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민속전통을 귀중히 여기시여

민속전통교양의 거점
유구한 력사와 수려한 풍치를 자랑하는 평양에는 근 60년의 력사를 가진 조선민속박물관이 있다.
다양한 민속유물들과 생동한 직관자료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조선민족의 우수한 민속전통과 미풍량속에 대한 폭넓은 인식을 주는데 크게 이바지하고있는 조선민속박물관은 나라의 민속유물보존 및 민속전통교양기지로서의 자기의 면모를 뚜렷이 갖추고있다.
이곳에는 조선의 민속전통을 귀중히 여기시고 그의 계승발전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이신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숭고한 발자취가 력력히 새겨져있다.
항일전의 나날 민족의 우수한 생활문화와 민속전통을 고수하고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원대한 구상을 무르익히신 그이께서는 해방후 새 조국건설의 그토록 바쁘신 가운데서도 민속유산들과 자료들을 적극 발굴수집정리할데 대한 방향과 방도를 명확히 밝혀주시며 민속전통을 고수하고 빛내이기 위한 사업에 언제나 깊은 관심을 돌리시였다.
미제의 야만적인 파괴행위로 온 강토가 재더미로 변해버린 준엄한 전화의 나날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귀중한 민속유물들을 안전하게 보관하도록 구체적인 대책과 조치들을 취해주시였다.
인민들속에 애국주의정신을 심어주는데서 민족의 우수한 생활문화와 풍습을 통한 교양사업이 가지는 중요성을 깊이 통찰하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벽돌 한장 성한것이 없던 전후의 그처럼 어려운 속에서 민속박물관창립을 발기하시고 그 준비사업을 세심히 보살펴주시였다.
공장 하나, 살림집 한채라도 더 짓는것이 급선무였던 당시에 어느 누구도 민속전통의 계승발전과 관련한 문제에 관심을 돌릴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있었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민족의 유구한 전통과 문화를 대대손손 빛내여나가는것을 그 무엇에도 비길수 없는 중대사로 보시고 그렇듯 큰 용단을 내리시였던것이다.
그리하여 1956년 2월 10일 국립중앙민속박물관(조선민속박물관의 전신)이 창립되게 되였다. 민속박물관이 창립됨으로써 우리 민족의 우수한 생활문화와 풍습을 전면적으로 살려나갈수 있는 믿음직한 연구기지, 민속유물에 대한 발굴수집 및 보존기지가 마련되게 되였으며 인민들에게 민족적긍지와 자부심, 애국심을 북돋아줄수 있는 거점이 꾸려지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민속박물관을 내오신 후 박물관사업에 깊은 관심을 돌리시고 제기되는 문제들에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주체49(1960)년 6월 이곳을 찾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박물관의 관리운영을 개선하기 위한 방향과 방도를 환히 밝혀주시였으며 박물관건물을 새로 건설할데 대한 조치도 취해주시였다.
그후에도 수령님께서는 평양시 중요건설대상모형사판을 보아주시는 자리에서 또다시 민속박물관건물을 잘 지을데 대하여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이렇듯 은정어린 손길아래 민속박물관은 훌륭히 꾸려지게 되였으며 지난 수십여년간 민족의 우수한 전통과 풍습을 찬란히 계승발전시키는 동시에 조선민족의 아름답고 유구한 민속전통을 온 세상에 널리 소개선전하는데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여왔다.
정녕 나라형편이 그처럼 어려웠던 전후시기 민속박물관을 창립하도록 하시고 걸음걸음 손잡아 이끌어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심혈과 로고속에는 인민들이 크나큰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우리 민족의 우수한 민속전통을 더욱 훌륭히 꽃피워나가도록 하시려는 높은 뜻이 담겨져있었다.
민속학발전의 고귀한 지침
인민들속에서 주로 예로부터 전해오는 전통적인 습관, 신앙, 설화, 가요, 속담 등을 수집, 정리하는것으로부터 발생한 민속학은 력사발전과 더불어 인민들의 생활풍습의 특성과 그 형성발전의 합법칙성을 밝혀내는 과학으로 발전하였다.
공화국에서 민속학은 수천년의 기나긴 세월을 거쳐 이루어진 단일민족의 풍속으로서 예로부터 전해오는 의례행사, 사회생활, 물질문화, 인민예술 등에 대한 연구사업을 주체적방법론에 기초하여 진행하고있으며 민족적형식에 사회주의적내용을 담은 새로운 풍습을 창조하고 발전시키며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높여주는데 실천적으로 이바지하고있다.
오늘 사회주의문명국가건설의 요구에 맞게 자기의 사명과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나가고있는 조선민속학의 발전에는 일찌기 민속학부문에 깊은 관심을 돌리시고 걸음걸음 손잡아 이끌어주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세심한 가르치심과 현명한 령도의 자욱이 뜨겁게 어리여있다.
주체52(1963)년 7월초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민속유산을 옳게 계승하고 발전시켜나가는데서 지켜야 할 원칙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날 오랜 력사를 통하여 형성되고 발전풍부화된 조선사람의 민족적생활풍습가운데는 좋은것이 많다고 하시면서 권력이나 재물보다도 의리와 도덕을 더 귀중히 여기고 서로 돕고 화목하게 사는 풍습을 비롯하여 녀자들의 옷차림풍습, 웃사람을 존경하고 아래사람을 사랑하는 례의도덕과 같은 풍습은 참으로 좋은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계속하여 그이께서는 자기 민족의 고유한 생활풍습을 잘 알도록 하는것은 사람들속에서 민족적긍지와 자부심, 애국심을 키워주고 사회주의적생활양식을 확립하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하시면서 말씀을 이어나가시였다.
사회주의적인 생활양식은 빈터우에서가 아니라 민속유산가운데서 진보적이며 인민적인것을 오늘의 현실에 맞게 비판적으로 계승발전시키는 기초우에서 이루어지므로 지난날의 생활풍습, 민속유산을 잘 알아야 한다. 민속유산을 허무적으로 대하는 현상을 경계하는 동시에 복고주의를 철저히 반대하여야 하며 그것을 비판적으로 계승발전시키는 원칙적립장을 견지하여야 한다. 지난날의 진보적이며 인민적인 생활풍습은 시대적 및 계급적제한성을 가지고있는것만큼 오늘의 시대적조건에 맞게 비판적으로 계승발전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나라의 민속유산들을 전면적으로 조사발굴하고 옳게 종합체계화하여야 한다. …
참으로 이날에 주신 위대한 장군님의 가르치심은 복고주의와 허무주의를 다같이 경계하면서 민족적풍습가운데서 낡고 뒤떨어진것은 버리고 좋은것은 적극 살려나갈데 대한 고귀한 지침이였으며 조선민속학연구와 선전에서 항구적으로 틀어쥐고나가야 할 강령적지침이였다.
식생활에서 주체를
해방후 정규무력건설사업이 추진되고있던 어느 겨울날에 있은 일이다.
이날에 진행된 군사부문 일군들의 협의회에서는 군대의 식사문제를 놓고 심각한 론의가 있었다.
군대의 주식을 빵으로 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였던것이다.
그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군대생활의 특성을 운운하면서 분과 초를 다투는 현대전의 요구에 맞게 식사를 하자면 빵을 먹는것이 좋을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다른 나라의 경험을 한참이나 렬거하였다. 그 자리에 참가했던 다른 사람들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이때 그의 이야기를 듣고계시던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서시여 빵이 간편하기는 하지만 우리 군대는 조선사람의 풍습대로 밥을 먹어야 한다, 맛으로 한두끼 먹는다면 몰라도 집에서 밥과 국만 먹던 동무들에게 빵이 맞을수 있겠는가, 또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주작물이 쌀인데 그 많은 량의 밀을 어데서 구해다 빵을 먹이겠는가, 그러니 빵은 우리 사람들의 오랜 식생활구미에도 맞지 않으며 현실성도 없다고 다정히 일깨워주시였다.
사실 빵을 주식으로 하자는것은 결국 오랜 력사를 두고 밥을 주식으로 하여온 우리 민족의 식생활풍습을 무시하는것이였다.
당시 사대주의, 교조주의에 물젖어 무턱대고 남의것을 그대로 본따려던 일부 사람들의 그릇된 주장은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의 사리정연한 론리앞에서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되였으며 협의회에서는 어머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밥을 군대의 주식으로 할데 대하여 일치한 합의를 보게 되였다.
이날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께서 하신 말씀은 모든 문제를 오직 우리 나라의 구체적현실과 우리 민족의 기호와 풍습에 맞게 조선식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귀중한 말씀이였으며 식생활에서 주체를 세워야 한다는 깊은 뜻이 담겨진 고귀한 지침이였다.
도서 《조선의 민속전통》이 발행되기까지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생활풍습을 종합체계화한 도서 《조선의 민속전통》은 오늘 사람들에게 커다란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안겨주며 조상전래의 우수한 풍습을 사회주의적생활양식에 맞게 계승발전시켜나가는데 적극 이바지하고있다.
주체77(1988)년 7월말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민속전통교양도서와 관련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매개 민족에게는 다 대를 이어가면서 계승되고 발전되는 민속전통이 있다고 하시면서 우리 인민은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를 가지고있는 슬기로운 민족이라고, 그 어느 민족보다도 우수한 민속전통을 창조하고 계승발전시켜왔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아직까지 우리 나라에는 우리 민족의 우수한 민속전통에 대하여 우리 식으로 써놓은 책이 없는데 대하여 지적하시였다.
사실 그때까지만 하여도 우리 민족의 우수한 문화전통과 미풍량속을 반영한 종합적인 민속도서가 별로 없었다.
이러한 실태를 깊이 헤아리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일찍부터 인민들과 청소년학생들에게 우리 민족의 민속전통에 대한 정확한 리해와 과학적해명에 도움이 될수 있고 높은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안겨줄수 있는 도서를 우리 식으로 새롭게 편찬발행하기 위한 구상을 무르익혀오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날 지난날 일부 편협한 사람들에 의해 민속전통의 계승과 발전을 저애하는 편향들이 나타난데 대하여 구체적으로 지적하시고나서 일군들에게 자신께서는 우리 시대에 우리 민족의 민속전통에 대한 책을 우리 식으로 완성하여 후대들에게 넘겨주기로 결심하였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계속하여 그이께서는 민속전통을 소개하는 책은 철저히 우리 민족의 민속전통을 잘 살리면서 시대적미감과 사회주의적생활양식에 맞게 우리 식으로 써야 한다고, 그래야 우리 민족의 우수한 문화전통과 미풍량속을 온 세상에 널리 소개선전할수 있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또한 그이께서는 앞으로 민속전통에 대한 책이 완성되면 그것을 우리 민족의 민속전통으로 고착시키고 대대손손 내려가면서 후대들에게 물려줄수 있게 잘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우리 민족을 제일로 사랑하시고 민족의 우수성을 길이 전해가시려는 그이의 숭고한 민족애에 일군들은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금할수 없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후 도서편찬발행과 관련하여 국가적인 비상설편찬위원회를 내오도록 하시고 유능한 과학자, 기자, 편집원, 일군들로 강력한 집필력량을 무어주시였다. 뿐만아니라 우리 나라의 민속전통을 소개하는 도서의 이름을 《조선의 민속전통》이라고 달도록 하시고 여러차례에 걸쳐 도서의 권별구성과 체계, 서술방향과 내용 등 학술적으로 제기되는 원칙적문제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으며 도서발행에서 나서는 실무적문제들도 하나하나 다 풀어주시였다.
