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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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박치명은 합숙으로 돌아간 뒤였다. 주인이 술도 안 마시니 기다릴 맛도 없거니와 필시 일감에 붙잡혔을테니 인차 들어오기는 코집이 글렀다면서 대충 몇술 뜨고는 가버렸다는것이였다.
《먼길을 온 손님을 혼자 앉혀놓고 당신은 참!…》
안해 최금숙이 어이없는듯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억실억실한 그의 두눈에서는 흥겨운 미소의 불꽃이 춤추고있었다. 여느때없이 환한 얼굴이였다. 지배인이 된 남편일이 사뭇 기쁜 모양이였다.
《미안하게 되였군.》
렴진욱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였다. 평양에 출장가면 어김없이 박치명네 집에 묵군 하는 그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박치명은 몹시 노여움을 썼고 바쁜 일도 젖혀놓고 극진히 대접했다. 이번길 역시 그랬었다. 오히려 지배인부임축하상은 그의 집에서 풍성하게 차려주었었다.
《내 이렇게 되기를 기다렸네. 믿었지. 우리 손 맞잡고 한번 본때를 보이세!》
그날 억지로 술잔을 쥐여주며 박치명이 제일처럼 기뻐 부르짖은 말이였었다. 그런데 이 무슨 인사불성이란 말인가?…
안해가 밥상을 차리는 사이 대충 세면을 하고 나온 렴진욱은 눈이 흡떠졌다. 밥상우에 난데없이 화려하기 그지없는 화장품함이 보란듯이 놓여있는것이였다. 첫눈에도 값비싼 외국제라는게 알렸다.
안해가 장난하듯 웃으며 말했다.
《맞혀보세요, 어디서 났겠는지?》
《?…》
《들으시면 깜짝 놀랄걸요. 글쎄 부국장동지가 우리 정옥이 쓰라고 가져오지 않았겠어요.》
《허?!―》
《호호, 그뿐인줄 아세요? 그분이 우리 집에 혼사까지 청했답니다!》
렴진욱은 눈이 아주 접시처럼 커지고말았다. 그야말로 믿기 힘든 파격적인 일이였다. 딸이 평양의학대학을 다닐 때 친조카이상으로 살틀히 돌봐주었으므로 화장품쯤은 그래도 안겨줄수 있다고 보겠지만 며느리감으로 점찍어두었으리라고는 꿈도 꿀수 없었던것이다. 박치명에게는 자식이란 외아들 하나뿐이였는데 그는 김형직사범대학을 나온 멋쟁이쾌남아였다. 하물며 평양에야 선녀같이 쭉 빠진 처녀들이 얼마나 많은가. 애초에 박치명이 지금껏 그 비슷한 눈치조차 보인적이 없는터여서 더욱 놀라왔다.
《저도 첨엔 롱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당신과의 오랜 우정을 봐서도 그렇고 또 정옥이가 직업도 의사인데다가 달덩이같은 미인이니 욕심내지 않을수 없었다는거지요. 뭐 자기 아들에겐 순박한 광산처녀가 적임이라나요.》
비로소 렴진욱은 안해의 류달리 환해진 얼굴이며 흥겨운 미소며가 어디서 온것인지 완전히 리해되였다. 하나밖에 없는 딸자식을 평양에 시집보낸다는것은 미상불 경사가 아닐수 없었다. 그랬다. 박치명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결심하고 나서줄 의리깊은 사람이였다.
렴진욱이 그를 안것은 새파란 총각시절 랑림산중의 화령이라는 광산에 있을 때였다. 그때 박치명은 김책공업대학(당시)졸업실습차로 광산에 내려와있었는데 막장에 몇번 드나드는 사이 재기있고 불같은 성격의 렴진욱이 마음에 들었는지 제 먼저 통성을 걸어왔었다.
《세살 아래니까 내 동생이 돼달라구.》 하고 박치명은 그 나이에 벌써 끼고다니던 도수안경을 추스르며 말했다.
《우리 집은 래력이 그런지 삼대째 외아들판이야. 형제없는 외로움이란 짝사랑만치 안타깝고 서글픈것이거던.》
렴진욱으로서는 마다할 리유가 전혀 없었다. 한창 지식욕에 불타던 때라 젊은 안경쟁이가 오히려 그지없이 고맙고 반가왔다. 이미 떠도는 소문으로 박치명의 졸업론문이 선광의 부선계통에서 혁신을 가져올만치 가치있는것이라는것을 알고있는터여서 더욱 그러했다.
