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찾아주고 빛내여준 세심한 손길

고유한 옷색갈
옷의 색갈은 민족성을 특징짓는 주요한 요소의 하나이며 해당 민족의 옷차림풍습을 리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사람들이 처음으로 옷을 해입기 시작한 원시시대에는 옷의 색갈에 대하여 별로 관심을 돌리지 못했다. 그후 생활범위가 넓어지면서 자연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고 문화생활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사람들은 옷의 색갈이 더운감과 시원한감, 밝은감과 어두운감, 가벼운감과 무거운감 등 여러가지 느낌을 준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활환경에 맞게 그리고 성격과 취미, 감정과 기호에 어울리게 옷색갈을 선택하려고 하였다.
매 민족들은 각이한 기후풍토와 자연환경에서 생활하면서 취미와 기호, 정서도 각이한것만큼 옷색갈에는 그 민족의 특성이 반영되게 된다.
주체94(2005)년 4월 중순 어느날이였다.
온 나라 천만군민이 하루 한시라도 마음편히 쉬시옵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았건만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이날도 인민의 행복을 위한 끊임없는 현지지도의 길우에 계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날 일군들에게 조선옷의 고유한 색갈과 관련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옛날부터 조선사람들은 흰색이나 유순한 색을 좋아하였다고 하시면서 알락달락하거나 칙칙한 색갈은 고유한 조선옷의 색갈이 아니라고 가르쳐주시였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산수수려한 자연환경과 정갈하고 고상한것을 좋아하는 민족적정서에 어울리게 옷색갈도 밝고 환한 느낌을 주는 은은하고 부드러운 색을 좋아하였다.
치마저고리색갈만 놓고보더라도 화창한 봄철에는 살구꽃, 진달래꽃, 개나리꽃을 비롯한 여러가지 꽃들이 피고 나무잎이 푸르러가는 자연환경에 어울리는 연분홍색, 연두색, 노란색 등 연하고 밝은 색갈이 기본이라면 무더운 여름철에는 선선하고 차거운감을 련상케 하는 옥색, 흰색, 연푸른색과 같은 시원한 색갈이 위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오곡백과 무르익는 가을철에는 도라지꽃, 들국화, 산나리꽃과 같은 청신한 느낌을 자아내는 감색, 능금색, 단풍색 등 풍만한 감정을 자아내는 색갈이, 맵짠 겨울철에는 초록색 같은 포근한감을 주는 색갈이 각각 이채를 띠였다.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사랑하고 즐겨온 이러한 옷색갈에는 아름답고 고상하며 강의한 조선민족의 성격과 품성, 정서와 기호가 그대로 반영되여있다.
우리 민족의 고유한 옷색갈이 민속전통과 풍습을 현실발전의 요구에 맞게 살려나가는데서 가지는 의의와 중요성을 깊이 헤아리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날 옷색갈과 옷차림에 대하여 관심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민족성을 고수하고 우수한 민족문화전통을 적극 살려나갈데 대하여 거듭 강조하시였다.
정녕 위대한 장군님의 이 말씀은 옷색갈문제가 단순한 형식상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의 전통을 살려나가는데서 나서는 중요한 문제라는것을 다시금 깨닫게 하는 귀중한 가르치심이였다.
우리 민족의 고유한 옷색갈을 내세우시고 적극 살려나가도록 이끌어주신 위대한 장군님의 뜨거운 은정속에 오늘 우리 인민들은 민족적특성이 잘 살아나는 밝고 우아하면서도 아름다운 색갈의 옷을 즐겨 입으면서 민족성을 철저히 고수해나가고있다.
덕천특산물
먼 옛날 원시시대에 가락바퀴로 실을 낳아 베천을 짜서 옷을 해입기 시작한 우리 선조들은 끊임없는 창조적활동을 벌려 명주, 무명, 모시 등 여러가지 옷감들을 생산하여 추운 겨울과 무더운 여름 등 계절에 맞게 옷을 해입게 되였다.
오래전부터 우리 녀성들의 여름치마나 적삼감으로 널리 리용되여온 항라도 이러한 과정에 나온 비단의 하나이다. 명주나 모시실을 세올씩 걸어 한올씩 비우면서 정교하게 짠 항라는 보기만 해도 상쾌한 느낌을 주었다. 손에 쥐면 감칠맛이 있고 살결에 비추어보면 색갈 또한 은근하고 고상하였다. 그래서 항라는 밝고 부드럽고 고상한것을 좋아하는 조선녀성들의 정서와 기호에 맞는 천으로 애용되여왔던것이다.
항라라고 하면 우리 나라에서는 덕천지방의 유명한 특산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한때 덕천항라는 인민들의 생활에 널리 리용되지 못하여 그 이름마저도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져가고있었다.
그러던 덕천항라가 다시 빛을 보기까지에는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뜨거운 은정이 깃들어있다.
주체57(1968)년 9월 어느날 덕천직물공장은 한없는 감격과 기쁨으로 설레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공장을 찾아주시였던것이다.
이날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견본들을 하나하나 보아주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항라를 만져보시며 그전보다 질이 훨씬 높아져 녀성들이 좋아하겠다고 못내 기뻐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사람들은 덕천특산물이라고 하면 먼저 항라부터 꼽군 하였다고, 항라를 앞으로도 계속 많이 짜서 녀성들에게 저고리도 해입히고 무대의상도 만들어주며 유치원어린이들과 학생소년들의 무용복도 만들어주면 좋을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우리 인민들에게 더 좋은 옷감을 마련해주시려고 마음쓰시는 위대한 장군님을 우러르는 공장일군들의 눈앞에는 몇해전 그이께서 처음으로 찾아오시였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이께서는 근간에는 항라와 모시 같은 천들을 보기가 힘든데 이 공장에서 항라를 짜고있으면 아주 좋은 일이라고 하시며 작업장으로 가보자고 하시였다.
직기에서 흘러내리는 산뜻한 항라천을 만족한 시선으로 바라보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곳 공장에서 생산되는 항라가 참 좋다고, 녀성들이 저고리를 해입으면 그저그만이겠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원자재가 귀해서 수익성이 높지 못하다는 공장일군의 대답을 들으시고 원가가 많이 들더라도 항라를 짜야 한다고, 항라는 덕천의 유명한 특산물이기때문에 장려해야 한다시며 생산을 늘일 방도까지 하나하나 가르쳐주시였던것이다.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는 하나의 옷감을 놓고서도 인민들의 입는 문제에 대하여 마음쓰신 위대한 장군님의 그 사랑이 있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가던 덕천항라는 다시금 빛을 보게 되였고 녀성들의 인기를 모으는 옷감으로 널리 리용되고있다.
영채김치와 총각김치
김치는 고유한 우리 민족음식이며 대표적인 부식물의 하나이다.
우리 나라에서 김치를 담그기 시작한 력사는 매우 오래며 그 가지수도 담그는 계절과 재료에 따라서 여러가지이다.
우리 선조들이 오래전부터 만들어온 다양한 김치에는 통배추김치, 보쌈김치, 동치미, 나박김치, 깍두기, 오이김치, 미나리김치 등이 있다.
이러한 김치중에는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은정어린 사랑속에 자기의 본색을 되찾은 이채로운 김치도 있다. 그것이 바로 영채김치와 총각김치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주체20(1931)년 12월 중순경에 명월구에서 동지들과 함께 당콩을 넣은 강냉이죽에 영채김치를 드시던 때를 감회깊이 추억하시였다.
그러면 위대한 수령님께서 반세기가 넘는 오랜 세월 그토록 잊지 못해하시며 감회깊이 추억하신 영채김치는 어떤 김치인가.
영채김치는 예로부터 함경도사람들이 즐겨 먹어온 토배기음식의 하나로 일러왔다.
오늘의 량강도와 함경북도를 포함한 북부지방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영채를 재배하여 식생활에 널리 리용하였다.
영채는 갓의 한 종류로서 일명 생갓, 산갓, 상갓이라고도 불리우는 한해살이남새작물이다.
