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5

 

전주석은 렴진욱의 외국출장보고를 주의깊이 듣고있다가 박치명부국장이 합영을 고집하던 대목에 이르자 오만상을 해가지고 불만스레 코그루를 킁킁 울렸다.

《속담에 가까운 무당보다 먼데 무당이 령하다는 말이 있지. 그 사람이 그런 미련을 품고있댔군. 어리석기란!》

그의 이야기가 갑자기 비약했다.

《우리 광산의 첫 당비서 아들이 부상을 입고 제대되여왔습니다.》

《아니, 군관을 하던 그 허운성이가요?》

렴진욱이 저으기 놀라 반문했다. 허태흥당비서를 잊지 못하고있는 그였다. 무서운 완력가였으나 속은 웅숭깊어 사람들을, 특히 청년들의 장래를 세심히 지켜주고 받들어주었던 당일군, 하여 렴진욱은 이미 작고한 그를 대신하여 그 아들에게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온터였다.

《예, 훈련도중 기울어지는 포를 떠받쳐 대원들을 구원하고 그렇게 되였다는데 그 불편한 몸으로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광산을 꽃피우겠다고 좋은 배치지도 마다했다오. 우리 장군님께서 광산에 돌려주신 은정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나봅니다.》

전주석은 그때의 감격을 되새기는듯 두툼한 입술을 꾹 다물고 잠시 침묵하더니 혼자소리처럼 다시 뇌였다.

《정말 좋은 젊은이들이 우리 광산을 떠메고있거던. 그들은 부흥할 광산의 래일을 굳게 믿고있지. 또 제 손으로 그 래일을 안아오지 않으면 누가 대신해주지도 않는다는걸 자각하고있기도 하고… 헌데 박치명부국장에겐 그게 없는것 같아. 그러니까 딴 나라에 헛눈팔며 구걸하러 들지.》

전주석이 허운성의 이야기를 느닷없이 꺼낸 리유가 이제는 리해되였다. 렴진욱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자기 손에 그 밝은 래일이 달려있다는 자각, 그것이야말로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이끄시는 우리 식 사회주의의 승리를 확신하는 신념에 뿌리를 둔 마음인것이다. 그런데 박치명은?… 과연 그런 인간이였는가?

불쑥 전주석이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는 통에 렴진욱은 생각에서 헤여났다.

《돌아오는 길에 연남령을 봤을텐데… 측량공들을 파견해야 하지 않을가요?》

《?…》

《길폭이 아직 좁고 고르지도 못한데다가 너무 오불꼬불하단 말입니다. 다리들 꼴은 더 한심하고… 내 언제부터 별렀는데 그걸 다 펴야겠소. 나무다린 콩크리트로 바꾸는게 어떻습니까?》

《살림집건설에 총집중해야겠는데…》

《해야 합니다. 집도 짓고 설비현대화도 하고 다 해야 합니다. 장군님께서 시간이 허락하면 우리 광산에 들려보고싶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 험한 길에 모시겠습니까?》

렴진욱은 타는듯 한 눈으로 전주석을 뚫어지게 마주보았다. 어버이장군님을 광산에 모시고싶은 소원으로 말하면 당비서에게 짝지지 않으리라 여겼던 자기였다. 하지만 얼마나 차이가 심한것인가. 부끄러움에 낯이 화끈 달아올랐다. 기본에 기본을 놓치고있은것이였다.

《왜 제때에 절 후려치지 못했습니까?》 렴진욱은 짐짓 노엽게 부르짖었다. 《저도 언제부터 그 도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런 각도에서는… 정말 좋은 발기입니다!》

전주석은 기뻐서 아예 책상을 쾅 울렸다.

《그럴줄 알았습니다. 지배인동무가 생산도 두배로 올릴래, 집도 짓고 설비현대화도 실현할래 뻐근하겠지만 이렇게 나설줄 알았다니까. 얼마나 좋소. 우리 장군님께 기쁨드리는 일이라는걸 알면 광부들은 기적을 창조할겁니다!》

그다음 전주석은 능청스레 눈귀를 쪼프려보였다.

