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민족이란
사람들은 흔히 우리 민족은 배달민족이라고 하면서 반드시 하나로 통일되여야 한다고 강조하군 한다.
그러면 왜 조선민족을 배달민족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배달이라는 말이 단군조선을 세운 박달종족의 이름에서 유래되여 오랜 력사적기간 조선민족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전하여왔기때문이다.
여기에서 단군이란 선조들이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건국시조를 한자로 표기한것이다.
12세기 중국의 송나라사람 손목이 쓴 《계림류사》라는 책에서 《단》자는 배달이라고 하였고 《군》자는 임금이라고 하였다.
또한 17세기 사람인 북애자는 우리 말로 박달나무를 박달 또는 배달이라고 하고 군주를 임금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단군이란 배달임금을 한자로 옮겨놓은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단군-박달-배달이란 말은 같은 뜻이라는것이다.
지금으로부터 5 000여년전에 박달추장의 지위를 계승한 단군은 당시 성숙된 사회정치적조건을 리용하여 동방에서 처음으로 되는 고대국가-단군조선을 세웠다. 그때 거주지역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조선일대였는데 점차 단군조선의 령역이 조선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시아의 넓은 지역으로 확대되면서 그 이름은 고대조선주민들을 가리키는 범칭으로 되였다.
이러한 전통은 그후 대를 이어가면서 전해져 오늘날에도 우리 민족은 자기를 가리켜 배달민족이라고 부르는것이다. 배달민족이라는 말속에는 우리 민족의 단일성과 유구성, 우수성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담겨져있다.
동방례의지국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동방례의지국으로 린방나라들에 널리 알려져있다고, 조선민족이 례절바르고 인정이 많고 충효심이 높다는것은 옛날 우리 나라에 와본 서방사람들도 한결같이 인정하였다고 쓰시였다.
동방례의지국이란 말은 동방에 있는 풍속이 아름답고 례의범절이 밝은 사람들이 사는 우리 나라를 이르는 말로서 오래전부터 조선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불리워왔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부모들을 잘 모시고 웃사람과 스승을 존경하며 아래사람들을 극진히 사랑할뿐아니라 이웃간에 서로 도우며 화목하게 지내는 고상한 도덕품성을 지니였다.
우리 인민들은 가정생활에서 남편과 안해, 부모와 자식, 형제들사이에 서로 존경하고 위해주며 아껴주는것을 미덕으로 여겨왔다. 그런가하면 이웃간에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 생기면 자기 일처럼 여기고 같이 나누었으며 농사일과 집짓기 등 품이 많이 드는 힘든 일은 서로 힘을 합쳐 도와주며 화목하게 살아왔다. 이와 함께 일상생활과정에 같은 말이라도 대상에 따라 웃사람에게 하는 말과 동년배끼리 하는 말, 아래사람들사이에 주고받는 말을 달리하였으며 인사도 친구들사이에는 머리를 숙이는것으로 례의를 표시하였다면 웃사람에게는 공손히 안부를 물으면서 허리굽혀 인사하였다.
우리 민족고유의 이런 아름다운 풍습을 보고 일찍부터 다른 나라 사람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몹시 부러워하였다.
임진조국전쟁(1592-1598년)시기 조선을 침략하였던 일본의 한 무사가 부모를 정성스럽게 모시는 우리 민족의 고상한 도덕품성에 크게 감복하여 조선사람으로 귀화하였다는 일화를 통해서도 이에 대해 잘 알수 있다.
《삼국지》, 《후한서》를 비롯한 중국의 옛 기록들에서도 사람들이 길을 가다가도 서로 만나면 사양하여 길을 비켜준다고 하였고 부인들의 행실이 단정하고 부부간의 정이 두터우며 밤에 문을 걸지 않고 살았다고 하였다.
하기에 고대에 벌써 중국에서는 우리 나라를 덕망이 높고 점잖은 사람, 성인과 같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라는 의미에서 《군자국》, 《례의지국》 등으로 불렀던것이다.
동방례의지국, 이렇듯 여기에는 아름답고 우수한 문화와 풍습, 도덕을 창조하며 화목하게 살아온 우리 민족, 우리 나라에 대한 세상사람들의 한결같은 평가와 부러움이 그대로 집대성되여있다.
