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을 올리라
1984년 11월 중순 어느 한 나라의 대표단이 공화국을 방문하였을 때 있은 일이다.
대표단이 도착한 다음날 저녁식사때였다. 상우에는 여러가지 음식들과 함께 우리 나라의 나박김치도 놓여있었다. 뜻밖에 김치를 본 대표단성원들은 고개를 기웃거리며 선뜻 수저를 대려 하지 않았다.
저녁상우에 김치가 오르게 된데는 류다른 사연이 깃들어있었다.
이날 아침 대표단안내사업을 맡은 한 일군을 부르시여 음식차림정형을 료해하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오늘 저녁부터 나박김치를 만들어줄데 대하여 가르치시면서 김치를 내면 그들이 처음 보는 음식이기때문에 선뜻 수저를 대려 하지 않을수 있는데 그때에는 김치를 기름진 음식과 함께 먹으면 입안이 산뜻하여 기분이 상쾌해지고 특히 술을 많이 마신 다음에 먹으면 머리가 거뜬해진다고 이야기해주라고 이르시였다.
일군은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그들에게 김치의 좋은 점에 대하여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이윽고 저녁식사가 끝난 다음 대표단단장은 이렇게 말하였다.
《사실 난 직업상특성으로 많은 나라들을 다니면서 이름이 났다고 하는 료리들을 거의다 맛보았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김치처럼 그렇듯 맛이 독특하면서도 마음까지 즐겁게 해주는 음식은 처음입니다. 정말이지 조선의 김치맛은 매력적입니다. 돌아가면 어떻게 해서든지 꼭 김치를 만들어 먹겠습니다.》
그날 밤 일군으로부터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유쾌하게 웃으시며 이제 그들이 김치담그는 방법을 배워달라고 할수 있소, 그러면 한두번 설명이나 듣고서는 어림도 없다고 뻐기시오, 품을 들여 배워야 김치맛을 제대로 낼수 있다고 값을 올리란 말이요라고 즐겁게 말씀하시였다.
값을 올리라는 그이의 말씀에 일군도 웃음을 터뜨렸다.
이윽하여 그이께서는 내가 왜 손님들에게 김치를 내라고 했는지 아는가, 김치는 우리 민족고유의 음식이다, 그러니 김치를 내면 손님들에게 우리에 대한 자랑을 할수 있다, 지금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김치나 고추장 같은것을 대접하면 마치 나라의 체면이 깎이는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지어 된장냄새나 마늘냄새가 빠다냄새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한심한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례외없이 자기의것을 귀중히 볼줄 모르고 남의것이라면 덮어놓고 숭상하는 눈뜬 소경들이다, 자기의것에 눈이 어두우면 남의것에 눈을 밝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머리속에 사대주의라는 쑥대밖에 자랄것이 없다고 말씀하시였다.
계속하여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자기의것을 자랑하는데는 큰 자랑도 필요하지만 작은 자랑도 중요하다고, 남에게 없는것은 작은것도 크게 자랑할줄 알아야 한다고, 그런 사람이 바로 애국자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정녕 자기 민족이 창조한것이라면 작은것도 크게 보고 귀중히 여길줄 아는 참된 애국자가 될데 대한 그이의 말씀은 그 일군으로 하여금 한없이 숭고한 격정에 휩싸이게 하였다.
강냉이국수의 감칠맛
오늘날 강냉이음식은 그 가공방법이 보다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이 즐겨 먹는 대중음식의 하나로 널리 장려되고있다.
강냉이국수도 그중의 하나이다.
강냉이국수가 우리 민족의 식생활에 등장하기 시작한것은 우리 나라에서 강냉이를 재배하여온 조선봉건왕조 후반기부터였다.
남아메리카가 원산지인 강냉이는 15세기말 아메리카대륙의 발견후 유럽을 비롯한 세계 여러 지역으로 급속히 전파되였다. 그 흐름을 타고 17세기말∼18세기초에 우리 나라에도 강냉이가 들어오게 되였다.
기후풍토가 다른 지역에서 재배되던 강냉이를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게 적응시키려는 조상들의 고심어린 노력에 의하여 강냉이는 짧은 기간에 나라의 여러 지역에서 재배되였으며 그 소출량도 늘어났다.
