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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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셋… 마흔넷… 열어놓은 부엌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속에 물기로 번들거리는 토피블로크들이 줄지어 마당에 늘어서고있었다. 최금숙은 형틀안에 꽁꽁 다져넣은 진흙과 벼짚혼합물우에 마감으로 미장칼질을 하고는 허리를 쭉 펴며 형틀손잡이를 쳐들어올렸다.

《마흔다섯!…》

허리가 끊어질듯 아프고 아래배도 무죽했다. 오랜 산후탈로 신고하는 그였다. 첫아이를 낳고 몸간수를 잘못하여 얻은 병인데 사람들 말이 다시 아이를 낳으면 떨어진다기에 내쳐두었더니 아주 고질로 남아버리고말았었다. 의사들의 권유에 의하면 무거운 짐을 다루는 일은 될수록 피해야 한다는것이였다. 그러나… 남편의 《명령》에 불복한다는것은 최금숙에게 있을수 없는 일이였다.

모든것은 저녁녘 그가 토방을 만들려고 시도한 일로부터 시작되였다. 여름철에 장마비가 내리면 토방이 변변치 않은 그의 집으로는 락수물이 거침없이 넘쳐나 부엌으로 쓸어들기 일쑤였었다. 그것이 늘 속상했던 최금숙은 마침 자기가 다니는 보수직장에 주택보수용세멘트가 들어오자 직장장에게 말하여 토방수리인원 몇을 부탁했었다.

《지배인네 집부엌이 물창이 되다니 광산의 낯이 깎이는 일이지요. 당장 합시다, 당장!》

그렇게 되여 로동자 셋이 팔을 걷어붙이고 허물어진 토방을 아예 걷어내기 시작했을 때 진흙을 적재함에 가득 실은 자동차가 들이닥치고 그 운전칸에서 남편이 내렸다.

남편의 눈꼬리는 당장에 쭉 가로째졌다.

《이건 뭐요? 동무넨 그렇게도 할일이 없소? 당장 철수하오, 당장!》

부엌에서 수고하는 로동자들에게 대접할 음식을 만들고있던 최금숙이 뛰쳐나왔다.

《정석이 아버지!…》

《당신이 이따위 일판을 벌려놨소?》 남편은 성나서 언성을 더 높였다. 《잘하는군, 잘해. 그렇게 말했는데도 내놓고 행세를 해? 제 손은 없는가?》

지배인의 성난 거동에 질겁한 로동자들은 최금숙이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줄행랑을 놓아버렸다. 최금숙은 눈물이 났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식사한끼 대접 안하고 쫓는 법이 어디 있어요?》

인정에는 몹시 무른 남편이였다. 《허, 그렇군.》하고 당장 목소리가 수그러든 남편은 급급히 울바자밖으로 달려나갔다가 잠시후 랑패한 기색으로 되돌아왔다.

《그 친구들 욕하겠는데… 할수 없지, 후에 사죄할수밖에. 그러나 당신도 정신차리오. 건설로력이 모자라 가두녀인들에게 호소했더니 모두 떨쳐나서겠다는거요. 지금 지배인집이 문젠줄 아오? 그 세멘트도 도로 바치오. 진흙을 쓰란 말이요!》

남편이 진흙을 실어온 사유는 당장 밝혀졌다. 가두녀인들에게 블로크찍기를 맡기기로 결심했는데 그러자면 하루정량을 확정해야 건설계획을 짤수 있으니 최금숙이더러 밤 열두시까지 네시간동안 몇장 찍을수 있는지 시험해보라는것이였다.…

쉰하나… 쉰둘… 허리의 아픔에 이제는 형틀을 들어옮기기조차 힘들었다. 직장에 출근해서도 오래동안 서있지 못하는 그였다. 얼마전 딸 정옥은 제손으로 오래동안 진찰해본 끝에 조만간 수술치료를 받지 않으면 생명을 놓칠수도 있다면서 야단했었다. 최금숙은 자기 병이 그렇게 심한줄 몰랐던지라 어지간히 놀랐지만 새로운 근심이 앞서 도리질했다.