사람의 건강에 좋은 여러가지 영양성분들이 함유되여있으며 매운맛과 특이한 향기가 풍기는 영채의 잎과 줄기로는 절임이나 나물을 해먹기도 하고 고기볶음에 넣어 먹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이채를 띠는것은 영채로 만든 김치이다.
영채김치 담그는 방법을 보면 먼저 잎과 줄기를 다듬어 바람이 통하는 더운 방에 펴놓고 노란색이 나도록 띄운다. 그 다음 맑은 물에 씻어 소금물에 절구었다가 생강즙, 다진 마늘, 파, 통고추 등 여러가지 양념에 버무려 독에 넣은 다음 초절임했던 소금물을 적당히 부어넣고 아구리를 봉해놓는다.
원래 영채김치는 함경북도의 길주, 명천사람들이 잘 담그었다. 이곳 사람들은 집에 귀한 손님이 오면 영채김치를 밥반찬으로 상에 차려 대접하는것을 풍습으로 여겨오군 하였다.
지난날 한갖 지방의 토배기음식에 불과했던 소박한 영채김치는 민족음식의 전통을 귀중히 여기고 빛내여주신 위대한 수령님에 의하여 오늘 누구나 다 아는 음식으로, 연회상에도 오르는 음식으로 되였다.
예로부터 조선사람들이 즐겨 먹어온 김치가운데는 총각김치로 불리우는 이채로운 김치도 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총각김치라는 이름은 김치로 담글 무우가 애어려서 김장감으로는 되지 못한다는 뜻에서 상투를 틀지 못하여 어른이 되지 못한 총각애들에 비유하여 불리워지기 시작한것이라고 한다. 다시말하여 줄기와 잎이 붙은채로 있는 애어린 무우로 담근 김치라는 의미로 부른다는것이다.
주체57(1968)년 11월 중순이였다.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가을한 남새밭에 작은 무우들이 그대로 있는것을 보시고 왜 저 무우들을 뽑지 않았는가고 물으시였다.
일군들로부터 무우가 작기때문에 집짐승먹이로 리용하려 한다는 보고를 받으신 그이께서는 저 아까운것을 왜 집짐승에게 먹이겠는가고 하시며 동무들중에 누가 총각김치를 먹어본 사람이 있는가고 물으시였다.
한 일군이 어렸을 때 먹어보았다고 말씀드리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다시 그에게 고향이 어딘가고 물으시였다. 함경북도 선봉이라는 대답을 들으신 그이께서는 총각김치는 북쪽사람들이 많이 담그어 먹었다고 하시며 이번에는 총각김치의 유래에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일군들에게 총각김치는 가난한 사람들이 만들어 먹던 김치라고 하시며 작은 무우들을 뽑아 잎을 따지 않고 다듬어 맑은 물에 깨끗이 씻은 다음 끓는 물에 살짝 데쳐내여 양념을 해서 한달쯤 익히면 맛있는 김치가 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그러시고는 어렸을 때 만경대할머님이 담그어준 총각김치맛이 참 별맛이였다고 감회깊이 말씀하시였다.
주체62(1973)년 11월 어느날에는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저녁식사를 마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늘 저녁엔 김치가 입맛을 돋구어주었다고 하시면서 문득 곁에 있던 한 접대원에게 총각김치를 먹어본 일이 있는가고 물으시였다.
총각김치라는 이름조차 처음 들어본다는 그의 대답을 들으신 수령님께서는 그 유래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였다.
평양지방을 중심으로 한 북쪽지방에서는 총각김치라는것을 담그어 먹고있다. 총각김치라는것은 채 자라지 않은 어린 무우로 김치를 담근다는데서 유래된 김치이름이다. 총각김치는 잎이 달린 무우를 소금에 절구었다가 여러가지 양념과 버무려 담그고 물을 조금 해붓는데 동치미와 함께 김치의 원종이라고 할수 있다. 옛날 북쪽지방에서는 기후가 차서 무우가 채 자라지 않았는데 그것을 그대로 수확하여 김치를 담근것이 맛이 좋아 온 나라에 퍼졌다. 총각김치물로 국수를 말아먹으면 제격이다. 하루종일 일하면서 답답하던 가슴도 후련해지고 머리가 상쾌해진다. …
그이께서 들려주시는 총각김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접대원은 하나의 민족음식도 소홀히 하지 않으시고 귀중히 여기시는 그이의 뜨거운 민족애에 감동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평범하던 영채김치와 총각김치는 우리 민족의 음식전통을 적극 살려나가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은정속에 자기의 본색을 되찾은 이채로운 김치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민족음료-수정과
수정과는 예로부터 우리 민족이 즐겨 만들어 먹어온 특색있는 민족음료의 하나이다.
19세기 전반기에 편찬된 《동국세시기》에는 끓였다가 식힌 물에 곶감을 담그고 거기에 생강, 잣을 넣은것을 수정과라고 하며 겨울철음식이라고 기록되여있다.
달고 시원하면서도 향긋한 맛을 내는 수정과는 피를 맑게 하고 피로를 푸는데 효과가 크며 술을 마신 후 속을 편안하게 해주는것으로 하여 설명절때 많이 리용하였다. 또한 음식물의 소화흡수를 촉진시키고 이몸에서 피가 나는 증상을 치료하는데도 효과가 큰 건강음료로 널리 알려져있다.
그 맛이 독특하고 건강에도 좋아 전통적으로 만들어 먹은 수정과였지만 식료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다양한 음료들이 수많이 출현하여 사람들속에서 그 이름과 가공방법이 점차 삭막해지고있었다.
주체58(1969)년 1월 중순 어느날이였다.
이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한겨울의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어느 한 려관을 찾으시여 봉사사업을 잘하는데서 나서는 문제들에 대하여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주시다가 문득 접대원에게 식사안내표 같은것이 없는가고 물으시였다.
그가 가져다 올린 식사안내표를 한동안 보시던 그이께서는 거의나 유럽음식이고 조선음식은 몇가지 안된다고 하시면서 료리의 민족적특성을 살리기 위해서 개성료리를 비롯한 고유한 조선음식을 다 찾아내여 그것을 장려하고 발전시켜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우리 인민들이 조상대대로 즐겨 만들어 먹은 고유한 조선음식이 많다고 하시면서 어느 한 일군의 집에 가시여 드신적이 있는 수정과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시였다.
그 집 아주머니는 전문료리사도 아닌 평범한 가정부인이였지만 수정과를 만드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였다.
그래서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 집 아주머니에게 수정과를 어떻게 만들었기에 이렇게 맛이 좋은가고 물으시였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로인들에게서 수정과를 만드는 방법을 배웠는데 로인들의 말대로 하였더니 누구나 다 자기가 만든 수정과를 좋아한다고 말씀드렸다.
그이께서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시고나서 접대원에게 수정과가 어떤 음식인지 아는가고 물으시였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수정과를 알고는 있는데 무엇으로 만드는지 잘 모른다고 솔직히 말씀드렸다.
그의 대답을 들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시고 수정과는 생강을 우린 사탕물에 곶감, 잣, 계피가루 같은것을 띄운 음식이라고 가르쳐주시면서 수정과와 같은 좋은 민족음식을 많이 발굴하여 봉사할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으로부터 또 하나의 민족음식을 알게 된 접대원은 남다른 기쁨에 휩싸여 접대봉사를 더 잘해나갈 결의를 마음속으로 굳게 다지였다.
사람들의 머리속에서 점차 삭막해지고있었던 수정과는 이렇게 되여 다시 빛을 보게 되였다.
개성의 특식-추어탕
추어탕은 두부와 미꾸라지를 넣고 끓인 음식으로서 맛좋고 영양가가 높아 예로부터 소문난 보양음식의 하나로 일러왔다.
12세기초에 편찬된 《고려도경》이라는 책에 미꾸라지를 료리에 리용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져오는것만 보아도 추어탕은 력사가 오랜 음식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지난 시기 추어탕은 어느 지방에서나 다 만들어 먹었지만 그중에서도 미꾸라지와 모두부를 간장과 고추장으로 간을 맞추어 끓이다가 파, 고추, 마늘, 방아잎을 넣어 끓인 다음 산초가루를 뿌려 만든 개성지방의것이 제일 유명하였다.