그리하여 그는 매일 밤 박치명의 합숙방에 찾아가 그의 머리속 지식을 깡그리 빨아들이려고 덤벼쳤다. 그것이 재미난듯 박치명은 껄껄 웃었다.
《굴진공이 선광공학에까지 눈독을 들인다? 지배인쯤 돼보자는거지? 좋아, 그 야심이 맘에 들어. 내 보건대도 진욱인 큰일할 재목이야. 그러자면 대학공불 해야 해!》
박치명은 진짜형님으로서의 자기 소임을 충실히 맡아했다. 실습을 마치고 대학에 올라가자마자 즉시 숱한 대학교재며 참고서들을 한궤짝이나 부쳐보냈고 직접 뛰여다니며 평양기계대학추천까지 받도록 힘써주었다. 그 대학도 그가 심중한 고려끝에 선택한것이라고 했다. 즉 앞으로 한 광산을 이끌자면 채광과 선광뿐아니라 그모두를 움직이는 기계까지 알아야 한다는것이였다.…
《헌데 내겐 왜 귀띔조차 안했을가?》
렴진욱이 고개를 기웃거리자 안해는 다시 흥겹게 웃었다.
《얼마나 고박한분인가 보세요. 글쎄 당신한테 맞대놓고 말하자니 체면에 아주 거북하더라나요. 코떼울가봐 겁나기도 하고요.》
《허허… 부국장동지도. 정옥이 생각이 어떨는지 난 딴 의견이 없소. 참, 그 앤 어디 갔소?》
《그 애야 노상 병원에 붙어사는걸. 오늘은 당직이래요.》
《혹시 정옥이한테 애인이 있지 않을가?》
불쑥 떠오른 생각을 내뱉았으나 말해놓고보니 아주 심중한 문제였다. 안해도 저으기 당황한듯 입술을 감빨며 얼른 대꾸하지 못했다.
《알아보오. 그랬다간 우리 립장이 아주 딱해지오.》
《그야 뭐…》
불안스레 미간을 쪼프렸던 안해가 약간 화색을 띠웠다.
《일전에 병원원장을 만났댔는데 그가 하는 말이 정옥인 총각소리만 꺼내도 한길씩 뛴댔어요. 그러단 아까운 얼굴에 주름이 겹쳐도 시집 못갈거라고요. 원래부터 부끄럼 잘 타고 내우하는 성미니까. 혹시 그애가 대학다닐 때부터 부국장댁 아들과 가까와진 사이가 돼서 그러지 않았을가요?》
짜장 그럴법도 했다.
《그렇다면 좋고… 어쨌든 빨리 알아보오.》
상은 제법 푸짐했다. 안해가 이날을 위해 각별히 마음써 준비했다는게 알렸다. 그러나 마감에 구수한 김을 피워올리는 잉어탕까지 들어왔을 때에는 렴진욱도 입을 딱 벌렸다. 그 모양을 보고 안해가 귀띔해주었다.
《현길실장이 당신 대접하라고 가져온거예요. 숱한 품을 들여 잡은 모양이더군요.》
렴진욱은 순간에 입맛이 싹 걷혔다. 《구태여 뗄 사람을 꼽으라면…》하던 리정우의 말이 대뜸 뇌리에 번개친것이였다. 이번에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게, 께름하게 안겨왔다.
그런줄도 모르고 안해 최금숙은 현길실장이 자기더러 이젠 직장을 그만두고 전적으로 지배인사업을 보좌해야 한다며 설득하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호호 웃었다. 안해인 자기도 남편이 어찌될지 몰라 전전긍긍할 때 그만은 어떻게 알아보았는지 숨차게 달려와 기사장동지가 지배인으로 임명되였으니 준비를 잘해야겠다고 선통해주었다는것이였다.
렴진욱은 저도 모르게 숟가락을 탕 놓았다.