《그건 안된다. 네 아버지가 광산을 추세우자고 밤낮없이 뛰여다니시는데 내가 없으면 그 때식은 누가 대접하겠니? 넌 노상 병원에만 붓박혀있으니… 조금만 더 참아보자꾸나.》

《흥, 어머니가 일생 산후탈로 고생한다는것도 모르시는 아버지?!》

《너 무슨 말본새냐?》 그때 최금숙은 진정으로 노하여 꾸짖었었다.

《요즘 아버지꼴이 어떻게 돼가고있는지 그래 넌 못 보느냐? 저걸 그래도 딸이라고.》

지난 수십년동안 하루 두세시간도 자며말며 일에 몰두해왔어도 앓는법을 모르고 혈기왕성했던 남편이였다. 그러나 지배인이 되여서부터는 푹 꺼진 눈확에서 피발진 두눈만이 번열에 들뜬듯 번뜩거리는것이였다. 막중한 책임감의 짐때문에 꼿꼿하던 등까지도 굽어든것처럼 보였다. 그것때문에 최금숙은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니 어찌 순간이라도 집을 비우고 나돌아갈수 있으랴.

벌벌 기다싶이 이긴 진흙을 형틀에 다져넣느라니 불쑥 정옥이라도 좀 도와주었으면 하는 애달픈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 딸은 채굴장에 나가있다. 엊그제인가 갑자기 남편이 그를 꿇어앉혀놓고 《너 요즘 무슨 고민거리가 그리 많냐? 아무래도 네가 광산의사라지만 진짜 광부의 넋은 가슴에 지니고있는것 같지 않다. 현장의사로 나가 배우거라.》하고 요구한것이였다.

남편의 의사를 거역해본적이 없는 최금숙으로서도 그 처사는 너무 무리하고 지어 황당한것 같았다. 어디서나 한결같이 의술이 능할뿐아니라 성실하고 정성 또한 지극하다고 칭찬받는 딸이였다. 그것은 광부들에 대한 진심으로부터의 존경과 아껴주려는 헌신에서 우러나온것일것이다. 더구나 평양으로 갈수 있는 혼사까지 마다했을적에야 광부집딸로서의 자기를 지키고 아버지의 사업권위를 지키려고 얼마나 모질게 마음 다잡았을것인가.

이래저래 마음이 언짢아 후에 조용히 위로 겸 《고민거리》를 따지니 딸은 묻는 말에는 대꾸없이 그저 흔연스레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아버지말씀이 옳아요. 난 원망 안해요. 현장에서 단련되겠어요.》

…자지러진 전화종소리가 방안에서 울려나왔다. 대충 손을 씻고 송수화기를 드니 뜻밖에도 박치명부국장의 은근한 목소리가 진동판을 흔들었다.

《정옥이 엄마구만. 진욱이 그 사람이 사무실에도 없길래… 그사이 집안에서는 모두 별고없겠지요?》

《예, 예!…》

최금숙은 당황망조해졌다. 남편 렴진욱이 밤에도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는것을 잘 아는 박치명이 굳이 이밤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을 때에는 다른 문제일수 없었다.

《저… 미안해요.》 최금숙은 이마에 와짝 내돋는 식은땀도 의식못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대답을 기다리실줄 알면서도… 실은 우리 딸에게… 아니, 우리 딸을 쫓아다니는 총각이 있어 그걸 아퀴지은 다음 기쁜 소식을 알려드리자고…》

한동안 징― 울리는 전류흐르는 소리, 그것이 최금숙의 심장을 더욱 옥죄여들게 했다. 모름지기 상대방은 자기 말의 진실성여부를 그 어조까지 되새기며 따져보고있을것이다. 어쩌면 모든 사연을 다 알고 분노를 억누르고있을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박치명의 헌헌한 웃음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됐수다, 마음쓰지 마시우. 그런 문제야 누구의 낯을 봐서 성사시키는 일도 아니지 않소. 다 알만 하니 난… 없었던 일로 치고말겠수다. 뭐 그때문은 아니고 주인에게 긴히 포치할게 있더라니… 래일 아침 첫시간에 내게 전화하라고 알려주시우.》

통화는 그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최금숙은 여전히 가슴이 활랑거렸다.

