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민족의 향기 만방에 넘쳐나다

 

1

 

가장 주되는 지표

 

주체89(2000)년 6월 중순 어느날이였다.

이날 일군들과 자리를 같이하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비단생산과 관련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우리의 경공업이 틀어쥐고나가야 할 가장 주되는 지표의 하나는 비단이라고 하시면서 자신께서는 어떻게 하면 비단천을 많이 생산하여 우리 인민들에게 비단옷을 해입히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절절히 말씀하시였다.

돌이켜보면 우리 민족은 고대로부터 비단을 짜기 시작하였으며 세나라시기에는 견, 라, 사, 초, 금, 릉 등의 여러가지 비단을 생산하였다. 비단짜는 기술이 매우 높아 당시 고구려를 비롯한 세나라의 비단짜는 기술자들은 일본에 건너가 그 나라의 비단생산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명주실로 짠 우리 나라의 비단은 다른 천들에 비하여 가볍고 빛갈이 우아하며 손맛이 부드러워 일찍부터 다른 나라들에 대대적으로 수출되고 그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조선사람들은 예로부터 비단을 좋아하였으며 비단옷은 행복한 생활의 표징으로 되여왔다.

우리 나라는 비단에서는 좌상이나 같다. 세계력사에 《비단길》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비단무역로도 그 동쪽끝을 우리 나라에 두고있다.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는 조선비단은 그 질이 또한 최상의 수준이였는데 우아한 광택과 울림, 보온성과 접촉감각, 흡수성이 좋은것으로 하여 널리 알려져있었고 위생학적으로도 우월하였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강행군시기 나라의 긴장한 경제형편은 비단천생산에도 영향을 미치여 결혼식을 하는 청년들에게 비단옷감을 제대로 공급해주지 못하고있었다.

이것을 두고 누구보다도 가슴아파하신분은 위대한 장군님이시였다.

그이께서는 비단과 같은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직물생산을 늘일데 대하여 강조하시면서 앞으로 결혼식을 하는 청년들과 생일 60돐, 70돐을 맞는 늙은이들에게는 다 비단옷감과 비단이불감을 공급해주어야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계속하여 그이께서는 나라와 민족을 부흥시키는데서 민족적전통을 고수하고 잘 살려나가는것이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우리 녀성들이 치마저고리를 늘 입도록 장려하는것과 함께 비단을 비롯한 치마저고리감을 많이 생산공급하여야 한다고 거듭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이처럼 비단을 우리 민족의 자랑으로 내세워주시려는 위대한 장군님의 크나큰 은정속에 그후 비단은 우리의 경공업이 틀어쥐고나가야 할 가장 주되는 지표의 하나로서 많이 생산되게 되였다.

오늘 우리 나라의 상점과 백화점에서 흔히 볼수 있는 우리 민족의 자랑인 비단천들마다에는 여러가지 무늬와 고운 색갈의 질좋은 천들이 우리 인민들에게 더 많이 차례지게 하시려고 온갖 심혈을 다 기울이신 그이의 뜨거운 손길이 어리여있다.

2

 

옷을 하나 지어도

 

오늘 공화국의 그 어디를 가보아도 시대적미감과 민족적정서, 조선녀성의 체질과 기호에 맞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조선옷과 간편하면서도 산뜻하고 보기 좋은 여러가지 형태의 고상한 옷차림을 한 녀성들을 볼수 있다.

그들의 이러한 옷차림새에도 녀성들을 나라의 꽃, 가정의 꽃으로 더 밝고 아름답게 내세우기 위해 기울이신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의 심혈과 세심한 손길이 깃들어있다.

해방직후 평양역에서 멀지 않은 중구 동흥리(오늘의 평양시 중구역 동흥동)에는 류달리 유리창이 많이 달린 집이 한채 있었는데 그 집으로 말하면 해방전부터 몇명의 녀성들이 모여 손님들이 가지고 온 천으로 옷을 지어주던 옷점이였다.

김정숙어머님께서 그 옷점을 찾으신것은 주체35(1946)년 2월 하순 어느날이였다.

이날 어머님께서는 서울에서 온 려운형선생의 두 딸에게 교복을 해입히시려고 그들과 함께 이곳에 들리시였던것이다.

재단사는 너무도 뜻밖에 항일의 녀장군을 뵈옵게 된 감격으로 설레이는 마음을 다잡으며 녀학생들의 몸을 재기 시작하였다.

이때 곁에서 그 모습을 세심히 살펴보시던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치마길이를 길게 재는것을 보시고 치마를 지내 길게 하면 활동하기에도 불편하고 천도 랑비된다고 하시며 무릎에서 3행지정도 내려가게 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뿐만아니라 치마의 주름너비를 직접 잡아보시며 주름너비가 너무 좁거나 지내 넓어도 보기 싫다고 하시면서 팔소매도 너무 넓게 하지 말데 대하여 일일이 가르쳐주시였다.

이뿐이 아니였다.

주체35(1946)년 3월 어느날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새로 만든 녀자양복을 보아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몸소 양복을 입으시고 팔을 앞으로 들어보시고는 소매가 꼬이고 뒤켠이 당겨지는 결함을 지적하시면서 이것은 등의 너비치수가 작아졌기때문이라고 일깨워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자신께서 재봉대에서 일할 때 일본사람들의 재단방법으로 만든 양복을 입은것을 본 일이 있었는데 이런 결함이 있더라고, 그래서 조선사람의 몸매에 맞는 재단방법을 연구해서 옷을 지었더니 대원들의 몸에 잘 맞게 할수 있었다고 감회깊이 말씀하시였다.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우리 조선녀성들은 몸매가 곱기때문에 그에 맞게 등너비와 등길이의 치수를 더 주어야 한다고 가르쳐주시면서 우리 나라가 지난날 일제놈들한테 강점되다나니 우리 사람들은 양복을 지어보지도 못했고 또 조선사람의 몸매에 맞는 양복재단방법을 만들어내지 못하여 일본사람들의 식대로 할수밖에 없었다고, 해방후에는 다른 나라에서 옷을 짓던 사람들이 들어와서 그 나라 식을 끌어들이고있다고 하시면서 말씀을 이으시였다.

우리 인민의 옷차림새를 맵시있고 문명하게 하기 위해서는 남의 식을 따를것이 아니라 조선사람의 몸매에 맞는 새로운 옷설계와 재단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우리가 만드는 옷은 우리 인민이 입는 옷이므로 어디까지나 조선사람들의 몸매에 맞고 로동과 생활에 편리하며 민족적정서에 맞아야 한다. 그래야 새 조선의 피복문화를 꽃피울수 있고 인민들의 옷차림새를 훌륭하게 할수 있다. …

그해 6월 어느날에도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새로 지은 조선옷견본을 보아주시고 옷의 설계와 재단에서 지난날의 낡은것을 그대로 답습한 부족점들을 바로잡아주시면서 우리는 옷을 하나 지어도 새 나라, 새 사회의 주인으로 된 근로하는 인민을 위해 만든다는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그러시면서 녀성들도 앞으로 남자들과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사회에 많이 나와 일하게 되므로 녀성들의 옷은 보기 좋으면서도 일하기에 편리하고 활동하기 좋게 만들어야 한다고 거듭 말씀하시였다.

이렇듯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새 민주조선건설시기 옷을 하나 지어도 시대의 요구와 조선녀성의 체질과 기호, 민족적정서에 맞게 짓도록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정녕 그이는 다심한 손길로 우리 녀성들의 옷차림새에도 시대적요구와 민족성이 깃들도록 손잡아 이끌어주신 조선녀성들의 자애로운 스승이시였다.

3

 

착상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평양에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성대히 개막되였다. 개막의식배경대가 펼쳐지는 속에 고구려무사복을 떨쳐입은 청년들이 손에 희귀한 뿔나팔을 들고 축전장에 등장하였다.

갑자기 우렁차고도 특유한 뿔나팔소리가 장내를 진감하였다. 축전장에 감격과 환희의 선풍이 일어번졌다.

어떻게 되여 축전장에 고구려의 뿔나팔소리가 울려퍼지게 되였는가.

축전준비가 한창이던 주체77(1988)년 6월초 어느날이였다.

이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개페막행사도안을 보아주시였다.

전시된 행사도안들을 유심히 살펴보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어느 한 도안앞에서 걸음을 멈추시였다.

축전개막 신호수의상과 소도구도안이였다.

보통양복에 금관악기를 손에 들게 되여있는 신호수도안을 주의깊게 보아주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축전개막신호를 할 때에는 축전참가자들의 시선이 신호수들에게 다 집중되기때문에 그들에게 어떤 옷을 입히고 신호를 어떻게 하는가 하는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자신의 생각에는 신호수들에게 고구려무사들이 입던 의상 같은것을 입히는것이 좋겠다고 하시며 그것도 보통 무사복이 아니라 고구려장군들이 입던 갑옷형식의 우아하고도 요란한 의상을 만들어 입히면 아주 멋이 있을것이라고 가르쳐주시였다. 계속하여 나팔도 양악기로 하지 말고 북을 치게 한다든가 뿔나팔을 들고 나와 불게 하는것이 어떤가고 일군들의 의향을 물으시였다.

고구려장군복과 뿔나팔!

생각할수록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착상이였다.

고구려장군복으로 말하면 나라를 지켜 용감히 싸운 고구려장수들의 위풍과 용맹을 상징하는 무사옷이였다. 바지와 저고리,  무릎치마와 어깨받치개, 도포로 이루어진 갑옷부분과 신발, 토시, 장갑, 투구는 그 모양과 장식이 볼만 하였다. 거기에 1 200여개의 갑옷알은 장군복의 품위를 돋구는데서 없어서는 안될 장식품이였다. 이러한 장군복은 보기만 해도 위풍있고 요란스러웠다. 뿔나팔 역시 고구려의 높은 공예술을 보여주는 민족악기의 하나로서 그 소리가 매우 부드럽고 우아하였다.