주체61(1972)년 9월 중순 어느날 개성시를 찾으시여 새로 건설한 백화점을 돌아보시던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문득 일군들에게 개성의 기본특식이 무엇인가고 물으시였다.
일군들은 상밥, 설렁탕, 약과 등 개성에서 일러주는 여러가지 민족음식들을 아는껏 말씀드리였다. 그러나 어느 하나도 그이께 만족을 드리지 못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찾으시는 개성특식은 무엇일가.
일군들이 몹시 궁금해하였지만 그이께서는 웃기만 하실뿐이였다.
그러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개성에서 오래 산 로인들을 만나시여 개성특식이 무엇인가고 물으시였다.
한 로인이 예로부터 개성에서는 추어탕을 별식으로 일러왔다고 말씀올리였다.
그제서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개성사람들은 추어탕을 좋아하였다고, 추어탕이라는것은 두부와 미꾸라지를 넣고 끓인것이라고, 지난날 개성사람들이 만들어 먹던 이런 특식을 다 찾아내여 인민들에게 봉사해주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고 말씀하시였다.
정녕 세월의 흐름속에서 사라져가던 지방의 고유한 민족음식 하나에도 깊은 관심을 돌리시고 찾아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은정속에 경치 아름다운 개성시 자남산기슭에는 추어탕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번뜻하게 일떠서게 되였으며 오늘도 찾아오는 사람들을 반겨맞아 봉사해주고있다.
옛 모습을 되찾다
평양쟁반국수는 예로부터 평양랭면과 함께 평양의 이름난 음식으로 알려져있다. 력사가 오랜 평양쟁반국수가 오늘도 자기의 고유한 맛과 멋을 그대로 살려나가고있는데는 이런 뜻깊은 사연이 있다.
주체78(1989)년 4월초 새로 증축한 옥류관을 찾으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일군들에게 옛날 평양의 쟁반국수를 먹어본 사람이 있는가고 물으시였다.
누구도 대답을 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일군들중에는 그때의 쟁반국수가 어떠했는지 먹어본 사람도 없거니와 아는 사람도 없었던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에게 옛날의 평양쟁반국수에 대하여 설명해주시면서 그때에는 뜨스한 온돌방에 여럿이 둘러앉아 큰 쟁반에다 국수와 꾸미를 많이 담아놓고 국수가 식을세라 더운 육수를 계속 부어가면서 같이 먹었다고 말씀하시였다.
일군들은 그이의 가르치심을 깊은 자책속에 받아안았다.
더운 육수에 마는 쟁반국수의 고유한 특징을 외면하고 언제나 찬 육수만을 두어 봉사했기때문이였다.
이러한 실태를 알고계신듯 그이께서는 찬 육수에 국수를 마는것은 쟁반국수가 아니라 랭면이라고 하시면서 쟁반국수를 마는 방법에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쟁반국수에 붓는 육수는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고 맞춤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사람들이 더운국수를 요구하면 주전자에 더운 육수를 담아서 부어먹게 하고 찬국수를 먹고싶어하면 육수를 식혀서 부어먹게 하면 된다고 일일이 일깨워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쟁반국수는 더운 음식인것만큼 김치 같은것은 적게 놓고 고기를 많이 놓아야 한다고 하나하나 일깨워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민족음식에 대한 해박한 식견으로 고유한 특징을 밝혀주시여 비로소 자기의 옛 모습을 되찾은 평양쟁반국수는 오늘도 옥류관을 비롯한 이름난 식당들에서 널리 봉사되고있다.
로동당시대의 음식문화로
주체93(2004)년 6월 24일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민속음식품평회장을 찾으시였다.
품평회장에는 옥류관, 청류관을 비롯한 여러 급양봉사단위들에서 내놓은 다양한 민족음식들과 그에 따르는 집기류들, 각종 참고도서들이 전시되여있었다.
하나하나의 전시품들을 주의깊게 보아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급양부문의 일군들과 근로자들이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주체성과 민족성을 철저히 확립할데 대한 시대적요구에 맞게 민족음식유산들을 옳게 계승발전시켜 특색있는 여러가지 민족음식들을 훌륭히 만들어낸데 대하여 커다란 만족을 표시하시고 그들을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전통적인 민속음식을 빠짐없이 찾아내여 발전시키는것은 우리 인민들의 식생활을 보다 윤택하고 문명하게 하는데서뿐아니라 사람들에게 민족적긍지와 자부심, 애국애족의 정신을 심어주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하시면서 지난 기간 민족문화유산을 계승발전시키는데서 력사주의원칙과 현대성의 원칙을 일관하게 견지하여 복고주의와 민족허무주의를 다같이 경계하도록 한 결과 선조들이 이룩한 우수한 음식문화가 우리 시대에 와서 더욱 개화발전되고있다고 기쁨에 넘쳐 말씀하시였다.
이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우리의 민족음식을 장려하고 더욱 발전시켜나가는데서 중요하게 나서는 과업들도 구체적으로 제시해주시였다.
선조들이 대대로 내려오면서 창조한 우수한 민속음식들을 모두 찾아내여 시대적요구에 맞게 더욱 발전시키고 도별로 자기 지방 토배기료리의 특성을 잘 살려나가는것이 중요하다.
료리가공기술과 식료가공기술을 발전시켜 민족음식의 특성을 적극 살리며 일군들이 민족료리를 내세우고 발전시키기 위한 사업에 관심을 돌리고 요구성을 높여야 한다. …
그러시면서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우리는 선조들이 창조한 민속음식들을 우리 대에 빠짐없이 찾아내고 시대적요구와 미감에 맞게 더욱 발전시켜나감으로써 온 나라에 민족의 향취가 흘러넘치게 하여야 한다고 간곡하게 말씀하시였다.
전체 품평회참가자들은 민족음식발전의 고귀한 지침을 밝혀주시는 위대한 장군님을 우러르며 그이의 숭고한 뜻을 높이 받들어 조선민족의 우수한 음식문화를 빛내이는 사업에서 새로운 전환을 일으켜나갈 불타는 결의를 다시금 굳게 가다듬었다.
그해 9월 전국지방특산물료리전시회가 열리였는데 전시회에는 700여점의 특산물료리와 260여점의 명절음식, 90여점의 토장음식이 출품되였다.
전시회는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애국의 열정을 안겨주고 로동당시대의 음식문화를 더욱 빛내여나가는데서 의의깊은 계기로 되였다.
그릇자랑과 반상기
반상기는 우리 인민들이 오랜 옛날부터 식생활에 리용해온 음식그릇으로서 밥사발과 국사발을 비롯하여 접시, 보시기, 양념단지, 주전자와 술잔, 수저 등 격식을 갖추어 밥상 하나를 차리게 만든 한벌의 그릇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반상기에 속하는 그릇은 사기, 놋 또는 나무로 만든것이 보통이였지만 은으로 만든 고급한것도 있었다.
반상기로 상을 차리면 한결 품위가 있었으므로 우리 나라에서는 명절이나 집에 온 귀한 손님을 대접할 때에는 반상기로 상을 차리는것을 하나의 자랑으로, 풍습으로 여겨왔다.
우리 민족의 생활풍습과 정서가 깃들어있는 전통적인 반상기는 지난날 일제식민지통치의 후과로 하여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게다가 극히 적은 도자기공장에서 수공업적인 방법으로, 그것마저도 옹근 한질을 다 갖추지 못하고 몇가지에 국한하여 만들고있었다.
이러한 실태를 헤아려보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주체72(1983)년 10월 어느날 새로 만든 여러가지 사기그릇들을 보아주시면서 옛날에는 반상기라는것도 있었는데 지금은 볼수가 없다고, 옛날부터 내려오는 반상기처럼 상을 한상 차릴수 있게 사발, 대접, 보시기, 접시 등 여러가지 사기그릇들을 한질로 갖추어 팔아주면 인민들이 아주 좋아할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그로부터 두달후인 12월 중순 어느날이였다. 반상기견본품을 만들었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전시장에 나오시여 그릇들을 일일이 보아주시고나서 이것이 반상기라고, 우리 인민의 전통적인 사기그릇일식이라고 기쁘신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아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가운데도 반상기라는 말을 처음 들어보는 동무들이 있을것이라고 하시면서 반상기에 대하여 설명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반상기는 밥상 하나를 차리는데 필요한 그릇들의 일식을 말하는데 지난날 급에 따라 그릇의 개수가 다르기는 했지만 우리 인민들의 고유한 생활양식과 정서에 맞게 여러가지 그릇들이 구색을 갖추어 한벌을 이루고있었다고 하시였다.