자기도 박치명도 서로 거짓말을 한것이였다. 그런데 그 밑감정은 또 서로 완전히 달랐다.

느닷없는 서글픔이 구름처럼 가슴속에 서려들었다. 딸도 자기도 사랑에서는 기이한 곡절을 겪는구나 하는 생각때문이였다. 자기의 결혼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마음의 충동으로 별안간 스스로도 어이없이 이루어진것이였었다. 그 시절 화령광산 연구실 관리원이였던 최금숙은 해설강사도 겸하고 있어 광부들속에서 안면이 매우 넓었다. 그가 청중들앞에 나서는 회수가 그만큼 많은 덕이였다. 특히 총각들은 그의 억실억실한 눈매 하나만으로도 숨죽이고 지켜보군 했었다. 그것이 최금숙에게 처음에는 수줍은 행복감을 주었다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중에는 우쭐한 자부심으로까지 자라났다. 그가 결코 경박스러워서도 아니였다. 인물에서 별로 빠진데가 없이 환하여 사처에서 청혼이 들어와 웬간한 총각은 눈아래로 보지 않을수 없는 이른바 《환경》탓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하여 그는 광산에서 아주 눈높은 처녀로 소문나게까지 되였다.

하루는 그의 퇴근길을 한 총각이 우뚝 막아섰다. 저물녘이였지만 최금숙은 첫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지금껏 불같은 열정으로 《마라손총각》이라 불리웠었고 최근에는 새로 개발되는 연하광산 돌격대장으로 나가있다는 렴진욱이였다.

《언제 왔어요? 무척 고생한다는 소린…》

미처 반색을 표시할 겨를도 없었다. 렴진욱이 그의 말을 중도에서 툭 잘라치우며 단도직입적으로 내뱉은것이였다.

《난 동무에게 장가들자고 찾아왔소.》

질겁하여 달아나버릴수도 있었다. 그러나 최금숙은 도고한 처녀로도 소문난터였다. 그는 렴진욱을 경멸하듯 똑바로 쳐다보며 쌀쌀하게 되받았다.

《내가 싫다고 하면요?》

《억지로라도 꺾겠소. 난 장가들라는 당조직의 권고를 나에게 주는 분공으로 받아들였단 말이요. 때문에 그 분공은 무조건 수행해야 하는거요.》

이미 어둠이 사위를 뒤덮고있었다. 처녀의 몸으로서는 아주 경계해야 할 정황이였다. 그럼에도 최금숙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수 없었다.

《아이구, 이보세요. 그 분공에… 꼭 나를 안해로 맞으라고 쪼아박았는가요?》

《우습고… 희떱다는거지?》 렴진욱의 목소리가 단번에 거칠어졌다.

《동무가 눈이 눈섭우에 붙었다는걸 알아! 그러나 나도 굴진공이라는걸 명심해. 착암긴 뚫지 못하는 암벽이 없단 말이야!》

처음으로 최금숙은 공포를 느꼈다. 비로소 《억지로라도…》라던 말의 현실적위험을 실감한것이였다. 그는 렴진욱의 늘씬하면서도 단단한 체구에 달려있는 울근불근 근육이 튀여나온 두팔을 두려움에 차서 흘끔거리는 한편 도망쳐야 할 뒤길도 곁눈질했다. 만약 저 아귀세여보이는 손에 잡히운다면 찍소리는커녕 발버둥쳐내지도 못할것이다. 하물며 자기의 같잖은 우쭐한 자부심따위야 무슨 도움이 되랴.

《날… 어쩔려는거예요?》

목소리이상으로 다리가 떨려 최금숙은 뒤걸음조차 쳐낼수 없었다. 그 기미를 알아챈듯 렴진욱이 픽 코웃음쳤다.