이로부터 한달 남짓한 어느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고구려장군복과 뿔나팔을 보아주시였다.

고구려장군복을 입고있는 신호수곁으로 다가가신 그이께서는 의상을 만져보시고 보기에는 아주 무거워보이는데 가볍다고 하시며 웃으시였다.

그이의 말씀에 곁에 있던 한 일군이 갑옷이 쇠로 되여있는데 무대의상인것만큼 질감을 살리면서도 가볍게 하였다고 말씀드리였다.

그러자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렇게 하는것이 옳다고 긍정해주시고나서 뿔나팔이 제대로 소리가 나는가고 물으시였다.

은근하게 울리는 뿔나팔소리를 듣고나신 그이께서는 소리가 특색이 있고 아주 듣기 좋다고 하시며 의상과 뿔나팔을 다 고증하였는가고 물으시고는 해당 부문의 전문가들을 통하여 정확히 고증되였다는 대답을 들으시고서야 마음을 놓으시였다.

이렇듯 우리 민족이 창조한 우수한 전통을 귀중히 여기시고 그것을 민족의 자랑으로 적극 내세워주시려는 위대한 장군님의 착상에 의하여 한갖 유물로만 전해내려오던 고구려장군복과 뿔나팔은 축전개막식장에 출현하여 참가자들에게 지울수 없는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였다.

4

 

소문을 내야 한다

 

나라 전체 인민이 새해명절분위기에 휩싸여 명절을 즐기고있던 어느해 양력설날 옥류관을 찾으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지방마다 특색이 있고 종류가 다양한 우리 나라 김치에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우리 나라의 김치는 지방의 기후조건과 남새의 종류에 따라 여러가지로 발전하였다고 하시면서 기후가 찬 북쪽지방에서는 간과 양념을 적게 넣고 신선한 맛을 살리는 방향에서 김치를 담그었고 날씨가 더운 남쪽지방에서는 짜고 맵게 하면서 양념을 많이 넣었다고 가르쳐주시였다.

계속하여 그이께서는 바다를 끼고있는 지방에서는 남새와 물고기를 배합해서 만드는 김치가 발전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함경도지방에서 많이 만드는 식혜라고 하시였다.

식혜는 여러가지 생신한 물고기에 무우, 조밥, 길금가루, 양념을 두고 삭혀낸 음식으로서 새큼한 맛과 단맛이 잘 어울려 누구나 좋아하는 부식물의 하나로 손꼽히였다. 함경도지방에서는 예로부터 집집마다 명태, 가재미, 도루메기, 낙지 등 여러가지 물고기로 식혜를 담그어놓고 밥반찬으로 하거나 손님상에 놓아주는것을 자랑으로 여겨왔다.

그이께서는 이렇게 지방별에 따르는 우리 나라의 김치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김치를 잘 만들어 세상에 크게 소문을 내야 한다고 하시였다.

지방별에 따르는 우리 나라 김치의 특성에 대하여 알기 쉽게 가르쳐주시는 그이를 우러르며 일군들은 탄복을 금치 못하였다.

진정 김치를 잘 만들어 세상에 크게 소문을 내야 한다는 그이의 말씀에는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속에서 겨울철 반량식일뿐아니라 일등료리인 김치를 더욱 발전시켜 민족의 자랑으로 내세워주시려는 위대한 장군님의 숭고한 뜻이 담겨져있다.

오늘 우리 나라에서는 김치가공방법이 급속히 발전하고있으며 세계의 많은 나라들에서 조선김치에 대한 인기와 수요가 날로 높아가고있다.

5

 

일상음식

 

주체50(1961)년 5월 중순 어느날에 있은 이야기이다.

이날 룡성도로확장공사에 참가하여 오전작업을 마친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은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을 한자리에 모시고 점심식사를 하게 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땀을 흘리며 일하고나서 여럿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니 별맛이라고 하시면서 학생들에게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식생활풍습에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그중에서도 우리 민족이 일상적으로 먹는 밥과 국수, 김치에 대한 이야기는 참으로 감명깊었다.

그이께서는 먼저 우리 민족의 주식인 밥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해주시였다.

조선사람은 빵보다 밥을 더 좋아하며 밥을 먹어야 끼니를 에운것으로 여긴다고 하시면서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밥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 인민의 풍습은 오랜 력사적과정을 거쳐 굳어진 전통적인 식생활풍습이라고, 고려때에 밥을 《박거》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것으로 보면 밥의 유래가 퍽 오래다고 볼수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우리 선조들이 인류력사발전의 매우 이른시기부터 재배하여온 여러가지 알곡유물들이 여러 유적들에서 드러난 사실은 밥을 주식으로 하여온 력사가 수천년이나 된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학생들모두가 그이의 해박한 지식에 심취되여있는데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국수는 우리 인민이 즐겨 먹는 음식의 하나이라고, 우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잔치상이나 돌상에 반드시 국수를 곁들이는것을 풍습으로 삼아왔다고 하시면서 말씀을 이어나가시였다.

지금은 국수가 점차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의 하나로 되고있지만 옛날에는 별식의 하나였다. 우리 나라의 어느 지방에서나 국수를 눌러먹는데 그 종류가 다양하다. 우리 나라에서 제일 이름난 국수는 평양랭면이다. 평양랭면은 메밀가루를 원료로 한 국수이다. 평양랭면은 오리가 질기고 국물이 시원하고 달며 생큼한 맛이 잘 어울리여 이채를 띠고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가르쳐주신것처럼 국수는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즐겨 먹어온 음식의 하나로서 특히 평양랭면은 그 맛이 하도 좋아 널리 소문이 났다. 하기에 조선봉건왕조시기의 문헌인 《동국세시기》에서는 평양랭면에 대하여 《메밀국수를 무우김치와 배추김치에 말고 돼지고기를 넣은것을 평양랭면이라고 하는데 관서지방(우리 나라 서북지방)의 국수가 제일 좋다.》고 하였던것이다.

평양사람들은 손님이 오면 다른 음식은 대접하지 못해도 랭면만은 잊지 않고 대접하는것을 하나의 풍습으로 전해왔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김치에 대해서도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김치는 우리 나라 부식물가운데서 가장 특색있는 음식의 하나라고 하시며 기름진 고기를 먹고도 김치로 입가심을 하며 맛좋은 떡을 먹고도 김치국물을 마시는것을 좋아한 우리 인민의 풍습에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주식물에서 밥이 우리 민족음식을 대표한다면 김치는 부식물에서 우리 민족음식의 특색을 보여주는 손꼽히는 음식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일상음식과 식생활풍습에 대한 그이의 말씀을 들으며 학생들은 민족음식 하나하나에 대해서까지 해박한 식견을 가지고계실뿐아니라 민족의 자랑으로 내세워주시려는 위대한 장군님의 숭고한 민족애를 다시금 가슴뜨겁게 느낄수 있었다.

6

 

더 좋아하신것

 

주체63(1974)년 6월 어느날 저녁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드실 저녁상에는 끼마다 번지지 않고 오르는 고추장과 무우장절임이 놓여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접대원의 마음은 다른 음식들도 있는데 하필이면 하는 생각을 털어버릴수 없었다.

잠시후 소박한 저녁상을 물리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그의 이러한 심정을 헤아리신듯 이윽고 생각에 잠겨계시다가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하시였다.

고추장과 장절임은 오래전부터 우리 인민들이 즐겨 만들어 먹는 민족식품이다. 우리 인민들은 가을에 겨울김장을 하면서 무우를 여러가지 모양으로 썰어 말리웠다가 깨끗이 씻어 양념을 하여 겨울과 봄, 여름에 반찬이 부족할 때 밑반찬으로 리용하여왔다. 말린 무우속에는 사람들의 건강에 필요한 여러가지 성분들이 많이 포함되여있고 그 맛도 또한 좋다. …

하지만 그때까지도 어버이수령님의 깊은 심중을 헤아릴길 없었던 접대원처녀는 누구나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있는 때에 그이의 식탁에만 검소한 식찬이 올라야 할 리유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는 그를 바라보시며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번에는 장에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고추장과 간장, 된장도 조선의 자랑이라고,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콩에 많은 단백질을 그대로 먹은것이 아니라 삶아서 발효시켜 간장, 된장, 고추장으로 만들어 먹었다고 하시며 이것만 보아도 우리 조상들이 예로부터 문명하고 슬기로운 인민이였다는것을 잘 알수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는 우리 민족고유의 음식인 고추장과 무우장절임을 그 어떤 다른 음식보다 더 좋아하며 그것을 매일 먹으면서 우리 인민의 슬기와 민족적전통에 대하여 긍지높이 생각하군 합니다, 사회주의가 건설되고 생활이 향상되였다 하여 고유한 민족적인것을 멀리하면 안됩니다, 나는 언제나 인민들과 같이 수수한 민족음식 한두가지면 만족합니다라고 마디마디에 힘을 주어 말씀을 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말씀을 받아안는 순간 무엇인가 그의 흉벽을 쿵- 하고 울려주는것이 있었다.

여직껏 한없이 검박하고 소탈한 인민적품성으로만 리해해왔던 어버이수령님의 검소한 식탁이 그리고 민족료리에 대한 그토록 깊으신 조예가 다름아닌 우리 민족에 대한 가장 열렬한 사랑과 긍지와 잇닿아있고 민족의 전통을 꿋꿋이 이어나가시려는 숭고한 의지의 발현인줄 비로소 가슴저리게 깨달았던것이다.