살림집례절
예로부터 례의도덕이 밝은 민족으로 널리 알려진 우리 인민들은 살림집을 짓고 사는데서도 사람들사이에 고상한 례의범절을 지켜왔다.
우리 인민들은 우선 이웃에서 살림집을 짓거나 집들이를 할 때 온 마을이 떨쳐나와 도와주는것을 례의도덕으로 지켜왔다.
지난날 살림집을 짓는 일은 한 가정의 몇몇 성원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마을에서 어느 한 가정이 살림집을 지으면 물심량면으로 도와주었으며 그렇게 하는것을 례절로 여기였다. 집을 지을 때 서로 돕는 일은 그 누구의 지시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도덕의리에 기초하여 진행되였다.
살림집이 완공되여 집들이를 할 때에도 마을사람들은 모두 떨쳐나와 이사짐을 날라주면서 새집들이를 축하해주었다. 그때 사람들은 새살림에 도움이 될수 있는 간단한 일용품인 성냥이나 바가지 등을 기념으로 주기도 하였다. 그러면 주인집에서는 그에 대한 답례로서 간단한 음식을 차려 대접하였다.
우리 인민들은 다음으로 방안출입과 리용에서도 례절을 지켰다.
살림집을 리용하는 과정에 방안으로 들어갈 때에는 반드시 신발을 밖에 벗어놓고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며 밖으로 나올 때에도 역시 문을 열고 닫는 소리가 크게 나지 않도록 주의하였다.
그리고 방을 리용할 때에는 방의 뜨뜻한 아래목은 웃어른들에게 권하고 젊은 사람들은 웃목이나 웃방에 자리를 잡는것을 례절로 여기였다.
이것은 웃어른들을 존경하며 그들에게 보다 좋은 생활조건을 마련해주려는 우리 인민들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그대로 반영한것이였다.
우리 인민들은 다음으로 이웃집을 방문할 때에는 반드시 밖에서 주인을 찾고 응답이 있을 때에만 집안으로 들어가 인사를 나누었다. 방에 들어가서는 주인이 권하는데 따라 자리에 앉아서 용무를 보는것을 례절로 여겼다.
이것은 이웃간에 서로 존경하며 신의를 두터이 하는것을 고상한 품성으로 여긴 우리 인민의 전통적인 례절이였다.
우리 인민들은 다음으로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친절하게 맞이하는것을 례절로 여기였다.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반드시 일어서서 맞이하였으며 방에서 제일 좋은 자리를 권하는것을 례절로 여겼다.
이밖에도 우리 인민들은 손님이 짐을 들고 왔으면 짐을 받아주고 겨울에는 솜옷 같은것을 받아 일정한 장소에 걸어주는 등 찾아온 사람이 불편이 없도록 도와주는것을 응당한 례절로, 보통현상으로 여기였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살림집생활에서도 고상한 례의범절을 창조하고 오랜 력사적기간 계승해왔다.
마을의 《배산림수》, 살림집의 《자좌오향》풍습
먼 옛날부터 단일민족으로 살아온 우리 선조들은 마을의 위치를 정할 때 그 지대의 지형조건에 의거하면서도 농업생산에 편리하게 정하는데 많은 관심을 돌렸다.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마을의 위치를 정할 때 《배산림수》 즉 산을 등지고 물을 앞에 두어야 한다고 말해왔다. 다시말하여 마을은 산기슭에 자리잡고 그앞으로 물이 흘러야 마을이 안착되고 생산활동에도 편리하며 생활에도 유리하고 자연풍치도 돋구어주게 된다는것이다.
산이 많고 골짜기도 많은 우리 나라 그 어디를 둘러보아도 마을뒤로 강물이 흐르고 마을앞에 산이 막힌 곳은 찾아볼수 없다.
《배산림수》는 마을위치선정에서 산이 많은 우리 나라의 자연지리적조건을 창조적으로 리용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의 하나라고 할수 있다.
우리 선조들은 《배산림수》의 마을위치선정에 따라 살림집의 위치와 방향을 《자좌오향》으로 하는것을 하나의 리상으로 일러왔다. 즉 살림집은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하게 짓는것이였다. 여기에 동쪽으로 대문을 내면 그이상 살림집으로서는 나무랄데 없는것으로 여기였다.
