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3

 

그 시각 렴진욱은 광부들이 《280계단》이라고 애정담아 부르는 선광장의 급경사계단을 터벅터벅 내리고있었다. 광산마을을 빤히 굽어보며 솟은 해발 700메터의 꽤 웅장한 연두봉허리를 깎아 선광장을 세울 때 도로를 미처 못 닦아 렴진욱네 개발돌격대는 거대한 마광기며 파쇄기들을 쇠바줄에 걸어 끌어올렸었다. 땀에 절고 지쳐내리는 신발에 다스려진 그 경사받이에 기념으로 만든것이 바로 콩크리트대돌로 정교하게 올려쌓은 이 《280계단》이였다. 경사가 무려 60도에 달하는 벼랑같은 길이고 또 멋진 도로가 닦아져 구태여 이곳으로 오르내릴 필요가 없어졌음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옛 추억을 소중히 여겨 매일 한번씩은 밟아보는것이였다. 무슨 급한 일이 있으면 지름길삼아 다니기도 했다. 렴진욱 역시 오랜 세월 이 길에 익숙되여 차를 타지 않을 때에는 절로 발길이 여기로 옮겨지군 했고 일단 발을 붙이면 숨 한번 돌리지 않고 훌훌 날아오를수 있었다.

그런데 이밤만은 달랐다. 복잡한 생각에 파묻히다보니 자주 발을 헛짚었고 그만큼 숨도 차군 했다. 좀전에 돌아본 2선광에서는 낡은 전동기가 마광기를 힘겹게 돌리다가 부하끝에 귀한 배전반과 함께 타버려 두대의 마광기밖에 움직이지 못하고있었다. 결국 고심끝에 용착으로 대치차이발을 재생시켜 석대로 늘쿠었던 마광기가동이 제자리로 되돌아간것이였다.

그것을 보느라니 박치명부국장의 장담에 불쑥 의혹이 들었다. 삭도페기가 쉽게 결론받을 일은 아니겠지만 벌써 두달째 그에게서는 좀더 기다리라는 아리숭한 소리뿐 귀가 열리는 대답이 없었다. 전동기며 배전반의 예비는 오직 삭도를 페기해야만 조성될수 있는데 과연 박치명부국장은 이런 사정을 리해하려고 하기는 하는가?

부선공정은 또 그것대로 렴진욱의 신경을 자극했다. 저품위원광때문에 실수률은 말이 아니였고 정광품위도 제련소가 먹지 못할 계선으로 급격히 곤두박질하고있었다. 부선장에 떠도는 시약냄새를 맡아본 렴진욱은 눈꼬리가 사납게 치째져올라갔다. 정광품위를 다문 얼마간이라도 높여보려고 김현길실장에게 시약체제개선방향을 구체적으로 대준것이 보름전이였는데 아직도 종래대로 주입하고있다는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맞혔던것이다. 교반장의 시약공들에게 확인해보니 틀림없었다.

물론 시약체제를 한번 뜯어고친다는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였다. 여러 종류의 각이한 기능을 가진 시약들이 엄밀히 검토된 배합비률속에서 규소를 누르고 정광을 띄워올리는 미묘한 작용을 하므로 그 비률의 미세한 변화에도 예민하게 반응하여 실수률이고 품위고 다 헝클어뜨리기 쉬웠다. 그래서 웬간한 사람은 감히 거기에 손을 댈 엄두도 못낸다. 하지만 김현길에게는 자기가 후과를 책임지기로 하고 시약체제변화를 지시하지 않았는가?

마침 선광실험실에 불이 환히 켜져있는것이 눈에 띠였다. 그래도 배포유하게 잠을 자고있은건 아니였단 말이지!…

믿지 않을수 없는 김현길이였다. 그에 대한 리정우의 반감이 늘 속에 맺혀있던 렴진욱은 보름전에 시약체제변경지시를 주기에 앞서 진지한 담화를 나누었었다. 요점은 김현길의 취미가 무엇인가 하는것이였다. 한 인간을 파악하는데는 그가 평소에 무엇을 제일 즐기는가 하는것만 알아보면 된다.

