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해박한 식견, 숭고한 실천적모범으로

 

1

 

《약산단》《구룡단》

 

오늘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여 인민들의 옷감으로 널리 리용되고있는 고급비단천들가운데는 《약산단》, 《구룡단》으로 불리우는 유명한 비단천들도 있다. 천의 아름다움과 함께 그 이름 또한 특이하고 민족적인 이 비단천들에는 뜻깊은 사연이 깃들어있다.

주체43(1954)년 6월 중순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우리의 기술자들이 자체의 힘으로 여섯달이라는 짧은 기간에 만들어낸 첫 비단천시제품들을 보아주시였다.

매 비단천의 조직과 무늬, 색갈까지 일일이 살펴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천은 시집장가가는 사람들의 이불감으로 썼으면 좋겠고 저 천은 첫날색시들의 옷을 지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이윽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진달래꽃무늬가 있는 한 비단천견본품을 골라드시고 천이름을 무엇이라 부르는가고 물으시였다.

한 일군이 처음으로 짠 천이여서 아직 이름을 달지 못하였다고 말씀올리였다.

그러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잠시 생각에 잠기시였다가 녕변에는 유명한 약산동대가 있다고, 약산에는 진달래가 많다고 하시며 《약산단》이라고 하면 어떤가고 말씀하시였다.

평안북도 녕변군에 자리잡고있는 약산동대는 경치가 아름답고 전망이 좋아 예로부터 관서8경의 하나로 널리 알려진 명승지이다.

약산이란 이름은 진달래가 많은 이 산에 약초가 많고 약수가 난다는데로부터, 동대라는 이름은 녕변이 지난날 무주, 연주, 위주로 나뉘여져있던 시기에 무주에서 보면 동쪽에 있는 대라는 뜻에서 불리워진것이라고 한다.

약산동대는 제일봉, 동대, 학벼루와 같은 기묘하게 생긴 봉우리와 바위들, 울창한 수림과 철따라 피는 갖가지 꽃들 그리고 천주사, 서운사, 륙승정, 철옹성지를 비롯한 옛 유적들로 하여 명승지로서의 풍치를 한껏 돋구고있다.

그중에서도 봄철에 온 산을 연분홍색으로 물들이며 활짝 피여난 진달래의 풍경은 볼수록 황홀경을 자아낸다.

모두들 그 이름이 참 좋다고 말씀올리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러면 이 비단천의 이름을 《약산단》이라고 부르자고 거듭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이번에는 옆에 놓여있는 비단천을 가리키시며 이름이 무엇인가고 또다시 물으시였다.

그 천 역시 아직 이름이 없다는것을 아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천의 무늬는 흐르는 강물처럼 은근한데 약산동대아래에 흐르는 구룡강의 이름을 따서 《구룡단》이라고 부르는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시였다.

구룡강은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시작하여 녕변군 하초리, 룡포리, 태천리, 연화리를 거쳐 청천강으로 흘러드는 강이다.

이 강이 구룡강으로 불리우게 된데는 먼 옛날 녕변군의 어느 한 마을에 살고있던 효동이라는 소년이 9마리 룡의 도움으로 강을 건너 약산에 올라 복숭아를 따다가 앓는 어머니의 병을 고쳐드렸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였다고 한다.

《약산단》 《구룡단》, 불러볼수록 민족적정서가 한껏 넘쳐흐르는 이름들이였다.

일군들이 참 좋은 이름이라고 말씀드리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기뻐하시며 우리 나라에서 생산하는 명주실을 가지고 더 많은 비단천을 짜서 인민들에게 비단옷을 해입혀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비단을 우리 민족의 자랑으로 세상에 널리 내세우시려는 그이의 은정속에 태여난 《약산단》《구룡단》.

정녕 새로 생산한 비단천 하나에도 친부모의 심정으로 시집장가갈 사람들의 옷과 이불감을 생각하시고 민족적정서와 자랑이 흘러넘치도록 심혈을 기울이신 위대한 수령님의 그 사랑은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에 의하여 그대로 이어졌다.

지금도 녕변에서는 비단처녀들이 짠 고운 비단천들이 필필이 쏟아져나와 인민생활향상에 이바지하고있다.

절세위인들의 숭고한 민족애, 인민사랑의 세계가 수놓아진 《약산단》《구룡단》으로 온 겨레가 화려한 비단옷을 해입고 어깨를 들썩이며 춤추며 노래부를 통일의 그날은 반드시 오고야말것이다.

2

 

앞치마와 위생

 

부엌일이나 음식가공을 하기에 앞서 녀성들이 의례히 먼저 찾군 하는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앞치마이다.

앞치마, 너무도 범상하게 여겨온 이 자그마한 차림새에도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의 사랑의 손길이 깃들어있는줄 아마 사람들은 다는 모를것이다.

주체37(1948)년 10월 중순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께서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제1중앙군관학교 제2기 졸업식에 참석하시였을 때 있은 일이다.

학교식당에 들리신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졸업식연회준비정형을 일일이 알아보시였다. 그러시던 어머님께서는 취사장에서 일하는 한 녀성이 앞치마를 띠지 않은것을 보시였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부 녀성들속에서는 흔히 나들이를 갈 때에만 옷을 깨끗이 갈아입고 누가 보지 않는 가정에서나 식당주방에서는 옷차림이 별로 단정치 않아도 되는것처럼 생각하고있었다. 그렇기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먹을 음식을 만드는 식당에서 일하면서 있는 앞치마도 두르지 않고있었던것이다.

예로부터 정결하고 깨끗한것을 지향해온 조선녀성들은 가정에서 음식을 만들 때면 의례히 머리수건을 쓰고 흰 무명천이나 흰 모시천으로 곱게 만든 앞치마를 산뜻하게 받쳐입는것을 생활관습으로 지켜왔다. 이것은 음식을 만드는데서 문화위생성을 보장할뿐아니라 보기에도 좋았다.

어머님께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시며 음식을 만들 때에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앞치마도 둘러야 간편하고 위생에도 좋다고 그 녀성을 따뜻이 일깨워주시였다.

김정숙어머님께서는 한 일군이 가져다올리는 앞치마를 받으시고 몸에 대보이시며 앞치마를 두르는 방법까지 가르쳐주시였다.

이렇듯 김정숙어머님의 가르치심과 실천적모범에 의하여 그후 이곳 식당의 녀인들은 지난 시기의 낡은 생활관습을 털어버리고 새 조선의 근로녀성들답게 앞치마를 정히 두르고 군인들의 식사보장에 나서게 되였다.

3

 

진미를 살리다

 

오늘 평양랭면은 조선민족음식의 자랑으로 우리 민족은 물론 세상사람들로부터 아낌없는 찬사와 호평을 받고있다.

여기에는 언제나 민족음식발전에 깊은 관심을 돌리시고 걸음걸음 손잡아 이끌어주신 위대한 장군님의 심혈과 로고가 뜨겁게 깃들어있다.

주체73(1984)년 1월초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한 일군을 부르시여 새해의 첫 과업으로 평양랭면의 진짜맛을 살릴데 대한 과업을 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평양랭면은 독특한 맛으로 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졌기때문에 그의 고유한 맛을 더 잘 살리는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로부터 며칠후 그이께서는 전화로 그 일군을 찾으시여 과업수행정형을 료해하시고나서 평양랭면의 고유한 맛을 더 잘 살리자면 우선 평양랭면의 특징이 무엇인가부터 알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가르치시였다.

국수는 그 감과 만드는 방법에 따라서 그리고 지방에 따라서 서로 다르다. 예로부터 평양지방의 특산인 평양랭면은 기본이 메밀국수인데 오리가 질기고 국물이 시원하며 향기롭고 산뜻하여 감칠맛이 나는것이 특징이다. 평양랭면의 맛을 살리자면 우선 어떻게 하면 메밀의 구수하면서도 특유한 향기가 나게 하겠는가, 또 어떻게 하면 국수오리가 가늘면서도 질기고 매끈매끈하게 할수 있겠는가, 그리고 무슨 감을 가지고 어떤 방법으로 해야 육수가 시원하고 산뜻하며 감칠맛이 나게 할수 있겠는가 하는 묘리를 알아내는것이다. …

그후 일군들과 전문가들이 합심하여 만들어 내놓은 평양랭면을 보아주신 그이께서는 국수맛이 괜찮다고 치하하시고나서 그러나 아직 합격품은 못된다고 하시며 그 결함을 하나하나 깨우쳐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오늘 만든 국수의 기본감은 메밀이라고 하는데 메밀냄새가 나지 않는것이 첫째 결함이라고 하시면서 그 원인은 메밀가루를 미리 내두었다가 가루를 고속도분쇄기에서 봏았기때문에 기계적인 열에 메밀의 주성분이 파괴된데 있고 한편 가루를 낼 때 희고 보드랍게만 하느라고 속껍질까지 말끔히 벗겨버렸기때문인것 같다고 가르쳐주시였다. 계속하여 그이께서는 오늘 만든 국수의 육수가 아직 제맛이 나지 않는것은 고기를 삶을 때 짧은 시간에 갑자기 삶았거나 간을 맞출 때 소금대신 간장을 기본으로 썼기때문인것 같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이번에 어떻게 하든지 평양랭면의 고유한 맛을 더 잘 살려서 진짜 평양랭면은 이것이라고 세상에 선포하자고, 그렇게 되면 모든 식당들에서 그것을 표준삼아 국수의 질을 전반적으로 높이게 될것이며 인민들은 아무 식당에 가서도 맛좋은 진짜 평양랭면을 먹을수 있게 될것이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이렇듯 료리전문가들도 미처 모르고있던 여러가지 구체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토록 해박한 식견으로 세심히 가르쳐주신 위대한 장군님의 끝없는 로고가 있어 평양랭면은 자기의 고유한 맛을 오늘도 변함없이 간직하고있는것이다.