7

 

한번에 맛볼수 있다

 

신선로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음식이며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이름난 료리이다.

원래 신선로란 음식을 끓여먹는 독특한 구조를 가진 그릇을 가리키는 이름이던것이 점차 료리이름으로 바뀌여진것이다.

신선로료리에 고급하고 진귀한 음식감이 많이 들어가고 가공방법이 독특할뿐아니라 영양가가 높고 특별히 맛이 좋아 예로부터 사람들은 신선로료리를 《열구자탕》, 《탕구자》, 《구자탕》이라고도 하였다. 다시말하여 그 맛이 하도 좋아 입맛을 더해주는 탕이라는것이다.

신선로의 유래와 관련하여 《해동죽지》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있다.

15~16세기초에 시문에 능하고 음양학에 정통하였다는 정희량은 부패무능한 연산군의 썩은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 살았다. 그에게는 기묘하게 생긴 화로가 있었는데 그는 산짐승을 잡거나 산나물을 뜯어서는 그 화로에 넣고 끓여먹군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가 쓰던 화로를 신선의 풍이 있는 로인이 쓰던 화로라는 뜻에서 《신선로》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서도 신선로가 우리 나라에서 만들어져 오래전부터 리용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주체66(1977)년 2월에 있은 일이다.

어느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옥류관에서 만든 신선로를 보아주시였다.

만면에 환한 웃음을 담으시고 신선로를 보아주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옥류관동무들의 료리솜씨가 대단하다고 하시며 신선로는 이렇게 차림에서 색갈을 살리고 전들과 고기가 골고루 섞여야 맛이 있다고 가르쳐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우리 나라 민족료리의 하나인 신선로는 세계 그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고, 정말 신선로와 같은 우리 나라 민족료리는 이를데 없이 훌륭하다고 긍지에 넘친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그이의 말씀을 받아안으며 일군들은 후더워오르는 가슴을 진정할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10여년전에 벌써 옥류관에서 신선로를 만들어 인민들에게 봉사할데 대하여 가르쳐주신 위대한 장군님이시였다.

신선로는 맛도 있고 영양가도 높다고, 신선로에는 고기, 물고기, 남새, 산나물을 비롯하여 수십가지의 음식감이 들어가며 단백질, 기름, 비타민, 광물질, 탄수화물 등 영양소들이 골고루 들어있어 카로리도 높다고 그 조성과 성분에 대해서도 가르쳐주시고 신선로를 낼 때에는 매 사람들에게 숟가락과 빈 접시를 같이 내야 한다고 봉사방법에 대하여서도 일일이 깨우쳐주신 위대한 장군님.

우리 민족의 슬기와 재능이 어려있는 신선로를 민족의 자랑으로 내세우시려고 늘 마음써오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선군혁명령도의 나날에도 여러차례에 걸쳐 신선로와 관련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주체93(2004)년 6월 민속음식품평회장을 찾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신선로에 각별한 관심을 돌리시면서 신선로료리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음식이며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유명한 료리라고, 다른 나라에도 신선로 비슷한 료리가 있기는 하지만 해삼과 새우와 같은 좋은 해산물이 들어간 우리 나라의 신선로와는 대비도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였다.

이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신선로료리는 옥류관에서 만들어내놓은것을 표준으로 하여 발전시켜나가며 신선로료리에 들어가는 원자재기준을 바로 정할데 대한 문제, 집기류의 재질문제를 비롯하여 신선로료리의 고유한 특색을 살려나가는데서 나서는 방향과 방도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이뿐이 아니다.

주체96(2007)년 5월 어느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또다시 신선로는 조선민족료리의 우수성을 대표할수 있는 명료리라고, 신선로료리는 여러가지 음식감들을 독특한 방법으로 가공하여 만든 료리로서 그 맛이 특별히 좋고 영양가가 높을뿐아니라 그릇까지 화려하여 사람들의 구미를 돋구며 조선음식의 진미를 한번에 맛볼수 있게 하는 유명한 민족료리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조선음식의 진미를 한번에 맛볼수 있는 유명한 민족료리 신선로, 바로 여기에는 민족음식을 귀중히 여기시고 그의 발전에 크나큰 심혈을 기울이신 위대한 장군님의 숭고한 민족애가 뜨겁게 깃들어있다.

오늘도 신선로는 조선의 특산, 명료리로 세상사람들의 부러움과 찬탄을 자아내고있다.

8

 

우리 음식이 제일

 

오랜 력사적과정을 통하여 발전풍부화되여온 우리 민족음식은 맛과 냄새, 색갈이 독특한것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있다.

주체74(1985)년 3월 어느날 위대한 장군님을 한자리에 모시고 저녁식사를 나누게 된 일군들은 기쁨에 휩싸여있었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별로 차린것은 없지만 어서 많이들 들라고 권하시고나서 일군들을 둘러보시며 오늘은 조선음식에 대하여 이야기하겠다고 다정히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말씀은 조선음식의 맛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였다.

조선음식은 기름기가 많지 않아서 느끼하지도 않고 또 슴슴하지도 않다고 하시면서 그이께서는 조선음식은 생신하고 감칠맛이 있으며 먹음직하고 향기로와 사람들의 구미를 당기게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조선음식이 특별히 맛이 좋은것은 무엇보다도 음식감들이 좋기때문이라고, 우리 나라는 사계절이 명확하고 비가 알맞춤하게 오며 기온이 따뜻하고 땅이 기름져 낟알과 남새, 산나물, 과일과 같은 음식재료들이 잘 자라고 잘 여문다고 하시였다.

이어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조선음식이 맛이 좋은것은 여러가지 양념감들을 고르롭게 쓰는 음식솜씨가 발달되여있고 세련되여있기때문이라고 하시면서 그 양념감에 대하여 이런 내용으로 가르치시였다.

조선음식에서 맛을 돋구는 기본양념감은 간장, 된장, 고추장, 소금이다. 말하자면 음식의 기본맛은 간을 어떻게 맞추는가 하는데 달려있는것이다. 조선음식의 양념감에는 이밖에도 파, 고추, 마늘, 생강, 후추, 겨자와 같이 자극성이 있고 향기가 있는것도 있고 깨, 참기름과 같이 고소한 맛을 돋구는것도 있으며 꿀, 물엿과 같이 단맛을 내는것도 있다. 특히 우리 나라에는 음식의 맛을 돋구는 양념감들도 다양한데 튀기 같은 기름기있는 음식이나 소고기편육에는 초간장, 젓갈장을 쓰고 물고기회에는 초고추장, 겨자장을 쓰며 소고기회에는 참기름, 소금장을 쓴다. …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조선음식은 색갈이 아름답고 모양이 곱다는데 대해서도 상세히 가르쳐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음식이란 사람들이 먹기 전에 먼저 눈으로 보는것인데 조선음식은 색갈이 아름답고 다채로우며 모양이 곱기때문에 시각적으로 벌써 사람들의 구미를 당기게 한다고 하시였다. 계속하여 조선음식은 오미자, 대추, 고추 같은것으로 빨간색을 내고 솔꽃가루, 닭알노란자위 같은것으로 노란색을 내며 쑥, 청콩 같은것으로 파란색을 내고 검은깨, 돌버섯, 검은콩 같은것으로 까만색을 낸다고 하시면서 은행, 잣, 호두, 대추, 밤 같은 열매로도 음식의 모양을 멋있게 만든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전문료리사들도 무색케 하는 그이의 말씀에 일군들속에서는 저도 모르게 감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감동과 흥분속에 잠겨있는 일군들을 둘러보시며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말씀을 이으시였다.

그이께서는 조선음식을 만드는데서는 과학성도 철저히 안받침되여있다고 하시면서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은 음식을 만들면서 끓이고 볶고 굽고 지지는것과 같은 물리적인 방법도 적용했고 김치, 쉬움떡, 식혜, 두부와 같이 삭히고 발효시키는 화학적인 방법도 리용하였다고 말씀하시면서 이것은 음식의 맛을 최대한으로 돋구게 할뿐아니라 사람들의 건강을 증진시키고 병을 예방하거나 낫게 하는 약리적작용도 하게 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계속하여 조선음식이 훌륭하다는것은 또한 그것을 담는데서도 높은 문화성과 위생성이 보장된다는것으로 설명할수 있다고 하시면서 원래 조선음식차림법에서는 차거나 맵고 자극성이 있는 음식은 작은 그릇에 담고 슴슴하고 자극성이 적은 음식은 큰 그릇에 담아서 그릇을 보고도 음식의 내용과 특성을 알수 있게 한다고, 조선음식의 그릇에는 대체로 뚜껑을 쓰게 되여있는데 그것은 음식물의 온도와 향기를 보존하고 외부환경에 오염되지 않게 한다고 알려주시였다.

그이의 음식지식보물고는 정녕 끝이 없는듯싶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윽고 조선음식은 종류도 많고 다양하다고 하시며 음식이란 사람들이 매일 매끼 늘 먹는것인데 그것이 다양하지 못하면 곧 싫증을 느끼게 되고 물리게도 된다, 그러나 조선음식은 종류가 많고 다양하기때문에 우리 인민은 결코 자기 음식에서 지루한것을 모르고 불만을 모르는 그런 의미에서도 행복한 인민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우리 나라 음식의 특성에 대하여 가르쳐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참으로 우리 음식이 제일입니다라고 하시며 말씀을 맺으시였다.

우리 민족의 고유한 음식을 통해서도 조선민족이 제일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깊은 뜻이 헤아려져 일군들모두는 숭엄한 감정에 휩싸여 그이를 우러러 감사의 인사를 드리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이렇듯 세심한 지도와 가르치심이 있어 오늘 공화국에서는 민족음식이 나날이 발전하고있으며 인민들은 민족음식이 제일이라는 높은 긍지를 안고 음식문화를 더욱 활짝 꽃피워나가고있다.