《여보, 그게 혹시 당신생각은 아니요?》
《예?…》
《직장을 관두겠다는것 말이요?》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안해의 얼굴이 금시 해쓱해졌다. 렴진욱은 곧 후회하였다. 안해야말로 지금까지의 결혼생활 전기간 남편의 의사외에 자신의 어떤 소원이나 욕망을 가져보려고 하지 않은 녀자였기때문이였다. 더구나 맏아들이 인민군대에 나가고 막냉이마저 연남령너머의 도1중학교에 붙어 기숙사생활을 시작하자 텅 빈 집이 쓸쓸하다면서 직장생활에 더 극성을 부리는터였다.
그래도 렴진욱은 내친김에 한번 더 오금을 박았다.
《벌써부터 지배인사모님행세를 할가봐 그러는거요. 그건 날 구렁텅이에 처박는 일이야.》
…밖으로 나오니 언제부터 내리기 시작했는지 주룩거리는 비발이 얼굴을 때렸다. 그 속을 뚫고 고르롭지 못한 마광기소리가 와릉와릉 광산마을을 뒤흔들었다. 오랜 광부들이 그 소리를 들어야만 단잠을 잘수 있노라고 흐뭇이 외우군 하던 음향, 줄기찬 생산의 메아리였었다. 하지만 이 순간 렴진욱에게는 그 소리가 가슴을 허비며 괴롭게 마쳐왔다. 수명이 지난 마광기의 울부짖는 하소연, 고통스러운 비명이였다. 애초에 직장건물이 밀페되여 소리가 나지부터 말아야 했다. 그래야 겨울에 미광이 얼어 분급기날개를 물고 늘어지지 않을것이다.
질척거리는 골목길을 빠져 2호원동소가 자리잡은 둔덕길을 톺아오르는데 어둠속 어디선가 되알진 사내아이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엄마, 엄마, 아직도 비물이 떨어지나?》
《얘, 좀더 웃쪽… 웃쪽을 덮어라.》
렴진욱은 대뜸 그들 모자가 무엇을 하고있는지 깨달았다. 광산개발 초기에 제일 당급한것이 살림집문제였었다. 수천의 광부들이 전국각지에서 일시에 밀려들었는데 연하주변에는 세멘트 나올데가 없었다. 벽돌공장은 물론 변변한 석회구이로도 찾아볼수 없는 형편이였다. 당시 수백여리 먼곳에 떨어져있는 철도신세를 진다는것은 더욱 불가능했다. 그래서 짓기 시작한것이 어디 가나 흔한 원목을 켜서 벽체를 대고 동기와를 얹은 나무집들이였다.
막부득하여 취한 조치라고는 하지만 기실 동기와야말로 이곳 북방의 풍경에 조화롭게 어울리고 편리까지도 훌륭히 도모해주는, 조상전래의 생활방식이 완성해낸 운치있는 창조물이라고 할수 있었다. 우선 심산오지의 푸른 수림속에 추녀를 쳐든 살림집들의 송진내 향긋한 바둑무늬동기와는 대조되는 그 색조화로 하여 한결 산뜻하고 아늑하고 신선한 쾌감을 자아내며 또 엄혹한 겨울에는 목재의 보온성능으로 하여 추위까지도 막아준다. 어디에나 흔한 나무를 리용하여 손쉽게 씌울수 있기때문에 사람들을 굳이 고생시키지 않는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이곳 토배기주민들은 가까와진 철도에 실려 기와들이 널리 퍼졌어도 굳이 동기와와 작별하려고 하지 않는것이였다.
물론 비바람과 볕에 고삭아 5~6년에 한번씩 교체하지 않으면 보기 흉해진다는 번잡스러움도 없지는 않았다. 그마저도 광산마을은 《고난의 행군》시기 기대설비를 살리고 돌리는데만 주력하다보니 동기와교체에는 거의 낯을 돌릴 여유가 없었었다. 결과 지금같이 비 새는 집들까지 생기기 시작한것이였다.
광산을 새롭게 일떠세우는것이 결코 생산설비나 기대의 교체만이 아니였구나!… 비로소 렴진욱은 지배인이라는 직무가 얼마나 막중한 짐인가를 페부로 절감하지 않을수 없었다. 기사장시절엔 그래도 작전해주고 책임져주는 지배인이 있다는 의식으로 그저 힘껏 생산과 기술혁신에만 몰두하면 되였었다. 그러나 지배인은 우선 광산이라는 대가정의 호주여야 했다. 광산운영은 물론 수천세대에 달하는 광부들의 살림살이까지 책임져야 하는것이다.