4

 

환성

 

참나물김치는 오래전부터 조선사람들이 즐겨 먹어온 김치의 하나이다. 독특한 향기와 새큼한 맛, 불그스레한 색갈을 띤 참나물김치는 특히 항일혁명투쟁시기와 인연이 깊은 김치로 알려져있다.

주체29(1940)년 8월 어느 한 숙영지에서 있은 일이였다.

이날 아침도 남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산정에 오르시였다가 참나물을 뜯어가지고 내려오시였다. 그길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작식책임자에게 참나물로 김치를 담그라고 이르시였다.

김치라는 말에 대원들은 모두 귀가 번쩍 띄였다. 먹어본지가 하도 오랜 김치여서 말만 들어도 입안에서는 군침이 스르르 돌았다. 하지만 기쁨보다 걱정이 앞섰다.

어떻게 한두시간동안에 김치를 익힐수 있겠는가. 더구나 소금도 한줌밖에 되지 않는 이 깊은 산중에서…

모두의 표정에서 의아함과 호기심을 읽어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작식책임자에게 김치를 담글줄 아는가고 물으시였다.

그는 모른다고 말씀드렸다. 다른 대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인자하게 웃으시면서 그러면 자신께서 가르쳐주겠다고 하시며 한 대원을 시켜 밥통에 소금물을 끓이게 하신 다음 손수 참나물을 다듬기 시작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참나물잎을 따시는 한편 그 줄기를 마디마디 자르시였다.

이때 작식책임자가 칼로 다듬으시지 않겠는가고 말씀드리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것은 모르는 말이라고, 나물은 손으로 잘라야 제맛이 나지 칼을 대면 쇠독이 들어 제맛이 안 나는 법이라고 가르쳐주시였다.

이윽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소금물을 끓인 밥통에 다듬은 참나물을 넣고 뚜껑을 꼭 덮으시였다.

얼마후 밥통뚜껑을 열어제낀 대원들은 일시에 《야!》 하고 환성을 올렸다. 밥통안에서는 가지빛이 도는 먹음직스러운 참나물김치가 제법 향긋한 냄새를 풍기고있었던것이다.

숙영지에서 터져오른 환성, 그것은 준엄한 항일대전의 나날에도 언제나 대원들의 식생활문제부터 먼저 생각하신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고마움과 우리 민족음식에 대한 해박한 식견을 지니시고 실천적모범으로 대원들을 가르쳐주신 민족의 어버이에 대한 다함없는 흠모의 분출이였다.

5

 

제손으로 해보아야 한다

 

록두묵은 예로부터 조선사람들이 명절이나 손님이 왔을 때 즐겨 해먹어온 특색있는 음식으로 알려져있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 편찬된 《고사십이집》, 《옹희잡지》, 《명물기략》 등 력사문헌들에 록두묵만드는 방법이 구체적으로 씌여져있는것만 보아도 록두묵은 오랜 력사를 두고 내려오는 민족음식임을 잘 알수 있다.

지난 시기 록두묵가운데서 노란 록두로 만든것은 《황포》, 파란 록두로 만든것은 《청포》라고 하였는데 빛갈이나 맛에서는 청포를 제일로 일러주었다. 록두묵은 민간에서 해독, 해열, 병후회복 등 치료음식으로 널리 쓰이였다.

주체36(1947)년 11월 중순 어느 한 항일투사의 안해가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을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때 김정숙어머님께서는 한창 록두망질을 하고계시였다.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장군님께서 산에서 싸우실 때 조선에서 나는 록두로 만든 지짐과 묵이 맛이 좋을뿐아니라 건강에도 좋다고 말씀하시던것이 생각나서 록두를 좀 사왔다고 하시면서 투사의 안해에게 녀자는 모든 음식을 제손으로 할줄 알아야 한다고, 제손으로 해서 먹는것이 맛도 더 있다고 다정히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그와 함께 망질을 계속하시면서 록두를 알맞춤하게 퍼넣으시였다.

얼마후 어머님께서는 망질한 록두를 자루에 넣어 물을 짜낸 앙금을 가마에 넣으시면서 이렇게 록두앙금을 가마에 넣어 끓인 다음 함지에 퍼담아 식히면 야들야들한 파란 록두묵이 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그리고 앙금을 끓일 때 주의할것은 불조절을 잘하는것이라고, 불을 지내 세게 때지 말고 적당히 때면서 앙금이 익을 때까지 밥주걱으로 자주 저어주는것이라고 그 방법을 차근차근 알려주시였다.

이윽고 어머님께서는 함지에서 퍼낸 록두앙금을 밥주걱으로 저으시며 얼마쯤 끓이시다가 숟가락으로 떠서 다 익었는가를 확인하신 다음 록두앙금을 함지에 얇게 펴서 식히시였다.

록두묵을 만드시는 김정숙어머님의 능란하고도 재빠른 일솜씨를 지켜보며 투사의 안해는 그만 탄복하지 않을수 없었다.

김정숙어머님께서는 그러는 투사의 안해에게 이제는 록두묵을 만들수 있는가고 다정히 물으시였다.

그 녀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어머님께서 다음에 한번 더 록두묵을 만드시는것을 보면 알수 있을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그의 대답을 들으신 어머님께서는 한번 더 보는것보다 제손으로 해보아야 손에 익힐수 있다고 하시며 자신께서 만든 록두묵맛을 보고 한번 록두묵을 만들어보라고 신심을 주시였다.

후날 그 녀성은 김정숙어머님께서 가르쳐주신 방법대로 록두묵을 만들어보았다.

김정숙어머님께서는 그가 만든 록두묵을 보시고 더없이 기뻐하시면서 록두묵에는 양념장을 잘 만들어 쳐야 맛이 더 난다고, 양념장을 감칠맛이 나게 만들자면 고추가루, 마늘, 식초, 참기름, 후추가루 등을 넣어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이날 어머님께서는 그 녀인과 함께 록두묵을 맛보시며 록두묵을 아주 잘 만들었다고, 록두묵맛이 좋다고 치하를 아끼지 않으시였다.

6

 

산나물과 표본집

 

산나물은 우리 민족이 오랜 옛날부터 식생활에 리용해온 음식재료의 하나이다. 우리 나라의 산과 들에는 맛있고 영양가높은 여러가지 산나물이 300여종이나 되며 그가운데서 흔히 부식물로 리용되고있는것만 하여도 150여종에 달하고있다. 산나물은 그대로 또는 끓는 물에 살짝 데치거나 소금에 절구는 등 가공방법에 따라 그 맛과 향기, 약리적효과가 달라지게 된다.

언제나 인민군군인들을 친어버이사랑으로 따뜻이 보살펴주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조국해방전쟁의 준엄한 시기에 전사들에게 산나물가공방법까지 가르쳐주시며 식생활을 높이도록 하여주시였다.

주체40(1951)년 이른봄 어느날 아침 어느 한 구분대전사들은 전투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오던 길에 산기슭에서 산나물을 뜯고있었다.

때마침 그곳을 지나시다가 그들을 보게 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기 로력으로 산나물도 뜯고 남새도 가꾸어서 식생활을 푸짐하게 하는것은 좋은 일이라고 하시면서 군인들이 뜯은 산나물들을 살펴보시였다. 그런데 그들이 산나물을 잘 알지 못하다나니 몇가지 안되는 보잘것없는 나물들이 고작이였다.

