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8
운명은 나를 배반했다!… 박치명은 합숙방에 홀로 틀어박혀 화술을 들이켰다. 자신에 대한 허무감에 가슴이 미여지는것 같았다.
아주 오래전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가 떠올랐다. 어느날 아버지가 술 한잔 걸친 불그레한 얼굴로 그때 벌써 안경을 끼기 시작한 파리한 아들을 불러앉히고 이렇게 말했었다.
《안경을 낀걸 분해하지 말아라. 그건 네가 학문으로밖에 성공할수 없다는걸 깨우쳐주는 하나의 경고이자 혜택이기도 하다. 네 이름이 왜 치명인지 아느냐? 네 손으로 네 운명을 다스려야 한다는 의미다.》
이제금 돌이켜보면 의미깊은 말이였지만 그 나이의 박치명으로서는 옳게 리해하고 뼈에 새길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어쨌든 그는 열심히 공부했고 뛰여난 성적으로 대학까지 졸업했으며 순조롭게 한개 성의 부국장으로까지 승진의 길을 걸어왔다. 말하자면 자기 운명을 제 손아귀에 꽉 틀어쥐고 다스려온셈이였다.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 그 운명이 슬며시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여러번 그런 조짐을 느끼고 각성하기도 했으나 자기가 결코 탈선한다고까지는 여기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 연하광산걸음만은 뭔가 전혀 달랐다. 새벽녘 병원에서 리정우기사장에게 모욕적인 면박을 당하던 일만 해도 그랬다. 한해전까지만 해도 여간 만만하고 고분고분하지 않던 리정우가 오늘은 애된 처녀굴착기운전공앞이라는 고려도 없이 《제 볼장이나 보라》며 뭘 쫓아버리듯 한것이였다. 그것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뛰쳐일어날만큼 분하고 억울한 심정이였다. 어찌하여 이런 소름끼칠 정도의 대접을 받게 되였단 말인가?
리정우기사장한테서 원인 모를 물구멍이 터졌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박치명은 대뜸 압록강이 맞구멍났구나 하는 판단에 눈앞이 아뜩해졌다. 그는 절망과 분노에 사무쳐 전화통에 대고 고함쳤다.
《끝내 광산을 망쳐먹었어, 끝내! 내 그렇게 방수벽엔 손대지 말라고했는데도 땅고집을 쓰더니… 당신들 목이 붙어있으리라고는 꿈도 꾸지말아!》
뼈저린 후회가 가슴을 쳤다. 작년엔가 내려갔을 때 렴진욱의 모욕적인 말에 울컥하여 방수벽채굴을 끝까지 막지 못하고 되돌아선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국가적리익의 관점에서 볼 때 일군의 극심한 무책임성이라고 지탄받아도 할말이 없게 되지 않았는가.
그러니 무엇보다 책임한계를 옳게 갈라야 했다. 그렇지 않다가는 그 불똥이 연하광산을 담당한 자기에게까지 튈수 있다. 그러지 않아도 여전히 긴장한 자금사정으로 다른 여러 광산들을 아직까지 완전히 추켜세우지 못해 성의 추궁을 받고있는 자기였다. 유독 연하광산만이 활성화되고있어 체면을 유지할수 있는데 그것마저 찌그러질 상황이 조성된것이였다.
그래서 박치명은 성에 강력한 실태료해조를 구성하여 내려보낼것을 제의할 때 지배인의 사업정지권한도 줄것을 각별히 요구했었다. 그래야 렴진욱의 독단을 제거해버리고 사태를 자기가 바라는대로 안전하게 수습할수 있다고 본것이였다.
정작 광산에 와서 채굴장을 돌아본 박치명은 이마를 쳤다. 오랜 전문가의 눈으로 그 물구멍이 압록강과는 무관계하다는것을 대뜸 포착한것이였다.
광산이 당장 망쳐진것은 아니였다.