《왜, 도망쳐보자구?》

그 코웃음이 최금숙을 진정시켰다. 그는 뒤걸음치기를 그만두고 오만하게 코를 쳐들었다.

《자기가 무뢰한이라는걸 깨닫지 못하는 사람앞에선 도망칠 필요도 없는거예요.》

렴진욱은 뜻밖인듯 최금숙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의 볼편살이 푸드득 떨렸다.

《내가… 무뢰한이라구?》

《그렇지 않다면 곱게 길을 비켜요!》

《음―》

괴로운 신음소리가 렴진욱의 입에서 새여나왔다. 그는 금시 허탈이라도 온것처럼 비틀거리며 길섶으로 물러나 털썩 주저앉더니 짜증처럼 손을 휘저었다.

《그렇다면… 자, 가보오.》

《?!…》

《다 옳아, 난 무뢰한이였어. 꼭 동물 맞으라고 한건 아니였는데… 주제넘게 떡 막아섰지. 다만 알아둘건… 내 심정을 들어줄만 한 처년 동무밖에 없다고 보았을뿐이요.… 어서 가보라는데!》

그날밤의 잠자리는 불편했다. 싱숭생숭한 밤이였다. 렴진욱이라는 청년이 광산의 이목을 모은다는것을 최금숙도 모르지 않았었다. 하면서도 청년의 무분별한듯 한 정열에는 위압감이 들었고 그때문에 자존심도 상했었다. 그래서 《아니야!》하고 지워버렸던 청년, 에이, 생뚱같은 생각은 왜 한담, 잠이나 자야지!… 헌데 《분공수행을 완전무결하게 도와줄 처녀》가 나라는건 무슨 의밀가, 갑자기 그따위 분공을 받게 된 내막은?…

아침에야 모든것이 밝혀졌다. 출근하자 최금숙은 곧 당비서에게 불리워갔다.

《연하에서 그곳 당비서가 간밤에 내게 전화를 하더구나. 진욱이를 잘 도와주라구…》

그리하여 최금숙은 연하광산개발에서 렴진욱이라는 청년의 무시할수 없는 지위며 가혹성, 그 밑바탕에 깔려있는 현순이의 넋의 호소… 등을 알게 되였다. 눈물겨운 이야기였다.

《…나도 진욱이와 같은 생각이다. 금숙이라면 한 좋은 청년을 구원하여 더 훌륭한 일을 더 많이 하도록 가꿔줄수 있으리라고 말이다. 그게 글쎄 사랑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난 금숙이의 정의감을 믿는다.》

최금숙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러나 이미 심장은 《정의감》이라고 정의된 그 세계속으로 끌려들어 사뭇 엄숙하게 들뛰기 시작했다. 현순이는 무엇을 보고 렴진욱이로 대표되는 굴진공들을 위해 한몸 기꺼이 바쳤을가.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그리도 관심하시는 연하광산개발에서의 그 청년의 큰 몫을 앞질러내다본건 아니였을가? 죽어서도 그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아 참된 인간으로 완성시켜주려고 애쓰는 갸륵한 그 넋, 이제 나 역시 자신을 희생하여 그 《완성》의 밑거름이 되여준다면 그 처녀앞에, 사람들앞에 떳떳하지 않을가?…

벌써 점심무렵에는 그의 결심이 굳어져 아버지에게 고백하는데까지 이르렀다. 광산에서 목수일을 하는 아버지도 이미 렴진욱을 잘 알고있어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우려를 표시했다.