이처럼 강냉이가 알곡작물로 새롭게 재배되면서부터 우리 인민의 주식물구성에서는 지난 시기에는 볼수 없었던 강냉이를 주원료로 하는 밥, 떡, 국수, 지짐, 범벅 같은 여러가지 강냉이음식들이 출현하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속에서는 너나없이 일상적으로 강냉이국수를 먹어오면서도 그 진맛을 돋구는 비결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있었다.
그저 강냉이국수는 뭐니뭐니해도 고기국물에 국수를 말고 좋은 꾸미를 놓아야 맛이 있다고 생각하여왔다.
인민들이 즐겨 먹는 평범한 음식 하나하나에도 언제나 깊은 관심을 돌려오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선군혁명령도로 현지지도의 길을 끊임없이 이어가시는 속에서도 강냉이국수의 맛을 돋구는 비결에 대하여 하나하나 가르쳐주시였다.
주체96(2007)년 9월말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강냉이국수물은 고기국물로 하지 말고 오이랭국에 양배추김치물을 두어 만들며 꾸미로는 양배추와 고구마잎줄기, 버섯, 풋고추, 미역줄기 같은것을 볶아놓고 삶은 닭알을 반알정도 같이 놓아주면 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그해도 다 저물어가던 12월 중순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또다시 강냉이국수와 관련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일반적으로 국수를 씻을 때 찬물을 쓰는데 강냉이국수를 찬물에 씻으면 국수발이 뻣뻣해진다고, 강냉이국수는 실내온도와 같은 온도의 물에 씻어야 국수발이 매끈매끈해지고 감칠맛이 나게 된다고 하시면서 비결은 바로 거기에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지난 시기 고급한 재료가 꼭 들어가야만 국수맛이 살아난다고 여겨온 강냉이국수가 오늘 어디서나 흔한 재료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그 감칠맛을 돋굴수 있는 맛좋은 국수로 사람들의 호평을 받기까지에는 해박한 식견으로 그 비결까지 세심히 가르쳐주시던 위대한 장군님의 은혜로운 손길이 뜨겁게 깃들어있다.
말복의 다른 의미
흔히 사람들은 말복이라고 하면 여름철의 가장 무더운 삼복기간 다시말하여 초복, 중복, 말복기간의 더위가 끝난다는 의미로만 생각한다.
그러면 말복의 의미가 그런것만이겠는가.
주체85(1996)년 8월 11일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농사문제에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면서 우리 조상들은 농사와 관련한 달력을 만들어 제일 더운 때를 초복, 중복, 말복으로 정하고 거기에 맞게 농사를 지었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말복은 무더위가 끝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농사결속을 잘해야 한다는 의미도 담고있습니다.》
사실 말복은 24절기에서 열세번째에 해당하는 립추와 열네번째에 해당되는 처서사이에 놓이게 되는것으로서 그무렵이면 한해농사의 모든 일이 기본적으로 끝나게 되는 시기이다.
일년내내 땀흘려 지은 곡식을 거두어들이기 위하여 논밭에서의 물빼기, 기계정비 등 가을걷이를 할수 있는 준비작업들이 전부 말복무렵이면 끝나야 한다.
속담에 처서에 비가 오면 독안의 곡식도 줄어든다는 말도 있는것처럼 만일 말복까지 농사결속을 위한 준비작업을 잘하지 못하면 논밭이 젖은채로 있어 기계도 제대로 가동하지 못하여 낟알허실이 생기기마련인것이다.
그러니 말복은 무더위가 끝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농사결속을 잘해야 한다는 의미도 담고있다고 하신 위대한 장군님의 명철한 가르치심은 농사에서 절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우쳐주는 명담중의 명담이 아니겠는가.
새로운 윷놀이방법
주체87(1998)년 1월 말이였다.
이날 인민군부대의 어느 한 중대교양실에 들리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교양실에 비치한 도서들과 문화오락기재들을 보아주시였다.
하모니카와 북을 비롯한 여러가지 대중악기들과 차곡차곡 쌓여있는 윷놀이판들.
《군인들이 윷놀이를 할줄 압니까?》
그이께서 중대정치지도원에게 물으시였다.
《윷놀이를 계획적으로 하고있습니다.》
《아니, 그런게 아니라 윷놀이를 어떻게 합니까?》
《중대에 윷가락과 판이 여섯조 있는데 일요일이나 군중문화오락시간에 분대별로 하고있습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물으시는것은 윷놀이방법이였으나 중대정치지도원의 대답은 또 빗나갔다.