지난날 우리 조상들은 반상기를 몇개 급으로 구분하였는데 접시의 개수를 기준으로 하여 3개일 때에는 3첩, 5개일 때에는 5첩 하는 식으로 홀수로 9첩까지 4개 급으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특수하게 12첩반상기가 있었는데 이것은 오직 왕만이 쓰게 되여있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반상기를 아주 잘 만들었다고, 가지수도 많고 모양새도 곱다고 다시금 높이 평가해주시고나서 예로부터 조선녀성들이 좋아하는 세가지 자랑중에서 자식자랑 다음이 그릇자랑이라고 했는데 이런 반상기를 많이 만들어 팔아주면 집집마다 하나의 자랑거리가 더 생길것이 아닌가고 하시며 환하게 웃으시였다.
우리 인민들에게 질좋은 반상기를 안겨주시려고 마음쓰신 장군님께서는 그후에도 반상기의 질을 높이기 위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고 그를 위한 대책들도 취해주시였다.
수많은 견본품들과 과학기술도서들도 보내주시고 강력한 기술력량을 무어주신 위대한 장군님.
그 사랑속에 자체의 원료로 질좋은 반상기들이 생산되였을 때에는 그토록 만족해하시며 친히 감사까지 보내주신 그이의 정력적인 령도에 의하여 반상기는 짧은 기간에 새로운 질적높이에 올라서게 되였다.
지난날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그 이름마저 희미해졌던 반상기는 이렇듯 민족의 고유한 풍습을 귀중히 여기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각별한 사랑과 관심속에 로동당시대에 와서 세상에 두번다시 태여나게 되였다.
발견
온돌이 앉아서 생활하는 조선사람의 풍습에 맞게 창안도입된 우리 민족고유의 독특한 난방시설이라면 뻬치까는 서서 생활하는 유럽사람들의 풍습에서 발생발전한 난방시설이라고 말할수 있다.
조선민족의 슬기와 지혜가 깃들어있는 온돌은 고대시기부터 발생발전하여 우리 민족의 주택생활에 널리 리용되여왔다.
온돌은 뻬치까에 비해볼 때 많은 우점들을 가지고있다.
온돌은 부엌에서 밥지을 때 나는 열을 리용하기때문에 땔감의 랑비가 없고 난방시설이 방바닥에 설치되여있어 살림방면적을 합리적으로 리용할수 있으며 아래목과 웃목의 온도차이로 하여 사람들이 자기의 기호와 건강상요구에 맞게 리용할수 있다. 뿐만아니라 아궁이 부엌에 자리잡고있어 항상 맑은 방안공기를 유지할수 있고 신경통, 관절염을 비롯하여 사람들의 건강과 병치료에 아주 효과가 크다. 민간에서 흔히 더운 온돌방에서 한잠 자고나면 병이 저절로 낫는다고 하는것은 결코 우연한 말이 아니다. 하기에 우리 인민은 뻬치까난방형식보다 온돌을 더 좋아하였던것이다.
전후복구건설이 한창이던 주체43(1954)년 10월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대동강기슭에 새로 일떠서는 어느 한 살림집건설장을 찾으시였다.
그 살림집으로 말하면 전후 평양에서 처음으로 건설되는 다층살림집들중의 하나였다.
살림집의 내부구조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료해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건설전문일군들에게 다층살림집에도 조선사람들이 좋아하는 온돌을 놓을수 없는가고 물으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나라에서 건설되는 살림집들에는 다른 나라에서처럼 뻬치까를 놓게 되여있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뜻밖의 물으심에 일군들은 얼른 대답을 올리지 못하였다. 다층살림집에 온돌을 놓을데 대하여서는 아직 그 누구도 생각해보지 못하였으며 또 이제껏 그 어느 나라에서도 해본 일이 없었기때문이다.
건설전문일군들은 다층살림집에 온돌을 놓는 문제를 가지고 속궁냥을 해보았다. 그런데 얼핏 생각해보아도 단층집과 달리 다층살림집에 온돌을 놓자면 해결해야 할 어렵고 복잡한 기술적문제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온돌과 부엌바닥의 높이보장문제, 건축물의 수명에 미치는 석탄가스의 영향극복문제, 건물에 실리는 온돌의 중량극복문제 등…
그들의 설명을 들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빠트에 온돌을 놓기 곤난할것 같다는데 온돌을 놓을수 있다고, 조선사람들은 예로부터 온돌방에서 살아왔기때문에 침대생활은 우리 생활풍습에 잘 맞지 않는다고 일깨워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우리 인민들의 생활풍습대로 온돌을 놓도록 연구해볼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다층살림집에 온돌을 놓을데 대한 문제를 두고 깊이 마음쓰신것은 이때뿐이 아니다.
주체50(1961)년 10월 어느날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새로운 살림집설계도면을 보아주시는 자리에서 온돌식으로 다층살림집의 난방을 보장할데 대하여 또다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당시 그 설계에는 살림방에 방열기를 설치하기로 되여있었다.
설계도면을 주의깊게 살펴보시고나서 생각에 잠기시였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설계일군들에게 방열기만으로는 추울수 있기때문에 온돌식으로 하는것이 좋겠다고, 우리 인민은 온돌을 더 좋아한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앞으로 난방은 방바닥에 관을 넣어서 온돌식으로 할데 대하여 설계가들도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방법까지 가르쳐주시였다.
온수온돌식난방방법, 그것은 조선사람의 생활풍습과 기호를 속속들이 꿰드시고 난방을 놓아도 남의 식보다 우리 민족의 고유한 민속전통을 더없이 중시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만이 찾아내실수 있는 새로운 발견이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이렇듯 크나큰 심혈과 은정이 슴배여있는 온수온돌식난방은 그후 모든 다층살림집들에 전면적으로 도입되게 되였다.
풀린 수수께끼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의 울창한 수림속에는 동방의 천년강국으로 이름떨친 고구려의 건국시조 고주몽(동명왕)의 릉이 있다.
여기에는 자기 시조왕인 고주몽(B. C. 298-B. C. 259년)에 대한 고구려사람들의 남다른 자부심과 숭배심이 깃들어있다.
고주몽은 B. C. 277년에 우리 나라 력사에서 첫 봉건국가인 고구려를 세운 시조왕으로서 건국초기에 주변의 여러 소국들을 통합하여 강대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하기에 고구려사람들은 고주몽을 숭배하고 신적인 존재로 여기였으며 사후에는 좋은 자리에 안장하고 릉도 잘 만들었다.
고주몽의 무덤은 원래 그가 활동하다가 죽은 고구려의 첫 수도인 졸본(오늘의 중국 료녕성)에 있었다. 그러던것을 고구려사람들이 427년에 수도를 집안(오늘의 중국 길림성)으로부터 평양으로 옮길 때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던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초까지만 하여도 우리 나라 력사학계에서는 동명왕릉의 주인공문제를 둘러싸고 오래동안 론의가 분분하였다. 거기에는 그럴만 한 사연이 있었다.
지난날 일제와 그에 추종한 반동어용사가들은 고주몽은 전설에 나오는 환상적인 인물이며 따라서 동명왕릉도 가짜라는 헛소문을 날조하여 퍼뜨리였다.
게다가 해방후 반당종파분자들과 사대주의에 물젖은 일부 사람들은 고주몽이 졸본에 첫 수도를 정하고 그곳에서 살다가 죽었는데 어떻게 평양에 그의 묘가 있겠는가고 하면서 동명왕릉의 존재사실을 한사코 부정해나섰다.
그리하여 동명왕릉의 주인공문제는 좀처럼 풀수 없는 수수께끼로 오래동안 남아있게 되였다.