그이께서는 미소를 지으시고 동무들이 좋은 단나물들을 밟고 다니면서도 쓴나물들만 뜯었다고 하시면서 음달진 곳에서 잎이 둥글넙적한 나물포기를 뜯어쥐시고 여기에는 비타민이 많은데 끓는 물에 데친 다음 물에 우려서 볶아먹어야 맛이 난다고 차근차근 설명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옷이 이슬에 젖는것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두릅을 비롯한 여러가지 산나물들을 가르쳐주시면서 그것으로 료리하는 방법까지 일일이 알려주시였다.

싸우는 전사들의 식탁을 풍성하게 하는데 여러가지 산나물을 많이 리용하도록 하시려 언제나 마음쓰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얼마후 누구나가 다 산나물과 관련한 특성을 잘 알수 있도록 표본집까지 만들어 보내주시였다.

전쟁이 한창이던 주체41(1952)년 여름 어느날 최고사령부에서는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참석밑에 직속구분대지휘관회의가 예고없이 소집되였다.

지휘관들은 저저마다 새로운 전투임무가 제기된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회의의제는 후방공급사업과 관련한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의에서 군인들의 부식물공급정형에 대하여 알아보시고 먹기도 좋고 건강에도 좋은 산나물을 식생활에 널리 리용할데 대한 은정넘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회의가 끝난 다음날 아침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산으로 오르시여 이슬맺힌 풀숲을 헤치시며 여러가지 산나물을 뜯으시여 동행한 일군에게 넘겨주시면서 이 산나물의 이름을 다 아는가고 물으시였다.

그 일군은 얼굴을 붉히며 자기도 다는 모른다고 솔직히 말씀드리였다.

그러자 그이께서는 걱정스러운 어조로 자신께서 전사들에게 산나물을 뜯어다 찬을 만들어 먹으라고 하였는데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고, 전사들이 산나물을 옳게 가려보지 못하고 먹지 못할 풀을 뜯을수 있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이날 아침 여러가지 산나물들을 뜯어가지고 집무실로 돌아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사진첩처럼 큰 책의 갈피마다에 산나물을 한가지씩 끼워넣고 거기에 산나물이름과 많이 자라는 곳, 독풀과 가려보기 위한 특징들을 구체적으로 써넣으시였다.

이렇게 되여 누가 보아도 산나물과 독풀을 제꺽 가려낼수 있게 작성된 표본집이 위대한 수령님께서 보시던 고려의학책과 함께 어느 한 고사총구분대 군인들에게 전달되게 되였다.

이슬에 옷이 젖는것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갖가지 산나물을 채집하여 손수 만들어 보내주신 산나물표본집.

어버이사랑이 뜨겁게 깃든 표본집을 받아안고 전사들은 격정의 눈물을 머금었다.

7

 

군인과 콩나물

 

주체41(1952)년 4월 어느 한 통신구분대를 찾으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구분대의 여러곳을 돌아보신 다음 식당에 들리시였다.

취사장내부를 세심히 살펴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 전사가 콩장을 만드는것을 보시고 콩으로는 콩장을 해먹는것보다 두부를 만들거나 콩나물을 길러먹어야 영양가도 높고 맛이 있다고 일깨워주시였다.

그이의 말씀을 듣는 일군들의 가슴은 뜨거움으로 설레이였다.

1211고지 군인들이 비타민결핍증에 걸리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시며 콩을 보내주도록 하겠으니 그것으로 콩나물을 길러 군인들에게 채도 메워먹이고 국도 끓여먹여야 하겠다고 사랑의 말씀을 주신 위대한 수령님.

자애로운 그 사랑은 그대로 1211고지의 방위자들모두에게 무한대의 힘이 솟구쳐오르게 한 원천으로,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청춘도 생명도 서슴없이 바쳐싸우는 무비의 용감성과 대중적영웅주의를 낳게 한 원동력으로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싸우는 군인들에게 푸짐히 먹이시려 마음쓰신 콩나물은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의 식생활에 널리 리용되여온 대중적인 콩음식의 하나로서 사람의 건강에 좋은 작용을 한다.

콩나물은 고려시기인 13세기 중엽에 편찬된 《향약구급방》에 처음으로 보이지만 그 유래는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라고 볼수 있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 편찬된 《시의방》, 《림원십륙지》, 《산림경제》 등에는 콩나물이 《황두아》, 《대두황》, 《두아채》로 기록되여있으며 여러가지 조리법에 대해서도 상세히 씌여져있다. 이러한 력사적사실은 우리 인민들이 먼 옛날부터 콩나물을 길러 식생활에 효과적으로 리용하여왔음을 그대로 보여주고있다.

슬기롭고 지혜로운 우리 인민들은 예로부터 해장(술취기를 없애는것)에 콩나물국을 즐겨 리용하여왔다.

자료에 의하면 콩나물속에 알콜분해를 촉진하는 성분인 아스파트산이 있는데 이 물질은 인체에 흡수되여 알콜분해효소를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아스파트산은 콩나물대가리에 58%, 콩나물줄기에 70%, 콩나물뿌리에 87%나 들어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콩나물로 음식을 만들거나 해장국감으로 쓸 때에 콩나물뿌리를 다듬지 않는것이 좋다고 한다.

콩에는 비타민C가 없으나 싹틔워 자래운 콩나물에는 비타민C(100g당 10~30mg)가 많이 들어있는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콩나물을 1g만 먹어도 하루 필요한 비타민C량의 3분의 1을 섭취할수 있다.

이처럼 비타민이 풍부한 콩나물을 병사들의 식생활에 널리 리용하게 하시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주체41(1952)년 2월 조선인민군 특무장강습소 교원, 강습생들과 하신 담화에서 가렬한 전투를 하고있는 1211고지에서 콩나물을 길러먹이는데 군인들이 아주 좋아한다고 만족해하시면서 전체 조선인민군 군인들에게 콩나물을 길러먹이도록 사랑의 대책을 세워주시였던것이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콩으로는 콩장을 해먹는것보다 콩나물을 길러먹어야 좋다고 하시면서 콩나물은 통에다가 기르는것도 좋지만 모래를 펴고 거기에다가 길러도 잘된다고 하시며 야외에서 콩나물을 기르는 방법까지 가르쳐주시였다.

일군들은 군인들의 식생활개선을 위해 이렇듯 심혈을 기울이시는 그이의 해박한 식견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돌이켜보면 비타민C가 많은 콩나물을 몰랐던탓에 세계전쟁사에 패전을 기록한 실례도 없지 않았다.

로일전쟁(1904-1905년)때 일본군에 포위된 려순요새에서 짜리로씨야군 장병들은 비타민C의 결핍으로 괴혈병에 걸려 결국 요새를 내여주지 않으면 안되였다. 만일 그때 려순요새안에 산더미처럼 쌓여있은 콩으로 콩나물을 길러먹을줄 알았더라면 로일전쟁의 력사가 달리되였을지도 모른다.

일군들은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르며 그이의 가르치심대로 전사들에게 더 많은 콩나물을 길러먹일것을 굳게 결심하였다.

그때로부터 얼마 지난 5월 어느날 또다시 이곳 구분대를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물가에 주런이 놓여있는 콩나물통의 덮개들을 하나하나 열어보시였다. 그리고는 콩나물이 해빛을 받아 파란색을 띤것을 보시고 콩나물맛이 덜하겠다고 아쉬운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콩나물통에 덮개를 꼭꼭 덮으시며 콩나물은 노랗게 자라야지 퍼래지면 맛이 떨어진다고, 해빛이 들어가지 않도록 덮개를 잘해서 덮어야 한다고 하나하나 깨우쳐주시였다.

그후 구분대에서는 해박한 식견으로 콩나물기르는 방법도 하나하나 가르쳐주신 그이의 숭고한 뜻을 높이 받들고 콩나물을 많이 길러 전사들에게 꼭꼭 공급하게 되였다.

이렇듯 소박한 콩나물에도 군인들을 제일로 아끼고 사랑하시며 민속음식을 장려하는데서도 군인들이 앞장서기를 바라시던 위대한 수령님의 깊은 뜻이 뜨겁게 어려있으며 그 뜻은 콩농사의 새 력사를 펼쳐주시여 선군9경-류다른 콩풍경을 안아오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에 의하여 빛나게 이어지게 되였다.

8

 

단고기장과 제맛

 

조선속담에 《오뉴월의 단고기장국은 발등에 떨어져도 약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조선사람들은 단고기장을 삼복철의 으뜸가는 보양음식으로 일러왔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우리 인민들이 오랜 옛날부터 즐겨 먹어온 단고기장의 제맛을 살릴수 있는 비결도 몸소 가르쳐주시였다.

주체41(1952)년 6월 어느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한 일군을 부르시여 회의에 참가한 도인민위원장들에게 단고기장을 한끼 해줄수 있게 준비할데 대한 과업을 주시였다.

그러시면서 단고기의 비린내를 없애고 제맛을 돋구자면 고기를 끓일 때 방아풀을 넣어야 한다고 특별히 일깨워주시였다.