이렇듯 위대한 장군님의 발기와 세심한 지도, 크나큰 은정속에 1995년 10월에 전 7권으로 된 도서 《조선의 민속전통》이 훌륭히 편찬발행되게 되였다.
도서는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의식주생활풍습, 가족생활풍습, 로동생활풍습, 민속명절과 놀이, 민속음악과 무용, 구전문학, 민속공예 등의 다양한 풍습내용을 력사적인 자료를 안받침하여 폭넓게 담고있다.
참으로 도서 《조선의 민속전통》은 조상전래의 민속풍습을 누구보다도 귀중히 여기시고 그것을 잘 살려나가도록 현명하게 이끌어주신 위대한 장군님의 은정깊은 조치에 의하여 세상에 태여난 또 하나의 귀중한 민족의 재보이다.
더없이 중요한 문제
1990년대초 이전 쏘련을 비롯한 동유럽의 일부 나라들에서 사회주의가 붕괴된것을 기화로 퇴페적인 자본주의생활풍조가 그 어느때보다 기승을 부리며 세상을 어지럽히고있었다.
제국주의자들은 어떻게 해서나 조선에서 사회주의기치를 내리워보려고 악랄하게 책동하고있었다.
주체83(1994)년 1월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이날 협의회를 소집하시고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민족적인것을 널리 장려할데 대한 문제를 토의하시였다.
너무나 뜻밖의 문제에 협의회참가자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사실 그때 나라의 전반사업에서는 해결을 기다리는 중요한 문제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사회생활에서 민족적인것을 살려나가는것을 사회주의위업수행을 위한 더없이 중요한 문제로 보시고 새해에 들어와 처음으로 진행되는 이날 협의회에 이 문제를 상정시키시였던것이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지금 우리 인민들의 사회문화생활에서 민족적인 색채가 점차 없어지고있다고, 체육경기를 하는것을 보아도 씨름과 같은 민족체육종목은 없고 거의나 국제경기들에서 하는 종목뿐이라고 지적하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회적으로 진행되는 체육경기들에서는 축구, 배구, 탁구를 비롯하여 국제경기들에서 하는 종목이 기본을 차지하고 예로부터 내려오는 우리 민족의 민속놀이인 씨름, 윷놀이, 그네뛰기, 바줄당기기 같은것은 널리 장려되지 못하고있었다.
그이께서는 앞으로 민족체육종목경기를 적극 장려할데 대하여 강조하시면서 씨름경기도 그냥 조직하지 말고 소를 내걸고 요란하게 하며 도별연띄우기경기 같은것도 조직하여 우승한 사람들에게 상을 주며 명절날 같은 때에 민족체육경기를 조직하면 인민들이 좋아할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전체 협의회참가자들은 사회주의위업수행에서 민족적인것을 살려나가는 문제를 더없이 중요한 문제로 내세워주시며 민족성고수의 고귀한 지침을 마련해주신 위대한 장군님에 대한 감사의 정과 끓어오르는 격정을 금치 못하면서 그이의 숭고한 뜻을 충실하게 받들어나갈 불타는 결의를 다지고 또 다지였다.
그후 해마다 전국의 이르는 곳마다에서 씨름, 널뛰기, 그네뛰기, 연띄우기경기 등 민족체육종목들이 적극 장려되여 활발히 진행되였으며 사람들은 명절이나 쉬는날에는 물론 일상적으로도 민족체육경기를 벌려놓고 서로서로 승부를 겨루면서 문화정서생활을 보다 마음껏 즐기고있다.
민속이 없으면 민족도 없다
주체69(1980)년 3월 어느날이였다.
이날 일군들과 자리를 같이하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그들에게 오늘이 정월대보름날이라고 하시면서 몸소 준비하신 조선엿을 맛보라고 나누어주시였다.
그날이 정월대보름날이라는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군들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러는 일군들에게 우리 인민들은 설명절과 같은 명절놀이에서뿐아니라 로동생활, 문화생활, 의식주생활, 도덕생활 등에서 우수하고 훌륭한 민속전통을 창조하였다고, 우리 선조들이 대를 이어오면서 창조한 민속전통은 우리가 잘 보존하고 계승발전시켜야 할 귀중한 민족적유산이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제서야 일군들은 그이께서 오늘이 정월대보름날이라고 알려주신것이 단순히 민속전통을 돌이켜보기 위해서만이 아니였음을 깨달았다.
계속하여 그이께서는 우리 선조들이 창조하고 대를 이어오면서 지켜온 민속전통에는 우리 인민의 고상한 사상감정과 례의도덕, 조선사람의 독특한 생활양식과 우리 민족의 고유한 기호와 특성이 반영되여있다고 하시면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고상하고 아름다운 민속전통을 가지고있다는 높은 긍지를 간직하고 우리 인민의 민족적특성을 더욱 빛내여나가야 한다고, 민속을 버리면 민족을 잃어버릴수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일군들은 위대한 장군님의 말씀에서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민속이 단순히 한 민족의 세태나 풍속이 아니라 거기에 바로 민족의 숨결과 넋이 깃들어있고 민족의 고유한 풍습과 발자취가 어려있기에 민속, 그것이 없으면 민족도 없다는 말씀이 고귀한 지침으로 일군들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졌던것이다.
민속이 없으면 민족도 없다.
세상에 나라도 많고 민족도 많지만 이처럼 숭고한 진리로 민족의 풍속을 귀중히 여기고 빛내여주신 절세의 위인을 모신 우리 인민, 우리 민족처럼 존엄높고 긍지높은 민족이 또 어디에 있으랴.
뜻깊은 사연
흰 저고리에 깜장치마는 색갈조화가 산뜻하고 단정하여 조선녀성들의 순결하고도 깨끗한 마음씨가 그대로 비껴있는 옷차림새이다.
주체66(1977)년 9월 중순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새로 만든 의상도안과 견본품들을 보아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조선옷 특히 녀성들의 치마저고리는 수천년의 력사가 있는 문화적이고도 세련된 옷으로서 오늘도 세계 그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할만 한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지난 시기 젊은 녀성들은 흰 저고리에 깜장치마를 즐겨 입었는데 그것은 검박하면서 고상하게 보여 좋다고 하시며 앞으로 대학생처녀들에게 교복을 줄 때 흰 저고리에 깜장치마를 한벌씩 더 주어야 하겠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이의 말씀을 받아안으며 류달리 산뜻하면서도 단정한 흰저고리에 깜장치마를 받쳐입은 대학생처녀들의 청신한 자태를 그려보는 일군들의 가슴은 저도 모르게 설레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대학생처녀들에게 흰 저고리에 깜장치마를 입히자고 하신데는 이런 뜻깊은 사연이 깃들어있었다.
해방직후에 있은 일이였다.
어느날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중요한 국가행사에 참가하게 될 한 녀성농민의 옷차림을 두고 무척 마음쓰시였다.
그 녀성으로 말하면 해방전 지주의 땅을 얻어부치며 고생이란 고생은 다하다가 해방이 되여 분여받은 제땅에서 거두어들인 첫해 알곡을 애국미로 바친 녀성이였다.
김정숙어머님께서는 녀성일군들에게 어떤 옷을 해입히겠는가 생각을 해보라고 이르시였다.
그러자 모두들 제나름의 생각들을 터놓았다. 까만 양복이니, 보라색양복이니, 달린옷이니…
곁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계시던 어리신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우리 녀성들이 제일 즐겨 입는 조선옷을, 그것도 그지없이 소박하면서도 깨끗하고 단정해보이는 흰 저고리에 깜장치마를 해드렸으면 좋겠다고 어머님께 말씀드렸다.
모두들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옷이였기때문이다.
진정 어린시절부터 민족고유의 우리것을 제일로 사랑하고 귀중히 여겨오신 장군님이시였기에 대학생처녀들에게 흰 저고리에 깜장치마를 안겨주도록 하시여 대학교정과 거리마다에 조선녀성들의 순결하고도 깨끗한 마음씨가 그대로 비껴들게 하시였던것이다.
오늘도 그날의 뜻깊은 사연과 은정을 전하며 공화국에서는 흰 저고리에 깜장치마가 처녀대학생들의 교복으로서뿐아니라 녀성들이 즐겨 입는 일상옷으로 각별한 사랑을 받고있다.
몇년전 조국을 방문하여 평양의 거리를 거닌적이 있는 한 해외동포는 자기의 방문기에 《보통날에도 평양시내에서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다니는 녀성들을 자주 볼수 있다. 대학생처녀들은 례외없이 깜장치마에 흰 저고리를 받쳐입고 학교에 오간다.
민족의상을 차려입고 민족적인 아름다움을 지켜가는 북녘인민들의 모습에 감동이 솟구쳤다.》라고 소감을 남겼다.
어느해인가 남조선의 한 방송이 설날을 맞으며 각계층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전통적인 민족의상을 입지 않겠다는 가정이 63%나 되였다고 한다.
민족성이 활짝 꽃피는 공화국과 양풍, 왜풍에 떠밀려 민족의 넋과 미풍량속이 흐려져가고있는 남조선의 판이한 차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실례이다.
소원
무릇 사람들에게는 소중히 간직하고있는 소원이 있다. 바라던 소원이 풀렸을 때 사람들은 제일 기뻐한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마음속 깊은 곳에 하나의 소원을 간직하고계시였다. 그리고 그 소원을 이루신 기쁨도 있었으니 이제 그 이야기를 전한다.
그날은 주체49(1960)년 11월 중순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이날도 수도시민들의 부식물문제가 걱정되시여 시안의 여러곳들을 돌아보시였다. 어느 한 상점에 들리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두부공급정형을 일일이 료해하시였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두부는 다른 부식물에 비하여 공급량이 적었고 질도 높지 못해서 주민들로부터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있었다.