《뭐랄가요…》 그때 김현길은 좀 당황한듯 한동안 갑자르더니 어색하게 웃었었다. 《저… 콤퓨터에 재미를 붙이고있다면 그것도 취미라고 부를수 있겠는지…》

《그게 정말이요?》

렴진욱은 무등 놀랐다. 그가 콤퓨터를 가지고있다는것이 여간 신기하지 않았던것이다. 당시로서는 콤퓨터가 좀 희귀한 물건이여서 광산에도 기술과만이 가지고있는 형편이였다. 그만큼 김현길의 현대과학에 대한 민감성과 학구열을 리해할수 있는 명백한 증거라고 하지 않을수 없었다.

지배인의 탄성같은 부르짖음을 어떤 의혹처럼 해석했는지 김현길은 둥실한 얼굴이 불그레해져서 황황히 변명했다.

《뭐 제 힘으로야 어디 구입해낼수 있습니까. 평양에 있는 친척이 저의 소망을 기특하게 여겼는지 한대 내려보내주길래…》

《아니, 대단하오. 정보화시대인 21세기가 코앞인데 응당 실장인 동무가 앞장에 서야지. 이거 내가 동무한테서 실습을 받아야 할가보오.》

《아, 아, 전 아직 유치원생입니다. 차라리 청주를 선생으로 택하십시오. 전문가이상이더군요. 어찌나 내 콤퓨터에 눈독을 들이고 빼앗지 못해 안달아하던지…》

렴진욱은 고개가 끄덕여졌다. 청주라면 능히 그럴수 있을것이다. 벌려놓은 일판에 다쫓기워 그를 한번 만나려던 계획을 실행 못한것이 가책되였다. 어쨌든 리정우가 배척하는 김현길에게 이런 진취성이 있다는것만 해도 숨이 나갈만치 반가운 일이였다. 하여 그는 기쁜 마음으로 선뜻 시약체제변경지시를 줄수 있었다.…

그런데 렴진욱을 맞아준것은 김현길이 아니라 난데없는 리정우기술부기사장이였다. 리정우는 《실험대장》이며 《농세도일지》, 《기술지표종합대장》 등을 쭉 펼쳐놓고 거기에 깨알같이 적혀있는 수자들을 골똘히 들여다보고있었다. 보매 그 역시 실수률과 품위의 급격한 저하에 충격을 받고 새로운 방도를 찾을 결심을 한듯 했다. 그 모습이 렴진욱을 고맙게 했다.

리정우는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고나서 쓴웃음을 입가에 그렸다.

《현길실장이 잔뜩 겁을 먹고 시약체제에 손을 못 댔군요. 겨우 한 시약의 량을 약간 늘여보고는 제김에 놀라 본래로 돌아가고말았지요.》

대체로 알고있는 사실이여서 더 대척할 마음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김현길도 지금쯤 집의 콤퓨터앞에 앉아 새 배합비률을 탐구하고있지 않을가 하는 미련을 버리게 되지는 않았다.

《아직 과학적해답이 나오지 않아 모대기는건 아닐가?》

《그렇게 믿습니까? 단언컨대 그의 머리로는 안됩니다. 결정적인 대책이 필요합니다.》

리정우가 무엇을 념두에 두고있는지는 묻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그는 류병근을 빨리 인입해야 한다고 채근하고있는것이였다.

지금껏 류병근은 광산의 결정을 통지해주었음에도 회양골에 틀어박혀 얼씬하지 않고있었다. 아마 렴진욱과의 개인적인 충돌을 여직껏 삭여내지 못해서 앙버티고있을것이다.

류병근은 원래 도깨비기사로 유명했다. 노상 무엇인가 불만스러워 하고 엉뚱한 궁리를 해내서는 안정되여있는 부선조업체계를 뜯어고치군 했는데 그것이 때로 은을 내여 생산이 높아지기도 했지만 대체로 실수률파동과 사고로 끝나기 십상이였다. 한번은 한 교대전부의 생산을 완전히 망쳐먹어 크게 문제가 선적도 있었다.

당시 기사장이였던 렴진욱은 그의 끊임없는 창조적지향에 공감하고 적극 지지해주는 립장이였지만 행정적처벌을 주었다. 자기의 분별없는 욕망실현에 광산재정을 고려없이 복종시키려는 무책임성을 경고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런데 류병근은 매우 맹렬하게, 병적으로 그에 반발해나섰다. 생산활성을 위한 긍정적인 실험과정에 처벌을 대치시키면 누가 연구를 하겠는가, 과학이 오늘 돈 한푼을 들여 래일엔 열푼, 백푼을 보상하는 가치있는 사업이라는것도 리해 못하는 당신이야말로 편협하고 근시안적인 일군이다, 당장 처벌을 철회하라!