《헌데말입니다. 우리가 지금껏 녀성들을 너무 깔본게 아닙니까?》

《?…》

《놀라는걸 보니 지배인동무도 좀 찔리는데가 있는것 같구만요. 실은 가두녀성들이 언제부터 자기들에게도 큼직한 일감을 맡겨달라고 보채던데 어떻습니까. 그들로 미장부대를 하나 조직해보는게?》

《허!―》

렴진욱은 절로 감탄이 튀여나왔다. 이것이야말로 하나의 강력한 예비부대를 확보할수 있는 방도인것이였다. 이번엔 그가 흥분하여 탁상을 탁 쳤다.

《멋집니다. 우리 장군님을 모시는 일에 녀성들이 더 극성일겁니다. 난 절대찬성입니다!》

그들은 이마를 맞대고 《다 하자》는 그 문제들의 구체적인 일정을 하나하나 짜나갔다. 역시 선행시켜야 할것이 그 모든 건설과 현대화를 실현할 자금확보였는데 그것은 오직 가열부선법과 류병근의 저농도부선법이 성공해야만 가능했다. 그것도 최단시일안에 성공시켜야 했다. 렴진욱은 그것을 믿었다.

문제는 멀지 않아 오게 될 봄철에 할 일이 너무 많이 겹쳐지는것이였다. 소리없이 오는것이 봄이라지만 이곳 북방의 봄은 불시에 와와 소리치며 달려든다. 얼음장이 우당탕거리며 꺼져내리고 골개울이 사품쳐 넘쳐나며 나무의 싹눈들도 껍질을 탕탕 퉁겨치우며 돋는데 그중 무서운것은 바람이였다. 렴진욱이 첫 개발돌격대장으로 연하땅에 왔을 때 화령광산지구처럼 생각하고 산업건물이며 후생시설들을 건설했다가 중학교교사를 비롯한 세동의 건물지붕이 통채로 날아나버린적도 있었다. 그런 일기조건속에서 살림집건설을 시작하고 도로건설도 벌려야 하며 생산능력확장을 위한 채굴장넓히기와 선광계통증설도 동시에 다그쳐야 했다. 봄을 놓치면 그 한해를 다 잃는것과 다름없는것이다!…

한시간후에 렴진욱은 전주석과 헤여져 청사밖으로 나왔다. 방수벽을 다시 본 다음 정식 성에 보고할셈이였다. 그런데 정문을 막 벗어나는 순간 코날이 유별하게 날카로운 젊은 광부가 그의 앞을 떡 가로막았다.

《채광갱 굴착기중대장 주경철, 만날수 있습니까?》

발뒤축을 딱 모으고 구령치듯 하는 품이 제대군인이였다. 렴진욱은 곧 알아보았다. 정력과 기능, 탐구욕에 통솔력까지 겸비하여 입직 석달만에 제꺽 중대장으로 제발된 좀 괴짜친구였다.

렴진욱이 눈을 찌긋하자 주경철은 다시 차렷자세를 취해보였다.

《전 지배인동지를 비판하자고 기다렸습니다.》

그것까지는 광부식의 꺼리낌없는 롱으로 보였다. 주경철당자도 그때까지 벙글거렸다. 그러나 일단 입이 열려지자 청년의 얼굴은 싸움을 걸듯 사나와졌다.

《지배인동진 우리 광부들을 뭘로 봅니까? 정옥선생한테 무조건 광부에게만 시집가야 한다고 내려먹였다면서요? 정옥선생은 한 영예군인을 사랑하고싶어합니다. 알겠습니까?》

지금까지 렴진욱을 맞대놓고 이런 《도발》을 걸어온 사람은 광산적으로 김청주뿐이였었다. 무엇보다 《사랑하고싶어한다》는 표현이 아주 기괴하게 들렸다. 무슨 물건을 가지고싶어할수는 있다. 그러나 사랑은 그것이 욕망으로 표현된다면 그 충족후에는 오히려 꺼져버리기 쉽다. 아무런 바람도 없이 자기를 송두리채 주고만싶은 헌신의 감정일 때 진실로 사랑이라 부를수 있는 법이다.