이전 지배인 김호성이 광산을 때벗이해달라고 부탁했을 때부터 제나름의 목표를 내세웠던 렴진욱이였었다. 그것은 광산을 적어도 몇십년후인 먼 래일의 눈으로 뜯어보고 그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것은 모조리 갱신해치운다는것이였다. 그 항목이 설비현대화라는것은 두말할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그것은 아직 없었다. 다만 무조건 해야 한다는 결심뿐이였다. 왜냐면 그런 래일의 높이야말로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잘 아시고 믿어마지않으실 광산의 모습일것이기때문이였다.
하지만 이제 당해보니 자기의 그 《래일》이 극히 일면적이라는것이 명백해졌다. 오랜 세월 쓰고살다보니 어느덧 습관되여 아주 편리하게 여겨지던 동기와살림집들 역시 그 래일엔 제일 흉해보이리라는 타산만은 전혀 못하고있은것이였다.
절로 무거운 한숨이 쏟아져나왔다. 어깨에 산같이 실려지는 일감의 이 무게를 내가 과연 감당해낼수 있겠는가?…
등뒤에서 전지불이 번뜩거리더니 머리우에 우산이 소리없이 씌워졌다. 돌아보니 안해 최금숙이였다. 전지불빛에 비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샤쯔가 드러났다. 우산을 들고오면서도 쓰지 않은것이다.
《용서하세요, 정석이 아버지.》
실낱같은 속삭임, 어느사이 안해는 철벅거리며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렴진욱은 아프게 혀를 깨물었다. 무엇을 용서하라는것인가, 오히려 괜히 역증을 부린 자기가 용서를 빌어야 할게 아닌가!
모든게 김현길때문이였다. 그가 품들여 잡아왔다는 잉어, 그런 걸음이 적지 않았었다. 명절날은 두말할것 없고 자기의 생일, 지어 아이들의 생일날까지도 잊지 않고 큼직한 꾸레미를 량손에 갈라쥔채 들이닥치군 했었다. 그것을 렴진욱은 김현길을 동생처럼 위해주는 자기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인간적인 의리감의 충동으로 기쁘게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어떤 허물이나 빈구석을 가리우기 위한 일종의 연막이라면?
그럴수는 없다!… 렴진욱은 힘껏 도리질을 했다. 김현길 역시 자기 누이와 한피줄을 타고났을진대 다문 얼마간의 헌신성이라도 왜 지니고있지 못하겠는가!
어쩔사이없이 렴진욱은 오래전의 그 처녀에 대한 아픈 추억에로 빨려들어갔다.
×
20여년전의 화령광산, 거기에 조용하고 아련한 압축기운전공처녀 김현순이 있었다. 가냘픈 몸매에 코마루에는 주근깨가 다문다문 박힌 귀여우나 소심한 처녀였다. 그는 매일같이 고개를 다소곳이 숙인채 말없이 압축기를 돌렸고 터진 배관을 막았으며 교대가 끝나면 어김없이 한두시간쯤은 더 막장에 남아 역시 말없이 굴진공들의 착암기고무호스를 옮겨주거나 정대를 섬겨주군 했다. 피곤할텐데 어서 나가보라고 떠밀면 처녀는 소심하게 웃어보이며 대꾸하는것이였다.
《여기가 시원해서 좋아요.》
그것은 여름철에 하는 대답이였다. 겨울에는 《여기가 훈훈해서 좋아요.》라고 했다.
처녀의 그 류다른 행동에서는 사납게 요동치는 착암기와 함께 암벽을 밀어나가는 억세고도 과묵한 굴진공들에 대한 존경섞인 은밀한 애착이 엿보였다. 하여 모두들 그를 사랑했고 아껴주려고 애썼다.
유독 렴진욱만은 그 처녀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기들을 도우려고 애쓰는것은 물론 고마운 일이지만 그 류다른 소행이 어떤 변덕은 아닌지 미심쩍었고 성가실 때도 없지 않아서였다.
