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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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광실험실안팎은 아침부터 처녀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로 들썩했다. 실험공, 시약공처녀들이 여느때없이 일찍 출근하여 회칠을 한다, 먼지를 털어내고 물걸레질을 한다 하며 복새를 놓은것이였다. 새로운 실장의 영접준비였다. 거의 반년가까이 실장없이 일해온 그들이여서 호기심은 물론 기대가 각별했다.
《엊저녁 늦게 새 실장이 슬그머니 실험실에 들렸겠지.》 하고 솔질못지 않게 입을 열심히 놀린것은 윤희였다.
《그래 내가 대담하게 직판 들이댔지. 〈이전 실장처럼 우리 〈류코바질〉 못살게 굴잖겠지요?〉 〈건 왜?〉, 〈우리 처녀들에게 이죽거리지도 않겠지요?〉 〈건 왜?〉, 〈건달도 안부리구요?〉, 〈건 왜?〉, 〈우리 실험실 잘 내세워야 해요!〉, 〈건 왜?〉…》
《아니, 그것까지도 〈건 왜?〉》
또 까르르 웃음이 터졌다. 시약공 영순이는 회물소랭이를 엎지르며 대굴대굴 굴기까지 했다. 그러나 윤희는 시치미를 뚝 떼고 계속 보탰다.
《〈아니, 실험실 못 내세울바에야 왜 실장으로 왔어요?〉 그제서야 한다는 소리가 〈일 내세우자고 왔지〉…》
수금은 잠자코 미소를 머금은채 새 실장에 대한 제나름의 표상을 가져보려고 애썼다. 실험실경력도 좀 있고 기술과에서도 근무했으나 최근에는 광산의 중요직장인 동력직장장사업을 하고있어서 적임자이지만 인차 소환 못했었다는것을 그는 알고있었다. 가까이 지내본적은 없었다. 그러나 다분히 과장된것이 틀림없는 윤희의 몇마디를 통해서도 푸수하고 소탈한 사람이라는게 짐작되였다. 하지만 또 어이 알랴.
새 실장은 처녀들이 청소를 채 끝내지도 못했을 때 불쑥 나타났는데 50대의 진득한 사나이였다. 그는 눈부시게 회칠한 실험실건물을 쭉 둘러보고는 누구에게라없이 말했다.
《현장들에 나가보시오. 저녁에 실적총화로 통성합시다.》
그다음 직장사무실로 가버렸다.
《아이구, 건 왜?》 하고 누군가가 웃겨보려고 했으나 웃음은 별로 일지 않았다. 《실적총화로 통성》한다는 새로운 인사법에서 어떤 강한 요구성을 의식하고 긴장해졌던것이다. 확실히 이전 실장과는 시작부터 달랐다.
열시경에 3선광에 내려가있던 류병근이 헐썩거리며 《280계단》을 올라왔다.
《성료해조가 벌써 왔다누나.》
류병근이 한숨과 함께 토한 말이였다. 수금은 이미 그런 소문은 들었었지만 진짜 나타나리라고는 별로 믿지 않고있었던지라 가슴이 활랑거렸다.
채굴장에서 물구멍이 터진 일때문에 내려오는 료해조이므로 청주의 운명에 또 새로운 그늘이 드리우지 않을가 하는 우려가 심장을 압박한것이였다. 그런데 류병근이 나타난것은 그 일때문이 아니였다.
《3선광조업지표가 이상해졌다. 아무래도 수금이 네가 채굴장에 나가 광석시료를 다시 떠와야 하겠다.》
그것이야말로 수금이 바라던 부탁이였다. 그는 냉큼 일어났다.
《알겠어요. 제꺽 갔다오겠어요.》
수금이 늘 채굴장으로 오가는 길은 운반갱의 장거리벨트콘베아가 쭉 가로질러간 연두봉중턱밑의 지름길이였다. 둬해전까지만 해도 풀숲과 애솔이 우거진 아주 한적한 오솔길이였는데 최근에는 그 주변에도 많은 살림집들이 일떠서서 겨우 절반길만이 옛 풍치를 그대로 보존하고있었다.