자기가 너무 반지빠르게 성에다 떠들썩 소문낸셈이였다.
대신 아짜아짜할 정도로 푹 깎아먹은 방수벽은 그에게 전률을 자아냈다. 언젠가 김지택이 경고한것처럼 몇번의 발파진동에도 층서가 발달하여 압록강이 슴새여들것은 불보듯 명백했다.
박치명은 이를 사려물었다. 렴진욱, 이제 더는 충고나 하는 식으로는 안돼, 방수벽의 위험성에 대한 결정적인 근거를 제시하는것과 함께 현사태의 책임을 무겁게, 뼈에 새기게 지워야 해!
렴진욱과의 담화를 잠시 뒤로 미룬 그는 김지택부터 불러들였다. 방수벽의 위태로움을 누구보다 걱정한 그야말로 렴진욱을 꺼꾸러뜨리는데 가장 유력한 과학적근거를 제공해줄수 있을것이기때문이였다.
그런데 김지택은 뜻밖의 애매한 태도로 박치명을 실망시켰다.
《난 내 감각을 더 믿어왔지만 콤퓨터3차원모의실험결과는 그 우려를 부정했수다. 고민이 많수다. 그네들 말처럼 정말 내가 낡아졌는지… 그 물구멍이 압록강과 련결된게 아니라면 현재로선 방수벽도 별일 없을거우다.》
《그러니… 지배인이 옳았다 그거요?》
아연하여 따지자 김지택은 흘깃 박치명을 가로보았다.
《뭘 그러시우? 아직 틀렸다는 답이 나온것두 아닌데. 물구멍을 해명한 다음 봅시다.》
《물구멍따위가 문젠줄 아오?》
박치명은 벌컥 역증을 냈다. 하지만 곧 혀를 깨물었다. 전화로 리정우며 렴진욱에게 압록강을 채굴장에 터뜨려넣었다고 앞질러 욕질한 생각이 떠올라서였다. 그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어쨌든 성의 지시도 안 듣고 망탕짓을 해온 지배인을 그냥 둘순 없소. 방수벽이 콤퓨터가 하자는대로 되여줄거라고 믿는 그 어리석음을 싹 씻어버리란 말이요!》
김청주와의 담화는 더 까다로왔다. 박치명자신도 리해 못할 복잡한 기술용어들을 써가며 방수벽의 안전성을 냅다 렬거하는통에 오히려 줄땀을 뽑기까지 한것이였다. 그러면서 김청주는 렴진욱지배인을 어떤 생산성과로 제 낯내기나 할 인간으로 보는 부국장자체가 의심스럽다고 반격해나섰다. 박치명이 흥분한김에 고려없이 내뱉은 《낯내기》소리가 낚시로 되여 도로 그의 코에 꿰인것이였다. 오랜 세월 친교를 맺아와서 렴진욱을 잘 아는 그였다. 렴진욱은 일욕심이 많다보니 때로 무모하게 굴때는 있어도 자기를 굳이 내세우려고는 하지 않는, 이른바 《살줄 아는 인간》의 부류에는 속하지 않았다.
실태료해조가 목적하고 내려온 일은 전반적으로 우습게 번져지고있었다. 가장 우스운 실례가 실태료해와는 하등 인연이 없는 살림집건설문제가 감탄속에 론의된것이였다. 한 성원이 멋진 살림집풍경에 혹하여 두루 알아보니 순 진흙으로 벽체축조도 미장도 함으로써 그 운반비와 지붕목재를 내놓고는 거의 돈이 들지 않았더라고 혀를 찬것이 그 계기였다. 그러자 이야기는 지배인이 물구멍을 폭파한데로 번져져 이젠 방수벽채굴도 긍정적으로 고찰해보자는데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즉 최대의 안전수치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최소한의 고려는 되여있지 않느냐는것이였다. 그것이 박치명의 부아통을 터뜨렸다.
《최소한이라는게 무슨 소리요?》하고 그는 노기등등하여 소리쳤다.