한번은 렴진욱이 꽁다리정대를 집어던지고 새 정대를 갈아맞추는데 김현순이 등뒤에서 《아이, 더 쓸만 한걸!》 하며 그것을 주어드는것이였다. 굴진계획을 초과하느라 등달았던 렴진욱은 처녀가 자기 일을 방해하는것 같아 《왜 시끄럽게 따라다녀?》 하고 꽥 소리치려다말고 에둘러 퉁을 놓았다.
《정 우리 일을 돕겠거들랑 손바리지 말고 노래나 불러. 알겠어?》
순간 처녀는 화닥닥 놀래여 굴벽에 붙어섰다. 그리고는 렴진욱이 억지로 노래를 시킬가봐 두려운듯 두눈을 흡뜬채 앞가슴을 붙안고 애원했다.
《딴건 다 시켜도… 노래만은… 정말…》
렴진욱은 픽 코웃음을 쳤다. 저렇게 쭐난 처녀와 무슨 재미로 마주선담, 천성적인 음치인지 아예 취미가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답답한 녀자인것만은 틀림없어!
처녀를 곁눈질하지 않는 보다 중요한 리유가 또 있었다. 렴진욱의 아버지는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원쑤들에게 학살되였다. 어머니는 무척 병약했고 나이가 썩 우였던 두 누이는 일찍 시집을 가버렸다. 그속에서도 그는 구김살없이 행복하게 자랐고 스물두살때에는 조선로동당 당원으로 되였다. 그러니 고마운 우리 당을 위하여 어찌 뼈를 아끼고 시간을 허투로 보내겠는가.
한편 자연은 그를 창조하는데 대단한 편애를 기울인듯 했다. 미끈하게 쭉 빠진 체격에 머리도 좋았는데 거기에 보태여 맑고 우렁우렁한 목소리까지 주었던것이다. 그래서 광산써클은 물론 웅변모임이나 무슨 회의결정서는 그가 아니면 읽고 읊을 사람이 없는것으로 치부되였다.
그때문인지 사람들은 그가 크게 발전할거라고들 수군거렸고 처녀들은 그의 눈에 들려고 무던히들 속을 태웠다. 그것이 은연중 렴진욱에게 《크게 발전》하려는 야심을 품게 해주었는지도 몰랐다. 하여 그는 대학졸업실습차로 광산에 내려온 박치명이 대학공부를 하라고 권고했을 때 그것을 《발전》의 기초로 믿게까지 되였던것이다. 그러니 잠시도 헛눈을 팔아서는 안되였다.
렴진욱은 무섭게 일했고 밤을 패며 무섭게 공부했다. 그가 어찌나 팽이처럼 돌아가는지 사람들속에서는 그의 우뚝하면서도 약간 휘우둠한 독수리부리코가 어떻게 붙어있는지 정확히 본 사람이 없다는 롱까지 돌아갈 정도였다. 《마라손총각》이라고 애정담아 불러주기도 했다.
어느날 채광막장을 확장하는 돌격작업때 렴진욱은 좀 덤벼치다가 그만 손가락 하나를 약간 찢기였다.
그때였다. 등뒤에서 《어마, 그 피!》 하는 숨죽인 비명과 함께 무엇인지 하얀것이 어깨로 넘어왔다. 양털로 곱게 뜬 사치한 가락장갑이였다. 의아쩍어 돌아보니 현순이가 걱정실린 눈으로 지켜보며 서있었다.
《주의하잖고… 어서 껴요.》
눈치빠른 몇사람이 웃음을 감추느라고 슬며시 얼굴을 돌리는것을 그는 감촉했다. 그러자 당치도 않은 역증이 벌컥 튀여나왔다.
《젠장, 저리 치워!》
렴진욱은 괜히 쭉 찢어진 눈을 부라리며 처녀의 손을 탁 쳐버렸다. 장갑이 날려가 땅바닥에 흩어졌다.
현순은 당혹과 원망으로 두눈을 파들파들 떨더니 《흑!…》 하는 외마디 흐느낌과 함께 얼굴을 싸쥐고 어디론가 뛰여나가버렸다.
《에이, 고자같은 자식!》
한 친구가 렴진욱의 어깨를 콱 쥐여박았다.
《우리의 귀한 현순이를 울리다니, 암만 봐야 넌 그게 바로 달리지 못한 녀석이야. 어서 장갑을 줏게.》
이미 렴진욱은 자신을 저주하고있던 참이였다. 그 양털장갑이 어떻게 마련된것인지는 몰라도 성의만은 받아들였어야 할것이 아닌가. 처녀에게 모욕을 줄 리유가 어데 있단 말인가?