이러한 실태를 헤아리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에게 두부는 우리 인민이 오래전부터 즐겨 먹으며 널리 자랑하여온 민족음식의 하나이라고, 앞으로 시민들에게 하루 한사람에게 두부를 한모씩만 차례지게 한다면 자신께서는 그 이상 기쁜 일이 없겠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사실 두부는 우리 인민들이 먼 옛날부터 즐겨 먹어온 대중음식, 고유한 민족음식이다.
우리 나라에서 두부와 관련한 력사기록은 고려 말기의 문헌들인 《목은집》, 《양촌집》 등에 처음으로 보이지만 그 유래는 그보다 퍽 앞선 시기로 볼수 있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 들어와 우리 나라의 두부만드는 기술이 발전하고 그 맛 또한 얼마나 좋았던지 중국의 명나라황제도 경탄하였다는 사실이 《세종실록》에 전해오고있다.
당시 두부의 종류에는 새끼로 묶어들고 다닐만큼 단단한 막두부, 처녀의 고운 손이 아니고서는 문드러진다는 연두부, 굳어지기 전에 먹는 순두부, 기름에 튀겨먹는 유두부, 얼구어서 먹는 언두부, 명주로 굳힌 비단두부, 베천에 싸서 굳힌 베두부 등 수십가지나 되였다.
뿐만아니라 지방의 이름을 달아 정선두부, 초당두부, 만월두부 등으로 불리우며 첨가되는 부재료에 따라 잣두부, 황기두부, 솔잎두부, 검은콩두부 등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두부는 고소하고 연하며 부드러운 맛과 함께 사람의 건강에 리로운 단백질, 기름, 당질, 광물질 등이 풍부히 들어있고 소화흡수률이 대단히 높은 단백질식료품으로서 조선봉건왕조시기 편찬된 《동국세시기》라는 책에도 지금의 반찬중에서 가장 좋은 음식은 두부라고 씌여져있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룡북식료공장도 찾으시고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망돌만 있으면 두부를 얼마든지 만들어 먹었다고 하시며 신비스러운것이 없으니 여러가지 방법으로 맛좋은 두부를 생산해서 인민들에게 공급할데 대하여 간곡히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을 받아안은 일군들은 곧 어느 한 두부공장에 나가 기술자들의 지혜를 발동하고 고심어린 연구를 거듭하던 끝에 몇가지 기술적문제들을 해결하여 20여일만에 새로운 두부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하였다.
어느날 새로운 방법으로 질좋은 두부를 만들어냈다는것과 두부에 대한 시민들의 평가도 대단히 좋아졌다는 보고를 받으신 수령님께서는 그 두부를 보아주시고 인민들에게 사철 따끈따끈한 두부를 마음껏 먹여보았으면 하는것이 자신의 간절한 소원의 하나이라고 하시면서 동무들이 오늘 나를 기쁘게 해주었다고 못내 만족해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신께서 오늘 기쁜 마음으로 두부이름을 하나 지어주겠다고, 두부가 하들하들한것이 보기에도 차분한 맛이 나니 《콩깨묵두부》라고 하는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시였다.
그후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겨울의 이른새벽에 어느 한 두부공장을 찾으시여 몸소 두부맛도 보아주시고 공장과 농촌마을들을 찾으시여서는 콩을 식생활에 합리적으로 리용하여 인민들에게 더 많은 두부를 만들어 공급할데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인류력사에는 해당 나라의 료리발전과 결부된 위인들과 정치가들의 일화가 적지 않게 기록되여있다.
하지만 우리 수령님처럼 인민들의 식탁에 민족음식 한가지라도 더 놓아주기 위해 그토록 마음쓰고 인민의 행복에서 가장 큰 기쁨과 락을 찾은 위인에 대한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위대한 수령님의 간절한 소원이 담긴 사랑의 조치에 의하여 조선사람들이 즐겨 먹던 민족음식 두부는 이렇듯 《콩깨묵두부》로 새롭게 태여나 오늘도 인민들의 식탁을 보다 풍성하게 하여주는 좋은 음식의 하나로 되고있다.
왜 김치가 없는가
김치는 조선민족음식의 특색과 우수성을 보여주는 손꼽히는 고유한 음식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있다.
김치라는 말은 남새를 소금물에 담그어 만든 음식이라는 고유조선말인 《딤치》에서 유래되였다. 그후 세월의 흐름속에서 《딤치》는 《ㄷ→ㅈ→ㄱ》의 어음변화과정을 거쳐 김치라는 말로 고착되였다.
우리 나라에서 김치는 세나라시기에 이미 중요부식물의 하나로 식생활에 보급리용되였으며 고려시기에는 국가적으로 김치를 만들고 관리하는 《침장고》라는 기구까지 생겨나게 되였다. 그후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이르러 김치의 재료와 담그는 방법이 보다 발전함에 따라 그 종류와 가지수는 더욱 다양해졌다.
김치는 조선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부식물의 하나이며 잔치때나 명절날과 같이 갖가지 맛있는 음식을 차릴 때는 물론이고 간단히 몇가지 음식만을 차릴 때에도 음식상에 김치만은 반드시 올려놓군 하였다. 시원하고 쩡하면서도 독특한 향기와 상쾌한 맛이 조화를 이루는 김치는 참으로 우리 민족의 식생활과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는 음식이다.
가렬한 조국해방전쟁이 한창이던 주체41(1952)년 6월 중순 어느날 저녁 한 비행구분대를 찾으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그곳 부대군인들이 리용하는 식당에도 들리시였다.
그때 식당에서는 몇명의 비행사들이 위대한 수령님께서 들어서신줄도 미처 모르고 유쾌하게 이야기하며 식사를 하고있었다.
그이께서는 비행사들에게로 다가가시여 밥이 맛있는가고 다정히 물으시였다.
그제서야 위대한 수령님을 알아본 비행사들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는 그들에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어서 앉아서 식사하라고 거듭 이르시고나서 자신께서도 식탁에 마주앉으시였다.
료리가 구미에 맞는가고 다시금 물으시며 잠시 식탁을 살펴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왜 김치가 없는가고 하시며 조선료리로서는 김치가 제일이라고, 조선사람은 김치가 있어야 밥먹는것 같다고 말씀하시였다.
사실 조선사람치고 김치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족음식의 가지수가 수없이 많지만 김치만큼 특색이 있고 일상적으로 즐겨 먹어온 음식은 없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취사장에도 들리시여 비행사들이 무슨 음식을 많이 찾는가도 알아보시고 김치와 고추를 찾는다는 취사원의 대답도 들어주시며 지휘관들에게 비행사들의 구미와 기호에 맞는 음식을 공급해줄데 대하여 간곡히 당부하시였다.
부대지휘관들은 왜 김치가 없는가라는 수령님의 다정한 그 물으심에 담겨진 깊은 뜻을 가슴에 새겨안고 그이의 가르치심대로 더 많은 민족음식을 군인들에게 공급할 결의를 굳게 다지였다.
그리하여 이곳 부대군인들의 식탁에는 김치를 비롯하여 구미를 돋구는 다양한 민족음식들이 더 많이 오르게 되였다.
민족의 향취 넘치는 푸짐한 식탁에 앉을 때마다 전사들은 사랑하는 조국을 피로써 사수할 불타는 애국심과 승리의 그날을 앞당겨올 일념으로 가슴을 불태웠다.
인민들의 비난을 받는다
예로부터 음식맛의 좋고나쁨은 장맛에 달려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18세기에 편찬된 《증보산림경제》에 《장은 모든 음식맛의 으뜸이다. 집안의 장맛이 좋지 않으면 좋은 남새와 고기가 있어도 좋은 음식으로 될수 없다.》고 씌여져있는것만 보아도 잘 알수 있다.
장맛에 대한 조선사람들의 관심이 얼마나 큰가 하는것은 《장이 달아야 국이 달다.》, 《장이 단 집에 복이 많다.》, 《녀자집의 장맛보고 색시감을 얻어라.》는 속담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주체51(1962)년 2월 중순 온천군을 현지지도하고계시던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어느날 저녁 이곳 군의 책임일군들과 식료공장 지배인을 부르시였다.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신 수령님께서는 장문제를 의논해보자고 동무들을 불렀다고 하시면서 온천장에 대한 인민들의 평가가 어떤가고 물으시였다.
그들이 제대로 대답을 올리지 못하고있는데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여러곳을 다니며 먹어보던중 온천장이 맛이 못한데 인민들이 먹는 장을 되는대로 만들어서야 되겠는가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조선음식은 밥다음에 장인데 장맛이 없으면 고기국도 맛이 없다. 조선사람에게 있어서 간장, 된장은 한끼도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식료품이다. 동무들이 만드는 장이 맛이 없으니 군내인민들은 늘 맛없는 음식을 먹을것이 아닌가. 지난날에 장을 맛있게 잘 담그지 못하는 며느리는 시어머니로부터 미움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장이 그처럼 식생활에서 중요하다는것을 의미한다.
그러시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장을 맛있게 담그지 않으면 시어머니가 아니라 인민들의 비난을 받는다고 일깨워주시고 우리는 인민들에게 고기도 많이 먹이고 닭알도 많이 먹이자고 하는데 무엇때문에 간장, 된장이야 맛좋게 만들어 먹이지 못하겠는가고 절절히 말씀하시였다.
일군들은 인민의 충복으로서의 복무정신이 부족하였던 자기들의 처사를 뉘우치며 얼굴을 붉히였다.
지난날 이 나라 농촌의 그 어느 집에 가도 방안이나 부엌의 여러곳에 주렁주렁 매달아놓은 메주덩이를 볼수 있었다. 집집마다 자체로 장을 담그는것은 녀성들에게 있어서 품이 드는 일의 하나였다.
해방후 위대한 수령님께서 군마다 장공장을 세워주시여 수천년을 두고 수공업적으로 담가먹던 장이 공업적방법으로 생산되게 되였다. 그리하여 장의 가지수가 늘어나고 장맛도 훨씬 더 좋아지게 되였다.
그러나 인민들에게 보다 질좋은 장을 안겨주시려 마음쓰신 위대한 수령님의 헌신은 그 폭과 깊이를 잴수 없는 한없이 숭고한것이였다.
얼마후 수령님께서는 온천식료공장에 유능한 기술일군들과 새로운 설비들도 보내주시였다.
이곳 일군들은 장맛이 없으면 인민들로부터 비난을 받는다는 그이의 가르치심을 심장에 새기고 장맛을 개선하기 위한 사업을 힘있게 내밀어 마침내 평양장맛과 다름없는 장을 만들어내게 되였다.