남쪽을 향하여 집을 지으면 살림방의 채광에 좋고 겨울에 춥지 않으며 또 여름에 그닥 덥지 않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배산림수》한 마을에 《자좌오향》한 집을 짓고 사는것을 하나의 리상으로 여기고 이러한 풍습을 대대손손 이어왔다.
늙은이들의 생일맞이이름과 그 유래
지난날에는 사람들이 생활에서 이러저러한 제약을 받아 수명이 길지 못하였다.
흔히 60살을 산 사람을 장수한 로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60살이상 사는 사람들을 위하여서는 특별히 생일맞이 이름을 정하고 크게 쇠군 하였다.
60돐생일을 쇤 다음부터는 10년을 계기로 생일상을 차려 늙은이들을 위로하여주었다.
생일 70돐을 《고희》라고 하면서 생일을 크게 쇠였다.
고희라는 말은 사람이 70살까지 사는 경우가 드물다는데로부터 《인간70고래희》라고 한데서 유래되였다.
여기에서 《옛 고》자와 《드물 희》자를 따서 《고희》라고 하였다.
생일 80돐은 《팔순》이라고 하면서 크게 쇠였다.
팔순이란 순이 여덟번 되였다는데로부터 유래되였다.
흔히 사람들은 순이라면 10일이라는 말로 통하지만 10돐이라는 의미로도 쓴다.
생일 90돐은 《졸수》라고 하였다.
졸수란 한자로 《군사 졸》을 초서로 쓰면 아홉과 열이 함께 쓰이므로 그것을 풀어놓으면 90이 된다는데로부터 붙여진 이름이다.
생일 100돐은 《백수》라고 하였다.
사람이 100년을 살았다는데로부터 부른것이다.
이밖에 우리 민족은 수자가 겹치는 생일도 특별히 의의를 부여하고 쇠기도 하였다.
이러한 풍습은 늙은이들을 존경하며 례의를 귀중히 여겨온 우리 민족의 미풍량속에서부터 발현된것이였다.
행주치마
행주치마는 예로부터 우리 녀성들이 가정에서 부엌일을 할 때 앞에 두르는 치마이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임진록》을 읽어본 사람들은 행주산성싸움에서 녀성들이 얼마만큼 큰 몫을 담당했는가를 생생하게 기억하고있을것이라고 하시면서 행주산성싸움에서 유래된것이라고 하여 그 앞치마를 《행주치마》라고 한다고 해박한 식견으로 감회깊이 쓰시였다.
일명 앞치마라고도 하는 행주치마는 세나라시기부터 우리 녀성들이 입어온 력사가 오랜 치마로 알려져있다. 고구려의 감신무덤벽화와 안악2호무덤벽화를 비롯한 당시 무덤벽화들에는 앞치마를 두른 여러명의 녀성들의 모습이 생동하게 그려져있다.
이 앞치마가 《행주치마》로 불리우게 된데는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나서자란 고향과 사랑하는 이 땅을 지켜싸운 이 나라 녀성들의 애국적인 소행이 깃들어있다.
임진조국전쟁이 일어난 이듬해인 1593년 2월 행주산성에서는 권률장군이 지휘하는 조선군사들이 수많은 왜적들과 맞서 치렬한 결사전을 벌리고있었다. 이때 이곳 녀성들은 예로부터 입어오던 앞치마에 돌을 담아 부지런히 날라다줌으로써 아군의 전투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후 행주산성녀성들의 위훈을 길이 전하려는 마음에서 사람들은 그 앞치마를 가리켜 《행주치마》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우리 녀성들은 식사를 준비할 때에는 물론 귀한 손님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할 때에는 의례히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 들어갔고 또 부엌에서 일하다가 방안에 들어서거나 찾아온 손님을 마중나갈 때에는 앞치마를 벗는것을 례절로 여기였다.
이처럼 어버이수령님께서 해박한 식견으로 회고하신 행주치마는 조선녀성들의 애국투쟁과 함께 예로부터 정결하고 깨끗한것을 숭상해온 알뜰한 생활풍습과 결부되여 전해오고있다.