9

 

밝혀진 원산지문제

 

맛있고 영양가높은 콩은 오늘 사람들의 식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알곡작물로 널리 알려져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맨 처음으로 콩을 재배하기 시작한 원산지라는 사실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못하였다.

우리 민족을 제일로 사랑하시고 민족의 고유한 전통을 찾기 위한 사업에 언제나 마음써오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여러 력사문헌자료들과 유적유물들을 료해하시고 우리 민족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콩을 심고 가꾸어왔다는것을 해명해주시였다.

주체73(1984)년 6월 위대한 수령님께서 동유럽의 어느 한 나라를 방문하시였을 때였다.

오찬회석상에서 그 나라 내각제1부수상은 자기 나라에서는 콩을 많이 심고있다고 하면서 경제적효과성이 큰데 대하여 자랑삼아 말씀드렸다.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력사적으로 볼 때 콩은 조선에서 제일먼저 심기 시작하였다, 우리 인민은 오래전부터 콩을 재배하여왔다, 지금으로부터 한 500년전에 프랑스사람이 우리 나라에서 콩종자를 가져다 자기 나라에 심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유럽에 콩이 퍼지기 시작하였다고 하시면서 식물학에도 그렇게 씌여있다고 말씀하시였다.

콩의 재배력사와 관련한 그이의 말씀은 계속되였다.

콩은 지금으로부터 약 4 000년전에 우리 선조들이 제일먼저 심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야생콩을 재배하였다. 그후 콩알이 크고 둥글며 소출이 높고 가지를 잘 치는 종자를 골라 널리 재배하였다. 중국에서는 지금으로부터 약 2 700년전에 우리 나라에서 콩을 가져다가 심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을 《숙》(콩을 상징한 상형문자) 또는 《호두》(다른 나라에서 가져온 콩이라는 뜻)라고 불렀다. 일본에서도 약 2 000년전에 우리 나라에서 콩을 가져다 심기 시작하였는데 이 나라에서는 그것을 《대두》라고 하였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그보다 퍽 후인 18세기 30년대에 이르러서야 우리 나라를 비롯한 아시아나라들로부터 콩을 가져다 심기 시작하였다.

콩의 원산지와 재배력사에 대하여 어찌나 감명깊게 설명해주시였던지 오찬회에 참가한 그 나라 사람들은 스승의 강의를 듣는 청강생의 심정으로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러 탄복을 금치 못하였다.

그때로부터 10년이 지난 주체83(1994)년 3월초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국농업대회 참가자들과 기념촬영을 하시는 그 짧은 시간에도 일군들에게 원래 콩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심었다고, 오래전부터 우리 나라에서 심어온 콩이 프랑스를 비롯하여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 퍼지고 중국에서도 심게 되였다고 하시면서 이것을 보면 우리 민족은 단군이 나라를 세운 때로부터 시작하여 5 000년의 유구한 력사를 빛내이며 살아온 가장 우수하고 재능있는 민족이라는것을 알수 있다고 긍지에 넘쳐 말씀하시였다.

실로 숭고한 민족애를 지니신 위대한 수령님에 의하여 콩의 원산지가 우리 나라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됨으로써 조선민족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콩을 재배한 민족이라는 력사를 다시금 찾고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더 깊이 간직할수 있게 되였다.

10

 

민족료리의 비중을 높게

 

오늘 공화국에서는 선조들이 대대로 내려오면서 창조한 우수한 민족음식들이 널리 장려되여 민족의 향취가 한껏 흘러넘치고있다.

언제인가 옥류관에 나오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어느 한 나라의 대표단을 환영하는 연회준비정형을 알아보시다가 문득 떠오르는것이 있으신듯 료리차림표를 가져오도록 이르시였다.

한 일군이 드린 료리차림표를 받아보신 그이께서는 신중한 어조로 물으시였다.

왜 우리 민족료리비중이 적은가고.

《상대측이 다른 나라 사람들이므로 그들이 좋아하는 료리를 많이 내놓으려 했습니다.》

그러자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우리 집에 온 손님에게 우리 집 음식을 대접하는것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조선사람들의 미풍량속의 하나라고 하시면서 오늘 연회에는 조선료리를 많이 내야 하겠다고 가르쳐주시였다.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계시던 그이께서는 조선료리가 제일입니다, 조선료리는 력사가 매우 오랩니다, 조선료리는 먹음직하고 깨끗합니다, 우리 나라에 온 다른 나라 사람들도 조선료리를 아주 좋아합니다라고 하시면서 앞으로 조선료리의 특성을 살리면서 더욱 발전시켜나갈데 대하여 강조하시였다.

그때에야 일군은 조선사람이면서도 조선료리, 민족료리의 우수성도 모르고 자기것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나도 부족했던 자신을 새삼스럽게 느끼였다.

그리하여 이날 연회에는 조선료리가 많이 나오게 되였다.

물론 연회에 참가하여 우리의 민족료리를 맛본 외국대표단성원들은 누구라 할것없이 조선료리가 제일이라고 엄지손가락을 내흔들었다.

11

 

소중히 여기신 조선돗자리

 

주체57(1968)년 6월 중순 함경북도의 여러 부문 사업을 현지에서 지도하고계시던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청진시에 새로 건설하게 될 국제려관의 설계도면을 보아주시였다.

설계도면을 주의깊게 살펴보시던 그이께서는 려관내부바닥에 모주단을 깔도록 예견되여있는 사실을 아시고 잠시 생각에 잠겨계시였다.

이윽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을 둘러보시며 모주단은 18세기나 19세기의 낡은것이고 다루기도 힘든것인데 무엇때문에 20세기 하반기에 와서까지도 그것을 쓰겠는가고 하시면서 원래 모주단은 추운 지대에서 쓰는것이라고 깨우쳐주시였다.

그러시고는 모주단은 먼지도 많이 끼고 청소하기도 힘들며 위생적으로 나쁘다고 하시면서 조선의 돗자리가 훨씬 낫다고, 언제인가 우리 나라에 왔던 한 외국수반이 조선돗자리를 보고 엄지손가락을 내들며 제일이라고 했다고 손시늉까지 해보이시며 말씀하시였다.

돌이켜보면 우리 민족은 이미 세나라시기부터 우리 나라에 흔한 왕골을 재료로 하여 돗자리를 만들어 살림방의 깔개로는 물론 집에 귀한 손님이 오거나 여러가지 례식을 할 때에 쓰군 하였으며 처녀들이 시집을 갈 때에도 돗자리를 장만해가지고 가는것이 하나의 풍습으로 되여왔다.

돗자리를 만드는 왕골은 사초과의 한해살이 또는 여러해살이 공예작물로서 우리 나라가 원산지이다.

우리 인민들은 오래전부터 왕골의 줄기로는 돗자리, 바구니, 방석, 여름모자 등을 만들어 썼고 줄기와 잎은 종이원료로 리용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 우리는 국제려관의 자그마한 비품을 갖추어놓는데서도 남들이 하는것을 그대로 본따려 할것이 아니라 우리의것을 기본으로 하여 우리 식대로 해야 한다고 강조하시면서 조선의 돗자리가 세계에서 제일이라고 긍지높이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숭고한 민족애, 인민적풍모를 그대로 이어받으신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주체66(1977)년 9월 어느날 고유한 조선식으로 지은 한 건물을 보아주시면서 초물주단을 깔데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합각지붕에 청색기와를 이은 조선식건물의 외부를 돌아보시고 우리 민족의 슬기와 정서가 그대로 안겨오게 잘 지은데 대하여 못내 만족해하시였다.

이윽하여 건물안에 들어서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어느 한 방을 돌아보시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시였다.

방바닥에는 벽에 붙인 벽지와 조화를 이룬 산뜻한 모주단이 깔려있었다.

생각깊은 안색으로 방바닥을 주의깊게 살펴보시던 그이께서는 조선식기와집이기때문에 내부도 조선식으로 초물주단을 까는것이 좋다고, 집의 형태는 전부 조선식으로 하여놓고 안에 모주단을 까는것은 격에 맞지 않는다고, 비유하여 말하면 겉에는 조선옷을 입고 안에는 서양식속옷을 입은것이나 같다고 일깨워주시였다.

순간 일군들은 얼굴이 뜨거워짐을 어쩔수 없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일군들과 건설을 전문하는 설계가나 건축가들이 매일같이 현장에서 살다싶이 하면서도 조선식기와집에 모주단을 깐것이 잘못되였다고 생각한적은 한번도 없었기때문이였다.

이렇듯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리용해오던 살림방의 깔개 하나도 소중히 여기신 위대한 대원수님들의 숭고한 민족애에 의하여 그후 건물들에는 모주단대신 민족적정서가 진하게 풍기는 조선식초물제품들이 그 자리를 메꾸게 되였다.

12

 

희귀한것이 아니다

 

언제인가 일군들의 협의회에서 연료리용과 관련한 문제를 토의하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지금 농촌살림집들에서 부엌아궁에 나무를 때여 밥을 지어먹으면서 동시에 방안을 덥히는 방법이 연료리용에서는 아주 효과적이라고 말씀하시고나서 전후복구건설시기에 있었던 일을 감회깊이 회고하시였다.

전후 우리 나라 주재 어느 한 나라의 대사는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옵게 된 기회에 자기 나라 대사관에서 핀란드에서 사온 설계대로 지어놓은 집을 한번 보아주셨으면 하는 의향을 말씀올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제의를 쾌히 수락하시고 얼마후 그의 집을 찾으시였다.