《그래 광산의 만년대계를 떠나 당장 문제가 없으면 된다는거요? 이게 래일을 확고히 담보해주어야 할 일군의 자센가 말이요. 문제를 그런 립장에서 보지 않을 땐 책임추궁받을줄 아시오!》
박치명은 자기가 왜 그리도 안절부절하며 신경질을 부리게 되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자기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인식으로만 머리가 꽉 차있을뿐이였다.
그날 지질전문가들을 휘동해가지고 다시 채굴장에 나간 그는 그 《최소한》의 위험성을 열을 올려 피력하고는 그 방향에서 료해를 심화시킬것을 지시하였다.
그런데 그가 막 돌아서려고 할 때 수지안전모에 돌가루투성이작업복차림의 김현길이 슬그머니 나타나 팔소매를 잡았다.
《안녕하십니까, 부국장동지.》
《어― 현길동무, 자네 끝내…》
박치명은 측은하면서도 딱하여 말을 이을수 없었다. 다름아닌 이 김현길이때문에 렴진욱과 마찰이 있은걸 생각하면 언짢기 그지없었으나 그래도 친한 하급생이고 아들의 운명까지도 건져준 은인이라 할수 있지 않는가. 어쨌든 그를 굴진공으로까지 내리굴린건 몹시 불쾌했다.
《다 내 책임일세. 서로 결함을 찾자구. 그렇다고 내가 자넬 아주 버리자는건 아니야.》
이전보다 퍽 여윈것 같은 김현길의 얼굴에 감사의 정대신 씁쓸한 미소가 그려졌다.
《괜찮습니다. 지배인동지가 인차 선광현장기사로 옮길걸 당위원회와 합의봤다니까요. 전 채광에 와서야 내 몸뚱아리속에 정광이 한줌도 되지 않는다는걸 깨달았습니다. 일은 하지 않고 낚시대만 둘러메고 다녔고 공부를 안하다나니 류병근아바이의 연구성과에 제 이름을 슬쩍 끼워넣고… 그뿐인줄 압니까? 제 낯내기를 해보자고 다른 기관들에 정품도 못되는 물자를 들이밀어 생산파동을 초래할번 하기까지 했는걸요.》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박치명은 안경알속에서 눈을 흡떴으나 그보다 먼저 심장 한귀가 띠끔해났다. 《물자》라는 소리가 대뜸 아들의 문제― 회사에 준 손실건을 떠올렸던것이다.
아닐세라 김현길은 또다시 쓰겁게 웃으며 터놓았다.
《뭘 숨기겠습니까. 제 먼 친척이 그런 부문에 있는데 부국장동지의 아들이 잘못 끌어들인 물자를 받아주었습니다. 제가 하도 사정하니까 눈을 꾹 감은거지요. 물론 기술자들과 토의하고 새로운 제품으로 전환시킬 방도를 찾아놓고야 동의했지만 어쨌든 다 소화하자니 진통을 겪은 모양입니다.》
큰일이 생긴건 아니라니 우선 숨이 나갔다. 하지만 박치명은 수치감을 이겨낼수 없었다. 결국은 자기 아들을 살려내자고 다른 기관에 곤욕스러운 짐을 넘겨씌운것으로 된셈이였다. 무엇보다 그러한 오그랑수를 쓴 김현길을 활동적인 사업가로 여기고 높이 사준 자기의 맹인같은 눈이 문제였다.
《제 부국장동지를 만나자고 한건…》
김현길은 박치명이 미처 입도 열지 못하게 계속 말을 내뱉았다.