첫돌상
첫돌상은 어린이가 태여난 첫돌을 축하하여 차리는 상이다. 지난 시기에는 첫돌을 초도일, 돌상을 백완반이라고 하였다.
돌상을 백완반이라고 하는것은 백가지 재롱을 부리는 상이라는 뜻이다. 돌잡이어린이가 상앞에서 갖가지 재롱을 부리고 어른들은 그것을 지켜보면서 어린이의 건강과 행복, 좋은 재주를 가지고 복많이 받기를 바라던데로부터 돌상에 《희롱 완》자를 붙여 백완반이라고 하였던것이다.
돌상에는 음식과 함께 물건들도 놓았는데 일반적으로 남자애이면 활과 화살, 책, 종이와 붓 같은 필기도구를, 녀자애이면 칼과 자, 바늘, 가위 등을 놓았다.
이렇게 상을 차린 다음 옷을 곱게 입혀 단장시킨 어린이를 상앞에 앉혀놓고는 돌잡이라고 하면서 돌상에 놓은 물건을 마음대로 잡게 하였다. 어른들은 어린이가 어떤 물건을 잡는가에 따라 그의 장래를 예언하기도 하였다.
이때 활과 화살은 무사, 책과 종이를 비롯한 문방구는 학자나 문장가로, 자, 가위, 바늘은 바느질솜씨를, 칼은 음식솜씨를 상징한것으로 해석하였다.
돌상에 놓는 음식으로는 백설기와 수수경단을 빠져서는 안될 음식으로 간주하였다. 백설기는 어린이를 깨끗한 정신세계의 소유자로, 팥고물을 묻힌 수수경단은 고상한 품격의 소유자로 키우려는 부모들의 념원과 함께 건장한 체력과 장수를 상징하는것이였다. 때문에 부모들은 첫돌때만이 아니라 해마다 맞는 생일날에도 백설기와 수수경단을 만들어주려고 온갖 지성을 다하였다.
지방에 따라 송편은 속을 넣은것과 넣지 않은것을 놓아주기도 하였다. 속을 넣은 송편은 사람이 속에 든것이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속이 빈것은 도량이 넓으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찹쌀떡도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듬직하고 대바르며 강의하게 자라라는 의미로, 아롱다롱 무지개떡은 무럭무럭 자라라는 부모들의 념원이 깃들어있다.
돌상에 차린 음식은 첫돌을 축하하려고 찾아온 손님들과 일가친척들, 이웃들과 나누어 먹었다.
돌상차림은 지방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전국적으로 거의 비슷하였다.
돌상차림풍습에는 자식이 잘 자라서 훌륭한 사람이 되여 나라의 기둥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들의 소박한 념원이 깃들어있다.
봉선화물들이기
봉선화물들이기는 어린 처녀애들이 여름철에 봉선화의 꽃을 뜯어 그 꽃으로 손톱에 빨간 물을 들이면서 노는 민속놀이의 하나이다.
조선녀성들은 해마다 봄이 오면 집뜨락이나 화단에 여러가지 꽃과 함께 봉선화도 심고 가꾸었으며 그 꽃이 활짝 필 때에는 꽃잎을 뜯어 손톱을 빨갛게 물들이기도 하였다.
봉선화물들이기는 활짝 핀 꽃을 뜯어 백반과 함께 짓찧은 다음 그것을 손톱우에 올려놓고 봉선화잎이나 천쪼박으로 싸매놓는 방법으로 하였다. 그렇게 한 다음 하루밤을 자고나면 손톱에 진분홍색의 고운 물이 든다. 물들인 손톱은 곱고 아름다울뿐아니라 마음도 상쾌하게 하여준다.
봉선화물들이기는 여름철에만 한것이 아니라 가을과 겨울철에도 하였다. 그때에는 여름철에 말리워두었던 꽃잎을 물에 개여서 손톱에 물들이였다.
이 풍습은 우리 나라에서 오랜 력사를 갖고 전하여온다.
16세기의 이름있는 녀류시인이였던 허란설헌은 《손톱에 봉선화를 물들이며》라는 시에 《금동이의 봉선화 붉은 이슬 내뿜는데 가느다란 열손가락 어쩌면 그리도 고울가.》라고 하였다.