연하땅의 그 유명한 이른봄철바람질이 멎은 계절이여서 날씨는 몹시 따스했다. 길섶에는 지난해의 묵은 풀대를 헤치고 기세좋게 돋는 새초와 함께 길짱구, 사라구들이 쌉싸래한 향기를 풍기고있었고 연두봉중턱의 가문비숲속에서는 산비둘기가 열심히 구구거렸다. 장난꾸러기아이들몇이 그 둥지를 털어보려고 바위코숭이에 위태롭게 매달리는것도 보였다.
그러나 수금은 별로 마음이 급하여 봄철다운 그 훈향이며 풍경에 주의가 가지 않았다. 오히려 절반으로 줄어든 그 지름길마저 그지없이 멀고 불편해보였다.
이마에 땀발이 쭉 내돋아서야 겨우 채굴장에 가닿은 수금은 열심히 사방을 곁눈질해보았다. 그러나 그가 찾는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유독 눈에 띄우는것은 무엇때문인지 천둥같이 화가 나서 굴착기운전공을 닥달하는 김지택부기사장의 모습이였다.
《…제동을 왜 제때에 못써? 바가진 왜 제대루 못 채우구? 차적재함 꼴이 어떻게 됐나 말이야?… 망할녀석, 청맹과니같은 꼴… 실태료해조나 네녀석이나 다 청맹과니들이야.》
최근에 들어와 아주 과묵해졌던 김지택이 저쯤 큰소리 치는것만 해도 하나의 기적인셈이였다. 굴착기운전공도 그것을 느꼈는지 벌쭉거리며 시까슬렀다.
《부기사장아바이, 료해조에 불려가 수태 욕을 잡수신 모양입니다?》
《이놈아!》 김지택은 더욱 기가 살아올라 꽥 고함쳤다.
《내가 그따위들한테 욕먹을 시러베아들같으냐?》
수금은 마음이 별스레 안정되는것을 느꼈다. 이전같았으면 김지택이야말로 성료해조가 요구하는 증언을 자진하여 해주었을, 청주의 방수벽채굴안을 결사반대하면서 소동을 피웠던 인물이였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그네들을 청맹과니라고 경멸하는 말이 거침없이 흘러나오고있지 않는가. 그래, 공연히 안달아했어!… 수금은 더이상 청주를 찾기를 단념하고 시료를 채취한채 돌아섰다. 그를 믿어야 했다. 이틀전 청주를 할아버지한테 데려갔을 때 할아버지는 대번에 탐사갱일거라는 실마리를 대주어 그를 기뻐 날뛰게 만들어주었었다. 그날 청주는 할아버지에게 허리부러지게 절을 한 다음 문지방을 나서며 속삭였었다.
《수금이, 고마워. 모든게… 다 고마워!》
그 순간의 그 환희와 감사의 정으로 이글거리던 눈빛, 그 눈빛이 너무 부시여 한줌으로 졸아드는듯 싶던 자기 심장의 짜릿한 헐떡임, 《모든》이란 뭘 념두에 두었을가. 자기가 모욕준 일도, 《빠져죽지 않게》 압록강까지 좇아가준 일도 지어 2.16경축공연시연회때 실수하게 만든 일도 다 포함될가?… 그날부터 머리속에서 가을잠자리떼처럼 줄곧 떠돌며 술래잡이를 하는 달콤한 생각이였다.
수금은 머리를 흔들었다. 차라리 청주를 만나지 못한것이 다행인지도 모른다. 만났다면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할아버지한테 데려다준 생색을 내자고 한다고 여길수도 있지 않겠는가.
《수금이!》
누군가 정겹게 불렀다. 제김에 와뜰 놀래여 돌아보니 뜻밖에도 어래와 삽을 든 은별언니였다. 그가 환한 미소속에 수금을 굽어보고있었다.
《아니… 여기서 뭘해요?》
《도로관리공이지.》
은별은 그것이 무척 자랑스러운듯 거침없이 대꾸하며 또 환하게 웃었다.
《지배인동지가 당분간 이 일을 하랬어, 이제 선광장이 커지면 그때 다시 실험실에 받겠다고.》
용서를 받았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것이 몹시 기쁘기도 하고 한편 미심쩍기도 했다. 수금의 그 감정변화를 포착한듯 은별이 정색하며 말을 이었다.