《사람이야 뭐 잘나구 큰일도 칠 인물이긴 한데… 그 사람의 무서운 투신속에 숨은 리기심도 엿보이거던. 그게 걱정이다.》

부끄러운 고백을 한 뒤끝이여서 고개를 들기도 힘들었지만 최금숙은 완전한 도리질을 당할것 같아 짐짓 우스개소리로 더퍼리처녀흉내를 내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 제가 마저 완성시키자는거랍니다. 이 딸이 옳게 생각했지요, 예?》

그 《완성》이 자기때문에 이루어졌다고는 결코 볼수 없었다. 그럼에도 어쨌든 남편은 그후 《숨은 리기심》이란 전혀 없는 인간으로 변모되여 정말로 많은 일을 해왔고 오늘은 지배인으로까지 성장했다. 대신 자기는 정말로 자신을 《희생》하여 고질적인 산후탈환자가 되여버렸다. 그렇다면 우리 딸 정옥이의 운명은 과연 어떤 길을 걷게 되겠는지?…

《어마, 이 밤중에 뭘 하세요?》

대문안에 뛰여든것은 옥수금이였다. 수금은 눈이 휘둥그래서 마당가득 줄지어놓인 블로크를 휘둘러보더니 제잡담 삽을 빼앗아들었다. 얌전하나 일솜씨가 암팡진 수금이를 잘 아는터여서 최금숙은 무등 반가왔으나 은근히 걱정스럽기도 하여 만류했다.

《관둬라, 이건 오늘 밤 내 혼자 해야 할 분공이란다.》

《분공이요?》 재미나는 이야기를 련상한 모양 수금은 고개를 갸웃한채 살금살금 웃으며 재촉했다.《이따위 엉터리분공을 준게 도대체 누구예요? 좀 알자요.》

《됐다, 그건 그렇구 내 한가지 물어보자. 너 요즘에도 우리 정옥일 자주 만나겠지?》

《그야 뭐…》

눈치빠른 처녀였다. 수금은 대뜸 최금숙의 궁금증이 무엇인지 포착한듯 잔뜩 경계하는 눈초리를 보냈다. 뭔가 알고있는게 뻔했다. 최금숙은 조바심이 났다.

《넌 정옥이의 친한 동무지. 제발 좀 대주렴. 그 애가 요즘 왜 고민하고있는지, 응?》

수금은 딱해서인지 한동안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아리숭한 말을 꺼냈다.

《자기가 자기 감정을 모를 때도 있나봐요. 정옥이가 지금 그래요. 아직은 정옥이를 욱박지르지 마세요. 사실 그 앤… 죄도 없이 채광에 갔거던요.》

《?…》

《아이, 그 이상은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럼 난 가요.》

수금이야말로 그 어떤 만류에도 끝까지 일손을 거들지 않고는 못 배기는 처녀였다. 그럼에도 그는 도망치듯 황황히 어둠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최금숙은 그 자리에 망연히 굳어졌다. 갈수록 의혹과 불안이 더 짙어진것이였다.

 

×

 

수금은 정옥이네 집울타리를 먼발치 벗어났을 때에야 호―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정옥이 어머니의 속상해하는 눈길앞에 몇분만 더 포로되여있었더라면 그만 마음이 약해져 자기가 알고있는 비밀을 다 토설하고말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정작 토설한대도 도무지 조리있게 설명해낼 자신이 없는 그이기도 했다.

수금은 고개를 갸우뚱한채 둥그런 전지불빛에 드러나는 고르롭지 못한 골목길을 타박타박 걸었다. 그는 이틀전에 우연히 만났던 정옥이와의 대화를 상기해보고있었다. 그날 광석시료를 뜨러 채굴장에 나갔던 수금은 뜻밖에도 대파공들을 닦아세우고있는 정옥이를 띠여보게 되였다. 마스크를 끼지 않고 착암한다고 추궁하는 모양이였다. 대파란 아름이 넘는 거석들을 파쇄기가 먹을수 있도록 잘게 발파해치우는 작업을 말하는데 채굴장 여기저기에 무질서하게 널린 돌들을 따라가며 하나씩 구멍을 내야 하기때문에 습식착암이 거의 불가능했다. 또 야외작업이여서 구태여 습식을 도입할 필요도 없었다.

수금은 얌전하고 사근사근하던 그답지 않게 날카롭게 소리치는 정옥의 모습에 우선 눈이 커졌다. 거기에 병원에 얌전히 앉아있어야 할 그가 구급원행세를 하는것 또한 괴이쩍었다.