또한 민간에서 전해오는 가요에는 《봉선화꽃으로 손톱을 물들이니 물들인 열손가락 지나가는 곳마다 봄향기 분명쿠나.》라고 하였다.
봉선화꽃으로 손톱을 물들이는 풍습의 유래에 대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온다.
옛날 어느 한 마을에 마음씨 착하고 부지런한 봉선이라는 처녀가 살고있었다. 그 처녀에게는 사랑을 언약한 한 총각이 있었다. 어느날 총각은 변방을 지키기 위하여 먼길을 떠나게 되였다.
그후 처녀는 오로지 총각을 그리며 상봉의 그날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어느날 그렇게도 기다리던 총각은 돌아오지 못하고 적과의 싸움에서 용감하게 희생되였다는 가슴아픈 소식만이 날아왔다. 너무도 뜻밖의 소식에 접한 처녀는 그길로 변방에 달려가 총각의 시신을 양지바른 곳에 안장하고 무덤앞에 꽃을 심었다고 한다. 이듬해 봄에 꽃포기에는 처녀의 마음을 알아주기나 하듯이 소담한 빨간 꽃이 아름답게 피여났다.
처녀는 총각을 잊을수 없어 그 꽃을 따서 자기의 손톱에 물을 들였다고 한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 처녀의 이름을 따서 꽃이름을 봉선화라고 하였고 처녀들은 봉선이와 총각의 순결한 사랑을 길이 전하려는 의미에서 봉선화물들이기를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봉선화물들이기에는 조선녀성들의 아름답고 순결한 마음과 고상한 정서가 반영되여있다.
믿음과 사랑으로 맺어진 우리 민족의 결혼
예로부터 의리와 도덕을 귀중히 여겨온 우리 민족은 믿음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 결혼을 하였다. 이로부터 남녀가 한번 결혼하면 서로 돕고 이끌어주며 일생동안 함께 가정을 꾸려나가는것을 본분으로, 의무로 여기였다.
고려시기만 보아도 부부는 쉽게 리혼하지 않았으며 부당하게 리혼할 때에는 법적제재까지 받았다. 당시에는 부모와 아무런 합의도 없이 처를 버린자는 벼슬을 박탈하고 제한된 지역에서만 살게 하는 벌을 주었으며 처가 마음대로 집을 뛰쳐나갔을 때에는 엄한 형벌까지 주었다고 한다.
근로인민들의 가정에서는 부부간의 신의가 두텁고 서로 진심으로 위해주고 도와주었으며 남편이 안해를 구박하거나 더우기 내쫓는 일이 드물었다. 안해 역시 남편을 업신여기거나 배반하는 현상은 없었다. 그리고 부부간에 재산을 가지고 다투는 일도 없었다.
우리 민족의 이러한 결혼은 조선봉건왕조시기에도 그대로 계승되였다.
이 시기의 법전에는 남편이나 안해의 가문에서 역적이 나는 경우에는 당사자들이 리혼을 하여도 이상하게 여긴것이 없다고 하였으나 비도덕적인 행위를 한자에게는 죄를 주어야 한다고 밝히였다. 뿐만아니라 그 어떤 경우에도 리혼은 법적으로 허락되지 않았다.
법전에는 또한 《안해를 내쫓는다.》는 문구자체가 없었다. 그만큼 안해를 내쫓는것은 도덕적인 규탄과 사회적비난의 대상으로 되여있었다. 18세기 유 아무개라는 사람은 안해의 《온당치 못한 행동》에 대하여 관청에 소송을 제기했지만 관청에서는 나라법에 《안해를 내쫓는다.》는 조항이 없어 그 리혼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한번 결혼하면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며 일생을 다정하게 살아가는것을 응당한 도덕으로, 의무로 여기였으며 리혼하는 현상에 대하여서는 비도덕적인것으로 간주하였다.
《강강수월래》놀이의 유래
《강강수월래》는 조국을 지켜싸운 조선녀성들의 숭고한 조국애를 륜무형식으로 보여주는 가무놀이이다.
이 놀이는 추석(한가위)날 달밝은 저녁에 수십명의 녀성들이 일정한 장소에 모여 진행한다.