《사랑하고싶어합니다!》하고 주경철이 렴진욱의 속생각을 반박하듯 고집스럽게 되뇌였다. 《그런데 아버지의 강요때문에 정옥선생은 망설이고있습니다. 광산을 떠나면 광부들을 배반하는것으로 된다는 주장인데… 그래 우리 광부들이 그런 훌륭한 소행도 가려 못 보고 리해 못하는 막스러운 놈들같습니까? 우릴 모욕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주경철은 나타날 때처럼 훌쩍 가버렸다. 수치감이 렴진욱의 얼굴을 태웠다. 딸을 미끼로 어떤 인기주의를 했다는 무자비한 폭로였다. 머리가 온통 혼란되여버렸다. 진심으로 광부들을 위해 취한 조치가 어떻게 모욕으로 받아들여졌는가? 사랑하고싶어한다는 딸의 리해할수 없는 감정은?… 그는 도무지 그 두 개념을 한고리로 련결시켜낼수 없었다. 간밤 채굴장에서 만났던 딸의 꾸밈없이 명랑하던 모습이 되새겨졌다. 차라리 고민하는 모습이였다면 뭔가 리해할수 있을듯 했으나 그것도 아니였다. 더더욱 괴로운것은 딸이 친아버지에게는 굳이 비밀에 붙여온 사연을 광부들에게는 다 털어놓았다는 점이였다. 《좋은 사람들이 많아요.》하고 딸은 간밤 말했었다. 결국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 못된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누군지 자기를 부른다는것을 의식한것은 한참후였다. 돌아보니 옥수금이였다.

《병근아바이가 이걸 전해주라고 해서 왔어요.》

처녀가 내민것은 간밤에 진행한 시약변경실험결과와 새로운 실험계획 그리고 렴진욱이 그려준 가열부선법계통설계초안이였다. 벼락같은 솜씨였다. 그만큼 가열법이 류병근을 흥분시킨 모양이였다.

《알겠다. 가서 수고했다고 전해라. 내 곧 설계를 심의에 붙이겠다고.》

《그럼 전 돌아가겠습니다.》

《가만!》

렴진욱은 생각키우는것이 있어 깍듯이 인사하는 수금을 얼른 제지시켰다. 그러나 정문앞이여서 복잡한 사람들의 출입이 그를 방해했다.

《내 방으로 가자.》

2층의 지배인사무실에 들어선 렴진욱은 수금을 자리에 앉힌 다음 쌍겹진 두눈만이 뎅그란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특별히 잘생긴형이라고 할순 없지만 대신 무척 투명하여 심장까지도 다 들여다보일것 같은 순수함이 느껴지는 얼굴이였다.

스스로도 느닷없는 질문이 불쑥 튀여나왔다.

《너… 사랑하고싶어한적 있니?》

《어마!》

궁금해서 빤히 쳐다보던 처녀는 비명처럼 부르짖으며 얼굴을 활딱 붉혔다. 그러면서도 이 괴이한 질문이 무엇때문이였는지 짐작한듯 고개를 약간 기웃한채 살금살금 웃기 시작했다.

《왜 웃어?》

《재미나서요. 지배인동진… 정옥이때문에 그러시지요?》

《옳다!》

수금은 웃음을 거두고 호― 한숨을 내쉬였다.

《이젠 비밀도 아니지요. 정옥인 얼음구멍에 빠진 애를 구원하느라고 주먹으로 얼음을 까서 뼈가 다 부서진 한 군인동무에게 제 피를 수혈해준적이 있어요. 무척 감동돼서요. 그것으로 일이 끝날줄 알았는데 그 동무가 제대돼서 고맙다는 편지를 보내오자 갑자기… 그 피의 부름을 듣게 되였다잖아요. 그리워졌던거지요. 그게 무슨 감정인지 몰라 고민도 좀 했는데 갑자기 알아냈지요 뭐. 사랑하기 시작한거예요.》

그 말도 아주 괴이쩍은것이였다. 사랑을 텔레비죤스위치를 넣듯 《자, 시작!》할수도 있을런지… 어쨌든 딸의 비밀은 밝혀진셈이였다. 《아버진 다 몰라요.》하고 뛰쳐나갈 때와 간밤의 그 명랑함, 이제는 그것이 한줄로 선명하게 꿰여졌다.