새로 정비된 식료공장에서 맛좋은 장이 생산된다는 보고를 받으신 수령님께서는 못내 기뻐하시며 도, 시, 군책임일군들과 지방공업부문 일군들이 온천식료공장을 돌아보도록 하시여 모든 도들에서 장맛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을 적극 벌려나가도록 이끌어주시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인민들이 일상적으로 먹는 장맛을 두고 온갖 심혈을 기울여오신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뜻을 이어 나라의 이르는 곳마다에 기초식품공장들을 일떠세우도록 하시고 여기에서 생산된 질좋은 여러가지 장들을 인민들에게 정상적으로 공급하도록 정력적으로 이끌어주시였다.
은정속에 솟아난 기초식품공장들에서 생산되여나오는 맛좋은 여러가지 장들은 오늘도 사람들의 식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부식물로 더욱더 호평을 받고있다.
충격
세 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 나라에서는 일찍부터 명란젓, 새우젓, 멸치젓, 조개젓, 굴젓, 게젓을 비롯한 여러가지 젓갈품이 밑반찬으로 널리 리용되여왔다.
력사자료에 의하면 우리 민족이 젓갈을 부식물로 리용해온 력사는 매우 오래다. 세나라시기 결혼례장에 젓갈이 쓰이였다고 한 《삼국사기》의 기록과 새우로 만든 젓갈을 모두 즐겨하였다는 《고려도경》의 기록은 조선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젓갈을 만들어 식생활에 널리 리용하였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참으로 그 맛이 하도 독특하여 한번 맛을 들이면 그릇에 담은것이 다 없어질 때까지 수저를 놓지 못한다는 젓갈이야말로 밥반찬으로서는 더없이 좋은 부식물이다.
그러나 한때 수산부문의 일부 일군들은 중세소어업을 소홀히 하고 대형어업에만 매달리면서 인민들에게 젓갈품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고있었다.
주체56(1967)년 12월초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남포시안의 수산부문 일군들을 몸가까이 부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지난번 남포에 나갔다가 인민들로부터 새우젓이 잘 공급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싶어 동무들을 불렀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자신께서도 평양에서 자랐는데 그때 어렵게 살았기때문에 죽을 쑤어먹으면서도 새우젓은 먹었다고 하시며 인민들에게 새우젓 하나 넉넉히 공급하지 못해서야 무슨 면목이 있겠는가고 절절히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은 조용히 울렸으나 일군들의 가슴속에 크나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예로부터 조선서해를 낀 평안도사람들은 집집마다 새우나 조개로 젓갈을 담그어두고 그것을 밥반찬으로 리용하는것을 매우 좋아하였다. 그리고 집에 귀한 손님이 온 경우에도 자기 고장의 특산물인 젓갈을 음식상에 올려놓군 하였다.
이날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새우젓이나 조개젓 같은것은 옛날부터 서해의 이름난 특산물이며 우리 인민들이 제일 좋아하는 밥반찬의 하나이라고 가르쳐주시면서 중세소어업에 힘을 넣어 인민들이 좋아하는 여러가지 젓갈품을 더 많이 공급하기 위한 조치까지 취해주시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도 우리 인민들에게 더 많은 젓갈품을 공급하기 위하여 마음쓰시였다.
주체54(1965)년 5월 어느날 위대한 장군님께서 원산수산사업소 수산물가공공장을 찾으시였을 때였다.
공장의 여러 작업장들을 돌아보시던 그이께서는 일군들에게 왜 젓갈품이 없는가고 물으시였다.
그러시고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으시고 옆에 서있는 한 녀성로동자에게 집에서 명태를 가지고 식찬을 할 때 어떻게 하는것이 제일 좋던가고 다정히 물으시였다.
그이의 물으심에 녀성로동자는 애를 두고 명태국을 끓여도 맛이 있지만 명란이나 창난으로 젓을 담그어 먹으니 아주 좋더라고 말씀드렸다.
그의 대답을 들으신 그이께서는 일군들을 둘러보시며 조선사람들이 젓을 얼마나 좋아하는가고, 명란젓이 별맛이라고, 창난젓도 그와 못지 않다고 말씀하시였다.
그이의 말씀에 접한 일군들은 자책감으로 얼굴을 들수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젓갈품이 반찬으로서 좋다는것을 알면서도 물고기면 됐지 젓갈품이야 먹을 사람들이 담가먹으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이에는 별로 관심을 돌리지 못한 자신들이였던것이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이제부터 잘해보자고, 명란과 창난으로 젓을 담그고 애를 가지고는 기름을 짜며 대가리는 가루를 내면 명태에서 버릴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가공하여 공급하면 인민들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고 절절히 말씀하시였다.
인민에 대한 사랑이 뜨겁게 맥박치는 그이의 말씀에 일군들은 앞으로 맛좋은 젓갈품을 많이 만들어 인민들에게 보내주리라 굳게 마음다지였다.
여러가지 맛좋은 젓갈품을 더 많이 생산공급할데 대한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의 가르치심은 당시 수산부문 일군들의 일본새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갖가지 젓갈품들이 생산되여 인민들의 식탁에 오르게 되였다.
색다른 김치
주체59(1970)년 5월 어느날 평양시인민위원회의 한 일군은 덕천지구를 현지지도하고계시던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부르심을 받게 되였다.
무슨 긴급한 일이 제기된것이라고 속단하며 일군은 급히 차를 달려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시는 곳에 도착하였다.
그 일군을 반갑게 맞아주신 수령님께서는 여기 와서 가을무우를 소금에 절였다 다음해 봄, 여름까지 두고 먹는 집들이 있다고 하기에 오늘 아침에 한 집에 가서 맛을 보았는데 군냄새도 나지 않고 맛이 아주 좋다, 여기서는 그것을 《흙김치》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래서 동무도 그것을 먹어보라고 여기까지 오라고 하였다고 다정히 말씀하시였다.
인민들에게 이른봄에 남새를 넉넉히 먹이시려고 얼마나 마음쓰시였으면 이렇게 지방사람들이 담가먹는 수수한 김치맛까지 보시였으랴 하는 생각에 일군은 눈시울이 뜨거워올라 아무 말씀도 올리지 못하였다.
그리고 제구실을 다하지 못한 죄책감이 갈마들어 이내 고개를 수그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러는 일군을 자신의 곁에 앉히시고 흙김치담그는 방법과 가공방법에 대하여 하나하나 가르쳐주시였다.
흙김치는 절임방법도 아주 쉽다. 무우를 물로 씻으면 안된다. 물에 씻으면 군냄새가 나기때문에 솔 같은것을 가지고 흙을 잘 털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독에 무우를 한돌기 넣고 소금을 뿌리고 또 한돌기 넣고 소금을 뿌리고 이렇게 한독 가득 채운다. 그 다음에는 공기가 들어가지 않게 뚜껑을 꼭 덮고 독을 밀봉해두었다가 다음해 봄에 가서 먹을 때 뗀다. 한겨울을 나고 이른봄에 나가 뚜껑을 열면 독안에는 없던 물이 가득한데 그속에 무우가 잠겨있다. 먹기 전에 무우를 꺼내여 깨끗이 씻은 다음 그것을 다시 찬물에 넣고 서너시간 있으면 누런 물이 우러나온다. 이 김치국물에 무우를 썰어 그대로 먹으면 쩡하고 시원한것이 동치미 못지 않다. 또한 이 절인 무우를 잘게 썰어서 고추, 파 같은 조미료를 넣어 무우짠지를 해먹어도 별맛이다.
그러시고는 일군에게 꼭 흙김치를 맛보고 가라고 다시금 이르시였다.
일군은 위대한 수령님의 모습을 우러르며 언제나 인민들의 식생활의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따뜻이 보살펴주시는 그이의 다심한 은정이 가슴에 어려와 뜨거운것을 삼키였다.
아무때나 맛보게 되다
평양온반은 예로부터 평양랭면, 대동강숭어국, 록두지짐과 더불어 평양의 명물로 손꼽히는 유명한 음식으로 알려져있다. 흰쌀로 지은 밥에 록두지짐과 닭고기, 버섯볶음을 꾸미로 얹고 따끈한 닭고기국물을 부어낸 평양온반은 보기만 해도 구미가 돌고 맛도 류달리 좋았다.
예로부터 평양지방사람들은 명절이나 잔치때면 온반을 즐겨 만들어 먹군 하였는데 그 유래는 이러하다.
먼 옛날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의지가지할데 없는 불쌍한 형달이라는 총각과 의경이라는 처녀가 평양관가에서 심부름군으로 일하고있었다.
어느해 추운 겨울날 억울한 루명을 쓰고 옥에 갇혀 고생하는 형달이를 생각하며 눈물만 흘리고있는 의경이를 측은하게 여기고 같이 일하고있던 한 어머니가 흰쌀밥 한그릇과 지짐 몇짝을 내놓았다.
의경은 밥우에 지짐을 얹고 설설 끓는 국물을 부은 다음 뚜껑을 덮어 치마폭에 꼭 싸가지고 형달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찬바람이 뼈속까지 스며드는 옥에서 추위에 떨며 굶주림에 지쳐있던 형달은 사랑하는 애인이 가져다준 음식을 먹고 꽁꽁 얼었던 몸이 풀리자 무슨 음식인가고 물었다. 두서없이 준비해온 음식이라 선뜻 대답을 못하고있던 의경은 얼핏 떠오르는 생각대로 더운밥이라는 뜻에서 《온반》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형달은 그의 손을 꼭 잡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라고 하면서 우리 잔치할 때 온반을 해먹자고 말하였다.
그후 그들은 약속대로 잔치날 온반을 만들어 이웃들에게 대접하였다. 손님들은 이구동성으로 음식맛이 참 별맛이라고 하면서 여간만 좋아하지 않았다.
이 일이 있은 다음부터 평양사람들은 결혼식을 할 때면 신랑신부가 형달이와 의경이처럼 착한 마음씨와 의리를 간직하고 화목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온반을 만들어 먹는것을 풍습으로 여겨왔다.
공화국에서는 이러한 풍습이 오늘날 보다 일반화되여 온반은 사람들속에서 인기있는 대중음식으로, 온반집은 누구나 즐겨 찾는 대중식당으로 되였다.
평양의 명물인 온반에도 가슴뜨거운 사연이 깃들어있다.
언제인가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급양봉사부문들에서 온반에 관심을 적게 돌리고있는 사실을 알게 되시였다.
이와 관련하여 일군들과 자리를 같이하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닭고기와 고사리, 지짐, 버섯, 콩나물, 도라지, 무우채 같은것을 두고 온반을 만들어 봉사하면 인민들이 아주 좋아할것이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여러곳에 온반집을 내오도록 해주시고 그 운영에 필요한 닭고기와 버섯, 닭알, 록두지짐, 고사리, 콩나물 등 여러가지 원자재들을 원만히 보장할수 있는 정연한 체계를 세워주시였다.