마침내 수금을 발견한 정옥이 대파공들에게 뭐라고 다시한번 오금을 박고나서 그앞으로 다가왔다.

《뭘 멍청해서 보는거냐?》하고 정옥이 활짝 웃으며 귀따가운 착암기소리를 제압하듯 소리쳤다.

《현장휴계실로 가자. 난 어제부터 채광갱구급원으로 일해. 멋있지?》

《뭐, 그건 어째서?》

《애두, 광산의사라면야 현장경험도 있어야잖니. 그리고… 난 뭔가 연구도 좀 하자는거야.》

수금은 나란히 걷는 정옥을 어리둥절해서 훔쳐보았다. 정옥의 좀 자랑스러운듯 한 말마디에서는 꾸며낸 활기가 엿보이고있었다. 현장에 구급원이 필요하다는것쯤은 그도 잘 알고있었다. 돌과 씨름하는 작업이라 부주의하여 손발의 피부가 상하는 경우도 있고 좀전처럼 마스크없이 일하는 자유주의자들을 단속통제도 해야 했다. 하지만 로천채굴장이여서 규페 같은 병을 우려할 필요가 전혀 없는것이 이곳 연하광산이였다. 그러므로 정옥이같이 기능높은 의사들을 구급원으로 파견해본 전례 또한 없었다.

현장휴계실에 들어서니 쌉쌀하면서도 달콤한 향기가 떠돌고있었다.

《마셔봐.》

정옥이 열리터들이비닐장통을 기울여 무슨 파르끼레한 액체를 한고뿌 부어주었다. 솔잎시롭이였다. 정옥이 그 하루사이 자기의 새 직무에 본격적으로 몸을 잠근것이였다.

《맛이 괜찮지? 굴진공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비타민제야. 이걸 만드느라 밤을 꼬박 샜지 뭐. 벌써 3번교대성원들껜 선을 보였어. 모두 얼마나 좋아하던지…》

끝내 참지 못하고 수금은 그의 말을 냉큼 가로챘다.

《너 혹시… 아버지를 노엽힌게 아니야?》

《아니, 왜?》

《듣자니까 뭐 평양멋쟁이를 차버렸다던데?…》

정옥의 얼굴에 떠돌던 흥겨운 미소가 서서히 사그라졌다. 동시에 싱싱한 탄력이 넘치던 그의 몸도 기운이 빠진듯 흐트러져버렸다.

《너도 들은게구나.》 시진하게 중얼거리며 걸상에 주저앉은 정옥은 먼지도 오르지 않은 탁자우의 전화기를 이리저리 문지르더니 불쑥 되물었다.

《만약 너에게 평양에 가 살 기회가 생긴다면 그땐 어쩔테냐?》

《그거야…》

그것 역시 괴이쩍은 질문이였다. 누군들 그런 기회를 마다하겠는가.

그래서 더더구나 정옥의 일이 비밀스럽던 참이였다.

《난 대학기간 6년을 살아봤어. 꿈같았지. 그래서 꿈에 자주 뵈나봐.》

가는 한숨끝에 정옥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 난… 우리 부국장큰아버지네 집에 자주 다녔어. 명절때는 물론이고 일요일에도 어김없이 날 청했으니까. 어쩌다 못 가면 그 집 오빠가 시퍼렇게 성나서 달려와서는 내 머리꽁지를 비틀었지. 그 오빤 멋쟁이고 쾌활하고… 난돌이랄가. 만날 때마다 늘 〈정옥아, 네 신랑감은 내가 골라주마, 평양총각을. 좋지?〉하군 했어. 친오빠이상이였는데… 그런데…》

《그럼 아버지가 반대해서?…》

정옥은 힘껏 도리질해보였다.

《그건 전혀 다른 문제야.… 내 언젠가 말했지. 그… 국경경비대사관!》

수금은 놀라서 채 마시지 못한 고뿌를 엎지를번 했다. 이 애가 아직도 그를 잊지 않고있었단 말인가. 그래서 평양의 《멋쟁이오빠》까지도 마다하고?… 이제와서야 수금은 언젠가 그에게서 들은 《피의 부름》이라는것이 일종의 그리움이였댔구나 하는 판단이 들었다. 그리움을 느꼈다면 그것은 벌써 사랑인것이다. 정옥은 그때 단지 그것을 확인하지 못해 안타까와했었을뿐이고.