렴진욱은 차마 장갑에 손을 댈수 없었다. 무엇인가 덞어질것 같은, 자신에 대한 수치심 비슷한 기분때문이였다. 하여 그는 자신에게 밸풀이하듯 정신없이 착암기만 돌렸다.
얼마후였다. 또다시 어깨너머로 무엇인가 넘어왔다. 피끗 보니 이번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여오르는 우유고뿌였다.
《자, 마시고 좀 쉬자구.》
같은 조의 나이지숙한 굴진공이 하는 말이였다. 렴진욱은 무심히 고뿌를 넘겨받아 단숨에 쭉 마셨으나 착암기를 놓으려 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굴진공은 바람변을 제손으로 탁 꺼버렸다.
《원, 고맙다고 인사할 렴치도 없어졌나?》
비로소 렴진욱은 안전등빛에 흐릿하게 보이는 막장구석에 오도카니 서있는 현순이를 알아보았다. 처녀의 손에는 배불뚝이늄주전자가 들려있었는데 그 삐죽한 주둥이로는 김이 뿜어오르고있었다. 그러니 자기가 방금 마신 우유는 현순이 끓여온것이였다.
렴진욱은 차마 그를 마주볼수 없었다. 그렇게 모욕을 당하였음에도 그것을 이겨내고 수고하는 굴진공들을 위해 막장으로 되돌아와준 처녀… 하여 그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피울줄도 모르는 담배를 한대 얻어 뻐금뻐금 빨기 시작했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리도 조용하고 수집음뿐이던 현순의 류달리 유쾌한 목소리가 등뒤에서 울린것이였다.
《어때요, 제가 옛말을 하나 할가요?》
렴진욱이 어리둥절하여 돌아보았을 때 굴진공들은 이미 처녀를 둘러싸고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고있었다.
《거 희한한데. 난 찬성이요!》
《닭대신 꿩이라고 이건 저 진욱에게 진 노래빚을 옛말로 갚는것이렷다. 여, 진욱이 바싹 다가와앉으라구.》
《아, 조용, 조용…》
마침내 현순이 약간 태를 머금은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건 범이 담배피울 때 얘긴데… 먼 옛날 어느 산골에 령리한 염소와 양을 기르는 두 늙은 내외가 살고있었대요.…》
렴진욱의 눈은 화등잔처럼 흡떠져있었다. 종일 함께 지내봐도 말한마디 변변히 들어보기 힘들었던, 애초에 활달한 억양같은것은 가지고있지조차 못했을것 같던 처녀의 저 은근한 미소는 갑자기 웬것이며 저 도란도란 정겹게 울리는 목소리는 또 뭐란 말인가?… 그 놀램과 희한함과 의혹에 머리가 뒤죽박죽되여 렴진욱은 무슨 《승냥이대가리가 든 자루》가 어떻소, 《마음약한 양과 마음 굳센 염소》가 어떻소 하는 이야기흐름에는 거의 귀기울일 경황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야기가 마감에 접어들었을 때에는 처녀가 얼마전 꽁다리정대를 버린 자기의 행위를 그 옛말로 에둘러 비판하고있다는것을 똑똑히 깨달았다. 굴진조원들도 그 사건을 알고있던지라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깊이 렴진욱을 돌아보는것이였다.
잠재웠던 수치감이 또다시 가슴을 허볐다. 렴진욱은 처녀의 마감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벌컥 뛰쳐일어나 착암기의 바람변을 왈칵 열었다. 그리고는 현순이쪽을 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역증처럼 내질렀다.
《그 얘긴 글로 써서 내게 직접 줘야 하는거야!》
착암기가 맹렬히 울부짖었다. 렴진욱의 가슴도 맹렬히 뒤끓었다. 자신에 대한 참을길 없는 울분때문이였다. 아아, 왜 곱게 말하지 못했던가, 진심으로 가책을 느끼고 처녀의 옛말을 두고두고 새기고싶어 부탁한다는게 또 그만 비뚤어진 심사 그대로 몰풍스러운 말이 튀여나간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처녀가 더는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가버렸을것이다. 그리고는 더이상 자기를 대상하려 하지 않을것이다. 자기같이 우직하고 조폭한 인간에게 이젠 완전히 혐오감을 느꼈을것이기에!… 정말 내가 아주 쓸개빠진 속물이였더란 말인가?