그이께서 가보신즉 집설계는 서양식으로 하고 온돌은 놓지 않았지만 부엌에 아궁을 만들고 거기에 나무를 때서 밥도 짓고 국과 차도 끓이고 방안의 온도도 보장하고있었다.

대사는 커다란 기대감을 가지고 위대한 수령님께서 어떤 평가를 주시겠는가 하는 생각에 조바심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러한 대사의 얼굴을 바라보신 그이께서는 이것은 희귀한것이 아니라고, 우리 조선사람들은 옛날부터 이런 방법으로 밥도 지어먹고 방안의 온도도 보장하여왔다고 하시면서 시간이 있으면 우리 사람들이 사는 살림집에 한번 가보자고 말씀하시였다.

(희귀한것이 아니라니?)

그이로부터 칭찬을 받을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조선에서는 수천년전부터 이런 방법이 리용되고있다니 대사는 그만 아연해졌다.

그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대사와 함께 온천군쪽으로 나가시던 길에 어느 한 집에 들리게 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날씨가 몹시 차거웠던 때이라 방안의 후끈후끈한 온기에 얼굴이 붉게 상기된 대사를 바라보시며 조선사람들이 사는 집이 핀란드에서 설계를 가져다 지은 집보다 더 좋지 않는가고 웃으며 물으시였다.

그제서야 대사는 슬기로운 우리 민족의 지혜와 재능에 깊이 탄복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사람들은 벌써 몇천년전부터 이렇게 훌륭한 열리용방법을 알고있었는데 유럽사람들은 이제야 그것을 알고 새로운것이라고 떠들었다고 하면서 이 나라 사람들은 재간있는 사람들이라고 자기의 심정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의참가자들을 바라보시며 우리 사람들이 조상때부터 내려오면서 아궁에 나무를 때서 밥도 짓고 방안을 덥히는것은 아주 좋은 열리용방법이라고 말씀하시였다.

회의참가자들은 희귀한것이라고 자랑하려던 대사가 오히려 조선민족의 슬기와 재능에 감탄한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민족이 창조한 열리용방법을 민족의 자랑으로 적극 내세워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뜨거운 민족애에 솟구치는 격정을 금치 못하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 이날에 들려주신 이야기는 우리 인민들속에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깊이 새겨주며 오늘도 널리 전해지고있다.

13

 

높은 평가

 

지혜롭고 재능있는 우리 민족은 아득한 옛날부터 여러가지 민족악기를 만들고 자기의 념원과 생활감정을 노래에 담아 부르면서 전통적인 민족음악을 창조하고 발전시켜왔다.

주체47(1958)년 가을 평양모란봉예술극장(당시)에서는 위대한 김일성주석을 모시고 공화국창건 10돐을 맞으며 전국예술축전입선단체들의 종합공연이 성대히 진행되였다.

공연무대에는 신의주 남송중학교(당시) 학생들이 출연하는 민족기악병창종목도 올랐다.

15명으로 구성된 민족기악병창조 성원들은 첫 노래 《풍년북을 높이 울려라》를 불렀다.

가야금을 타고 새장고를 치며 부르는 그들의 민족기악병창이 축전에 입선은 하였지만 규모와 형식, 기량에 있어서도 그리고 번쩍번쩍 윤기도는 서양악기반주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을 추는 다른 단위들에 비하면 촌티가 났다. 이것은 축전을 주관하던 일군들과 지어는 민족기악병창을 지도하였던 교원들이 속으로 품고있던 생각이였다.

그래서 출연자들은 신심없이 공연에 출연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노래가 끝나자 맨 먼저 박수를 쳐주시며 학생들이 민족기악병창을 잘한다고 평가해주시였다.

이에 고무된 학생들은 계속하여 두번째 노래로 준비한 《쾌지나 칭칭나네》를 불렀다.

《쾌지나 칭칭나네》는 임진조국전쟁시기 섬나라 왜적들을 쳐물리친 조선인민의 불굴의 기개와 승리의 기쁨을 반영한 노래로서 널리 불리워왔다.

노래제목에서 《쾌지》라는 말은 시원하고 통쾌하다는 《쾌재》가 변한것이고 《칭칭》은 당시 적장의 한놈이였던 가등청정(가또 기요마사)을 가리킨것이며 《나네》는 쫓겨간다는 의미를 담고있다. 결국 《쾌지나 칭칭나네》는 왜적장 가등청정이 쫓겨가니 후련하고 통쾌하다는 뜻을 담고있다.

시종 만족스럽게 공연을 보고나신 그이께서는 또다시 선참으로 박수를 쳐주시며 민족악기가 참 좋습니다, 우리 나라 민요는 들을수록 좋습니다, 아이들이 노래도 잘 부르고 가야금도 잘 탑니다라고 높은 평가를 해주시였다.

그리하여 민족기악병창에 대한 심사를 맡은 일군들의 그릇된 편견은 완전히 뒤집어지게 되였다.

공연이 끝난 다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학생들을 몸가까이 부르시여 오늘 공연을 제일 잘했다고 하시며 엄지손가락을 펴보이기까지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민족악기를 언제부터 배웠는가고 물으시고나서 우리 민족음악이 참으로 훌륭하다고, 조선노래는 부르기도 좋고 듣기도 좋다고 하시면서 전체 학생들이 민족악기를 한가지씩 다룰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이날 그이께서는 학생들을 사랑의 한품에 안으시고 기념사진도 함께 찍으시고 민족악기와 새옷을 안겨주시는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참으로 어버이수령님의 이렇듯 높은 평가속에는 자라나는 새 세대들이 우수한 민족음악의 전통을 계승하여 주체예술의 화원을 더욱 꽃피워나가기를 바라시는 한없이 숭고한 뜻과 기대가 담겨져있었다.

그후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학교 학생들의 민족기악병창을 10여차례나 보아주시고 매번 높은 평가를 주시였으며 이 학교는 민족기악을 잘하는 학교로 온 나라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김일성주석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이 땅우에 민족음악발전의 찬란한 전성기를 펼쳐주시였다.

이 과정에 민족음악발전에 한몫하는 음악인재들이 수많이 자라났으며 주체성과 민족성이 철저히 구현된 새로운 형식의 음악작품들이 수많이 창작되여 온 사회에 민족적정서가 차넘치게 하는데 적극 이바지하고있다.

어느 한 기회에 공화국의 예술인들이 출연하는 공연을 관람한 남조선의 한 음악가는 민족적정서가 넘쳐나는 참으로 훌륭한 공연이였다고 하면서 자기의 격동된 심정을 이렇게 피력하였다.

《민족의 넋이 계승되는것처럼 위대한 력사는 없다고 생각한다. 옳바른 음악정신을 가진 예술인재를 찾는다는것은 정말 하늘에서 별을 따오는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평양의 악단들에는 훌륭한 민족정신을 소유한 젊은 인재들이 많다. 그들은 민족악기를 사랑하고 민족의 노래를 사랑하며 민족음악속에서 세계의 음악과 호흡하고있다.》

절세위인들의 손길아래 꽃펴난 주체적민족음악예술의 자랑찬 현실에 대한 옳은 평가라고 본다.

14

 

어깨장단이 제일 좋다

 

주체54(1965)년 5월 중순 어느날이였다.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시던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모내기가 한창인 어느 한 농장포전앞에 잠시 차를 세우시였다.

마침 그곳에서는 농장원들과 지원자들이 모내기 쉴참에 꽹과리와 새납소리에 맞추어 흥겹게 어깨춤을 추고있었다.

어깨춤은 조선사람들이 오랜 옛날부터 로동의 쉴참이나 민속명절을 계기로 즐겨 추어온 대중적인 군중무용의 하나로 알려져왔다.

장단에 맞추어 어깨를 으쓱으쓱하며 추는 어깨춤은 춤군들은 물론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누구나 춤판에 뛰여들고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흥겨우면 어깨춤이 절로 난다고 일러왔다.

만족한 미소를 지으신채 춤판을 바라보시는 위대한 장군님께서도 어깨장단을 치시는것 같았다.

농장벌을 가꿔가는 그들의 모습도 좋지만 로동의 희열속에 펼쳐놓은 춤판이 더더욱 마음에 드시는듯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매우 만족해하시였다.

이때 동행한 한 일군이 그이께 모내기 쉴참의 어깨춤이 그렇게 좋으신가고 조용히 물었다.

그이께서는 어깨장단이 좋다고, 얼마나 건드러진가고 하시면서 우리 조선사람들에게는 그저 어깨장단이 제일 좋다고 기쁨에 넘친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이윽고 그이께서는 시간이 허락되면 우리도 모를 좀 내고 한바탕 어깨춤을 춰보는건데 하시며 그 춤판에 선뜻 들어서지 못하는것을 못내 아쉬워하시였다.

참으로 우리 민족고유의 모든것을 제일로 사랑하시고 그것을 민족의 자랑으로 적극 내세워주시려는 위대한 장군님이시였기에 현지지도의 길에서 잠시 띄여보신 춤가락앞에서 선뜻 발걸음을 떼지 못하신것 아니랴.

진정 된장국을 먹는 조선사람은 조선민요를 들어야 어깨가 올라간다 하시며 위대한 장군님 제일 좋다고 하신 흥겹고도 건드러진 어깨춤가락은 오늘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근로자들이 쉴참에 펼쳐놓는 춤판과 명절날의 야회와 극장무대에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에서 흥겨운 화폭으로 펼쳐지고있다.