그이의 은정어린 조치에 의하여 시내의 여러곳에는 온반집들이 생겨나게 되였으며 시민들은 아무때나 평양온반을 맛볼수 있게 되였다.
지난 시기 평양에 왔던 남측인사들은 평양온반의 이채로운 맛에 매혹되여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북에서는 음식문화에서도 민족적전통을 확고히 견지하고있다고 감동을 표시하였다.
언제나 우리 인민의 고유하고 우수한 민족음식전통을 잘 살려나가기 위한 사업에 깊은 관심을 돌리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95(2006)년 6월 중순 민족음식가운데서는 온반이 좋다고 하시면서 그전에는 대사집들에서 손님들에게 온반을 대접하였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온반은 평안도지방에서 만드는것이 다르고 해주지방에서 만드는것이 다르다고, 지방별로 온반을 어떻게 만드는지 구체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하시였다.
평안도지방에서 예로부터 내려오는 온반은 그릇에 흰쌀밥을 담고 버섯볶음과 양념을 무친 닭고기, 록두지짐을 꾸미로 얹고 실닭알과 실파, 실고추로 고명을 한 후 소금을 두고 끓인 닭고기국물을 부어 만들었다.
한편 황해도 해주지방의 온반을 보면 그릇에 흰쌀밥을 담고 다진 파와 마늘, 간장으로 무친 닭고기를 꾸미로 얹은 다음 깨가루, 후추가루를 치고 실고추와 실닭알로 고명한 후 소금과 간장을 두고 끓인 닭고기국물을 부어 만들었다.
여러가지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할수 있으며 맛 또한 좋은 온반을 두고 위대한 장군님께서 마음쓰신것은 이뿐이 아니다.
그해 9월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또다시 온반을 잘 만들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온반은 대중음식이라고 하시면서 구수한 냄새가 나게 해야 맛이 있다고, 온반을 구수한 냄새가 나게 만들자면 닭고기만 쓰지 말고 돼지고기도 써야 한다고 그 방법까지도 하나하나 가르쳐주시였다.
김정일장군님의 이렇듯 세심한 관심과 은정깊은 조치가 있었기에 온반은 선군시대에 와서 인민들이 아무때나 맛보게 되는 보다 맛좋은 민족음식의 하나로 사람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을수 있었다.
해결된 문제
주체64(1975)년 어느 여름날에 있은 일이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일군들과 함께 새로 건설되는 평양시의 어느 한 살림집거리를 찾으시였다.
살림방을 돌아보시고 복도로 나오신 그이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복도에 만들어놓은 란간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시였다.
일군들이 혹시 시공에서 잘못된 점이 없는가 하여 찬찬히 살펴보았으나 별로 흠집은 있는것 같지 않았다.
이윽하여 그이께서는 겨울에 담그는 김치독을 어디다 놓을 작정인가고, 란간을 매 세대의 부엌에 만들어주어야 김치독을 놓을수 있지 이렇게 복도에 공동란간을 만들어놓으면 김치독을 놓을데가 없지 않는가고 하시였다.
인민들의 식생활에서 겨울에는 김치가 절반식량이라는 말을 놓고보아도 한 아빠트에 수백세대가 들어사는 도시의 고층살림집들에서 김치독을 어디에 놓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절실하고 긴요한 문제가 아닐수 없었다.
하지만 일군들은 새 살림집을 많이 건설하면 인민들이 좋아할것이라는 생각만 했지 김치독을 놓을 자리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이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조선사람은 김치를 좋아하는것만큼 부엌란간에 김치독을 놓게 할데 대하여 간곡하게 이르시였다.
그리하여 오래동안 일군들이 풀지 못해 애를 먹던 겨울철의 김치독자리문제는 위대한 장군님의 은정어린 조치에 의하여 해결되게 되였다.
주체70(1981)년 늦가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한 기념비적건축물의 설계도면을 보아주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한동안 락엽지는 창밖을 바라보시였다.
이윽고 그이께서는 걱정어린 어조로 고층살림집들에서 저마끔 많은 무우, 배추를 끌어올려다가 김장을 하자니 얼마나 힘들겠는가고, 김치독은 원래 땅에다 파고 묻어야 김치가 인차 시여지지 않아 봄까지 맛있게 먹을수 있는데 창광거리와 같은 고층살림집들에서야 그렇게 할수 없지 않는가고, 그러니 고층살림집들에서 사는 주민들은 설사 김장을 한다 해도 제대로 맛있게 먹을수 없을것이라고 하시였다.
계속하여 그이께서는 수도의 살림집구성에서 고층, 초고층살림집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계속 늘어나는 실정에서 주민들의 겨울김장을 어떤 방법으로 해결하겠는가 하는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로 제기된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고층살림집들이 많은 수도 중심구역주민들의 김장문제를 해결할수 있는 방도는 김치를 공장에서 공업적인 방법으로 만들어 공급하는것이라고 명철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이의 말씀대로 김치를 공장에서 공업적방법으로 만들어 공급한다면 겨울내내 시지 않고 맛있는 김치를 먹을수 있고 고층살림집들의 생활에 편리하게 식생활을 보다 문화위생적으로 꾸릴수 있었다.
이렇게 되여 그후 고층살림집들에서 사는 주민들을 위해 공장에서 만든 김치를 보충적으로 공급하는 체계가 세워지게 됨으로써 평양시 중심구역 주민들의 김장문제가 해결되게 되였다.
다층살림집들에서의 김치독자리문제와 수도의 중심구역 주민들의 김장문제의 해결, 이것은 인민들의 식생활문제에 언제나 깊은 관심을 돌리신 인민의 자애로운 어버이 위대한 장군님의 뜨거운 사랑이 낳은 결실이였다.
료리합평
록두지짐은 우리 인민들이 오랜 옛날부터 즐겨 만들어 먹어온 민족음식의 하나이다.
지난 시기 록두지짐을 가리켜 일부 지방에서는 손님을 존대하여 대접한다는 의미에서 《빈대떡》이라고 하였는가 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해먹는 음식이라 하여 《빈자떡》이라고도 불러왔다. 이것만 보아도 록두지짐이 우리 인민들의 생활과 얼마나 인연이 깊은 음식의 하나인가를 잘 알수 있다.
주체72(1983)년 5월 어느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청류관을 찾으시였다.
그이께서는 청류관의 료리솜씨를 보자고 하시며 어느 한 식탁에 마주앉으시였다.
일군들은 한동안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몰라 머뭇거리였다.
그들의 심정을 헤아려보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환하게 웃으시며 일없다고, 인민들에게 내는 음식을 그대로 맛보자고 허물없이 말씀하시였다.
이윽고 식탁에 음식이 오르자 그이께서는 일군들을 가까이로 불러앉히시고 오늘은 청류관의 료리를 합평하자고 하시며 먼저 수저를 드시였다. 그러시고는 차려놓은 료리들의 맛을 하나하나 보아주시며 매개 료리들의 우단점을 지적해주시였다.
록두지짐의 맛을 보아주신 장군님께서는 록두지짐을 잘하지 못했다고 하시며 록두지짐은 가루를 보드랍게 하고 김치와 돼지비게를 넣어 만들어야 한다고 따뜻이 일깨워주시였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록두지짐이라고 하면 평안도지방의것을 제일로 일러주었다. 그것은 다른 지방과는 달리 이 고장의 록두지짐은 물망에 간 록두가루에 배추김치와 돼지비게를 섞어 지졌으므로 독특하면서도 구수한 맛이 나기때문이였다.
우리 인민들이 즐겨 만들어 먹어온 록두지짐은 보통때에는 물론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음식상이나 명절음식상에 의례히 오르군 하였는데 특히 평안도지방에서는 록두지짐을 놓지 않은 잔치상은 제대로 차린 상으로 일러주지 않을 정도로 중시하였다고 한다.
록두에는 단백질, 탄수화물, 비타민이 고루 들어있을뿐만아니라 여러가지 독풀이작용을 하는것으로 하여 사람들의 건강증진에서 효과가 크다.
오늘 록두지짐은 특이한 영양학적가치로 하여 국제적으로도 조선불고기, 김치와 함께 3대기호식품으로 널리 보급되고있다.
이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록두지짐을 한번 잘해보아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일군들이 청류관의 모든 료리의 수준을 결정적으로 높이도록 자주 의견을 줄데 대하여서도 간곡히 말씀하시였다.
료리합평, 그이를 모시고 이날에 있은 합평은 단순한 합평이 아니였다. 이것은 록두지짐 하나를 놓고서도 조상전래의 우수한 음식전통을 살리고 민족음식의 질을 보다 높여 인민들에게 더 많이 차례지게 하시려는 그이의 숭고한 민족애의 정이 뜨겁게 넘쳐흐르는 인민을 위한 사랑의 합평이였다.
보배물
주체73(1984)년 4월초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어느 한 식료공장을 찾으시였다.
여러 생산공정들을 돌아보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쌀세척공정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시였다.
한동안 쌀씻는기계를 바라보시던 그이께서는 바닥에 늘여놓은 관을 통하여 지하로 흘러드는 쌀씻은 물에 시선을 옮기시며 쌀씻은 물을 어떻게 하는가고 물으시였다.
한 일군이 공장마당의 탕크에 받아놓았다가 내버린다고 말씀드렸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신중한 안색을 지으시며 쌀을 씻고 나오는 물을 그냥 내버리게 한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지적하시였다.
그제서야 일군들은 그이께서 쌀세척장을 선뜻 떠나지 못하신 의도를 깨닫게 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쌀씻는기계에서 나오는 쌀뜨물을 가지고 청주나 막걸리 같은것을 만들면 좋을것이라고 하시면서 쌀씻은 물을 모았다가 농축시켜 막걸리를 만드는 방법까지 일일이 가르쳐주시였다.
막걸리는 조선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식생활에 널리 리용하여온 고유한 민족음료의 하나이다.
그래서 막걸리라는 말도 발효된 술을 그대로 걸러낸 술이라는 뜻을 가진 고유한 조선말에서 유래되였다. 막걸리에서 《막》은 《함부로》, 《마구》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고 《걸리》는 액체속에 들어있는 찌끼나 건데기 등을 없애고 필요한 액체만을 걸러낸다는 뜻을 가진 동사 《거르다》가 명사화된것이다.
이밖에 막걸리는 술빛갈이 희뿌옇고 흐린데로부터 《탁주》, 《재주》, 《회주》, 일하는 사람들이 마시는 술이라고 하여 《사주》, 농민들이 즐겨 마시는 술이라고 하여 《농주》 등 여러가지 명칭으로 불리우기도 하였다.