그이께서는 웃으시면서 윷놀이판과 윷가락을 꺼내다가 책상우에 올려놓으라고 이르시였다.
그러시고는 중대정치지도원에게 물으시였다.
《후도할 때 말을 어떻게 씁니까?》
《자리길에서 뒤로 한점 후진시켜놓습니다.》
《두후도할 때는 말을 어떻게 씁니까?》
《말이 놓인 위치에서 두점을 후진시킵니다.》
《왜 윷가락에 점을 두점 찍었습니까?》
《두후도를 표시한것입니다.》
《윷가락에 점을 두점 찍지 않아도 됩니다. 점을 한개씩 찍은 윷가락을 두개 만들면 두후도를 알수 있습니다.》
아주 단순하고 명백하면서도 그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방법이였다.
(두점을 찍은 윷가락 한개와 한점씩 찍은 윷가락 두개!)
이렇게 되뇌이며 중대정치지도원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자기 중대를 찾아주신것만 해도 분에 넘친 일인데 새로운 윷놀이방법까지 배워주시니 그 사랑, 그 영광에 감격하여 어쩔줄을 몰라하였다.
세상에 나라마다 군령수가 있다 하지만 그 어느 나라 군최고령수가 평범한 전사들과 한데 어울려 유희오락방법에 대하여 이처럼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눈 례가 있었던가.
정녕 위대한 장군님은 우리 인민군군인들에게 끝없는 사랑과 영광만을 안겨주신 전사들의 친어버이이시였다.
그후 그이의 은정어린 조치에 의하여 새로운 윷놀이방법이 군대에서뿐아니라 전사회적으로도 널리 보급되게 되였다.
뒤로 미루신 점심식사
선조들이 창조한 전통적인 민족음식을 빠짐없이 찾아내여 적극 장려하는것은 인민들의 식생활을 보다 윤택하고 문명하게 하는데서뿐아니라 사람들에게 민족적긍지와 자부심, 애국애족의 정신을 심어주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어느해 봄날이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점심시간도 쉬지 않으시고 민족음식의 발전과 관련한 문제를 의논하시기 위하여 일군들과 자리를 같이하시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지방마다 사람들의 식생활이 각이한데 그가운데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유명한 음식과 료리들이 많다고 하시면서 우리 나라에 몇가지 료리가 있는지 알고있는가고 물으시였다.
일군들은 서로 얼굴만 마주볼뿐 아무런 대답도 올리지 못하였다.
그러는 일군들을 바라보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웃으시며 몇개의 옛책에 적혀있는것만 하여도 600여가지의 료리만드는 법이 있다고 하는데 거기에 민간에서 전해오는 료리까지 합치면 그 수는 더 많을것이라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조선사람의 구미에 맞는 민족료리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여야 한다고, 민족료리를 발전시키는것은 민족성을 옹호고수하기 위한 중요한 사업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일군들은 점심식사시간까지 바쳐가시며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민족음식을 빠짐없이 찾기 위하여 온갖 심혈을 다 기울이시는 그이의 뜨거운 민족애에 크나큰 감동을 금치 못하였다.
민족음식의 발전과 관련하여 뒤로 미루신 점심식사, 진정 그이께서 바치신 이런 날과 달들이 있어 우리 민족음식들이 하나하나 발굴, 장려되고 인민들의 식생활이 보다 윤택하고 문명하게 된것이 아니던가.
참으로 위대한 장군님은 유구하고 아름다운 민속전통의 발전을 위해 모든것을 다 바치신 민족의 어버이, 절세의 위인이시였다.
좋은 방법
주체57(1968)년 4월 어느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우리 나라 민족음식을 많이 발굴하여 우리 인민들의 식생활에 널리 리용하도록 하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민족음식을 적극 장려할데 대하여 간곡히 가르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우리 식의 민족음식을 발전시키자면 지방별로 우리 인민들이 좋아하는 민족음식을 많이 찾아내야 한다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음식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을 찾아내여 민족음식을 만들게 한 다음 품평회를 조직하여 좋은것은 무엇이며 원자재는 무엇이 얼마나 들고 만들자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를 토론하고 그 내용을 책으로 써놓으면 좋을것이라고 민족음식을 적극 장려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까지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그이의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일군들은 왜서 자신들은 우리 민족의 식생활풍습을 책으로 써놓는 이 좋은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을가 하는 자책감으로 마음을 진정할수 없었다.