15

 

찬사와 부러움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때 대성산 남문공지에 꾸려진 국제민속명절놀이장에는 류달리 큰 대형병풍이 세워져 축전손님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병풍은 예로부터 방안을 장식하거나 바람막이 또는 어떤것을 가리우거나 둘러치기 위한 수단으로 생겨난이래 오랜 력사적과정을 통하여 하나의 민속적인것으로 리용되여왔다.

우리 나라에서 병풍은 이미 세나라시기에 만들어져 리용되여온 력사가 오랜것으로 알려져있다.

지난 시기 병풍은 용도에 따라 일상용병풍과 의례용병풍, 크기와 폭에 따라 6폭, 8폭, 10폭, 12폭병풍, 놓는 위치에 따라 사랑병풍, 안병풍, 장식내용에 따라 그림병풍, 글자병풍, 수예병풍을 비롯하여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였다.

병풍이 우리 민족의 생활과 인연이 깊은 생활용품의 하나로 쓰인데로부터 《병풍도 꼬부려야 선다.》, 《병풍에 그린 꽃이 향기나랴.》, 《혼인뒤에 병풍친다.》와 같은 격언들도 생겨나게 되였다.

오랜 력사를 두고 우리 인민들속에서 전해내려오는 병풍은 오늘에 와서는 손쉽게 벽면을 조성하거나 공공장소의 넓은 공간을 장식하는 수단으로 많이 리용되고있다.

이러한 병풍이 높이 5m, 너비 2. 5m, 길이 85m에 34폭으로 된 대형그림병풍으로 훌륭히 완성되여 대성산 남문공지에 펼쳐지기까지에는 이런 사연이 깃들어있었다.

축전준비분위기로 들끓던 주체77(1988)년 2월 어느날 대성산 국제민속놀이장형성안을 료해하시던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놀이장뒤에 우리 인민의 민속적인 생활모습을 형상한 대형그림판을 세우도록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우리 나라의 아름다운 자연풍경과 예로부터 인민들속에서 널리 알려진 민속놀이가운데서 오늘까지 계승되고있는 민속놀이들을 위주로 하여 그림을 그리도록 그 방향과 방도를 하나하나 가르쳐주시였다.

그때로부터 다섯달이 되는 7월말 대형병풍초안이 완성되였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인민문화궁전에 전시된 병풍그림을 보아주시였다.

시종 만족의 미소를 지으시고 대형병풍그림초안을 보아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림이 괜찮다고 하시며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면 아주 흥미있어할것이라고, 그림초안에 있는 민속혼례식장면이 아주 좋다고 말씀하시였다.

이어 그이께서는 매개 민족에게는 대를 이어가면서 계승되고 발전되는 민속전통이 있는것만큼 우리는 우리 민족이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를 통하여 이룩한 슬기롭고 우수한 민속전통을 우리 식으로 계승하여 완성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이해 9월초에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대형병풍그림의 크기와 지대상특성에 맞게 위치를 옳게 설정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륜환도로와 관람석을 형성하는데 맞게 남문뒤 맞은편에 설치하게 되여있는 대형병풍그림위치를 남문뒤 왼쪽으로 옮겨 설치할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이렇듯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널리 리용하여온 병풍을 민족의 자랑으로 적극 내세우시려는 위대한 장군님의 세심한 가르치심에 의하여 조국강산의 풍치수려한 산천경개와 인민들의 근면한 로동생활, 무술놀이, 사냥놀이, 씨름, 그네뛰기, 널뛰기를 비롯하여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민속놀이장면들이 생동하게 반영된 대형병풍이 걸작으로 완성되여 대성산 국제민속놀이장에 세워지게 되였다.

이 대형병풍그림을 보고난 외국의 벗들은 한결같이 대형병풍은 이 세상에 없는 훌륭한 걸작이다, 대형병풍에는 조선인민의 생활이 잘 반영되여있다, 병풍을 통해서도 조선에서는 위대한 김일성주석과 위대한 김정일각하의 현명한 령도밑에 민속전통이 훌륭히 발전하고있다는것을 알수 있다, 세계 여러 나라를 많이 다녀보았지만 이렇게 큰 병풍은 처음 보았다고 하면서 찬사와 부러움을 금치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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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회에서 하루동안 살다

 

평양시교외의 소나무숲 우거진 곳에는 동방의 천년강국 고구려의 기틀을 마련한 건국시조 동명왕의 릉이 자리잡고있다.

1989년 7월 평양에서 대성황리에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때 이곳에서는 축전관광 및 특별프로로 고구려민속놀이가 이채를 띠고 진행되였다.

고구려사람들은 활달하고 패기있고 용감한 상무적기풍과 락천적인 생활풍습을 가지고있었으며 여러가지 민속놀이들도 즐겁게 하였다.

이 땅우에 고구려시기의 생활이 펼쳐졌던 때로부터 수천년 세월이 흐른 오늘에 와서 시조왕의 릉에서 그때의 민속놀이를 본다는것은 그야말로 감개무량하고 희한한 일이 아닐수 없다.

사실 축전초기까지만 해도 행사준비를 맡은 일군들속에서는 동명왕릉에서 고구려민속놀이를 벌릴 생각은 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동명왕릉이 경치도 좋고 유적으로서의 국보적가치도 컸지만 대성산에서 국제민속명절놀이를 하게 된 조건에서 별로 의의가 없을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유구한 력사와 문화전통을 귀중히 여기고 그 계승발전에 깊은 관심을 돌려오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동명왕릉에도 민속놀이장을 준비하도록 하시였다.

그러던 주체78(1989)년 3월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동명왕릉에서 진행할 고구려민속놀이와 관련한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먼저 동명왕릉에 대한 참관을 조직한 다음 민속춤, 무술, 말타기, 그네뛰기, 씨름 등 민속놀이를 보여주고 계속하여 진주못에서 결혼례식을 보여주며 민속음식을 만들어 식사를 하면서 고구려시기의 풍속을 그대로 보여주어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계속하여 그이께서는 고구려민속놀이를 준비하는데서는 철저히 력사주의적원칙을 지켜야 한다, 모든 민속놀이는 고구려시기의 력사적사실에 철저히 의거하여 고구려사람들이 살며 생활하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동명왕릉 민속놀이장에 들어선 사람들이 돌아나갈 때까지 고구려사회에서 하루동안 살다가 나가는것과 같은 인상을 받도록 놀이참가자들의 옷차림과 소도구, 놀이내용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고구려시기의것으로 하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놀이내용도 고구려시기에 놀던 방법을 그대로 살리고 민속놀이종류도 주로 경기놀이인 씨름, 그네뛰기, 널뛰기, 말타기, 활쏘기를 하도록 하시고 그네뛰기도 여러가지 경기방법이 있으나 가장 오래고 활동적이며 가치가 있는 방울차기를 하고 활쏘기도 목표물을 짐승으로 하여 고구려사람들이 짐승사냥을 하던 방법 그대로를 보여줄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뿐만아니라 그이께서는 점심식사도 순수 고구려민족음식으로 하되 음식구성은 소고기볶음, 불고기, 지짐, 찰떡, 송편, 고사리 등 우리 조상들이 즐겨 먹던 음식을 내놓도록 하며 그릇도 접시에 저가락을 주어 조선사람들이 먹는 방법으로 먹도록 할데 대해서도 일깨워주시였다.

그후 또다시 고구려민속놀이준비정형을 료해하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축전참가자들에게 고구려시기의 풍습을 보여주기 위하여서도 동명왕릉입구에 갑옷을 입고 창과 칼을 쥔 무사들로 파수를 세우고 나팔수가 뿔나팔을 불어 환영과 환송을 인상깊게 할데 대하여 가르쳐주심으로써 행사에서 조선민족의 전통과 풍습의 특색을 한껏 살릴수 있도록 하시였다.

참으로 천년강대국 고구려의 력사와 문화를 민족의 자랑으로 세상에 높이 내세우시려는 그이의 세심한 지도와 가르치심이 있어 마침내 동명왕릉의 드넓은 공지에는 고구려사람들의 기마술과 활쏘기, 씨름경기와 그네뛰기 등을 보여주는 민속놀이장과 결혼례법을 보여주는 혼례식장이 훌륭히 꾸려지게 되였다.

하기에 축전의 나날 고구려민속놀이장을 찾은 수많은 외국손님들은 고구려사회에서 하루동안 살다가 나간것 같은 인상을 강하게 받은데 대하여 경탄을 금치 못해하면서 이구동성으로 다채로운 동명왕릉 민속놀이를 통하여 조선의 유구한 력사와 고유한 민족문화, 조선인민의 슬기와 재능, 생활풍습을 더 잘 알게 되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과 위대한 김정일각하의 현명한 령도를 받는 조선인민이 부럽다고 한결같이 자기들의 격동된 심정을 토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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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름과 대황소

 

반만년의 오랜 력사를 내려오며 우리 민족이 창조하고 발전시켜온 민족체육종목가운데는 튼튼한 체력과 완강한 투지, 슬기를 키워주는 씨름도 있다.

주체50(1961)년 8월말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학생들과 자리를 같이하시고 씨름과 관련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먼저 우리 나라 씨름의 력사에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우리 인민의 전통적인 씨름은 고구려시기에 이미 널리 보급되여있었다고 하시면서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고구려무덤의 벽화들에는 웃동을 벗어제낀 씨름군들이 승부를 겨루는 재미있는 장면이 그려져있는데 이것은 당시 고구려사람들이 씨름을 즐겨하였으며 고구려에 씨름이 널리 보급되여있었다는것을 증명해주고있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가르쳐주신것처럼 조선씨름은 아득히 먼 옛날 우리 민족에 의해 창조되고 전해져온 유래가 오랜 민족체육종목이다.

씨름이라는 말도 고유한 우리 말이다.