《난 널 고맙게 생각해. 그때 넌 사랑은 무겁다고 했지. 지배인동지도 그 비슷한 말씀을 해주었어. 광산을 위해 뻐근하도록 짐을 져라, 그것이 무겁게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그러면 진짜 광산을 사랑하는걸로 된다! 하고.》
《은별언니, 정말… 기뻐요!》
수금은 그의 손을 꼭 쥐였다. 이제는 그가 더이상 광산을 버리지 않을것이라는, 뼈를 아끼지 않고 광산을 꽃피울것이라는 믿음이 생긴것이였다.
은별언니와 헤여져 다시 걷기 시작한 수금의 마음속에 행복한 노래가락같은것이 울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좋은가. 모두들 나를 고맙게 여긴다. 은별언니도, 청주동무도!… 고마운 처녀로 산다는건 결코 쉽지 않아, 그때문에 눈물은 또 얼마나 흘렸는가, 그래서 결국 행복한 오늘을 맞은거야!
1차턱파장을 벗어난 산모퉁이길을 타박타박 걷던 수금은 갑자기 와뜰 얼어붙었다. 지금껏 마음속의 한 선률로 기껍게 울리던 청주가 산모습이 되여 마주오고있었던것이다. 고개를 짓수굿한채 휘청거리는 그의 걸음이 이상했다. 술에 취한 사람, 더 정확히는 열병에 걸려 허덕이는 사람같았다.
반갑기보다 두려움에 온몸이 졸아들었다. 외통길이라 어디 피할데도 없었고 되돌아서서 도망치기에도 늦었다. 아니, 도망은 왜 친단말인가. 청주자체가 그를 보려고도 하지 않고있었다. 그러면서도 부득부득 코앞으로 다가왔다.
수금은 아프게 입술을 깨물고섰다가 오연히 고개를 쳐들고 그의 곁을 씽 지나쳤다. 길이 좁아 그의 어깨가 청주의 한팔을 건드렸다.
《누구야?》하면서 돌아보겠지. 그리고는 날 알아보고 소리칠거야.
《수금이, 왜 못본체 해? 아직도 내가 싫어?》
잔등이 짜릿짜릿했다. 이제 한걸음만, 한걸음만 더 내짚으면!… 그런데 이상했다. 소리칠 시간이 두번, 세번쯤은 지났는데도 등뒤에서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둘사이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져갔다. 잔뜩 도사려졌던 수금의 마음속에 실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며 두다리가 매시시해났다. 그다음은… 분한 생각에 약이 바짝 올랐다.
돌아보지 않을테야, 결단코!… 수금은 노여움에 사무쳐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그의 고개는 의지를 거슬러 피끗 뒤로 돌려졌다.
청주는 여전히 고개를 짓수굿한채 휘청휘청 걸어가고있었다. 풀대에 발이 걸려 넘어질듯 하다가는 또 자세를 바로잡군 했는데 그것도 순간뿐이였다. 또 발이 걸려 휘청거렸던것이다.
이번에도 수금은 입술을 아프게 깨물고섰다가 홱 돌따서 청주를 따라잡은 다음 그앞을 딱 막아섰다. 청주는 수금을 골받이하다싶이 했을 때에야 비로소 고개를 쳐들었는데 그의 두눈은 흐리멍텅했다. 수금은 약이 바짝 올랐다.
《대낮에 술마시고… 아직도 정배군흉내를 내고있어요?》
수금의 맵짠 말마디가 청주를 정신들게 한 모양이였다. 흐릿하던 그의 눈이 이상하게 번뜩였다.
《그래.》하고 청주가 이새로 내뱉듯 말했다.
《난 알았어. 그들은 방수벽을 깎은걸 여전히 해독행위로 인식하고있어. 그리군 그 책임을 지배인동지에게 들씌우려고 해!》
《?…》
완전한 동문서답이였다. 청주의 입에서는 술냄새가 전혀 풍기지 않았다. 그가 어딘가를 노려보며 여전히 매섭게 내뱉았다.
《뭐 물구멍이 방수벽채굴의 위험성을 예고해준셈이라구? 완전히 손을 떼라?… 흥!》
그때에야 수금은 사태의 륜곽이 비슷이 잡혀졌다. 좀전 채굴장에서도 김지택은 기가 올라 실태료해조를 청맹과니들이라고 모욕적으로 불렀었다. 청주의 꼬리대가리없는 소리도 이제는 하나로 쭉 꿰여졌다.