지난 시기 가정들에서는 일반적으로 쌀씻은 물이나 먹다 남은 밥과 같은 농마질원료에 누룩을 넣어 발효시켜 걸러내는 방법으로 막걸리를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막걸리는 알콜함유량이 보통 5~10%정도이며 단맛, 신맛이 한데 어울려 그 맛이 상쾌하기때문에 청량음료로 많이 리용되였다. 특히 무더운 여름철의 시원한 막걸리는 참으로 별맛이여서 농군들이 일하다 쉴참이나 점심참에 마시면서 피로를 푸는것을 하나의 풍습으로 여겨왔다.
위대한 장군님의 말씀을 받아안고보니 얼핏 타산해보아도 그저 흘러보내던 쌀씻은 물을 효과적으로 리용하면 하루에 200여L의 막걸리를 만들수 있는 예비가 나왔다.
결국 내버려지던 물이 순간에 보배물로 전환된것이였다.
여직껏 공장일군들은 물론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무심히 흘러보내는 물에까지 주의를 돌린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오로지 인민들의 식생활향상과 전통적인 민족음식을 한가지라도 더 장려하려고 언제나 마음쓰신 위대한 장군님께서
만이 생각하실수 있는 문제였다.
그후 이 공장에서는 여러가지 맛좋은 민족음료들을 만들어 인민들에게 공급하게 되였다.
정녕 인민을 끝없이 사랑하신분이시기에 그이의 안광에 한번 비끼면 쓸모없이 흘러가던 물도 보배물로 되는것이 아니겠는가.
생활의 멋
언제인가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예로부터 조선녀성들은 장을 맛있게 담그는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였으며 집집마다 장을 담그는 일을 매우 중시하였다고 말씀하시면서 장을 공장에서 생산공급한다고 해도 집집에서 자기들의 구미에 맞게 얼마간씩 담그어 먹는것은 생활의 멋이라고 가르쳐주시였다.
예나 지금이나 장은 우리 민족의 식생활에서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는 기초식품의 하나로 되고있다. 우리 인민들은 오랜 옛날부터 어느 집이나 할것없이 한해 일가운데서 겨울김치와 함께 장담그는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고 맛좋은 장을 담그기 위해 각별히 애써왔다.
장은 일반적으로 음력 정월, 우수 또는 립동을 전후하여 담그는것이 예로부터 내려오는 풍습이다. 그것은 이때 담근 장이라야 쉽게 변질되지도 않고 잘 익기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장만들기를 보면 먼저 콩을 하루쯤 물에 불구었다가 삶은 다음 절구에 찧어 둥글게 빚은 메주를 벼짚에 싸서 처마밑에 매달아 띄운다. 메주가 바싹 마르면 잘 부스러뜨려 독에 넣고 소금과 물을 1대3의 비률로 풀어 붓는다. 이렇게 하여 두달쯤 지나면 메주에서 까만빛이 도는 물이 우러나오는데 이 물을 가마에 두고 졸이면 간장이 되고 남은것에 메주와 소금물을 더 넣고 삭이면 된장이 된다.
가정들에서의 장담그기가 생활의 멋이라는 위대한 장군님의 이 말씀에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우리 민족고유의 장담그는 풍습을 귀중히 여기고 적극 살려나가도록 하시려 그토록 마음쓰신 위대한 장군님의 심혈의 자욱이 뜨겁게 깃들어있다.
주체98(2009)년 1월 어느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원산청년발전소 제대군인 로동자신혼부부의 가정을 방문하시였을 때였다.
세간난 자식의 집을 찾은 친어버이의 다심한 심정으로 그들의 살림살이형편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웃방벽에 주런이 매달아놓은 메주덩이를 보시고 환하게 웃으시며 집안벽에 메주덩이를 매달아놓았는데 멋있다고, 농촌에서만 볼수 있는 류다른 풍경이라고 하시면서 그것을 귀한 보물인양 두드려도 보시고 쓸어만지기도 하시며 메주장의 좋은 점에 대하여서도 일일이 가르쳐주시였다.
메주장은 심장혈관이 경화되는것을 막고 혈전이 생기지 않게 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곰팽이는 암을 발생시키는것으로 되여있지만 메주장을 먹으면 암도 예방할수 있다고 한다. 그밖에도 메주장에는 장수에 필요한 좋은 성분들이 많다고 한다. …
그러시면서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제대군인의 안해가 메주를 쑤는데서 대단한 선생같다고 하시며 이 집에서 메주로 간장을 잘 만들어놓으면 자신께서 가져다가 맛보려고 한다고, 간장을 가지러 오겠으니 잘 만들어놓으라고 정겹게 당부하시고 이곳을 떠나시였다.
이 소식이 전해진 후 사람들속에서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장을 더 맛있게 담그려는 열의가 부쩍 높아졌다.
해마다 집집의 가정주부들이 정성을 듬뿍 담아 장을 담그며 류다른 생활의 멋을 한껏 누리는 행복한 모습들을 어디서나 찾아볼수 있다.
새로 생긴 매대
맑고 푸른 가을하늘아래 펼쳐진 아름다운 평양의 거리를 거니느라면 한가지 이채로운 풍경을 볼수 있다.
남녀로소가 웃음을 머금고 흰색의 타일로 산뜻하게 꾸려진 군밤매대들앞에서 달콤한 군밤맛을 보며 조국의 풍요함과 가을철의 특이한 정취를 한껏 느끼는 모습들이 바로 그것이다.
수도의 거리에 펼쳐지는 이러한 풍경들에도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사랑의 손길이 뜨겁게 어려있다.
주체76(1987)년 10월 하순 어느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일군들과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우리 나라의 이름난 밤에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밤은 우리 나라의 이름난 토산물이며 우리 인민들은 예로부터 밤을 특히 군밤을 아주 좋아하였다고 가르쳐주시였다.
밤은 기후가 비교적 찬 북부지대를 제외한 우리 나라의 거의 모든 고장들에서 나는 나무열매로서 탐스럽고 오돌찰뿐아니라 맛좋고 영양가가 높아 우리 인민들뿐아니라 외국사람들도 좋아하는 명산물의 하나로 손꼽히고있다. 특히 군밤은 날밤이나 삶은 밤에 비해 맛도 훨씬 좋지만 껍질이 잘 벗겨져 쏙 빠져나오는 노르스름한 속알을 먹는 재미는 그저그만이였다. 《엿 내놓고 군밤 먹는다.》, 《군밤장사 옆에 오면 엿장사 돌아앉는다.》는 말이 생겨난것도 예로부터 군밤이 그만큼 맛있고 인기가 있었다는것을 말해주고있다.
그처럼 맛좋고 인기있는 군밤을 평양을 비롯한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도 철따라 맛보게 하려는것이 어버이장군님의 웅심깊은 마음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지금은 밤철이 와도 거리에 군밤을 내놓고 팔아주는것을 별로 볼수 없다고 하시면서 군밤은 배부르게 먹는 음식도 아니고 군입삼아 맛으로 먹는것이기때문에 우리 일군들이 조금만 관심을 돌리면 밤이 나는 가을 한철에만이라도 평양시주민들에게 군밤맛을 보게 할수 있을것이라고 절절하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장군님께서는 앞으로 평양시민들에게 밤을 팔아주는것을 전통화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색다른것이 하나 생겨도 인민을 먼저 생각하시고 인민들에게 하나라도 더 안겨주시려는 그이의 따뜻한 사랑과 은정속에 평양의 곳곳마다에는 군밤매대로 정답게 불리우는 새로운 매대가 생겨나게 되였다.
그후에도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밤생산과 수송, 군밤매대들을 새롭게 개건하고 그 수를 늘이기 위한 대책들을 몸소 취해주시였으며 인민들에게 봉사하는 군밤의 맛과 질도 친히 헤아려보시며 깊은 관심을 돌려주시였다.
오늘도 수도시민들은 해마다 가을과 겨울철이 오면 군밤매대들에서 군밤을 맛보며 위대한 장군님의 그 사랑, 그 은정을 다시한번 가슴깊이 느끼군 한다.
TV방송과 소리방송으로
지혜롭고 근면한 우리 인민이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와 더불어 창조하고 발전시켜온 조선민족료리를 널리 소개하는것은 온 나라에 조선민족의 우수한 음식문화를 꽃피우고 민족성을 적극 살려나가는데서 절실한 문제로 나선다.
주체74(1985)년 10월 어느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TV방송부문의 한 책임일군을 만나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일군에게 TV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우리의 고유한 민족음식을 다 소개하여야 한다는데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조선료리를 만드는 방법을 소개할 때에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고유한 우리 민족료리와 거기에 들어가는 재료의 가지수를 다 밝혀 똑똑히 소개하여야 한다고, 우리의 조선료리를 전세계에 널리 자랑하여야 한다는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조선료리책을 보내주겠으니 같은 료리라도 평양, 개성 등 지방별특색을 살려 소개선전을 잘하여야 하겠다고 강조하시였다.
이렇게 되여 TV방송에서는 우리 민족이 오래전부터 식생활에 널리 리용하여온 여러가지 민족음식들에 대한 력사자료와 실기화면을 배합한 특색있는 편집물들이 방영되여 사람들에게 조선료리에 대한 깊은 인식을 주고 민족음식을 장려하는 사회적기풍을 확립하는데서 커다란 작용을 하게 되였다.
주체93(2004)년 3월 중순에도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TV방송과 소리방송으로 토장국만드는 방법을 널리 보급할데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토장국은 그 독특한 맛과 향기로 하여 사람들에게 자기가 나서자란 고향의 향토미를 느끼게 하는 우리 민족고유의 음식이다.
인류력사발전의 이른시기부터 콩을 재배하면서 장을 만들어 식생활에 리용해온 우리 선조들은 장에 여러가지 음식재료를 넣어 구수한 토장국을 즐겨 해먹군 하였다.
일반적으로 토장국은 누르스름한 빛을 띠는 질좋은 된장에 남새, 고기, 물고기말린것 등을 넣고 푹 끓여 만들었다. 한편 지방에 따라 서로 다른 음식감과 각이한 방법으로 토장국을 만들기도 하였다. 실례로 벌방지방에서는 속쌀뜨물에 된장을 걸러넣고 끓였다면 산간지방에서는 남새에 날콩가루를 버무려넣고 끓이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지방마다 다른 토장국만드는 방법을 잘 보급할데 대하여 가르쳐주시면서 TV와 소리방송으로 토장국만드는 방법을 잘 알려주어 우리 민족음식의 우수성을 적극 살려나갈데 대하여 강조하시였다.
그후 위대한 장군님의 가르치심에 따라 TV와 소리방송에서는 《토장국의 유래와 만드는 방법》, 《민족의 향취 넘치는 우리의 토장 제일일세》, 《토장만들기》를 비롯하여 각 지방에 따르는 여러가지 토장국만드는 방법을 보여주는 다양한 편집물들이 여러차례 소개되였다.