지난 시기에는 한자가 서사생활에 널리 쓰인것으로 하여 력사자료들에 씨름이 각력, 각저, 상박 등으로 표기되여있다.

그러나 씨름이라는 명칭은 《싱갱이질》을 뜻하는 고유한 우리 말인 《힐흠》에서 유래되였다. 《힐흠》의 줄기인 《힐후다》라는 동사에 《ㅁ》이 붙어 명사화되면서 《힐흠》→《실흠》→《실음》→《시름》의 어음변화과정을 거쳐 《씨름》으로 고착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씨름의 우수성에 대해서도 뜻깊은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우리 나라 씨름은 장수힘을 키울뿐아니라 때와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누구나 할수 있는 체육종목이라고, 우리 나라 사람들은 누구나 씨름을 즐겨하였다고, 예로부터 어린이들은 강가나 들판에서 놀 때에는 씨름을 많이 하였고 두레군들은 쉴참이면 밭머리에서 씨름을 즐겨하였다고 말씀하시였다. 뿐만아니라 우리 인민들은 민속명절을 계기로 마을마다 여러가지 놀이와 함께 반드시 씨름을 한 경기종목으로 정해놓고 경기에서 이긴 씨름군에게는 꽃목걸이장식을 한 황소를 상으로 주는것을 풍습으로 여겨왔다고 하시였다.

이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씨름은 조선사람들이 좋아하는 전통적인 민족경기라고, 우리 인민의 자랑인 민족씨름을 널리 장려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민족의 슬기와 용맹의 상징으로 되고있는 씨름에 언제나 깊은 관심을 돌려오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새 세기에도 씨름을 더욱 장려하여 온 사회에 민족적향취가 한껏 흘러넘치도록 해주시였다.

주체91(2002)년 1월 어느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미전부터 진행되여온 민족씨름경기의 내용과 품격을 한계단 높여 특색있게 조직할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고 시상을 송암명기소목장의 대황소로 할데 대한 은정깊은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그해 모란봉 씨름경기장에서는 대황소상 전국민족씨름경기가 대성황리에 진행되였다. 이날 경기에는 평양시를 비롯하여 각 도에서 선발된 70여명의 선수들이 참가하여 승부를 겨루었다. 경기가 끝난 후 우승을 한 선수에게는 대황소가 수여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날 저녁 현지지도를 마치고 돌아오시는 길로 일군들에게 오늘 모란봉에서 진행된 씨름경기가 어떻게 되였는가고, 황소는 얼마나 큰것이였는가고 물으시고 900kg짜리 대황소라는 대답을 들으시고나서 흐뭇해하시며 말그대로 대황소라고, 잘되였다고 거듭 외우시였다.

우승한 선수에게 시상된 대황소는 위대한 장군님의 특별한 관심속에 마련된것이였다.

어버이장군님께서는 이미전에 해당 일군들에게 자신께서 생각이 있어 그러니 황소 한마리를 선정해놓고 사료단위에 관계없이 잘 기를데 대한 과업을 주시였다. 그리하여 송암명기소목장 관리공들의 지성속에 600Kg이던 황소는 900Kg이라는 굉장한 무게로 씨름터에 나타나게 되였던것이다.

이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런 대황소상경기를 전통화하여야 한다고, 유서깊은 모란봉에서 대황소상 금소방울소리가 온 나라에 울리게 되였으니 얼마나 좋은가고 하시며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해마다 추석을 계기로 온 나라 인민들의 커다란 기대와 관심속에 대황소상 전국민족씨름경기가 성황리에 진행되고있는 공화국의 자랑찬 현실은 사람들로 하여금 위대한 령도자를 모실 때 민족의 유구한 민속전통도 빛을 뿌릴수 있다는 진리를 다시금 새겨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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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꽃, 나라의 꽃으로

 

남존녀비란 문자그대로 남자를 존대하고 녀자를 천시한다는 말로서 녀성들에게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혹심한 차별과 멸시, 불행을 들씌우고 그들의 인권을 유린하며 극도의 무권리와 굴욕을 강요하는 착취사회의 반동적인 륜리도덕관이다.

지금으로부터 수십여년전의 여름 어느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한 녀성일군을 만나주시였다.

그 일군과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남존녀비가 지난날의 생활에서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찾아보는것이 나쁘지 않다고, 그래야 그러한 사상요소들과 낡은 잔재들을 낱낱이 들추어내서 청산해버릴수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그런 점에서 생각되는것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하시였다.

녀성일군이 신통한 대답을 찾지 못하자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자신께서 몇가지 생각되는것을 말해보겠으니 한번 들어보라고 하시며 이런 내용으로 말씀하시였다.

우리 조상들은 옛날부터 자기 가계를 이어가기 위하여 족보라는것을 만들어놓군 하였는데 그것을 보면 남자들을 중심으로 써놓았지 녀성들을 중심으로 써놓은것은 하나도 없다. 이뿐이 아니다. 남존녀비는 지난날 주택구조에서도 나타나고있다. 물론 가난한 사람들의 집에서는 그런것을 찾아볼수 없었지만 권세있는 량반이나 부자들의 집에서는 의례히 제일 밝고 좋은 방은 사랑방이라고 정해놓고 거기서는 남자들만 생활하게 하고 녀자들은 얼씬도 못하게 하였다. 그런 집들을 보면 녀자들이 생활하는 방은 제일 컴컴한 구석진 곳에 있었다.

위대한 장군님의 이 말씀을 들으며 그는 녀성들조차도 미처 생각할수 없었고 찾아낼수 없었던 남존녀비의 낡은 잔재들을 그렇듯 적라라하게 밝혀내시는 그이의 예지와 통찰력에 감탄을 금치 못해하였다.

돌이켜보면 세기를 이어오며 온갖 사회적불평등과 봉건적질곡속에서 피기도 전에 시들은 볼품없는 꽃마냥 모진 수모와 학대를 받지 않으면 안되였던 조선녀성들이였다.

그러던 그들이 해방된 조국땅에서 남녀평등, 녀성존중의 새시대를 맞이하게 되였다.

일찌기 항일의 나날 남녀평등의 사상을 조국광복회10대강령에 새기시고 해방후 남녀평등권법령을 몸소 작성발포하신 위대한 수령님.

녀성들의 역할을 혁명의 한쪽수레바퀴라는 유명한 명제속에 집대성하시고 당대회의 높은 연단에서 녀성들을 가정일의 무거운 부담에서 해방하는것을 3대기술혁명의 과업의 하나로 정책화하신분이 바로 위대한 김일성주석이시다.

어버이수령님의 뜻을 높이 받드시고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조선녀성운동사에 빛나는 공적을 쌓아올리시여 녀성들이 사회의 활력있는 꽃으로, 나라의 당당한 주인으로 자라날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남존녀비의 낡은 잔재들까지 말끔히 청산해주시려는것 아닌가.

이렇게 시대의 요구와 인민의 지향에 맞게 고상한 사회주의륜리도덕관계를 온 사회에 확립하시려는 위대한 장군님의 숭고한 뜻에 의하여 남존녀비의 낡은 사상과 생활관습의 잔재들은 그후 사회적으로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였다.

어찌 이뿐이랴. 피눈물의 해를 보내고 맞이한 주체84(1995)년 3월 8일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고전적로작 《녀성들은 혁명과 건설을 떠밀고나가는 힘있는 력량이다》를 발표하시여 녀성들에게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고 당보에 싣게 될 남녀평등권법령발포기념일과 관련한 한건의 기사를 여러차례나 친히 보아주시며 심혈을 기울이시였으며 조국과 민족앞에 엄혹한 시련이 가로놓였던 시기에도 녀성들을 위한 사회적시책들을 변함없이 고수하도록 이끌어주시였다.

그 사랑속에 《녀성은 꽃이라네》, 《사랑하시라》와 같은 녀성존중의 노래가 온 나라에 울려퍼지게 되였고 《3. 8절의 봄향기》라는 가슴뜨거운 이야기도 꽃펴나게 되였다.

조선녀성들이 누리는 복받은 삶은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에 의하여 오늘도 뜨겁게 이어지고있다.

주체101(2012)년 3월 8일 국제부녀절을 맞으며 부강조국건설을 위하여 헌신하고있는 온 나라 전체 녀성들에게 따뜻한 인사를 보내시고 뜻깊은 축하공연무대를 마련해주신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 제1차 전국어머니대회에서 《자녀교양에서 어머니들의 임무》라는 연설을 하신 력사적인 11월 16일을 어머니날로 제정하도록 하여주시고 제4차 전국어머니대회를 소집하시여 녀성들에게 온갖 행복과 영광을 다 안겨주시였다.

정녕 태양의 따사로운 빛과 열을 떠나 아름답게 만발한 화원에 대해 어찌 생각이나 할수 있겠는가.

오늘 공화국의 녀성들 누구에게라 할것없이 지난날의 꽃과 오늘의 꽃이 어떻게 다른가고 물어보면 그들은 긍지에 넘쳐 이렇게 대답한다.

절세위인들의 손길아래 남자들과 꼭같은 권리를 가지고 혁명의 한쪽수레바퀴를 당당히 떠밀고나가고있으며 가정의 꽃, 나라의 꽃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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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무용의 본보기작품으로

 

오늘 공화국에서는 위대한 대원수님들의 현명한 령도와 조선로동당의 옳바른 민족문화보존정책에 의해 선조들이 창조한 우수한 민속무용유산들이 적극 발굴고증되여 시대적요구와 인민들의 지향에 맞게 훌륭히 계승발전되고있다.

그가운데는 우리 나라 동서해안지방의 대표적인 민속무용으로 널리 알려진 《돈돌라리》와 《룡강기나리》도 있다.

