 맞소?》
수금은 불에 지져지는것 같았다. 그리도 은밀히 소원해온 이 첫 관심, 그것이 아찔하도록 무서웠고 또 눈물나리만치 반가왔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팔목에 매여있는 손수건을 슬쩍 훔쳐보기까지 했다. 다행히 손수건은 비뚤어지지도 않았고 좀 가느다란 팔의 어설픔을 돋구어주듯 아주 이쁘게 어울리는것이였다.
그럼에도 김청주는 손수건쪽엔 눈길 한번 돌리지 않고 여전히 감탄조로 덧붙였다.
《역시 대단하시더군, 노래도 썩 잘하시고… 〈코바지〉의 년세가 어떻게 되오?》
《…》
수금은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자기에 대한 관심은 아니였던것이다. 그런걸 이 바보는 숨까지 가빠하며 허둥댔지!… 그러자 비로소 청주가 자기의 존경하는 할아버지를 이 고장 토배기투로 《코바지》라고 곱씹어 외웠다는 사실이 상기되면서 은근히 약이 올랐다.
어떤 연원으로 이루어진 말인지는 몰라도 연하일판에서는 친밀하게 따르는 늙은이들을 허물없이 《코바지》, 《코마니》라고 부르군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준말이였다. 대신 인연이 먼 사람들의 입에서 그 부름이 튀여나오면 반대로 어떤 하대처럼 인식되기 쉽기도 했다.
좀 속이 토라진 수금의 귀에야말로 청주가 내뱉은 그 부름이 모욕적으로 들리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수금은 약간 코살을 찡그리며 쌀쌀하게 내쏘았다.
《아직 멀었다는 생각 들지 않아요?》
뜻밖의 푸접없는 말에 청주는 어리둥절한듯 눈섭을 치켜올렸다.
《그건… 무슨 소리요?》
《그 어색한 토배기흉내, 동무하고 우리 집은 아직 친해본적 없단 말예요. 그럴 생각도 없구요. 그러니 〈코바지〉가 아니라 할아버지라고 불러주길 바래요!》
수금은 아연하여 입이 벌어진 상대를 등지고 픽 돌아서버렸다. 그런데 몇걸음 옮기기도 전에 씹어뱉듯 하는 비양조의 말마디가 잔등을 때렸다.
《그렇다? 나하군 마주서기도 싫단 말이지? 하긴 나야 처벌받고 내려온 사람의 자식이니까. 동무의 먼 조상과 비슷하달가…》
수금의 얼굴이 대뜸 불화로를 들쓴듯 했다. 뭐 《비슷하다》?… 부르르 몸을 떤 수금은 몸을 돌리자 육박하듯 청년앞으로 다가갔다. 그다음… 자신도 의식 못하며 후려치듯 쏘아붙였다.
《이 버럭덩이같은 쓰레기!》
사람들이 놀래여 돌아보았다. 그러나 수금은 오연히 고개를 쳐든채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분한 생각에 눈물이 나올것 같았다. 무얼 보고 자기는 그에게 반했던가. 얄밉도록 곱게 생긴 얼굴때문에? 아니, 바로 그렇게 얄밉게 생겼기에 그는 《비슷하다》는 말로 우리 조상들은 물론 전체 광부들 그리고 자신까지 옛날의 정배군비슷한듯이 경멸하고 모욕한거야. 마치 제 아버지의 과오에 대한 처벌을 두고 불만을 품고있기라도 한듯이. 정말 그렇다면 진짜 쓰레기가 아니고 뭐란말인가?
광산을 사랑하고 자기의 직업에 대하여 무한한 애착을 품고있는 수금이였다. 그는 비록 자기가 볼품없이 생기기는 했지만 광산의 기본생산계통인 선광에서 높은 기술과 기능으로 정광실수률을 높이는데 기여하는 아주 착실한 처녀라는 긍지로 해서 자부심이 높았다. 그러니 청주따위에 비하면 자기는 몇배의 금새가 나가는 처녀인것이다.
할아버지가 준 영향력은 깊었다. 옷을 갈아입고 선광실험실에 올라가니 실험공 윤희를 둘러싸고 영순이, 경희 등 시약공처녀들이 오구구 모여앉아 목청을 뽑고있었다.