렴진욱이 몇번 따끔하게 충고했으나 류병근은 듣지 않았다. 오히려 당위원회에까지 문제를 끌고가 복잡하게 굴던끝에 나중에는 그런 매정한 일군과는 함께 일할수 없다면서 사표를 제출하고말았다.…

어쨌든 그가 필요한 존재라는것은 부인할수 없었다. 그렇지만…

《내 알기엔…》 렴진욱은 좀 망설여지는것이 있어 말을 더듬었다.

《현길실장이… 콤퓨터에 낯을 돌리고있는데 머리는 어떨런지 일하자는 사람으로는 봐야 하지 않을가?》

《그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뭐 콤퓨터오락에 미쳤다더군요.》

리정우가 비웃듯 내뱉았다. 그다음 지나친 야유라고 여겼는지 정색하여 계속했다.

《그 취미가 좋은 목표로 이어질수도 있겠지만… 그는 박치명부국장의 대학졸업론문과 류병근아바이가 세워놓은 부선조업체계사이를 왔다갔다할뿐 지금껏 무슨 새로운 시도를 해본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야 안정된 조업체계였으니까 뜯어고칠 필요가 별로 제기되지 않았을수도 있지.》

《머리쓸 위인이 아니니 그랬지요. 지독한 낚시군이니까요.》

《낚시군》!… 렴진욱은 어쩔수없이 미간이 찡그려졌다. 지배인부임 첫날 김현길이 잡아왔다는 잉어에 대한 께름한 기억이 되살아오른것이였다. 낚시질이란 년로보장자들이 하는 인생의 서글픈 위안거리라고 믿고있는 그였다. 물론 낚시질취미자체를 완전히 배제할만큼 몰상식한 축은 아니였다. 과연 김현길이 자기를 속였단 말인가?

렴진욱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섰다가 리정우앞에 걸상을 끄당겨놓고 마주앉았다.

《동문… 이제라도 고향에 보내주면 가겠소?》

저도 모르게 불쑥 튀여나온 말이였다. 리정우에게도 그것은 너무 왕청같고 돌발적인 질문인 모양이였다. 그는 한동안 멍하니 렴진욱을 건너다보더니 어떤 감정적인 색채가 섞인것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던지 마침내 벌씬 웃었다. 그로서는 보기드문 웃음이였다. 그로 하여 리정우는 한결 순진해보였다.

《뭐랄가요.… 한 처녀를 사랑했는데…》하고 그가 생각을 고르듯 뜨직이 입을 열었다. 《한 처녀를 사랑했는데 부모들이 덜컥 다른 녀자에게 장가보냈습니다. 그래서 살긴 사는데 옛사랑이 잊혀지더라구요?! 이제라도 이 녀자가 물러나주었으면, 그러면 애인한테 돌아갈수도 있으련만.… 그러는 사이 어느덧 안해한테 정들기 시작했습니다. 지내보니 그에게도 좋은 점이 많아 아주 귀중한 녀자로 여겨졌던겁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마음에 없는 녀자와 결혼했다가 나중에 진짜 사랑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허허…》

왜서인지 마음이 별안간 후련해져 렴진욱은 소리내여 웃었다. 연하땅을 《귀중한 안해》로 비유한 그 말이 몹시 마음에 든것이였다. 보매 리정우도 고향도시에 대한 그리움과 광산에서의 자기 생활을 두고 많은 고민과 비교를 거듭해온 모양이였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피치 못하게 결혼》한 광산을 이제는 안해처럼 사랑하게 되였다는 의식일것이다. 사실 리정우는 포차운전사였던 아주 환하게 잘 생긴 제대군인처녀를 안해로 맞았는데 그 활달하고 굳센 성품의 녀인이 그를 새로운 고향― 연하광산에 정들도록 하는데 한몫 했을지도 몰랐다.

렴진욱은 솔직한 리정우와 진심으로 흉금을 터놓을수 있다고 믿고 즉시 화제를 바꾸었다.

《청주에 대한 처벌이 아직도 옳지 않다고 보오?》

리정우는 즉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면서도 엷은 홍조가 얼굴에 번지는것으로 미루어 이전의 완고한 립장에 변화가 생긴 모양이였다.