결과 토장국은 식당에서나 가정들에서 즐겨 먹는 음식으로 그 인기가 부쩍 높아지게 되였다.
오늘도 TV와 소리방송에서 방영되는 민족음식에 대한 소개편집물들은 사람들이 민족음식의 전통을 고수하고 살려나가도록 하는데서 큰 역할을 하고있다.
명당자리로 옮겨진 마을
오늘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를 찾는 사람들은 누구나 할것없이 부락위치가 명당자리라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이곳 사람들은 다른 고장 사람들이 찾아오면 의례히 《이곳은 바로 위대한 수령님께서 잡아주신 자리입니다.》라고 감격에 넘쳐 말하군 한다.
예로부터 조선사람들은 자기들이 살 집터와 마을자리를 좋은 곳에 잡는 풍습이 있었다. 집을 하나 지어도 양지쪽에 지었고 경치좋은 곳에 부락을 형성하였다. 그것은 집을 한번 짓고 살면 좀해서 다시 뜨게 되지 않고 그곳이 대대손손 살아갈 보금자리로 되기때문이였다.
그러나 이 고장 사람들은 대대로 내려오면서 경치좋고 양지바른 산기슭이 아니라 바람 한점 막을수 없는 허허벌판 한가운데서 살지 않으면 안되였다. 벌이 하도 넓다보니 산등성이에 집터를 잡고서는 도저히 농사를 지을수 없기때문에 모기에게 물리우고 개구리울음소리에 잠들지 못하면서도, 웅뎅이의 썩은 마타리물을 마시면서도 논밭근처에서 떠날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새 집을 지을 때에도 벌판가운데다 지었고 새 마을을 꾸려도 자기들이 살던 곳에 꾸리였다.
그러던 주체38(1949)년 11월 이곳을 찾으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벌판가운데 널려져있는 집들을 등성이에 옮겨 짓는것이 좋겠다고 하시면서 부락위치까지 정해주시였다.
하건만 이 고장 사람들은 오래동안 굳어져온 낡은 인습을 버리지 못하고있었다.
십여년이 지난 후 또다시 이곳에 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고장 사람들이 자기들이 살던 고장을 차마 뜨지 못하고있다는것을 아시고 지난날 지주의 착취와 압박을 받으면서 살 때에는 모기가 물고 물이 나빠도 할수 없었지만 오늘은 인민이 정권을 쥐고있는데 왜 그렇게 살겠는가고 일깨워주시였다. 그러시고는 부락을 건설하는것은 백년대계의 사업이므로 잘해야 한다고, 집터를 잘못 잡으면 후대들에게 욕을 먹을수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그후에도 오국리의 부락위치를 두고 늘 마음써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63(1974)년 6월 마침내 이 문제를 확정지어주시였다.
오국리살림집건설사판을 보아주시면서 그이께서는 지시봉으로 부락이 형성될 곳을 가리키시며 이곳에 살림집들을 짓고 널려져있는 살림집들을 다 옮겨야 하겠다고, 그래야 부락을 규모있게 정리할수 있으며 부침땅면적도 늘일수 있다고 가르쳐주시였다.
낡은 사회가 남겨놓은 가난의 마지막흔적마저 말끔히 가셔주시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친히 오국리의 건설주가 되시여 살림집들을 생활에 편리하게 조선식으로 짓도록 하시고 집집마다 수도물이 들어가도록 하시였으며 건설이 한창일 때에는 현지에 나오시여 건설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을 풀어주시였다. 그러시고도 이곳 사람들의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많은 뻐스와 화물차 그리고 1 000대의 자전거까지 보내주시였다.
정녕 부락위치까지 잡아주시고 부락건설을 백년대계의 사업으로 잘하도록 하신 어버이수령님의 사랑과 은정속에 지난날 물우에 뜬 쪽박과도 같이 논 한복판의 오막살이초가집에서 귀떨어진 사발 몇개를 놓고 대대로 살아오던 오국리사람들은 드디여 경치좋고 살기 좋은 곳에 행복의 보금자리를 펴게 되였다.
하기에 오늘도 이곳 농민들은 모내기가 한창인 봄철에나 구수한 낟알향기가 풍기는 가을철에나 위대한 수령님의 자애로운 그 은정을 전하며 해마다 농사를 더 잘 지어 쌀로써 사회주의강성국가건설에 이바지할 오직 한마음으로 포전에서 구슬땀을 바치며 일해나가고있다.
조선식건물로
풍치아름다운 대동강기슭에 조선식건물로 웅장하게 일떠선 평양대극장과 옥류관은 민족고유의 독특한 건축미로 하여 평양의 자랑으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져있다.
하기에 사람들은 이곳에 한번 왔다가는 극장구경도 평양랭면맛도 좋지만 조선식건물의 우아함에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누구나 탄복을 금치 못해하는 이 두 건물이 조선식건물로 일떠서기까지에는 참으로 가슴뜨거운 사연이 깃들어있다.
평양대극장설계가 한창이던 주체45(1956)년 4월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한 일군으로부터 대극장설계에서 나타나고있는 실태를 보고받으시였다.
그때 설계를 맡은 일부 전문가들은 조선식건물은 큰 규모로 건설할수 없다는 기성관념에 사로잡혀 현대식건물보다 작게 설계하려고 하였으며 그래야 조선맛이 나는것처럼 여기고있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현대건축에서 민족성을 살린다는것은 부질없는것이라느니, 큰 극장을 조선식으로 짓는것은 복고주의라느니 하면서 총계획에 예견되여있는 대극장을 서양식으로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료해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근엄하신 어조로 설계를 빨리 하여 조선에서뿐아니라 동양에서 제일 멋있는 극장을 지어야 한다고 하시며 일부 사람들은 큰 극장은 유럽식으로 지어야만 하는것으로 생각하고있는데 그것은 잘못이라고 엄하게 지적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앞으로 평양에 지을 큰 극장은 자리도 좋은 곳에 잡고 꼭 조선식으로 지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옥류관도 조선식으로 지을데 대하여 여러차례 교시하시였으며 건설현장에까지 나오시여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고 대책도 세워주시였다.
주체49(1960)년 2월초 어느날 점심무렵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마감고비에서 골조조립을 다그치고있던 옥류관건설현장을 찾으시였다.
당시 설계일군들은 옥류관을 조선식으로 지을데 대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미 여러차례 가르치심을 주시였지만 그이의 높은 뜻을 옳게 구현하지 못하여 설계나 시공에서 조선식건물의 특성을 잘 살리지 못하고있었다.
옥류관전경도를 주의깊게 보아주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지붕추녀가 낮은것을 가리키시며 대동문의 지붕과 같이 날아가는 학의 날개처럼 추녀가 번듯하게 들리도록 하라고 설계가들의 안목을 틔워주시였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퍼그나 지났으나 그이께서는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하시였다.
이때 한 일군이 옥류관을 조선식으로 짓자면 철근과 목재, 석재를 비롯한 자재가 많이 들어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러한 의견을 제기하는 일군의 심정을 헤아리시며 온천채석장에 철도인입선을 놓았으니 이제 좀 있으면 석재는 풀릴것이고 그리고 철근과 목재, 도료가 부족할수 있겠지만 그래도 이 집은 결정적으로 조선식으로 지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힘있게 울리는 그이의 말씀에는 우리 인민의 민족건축형식의 우수한 전통을 고수하고 빛내이시려는 드팀없는 의지와 결심이 맥박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이렇듯 확고한 결심과 세심한 손길에 떠받들려 평양의 중심부에 날아갈듯 활짝 깃을 편 한쌍의 학마냥 평양대극장과 옥류관이 웅장하게 일떠서 우아한 조선식건물의 자태를 한껏 자랑하게 되였다.
정녕 하나의 건축물에도 민족의 슬기와 넋이 깃들게 하시려는 위대한 수령님의 헌신의 자욱이 있어 현대성이 힘있게 강조되면서도 민족적정서가 맥맥히 흐르는 도시, 활기에 넘치고 참신하면서도 유구한 력사의 자취가 그윽히 깃들어있는 오늘의 평양이 있는것 아니겠는가.
생겨난 김치움
주체66(1977)년 7월 평안북도 창성군 약수리의 어느 한 가정을 찾으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새 집이 좋은가고 다정히 물으시였다.
정말 좋다고 말씀올리는 그를 바라보시며 부엌에 들어서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수도꼭지를 돌려보시고 물이 잘 나오는가, 땔감은 무엇을 쓰는가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알아보시였다.
이어 방안까지 다 돌아보시고 밖으로 나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마당 한구석에 놓여있는 김치독을 한동안 바라보시였다.
여름에는 의례히 마당에 엎어놓군 하는 빈 김치독이였다.
깊은 생각에 잠겨계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행한 일군들에게 가정들에 김치움을 만들어주는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사실 집주인들도 새 집에서 불편을 모르고 살다보니 김치움에 대해서는 미처 관심을 두지 못하고있었다.
예로부터 조선사람들은 집집마다 김치움을 잘 만들고 효과적으로 리용하는 풍습이 있었다.
김치움은 주로 앞뜰이나 뒤뜰의 부엌과 가까운 한구석에 짓군 하였다. 지방에 따라 김치움의 형식과 만드는 방법을 서로 달리하기도 하였다. 겨울철에 눈이 많이 내리는 추운 북부지방들에서는 땅을 깊이 파고 기둥을 세운 다음 그우에 가름대를 여러대 가로놓고 흙을 두텁게 덮어 견고하게 만들었다. 이와는 달리 추위가 덜한 서해안 및 중부지방들에서는 독이 들어갈 깊이만큼 땅을 파고 각추형으로 기둥을 몇대 세운 다음 벼짚 또는 강냉이짚을 둘러치는 형식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김치움에는 김장독이나 무우, 파, 감자종자들을 보관하였다.
비록 크지 않은 김치움이였지만 거기에 깃들어있는 조선민족의 슬기와 지혜, 근면함을 더없이 소중히 여기시였기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집집마다 김치움을 만들어주어 살림살이에 적극 리용하도록 마음을 쓰신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다녀가신 후 김치움건설에 필요한 많은 자재가 마을에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새집들이한 모든 가정들마다에는 번듯한 김치움이 생겨나게 되였다.
부모는 첫 스승
자기를 낳아키워준 부모를 존경하고 정성다해 섬기는것은 오랜 옛날부터 내려오는 조선민족의 아름다운 도덕품성이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부모가 있어야 자기자신도 있는것이고 자식은 다시 얻을수 있어도 부모만은 두번다시 얻을수 없다고 하면서 부모를 잘 모시는것을 인간의 초보적인 도리로 여겨왔다. 그래서 일상생활과정에 좋은 옷이나 색다른 음식이 생겨도 부모에게 먼저 드리고 부모들이 앓을 때에는 온갖 지성을 바쳐 병구완을 하였다.