《그러니까… 그 친구한테 시집가고싶어한다는거지?》

《사랑하고싶어한다》는 표현을 거의 기계적으로 옮기며 렴진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금은 난감한듯 눈을 내리깔았다.

《이건… 말씀드리지 말자던건데…》 처녀가 기여드는것 같은, 그러면서도 분명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곳에 있다 해도… 광산을 위해선 그 사랑을 포기해야 하나요?》

렴진욱은 흠칫했다. 수금은 자기가 딸에게 강요했던 《도리》운운에 의혹을 품고 물어보는것이였다. 그것은 좀전 주경철의 규탄과는 좀 다른 측면에서의 의혹이고 항의였다. 결국 광부들앞에 수범을 보여야 할 지배인으로서 달리 처신할수 없다고 여긴 문제가 모든 광부들에게까지 어떤 《준칙》처럼 받아들여져 혼란을 빚어낸것이였다. 의무감에 의한 행위는 결코 사랑일수 없다. 따라서 자기의 본을 따른다면 광부들은 사랑없는 결혼도 찬양받을 행위로 여기기 시작할것이다.

딸같은 처녀앞에서 궁색하여 렴진욱은 공연히 군기침을 깇었다.

《수금이가 오늘… 두번째로 내 뺨을 치누나!》

《아이, 제가 언제?…》

《허허, 사랑을 막는거야 야만행위지. 이젠 누구도 그런 강요를 못할게다, 이 지배인도.》

《고맙습니다, 지배인동지. 그럼 전…》

수금은 일어났다. 그러나 인사를 할 대신 무엇인가 망설이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기 시작했다. 렴진욱이 찌긋한 눈길속에 끌어넣어서야 처녀는 결심한듯 숨죽인 속삭임을 터뜨렸다.

《한번… 한번 청주동무를 찾아가봐주세요!》

수금은 회오리바람에 불린듯 사라졌다. 렴진욱은 어리둥절했다. 수천의 종업원을 거느린 지배인이 어떤 개인적용건으로 누군가를 찾아다닐 겨를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수금의 부탁은 앞서와 같은 사업의 어떤 빈틈에 대한 지적이고 충고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실지로 청주와의 관계에는 빈틈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처녀의 목소리에서는 그와는 전혀 다른 무엇인가에 대한 애끓는 하소가 울리지 않았던가?…

거기에 오래 머리 썩이고있을 때가 못되였다. 현장이 그를 기다리고있었다. 렴진욱은 벗어놓았던 모자를 꾹 눌러쓰고 문쪽으로 향했다. 그 순간 공교롭게도 문이 밖으로부터 열리며 딸 정옥이 소리없이 들어섰다.

《아버진 뭐예요?》

대뜸 딸이 안타까운 푸념을 터뜨렸다. 그의 손에는 보자기로 꽁꽁 싼 삼단밥통이 들려있었다. 비로소 렴진욱은 자기가 어제 저녁부터 지금껏 두끼를 꼬박 굶었다는것을 생각해냈다. 집에 들릴 짬을 못낸것이였다. 모름지기 딸은 온밤과 아침내껏 음식을 차려놓고 아버지를 기다렸을것이다.

《이러실줄 알았어요. 간단히라도 요기하세요. 군만두예요.》

《어머닌 왔니?》

보자기를 끄르던 딸의 손이 굳어졌다. 딸은 말없이 도리질을 했다. 렴진욱은 새삼스러운 노여움이 끓어올랐다.

《잘한다, 잘해.》 렴진욱은 부아가 치밀어 언성을 높였다. 《에미라는건 집을 버리고 어디 가서 한가하게 딩굴고 딸은 일을 버리고 대낮에 밥통이나 들고 돌아치고… 집안이 왜 이런 꼴이 됐냐, 응?》

《아버지!》

《듣기 싫다!》

이미 렴진욱은 자신을 걷잡을수 없었다. 도끼날처럼 날카로운 코마루를 가진 주경철의 맵짠 입도끼질이 새로운 부아를 돋구며 그의 뇌리를 들쑤셨다.