《뭐 질책하자고 꺼낸 말은 아니요. 언제부터 청주를 한번 만나려고 했는데 기회를 얻지 못한게 속에 걸려 그러오. 이자 동무가 결정적대책소리를 했는데 선광보다는 채광의 저품위가 문제거던. 이걸 어떻게 타개하겠는가?…》

비로소 리정우는 눈을 들고 담담히 대꾸했다.

《제 몇번 청주를 만나긴 했는데 도무지 곁을 안 주더군요. 일부 일군들이 자기 아버지의 과오를 거들어 자기를 몹쓸 놈으로 여기는줄 다 안다는거지요. 확실히 그에겐 광부들에 대한 삐뚤어진 인식이 뿌리박혀있습니다. 그걸 조장시킨 사람도 있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지금 상태에선 그가 내놓은 방수벽채굴안이 그중 연구해볼 가치가 있는것입니다.》

《방수벽채굴안?…》

그것은 렴진욱이 지금껏 기다려온 대답이였다. 물론 새삼스러운것은 아니였다. 박토를 선행시킬 기대와 전기가 매우 긴장한 조건에서 방수벽쪽의 품위높은 광석을 캐여 저품위와 섞어먹는다면 선광의 시약체제변경 같은 까다로운 공정도 당장은 필요없이 생산이 쭉 올라갈것이다. 렴진욱자신도 그 방수벽에 얼마나 눈독을 들여왔으랴. 그러나 방수벽을 헌다는것은 수만립방의 압록강물을 채굴장에 쏟아넣어 광산자체를 페광시키는 운명적인 모험이였다. 아마 박치명부국장이 그런 채굴안을 들었다면 길길이 뛰며 당장 달려내려올것이다. 《방수벽은 단 1센치도 건드려서는 안되는 광산의 수호벽》이라는게 그가 말끝마다 강조하군 하는 표현이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그럼에도 저 수재형의 기술자인 청주가 굳이 그런 방안을 고집했다면 안전성을 담보하는 어떤 과학적론거를 걷어쥐였다는 소리가 아닐가?

《어쨌든 흥미있소. 청주의 안을 더 검토해보오. 확신이 생기면 내 성과 합의해서 실행하도록 하겠소.》

렴진욱은 어떤 큰 짐을 부리운듯 한 개운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가 별로 파리해보이는 리정우의 훌쭉한 얼굴이 눈에 걸려 언짢게 내뱉았다.

《동무에겐 나쁜 습관이 있더군. 뭐 아침밥을 아예 입에 대지 않고 출근하군 해서 안해를 울린다면서? 다 잘못 배운 술버릇탓이야. 뚝 떼라구. 일군의 행동 하나하나는 다 로동자들이 지켜보며 따라배운다는걸 명심해야지. 건강해야 큰일도 하는 법이고.》

그닥 밤이 깊은것도 아닌데 공기는 싸늘했다. 한여름에도 새벽이면 마광장안에서까지 솜옷을 걸쳐야 하는 북방특유의 변덕심한 날씨였다. 하물며 가을이 깊어가고있음에야.

가을!… 느닷없는 초조감이 또다시 뇌리를 파고들었다. 따져보면 아직도 무엇인가 신통히 해결된것은 없지 않는가. 마광기가 한대 멎었건만 그것을 해결할수 있는 삭도페기소식은 여전히 없다. 박치명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있는것인가? 이제 두달만 지나가면 새해가 시작된다. 이대로는 결코 맞을수 없고 맞아서도 안되는 그 순간인것이다!

《280계단》중간에 이르렀을 때에야 렴진욱은 환한 전지불빛이 흔들거리며 코앞까지 마주올라온것을 알아보았다. 거의 동시에 《깜짝이야!》하는 녀자의 가벼운 비명이 울렸다. 둥그런 전지불빛속에 렴진욱의 두다리가 들어온것이였다.

《아이, 지배인동지신걸!》

약간 코멘듯 한 목소리로 렴진욱은 그가 오래전에 퇴근했었을 옥수금이라는것을 알았다.

《허― 이밤에 무슨 일로?》

지배인의 은근한 물음에 옥수금은 좀 쑥스러운듯 혀아래소리를 내였다.