렴진욱은 잠간만이라도 뒤돌아보고싶었다. 현순이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해보지 않고는 진정할수 없어서였다. 그러나 두려움이 감히 목을 돌리지 못하게 방해했다. 정말 처녀가 사라졌다면 자기는 스스로를 완전히 증오하게 될것이다.
그때였다. 돌연 등뒤에서 웬 녀자의 새된 부르짖음이 막장을 흔들었다. 홱 돌아본 렴진욱은 깜짝 놀랐다. 다름아닌 현순이가 한대의 예비동발을 천정에 버틴채 불편하게 엎드려있는것이 아닌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처녀가 다시 필사적으로 부르짖었다.
《빨리 피하라요. 진욱동지! 붕락… 빨리요!》
왜 그리 힘겹게, 고통스럽게 토막말을 짜내는지… 벌써 천정에서는 주먹같은 돌멩이들이 투닥투닥 떨어져내리고있었다.
사태를 깨닫고 모두들 후닥닥 들뛰여 물러섰을 때 렴진욱은 처녀가 그자리에 그냥 엎디여 괴롭게 몸을 비트는것을 보았다.
《왜 그래? 빨리 나오지 않고 왜…》
미처 말을 맺을수 없었다. 미처 처녀에게 손을 뻗칠 사이도 없었다.
와르륵!― 뽀얀 돌가루를 날리며 쏟아진 붕락이 처녀를 덮친것이였다.
손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미친듯이 락반을 걷어냈을 때 렴진욱은 억이 막혀 말뚝처럼 굳어졌다. 이미 숨진 현순이의 한손은 지압에 눌리운 동발밑굽에 꽉 끼여있었다. 동발을 버티는 순간에 이미 그렇게 된 상태였다는것이 어렵지 않게 알렸다. 비통한 오열과 함께 불뭉치같은것이 가슴을 지졌다. 처녀는 자기의 피할길 없는 불행을 사람들에게 호소하면 모두 자기를 구원하러 달려올가봐, 하여 함께 붕락에 치일가봐 그것만은 마지막까지 숨겼던것이다.
렴진욱의 가슴을 찢는 사연이 후에 또 발견되였다. 김현순의 작업일지짬에 손때오른 손바닥만 한 노래수첩이 끼여있었는데 마지막여백에 다음과 같은 글이 씌여있은것이였다.
《오늘 난 렴진욱동지가 눈을 부라린다고 고깝게 생각했다. 부끄럽기 그지없다. 우리 수령님께서 조금만 젊었어도 막장에 들어가 탄을 캐고 광석을 캐겠다고 하신 한없이 고귀한 말씀의 뜻이 바로 렴진욱도 포함한 광부들에 대한 최대의 사랑과 믿음이 아니였단 말인가. 그 높으신 뜻을 받들고저 막장에서 한몸 내댈 결심을 했던 나, 더 분발해야겠다.…》
렴진욱은 노래수첩장우에 처음이자 마지막인 사나이다운 눈물방울을 떨구었다. 우리 수령님 사랑하시는 용감한 굴진공들을 위하고 그 세계속에 자신을 올려세우려고 애썼던 티없는 처녀의 마음을 한 총각에게 반한 어떤 아양처럼 경멸한 자신이 죽고싶도록 수치스러웠던것이다. 그와 함께 숙연한 생각이 가슴을 울렸다. 타고난 음치거나 노래취미가 없으리라고 여겼던, 그리도 말없고 조용한 처녀가 기실 노래를 사랑한것이였다. 수집음때문에 사람들앞에 선뜻 나서지 못했을뿐, 아니, 김현순은 노래를 사랑하지 않을수 없었을것이다. 애초에 그의 짧은 인생자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노래였다. 우리 수령님의 뜻에 심장의 고동을 맞춘, 화답해부르지 않고는 못 배길 그렇게 티없고 랑랑한 헌신의 노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에 따라 연하광산개발이 정식 선포되여 그 첫 돌격대장으로 달려왔을 때 렴진욱은 김현순에 대한 죄스러움을 씻어버리기 위해 더더욱 무섭게 일했고 대원들에게도 그렇게 요구했다. 그 과정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모질고 혹독한 인간으로 변하여 모두의 두려움을 자아냈다.