《명예욕에 눈멀었던 저를 가려보지 못한것도 문제지만 우리 지배인이 하는 일까지 왜 삐뚤서 보는가 하는겁니다. 기술수준이 낮아서요? 아니, 그 점에서는 나도 여전히 부국장동지를 존경합니다. 부국장동진 다만… 변화를 두려워하는겁니다. 뭐든 새 일이 벌어지면 시끄럽고 골쓸 일이 많아지고 그렇게 해서 얻어질 결과까지도 좋게 믿어지지 않고… 다 못믿고 다 하기 싫다는거지요.》
《아무 소리나 탕탕… 뭘 안다고 그래?》
박치명은 불끈하여 버럭 고함질렀다. 주변을 오가던 광부들이 어리둥절해서 그들을 돌아보았다. 김현길의 얼굴에 례의 그 씁쓸한 미소가 다시 그려졌다.
《몰랐기에 여태 부국장동지를 따른거지요. 권고하는데… 광산에서 손을 떼고 돌아가십시오.》
김현길은 훌쩍 물러가버렸다. 박치명은 아프게 혀를 깨물었다. 싸늘한 전률이 온몸을 강직시키는듯 했다. 돌아가라!… 비록 조용히 던진 말이였으나 그것은 리정우기사장의 《제 볼장이나 보라》는 모욕적인 언사보다 더 뼈를 에이는것이였다. 이 순간 박치명은 자기 립장의 옳고그름에 대한 환멸보다 김현길의 인간적《배신》이 더 분해났다. 지금껏 왜 그것을 전혀 모르고 지냈던가? 그토록 자기를 잘 위장해서?…
불쑥 느닷없는 공포가 그를 휘감았다. 자기가 바로 김현길을 그런 인간으로 만든 장본인이 아니겠는가 하는 무서운 깨달음이였다. 만약 그렇다면 이 박치명이라는 인간의 진짜모습은?
그때부터 박치명은 자신에 대한 의혹을 삭이지 못하여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런데 술은 목구멍을 뜨끔하니 지지며 배속으로 흘러들어가서는 마음을 안정과 취기로 감싸줄 대신 이번에는 혐오감을 달구어 목구멍으로 울컥 뿜어올리는것이였다. 그것을 누르자니 새 잔을 기울이지 않을수 없고 그러면 그것이 또다시 새로운 혐오감으로 치밀어오르고… 과연 내가 어떻단 말인가? 뭐 김현길에게 그런 부정한 행위를 하라고 부탁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박치명은 뭐든 《다 믿지 않은》 자신을 해부할 대신 김현길에게 모든걸 떠민다는것도 의식 못하며 혼자 끝없이 모대기였다.
갑자기 문이 덜컹 열렸다. 놀래여 고개를 든 박치명은 문가에 허연 수염발을 드리운 웬 로인이 우뚝 서있는것을 보았다. 옥준보로인이였다. 매번 광산에 올적마다 어김없이 문안인사를 하고 귀한 조언도 받군 하던 그를 몰라볼리 없었다. 그런데 멀리 떠나보낸 자식처럼 늘 살갑게 맞아주던 로인의 엄엄한 기상이 박치명을 긴장시켰다.
박치명은 책상우에 벌려놓은 술병이며 마른 명태들을 급급히 잔등으로 가리우며 수선을 피웠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침대에… 아니 쏘파에 앉으십시오. 이번에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꽤 술을 마셨으나 혀가 제대로 돌아가는것이 그래도 다행이였다. 로인을 쏘파에 부축해앉히고나니 또 책상우의 물건짝들이 어지러운 뒤생활을 고발하듯 눈에 걸렸다. 박치명은 제김에 얼굴이 붉어져 변명삼아 중얼거렸다.
《갑자기 몸살이 오더라니… 아니, 춥더라니…》
《임자… 이번엔 왜 왔다구?》
옥준보로인의 첫 물음이였다. 그 어조가 서늘했다. 박치명은 정신을 바싹 차렸다.