《저, 마광기가 한대 멎었길래… 시약공들이 깜빡 잊고 석대분 시약바가지를 그냥 돌릴 때가 있답니다.》

《그래서!…》

렴진욱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실험공인 옥수금이 그에 직접 책임있는것은 아니였다. 그럼에도 귀한 시약이 허비되고 또 실수률에 파동이 올가봐 이런 한밤에 숨가쁘게 달려나오고있다. 이상하게도 밤에만 신통히 만나게 되는 기특한 처녀, 류병근은 이와 얼마나 큰 대조를 이루는가.

이미 부선장에서 시약공들이 시약바가지를 조절해놓은것을 보았었지만 렴진욱은 처녀의 섬약한 어깨를 살뜰히 떠밀었다.

《어서 올라가봐라.》

불빛을 앞세우고 사슴처럼 날쌔게 멀어져가는 처녀를 이윽히 지켜보느라니 반사적으로 딸의 모습이 겹쳐들었다. 《아버진 다 몰라요.》하고 원망스레 부르짖던 딸, 그러면서도 지금껏 그 《모르는》것을 터놓으려고는 하지도 않고있다. 옥수금은 몹시 투명한 유리고뿌처럼 무엇이나 다 들여다보이는 명백한 처녀였다. 하지만 딸은 아버지앞에서도 뚜껑을 꼭 봉인한 토기단지같은 존재였다. 딸의 봉인된 그 가슴속에서 어떤 갈망과 정이 끓고있는지, 무엇이 그의 심장을 괴롭히는지 모르는것이 렴진욱은 고통스러웠다.

아버지로부터 멀어지는 자식… 불쑥 딸이 네댓살 잡혔을 때의 일이 상기되였다. 광산개발이 거의 끝나가던 어느날이였다. 선광장을 일떠세우는 긴장한 돌격전투를 마무리하고 오래만에 집에 들어서니 방안에서 오또기인형을 가지고 놀던 딸이 말똥말똥 올려다보고있었다.

《오, 우리 정옥이 그새 컸구나.》

렴진욱은 딸의 볼을 다독이며 안아올리려 했다. 순간 딸이 왕 울음을 터뜨리며 부엌으로 구을러 내려갔다.

《엄마, 누가 날 때려.… 막 때려!…》

아버지가 낯설어지도록 일에만 파묻혀지낸터여서 응당한 대접이기는 하지만 애무조차 《매》로 여기는 딸의 반응앞에는 자신을 질책해보지 않을수 없었다. 하지만… 그후에도 달라지게 되지 않았다.

그 딸이 커서 대학공부를 할 때에도 그의 학업성적을 알려주군 한것은 오히려 박치명이였다.

《여보게 진욱이, 정옥이가 최우등으로 4학년에 진급했네. 헌데 이번 방학도 집엔 안 가겠대. 대학도서관이 유혹한다지만 뭐 집에 가야 쓸쓸해 그러겠지. 아버지구실을 잘해야겠어.》

절로 한숨이 나왔다. 자식들에 대한 항시적인 관심과 념려의 결핍이 빚어놓은 결과였다. 그러나 깊은 가책뒤끝에도 다닥치는 일들을 뒤전에 밀어놓고 자식가진 아버지의 도리를 먼저 생각할 여유는 끝내 가져보지 못하고말았던것 같다. 그게 과연 옳은, 이른바 《혁명적》인 처사겠는가?…

렴진욱은 힘껏 머리를 흔들어 번거로운 생각을 털어버리고는 성큼성큼 계단을 뛰여내렸다. 그다음 3선광에 들려보기로 했던 걸음을 곧추 류병근의 집으로 옮겼다. 리정우의 권고야말로 이밤 지체할수 없는 자기의 당급한 과제인것이였다.

안주인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류병근 혼자만이 방복판에 쭈그리고앉아 터밭에서 거둔 강냉이를 까고있다가 엉거주춤 일어나 렴진욱을 맞았다. 강냉이마대들이 벽에 주런했다. 그것이 별스레 혐오감을 자아내며 눈을 찔렀다. 생존의 추구는 인간의 가장 신성한 권리이다. 하지만 한 선광기사로서의 그의 사회적의무는?

어쩔수없이 렴진욱의 목소리는 첫마디부터 격하게 나왔다.

《왜 소환에 응하지 않습니까? 내가 지난 일을 두고 사죄하기를 기다립니까?》

《…》

류병근의 이마에서 주름살들이 대뜸 깊은 고랑을 팠다. 목의 울대뼈가 꿈틀거리는것으로 미루어 대꾸하고싶은 말을 억지로 삼키는듯 했다. 렴진욱은 그 의미를 깨달았다.