이렇게 민족음식발전을 위해 커다란 관심을 돌리신 위대한 장군님의 은정어린 조치에 의하여 그후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알려져있거나 새롭게 발굴한 우수한 민족음식들을 정리하고 편찬한 책들이 수많이 출판되게 되였으며 이것은 발전하는 시대적요구에 맞게 우수한 민족음식문화를 활짝 꽃피우는데 적극 이바지하게 되였다.
평안도와 함경도의 부뚜막
부뚜막은 예로부터 우리 민족이 음식조리와 난방을 동시에 보장할 목적에서 창안리용해온 독특한 부엌시설의 하나이다.
력사자료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서 부뚜막은 고국원왕릉(4세기 중엽)과 약수리벽화무덤(4세기말~5세기초)을 비롯한 고구려무덤벽화들에서 볼수 있는바와 같이 매우 오래전부터 쓰이여왔다.
우리 나라 부뚜막은 일반적으로 웃면에는 가마를 걸기 위한 둥근 구멍이 있는데 앞면의 밑부분에는 불을 때는 아궁이 있다. 그리고 방과 잇닿은 곳에는 아궁에서 땐 불에 의하여 생긴 열이 구들로 들어갈수 있는 괴목이 설치되여있다.
하지만 같은 부뚜막이라도 지방에 따라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실례로 외통집이 기본을 이루고있던 평안도지방의 부뚜막은 가마가 한줄로 걸려있고 그에 따라 부뚜막의 너비는 1m안팎이며 아궁높이 또한 낮다. 그에 비해 량통집이 위주를 차지하고있던 함경도지방의 부뚜막은 4개의 가마가 앞뒤 두줄로 걸려있고 아궁이 상대적으로 높을뿐아니라 부뚜막의 너비도 가정주부들이 편안히 앉아 부엌일을 하는데 편리하게 매우 넓은것이 특징이다.
부뚜막의 이러한 지방적차이는 해당 지역 살림집의 류형과 오랜 세월 굳어져온 사람들의 생활관습 등과 관련되여있다.
우리 인민들의 오랜 생활관습까지 무심히 대하지 않으시고 보살펴주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새로 지은 살림집들에서 부뚜막을 지방적특성에 맞게 만들어주어 인민들이 생활에서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하시였다.
주체68(1979)년 3월 중순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궂은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삼지연읍에 새로 건설한 살림집들을 돌아보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방내부를 구체적으로 돌아보시고 꽃타일을 붙인 부뚜막을 어루만져보시며 부엌을 잘 꾸렸다고 만족해하시였다.
그러시다가 부뚜막에 눈길을 돌리시던 그이께서는 가마는 왜 이렇게 걸었는가고 물으시였다.
그때 부뚜막에는 2개의 늄가마가 나란히 걸려져있었다.
아무리 생각을 굴려보아도 그이의 물으심이 무엇을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짐작이 가지 않아 일군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뿐 대답을 드리지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하였다.
그러는 일군들을 둘러보시며 그이께서는 부엌을 평안도에서처럼 꾸렸다고 하시며 원래 함경도집들에서는 평안도에서처럼 부엌에 가마를 두세개 나란히 거는것이 아니라 두줄로 네댓개씩 건다고 따뜻이 일깨워주시였다.
순간 일군들은 이곳을 많이 다녀보면서도 왜 자기들은 새로 꾸린 살림집의 부엌꾸림새에서 나타난 편향을 제때에 발견할수 없었는지 심각히 자책하면서 엄연한 사실앞에서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어쩌면 그이께서 매 지방 사람들의 기호와 풍습까지 그토록 환히 꿰뚫고계실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번에 새로 지은 살림집들에 가마를 많이 걸어주면 이 고장 인민들이 좋아할것이라고 뜨겁게 말씀하시고 이곳을 떠나시였다.
진정 그이는 매 지방 사람들의 기호와 풍습까지도 속속들이 아시고 우리 인민들의 생활에 자그마한 불편이 있을세라 따뜻이 보살펴주시는 인민의 령도자이시다.
크게 기여한 품앗이와 소겨리
품앗이와 소겨리는 지난날 우리 나라 농민들의 로동생활과 밀접히 련관된 로동조직의 한 형태였다.