이 문제를 두고 그 누구보다도 가슴아파하시며 사색에 사색을 거듭하시던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1970년대 중엽의 어느해 일군들과 함께 한편의 기록영화를 보신적이 있었다.
화면에는 꿈결에도 그리던 어머니조국의 품에 안기는 재일동포들의 감격과 환희, 그들을 맞이하는 조국인민들의 뜨거운 동포애가 넘쳐흐르는 가운데 유골함을 안고 배에서 내리는 동포들의 모습도 실리였다.
이 장면을 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 보시오, 조선사람들은 저렇게 이역만리에서도 자기 조상의 유골을 가지고 오지 않는가, 하물며 강대하였던 고구려사람들이 자기의 건국시조의 묘를 버리고 올수 있겠는가고 확신에 넘친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주체63(1974)년 1월 하순 어느날 한 일군을 부르신 그이께서는 최근 고구려시기 력사를 연구해본데 의하면 왕이 쓰고살던 사당은 두고 올수 있지만 시조왕의 무덤은 두고 올수 없다고, 고구려가 도읍을 평양으로 옮길 때 동명왕의 묘지도 평양으로 옮겨 현재의 위치에 만들어놓은것으로 보는것이 정확한것 같다고 하시면서 발굴사업을 심화시켜볼데 대한 과업을 주시였다.
이렇게 되여 국가적인 관심속에 동명왕릉에 대한 조사발굴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였다. 그 과정에 릉에서는 금, 은, 동으로 만든 100여개의 왕관장식품들과 관못, 구슬과 머리빗 등 귀중한 유물들이 발굴되였으며 오랜 세월 스며내린 돌물에 가리워 보이지 않던 무덤벽화도 찾아내게 되였다. 뿐만아니라 왕릉앞에서 방대한 규모의 사찰터와 함께 《정릉》, 《릉사》라는 글이 새겨진 기와쪼각들도 찾아냄으로써 오래동안 미해명으로 남아있던 동명왕과 동명왕릉고증문제가 비로소 해명되게 되였다.
그후 주체65(1976)년 11월말 김일성종합대학을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대학의 교원, 학생들이 새로 발굴해낸 동명왕릉의 유물들을 하나하나 보아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일군들을 둘러보시며 동명왕릉은 자기 조상의 묘에 대한 조선사람들의 신조와 관련된 문제이라고, 고구려사람들은 건국시조인 동명왕을 신격화하였던것만큼 도읍을 평양으로 옮길 때 건국시조의 묘를 줴버리고 나올수는 없었을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원래 조선사람들은 자기 조상의 묘를 함부로 줴버리고 다니지 않는다고 하시며 그전에 기록영화에서 보시였던 사실을 이야기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지금 다른 나라에 가서 살던 사람들도 조국으로 귀국할 때에는 자기 부모들의 유해를 상자에 넣어가지고 오는데 하물며 강대했던 고구려사람들이 자기들의 건국시조의 릉을 줴버리고 다닐수야 없지 않는가고 하시였다.
이렇듯 하나의 력사문제를 해명하는데서 그 어떤 문헌자료보다도 조상전래의 풍습을 더 중시하시고 내세우신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민족애에 의하여 오랜 기간 갑론을박하며 풀지 못하고있던 수수께끼는 드디여 풀리게 되였으며 그후 동명왕릉은 고구려시조왕의 무덤으로 명백히 고증되게 되였다.
오늘도 고구려시조왕릉의 체모에 어울리게 웅장하게 개건된 동명왕릉을 찾으면 누구나 해설강사들로부터 오래동안 론의가 분분하였던 동명왕릉의 주인공을 어느분이, 어떤 심혈을 바쳐 찾아주시였는가 하는 그날의 이야기를 감동깊이 들을수 있다.
300kg과 400kg
1960년 9월 어느날 청순한 가을하늘아래 풍년의 낟알향기 넘치는 청산벌은 위대한 김일성주석을 모신 기쁨으로 더없이 설레이였다.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수양버드나무둘레에 모여앉은 농장원들은 기쁨에 넘쳐 들썩거리였다.
한 농장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수령님께 올해에는 1년 먹을 낟알만 집으로 가져가고 나머지는 나라에서 곧장 사주도록 해주었으면 한다고 말씀올리였다. 곁에 앉은 다른 농장원들도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한마디씩 덧붙였다.
그러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렇다면 한사람앞에 얼마씩이나 남기면 1년간 식량이 넉넉할것 같은가고 물으시였다.
이때 다른 농장원이 그저 아이, 어른 할것없이 한사람앞에 벼 대여섯가마니만 있으면 넉넉하다고 말씀올리였다.
그의 대답을 들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300kg이라… 그것도 좀 적습니다, 군대에 나갔던 아들이 제대되여오는 집도 있겠고 또 공장에 가있는 딸이 휴가를 받고 놀러도 올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시집갔던 딸도 친정집에 나들이올것이고… 그러면 부모보러 오는 자식들에게 《공급받은 쌀을 가지고 오너라.》 하겠습니까라고 말씀하시였다.
그바람에 와- 하고 한바탕 웃음판이 터졌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도 크게 웃으시였다. 이윽고 그이께서는 옛날부터 조선사람들은 장마당에서 사돈님을 만나도 쌀 판 돈으로 술 한잔 대접해보내는 풍습이 있는데 1년에 한번이라도 사돈님이 찾아오면 대접도 해야 할것이 아닌가고 하시면서 그러니 1년에 아이, 어른 할것없이 한사람앞에 400kg씩은 남겨놓아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인심이 후더운 우리 민족의 가정생활풍습을 헤아리시여 집집마다 제대되여올 아들과 나들이올 시집간 딸의 몫에 사돈님대접몫까지 찾아주시여 정해주신 분배몫, 정녕 이것은 농장원자신들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분배몫이였다.
이렇게 되여 그해 이곳 농장원들은 집집마다 부모보러 오는 자식뿐아니라 사돈님대접몫까지 합쳐 분배몫을 받게 되였다.
300kg과 400kg, 단순한 수자로만 볼수 없는 이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해들은 청산리만이 아닌 온 나라 농업근로자들은 우리 인민의 민속풍습을 찾아주시고 헤아려주신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크나큰 사랑에 기어이 쌀로써 보답할 결의를 굳게 다지였다.
밤 12시
온 나라 강산에 해방의 감격과 기쁨이 차넘치던 1945년 12월 31일 밤 12시 평양의 밤하늘에 제야의 종소리가 은은히 구성지게 울려퍼졌다.
제야의 종은 한해의 마지막날인 섣달그믐날 밤에 새해를 알리는 의미에서 치는 종 또는 종소리를 말한다.
오랜 옛날부터 평양을 비롯한 우리 나라의 큰 도시들에서는 한해의 마지막시각 즉 섣달그믐날 밤 12시에 맞추어 종소리를 울려 새해가 시작됨을 알려주군 하였다.
평양에서는 평양종을 울리여 사람들에게 새해를 알려주었다.
높이 3. 1m, 너비 1. 6m에 12t 914kg의 무게를 가진 평양종은 화재로 인하여 원래의 종이 못쓰게 된것을 1726년 6월부터 9월까지 약 4개월간에 걸쳐 다시 주조한 종으로서 모양이 아름답고 그 소리 또한 장중하여 평양의 자랑으로 손꼽히였다.
제야의 평양종소리가 얼마나 우렁찼던지 100리 밖에서까지 그 종소리를 들을수 있었다고 한다. 집집마다 불을 켜놓고 명절준비를 다그치던 평양사람들은 제야의 종소리에 맞추어 조상들을 추모하는 제사도 지내고 밤새도록 온 집안식구들이 모여앉아 윷놀이를 비롯한 다채로운 민속놀이를 하며 새해 첫아침을 맞이하군 하였다.
이렇듯 평양사람들의 가슴속에 류다른 감흥과 희망을 안겨주던 제야의 평양종소리는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오래동안 침묵만을 지켜왔다.