민속무용 《돈돌라리》는 지난 시기 함경남도 북청지방의 녀성들속에서 해마다 4월에 달래를 캐면서 추던 륜무형식의 춤으로서 《동틀 날이 오리라.》는 말이 줄여지면서 붙은것이라고 한다. 특히 일제식민지통치의 그 암담한 속에서도 이 고장 사람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기어이 오고야말 조국해방의 《동틀 날》을 그리며 돈돌라리춤을 추어왔다.

한편 《룡강기나리》는 룡강, 온천지방에서 널리 불리워진 로동민요인 룡강타령에 기초하여 건드러지면서도 활달한 춤동작을 펼쳐보이고있는 민속무용이다.

이 민속무용들에도 인민들속에서 널리 전해오는 문화유산들을 적극 발굴하여 시대적미감에 맞게 발전풍부화하시려는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령도의 손길이 뜨겁게 깃들어있다.

주체64(1975)년 12월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새로 발굴형상한 민속무용들인 《돈돌라리》와 《룡강기나리》를 보아주시였다.

춤을 다 보아주신 그이께서는 민속무용형상에서 나타난 부족점과 수정방도에 대하여 하나하나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원래 《돈돌라리》춤은 손동작을 맞추어 추는 특색이 있는 춤인데 원래의 곡은 다 없애고 현대화된 곡에다 손동작을 맞추어놓으니 흥취가 나지 않는다고 일깨워주시였다. 그러시면서 《돈돌라리》를 하자면 민속무용대로 해야지 원래의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현대화하면 누구도 그것을 보고 《돈돌라리》라고 하지 않는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이어 그이께서는 《룡강기나리》와 관련하여 주제를 잘 잡았다고 하시며 농민들의 로동생활을 형상한 정서적인 작품이라고 높이 평가하시였다. 그러시고나서 무용수들이 무대에 호미를 가지고 나왔으면 처음부터 마감까지 쓰도록 하여야 하겠는데 빠른 동작을 하는 대목에 가서 처리하기 곤난하다고 하여 호미를 놓고 춤을 추거나 도중에 들었다놓았다 하여서는 안된다고 일깨워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룡강기나리》에서는 무용수들이 호미를 들고 나오는것을 잘 살려 농민들의 근면한 로동생활을 형상한 무용작품으로 고칠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때로부터 석달이 지난 주체65(1976)년 3월 중순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재형상한 《돈돌라리》와 《룡강기나리》를 또다시 보아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먼저 그전에 만든 《돈돌라리》에서는 손을 들었다 내리며 어깨를 가지고 재간을 부리는것이 있었는데 오늘 출연한 무용에는 그런것이 없고 손을 머리우에서 놀리는것이 너무 많다고 지적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음악은 지금대로 고착시키고 춤동작만 《돈돌라리》춤가락들을 살려 완성할데 대한 구체적인 방도까지 일일이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또한 《룡강기나리》에 대하여 형식도 좋고 소도구도 좋은데 벼를 베는 장면에서 무용적으로 곱게만 형상하였기때문에 로동생활이 진실하게 안겨오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농민들의 생활을 깊이 파고들어 예술적으로 잘 형상할데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이렇듯 위대한 장군님의 크나큰 관심과 세심한 가르치심속에 《돈돌라리》와 《룡강기나리》는 그후 시대적요구와 인민들의 지향에 맞게 민속무용의 본보기작품으로 훌륭히 완성되여 주체예술의 화원속에서 아름다운 꽃으로 다시 피여나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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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민족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래일

 

먼 옛날 어느 한 마을에 지주집 머슴살이를 하던 리랑이라는 총각과 성부라는 처녀가 살고있었다. 흉년이 든 어느해 이 지방에서 일어난 농민폭동에 참가하였던 그들은 관군의 추격을 피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성부와 리랑은 백년가약을 맺고 의좋게 행복한 생활을 하고있었다. 그후 착취자들을 반대하는 싸움터에 나갈것을 결심한 리랑은 사랑하는 안해인 성부와 리별하고 높고낮은 고개들을 넘고넘어 떠나갔다. 그때 성부는 석별의 정을 금치 못하여 남편이 넘은 고개들을 바라보면서 그리움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1.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2.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

   청청하늘엔 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꿈도 많다

 

3.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

   아리랑고개는 열두나고개

   구름도 사람도 쉬여간다

 

4.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

   저기 저 산이 백두산이라지

   동지섣달에도 꽃만 핀다

 

바로 이것이 조선민요의 상징으로, 세계적인 명곡으로 널리 알려져있는 민요 《아리랑》의 발생과 어원에 대한 많은 전설들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성부와 리랑》전설이다.

민요 《아리랑》은 1926년 라운규가 창작한 우리 나라의 첫 무성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로 새롭게 편작되여 나온 때로부터 더욱 유명해지기 시작하였다.

《아리랑》은 널리 불리워지는 과정에 평안도의 《서도아리랑》, 함경도의 《단천아리랑》, 강원도의 《강원도아리랑》, 경기도의 《긴아리랑》, 경상도의 《밀양아리랑》을 비롯한 지방별특색과 우리 민족의 세태풍속을 반영한 《아리랑》노래들이 창작되게 되였다. 뿐만아니라 선군조선의 현실을 반영한

《강성부흥아리랑》, 《군민아리랑》, 《철령아리랑》, 《통일아리랑》과 같은 《아리랑》이 계속 창작되여 이제는 40여편을 헤아리고있다.

조선사람치고 《아리랑》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전해지고 사람들에게 커다란 감흥을 안겨주는 이 노래에도 민족의 문화전통을 적극 살려나가도록 이끌어주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뜨거운 은정이 깃들어있다.

주체51(1962)년 5월 어느날 하루수업을 마친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과 자리를 같이하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민요 《아리랑》을 두고 뜻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민요 《아리랑》은 곡도 유순하지만 가사의 글줄마다에는 곡절많은 사연이 깃들어있다고 하시면서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창작초기의 가사에서 나오는 표현의 뜻에 대하여 알기 쉽게 풀이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가사에서 《아난리요》(현재는 아라리요로 됨)란 나는 님을 리별하기 어렵다는 뜻이고 《고계》라는것은 고생의 계선이라는 의미이나 민요 《아리랑》의 유래에서 본것처럼 리랑이 그때 실지 재등을 넘어갔으므로 두가지 뜻을 다 담고있다고 그 의미를 해설해주시였다. 그러시면서 《고계》라는 단어도 실상 입에 오르면 《고개》로 발음되니 사람들이 입말체를 따라 《고개》로 부른것인데 지금 그것이 굳어져 그렇게 되였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이윽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민요 《아리랑》이 나온지는 오래되였지만 오늘도 우리 인민들속에 널리 알려져있다고 하시면서 그것은 이 노래에 고유한 민족적정서가 깔려있기때문이라고, 민족적정서와 감정이 풍부히 담겨져있는 노래는 오랜 세월이 흘러가도 잊혀지지 않고 사람들속에서 널리 불리우게 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 민요 《아리랑》에 대하여 말씀하신적은 이뿐이 아니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탄생 90돐과 조선인민군창건 70돐을 계기로 가장 훌륭한 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을 진행할것을 발기하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90(2001)년 9월 해당 부문 일군들과 창작가들에게 우리 나라에는 옛날에 나온 《아리랑》도 있고 우리 시대에 새로 창작한 《아리랑》들도 많은데 《아리랑》을 가지고 작품의 대를 세우는것이 좋을것이라고 하시면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제목을 《아리랑》으로 달도록 하시고 작품창작에서 나서는 문제들에 구체적이고도 세심한 지도를 주시였다.

이렇게 창작완성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은 지난 10여년간 수백여차의 공연을 진행하였으며 선군조선의 국력과 일심단결의 위력을 떨치고 새 세기 주체문화예술의 높은 경지를 자랑스럽게 과시하였다.

2002년 6월에 김일성상을 수여받은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은 그후 여러 나라들로부터 태양대메달, 평화훈장을 받았으며 2007년 8월에는 기니스세계기록에 등록되였다.

주체91(2002)년 8월 중순에도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자신께서 이번에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민요 《아리랑》을 종자로 하여 《아리랑》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민족의 운명문제를 우리 혁명의 력사와 결부하여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을 창작하도록 하였다고 하시면서 지난날 우리 민족의 수난의 력사가 비껴있는 비애와 눈물의 《아리랑》이 우리 시대에 와서 민족적긍지와 랑만, 혁명적기상이 넘치는 선군《아리랑》, 강성부흥《아리랑》으로 승화되였다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우리 창작가들과 출연자들은 당의 의도에 맞게 우리 민족의 어제와 오늘, 희망찬 래일에 대하여 사상예술적으로 가장 훌륭히 형상함으로써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시대의 명작으로 창작완성하였다고 긍지에 넘쳐 말씀하시였다.

민요 《아리랑》을 종자로 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의 성과적인 창작완성, 바로 이것은 시대의 요구와 인민의 지향에 맞게 민족의 문화전통을 적극 살려나가도록 걸음걸음 손잡아 이끌어주신 위대한 장군님의 현명한 령도가 안아온 자랑찬 결실이였다.

하기에 사람들은 조선민족의 어제와 오늘, 희망찬 래일을 형상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보면서 위대한 령도자를 모시여 민족이 위대하고 민족적전통도 찬연히 빛난다는 진리를 가슴뜨겁게 새기고있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민족에 대한 깊은 애정을 지니시고 시대의 요구와 인민의 사상감정에 맞게 승화시켜주신 민요 《아리랑》은 더욱더 강성번영할 래일을 향하여 힘차게 전진해나가는 천만군민의 전투적기상에 민족적정서를 더해주며 앞으로도 영원히 울려퍼질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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