품앗이는 품(로력)을 서로 지고 갚는다는 뜻으로서 지방에 따라 《품바꿈》(평안도), 《품들이》(함경도)라고도 불리웠다. 일반적으로 4~15명정도의 규모에서 무어진 품앗이에서는 농사일은 물론 집짓기와 수리, 방아찧기, 물레질을 비롯한 품이 많이 드는 일을 대상으로 서로 로력을 바꾸어쓰군 하였다.
한편 소겨리는 소를 결합한다는 뜻으로서 《소쩨리》(강원도), 《밭갈이제리》(함경도)라고도 하였으며 거기에 망라되는것을 《겨레든다.》, 《소품에 든다.》, 《권에 든다.》고 하였다. 소겨리는 소를 가지고있는 집과 없는 집(모두 5호정도)으로 무어져 일정한 분업을 이루고 작업을 진행하였다.
품앗이와 소겨리는 처지가 같은 빈농민들로 무어졌으므로 공동작업과정에서 개개인의 리해타산을 그리 내세우지 않았으며 로력 혹은 축력이 많거나 적은데 대하여 보상을 받거나 주는 일이 없었다.
이처럼 서로 돕고 화목하게 살아온 우리 인민의 미풍량속을 보여주는 품앗이와 소겨리의 우월성은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에 높이 발양되였다.
주체41(1952)년 5월 중순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포화속을 뚫고 평안남도 대동군 동암면 원화리(오늘의 평안남도 평원군 원화리)를 찾으시였다.
이곳 농민들과 함께 허물없이 밭머리에 앉으시여 농사형편을 일일이 알아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품앗이와 소겨리반을 뭇고 서로 도우면서 농사를 짓고있는 사실을 보고받으시고 좋은 일이라고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이윽고 그이께서는 품앗이와 소겨리를 하여 서로 힘을 합치고 도우면서 농사일을 하는것은 우리 농민들의 전통적인 미풍이라고 하시면서 여러 집이 서로 힘을 합치면 일하기도 헐하고 소와 농기구도 합리적으로 리용할수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품앗이와 소겨리반을 무어 힘을 합쳐서 서로 도우며 일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대로 그후 원화리는 물론 모든 농촌들에서 전시조건과 농민들의 지향에 맞게 품앗이와 소겨리반이 널리 조직운영되게 되였다.
참으로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미풍량속을 시대의 요구와 인민들의 생활감정에 맞게 계승발전시키시려는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민족애에 의하여 전화의 나날 우리 나라 농촌들에서 장려된 미풍량속인 품앗이와 소겨리는 당시 전시농업생산에서 로력과 축력, 농기구 등의 심한 부족을 타개하고 농민들속에서 서로 돕는 기풍이 높이 발휘되게 하였으며 그것은 전후 협동경리에로의 농민들의 지향을 높여주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희한한 일
주체81(1992)년 9월 어느날 개성시에서 살고있는 한 늙은이가 시의 책임일군을 찾아왔다.
일군을 만난 자리에서 그는 자기는 왕건가문의 후손이라고 소개하고나서 가지고 온 왕씨족보를 조심히 내놓았다.
족보는 한가문의 래력 다시말하여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대대로 내려오는 자기 집안의 혈통관계를 체계적으로 기록해놓은 책으로서 일명 계보라고도 하였다. 족보에는 일반적으로 시조로부터 같은 항렬에 속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자, 호, 시호 등 여러가지 별명과 생년월일, 사망날자, 간단한 경력, 벼슬이름은 물론 무덤위치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적혀있다. 그러므로 족보만 보아도 그 집안의 래력과 경력에 대하여 인차 알아볼수 있다.
지난 시기 일반사람들의 족보는 해당 문중에서, 왕족들의 족보는 종부시라고 하는 중앙관청에서 맡아 작성하였다.
족보를 내놓는 너무나도 놀라운 사실앞에서 일군은 아연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잠시후 늙은이는 오랜 세월 비밀로 간직해온 사연을 숨김없이 다 털어놓았다.
1392년 고려왕조를 뒤집어엎고 왕위에 오른 리성계의 왕씨가문에 대한 피비린내나는 살륙만행을 피하여 왕건가문의 족보를 가진 왕족이 구사일생으로 송도장안을 탈출하였다. 그때로부터 그들은 변성명을 하고 깊은 산골에 숨어살면서 가문의 족보만은 대를 이어가며 목숨으로 지켜왔다. 그사이 여러차례 족보를 보충하여 간행하기도 하였다. 늙은이가 내놓은 족보도 1798년에 처음으로 편찬간행하였다가 1850년과 1881년에 다시 간행하였으며 1918년에 전면적으로 수정보충하여 만든것이였다.