《너때문에 내 낯이 뭐가 됐는지 아느냐? 그런 사연을 왜 아버지한텐 말 못해? 광부들이 뭐랬는지 알아? 이 지배인이 자기들을 아무것도 리해할줄 모르는 막스러운 사람들로 본다는거야.》

딸의 억실억실한 두눈에 핑 눈물이 고여올랐다. 그가 아버지쪽을 원망스레 쳐다보며 흐느낌을 터뜨렸다.

《아버진 너무해요!… 모질어요!》

《?!…》

《아버진 많은 일을 하셨어요.》 어깨를 들먹이며 딸이 부르짖었다.

《온 광산이 아버지를 존경해요. 그러나 난… 아버지가 싫어요. 자식들의 운명보다 지배인의 권위나 체면을 더 중히 여기시는 아버지… 싫어요!》

딸은 몸부림쳤다. 렴진욱은 단단한 몽둥이로 한대 후려맞은 기분이였다. 지령전화가 소란스럽게 떠들며 끼여들었다.

《수송직장!… 수송직장!… 왜 차가 넉대만 뛰는가? 이젠 일하기 싫증났는가?…》

사방에서 싫증나한다. 딸은 아버지가 싫증나고 수송직장은 광석운반에 싫증나고… 광부들 역시 싫증나 항의하고 규탄했었다.

딸은 의외에도 먼저 리성을 되찾은듯 했다. 정옥은 처녀답게 눈물을 꼼꼼히 훔치고나서 표연히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한가해서 나돌아다닌다고 욕하셨는데… 아버진 어머니가 20여년동안이나 산후탈로 고생하시는걸 알고계셔요? 일밖에 모르셨지 그런건 알려고도 하지 않으셨지요?… 어머닌 아버지일에 지장이 될가봐 지금껏 그걸 감추고있다가 아버지가 외국에 가신 기회에 제꺽 수술해치우자고 병원에 간거예요.》

《뭐, 수술?…》

렴진욱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물론 안해가 산후탈로 고생하는줄은 짐작했었지만 수술할 지경에까지 이르다니. 지난 가을 얼굴이 부석부석한걸 본 기억이 새삼스레 되새겨졌다. 그러면서도 안해는 그때 처음으로 되는 충고를 했었다. 《사람들이 다 현순이같지는 않다는거예요.》… 현순의 최후모습으로만 모든 사람들을 재단해보는데 습관된 자기, 그런데 안해는 자기의 말대로 드러내놓지 않고 일생 자신을 바치는 녀성으로 살아온셈이 아닌가.

《너 왜 그걸… 그걸…》

렴진욱은 울컥하고 치받는 노기를 내뱉다가 흠칠 입을 다물었다.

어찌 딸이 그 사연을 귀띔해줄수 있었으랴. 일생 일을, 《지배인의 권위와 체면》만을 중히 여기고 가정사엔 완전히 무관심해온 자기에게?…

일이야말로 렴진욱의 생존리유 그자체였다. 일을 떠난 순간은 그에게 죽음과 같았다. 지배인이 된 다음 더욱 그랬다. 그런데 그 일이야말로 안해와 딸이, 광부들모두가 떠이고있는 운명이였고 그들자신이였다. 하거니 그들을 떠난 일이 과연 일일수 있겠는가?

옥준보로인의 준절한 말이 새로운 의미로 고막을 두드렸다. 《사람의 가슴은 한치여도 심장은 천길깊이에서 뛰는 법이네!》… 바로 자기는 그런 심장들을 여태 깊이 파헤쳐보려고 시도하지 않은것이였다. 무엇보다 청주에게 더 그랬다. 수금의 부탁에 어떤 개인적인 감정색채가 섞여있는것만은 틀림없지만 어쨌든 따져보면 이미전에 잘 도와 과오를 범하지 않게 해주지 못한 자기에 대한 타매, 충고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러니 안해며 딸 정옥이같은 혈육들한테서까지 지탄을 받는것이 아니겠는가.

무서운 일이였다. 결국 자기는 수천의 광부들을 지휘통솔하는 지배인이였으되 그들의 친구는 아니였고 한 집안의 가장이였으되 아버지는 못되였던것이다.