《예, 예. 광산실태료해차로…》
《그걸 몰라 묻는게 아니야. 광산을 떠밀어주자는 목적인가 뒤다리 잡아채는 훼방군목적인가?》
《…》
박치명은 단번에 땀이 와짝 내돋았다. 《훼방군》이란 표현이 비수같이 가슴에 박혔다. 너무도 가혹한 비유였다. 위태로와진 광산을 구원하자고 달려내려온 정당한 행위가 어떻게 훼방군의 뒤다리잡이로 오도될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미처 반박할 기회도 주지 않고 로인은 여전히 추상같은 말마디들을 내뿜었다.
《내 임자를 잘못 안것 같애. 내게 보약재를 가져온다, 우리 지배인을 동생처럼 여기구 내세우는 관계다 하길래 쉽지 않은 일군이로다 하구 감심했더니… 그래서 부국장이라는 직무두 초월해서 친자식 대하듯 해왔더니 빛갈 좋은 보자기를 써왔거던. 뭐 료해라는게 실은 검열이라면서?… 어디 해보게. 허나 미리 알라구. 우리 지배인은 30년가까이 하루 두세시간씩밖에 자지 않으면서 광산을 위해 뼈를 깎아온 사람이야. 알아보니 동생이라면서도 그의 집엔 안 가봤대? 광부들은 새집에 꽃타일, 꽃벽지를 붙여 내세우면서 자긴 아직 동기와를 얹은 헌집에서 살구있어. 지금두 어깨뼈를 삐였지만 붕대를 매구 현장에 나갔어. 헌데 부국장인지 뭔지 하는 량반은 뜨뜻한 방안에 틀어박혀 술마시면서두 오히려 그런 사람이 나쁘다구?》
혀가 풀린것은 그때였다. 박치명은 로인앞에 허둥지둥 손을 저어보이며 숨가삐 부르짖었다.
《로인님은 뭔가 오해하십니다. 로인님도 잘 아실테지만 방수벽은 광산의 생명보루입니다. 헌데 눈앞의 생산만 생산이라구 래일의 안전한 광산을 깨버리고있으니 제 어찌…》
순간 로인이 여윈 주먹으로 쏘파팔걸이를 탁 내리치며 호령했다.
《예끼! 아직두 제 잘못을 남에게 뒤집어씌울 차빈가, 엉?》
박치명이 깜짝 놀라 제김에 걸상에서 굴러내릴만치 천둥같은 고함이였다. 그 고함으로 로인은 기력을 싹 소모했는지 숨이 차서 훌쭉한 가슴을 풀떡거리며 줄기침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머리끝까지 치받친 분노를 깨끗이 쏟지 않고는 견딜수 없는지 토막토막 끊기는 서리발같은 말마디들을 계속 토해냈다.
《그래 지질전문가들도… 안전성을 담보하는 방수벽을… 어째서 계속… 계속 따져보라구 강박했느냐? 성에… 역적이라도 잡을것처럼 소문내고… 그렇게 달려온 체면이 깎일가봐 뭐든 죄를… 죄를 만들어낼 심보가 아니였단 말인가?》
이미 술은 말짱 깬 뒤였다. 박치명은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턱에 매달려 참을수없이 가렵혔지만 그것을 훔칠 엄두도 못냈다. 그저 다리만 떨렸고 가슴도 싸늘하게 얼어들었다. 귀신같은 로인이였다. 료해조성원들사이에서만 론의된 문제를 그가 어떻게 알아냈단 말인가? 보다 무서운것은 자기자신조차 느끼지 못했던 지질전문가들에 대한 까닭없는 신경질의 근원을 통쾌할 정도로 해부해낸것이였다.
박치명은 전률했다. 자기라는 인간이 로인의 말마디를 통하여 홀랑 벗기운것이였다. 그랬다. 자기의 신경질의 근원은 렴진욱이 옳았다는데로 기울어지는 료해결과에 자기 체면이 무참해질것 같아 일으킨 일종의 피해의식, 자기보존의 비루한 발작이였던것이다!
걷잡을수없이 내돋는 박치명의 줄땀이 불쑥 가긍하게 여겨진듯 로인이 저으기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부드럽게 훈계하기 시작했다.