그러던 그들은 주체81(1992)년 5월초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 고령의 몸으로 왕건왕릉을 찾으시고 우리 나라에서 첫 통일국가를 세운 고려태조 왕건의 릉을 크게 잘 꾸려주자고 하셨다는 감격적인 소식에 접하게 되였다.
며칠밤을 눈물로 지새우던 그들은 마침내 수백년을 고이 간직해내려오던 왕씨가문족보와 왕의 옥새를 위대한 수령님께 삼가 올리기로 결심하였던것이다.
이 사실을 보고받으신 수령님께서는 시대가 좋으니 참으로 희한한 일이 다 있다고 하시며 그들이 올린 왕씨족보와 왕의 옥새를 보아주시였다.
개성왕씨족보를 한장한장 주의깊게 보아주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족보에 있는 왕건의 초상을 보시고는 그가 아주 잘 생겼다고 하시며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그러시고는 개성왕씨족보와 왕건이 쓰던 도장을 잘 보관하도록 하시고 그것을 내놓은 왕건의 후손들에게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개성왕씨족보의 출현, 참으로 그것은 민족의 자랑스러운 력사와 문화유산을 더없이 귀중히 여기시고 민족사에 길이 빛내여나가도록 대해같은 사랑을 베풀어주신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뜨거운 민족애와 숭고한 덕망이 낳은 전설같은 이야기였다.
돼지 1마리 대접
1980년대 중엽 공화국에 체류중이던 어느 한 나라의 대표단이 점심식사를 하려고 식탁에 마주앉았다.
그러고나서 차려진 음식들에 시선을 주던 대표단성원들은 대번에 눈이 둥그래졌다. 식탁에는 그 나라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는 돼지발쪽료리가 올라있었던것이다.
대표단단장은 곁에 앉은 우리 나라 주재 자기 나라 대사에게 어떻게 돼지발쪽을 먹는가고 의문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러는 단장에게 대사는 일장 연설을 들이댔다.
사실은 나도 조선에 와서 돼지발쪽료리를 처음 보았을 때 속으로 흉을 보았다. 그러나 한번 맛을 보고 돼지발쪽료리에 홀딱 반하고말았다. 상점에 가서 바빠도 기다렸다가 돼지발쪽을 꼭 사오군 한다. 우리 집사람은 나보다도 돼지발쪽료리를 더 좋아한다, 녀자들이 돼지발쪽을 먹으면 남자들보다 좋은 점이 더 많다. 그런데 우리 사람들은 그 좋은 돼지발쪽을 천한것으로 여기고있다.
대사의 이야기에 부쩍 구미가 동한 단장은 발쪽 하나를 집어들고 깨소금에 찍어 맛나게 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우리 일군이 단장에게 귀띔했다.
《당신들에게 돼지발쪽료리를 대접하는건 단순히 이 료리가 맛이 좋아서만이 아니지요.》
《그건 무슨 뜻인지…》
《돼지에게 발쪽이 몇개 있는가요?》
《가만… 그러니 발쪽이 4개면 돼지가 1마리?》
《그럼요. 발쪽이 4개면 돼지가 1마리지요.》
《그러니 내가 돼지 1마리를 대접받은셈이군요.》
계속하여 단장은 앞에 놓인 돼지발쪽료리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을 이었다.
《난 이 크지 않은 료리를 통해 제 집에 찾아온 손님을 성의껏 대접하려는 이 나라 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씨와 함께 남이야 뭐라고 하든 제 식대로 살아가는 조선인민의 강한 자주정신을 읽어보게 됩니다. 아마 이처럼 훌륭한 민족은 세상에 조선민족밖에 없을것입니다.》
그날 저녁이였다.
낮에 있은 사연을 보고받으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그만하면 대표단의 식사조직이 잘되였다고 하시며 다른 나라 사람들에 대한 대접도 우리 식으로 하여야 한다고, 우리 식대로 우리 민족고유의 음식으로 다른 나라 사람들을 대접하면 민족의 우수성을 살려나가는 측면에서도 좋고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을 보여주는데서도 좋다고 말씀하시였다.