조상대대로 내려오며 기대와 환희속에 즐겁게 쇠군 하던 새해명절을 일제의 가혹한 억압과 략탈로 민족적인 모든것을 다 잃은 울분과 통탄속에 맞고 보내지 않으면 안되던 수난의 시기였으니 어찌 제야의 종소리가 울릴수 있었으랴.
그러던 제야의 평양종소리를 해방된 조국땅에서 처음으로 맞는 새해전야에 듣게 되였으니 평양사람들의 감격과 기쁨은 그 어디에도 비길수 없이 컸다.
하지만 어떻게 되여 평양종이 울리게 되였는지 그 사연에 대하여 아직은 누구도 알지 못하였다.
일일천추로 고대하던 해방의 열기가 온 강산을 진감하던 주체34(1945)년 12월의 마지막날 아침, 전화로 평양시의 한 책임일군을 찾으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시민들의 설준비정형을 알아보시고나서 문득 평양종을 칠만 한가고 물으시였다.
너무도 뜻밖의 물으심이여서 일군은 미처 대답을 올릴수 없었다.
그의 심정을 헤아리신듯 잠시 동안을 두시였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제침략자들이 없는 세상에서 처음으로 맞는 설날을 전체 인민이 즐겁고 뜻깊게 지내도록 하여야 한다시며 오늘 밤 12시에 평양종을 울리도록 할데 대하여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평양종이 일제가 우리 나라를 강점한 후 놈들에게 눌리여 자기 소리를 내지 못하고있었으나 이제는 해방이 되였으니 응당 제 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이렇게 되여 그날 밤 12시 해방후 처음으로 제야의 종소리가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우리 인민에게 북받치는 해방의 감격을 새로이 안겨주며 힘있게 울려퍼지게 되였던것이다.
뗑- 뗑- 뗑-
평양의 밤하늘가로 울려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은 민족의 머리우에 무겁게 드리웠던 망국의 비운을 가셔주시고 자기들의 가슴속에 류다른 감정과 희망을 안겨주던 제야의 종소리까지 찾아주신 절세위인의 은덕이 너무도 고마와 목청껏 김일성장군 만세를 웨치며 감격의 눈물을 머금었다.
새로 생긴 결혼식풍습
주체75(1986)년 5월 어느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결혼식은 사람의 일생에서 중요한 경사인데 결혼식전문식당을 잘 꾸려야 한다고 은정깊은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이께서는 결혼식전문식당을 리용하면 결혼식을 집에서 하는것보다 편리할뿐아니라 경제적일것이라고 하시였다.
사실 결혼식전문식당을 내오면 신랑과 신부집이 한곳에 모여 결혼식을 간편하면서도 의의있게 하는 등 여러모로 편리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경흥거리 야시장건물가운데서 결혼식전문식당으로 쓰기 좋은 건물을 하나 선택하여 멋있게 꾸려야 한다고 간곡하게 말씀하시였다.
그때로부터 1년후인 주체76(1987)년 9월 어느날이였다.
새로 꾸린 결혼식식당을 찾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여러쌍의 결혼식을 동시에 진행할수 있게 한것도 좋고 신랑신부가 앉을 자리를 특색있게 한것도 좋다고 하시면서 신랑신부자리뒤에 걸어놓은 수예병풍 《금강의 꿩》을 아주 잘 형상한데 대하여 치하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그이께서는 평양시에 결혼식전문식당을 꾸려놓았기때문에 앞으로는 시민들이 결혼식을 자기 집에서 하지 않고 여기 와서 하자고 할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이어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결혼식장과 결혼식장사이의 간막이를 밀페식으로 하지 않고 개방식으로 한것은 잘못되였다고 하시면서 이쪽에서 축사를 할 때 저쪽에서 노래를 부르며 떠들게 되면 방해가 될수도 있으니 앞으로 운영해보면서 고칠데 대하여 일깨워주시였다. 그리고 손님좌석수도 결혼식에 참가하는 가족, 친척, 친우들의 필요한 인원수만큼 정할데 대하여서도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신혼부부들을 위하여 식당에 결혼사진도 찍을수 있게 사진기도 마련해주며 기념품매대도 꾸려놓는 등 결혼식전문식당운영에 필요한 여러가지 조치들을 취해주시였다.
그이의 은정어린 조치에 의하여 결혼식전문식당들이 나오게 되면서부터 사람들속에서는 이 식당들을 즐겨 리용하여 결혼식을 편리하게 하는 새로운 풍습이 생겨나게 되였다.
민속전통계승《특강》
주체98(2009)년 11월 20일이였다.
이날 일군들과 자리를 같이하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바쁘신 시간을 내시여 우리 민족의 우수한 민속전통을 적극 살려나갈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우리 민족의 민속전통에는 민족의 유구성과 우수성이 깃들어있으며 우리 인민의 고상한 정신세계와 고유한 생활세태가 반영되여있다고 하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잠시 생각에 잠기시였다가 의미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민족의 우수한 민속전통을 살려나간다는것은 우리 인민이 대를 이어 전해오는 미풍량속과 민족의 슬기와 재능이 깃들어있는 창조물들을 귀중히 여기고 시대적요구에 맞게 계승발전시켜나간다는것입니다. …
그러시면서 민속전통을 적극 살려나가야 사람들에게 민족의 넋과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정신을 심어주며 그들이 높은 민족적자존심을 가지고 민족의 슬기와 재능을 계속 꽃피워나가게 할수 있다고, 이것은 민족성을 고수하고 조선민족제일주의정신을 발양시키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강조하시였다.
너무도 통속적이면서도 심오한 그이의 가르치심을 받아안는 일군들의 생각은 깊어졌다. 민속전통을 살려나가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은것이였다.
하기에 지난 시기 민족음식과 민족옷차림, 민속놀이를 장려하고 민속명절들을 즐겁게 쇠도록 하였으며 민속거리도 건설하고 민속무용과 민요들을 적극 찾아내여 창조공연하도록 장군님께서 그 얼마나 깊은 관심을 돌려오시였던가.
일군들은 민족의 향취가 가득 넘쳐나는 이 땅의 현실이 주마등처럼 안겨와 가슴이 끝없이 설레이였다.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보신듯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우리는 앞으로도 우수한 민속전통을 적극 찾아내여 그것을 계속 살려나가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한가지한가지씩 실례를 들어가며 깨우쳐주시였다.
- 옛날에 함경남도의 일부 지방에는 부모들이 시집장가를 가는 자식들에게 조선기와를 마련해주는 풍습이 있었다. 그들은 기와터에서뿐아니라 부엌아궁에 불을 지필 때마다 생기와를 한두장씩 넣어 구워냈는데 한해동안이면 집 한채에 이을 기와를 다 장만하였다고 한다. 그 고장들에 가면 어느 집에 가나 기와를 쌓아놓은것을 볼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지난해 함경남도를 현지지도하면서 도에서 집들에 조선기와를 쌓아놓는 풍습을 살려나가도록 하였다.
- 숯을 구워 일상생활에 널리 리용한것도 우리 민족의 고유한 풍습이다. 우리 인민들은 오랜 옛날부터 숯을 잘 만들었다. 숯을 잘 구워가지고 호미와 낫을 비롯한 생산수단과 창과 칼을 벼리였으며 불고기도 하고 화로도 피웠다. 새 세대들이 숯구이방법에 대하여 잘 알게 하여야 한다.
- 우리 인민들은 오래전부터 도자기그릇을 많이 만들어 리용하였다. 고려시기의 청자기와 조선봉건왕조시기의 백자기는 오늘도 유명하다. 우리 나라 도자기는 다른 나라 사람들도 인정하고있다. 경질유리그릇이 나온다고 하여 거기에만 매달리지 말고 지난 시기 지방들에서 생산하던 도자기제품들을 계속 생산하도록 하여야 한다.
- 봉산탈춤은 봉건관료배들과 중들의 부패상을 풍자하고 불행과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근로인민들의 항거정신을 반영한 춤과 노래, 재담형식으로 되여있는데 우리 사람들에게 잘 알려주어야 한다.
- 절을 하는 우리 식의 고상한 인사법도 잘 살려나가야 한다. 지금 사람들은 서로 만나면 절을 하는것이 아니라 악수를 하고있는데 그런것도 우리 민족의 풍습에 맞게 바로잡아야 한다.