아닐세라 청주는 방금 박치명부국장과 담화하고 나오는 길이라는것을 대중없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박치명은 그때 압록강방수벽채굴이 진정으로 안전하다고 믿고 설계했는가, 아니면 당장 생산성과를 올려 제 낯내기를 하려는 지배인의 요구때문에 억지로 했는가 하고 따졌다고한다.
《그렇겐 안될걸. 내 이제 꼭 증명해보이지 않나 두고봐!》
청주가 사납게 부르짖었다. 무엇인가 류다른것을 결심한듯 한 단호한 눈빛이였다. 수금은 불현듯 심장이 옥죄여들었다. 지배인의 불도젤앞을 막아섰던 언젠가의 모습을 방불케 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청주의 옷자락을 부여잡으며 애원했다.
《말해줘요. 뭘 어떻게 증명해보인다는거예요? 제발 말해줘요!》
청주가 멍하니 수금을 쳐다보았다. 어딘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노려보듯 희번뜩거리던 눈동자가 비로소 수금이라는 산 존재를 포착한듯 한 사뭇 놀랍고 어리둥절한 표정이였다.
《뭘…뭘 물었어?》
《무언가 증명해보이겠다고 하잖았나요. 그게 뭐예요? 난 동무가… 또 무슨 과오를 범할가봐 겁나요.… 정말 겁나요!》
청주가 불시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는 불이 이는듯 한 눈으로 수금을 쏘아보았다. 목에서 울대가 경련했다. 다음순간 그가 발작적으로 수금의 두손을 틀어잡았다.
《수금이!》 짓눌린듯 한 이상해진 목소리로 그가 확 단김을 뿜었다.
《난… 난 수금일 사랑해! 수금이도… 그렇지, 응?》
수금은 온몸이 산산이 흐트러지는것 같았다. 별찌처럼 타서 한줌의 재로 되는것 같았다. 눈앞이 빙그르 돌았다.
《수금이도 그렇지?》… 정말 그럴가? 그래그래,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한없이 그리워했고 두려워했고… 그래서 한사코 미워해보려했고 도망치려고도 했어. 이게… 그 감정이 아닐가?
불시에 청주의 손이 슬며시 풀렸다. 불이 이는듯 한 눈도 빛이 사그라져갔다. 그가 고개를 힘껏 흔들었다.
《아니, 아니야. 난… 수금일 사랑해선 안돼. 안돼.》
수금은 그만 목이 콱 말라들었다.
《무엇때문에요?… 무엇때문에요?》
이 순간 수금은 자기가 처녀로서는 가장 부끄러운 물음을 던지고있다는것을 알지 못했다. 알고싶지도 않았다. 다만 그 질문에 대한 대답 하나를 타는듯이 바랄뿐이였다.
청주는 두눈을 꽉 감고있었다. 동요의 빛이 그의 볼편을 실룩거리게 만들었다.
《말해줘요. 무엇때문인지… 말해줘요!》
수금이 재차 그의 옷자락을 비틀었다. 그러자 청주는 끝내 뜨거운 입김으로 수금의 얼굴을 지졌다.
《만약 내가… 또 무슨 일을 쳐도… 그래도 수금인 날 믿을수 있어? 내가 나쁜놈이 아니라는걸… 지배인동지나 광산을 위해서 진심으로 뭔가하려고 했다는걸… 믿을수 있어, 응?》
《믿어요. 믿지 않구요. 믿어요!》
《수금이!》
청주가 와락 수금의 두어깨를 붙잡았다. 뼈가 부서지는것 같았다. 눈물이 왈칵 솟구쳐올랐다. 아아, 이게 내가 여태 바라고 기다려온 순간이 아닐가?…
구구구… 연두봉중턱에서 우는 산비둘기소리를 의식한것은 한참후였다. 넋마저도 혼미해지는듯 한 무아경속으로 흘러들어온 그 소리에 수금은 별안간 몸이 오싹해났다.
《무슨 일을 쳐도》!… 이인 좀전에 그렇게 말했어. 그게 뭘가? 여태 나를 사랑하면서도 차마 입밖에 꺼낼 엄두도 못 내고있던 이이가 왜 갑자기 대담해졌을가? 무엇을 결심했기에?… 불안으로 하여 수금은 새처럼 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그러나 그것을 맞대놓고 묻기엔 수금의 심장이 너무 여렸고 청주의 억센 포옹을 순간이나마 잃을가봐 그것 또한 너무 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