《자고로 일생에 좋은 일 한가지만 남겨두 그 인간은 산 보람을 느낄만 하다구 했네. 헌데 우린 좋은 일 열가지, 백가지를 남겨두 성찰수 없는 세월에 살구있지 않나. 하물며 못된짓이야 왜 남겨?… 임자 우리 렴지배인과 자기의 차이가 뭔지, 자기가 왜 이런 꼴이 됐는지 속을 깊이 파보게, 깊이!》
그다음 로인은 끙 몸을 일으키며 《난 가겠네.》하고 말했다.
박치명은 로인이 문을 열고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래줄 생각도 못하고 멍청히 굳어져있었다. 한바탕 악몽속을 헤맨 기분이였다. 하지만 그것이 꿈이였다면 이토록 생리적아픔까지 생생하게 마쳐올수 있겠는가.
로인은 말했었다, 왜 이런 꼴이 됐는지 속을 깊이 파보라고. 정말 자기는 렴진욱을 걸고들 못된 의도로 이 연하땅에 왔던가? 아니, 맹세컨대 광산이 망했다는 의분에 그런 사태를 빚어낸 죄인들을 징벌하자는 응당한 의도뿐이였었다. 그런데 정작 내려와보니 죄인은 없고 오히려 김청주를 비롯한 광산기술진영의 능력을 자기가 여태 과소평가해옴으로써 돌이킬수 없는 실책을 범했다는것, 료해검열의 타당성을 증명하지 못하면 성앞에서 무능한 일군의 오명을 벗지 못하리라는것을 의식하지 않을수 없었다. 바로 이런 초조한 심리가 은연중 《먼 래일까지의 방수벽안전》을 내들게 만든것이다. 그렇게 보니 자기는 참으로 너절하고 비렬한 인간인셈이였다. 여기에는 어떤 형벌이 적당하겠는가?
불쑥 어깨를 상한 렴진욱이 그 몸으로 현장에 나가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쳤다. 성료해조앞에 자기의 결백이나 어떤 투지를 시위하려는 연기일수는 없었다. 그것이 원래부터 타고난 렴진욱의 인간됨이였던것이다. 대조되는 두 모습의 차이!… 절로 진저리가 쳐졌다. 문기척과 함께 수수하게 생긴 중년녀인이 빠끔히 문을 열고 속삭였다.
《식사를 다 차렸는데… 이리로 들여올가요?》
책상우의 술병을 보고 묻는 말이였다.
《아, 아니, 내 가지.》
흔연스럽게 대답했으나 박치명은 식당으로가 아니라 밖으로 나갔다. 피빛저녁노을이 방금 스러져가는 순간이였다. 그 노을이 어찌나 정열적으로 자기를 불태우고 급격히 사라지는지 미처 여겨볼 사이도 없었다. 괴이한 노을이였다. 어쩌면 순간에 조락해버릴 자기 운명에 대한 암시는 아닌지…
밤도 급속히 다가왔다. 평양과 달리 밤하늘의 별들은 별스레 주먹같이 크고 령롱했다. 이것 또한 연하에만 있는 괴이한 별들이였다. 고산지대여서 별에 보다 가까운때문일가?
박치명은 때아닌 때에 태평스러운 생각을 하게 되는 자신에게 화를 내며 마구 걷기 시작했다. 어디로 무엇하러 가는지도 몰랐다. 그저 마음만 울적해졌다. 지금껏 자기가 가는 길을 너무도 잘 알고 자신만만하게 걸어온 그였다. 당에서 크게 믿고 맡겨준 성의 한 부국장직무, 그에 보답하려고 여태 몸을 아끼지 않으며 부지런히 드달려온것만은 사실이였다. 그런데… 별안간 아들문제가 발에 걸채여 그리도 곱게, 씩씩하게 걷던 걸음을 비청거리게 만들기 시작했다. 아들을 구원하자니 구차하게 남의 지원도 덥석 받았고 그 신세를 갚자니 원칙을 어기며 소환놀음도 벌렸으며 그것이 튀여버리니 한 옳은 인간을 찌글서 보며 못마땅하게 대하는 추태도 부리게 되였다. 당이 바라는 길이 아닌 시궁창길에 빠져든것이였다. 저주로운 아들이였다.