민속전통에 대한 그이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일군들은 정녕 김정일장군님이시야말로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속전통의 수호자이시라는 생각으로 가슴을 들먹이였다.
그리고 그이로부터 민속전통을 살려나가는데서 지침으로 삼아야 할 《특강》을 받은 행운을 지닌것으로 하여 무한한 기쁨을 금할수 없었다.
민속명절을 시대적요구에 맞게
언제인가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일군들과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문득 우리 나라에 민속으로 전해내려오는 명절이 몇이나 되는가고 물으신적이 있었다.
그이께 대답을 올리느라 일군들은 제가끔 속구구를 해보았다.
그러는 일군들을 정겹게 바라보시던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우리 민족의 명절풍습들을 사회주의적생활양식에 맞게 잘 살려나가야 한다고 하시였다.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은 해마다 설명절, 정월대보름, 일군날, 삼월삼질, 류두, 백종, 추석, 중구 등 여러가지 민속명절을 즐겨 맞아왔다. 이러한 민속명절에는 윷놀이, 바줄당기기, 씨름, 그네뛰기, 널뛰기를 비롯한 다채로운 민속놀이들이 진행되군 하였는데 그것은 집단적으로 로동의 피로를 풀고 휴식하기 위한것이였다.
그이께서는 《명절》이라는 말은 근대에 와서 생겨난 말이고 그전에는 민속명절을 《세시》 또는 《월령》(달별로 진행되는 민간행사), 《속절》(민간의 명절)이라고 불렀다고 하시면서 민속은 말그대로 근로인민대중속에서 생겨나고 발전하였으며 오늘까지 전해지고있는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풍습이라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로동의 보람과 미래에 대한 리상을 춤과 노래에 담아 즐긴것은 근면하고 지혜로운 우리 인민의 생활감정을 표현한것이며 조상의 산소를 돌아보고 제사를 지내는것은 례절이 밝고 의리가 깊은 우리 인민의 품성을 그대로 반영한것이라고 가르쳐주시였다.
계속하여 그이께서는 착취계급이 민속을 저들의 지배권을 강화하는데 악용하였기때문에 오늘에 와서 보면 민속에 허례허식이 덧붙여졌는데 이런것을 비판적으로 보고 좋은 점을 살려나갈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실로 그이의 말씀에는 시대의 요구와 인민의 지향에 맞게 우리 민속의 좋은 점을 잘 살려 민속명절을 보다 의의깊게 쇨데 대한 깊은 뜻이 담겨져있었다.
오늘 공화국에서는 우리 민속의 좋은 점을 잘 살려 설명절, 정월대보름, 추석과 같은 민속명절들을 국가적인 휴식일로 정하고 명절로 뜻깊게 쇠고있으며 이날에 사람들은 다양한 민속놀이 등을 하면서 즐거운 휴식의 한때를 보내고있다.
선군시대에 꽃펴난 민속명절
정월대보름은 우리 민족이 오랜 옛날부터 즐겨 쇠여온 민속명절의 하나이다.
력사기록에 의하면 정월대보름을 명절로 쇠여온것은 세나라시기부터였는데 고려시기에 이르러서는 정월대보름이 당시에 쇠던 9개의 명절가운데 하나로 되여있었다.
정월대보름명절은 보통 음력으로 1월 14일부터 시작되였는데 이날은 작은 보름이라고 하고 15일은 대보름(큰 보름)이라고 하였다.
해마다 이날을 맞으며 사람들은 새해에도 행복과 기쁨이 찾아들기를 바라는 소박한 마음에서 벼, 기장, 조 등의 낟알이삭을 장대에 매단 낟가리대세우기, 달맞이와 같은 여러가지 의례행사들을 진행하는 한편 약밥, 오곡밥, 마른나물반찬, 귀밝이술, 국수, 엿 등 특색있는 명절음식을 해먹고 연띄우기, 바람개비돌리기, 바줄당기기, 윷놀이를 비롯한 재미나는 민속놀이를 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잃었던 수난의 세월 정월대보름명절은 일제의 악랄한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하여 여지없이 유린당하였으며 그 후과로 하여 세월의 흐름과 함께 자기의 모습을 잃고 점차 사람들의 관심밖으로 밀려나게 되였다.
주체91(2002)년 2월말 일군들과 자리를 같이하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는가고 물으시였다.
뜻밖의 물으심에 일군들은 벽에 걸린 달력과 서로의 얼굴들을 마주볼뿐 아무런 대답도 올리지 못하였다.
그들을 다정히 둘러보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며 오늘이 음력으로 정월대보름날이라고 가르쳐주시였다.
이어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정월대보름이 어떤 날인가를 알고 지낼 필요가 있다고 하시면서 음력으로 1월 15일을 대보름이라고 하는것은 새해 첫달에 맞는 음력보름이라는 뜻에서 유래된것이라고 설명해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조상전래로 우리 인민들은 이날에 마른나물 9가지를 가지고 반찬을 만들고 오곡밥을 지어먹었으며 엿도 달여먹었다고 하시였다.
이윽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정월대보름이 어떤 날이며 무슨 음식을 만들어 먹는가 하는것과 같은 상식들도 알려주며 달력이나 탁상일력에도 정월대보름이라고 쓴것이 없는데 사람들을 계몽시키는 의미에서도 써넣는것이 좋겠다고 일깨워주시였다.
그이의 말씀을 받아안는 일군들의 가슴속에는 위대한 령도자를 모시여 민족의 전통이 빛나고 번영하는 내 조국의 오늘과 래일이 있다는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이 넘쳐났다.
주체92(2003)년 1월 중순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또다시 우리 민족이 력사적으로 쇠여오던 정월대보름명절을 적극 살려나갈데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그리하여 력사의 갈피속에 묻혀있던 정월대보름명절은 선군시대에 와서 다시 꽃펴나게 되였다.
해마다 이날을 맞으며 수도와 지방의 일터와 가정, 공원과 유원지들에서 민족의 정서가 넘치는 민속놀이들이 성황리에 진행되고 각지의 급양봉사망들에서는 오곡밥, 국수, 약밥을 비롯한 민족음식들을 봉사하는 이채로운 광경들이 펼쳐지게 되였다.
오늘도 우리 인민들은 정월대보름의 둥근달을 바라볼 때마다 빛을 잃었던 민족의 우수한 유산들을 보석을 고르듯이 하나하나 되찾아주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자애로운 모습을 그리며 명절을 뜻깊고 즐겁게 쇠고있다.
되찾은 탈춤
1946년 봄 평양에서는 어느 한 나라와의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예술교환의 밤》공연준비사업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고있었다.
건국사업으로 하셔야 할 일이 많으신 속에서도 공연준비정형을 료해하시던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예로부터 서북조선일대에서 널리 추어지고 전국적으로 소문난 가면무용극 《봉산탈춤》을 내놓는것이 좋겠다고 하시면서 해당 일군들을 현지에 파견하여 봉산탈춤의 원형을 찾아 공연준비를 완성할수 있도록 대책을 세워주시였다.
봉산탈춤은 인민들의 행복에 대한 지향과 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하는 항거의 정신을 반영한 진보적인 민속무용의 하나로서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다. 노래와 춤, 대사로 이루어진 봉산탈춤은 12개의 과장을 이루고 다채롭고 개성적인 춤동작들을 펼쳐보이고있다.
지난날 황해북도 봉산지방에서는 년중 5월초를 계기로 봉산탈춤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속에 성황리에 벌어지군 하였다.
그러나 조선을 강점한 일제의 악랄한 민족문화말살책동의 후과로 봉산탈춤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였다.
그러던 봉산탈춤이 해방의 봄을 안아오신 절세위인의 손길에 떠받들려 자기의 모습을 되찾게 되였으니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주체35(1946)년 6월초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회의실(오늘의 당창건사적관)에서는 위대한 김일성주석과 김정일장군님,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을 한자리에 모시고 봉산탈춤의 첫 공연이 진행되였다.