달밝은 저녁 곱게 단장한 녀인들이 놀이터에 모이면 둥글게 원을 지어 늘어선 다음 선창자의 먹임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이때 펼쳐지는 녀성들의 발동작, 손동작 하나하나는 조선녀성들의 아름답고 고상한 민족적정서와 그들의 내면세계를 그대로 보여주는듯 하다.
발을 곱디디며 전주르는가 하면 앞으로 마주잡은 손에 의지하여 몸을 반나마 뒤로 젖히는 춤동작은 흥겨우면서도 활달하며 우아한 우리 나라 녀성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놀이는 조선봉건왕조시기 전라도지방의 남해안 녀성들속에서 왜적을 쳐물리치는 반침략투쟁과정에 창조되였다.
임진조국전쟁(1592-1598년)이 한창 벌어지던 시기 전라도수군통제사였던 리순신장군은 바다가 부근의 녀인들을 동원하여 왜놈들에게 우리의 군사가 많다는것을 보여주도록 하는 한편 그들로 하여금 침략해오는 놈들을 감시하도록 하였다.
그때 녀인들은 수십명씩 떼를 지어 해안가의 곳곳에 불무지를 피워놓고 그 주위를 빙빙 돌면서 주위를 경계하라는 뜻의 《강강수월래》라는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춤을 추군 하였다.
그후 왜적들을 몰아내고 전쟁을 승리에로 결속한 다음에도 남해안지방 녀인들은 덥지도 춥지도 않는 8월 추석날 달밝은 밤이면 바다가에 모여 서로 손을 잡고 빙빙 돌면서 《강강수월래》의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이것이 점차 남해안지방에 퍼져 하나의 전통적인 행사처럼 되여 후세에까지 전해지면서 우리 인민의 고유한 민속놀이로 되였다.
이 노래에서 《강강수월래》라는 말의 뜻은 왜적이 바다를 건너 침략해오니 경각성을 높이자는 의미를 담고있다.
여기에서 《강》은 주위의 원이라는 뜻(호남지방의 방언)이고 《수월래》는 순라에서 온 《술래》로서 주위를 경계한다는 의미를 가지고있다.
그리고 《강》이 두번 겹친것은 주위를 특별히 경계하라는것을 강조한것이고 《수월래》라고 한것은 《술래》가 노래에 맞추어 부르는 과정에 변화된것이다.
이처럼 《강강수월래》놀이는 나라를 지켜 싸운 조선녀성들의 숭고한 애국심에서부터 유래되여 오랜 력사적기간 전하여오는 놀이의 하나이다.
세배
세배는 설명절아침 웃사람이나 이웃어른들에게 례의를 표시하며 새해에도 건강하여 맡은 일에서 성과를 바라며 하는 인사이다.
우리 인민들의 세배풍습은 먼 옛날부터 전하여온다.
세배는 우선 집안의 웃사람순서로 차례차례 머리를 깊숙이 숙여 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마을의 웃어른들을 찾아다니며 하였다.
가까운 이웃사람들, 마을의 나이많은 어른들, 선생들에게도 의례히 세배를 하였다.
집안에서의 세배는 항렬이 낮은 사람이 항렬이 높은 사람에게 하였다.
만일 나이는 어리나 항렬이 높은 사람이 항렬이 낮은 나이많은 사람에게 세배를 하면 그저 답례를 하였다.
항렬도 낮고 나이도 어린 사람이 세배를 하면 답례를 하지 않고 다만 새해에도 건강하여 일을 잘하라는 등의 말을 하면서 맛있는 간식이나 생활과 학습에 필요한 간단한 물건을 기념으로 주기도 하였다.
우리 나라에는 다른 나라에서는 볼수 없는 류다른 세배풍습도 있었다.
그것은 글로 세배를 대신하는 례절이였는데 이것을 지난 시기에는 《세함》풍습이라고 하였다.
세배하러 집에 찾아갔을 때 그 집주인이 없으면 대문간안의 탁자우에 있는 종이에 자기의 이름과 새해 축하의 말을 적어놓고 오는것과 좋은 인사말을 적은 종이쪽지를 어린이에게 시켜 상대방집 대문안에 있는 탁자우에 갖다놓고 오게 하는것이다. 그러면 직접 만나 인사를 나누지 않아도 새해의 세배를 한것으로 되였다.