《퉤!―》
박치명은 느닷없이 입안에 가득 고여오르는 열물을 쓰겁게 뱉아버렸다. 또 변명이 아닌가. 모든 죄를 아들에게 밀몰아붙이다니, 이 박치명이란 인간은 얼마나 역겨운가. 아들 역시 자기를 그대로 닮은 한 분신이거니 누구를 탓하고 저주한단 말인가. 오직 자기자신을 저주해야 한다. 자신을… 그렇다면 자신의 그 무엇을?…
요란한 방송차의 메아리가 그의 생각을 흐트러뜨렸다. 사위를 두리번거리던 박치명은 자기가 어느 사이 채굴장가까이까지 걸어왔다는것을 알았다. 모름지기 렴진욱을 만나보고싶은 이상한 충동이 그를 이리로 이끌었는지 몰랐다. 불빛이 환한 채굴장에서 방송차소리는 더 또렷이 울리기 시작했다.
《…비겁한자들은》하고 누군가가 《적기가》의 비장한 음악속에 부르짖고있었다.
《압록강이 터져들어온다고 아우성쳤으나 우리 광부들은 끄떡없이 지켜섰습니다. 이 땅이야말로 우리의 사회주의를 지키고 빛내이는 내 조국의 전초보루이기에, 위대한 장군님께서 강성대국의 그날에 펼쳐보이시려는 아름다운 풍경을 바로 이 땅에 선참 꽃피울 신념을 지니였기에, 위대한 장군님을 기쁨속에 모실 환희의 래일을 확신했기에 동지들은 한몸 주저없이 내던져 채굴장을 구원했으며 30만산대발파의 도화선으로 온몸을 짓태우며 기적의 불꽃을 튕겨올리는것입니다!…》
박치명은 우뚝 굳어졌다. 너무도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비로소 그는 아찔한 채굴장벼랑우에 쭉 늘어서서 붉은기를 힘차게 휘두르는 녀인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휘황한 작업등의 불빛이 당비서며 기사장 등 광산일군들의 안해들을 알아볼수 있게 했다. 방송차의 마이크를 잡고있는것은 다름아닌 렴진욱의 안해 최금숙이였다.
《위대한 장군님을 모실 그날을 앞당겨 앞으로!―》
구호가 터지고 이어 힘찬 노래가 울렸다.
사나운 폭풍도 쳐몰아내고
신념을 안겨준 김정일동지
당신이 없으면 우리도 없고
당신이 없으면 조국도 없다
…
압축기며 착암기들이 맹렬히 울부짖고 굴착기들이 기세좋게 무쇠팔을 휘둘렀으며 광석수송차들 역시 경적드높이 채광계단을 줄달음쳤다. 하나의 치렬한 격전장을 방불케 했다. 아니, 아름다운 래일을 오늘에로 이끌어오는 환희의 무도장같았다.
박치명은 위압감에 숨이 막혔다. 위대한 장군님 안겨주신 사회주의의 신념을 지켜 광산을 일떠세워왔으며 사회주의 선군선경으로 활짝 꽃피워가는 저 거창한 숨결, 저 무궁한 힘!… 바로 그것이 아닐가. 자기에겐 바로 우리 조국의 미래, 강성대국의 그 래일을 투쟁으로 안아오는 저 광부들의 힘과 의지에 대한 믿음이 없은게 아닐가. 그래서 래일 그자체를 못 믿은게?… 박치명은 공포에 몸을 떨었다. 결국 자기는 우리의 사회주의가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있지 못한것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