조선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말에서 《처자부모》라고 하지 않고 《부모처자》라고 하는것만 보아도 처자보다 부모를 더 극진히 생각하고 효도를 다해온 조상전래의 미풍량속을 잘 알수 있다.
주체56(1967)년 10월 말 한 일군과 자리를 같이하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청소년학생들이 자기 부모를 존경하고 잘 받들어나가도록 하는데 깊은 주의를 돌려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청소년들의 도덕관념은 집을 지을 때 주추돌을 놓는것처럼 기초부터 잘 쌓아나가야 한다. 사람들이 태여나면 누구나 다 제일 처음으로 부모들의 슬하에서 몸도 마음도 키우며 세상리치를 배우게 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부모는 사람들의 첫 스승이라고 말할수 있다. 그렇기때문에 자기를 낳아주고 키워준 부모를 잘 모시고 받드는것은 인륜도덕의 시초로 된다.
그이의 이 말씀은 가정생활의 귀중한 진리를 새겨주는 뜻깊은 가르치심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모를 존경하고 극진히 섬겨온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도덕품성을 적극 살려나갈데 대하여 강조하시였다.
주체94(2005)년 12월 어느날에도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우리 민족은 부모에 대한 례의를 지키는데서 절대적이라고 하시면서 우리 나라에서는 자식들이 시집, 장가를 간 다음에도 자기를 낳아키워준 부모를 잊지 않고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것을 응당한것으로 여기였다고 말씀하시였다.
정녕 가장 숭고한 도덕의리의 최고체현자이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가르치심과 령도에 의하여 오늘 공화국에서는 부모를 잘 모시고 받드는것이 하나의 사회적풍조로, 미풍으로 더욱 활짝 꽃펴나고있다.
생일맞이풍경
자식들과 부모들의 생일을 잊지 않고 새겨두었다가 특색있는 음식을 성의껏 차려 축하해주는것은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전해오는 아름다운 풍습의 하나이다.
주체75(1986)년 7월 중순 어느날 한 일군에게 사업과 관련한 가르치심을 주시던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문득 그에게 자식들의 생일을 잘 쇠여주는가고 다정히 물으시였다.
뜻밖의 물으심이여서 그이의 의도를 다는 알수 없었던 일군은 안해가 자식들의 생일날마다 특식을 차리군 한다고 사실그대로 말씀올리였다.
그러자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집에서 자식들의 생일을 잘 쇠여준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라고 하시면서 혁명가는 아이들의 생일도 부모의 사랑도 모르는 목석인간이 아니라 후대들을 누구보다도 더 열렬히 사랑하는 뜨거운 심장을 지닌 인간이라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그이께서는 부모들이 생일날 자식들에게 특식도 해주고 놀이감도 사다주면서 정서적으로 키워야 그들이 어려서부터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은 물론 조국을 위한 아름답고 고상한 정신도덕적풍모를 간직할수 있다고 일깨워주시였다.
계속하여 그이께서는 아이들의 건전한 도덕품성, 사상정신적풍모는 절대로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우리 나라 속담에 웃물이 맑아야 아래물이 맑다는 말도 있듯이 부모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며 인민을 사랑하는 마음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영향하에 차곡차곡 자래워지는 법이라고 가르쳐주시였다.
조상전래의 생일맞이풍습을 존중하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숭고한 뜻은 로인들의 생일맞이에도 뜨겁게 깃들어있다.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은 가정에서 로인들의 생일맞이에도 각별한 관심을 돌려왔다. 특히 로인들의 60돐, 70돐생일때에는 가족, 친척은 물론 친우들과 이웃들이 모여 진심으로 축하해주는것을 하나의 풍습으로 여겨왔다.
주체87(1998)년 5월말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로인들의 생일맞이와 관련한 은정깊은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생일 60돐, 70돐상을 받으면 가족, 친척들이 많이 모이는데 가족, 친척보다 기관에서 같이 일하는 동지들이 모여앉는것이 더 좋다고 가르쳐주시면서 좋은 때나 어려울 때나 변함없는것은 같이 일하는 혁명동지들이라고, 60살, 70살, 80살까지 살면서 당과 혁명을 위하여 보람있게 일해올수 있은것은 친척보다도 혁명동지들이 있기때문이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이어 그이께서는 생일 60돐상이나 70돐상을 받을 때에는 친척들과 같이 일하는 혁명동지들이 모여앉아 축하를 해주고 당과 혁명을 위하여 더 많은 일을 할데 대한 결의를 다지면서 즐겁게 쇠는것이 좋고 생일 100돐상을 받을 때에는 사회활동에서 떨어져 집에 들어온지 오래되는것만큼 가족, 친척들이 축하를 해주는것이 더 좋다는데 대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이렇듯 누구보다 우리 민족의 민속풍습을 귀중히 여기시는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은정어린 조치에 의하여 로동당시대의 생일맞이풍경이 새롭게 펼쳐져 사람들 누구나 생일이 되면 가족, 친척들과 동지들의 축복속에 이날을 보다 뜻깊고 즐겁게 보내고있는것이다.
잊지 말고 써보내야 할것
년하장은 새해를 축하하여 사람들 호상간에 주고받는 인사편지로서 예나 지금이나 문화정서생활의 한 측면을 반영하고있다.
주체51(1962)년 양력설을 즐겁게 보낸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은 한자리에 모여앉아 명절기간에 있은 일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고계시던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학생들이 새해를 맞으며 대학의 교원들과 함께 공부하는 동무들 그리고 고향에 있는 부모형제들과 친척들에게 년하장을 보낸것은 아주 잘하였다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새해를 맞으며 웃사람들과 동무들에게 새해인사를 하는것은 우리 인민의 전통적미풍이며 아름다운 례의도덕이라고 가르쳐주시였다.
예로부터 례의범절이 밝은 조선사람들은 해마다 설날이면 집안의 웃어른들에게 세배를 한 다음 마을의 나이많은 로인들과 선생님들을 찾아다니며 설인사를 드리였다. 이와 함께 멀리 떨어져있는 친척의 웃어른이나 스승들에게는 새해를 축하하는 문안의 인사말을 적은 글을 보내는 형식으로 설인사를 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학생들을 둘러보시며 년하장을 쓰는것이 간단한것 같지만 거기에는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성의가 깃들어있다고 가르치시였다.
사실 일부 학생들은 년말에 바쁘다고 하면서 친척, 친우들에게 년하장도 미처 쓰지 못하고 양력설을 맞은 때도 있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년하장을 쓰지 않는것은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관심과 성의가 부족하기때문이라고 하시면서 새해가 다가오면 미리 준비를 하였다가 년하장을 보내야 할 사람들에게 잊지 말고 써보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아안은 학생들속에서는 지난 시기 년하장을 별치않은것으로 여겨온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해마다 년말이 가까와오면 스승과 친척, 친우 등에게 년하장을 잊지 않고 써보내는 기풍이 세워지게 되였다.
추석날과 민속전통
해마다 추석이면 집집마다 햇곡식으로 정성껏 음식을 지어가지고 조상의 묘를 찾아 성묘도 하고 조의를 표시하는것은 예로부터 례절이 밝고 도덕의리가 깊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풍습이다.
우리 인민의 민족적인 생활풍습을 귀중히 여기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일찌기 해마다 추석이 오면 사람들이 조상의 묘를 찾아가 성묘를 하는데 불편이 있을세라 교외뻐스운행을 조직하고 제상에 놓을 음식감도 팔아주도록 은정깊은 조치들을 취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민족애를 그대로 체현하신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일찍부터 우리 인민의 전통적인 민속명절인 추석에 남달리 깊은 관심을 돌려오시였다.
주체51(1962)년 9월 추석날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대학생들과 자리를 같이하시고 추석과 관련한 우리 인민의 풍습에 대하여 뜻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추석은 우리 인민이 옛날부터 쇠는 명절이라고, 지난날 우리 인민은 년중 설명절과 추석을 큰 명절로 즐겁게 쇠군 하였다고 하시면서 기록에 의하면 우리 선조들은 세나라시기에 이미 8월추석을 큰 명절로 쇠군 하였다고, 그러니 추석의 유래는 세나라 초기나 그 이전시기부터였을것이라고 가르쳐주시였다.
계속하여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옛날에는 추석을 가위라고 하였는데 추석날에는 햇곡식으로 밥과 송편, 찰떡, 밤단자 같은 음식을 만들어가지고 조상의 무덤을 찾아보았으며 활쏘기, 씨름과 같은 민속놀이로 하루를 즐겁게 보냈다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추석명절을 두고 마음쓰신것은 이때뿐이 아니였다.
주체76(1987)년 10월 일군들을 부르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오늘은 추석날이여서 기관, 기업소들에서 다 쉬겠는데 묘지에 가는 사람들을 위한 뻐스조직이랑 다 했는가고 물으시였다.
한 일군이 묘지들이 대체로 교외에 떨어져있으므로 모두들 아침 일찌기 떠나며 게다가 철도에서는 림시렬차를 편성하여 운행하고 려객자동차사업소들에서는 방향별로 뻐스를 집중배치하였다고 말씀드렸다.
그의 대답을 들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저으기 마음을 놓으시며 추석날에 조상들의 묘보러 가는것은 례절이 밝고 의리가 깊은 우리 인민들의 품성을 그대로 반영한것이라고 하시였다.
주체95(2006)년 10월에도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추석날에 조상의 묘를 찾아가는것은 우리 인민의 민족성을 살려나가는 아주 좋은 풍속이라고, 우리 인민은 예로부터 한해에 조상의 묘를 두번 찾아가군 하는데 청명날에는 조상의 묘에 잔디를 입히느라고 찾아가고 추석날에는 햇곡식으로 떡을 비롯한 여러가지 음식을 만들어가지고 조상의 묘를 찾아가 조의를 표시하군 하였다고 하시면서 이런 민족적풍습을 잘 살려 우리 인민들이 추석을 비롯한 민속명절을 뜻깊게 보내도록 하여야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이렇듯 추석명절에는 민족의 생활풍습을 존중하시고 적극 장려해나가시는 절세위인들의 숭고한 뜻과 은정깊은 조치가 뜨겁게 어리여있다.
오늘도 우리 인민들은 해마다 추석날이 오게 되면 조상전래의 풍습대로 돌아간 부모친척들과 혁명동지들의 묘를 찾아 인사도 하고 특색있는 민족음식과 다채로운 민속놀이로 명절의 하루를 뜻깊게 보내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