참으로 돼지 1마리 대접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도 모든 문제를 오직 우리 식대로, 우리 민족의 리익의 견지에서 풀어나가신 위대한 장군님의 높은 뜻과 숭고한 자주정신을 더 잘 알수 있다.
농악기의 행처
주체46(1957)년 8월말 어느날 아침이였다.
당시 국가공업 및 농업전람관의 처녀해설원은 출근하자부터 울상이 되여 발을 동동 굴렀다.
어제 오후까지만 해도 전시대에 놓여있던 농악기들이 간밤에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던것이다.
밤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도무지 행처를 알수 없었다.
이때 전람관의 책임일군이 그에게로 다가와 자초지종을 이야기해주었다.
며칠전 안악군 북성농업협동조합(오늘의 오국협동농장) 조합원들이 햇쌀을 지고 위대한 수령님을 찾아뵙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이 가지고 온 벼의 품종도 알아보시고 조합살림살이형편이며 유가족들의 생활에 이르기까지 세심히 료해하시였다.
그러시고는 평양에 올라온김에 견학도 하고 내려갈 때에는 무사히 집까지 가도록 조직사업도 친히 해주시였다.
무엇인가 못다 주신것이 있으신듯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농민대표들을 둘러보시며 생각에 잠기시였다.
이윽고 처녀민청위원장에게로 눈길을 주시던 수령님께서는 이 동무들에게 청년들이 즐겨하는 농악기 두조를 선물로 보내주자고 말씀하시였다.
이때 한 일군이 지금 당장 농악기를 만들어놓은것이 없다고 조용히 말씀올렸다.
그러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지금 만들어놓은것이 없으면 공업 및 농업전람관에 전시한것이라도 주는것이 좋겠다고 하시며 그 일군에게 과업을 주시였다.
사연인즉 그렇게 되였던것이다.
이렇게 되여 국가전람관에 전시되였던 농악기는 안악땅으로 옮겨가게 되였다.
하나의 사실을 통해서도
주체65(1976)년 11월 1일이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한 녀성일군에게 사업방법과 사업작풍을 개선할데 대하여 가르쳐주시다가 문득 동무는 늘 웃고있으니 참 인상이 좋다고, 사람은 언제나 웃는것이 좋다고, 더우기 군중과 사업하는 일군들은 늘 인상이 좋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물으시였다.
《조선말에는 웃음을 표현하는 말이 몇가지나 됩니까.》
《저, 잘 모르겠습니다.》
그이께서는 그러지 말고 한번 실례를 들어 말해보라고 이르시였다.
일군은 곰곰히 생각을 더듬으며 《하하》, 《허허》, 《호호》 하고 꼽아내려가다가 제풀에 웃고말았다.
《이번에는 다른것을 한가지 물읍시다.
에스키모인들이 주로 어디서 살고있습니까?》
눈이 쌓여있는 북빙양일대에서 살고있다고 말씀드리자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긍정해주시며 그 사람들의 말에 눈과 관련된 말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고 다시 물으시고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으시고 말씀하시였다.
에스키모말에는 하늘에서 내리기 시작하는 눈, 방금 내린 눈, 내린지 오래된 눈, 녹기 시작하는 눈 등 눈이 내린 시간에 따라 달리 부르는 말이 여러가지가 된다고 한다. 에스키모말에 왜 눈과 관련된 말이 많은것 같은가? …
《에스키모사람들의 생활이 눈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때문인것 같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옳다고 하시면서 말씀을 이으시였다.
사람들의 말은 생활이 만들어낸다. 언어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우리 말에는 웃음과 관련된 표현이 수백개나 된다고 한다. 우리 말에 울음과 관련된 말보다 웃음과 관련된 말이 많다는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아마도 조선말처럼 웃음과 관련된 말이 많은것은 세상에 없을것이다. …
그이께서는 유쾌히 웃으시며 말씀을 계속하시였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이것은 우리 인민들이 예로부터 늘 웃음속에 살아왔다는것, 다시말해서 우리 인민들이 대단히 락천적인 인민이라는것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이 하나의 사실을 통해서도 우리 민족의 우수성에 대하여 더욱 똑똑히 알고 그것을 더욱 빛내여나가야 할것입니다.
《알았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드리면서 일군은 사람들이 별치않게 생각하는 웃음을 표현하는 말 몇마디를 통해서도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찾아내시는 장군님의 비범한 예지와 뜨거운 민족애에 경건한 심정을 금할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