그로부터 이틀후 단고기장이 준비되였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날 점심시간에 도인민위원장들이 들어있는 숙소를 찾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을 둘러보시며 오늘 동무들이 내려가기 전에 식사라도 한끼 같이하려고 단고기장을 준비하였다고, 단고기장에는 조밥이 좋으므로 조밥을 짓게 하였는데 성의로 알고 많이 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친어버이사랑에 목이 꽉 메여올라 선뜻 수저를 들지 못하고있던 일군들은 그이께서 거듭 권하시여서야 비로소 수저를 들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이 단고기장의 맛을 돋구기 위해 향신료로 리용해온 방아풀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려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방아풀은 우리 나라의 그 어디에나 잘 자라는 다년생식물인데 일명 배초향이라고도 한다는것, 방아풀은 약재로도 쓰며 식료공업에서 향료로도 쓴다고 말씀하시였다.

방아풀은 꿀풀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서 8~9월경에 보라색꽃이 피는데 이때 줄기를 베여 그늘에서 말리웠다가 더위를 먹었거나 체한데, 감기, 머리아픔, 구토설사 등에 쓴다. 그리고 어린 줄기와 잎은 끓는 물에 데쳐 국거리로 하거나 나물로 무쳐먹는다.

한편 방아풀에는 특이한 향기를 내는 정유가 들어있으므로 식료공업부문에서는 잎을 말리워 가루낸것을 고기비린내를 없애는 양념감으로 쓰거나 간장이나 된장에 향료로 넣기도 한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단고기장을 끓일 때 방아풀을 천에 싸서 넣고 같이 끓이면 비린내가 없어지고 단고기장의 독특한 냄새와 맛이 난다는것은 자신께서 어렸을 때 어머님께서 배워준것이라고 감회깊은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도인민위원장들은 도내 인민들의 생활을 책임진 호주인것만큼 이런 일반적인 상식들을 알고있어야 한다고 일깨워주시였다.

진정 평범한 음식 하나를 놓고서도 그 진맛의 비결을 손수 가르쳐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속에는 민족의 슬기와 지혜를 귀중히 여기고 그것을 더욱 빛내여주시려는 깊은 뜻이 담겨져있었다.

오늘도 삼복철이면 사람들은 소문난 평양단고기집을 비롯한 급양봉사망들에서 단고기장의 진미를 즐기며 하나의 민족음식에도 심혈을 기울이시며 고유한 맛을 살리도록 세심히 보살펴주신 절세위인의 뜨거운 사랑을 가슴뿌듯이 느끼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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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찌산국수》

 

오늘의 량강도를 포함한 함경도지방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언감자국수를 특산음식으로 일러왔다.

감자를 기본작물로 재배하여온 이곳 사람들은 명절날이나 잔치날을 비롯하여 집에 귀한 손님이 찾아왔을 때에는 언감자국수를 눌러먹는것을 즐겨하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생전에 일군들에게 언감자국수는 자신께서 항일무장투쟁을 할 때 많이 만들어 먹던 국수라고 하시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주 언감자국수에 대하여 감회깊이 추억하시였다.

온 나라가 천리마대고조로 세차게 들끓고있던 주체47(1958)년 5월 량강도의 여러 부문 사업을 현지에서 지도하고계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군들과 함께 점심을 나누신적이 있었다.

그때 도내 인민들의 뜨거운 지성이 담겨진 점심상에는 귀밀떡이며 감자떡, 언감자국수와 같은 이 고장의 특산음식들이 차려져있었다.

한동안 감회깊은 눈길로 상을 바라보시던 그이께서는 일군들을 둘러보시며 언감자국수는 갓김치물에 말아야 제맛이 난다고 말씀하시였다.

갓김치는 함경도지방의 특색있는 김치의 하나로서 시들시들하게 말리운 갓을 소금에 절인 다음 파, 마늘, 생강, 고추가루를 두고 버무려 익힌 김치이다. 갓김치맛이 얼마나 류별하였던지 옛날에 이 고장에서는 셋이 모여 갓김치물에 언감자국수를 말아먹느라면 그가운데 한사람이 갑산으로 가도 모를 정도라는 말까지 생겨났던것이다.

식사를 마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갓김치물에 언감자국수를 말아먹으니 국수맛이 참 좋다고, 언감자국수는 량강도의 특산물로서 소문난 음식이라고 말씀하시였다.

그후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언감자국수에 대하여 자주 말씀하시면서 언감자국수는 땅속에서 언 감자를 가지고 만들어야 잘된다고, 땅에서 언 감자를 캐다가 밖에서 해볕과 바람에 말리워 가루를 내서 눌러야 제맛이 난다고 국수만드는 방법도 하나하나 가르쳐주군 하시였다.

주체80(1991)년 9월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뜻깊은 오찬회가 마련되였다.

오찬회가 한창 진행되고있을 때 그이께서는 일군들에게 음식을 많이 들라고 다정히 권하시고나서 그전에 우리는 언감자국수를 《빨찌산국수》라고 하였다는 의미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항일무장투쟁시기 조선인민혁명군의 적극적인 군사활동에 질겁한 일제는 이르는 곳마다에 집단부락을 만들어놓고 인민들이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원호를 하지 못하게 갖은 책동을 다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그 어떤 폭압과 회유기만도 백두산으로 향하는 우리 인민의 마음을 결코 돌려세울수 없었다.

그때 백두산일대의 인민들은 가을이 되면 넝쿨만 걷어내고 감자는 캐지 않고 그대로 놔두었다가 지하조직을 통하여 조선인민혁명군에 련락을 띄워 감자를 캐가도록 하는 방법으로 혁명군의 식량을 보장하군 하였다. 지하조직으로부터 련락을 받은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밭에서 미처 다 캐지 못한 감자는 겨울이나 이듬해 봄에 가서 언것을 캐왔다. 캐온 감자는 녹여서 물을 짜낸 다음 말리워 가루를 내여 국수나 떡을 만들어 먹기도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으로부터 간고하고 시련에 찼던 항일무장투쟁과 각별한 인연을 맺고있는 언감자국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듣는 일군들의 가슴속에는 한없이 뜨거운 격정이 솟구쳐올랐다.

《빨찌산국수》, 바로 이 말속에는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항일선렬들이 흘린 피를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는 수령님의 간곡한 당부가 깃들어있다.

수령님께서 그토록 못 잊어 하시고 만드는 방법도 일일이 가르쳐주신 언감자국수는 지금도 누구나 좋아하는 특색있는 민족음식의 하나로 적극 장려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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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용 및 약용가치가 크다

 

미나리는 우리 나라에서 오래전부터 재배하여온 미나리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남새작물로서 부식물로뿐아니라 약재로도 널리 쓰인다.

미나리는 단백질, 지방, 당질, 비타민(A, B1, B2, C)류와 정유, 콜린 등을 포함하고있어 물고기중독때는 독풀이약으로 쓰이며 간염, 돌림감기, 신경통 등에 효능높은 약으로도 쓰인다. 한편 《고려사》에 《근전》(미나리밭)이라는 기록이 있는것만 보아도 조선사람들이 고려 이전시기부터 미나리를 널리 재배하여 음식감으로뿐아니라 약재로 써왔다는것을 알수 있다.

미나리는 어지러운 진흙탕속에서 자라면서도 절대로 독을 품거나 오염되지 않고 푸르싱싱 자라는 정결함 그리고 양지와 음지를 가리지 않으며 가물철에도 자기의 푸른 모습을 잃지 않는 강인함과 같은 아름다운 덕을 간직한것으로 하여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식용식물가운데서 미나리를 단연 첫자리에 놓았다고 한다.

주체63(1974)년 6월 어느날이였다.

한 일군과 자리를 같이하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미나리무침이 아주 맛있다고, 미나리는 생것으로 고추장에 찍어먹어도 맛있고 오늘처럼 데쳐서 무친것도 좋다고 하시면서 동무도 미나리를 좋아하는가고 물으시였다.

사실 그 일군은 미나리가 흔한 고장에서 나서자랐지만 냄새가 별나다고 하면서 미나리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조차 않았었다.

일군으로부터 이런 사연을 듣고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가볍게 웃으시며 미나리는 사람들의 간장을 보호하고 간염치료나 독풀이를 하는데 아주 좋은 약재라고 깨우쳐주시였다. 그러시고는 미나리가 약초의 효능이 높아 고려약재로 널리 사용되고있는데 대하여 여러가지 실례를 들어 설명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계속하여 미나리의 생육조건에 대하여 물으시였다.