《속단하지 마.》 수금의 호기심가득한 표정에서 그의 속생각을 읽어낸듯 정옥이 성급히 속삭였다. 《그 동무를 잊지는 않았어도 난 아직 그에게 회답편지조차 못 보내고있어. 그한테 달려갈 결심은 더더구나 내리지 못하고! 물론… 아버지가 광부한테 시집가는게 도리라고 못박은건 사실이야. 하지만 사랑한다면 그 동물 여기로 데려올수도 있잖아. 그래서 난 자신을 검토해보는중이야. 〈가슴에 손얹고 말해봐라. 너 짐이 무거울가봐 사랑을 저울질하는게 아니냐?〉하고.… 이젠 알만 하니?》

수금은 얼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갑자기 구급원이 된 사유는 짐작되여도 그 나머지는 통 알수 없었다. 짐이 될 사랑도 있단 말인가? 그 동무가 몸이 불편하다는걸 념두에 둔것 같긴 한데 어쨌든 사랑한다면야…

정옥을 도와 솔잎시롭통을 굴진중대에 날라다주고 시료뜨기를 시작했을 때에도 수금의 뇌리에서는 풀수 없는 그 답을 찾으려는 헛된 시도가 계속 진행되였다. 오히려 《광부한테 시집가는게 도리》라고 했다는 지배인의 말이 더 명백한 열쇠로 될것 같았다. 그러한 론리로 정옥의 감정을 재단해본다면 어떤 답이 나오겠는지. 아니, 어떤 경우이든 나만은 광산을 뜨지 않는 쪽을 선택할것이다. 그래서 한때 허물은 많지만 청주라는 광부를 맘에 두기도 한게 아닌가!

갑자기 수금은 흠칫 몸을 옹송그렸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 순간 그의 시야에 진짜 청주의 모습이 뛰여든것이였다. 청주는 어느 한 소갱입구앞에서 두손을 호주머니에 찌른채 멍하니 하늘 어딘가를 쳐다보고있었다. 책임기사자리를 떼우고 보통굴진공이 된 자기 처지가 허망스러워 한숨짓는 꼴이였다.

급급히 고개를 수그렸으나 청주의 모습은 눈앞에서 그냥 얼른거렸다. 아이, 사내라는게 왜 저리 청승맞담?… 그러면서도 가슴은 이상한 애처로움으로 조여들었다. 정배군소리를 탕탕 내뱉는 푼수없는 인간이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과오를 씻는다면서 광산으로 자원해왔다지 않는가!

 …몸이 휘친하는 바람에 수금은 그만 중심을 잃고 전지를 떨구어버렸다. 생각에 너무 옴하던 나머지 환한 전지불빛속에서도 돌부리에 걸렸던것이다. 도랑속에 굴러들어간 전지를 집느라고 수금은 한쪽 신발까지 흠뻑 적시고말았다. 절로 욕설이 나왔다. 에이, 싸지 싸. 괴이한 사랑에 방황하는 정옥을 동정했으면 됐지 하필이면 거기에 청주따위는 왜 껴묻여 그려보았담?

그다음부터 수금은 거의 반달음쳐 걸음을 재촉했다. 청주의 환영으로부터 재빨리 그리고 멀찍이 도망치고싶었던것이다.

집에 들어서니 할아버지가 근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어째 마광기가 한대 멎었구나.》

수금은 아차 하고 혀를 깨물었다. 아까부터 고막이 이상하게 멍멍하다는 느낌이 들었었는데 그 리유를 할아버지가 깨우쳐준것이였다. 대뜸 새로운 근심이 그를 사로잡았다.

《할아버지, 나 선광에 잠간 올라갔다 와요.》

수금은 미처 신발도 바로 꿰지 못한채 밖으로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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