이와 같은 풍습은 유럽에서 발생하였다고 하는 우편엽서보다 앞선 시기부터 우리 인민들속에 전하여오는것이였다.
세배는 섣달그믐날에도 하였다. 이것을 《묵은 세배》라고 하였다. 그때에는 웃어른들이 있는 집을 찾아가 《과세안녕하십시오.》라고 하면서 인사를 하였다. 과세란 묵은해를 잘 보내라는 뜻이다. 이렇게 묵은 세배를 하였어도 다음날 설명절에 또 새해의 세배를 하였다.
이처럼 웃사람을 존경하고 잘 모시는것을 미덕으로 지켜오는 우리 민족의 미풍량속은 세배풍습에도 잘 반영되여있다.
단정하고 례절바른 인사-조선절
세상에는 나라와 민족마다 자기의 고유한 특성을 가진 여러가지 례법들이 있다.
사람들이 서로 만나거나 헤여질 때 손을 맞잡거나 볼을 비비는 례법, 이마를 맞대거나 코를 비비면서 서로 반가움을 표시하는 례법, 무릎을 맞대거나 발을 만지면서 최대의 례의를 표시하는 례법 등 여러가지가 있다.
그가운데서도 조선절은 고상하고 단정할뿐아니라 위생적으로도 깨끗하며 아름답고 례절바른 인사법이라고 할수 있다.
조선절은 사람들이 서로 만나거나 헤여질 때 허리를 굽히거나 머리를 숙여 존경과 축하, 안녕을 례절로서 표시하게 하였다.
우리 민족은 이러한 인사례법을 먼 옛날부터 지켜왔다.
고대에 벌써 이웃나라인 중국에서는 우리 나라를 가리켜 덕망이 높고 점잖은 사람, 성인과 같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라는 뜻으로 《군자국》이라고 하였으며 우리 나라는 동방례의지국으로 세상에 널리 이름을 떨치였다.
조선절에는 때와 장소, 환경과 조건, 대상에 따라 웃몸을 깊숙이 숙이는 형식, 절반정도 숙이는 형식, 고개만을 숙이는 형식의 세가지 방법이 있다.
조선절은 웃몸의 굽힘정도에 따라 웃사람과 아래사람에 대한 정중성을 나타낸다.
다시말하여 몸을 깊숙이 숙이는것은 인사를 받는 사람에 대한 최대의 정중성을 표시하는것이고 절반정도 몸을 숙이는것은 상대방에 대한 인사의 표시로 되며 고개만 숙이는것은 인사에 대한 답례 또는 가까운 친구들사이의 례절로 된다.
조선절은 웃사람과 아래사람, 대상에 따라 상대방에 대한 례절을 충분히 표시할수 있는 단정하면서도 고상한 인사법이다.
상모
상모는 농악무때 리용하는 모자에 매단 형상수단의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상모라고 하면 농악무에서 흰천이나 종이오리가 길게 달린 모자를 가리키는것으로 리해하고있다.
상모는 모자(전립)나 벙거지에 매달린 긴 천오리, 털, 종이오리와 같이 바람에 날리는 부분만을 가리키는것이다.
원래 상모란 말은 중세기 군사들이 주로 쓰던 모자의 하나인 전립이나 벙거지, 기발, 창들에 이삭형태로 장식한 털을 가리키는것이였다.
이로부터 상모라는 글을 쓸 때에는 《코끼리 상》자에 《털 모》자를 썼는데 그 뜻인즉 《모자우에 장식한 털》 다시말하여 모자에 매여단 털장식이라는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농악무가 발전하고 마을과 마을사이에 규모가 큰 농악무경연이 진행되면서 머리에 쓴 전립에 매단 상모가 바람에 나붓기는 형태를 본따 경쾌한 회전으로 특색을 나타내는 상모놀이가 출현하게 되였다.
농악무때 상모는 흰상모나 털상모로 춤판의 분위기를 더욱 돋구고있으며 더우기 상모가 없는 농악무에 대하여 생각할수 없을 정도로 그 역할이 중시되고있다.
오늘 상모의 독특한 형상적기능으로부터 상모를 단 전립이나 벙거지자체를 상모라고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