일군은 머리를 기웃거리며 몸둘바를 몰라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를 바라보시며 어떤 사물현상이나 본태를 잘 알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미나리는 습한 땅에서 잘 자라고 생활력도 강하다고, 그래서 자연적으로 자라난 미나리만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습한 땅에서 미나리를 재배하도록 하였다고, 오늘 우리 인민들은 미나리를 약으로도 쓰고 부식물로도 널리 리용하고있다고 일깨워주시였다.

지금까지 범상히 보아온 미나리에 대하여 해박한 식견으로 알기 쉽게 가르쳐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르며 일군은 탄복을 금치 못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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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날의 추억

 

흔히 동지날과 관련하여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풍습에 대하여 말하라고 하면 누구라 할것없이 제일 먼저 꼽는것이 아마도 동지팥죽일것이다.

《동국세시기》의 저자 홍석모는 동지날에 쑤어먹는 팥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시로 형상하였다.

 

더운 김이 물물 나는

동지날 팥죽

새알심지 들어있고

꿀도 탔어라

 

력사기록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고려시기에 국가적으로 동지를 민속명절의 하나로 정하고 쇠였으며 이날에 사람들은 동지팥죽을 먹으면서 나이 한살 더 먹었다는 생각과 지나온 한해를 돌이켜보았으며 이웃들과 팥죽을 서로 나누어먹으면서 화목을 두터이하였다.

추석날의 송편처럼 팥죽이 동지날을 상징하는 음식인데로부터 민간에서는 동지무렵에 날씨가 따뜻하면 이듬해에는 농사가 잘될 징조라는 의미에서 《동지죽이 쉬는 해에는 풍년이 온다.》, 얼핏 보기에는 사람이 변변치 않는것 같으나 하는 일이 녹녹치 않음을 비겨 《배꼽은 작아도 동지팥죽은 잘 먹는다.》는 속담도 전해져오고있다.

주체64(1975)년 12월 어느날이였다.

몇몇 일군들은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이께서 계시는 곳으로 달려왔다. 영문을 몰라하는 그들을 바라보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식사나 함께 나누자고 찾았다고 하시며 어서 상에 나앉으라고 이르시였다.

그러시고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는가고 물으시였다.

서로 머리만 기웃거릴뿐 대답을 못하고있는 그들을 바라보시던 그이께서는 오늘이 동지날이라고 하시며 동지죽을 쑤었으니 모두들 들라고 다정히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일군들 매 사람앞으로 동지죽그릇을 밀어놓으시며 어서 들자고, 동무들을 위해 쑨 동지죽이라고, 우리 함께 동지죽을 먹고 새해에도 더 많은 일을 하자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계속하여 그이께서는 예로부터 우리 인민은 년중 밤이 제일 길고 낮이 제일 짧은 날인 동지날에 팥죽을 쑤어먹는것을 전통적인 민족적풍습으로 여겨왔다고 하시면서 동지날에 동지죽을 먹으면 한살을 더 먹는다는데 이렇게 마주앉아 지난 한해를 돌이켜보는것도 좋은 일이라고 가르쳐주시였다.

일군들은 민족적정서를 훈훈히 자아내는 팥죽을 감동속에 들면서 장군님과 함께 창조와 기적으로 빛내여온 한해를 자랑스럽게 돌이켜보았다.

어찌 그뿐이랴. 우리의 민족성을 활짝 꽃피워주시려 마음쓰신 김정일장군님의 은정속에 공화국에서는 오래전부터 동지날이면 동지죽을 봉사하여왔다.

출장이나 나들이를 떠난 사람들도 맛볼수 있게 식당들에서도 동지죽봉사를 하도록 하시고 필요한 원자재보장대책까지 세워주신 위대한 장군님의 은정속에 해마다 동지날을 앞두고 급양봉사망들에 흰쌀과 팥, 찰수수를 비롯한 원자재들이 공급되였다.

나라가 그처럼 어려웠던 고난의 행군시기에도 식당들에서 풍기는 구수한 동지죽냄새는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민족의 향취를 더해주었고 고난을 뚫고 미래를 향해가는 보람찬 삶의 희열을 안겨주었다.

하건만 2011년의 동지날은 민족의 어버이를 천만뜻밖에 잃은 크나큰 상실의 아픔속에 산천초목도 몸부림치던 대국상의 나날에 찾아왔다.

장군님을 애타게 부르며 잠도 때식도 잊은 인민들의 물결이 낮이나 밤이나 조의식장으로 흐르고있었다. 너무도 크나큰 슬픔속에 사람들은 동지날도 잊었으며 동지죽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어찌 상상이나 하였으랴.

평양체육관광장을 비롯하여 수도의 여러곳에 꾸려진 조의식장들에는 뜻밖에도 동지죽이 나타났다.

이해에도 급양봉사망들에는 위대한 장군님의 은정이 깃든 동지죽원자재들이 공급되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을 그대로 이어주시는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의 사랑속에 대국상의 비보에 접하여 닫기였던 식당문들이 다시 열리고 동지죽봉사도 진행되게 되였다. 하지만 식당을 찾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리하여 봉사자들이 어버이의 사랑이 깃든 동지죽을 안고 각곳의 조의식장을 찾았던것이다.

장군님의 사랑이 뜨겁게 어린 동지죽이라면서 조의식장을 찾은 사람들에게 더운 김이 피여오르는 죽그릇을 들려주는 봉사자들의 두볼에도, 그것을 받아들고 오열을 터치는 시민들의 두볼에도 격정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아, 피눈물속에 받아안은 사랑어린 동지죽.

조의식장의 동지죽과 더불어 천만군민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진 동지날의 추억, 이것은 열화와 같은 민족애를 지니시고 한평생 조국과 인민을 위해 심장을 불태우신 민족의 어버이에 대한 영원한 그리움의 추억이며 절세위인들의 숭고한 뜻과 념원을 받들어 이 땅우에 기어이 륭성번영하는 사회주의강성국가를 일떠세우고야말 불타는 일념의 분출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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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 치신 찰떡

 

주체76(1987)년 10월 7일이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을 모시고 점심식사를 하게 된 일군들은 마침 이날이 추석날이여서 햇쌀로 찰떡을 치기로 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추석날에는 햇쌀로 떡을 했는데 그 풍속대로 찰떡을 친다면 좋다고 하시였다.

일군들은 찰떡이야 그저 찹쌀을 시루에 쪄내여 떡돌에 놓고 치면 되는것으로 생각하면서 그이께 떡은 자신있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웃으시며 그건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떡은 치고 국수는 만다.》고 무슨 음식이든지 다 자기의 고유한 특징이 있는것이라고, 찰떡이라고 해서 그저 떡판에 놓고 치기만 하면 되는것이 아니라고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일군들을 둘러보시며 그래도 떡은 자신이 있다면 우리 나라 떡가지수가 얼마나 되는지 누가 꼽아보라고 하시였다.

한 일군이 나서서 손가락을 꼽아가며 《찰떡, 시루떡, 절편…》 하고 꼽기 시작하는데 다섯손가락도 다 꼽지 못한채 말문이 막혀버리고말았다. 그바람에 모두들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이께서도 웃으시며 떡을 해주면 먹을줄은 알지만 꼽으라면 고작해서 서너가지밖에 더 꼽지 못한다고, 그런데도 떡은 자신이 있다고 흰소리를 하는가고 말씀하시였다.

이어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떡은 오래전부터 우리 인민들이 즐겨 해먹어온 고유한 민족음식의 하나로서 그 가지수가 많을뿐아니라 볼품이 있고 영양가가 높으며 맛이 좋다고, 떡은 감과 만드는 방법에 따라 여러가지로 나누는데 우리 인민들이 특별히 좋아하는 찰떡과 송편만 해도 그 가지수가 많다고 실례를 들어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 실례를 드신 찰떡만 해도 떡감에 따라 흰찰떡, 조찰떡, 기장떡 그리고 고물의 특성에 따라 깨고물찰떡, 콩고물찰떡, 팥고물찰떡, 밤고물찰떡 등 여러가지로 나누며 그 맛도 서로 다른것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세상에 수많은 민족들이 살고있고 민족마다 자기의 전통적인 민족음식을 가지고있지만 우리 조선사람만큼 맛좋고 다양한 민족음식을 가지고있는 민족은 아마 얼마 없을것이라고, 이 한가지 사실만 놓고보아도 우리 인민이 벌써 오래전부터 얼마나 높은 수준의 식생활문화를 창조하였는가 하는것을 알수 있다고 하시면서 우리는 이에 대하여 응당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이윽고 그이께서는 일군들과 함께 떡판이 마련된 곳에 이르시였다.

그이께서는 모두들 집에서는 아주머니가 해주는 떡을 먹고 밖에 나가서는 남이 만들어주는 떡만 먹었겠는데 오늘은 자기가 먹을 떡은 자기가 칠 내기라고 말씀하시며 누구든 먼저 떡메를 잡으라고 하시였다.