《옳습니다, 나이도 됐으니 년로보장도 권리라는거겠지요. 그게 가장 기본적인 리유라면 난 더 할 말이 없습니다.》

《뭐 그뿐은 아니구…》

잠시 눈을 허둥거리던 류병근은 고개를 떨구며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이어 후들거리는 손으로 서툴게 마라초를 말기 시작했다. 종이가 곧 찢어졌다. 류병근은 다시 새 종이에 손을 뻗치려다가 단념해버리고 후― 처량한 한숨을 내불었다.

《어찌겠소. 먹기두 해야겠구… 그새 선광기술두 다 까먹다나니…》

《그만두시오!》 렴진욱이 날카롭게 가로챘다. 《기술부기사장은 류동무가 회양골에 들어가서도 선광공학책을 떼여놓지 않고있다고 말했습니다.》

류병근은 흠칠 어깨를 움츠렸다. 대번에 그의 눈이 물기에 젖어 흐릿해졌다. 그가 돌연 울음처럼 부르짖었다.

《날 이젠… 그만 놔두구 가주시우.… 가주시우.…》

거의 동시에 방웃목쪽에서 흐느낌 비슷한 억눌린 소리가 새여나왔다.

홱 고개를 돌린 렴진욱은 비로소 누구인가 이불을 푹 뒤집어쓴채 누워있는것을 보았다. 그 이불이 경련처럼 푸들푸들 떨리고있었다. 대뜸 심장이 쿡 찔리였다. 류병근의 아들!… 그 아들은 몇달전 채굴장에서 뜻하지 않은 일로 다리를 다치였는데 입원치료를 마다하고 계속 현장출근을 했었다. 그것을 띠여본 렴진욱은 천둥같이 화가 나서 욕설을 퍼부은적이 있었다.

《다시한번 작업장에 얼씬거려봐라. 당장 광산에서 내쫓을테야!》

그때 그가 하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기사장동지, 제가 누구 아들인지 잘 아시지요? 절 죽이려거든 내쫓으십시오.》

그것은 울분이 아니였다. 아버지몫까지 다 하려는 눈물의 호소였다.

그날 억지로 병원에 떠밀어보내기는 했지만 후에 들으니 붕대를 감은 다리로 계속 몰래 나타나 일하군 한다는것이였다. 그러다가 뼈가 잘못붙어 불구지경까지 되였다고 했다. 그런데 렴진욱은 그때 지배인사업까지 떠맡아보기 시작하는 통에 그만 가뭇 잊고말았었다. 새로운 역증이 울컥 끓어올랐다. 자신에 대한 참을수 없는 울화의 폭발이였다.

《좋습니다, 가겠습니다.》 렴진욱은 이를 악물며 거칠게 소리쳤다.

《내가 노엽고… 그래서 사랑하는 선광마저 외면했다면 다시 찾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명심하시오. 나라엔 지금 유색금속 한줌한줌이 매우 귀한 때입니다. 나나 류동무나 다 이 나라의 한 공민이겠지요? 그렇다면 이 지배인의 얼굴이 뭡니까? 그렇게 보기 싫으면 냅다 후려갈겨치우고라도 선광장만은 지켜야 할게 아니요!》

렴진욱은 더 뒤돌아보지도 않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절로 헉― 단김이 뿜어올라왔다. 이 순간엔 정말로 자신의 낯짝을 막 후려치고싶은 심정이였다. 남에게 욕할수 있는 권리는 사랑할 때에만 부여된다고들 한다. 그럼 자기는 류병근을 언제한번 애정을 가지고 대해본적 있었던가? 생산과만 결부된, 그 리용가치때문에 외면하지 않은 랭랭한 타산속에서의 실무적관계였을뿐이였다. 그러한 자기를 누가 가슴헤쳐보이며 따를수 있겠는가.

소슬바람에 불려온 누런 락엽이 이마를 건드렸다. 얼결에 만져보니 농구나무잎사귀였다. 절로 박치명부국장이 떠올랐다. 농구를 한바구니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었건만 지금껏 감감 잊고있었다. 삭도해체결정을 떨구지 않는다고 울분에 사무쳐 타매하였을뿐… 이것이 렴진욱이라는 인간의 실체였더란 말인가?

 

 

 이전페지  차례  다음페지 
되돌이 목록
감 상 글 쓰 기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22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