보루에 칼짚고 섰네
압록수 흘러흘러도
…
《아니, 안야, 그 음정은 틀려!》
《잘도 안다, 틀린게 아니라 왕청같은 장단에 태워 그래. 들어봐, 이렇게… 딴따 딴딴따…》
《헌데 천년코 못지운다는건 무슨 뜻일가?》
《아이구, 이 답답한 친구야. 그런 형상적비유도 넘겨 못 짚어? 영원히 우리 국경으로 솟아있으리라는 소리야!》
소문 또한 빨랐다. 《기술지표종합대장》을 뒤적거리며 앉아있던 실장 김현길이 수금을 띄여보자 둥실둥실한 얼굴에 웃음을 담고 수군거렸다.
《뭐, 청주가 네게 청혼했다가 귀쌈벌이를 했다며?》
어이없이 와전된 소문이였지만 수금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하고싶지도 않았다. 오물은 주무를수록 더 역한 냄새를 풍기는 법이다.
그럼에도 김현길은 끈덕졌다. 이번에는 한숨을 짓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훈계조로 넘어갔다.
《모르겠어, 잘한것 같지 않아. 잘 생기고 똑똑하고… 그만한 대상을 나무라다니! 또 싫으면 그만이지 숱한 사람들앞에서 망신시킬건 뭐야? 처녀가 방정한 맛도 있어야지.》
끝내 수금은 그냥 입을 다물고있을수 없어 탁 내쏘았다.
《그럼 실장동진 자기를 정배군자손이라고 놀려대면 기뻐 춤추었겠군요?》
《뭐, 정배군? 설마…》
《더 말하지 말자요!》
늘 심심해하며 무슨 색다른 소문이라도 귀에 걸리면 거기에 열중하여 있는 소리, 없는 소리 다 갖다붙이기를 좋아하는 실장의 습벽을 잘 아는 수금이라 단마디로 화제를 끝내버리고말았다. 그럼에도 수치와 분노로 하여 일은 전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지척에서 와릉거리는 마광기소리마저 성가스러웠다. 습관이 되여 어쩌다 마광기가 멎거나 소리가 약해지면 오히려 고막속이 웅웅거려 불안스럽던 그였다.
얼마나 낯뜨거운 일인가. 내가 청주의 청혼을 모욕으로 느끼고 귀뺨을 쳤다구? 이제 온 광산이 수군거릴것이다. 못생긴 주제에 눈은 이마우에 붙어서 교만하고 방자하기 짝없다고, 늙어죽을 때까지 시집가나 보자고!… 무엇보다 할아버지가 그 소문을 듣고 대노하여 꾸짖지 않겠는가 하는것이 제일 걱정이였다. 손녀를 끔찍이 사랑하고 온갖 편역을 다들어주는 할아버지지만 녀성으로서의 행실측면에서만은 몹시 완고하셨던것이다.
다행히 할아버지는 저녁상을 물리고 잠자리를 펼 때까지 아무 말씀도 없었다. 그러다가 수금이 잠을 못 이루고 뒤척거리는 기미를 알아채고서야 슬며시 웃방미닫이를 열고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얘 수금아, 래일 우리 집 농구나무를 한그루 떠서 그 젊은이네 집에 심어주자꾸나.》
《?…》
《허허, 조상이 어쨌다니. 입심두… 어쨌거나 그 젊은이가 아직 연하땅에 뿌리를 못 박아 그러느니라!》
비로소 할아버지의 말뜻을 깨달은 수금은 놀라서 한길 뛰였다.
《아이구 할아버지, 싫어요! 전 죽어도… 싫어요!》
《됐다, 자거라. 아침엔 생각이 달라질게다. 자거라!》
이쯤되면 별의별 응석과 투정으로도 돌려낼수 없는것이 할아버지였다. 이미 그것은 엄명으로서 거역하면 안되는것이다. 수금은 잠이 말짱 달아나고말았다. 청주에 대한 괘씸한 생각은 문제도 아니였다. 기껏 모욕한 총각네 집에 비위좋게 찾아들어가 농구나무를 심어줄 일이 산같이 걱정스러웠다. 오늘보다 더 뛰뛰한 소문이 날건 뻔했다. 아이구, 이 일을 어째?…
웃방에서도 할아버지의 끙끙거리는 괴로운 숨소리가 그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