한 일군이 자신있는듯 팔소매를 걷어붙이며 나섰다. 잠시후 떡판우에 떡밥이 오르자 그는 한두번 뭉개다말고 성급하게 내려치기 시작하였다. 떡밥이 떡메에 달라붙고 더러는 땅바닥으로 튕겨나왔다.

그 일군의 서투른 솜씨를 지켜보시던 장군님께서는 선뜻 떡메를 들고나서기에 어지간히 솜씨가 있는줄 알았더니 아예 생판이라고 하시며 떡치는 방법을 가르쳐주시였다.

찰떡은 장작을 패듯이 쳐서는 안된다. 처음에는 떡메로 떡밥을 뭉개다가 밥알이 풀어지려 할 때 쳐야 한다. 떡을 칠 때에는 떡메나 떡돌에 떡이 달라붙지 않게 물을 발라야 한다.

그러시고는 손수 떡메를 잡으시고 옆에 있는 물그릇에 한번 살짝 잠그었다가 먼저 떡판을 문지르고나서 떡밥을 뭉개시였다.

모두들 굳이 만류하였으나 그이께서는 한동안이나 떡을 치고나서야 일군들에게 떡메를 넘겨주시였다.

장군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일군들은 신이 나서 떡을 치기 시작하였다.

환한 미소를 지으시고 그 모습을 바라보시던 그이께서는 그래서 눈에는 익고 손에는 선것이 바로 일이라고 하는게 아닌가, 아무 일이나 주관적인 욕망이나 힘만으로 안된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필요한 묘리와 방법 다시말하여 요령이 있는 법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정답게 웃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그날의 정다운 미소는 해마다 찾아오는 추석날과 더불어 민족성고수의 열기가 뜨겁게 넘치는 인민의 마음과 얼굴마다에 오늘도 따뜻이 비껴흐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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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맛

 

두릅나물은 우리 나라 각지의 산기슭과 산골짜기, 양지바른 곳에서 자라는 산나물의 하나로서 향기롭고 맛이 좋아 오래전부터 우리 인민들속에서 음식감으로 널리 리용되여왔다.

주체74(1985)년 6월 중순 어느날에 있은 이야기이다.

머나먼 북변의 어느 한 지방을 현지지도하고계시던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아침일찍 일군들을 부르시여 산구경을 가자고 하시였다.

신선한 새벽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산을 오르던 일행이 산중턱에 이르렀을 때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옆에 있는 가시돋힌 나무를 가리키시며 이것이 두릅나무라고 하시면서 나무아지끝에 돋아나온 두릅순을 따오라고 이르시였다.

일군들과 함께 두릅나물과 여러가지 산나물을 뜯어가지고 돌아오신 그이께서는 나물을 다듬기 시작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만류하는 일군들에게 산나물은 이렇게 자기가 뜯어다가 제손으로 다듬어야 맛이 더 좋다고 하시면서 두릅은 데쳐서 무쳐먹는것도 좋지만 김치를 담그어 먹어야 별맛이 난다고 말씀하시였다.

순간 일군들은 두릅나물로 김치를 담근다는 그이의 말씀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속에서는 두릅나물을 끓는 물에 데친 후 양념장에 무쳐먹는것이 고작이였다.

력사자료들에 의하더라도 두릅은 날것을 물에 담가 쓴맛을 빼고 먹어도 좋고 뜨거운 재속에 넣어 찌면 그 맛이 더 좋다고 하였으며 또 약간 데친 다음 길게 찢어 소금, 기름, 깨로 양념하고 꼬챙이에 꿰여 밀가루를 바르고 닭알물을 씌워 지져먹는것도 별맛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두릅나물로 김치를 담근다니 그들의 놀라움은 당연한것이였다.

수령님께서는 의아한 표정을 짓는 일군들을 둘러보시며 두릅나물김치를 잘 모르는것 같은데 방법을 배워주겠다고 하시며 두릅을 이렇게 깨끗이 다듬어 씻은 다음 끓는 물에 살짝 데쳐서 찬물에 살랑살랑 헹군다고, 그 다음 하나하나 건져내여 물을 찌운 다음 양념을 넣고 버무려 단지에 차곡차곡 넣는다고, 그리고 두릅을 데쳐낸 물을 식혀서 김치물로 넣고 하루나 이틀쯤 지나서 먹으면 아주 별맛이라고 말씀하시였다.

그후 일군들은 그이께서 배워주신대로 두릅나물로 김치를 담그어 먹었는데 정말 그 맛은 별맛이였다.

실로 먹으면 아주 별맛이라고 해박한 식견과 실천적모범으로 두릅나물김치 담그는 방법까지 하나하나 가르쳐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그 은정속에 이 김치는 오늘 우리 인민들속에서 인기있는 새로운 민족음식의 하나로 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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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소 내놓으신 기념품안

 

주체72(1983)년 5월 어느날 한 일군은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였다.

그를 만나주신 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최근년간에 우리 나라에서 세쌍둥이가 자주 태여나는데 이것은 나라가 흥할 징조라고 하신데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어느 한 창작사에 과업을 주어 세쌍둥이들에게 줄 기념품도안을 만들도록 하시였다.

일군으로부터 이러한 사연을 전해들은 창작가들은 크나큰 창작적흥분으로 가슴을 설레이며 즉시 기념품도안창작에 달라붙었다. 수십명의 공예창작가들이 며칠밤을 새워가며 내놓은 안의 대부분은 시계류였다. 시계는 실용성이 있으면서도 기념품이 될수 있다는것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기념품도안창작정형을 보고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동안 자신께서 생각하신 안을 내놓으시였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은장도와 금반지였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호신과 행복, 기쁨의 상징으로 장도와 반지를 즐겨 리용하여왔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장도는 생활상에서의 온갖 위험으로부터 자신의 생명과 행복을 지켜주리라는 소박한 념원에서 리용해온 치레거리의 하나였다. 반지 또한 행복과 기쁨의 상징으로서 녀성들의 귀중한 애용품의 하나였다.

장군님께서는 세쌍둥이들에게 줄 은장도와 금반지에는 생일을 새겨넣되 은장도와 금반지 세개가 합쳐야 옹근 출생년월일이 되도록 하는것이 좋을것 같다고, 그렇게 하면 세쌍둥이가 어려서 뜻하지 않게 헤여져도 은장도와 금반지를 가지고 자기 형제를 정확히 찾아볼수 있을것이라고 가르쳐주시였다.

그이의 말씀을 전달받은 창작가들은 크나큰 격정에 휩싸였다.

민족적특성과 정서에 맞게 기념품을 만들도록 해주시고도 천만번중에 단 한번 있을수 있는 일까지 헤아리시여 생년월일까지 새겨넣도록 해주시는 은정앞에 가슴은 감격으로 설레이기만 하였다.

그후 창작가들은 장군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첫째 은장도의 칼날에는 출생년도를, 둘째 은장도의 칼날에는 태여난 달을, 셋째 은장도의 칼날에는 난날을 각각 새겨넣었다. 그리고 모든 칼집의 한쪽면에는 옹근 출생년월일을 새겨넣어 칼을 보면 세쌍둥이들의 생년월일과 그가 몇째라는것을 알수 있게 하였다. 이와 함께 칼자루의 량면에는 세쌍둥이라는것을 상징하여 록두알같은 세개의 홍보석을 세송이의 목란꽃안에 박아넣었다. 또한 은장도에 고리를 만들고 여러 갈래의 붉은색수실을 달아 그 품위를 돋구어주고 기념일때에는 차고 다닐수 있게 하였다. 한편 금반지도 역시 그 한가운데에 세송이의 해바라기꽃을 형상하여 만들고 그안에 세개의 홍보석을 끼워 세쌍둥이를 상징하게 하였으며 반지안에는 은장도와 같은 형식으로 출생년월일을 차례로 새겨넣었다.

그해 10월 어느날 완성된 은장도와 금반지를 보아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아주 잘 만들었다고 치하하시며 못내 만족해하시였다.

태여나는 세쌍둥이들에게 은장도와 금반지의 수여, 그것은 그대로 우리 선조들이 창조한 민속전통과 풍습을 소중히 여기고 빛내여주시려는 김정일장군님의 뜨거운 민족애와 세쌍둥이들의 앞날을 축복해주시는 뜨거운 어버이사랑이 낳은 은정어린 조치였다.

15

 

지성어린 생일상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은 부모의 60돐생일을 기념하는데 큰 의의를 부여하고 아무리 살림이 어려워도 여러가지 음식으로 생일상을 성의껏 차려드리는것을 자식으로서 지켜야 할 마땅한 도리로 여겨왔다.