렴진욱은 입귀를 비틀며 침통하게 중얼거렸다.

《그걸 감추다니… 너의 어머니도 무서운 녀자지만 이 아버진 더 무서운 인간이였구나. 이제 면회를 가면… 어머니가 날 받아줄가?》

《가세요, 가세요!》

또다시 눈물이 함빡 고인 딸이 속삭였다. 그 모습에 렴진욱은 가슴이 뭉클해났다. 한마디 말로 표시한 정에도 인간은 이처럼 감동하는것이다.

《그래. 가야지… 가야지. 그리고 너도 이젠 시집을 가거라. 마음놓고 광산을 떠나도 된다.》

《예?…》

딸은 어째선지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렴진욱은 빙그레 웃었다.

《광부들의 뜻이 아니냐. 그들은 훌륭한 사람들이다.》

《아버지!》

별안간 정옥이 왈칵 렴진욱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어깨가 발작적으로 경련을 일으켰다.

《늦었어요, 아버지… 늦었어요!》

《?…》

《그 동문 싫대요. 절 사랑하지 않는대요. 그래요, 늦었어요!》

딸은 오열했다. 렴진욱은 그에게 몸을 맡긴채 어리둥절하여 굳어졌다.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수금의 말에 의하면 그 영예군인쪽에서 먼저 편지가 왔다고 하지 않았는가.

《너 혹시… 그 영예군인이 널 고생시키지 않으려고 사양한걸 잘못 리해한건 아니냐?》

《안예요, 안예요.》 딸이 여전히 흐느끼며 목멘 부르짖음을 터뜨렸다. 《제가 나쁜 녀자였어요. 영예군인이라고 망설인건 아니지만… 어쨌든 오래동안 회답하지 않았으니 그 동무가 절 어떻게… 어떻게 믿을수 있었겠어요. 의심을 줬던거예요. 그러니… 이젠 다 늦었어요. 아버지가 옳았어요. 광부들속에 들어가 배우라던 말씀… 그렇게 전 나쁜녀자였어요.》

비로소 모든것이 석연해지는듯 했다. 수금의 설명대로라면 그 《피의 부름》이 사랑이라는것을 깨닫는 기간이 오래진통에 영예군인은 불편한 자기 몸을 두고 동요했다고 판단해버린것이였다. 그런 동요가 앞으로도 생기지 않는다고 누군들 수월히 믿겠는가.

딸이 박치명의 혼사요청을 거절했을 때, 뭔가 고민하고있다는것을 깨달았을 때 덮어놓고 채광에 쫓아버리지 않고 아버지답게 대해주었더라면 이 모든 사연을 알아냈을것을, 그리하여 《다 늦었다》는 후회가 없이 깨끗하게 행복을 가꾸어줄수 있었을것을!

《그래… 이젠 어떻게 할셈이냐?》

렴진욱은 전혀 다른 말을 하려고 했으나 저도 모르게 이런 질문이 튀여나왔다. 딸은 초연히 눈을 들었다.

《아버지, 전 광산을 사랑해요. 채광구급원을 하면서부터야 제가 광산을 결코 뜰수 없다는걸 깨달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모든게 잘 될거예요.》

딸은 보매 이런 생각을 마음속에서 곱씹어가며 굴려본것 같았다. 그것이 렴진욱에게는 무척 기특했으나 또한 무척 아프기도 했다. 광산을 사랑한다는것과 일생을 같이할 련인선택은 어쨌든 별개의 문제인것이다.

《그건 물론 좋은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령전화가 그의 말을 방해했다.

《지령장동지, 이젠 만족합니까? 우리 운전사들이 건달을 부린건 아닙니다. 그들은 눈판이 미끄러워 바퀴사슬을 차느라 잠시 지체했던거란 말입니다.…》

렴진욱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힘껏 문질렀다. 준비가 잘되였으니 자동차들은 탈선없이 먼길을 가낼것이다. 딸도 그만하면 정신적준비가 잘된셈이다. 그러나 그의 첫사랑이라는 세계에 또렷이 찍힌 옛 국경경비대사관의 모습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것이니 아버지로서 도울 일은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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