하루는 허태흥이라고 부르는 새 광산의 첫 당비서가 그를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몇달째 잠 한번 변변히 자지 못해 눈이 쑥 들어가고 볼살이 깎인 렴진욱을 지그시 노려보더니 버럭 고함질렀다.
《이 도깨비! 처녀들을 세탁할 짬도 안 주면서 밤낮 달구어대? 다 죽일 잡도린가, 엉?》
그때 렴진욱은 자기 가슴부터 쳤다.
《비서동지, 현순일 생각하면… 전 여태 자신만을 위해 살아온 놈이였습니다. 그 처녀처럼 깨끗한 마음을 지니지 못한 내가 밉고 나같은 심보를 가진 녀석들이 미워 눈에서 절로 불이 나는걸 어쩝니까?》
《어― 사람두.》
허비서는 긴 탄식을 터뜨리고나서 머리를 썩썩 긁었다. 《할수 없지. 돌격대장자릴 내놓든가 장가를 들든가 량단간에 정하게!》
《장간… 못 가겠습니다!》
《뭐, 그럼 돌격대장을 그만두겠다는건가?》
허비서는 책상을 탕 쳤다. 살림집건설이 너무 방대한데다가 산업건물건설과 채광장확보, 장거리벨트콘베아설치를 위한 굴뚫기 등 온통 숨가쁜 건설뿐이여서 그자신 당일군이면서도 시공일군몫까지 도맡아 밤을 밝히기로 유명해진 허비서의 얼굴이 대뜸 험악해졌다.
《동무두 당원이요?》
《비서동지!…》
《나가오! 당장!》
《…》
끝내 제 먼저 누그러진것은 당비서였다. 그는 걸상에 털썩 주저앉아 성급히 담배를 몇모금 들이빨더니 긴 한숨을 내쉬였다.
《결혼이라는게 뭔지 아나? 우선 녀성을 알게 되는거야. 다음은… 고급한 말로 두 넋, 두 세계의 결합으로 그 세계가 더 커질뿐아니라 화학반응처럼 보다 아름답고 훌륭한 세계가 재창조되는 과정이 결혼이지. 내 왜 이런 유식한 말을 하냐하면 자네가 아직 작아서 그러는거야. 원, 처녀들을 그렇게 다루다니… 장가를 가게, 당장! 알겠나?》
그렇게 이루게 된 가정, 그러면 렴진욱 자기는 그때부터 보다 훌륭해졌던가?… 잘 알수 없었다. 그저 가정에 몸담을 여가를 갖지 못하며 줄곧 일에 몰두했던 기억뿐이였다. 그래서 광산조업후 기술발전책임기사, 부기사장, 기사장을 거쳐 오늘은 지배인으로까지 될수 있었다. 그것은 총각시절에 자신이 원했던 그런 《발전》은 결코 아니였다. 현순이의 최후모습처럼 자신을 완성시키려고 제나름으로 애써온 과정이였다. 또 명백한것은 자기가 그만 현순이의 최후모습으로 사람들을 재단하고 평정하는 완고한 습벽을 굳혔다는것이였다.
그런 눈으로 볼 때 김현길실장은 어떤 평정을 내릴수 있는 인간이겠는가? 김청주며 기술부기사장 리정우는?…
불쑥 렴진욱은 쓰겁게 웃었다. 10년 가까운 기사장생활기간 거의 코를 맞대고 일하다싶이 해온 자기의 손발같은 기술자들을 아직 똑똑히 파악 못해서 이런 의문을 던지다니 이 얼마나 괴이쩍고 기막힌 노릇인가.
《어쨌든 청주를 한번 만나보고 결심해주십시오!》 하고 리정우는 호소했었다. 너무도 단순하고 명백한 론거였다. 광산을 새롭게 추켜세우자면 그것을 담당해줄 광부들부터 불러일으켜야 하는데 그들이 어떤 인간들이며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모른다면 지휘관의 돌격구령은 빗나가는 화살꼴이 되고말것이다. 그렇다, 지배인은 바로 알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