생일상을 차리자면 음식가공과 상차림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품과 숙련된 솜씨가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지난 시기 가정들에서는 상을 차릴 때면 《숙수》라고 불리우는 전문가를 청해다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해방후 홍명희선생의 60돐생일을 며칠 앞둔 때였다.

어느날 저녁 위대한 김일성주석으로부터 선생이 생일을 맞는다는것을 알게 되신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자신께서 생일상을 준비하겠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씀올리였다.

김정숙어머님께서는 곧 서울음식차리는 법과 례절을 잘 알고있는 일군들을 수소문하시였다.

그때 어머님께서는 웬만한 연회도 거의나 저택에서 차리군 하시였는데 홍명희선생의 생일상준비에는 특별히 품을 들이시였다.

이렇게 차린 생일상은 참으로 훌륭하였다. 육포, 수정과, 약과를 비롯하여 특색있는 음식들이 거의다 올라있는 생일상은 서울생일상이 왔다 울고 갈만큼 손색없이 차려져있었던것이다.

사람들마다 이렇게 정성껏 차린 생일상은 난생처음 본다고들 하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드디여 홍명희선생의 생일날이 왔다.

이날 일찍 댁으로 돌아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에게 홍명희선생을 데려오도록 하시고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과 함께 현관문밖에까지 나가시여 그를 맞이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을 받고 저택에 도착하여 어느 한 방으로 안내된 홍명희선생은 김정숙어머님의 지성이 깃든 생일상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늘이 바로 선생의 생일이기에 좀 차리느라고 하였는데 변변치 않은것 같다고 말씀하시였다.

생일상을 마주한 그는 거듭 사의를 표시하였다.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선생님이 서울에 계시여 이날을 맞이하셨더라면 아들, 며느리들과 일가친척들이 얼마나 훌륭한 상을 차려드렸겠는가고 하시며 생일상이 정말 변변치 못하다고, 서울음식을 잘 알지 못하다나니 선생님의 구미에 맞지 않을것이라고 겸손하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남녘땅에 두고 온 그의 일가친척들을 대신하여 선생에게 례의를 표시하시였다.

민족의 풍습에 대한 해박한 식견과 숭고한 도덕의리를 지니신 김정숙어머님의 풍모는 세월의 모진 고초와 풍파속에서 헤매이다가 비로소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품에 안겨 인생의 봄을 맞이한 로정객의 심장을 크게 울리고야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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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선생

 

《사람에게 한생을 두고 회고할수 있는 스승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행복한 인간이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쓰신 명제의 한 구절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생전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길림육문중학교의 어문교원이였던 상월선생을 잊지 않으시고 회고하군 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회고록에서 《상월선생》이라는 제목을 설정하시고 자신께 고리끼의 《어머니》와 《홍루몽》을 소개해준 사람은 상월선생이라고 회고하시며 로스승에게 충심으로 되는 마음속 감사를 드린다고 쓰시였다. 수령님께서 반세기가 넘는 장구한 기간 잊지 못하신 로스승에 대한 충심으로 되는 존경의 표시였다.

스승을 존경하고 따르는것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미풍량속이다.

우리 나라 속담에 《일자지사》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글 한자를 배워준 사람을 일생 스승으로 모셨다는 말로서 여기에는 스승을 존경하고 따른 우리 인민의 아름다운 도덕품성이 그대로 비껴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도 수십년세월이 흘렀어도 잊지 못하신 스승이 있다.

주체84(1995)년 1월초 김일성종합대학사업에 대하여 료해하시던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얼마전에 TV화면에 나온 경제학부의 교수는 가장 실력있는 사람이라고, 이제는 나이도 많아보인다고 은정넘친 말씀을 하시였다.

옛 스승의 모습을 그려보시는듯 한동안 생각에 잠기시였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윽고 믿음어린 음성으로 그는 자신이 존경하는 선생이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존경하는 선생!

평범한 한 교원의 수고를 헤아려주시며 오랜 세월 잊지 않으시고 존경하는 선생이라고 불러주시는 그이의 말씀에 일군은 숭엄한 감정에 휩싸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계속하여 자신도 인간이라고, 인간일수록 자기 스승을 존경할줄 알아야 한다고 하시며 그에게 동무가 나가 선물을 전달하고 자신의 인사도 전하는것이 좋겠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로부터 얼마후 한생을 후대교육사업에 바쳐온 김일성종합대학의 로교수는 만사람의 축복속에 위대한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은정어린 사랑의 선물을 받아안는 크나큰 영광을 지니게 되였다.

자기를 대학시절의 존경하는 선생이라고 불러주시고 내세워주시는 장군님의 크나큰 은정이 너무도 고맙고 고마와 로교수는 심장으로 웨치고 또 웨쳤다.

(위대한 장군님. 이 늙은것이 뭐라고 존경하는 선생이라고 불러주신단 말입니까. 진정 저의 존경하는 선생, 위대한 스승은 바로 장군님 한분밖에 없습니다.)

스승을 존경하고 내세워주신 위대한 대원수님들의 숭고한 실천적모범은 학생들은 물론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스승들에게 자주 편지도 하고 생일날에는 축하장이나 꽃다발을 보내주는 고상하면서도 도덕의리적인 풍모가 온 사회에 더욱더 차넘치게 하였다.

17

 

《윷진애비》가 되여서는 안된다

 

주체73(1984)년 12월 하순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새로 만든 종합오락기구견본품을 보아주시였다. 그 견본품은 하나의 함에 4가지 오락기구(장기, 윷, 꼬니, 주패)가 들어있는것이였다.

오락기구를 한동안 살펴보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윷가락을 집어드시며 윷놀이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민속오락의 하나라고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윷놀이는 남녀로소를 물론하고 누구나 다 놀수 있는 대중오락으로서 오랜 옛날부터 즐겨 놀아왔다고 하시면서 일군들에게 윷놀이를 할줄 아는가고 물으시였다.

한 일군이 윷놀이를 할줄은 알지만 재미가 없기때문에 잘 놀지 않는다고 말씀올렸다.

이 대답을 들으신 그이께서는 가볍게 웃으시더니 윷놀이도 다른 오락과 마찬가지로 묘리가 있고 묘술이 있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윷놀이가 재미없기때문에 잘 놀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윷놀이가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윷놀이의 진미를 모르기때문이라고, 윷놀이가 재미없다면야 공연히 《윷진애비》라는 속담이 다 있겠는가고 하시며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들려주시였다.

옛날 어느 외진 산골에 아버지와 아들이 살고있었다. 겨울이 되자 일거리도 없는데다 폭설에 길이 막혀 마실놀이도 갈수 없어 갑갑증이 난 아들이 하루는 아버지보고 심심한데 윷이나 놀자고 청하였다. 아버지는 아무리 갑갑하기로서니 자식을 상대로 놀음놀이를 하는것이 체면없기도 하거니와 윷놀이가 별로 재미있을것 같지도 않아 처음 몇번은 마다하였다.

그러다가 아들의 끈질긴 청에 못이겨 윷을 놀기 시작하였는데 처음 한두판은 별로 흥미를 못 느꼈지만 몇판이 지나서부터는 이기면 이긴 재미에 한판 더, 지면 분한김에 또 한판, 이렇게 하다나니 해가 지는줄도 몰랐다.

그러다가 연거퍼 두판이나 이긴 아들녀석이 오늘은 그만 놀자고 하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한판만 더 놀자고 했다. 그래서 한판 더 놀았는데 이번에도 아버지가 졌다.

그쯤했으면 물러나야겠는데 아버지는 체면을 무릅쓰고 한판만 더 놀자고 했다. 그래서 져도 이겨도 마지막판이라는 단단한 약속밑에 한판 더 놀게 되였는데 이번에도 역시 아버지가 졌다. 후끈 단 아버지는 방금전의 약속도 잊고 한판만 더 놀자고 했으나 아들은 약속대로 그만하자고 윷놀이판을 밀어놓았다. 이리하여 아버지는 한판 더 놀자거니 아들은 그만하자거니 하면서 부자간이 밤새껏 싱갱이를 하였다.

이때로부터 경쟁이나 내기에서 지고도 수그러들지 않고 자꾸 달라붙는 사람을 비겨 《윷진애비》라고 부르게 되였다.

이야기를 마치시면서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 속담은 윷놀이가 벌써 오랜 옛날부터 우리 인민들속에서 널리 보급되여왔을뿐아니라 얼마나 재미있는 오락인가를 그대로 말해주고있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날 윷놀이와 같은 민속오락은 그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것이라고 하시면서 그래서 자신께서는 어떻게 하면 이러한 민속오락을 널리 장려하여 우리 인민의 고유한 민족성과 아름다운 정서를 더욱 살릴수 있겠는가에 대해서 오래전부터 생각하여왔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앞으로 윷놀이와 같은 민속오락을 널리 장려하여야 한다고, 우리 인민들속에서는 물론 국제적인 친선모임을 할 때에도 윷놀이와 같은 민속오락을 자랑스럽게 할수 있을것이라고 가르쳐주시였다.