공연이 끝난 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봉산탈춤을 흥미있게 보았다고 하시면서 오랜 력사를 가진 탈춤이 일제놈들에 의하여 파묻혀있었지만 봉산지방에서 그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였다고 못내 만족해하시였다.
이날 그이께서는 선조들이 남긴 유산들가운데서 좋은것을 찾아내여 우리 인민들의 감정에 맞게 발전시켜야 한다고 하시면서 무용률동을 기본으로 하여 봉산탈춤을 더 훌륭히 완성하기 위한 방향과 방도를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그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봉산탈춤보존회를 결성하여 탈춤을 영구보존하기 위한 대책도 세워주시고 전후의 어려운 시기에도 봉산탈춤을 나라의 재보로 보존하고 계승발전시키기 위하여 작품을 가지고 기록영화를 만들도록 뜨거운 사랑을 베풀어주시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애국의 뜻을 그대로 이으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도 봉산탈춤에 각별한 관심과 은정을 돌려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1955년에 나온 기록영화 《봉산탈춤》을 다시 더 잘 편집하도록 하시고 기록영화가 훌륭히 완성되였을 때에는 나라의 민족예술발전에 적극 이바지할수 있도록 하여주시였다.
주체92(2003)년 여름 황해북도 은정축산전문협동농장을 찾으시였을 때에도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이곳 농장원들이 출연하는 민속무용 《봉산탈춤》을 보아주시고 더없이 만족해하시며 수십여년전에 보시였던 봉산탈춤에 대하여 감회깊이 추억하시였다.
이날 작품에 등장하였던 탈들에도 깊은 관심을 돌려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우리 선조들이 창조한 우수한 문화적재부를 옳게 계승발전시키는것은 주체성과 민족성을 고수하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민속무용을 적극 장려하고있는것은 아주 좋은 일이라는 과분한 평가의 말씀도 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전통적인 민속무용을 널리 보급하고 더욱 발전시켜나갈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이렇듯 어버이수령님의 사랑과 은정속에 자기의 모습을 되찾은 민속무용 《봉산탈춤》은 위대한 장군님의 숭고한 민족애와 세심한 지도에 의하여 현대적미감에 맞게 더욱 훌륭히 완성되여 오늘 전문단체들의 공연무대에서는 물론 민속명절날의 흥겨운 춤판마다에 등장하여 절찬받는 인기종목으로 되고있다.
활기를 띠다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속에서 창조되고 계승발전되여오는 민속놀이가운데는 어린이들의 심리적특성을 반영한 백수십여가지의 놀이들도 있다.
그가운데는 온몸의 힘을 키워주는 줄넘기, 돌아잡기, 공치기, 눈싸움놀이, 팽이치기, 팔씨름, 제기차기, 무릎싸움 등과 사고력을 틔워주는 산가지놀이, 꼬니, 칠교놀이, 글자찾기, 실뜨기와 같은 놀이들이 있다.
이러한 민속놀이들은 어느것이나 다 어린이들의 체력단련과 지능발달에 유익한것으로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면면히 전해오고있다.
온 나라가 고난의 행군, 강행군의 승리를 향한 진군길을 다그쳐나가던 주체87(1998)년 10월초 어느날이였다.
아직은 부족한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여서 일군들은 물론 자식을 가진 부모들도 아이들의 문화정서생활에 대해서까지는 깊이 관심하지 못하고있었다.
그렇지만 그 누구보다 미래를 사랑하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어린이민속놀이를 널리 장려할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전에는 팽이치기와 제기차기, 메뚜기치기를 비롯하여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유희가 많았는데 지금은 그런 놀이를 하는것이 없다고, 그전에는 어린이들이 강물우로 돌팔매질을 하여 돌이 물우로 여러번 스쳐지나가게 하는 놀음도 많이 하였다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최근에는 어린이들의 유희에 대한 책도 별로 나오는것이 없는것 같다고 지적하시였다.
일군들은 어려운 조건만 생각하며 제 할바를 다하지 못한 자신들이 민망스러워 얼굴을 붉히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어린이들이 민속놀이를 하는것을 단순한 놀음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그 과정을 통하여 그들이 우리 민족의 우수한 민족성을 배양해나가게 된다고 일깨워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어린이들속에서 민속놀이를 적극 장려하여야 자라나는 새 세대들이 조선민족의 우수한 민족성을 살려나갈수 있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어린이들의 동심세계와 체질에 맞는 민속놀이들이 세기를 이어 더욱 장려되게 하시려 그토록 마음쓰신 위대한 장군님의 크나큰 사랑과 은정어린 조치에 의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고난의 행군, 강행군을 하는 그처럼 어려운 속에서도 이르는 곳마다에서 어린이들의 민속놀이가 활기를 띠고 진행됨으로써 온 사회에 풍만한 정서와 랑만이 흘러넘치게 되였다.
오늘 나라의 방방곡곡 그 어디를 가보아도 행복에 겨운 아이들의 즐거운 민속놀이모습을 언제나 볼수 있다.
조선식의 색갈
우리 민족이 오랜 력사를 두고 창조하고 발전시켜온 섬세하고 우수한 민속공예품가운데는 자개박이옻칠공예품도 들어있다.
옻과 전복, 소라, 진주와 같은 희귀한 조개껍질소재와 섬세한 상감수법, 광택나는 흑칠 등 우수한 특성으로 우리 나라의 자개박이옻칠공예품은 수백년이 지나도 변치 않아 세상에 보물로 널리 알려져있다.
모든 분야에서 민족의 슬기와 전통을 고수하고 빛내이시려 언제나 마음쓰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민족의 자랑인 자개박이옻칠공예품에도 세심한 관심과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주체86(1997)년 12월 어느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어느 한 창작사에서 새로 만든 자개박이대형꽃병을 보아주시였다.
꽃병을 주의깊게 보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잘 만들었다고, 대단하다고 높이 평가하시고나서 옻칠을 하지 않고 수지칠감을 바른것은 좋은데 색갈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시였다.
사실 창작가들은 위대한 장군님에 대한 인민들의 절대적인 흠모의 마음을 상징하는데서 붉은색이 가장 적합하며 또 지금까지 붉은색꽃병이 없는 조건에서 새롭고 특색있는것으로 될것이라고 생각하고 꽃병의 바탕색을 붉은색으로 하였던것이다.
창작가들의 생각을 헤아려보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붉은색을 우리 식으로 새 질감이 나게 칠하였다고 하지만 근본바탕이 붉은색인 경우에는 다른 나라의 맛을 피할수 없다고 하시면서 자개박이공예의 전통으로 보아도 조선식은 까만색이 기본이라고, 까만색에 흰 자개박이를 하여 빛을 내는것이 조선식이라고 가르쳐주시였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의 자개박이옻칠공예는 까만색옻칠바탕에 정교하고 섬세한 흰 자개박이를 하는것이 전통화되여 내려왔다.
력사적으로 내려오는 우리 민족고유의 우수한 공예전통에 대하여 환히 꿰뚫고계신 그이께서는 무엇이든지 고유한 우리 식으로 발전시켜야지 얼치기를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하시며 자개박이공예를 붉은색으로 한것은 조선식이 아니라고 창작가들을 깨우쳐주시였다.
그 이듬해인 주체87(1998)년 1월초 그이께서는 또다시 전통적으로 보아도 자개박이공예에서 우리 식은 까만색이라고 하시며 자개박이대형꽃병을 까만색으로 다시 만들데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그때로부터 불과 한달 남짓한 2월 어느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창작가들이 다시 만든 자개박이대형꽃병을 보아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짧은 기간에 아주 잘 만들었다고, 이번에는 마음에 든다고 하시면서 바탕에 까만색을 쓰니 우리 식으로 되였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까만 바탕에 흰 자개박이를 하니 더 빛이 나고 무게도 있어보여 아주 좋다고, 바로 이것이 조선식이라고 더없이 만족해하시였다.
정녕 자개박이대형꽃병 하나를 보시고도 조선식의 색갈을 찾아주신 위대한 장군님의 이렇듯 세심한 가르치심이 있었기에 그후 우리 나라 자개박이공예는 우리 인민의 고유한 민족적전통에 바탕을 둔 조선식공예로 더욱 발전하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