그때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주체85(1996)년 3월에도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한 일군을 부르시여 군인들의 문화정서생활과 관련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다가 그에게 집에서 가족들과 어울려 윷놀이를 해본적이 있는가고 물으시였다.

일군이 올리는 대답을 들으신 그이께서는 이번에 윷판을 많이 만들어서 군대에도 보내주고 집에도 하나 가져다놓고 가족들과 함께 윷놀이를 한번 해보라고 하시면서 집에서 윷놀이를 하는것은 좋은데 잘해서 이겨야지 《윷진애비》가 되여서는 안된다고, 그렇게 되면 가장의 위신이 다 떨어진다고 하시며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그바람에 그전에 위대한 장군님께서 들려주신 《윷진애비》이야기가 생각나 그 일군도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윷진애비》이야기는 윷놀이가 얼마나 재미있는 오락인가를 말해주고있다고, 윷놀이와 같은 민속오락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아주 좋은 오락으로서 그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것이라고 하시였다.

그를 바라보시며 그이께서는 사실 윷놀이는 세상에 자랑할만 한 우리 민족고유의 민속놀이라고, 윷놀이는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다 할수 있고 또 여럿이 할수도 있고 둘이서 할수도 있으며 집에서도 할수 있고 밖에서도 할수 있는 좋은 대중오락이라고 하시면서 윷놀이는 력사도 오래다고, 우리 선조들은 세나라시기 이전부터 윷놀이를 하였다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군인들과 인민들이 윷놀이를 많이 하도록 하자면 윷놀이의 오랜 력사와 재미있는 고담들도 알려주는것이 필요하다고 하시면서 우선 군인들에게 윷판을 많이 만들어주어 그들이 생활을 더욱 흥겹게 할수 있도록 조건을 보장해줄데 대하여 거듭 당부하시였다.

주체85(1996)년 7월 8일, 이날은 위대한 수령님의 서거 2돐이 되는 날이였다.

수령님에 대한 그리움이 남다르시고 하셔야 할 일도 많으시였지만 이날도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조국의 부강번영을 위해 떨쳐나선 인민들이 랑만과 정서속에 살며 일해나가도록 하기 위하여 민속놀이를 장려할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우리 나라에는 지방마다 독특한 민속놀이풍습이 있다고 하시면서 우리 인민들이 먼 옛날부터 즐겨온 윷놀이에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함경도지방에서는 나무를 쪼개여 윷쪽을 만들어가지고 윷놀이를 하는데 그때마다 《돈돌라리》춤을 출 때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즐겁게 놀았다고, 평안도지방에서는 당콩이나 팥알을 쪼개여가지고 윷놀이를 하였다고 하시였다.

지방에 따르는 윷놀이방법에 대하여 해박한 식견으로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는 그이의 말씀을 들으며 일군들은 생활의 랑만과 희열을 북돋아주는 우수한 민속놀이를 창조하고 발전시켜온 우리 민족의 슬기와 재능을 다시금 가슴뿌듯이 느낄수 있었다.

윷놀이는 우리 나라에서 고대로부터 전하여오는 력사가 매우 오랜 놀이로 알려져있다. 그것은 윷놀이에서 쓰이는 용어들인 《도》, 《개》, 《걸》, 《윷》(《슝》), 《모》가 고대국가의 하나였던 부여의 관직명에서 유래된 사실이 잘 보여주고있다.

윷놀이는 그후 세나라시기에 들어와 보다 활발히 진행되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채를 띠고 벌어진 곳은 고구려였다.

최근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서는 고구려시기의 윷놀이판도형이 새로 발견되여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큰 바위우에 29개의 홈구멍들이 《》모양으로 새겨져있는 윷놀이판도형은 조선봉건왕조시기에 나온 《송도지》라는 책에 실려있는 윷놀이판그림설명문과 꼭같다.

윷놀이에 깃든 우리 민족의 지혜가 얼마나 뛰여났는가 하는것은 윷판에도 그대로 반영되여있다. 모두 29개의 말밭(윷말이 머무르는 자리)으로 되여있는 윷판은 고대사람들의 우주관에 기초하여 만들어진것으로 알려져있다.

그에 대하여 《송도지》를 비롯한 력사기록에서는 《윷판의 바깥 둥근것은 하늘을, 안의 모진것은 땅을 상징한것이다. 즉 하늘이 땅을 둘러싼 형상이다. 그리고 29개의 말밭은 별의 위치를 형상한것인데 가운데방이 추성(북극성)이고 그옆의 28개의 밭들은 하늘의 28수(해자리길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7개씩 돌려있는 28개의 별자리)를 본뜬것》이라고 씌여져있다.

이렇듯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고 우리 민족의 지혜와 슬기를 상징하는 윷놀이는 놀이방법이 간단하고 때와 장소, 성별과 나이에 구애됨이 없이 누구나 할수 있는 대중성을 띤 민속놀이이다.

정녕 선조들이 창조한 민속놀이 하나에도 심혈을 바치신 위대한 장군님의 크나큰 사랑과 뜨거운 은정이 있어 공화국에서는 윷놀이가 민속명절때마다 TV로 방영되고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대중오락으로 더욱 장려되게 되였다.

18

 

순수 오락으로만 여기지 말라

 

예나 지금이나 우리 인민들이 즐겨 노는 민속놀이가운데서 장기만큼 대중적인 놀이는 없다.

일단 놀이를 시작하면 언제 시간이 가는지 모르는것이 장기이고 뺨을 맞으면서까지 훈수를 드는것도 다름아닌 장기이다. 그만큼 장기는 우리 민족의 생활과 인연이 깊은 흥미있는 놀이로서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다.

력사기록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시기에 벌써 무관들은 물론 일반평민들속에서까지 장기가 널리 보급되여있었다.

당시의 장기는 가로 14줄, 세로 15줄로 된 넓은 장기판을 가지고 논데로부터 일명 《광상희》라고도 하였다.

그후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이르러 장기가 보다 광범히 보급되는 과정에 오늘날의것과 같이 32쪽의 장기쪽과 가로 10줄, 세로 9줄로 된 장기판을 가진 놀이로 고착되게 되였던것이다.

어느해인가 위대한 장군님께서 인민군지휘성원들과 함께 어느 한 인민군부대를 찾으시였을 때의 일이다.

마침 점심식사를 앞두고 잠시 마련된 휴식시간이여서 한 젊은 지휘관과 그곳의 나이지숙한 부대장이 장기를 두고있었다.

이때 그곳에 들어서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부대장쪽 차와 말이 젊은 지휘관의 궁앞에 와 통장훈을 노리는것을 보시고 방어만 하지 말고 대담하게 공격하라고 이르시였다.

서로 이기겠다고 승벽을 부리는 두 지휘관의 장기모습을 이윽토록 바라보시던 그이께서는 동행한 일군들에게 장기를 배우는것이 나쁘지 않다고, 더구나 지휘관들은 휴식날 같은 때에 전사들과 허물없이 어울리자고 해도 장기를 배우는것이 좋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우리 나라에서는 오래전부터 윷, 바둑, 꼬니를 비롯한 겨루기놀이들을 해왔는데 그중에서도 남성들은 장기놀이를 즐겼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옛날에는 장기에 궁, 말, 차, 졸밖에 없었다는것과 그후 화약의 발명으로 포라는 쪽이 생기고 상과 귀사도 생겼다고 하시며 장기의 발전력사에 대하여 하나하나 가르쳐주시였다.

계속하여 그이께서는 장기는 전투마당을 본따서 만든 오락으로서 누가 먼저 수를 써서 상대방의 궁을 제압하는가에 따라 승부를 가르기때문에 다른 오락에 비하여 머리를 많이 쓸것을 요구한다고, 장기는 수의 겨루기놀이인것만큼 쪽 하나를 잘못 쓰면 결국 전반적형세에 돌이킬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것이라고 하시면서 그래서 졸 하나를 옮길 때에도 심사숙고하고 자기와 상대편을 구체적으로 료해하는것이라고, 그렇기때문에 장기는 순수 오락으로만 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누구도 생각지 못한 문제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일깨워주시였다.

순수 오락으로만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위대한 장군님의 말씀은 일군들의 가슴을 세차게 울리였다.

실로 장기에 대하여 그렇듯 해박한 식견을 지니시고 거기에 깃들어있는 우리 민족의 남다른 슬기와 재능을 빛내여주시려는 김정일장군님의 높으신 뜻에 의하여 오늘도 우리 인민들속에서는 장기가 가장 인기있는 대중놀이로 적극 장려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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