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주체예술의 이모저모
나는 김일성광장에서 있었던 열병식과 군중시위,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도 직접 보았다.
100%가 조선의 음악이다. 공장과 농촌의 예술소조원들이 부르는 노래도 조선의 노래이며 학생들이 부르는 노래도 역시 민중의 정서에 맞는 조선의 노래이다. 그 어느 예술인이나 예술단의 독창회나 합창공연도, 삼지연악단과 은하수관현악단의 공연도 조선의 노래를 위주로 음악회를 이끌어가지만 음악회마다 청중들에게 무한한 감동을 준다.
이렇게 민중이 요구하고 시대발전을 추동하는 진정한 음악예술의 발전은 풍부한 문화적자원과 예술적잠재력, 고도의 창작능력을 요구한다.
북에서는 이를 위한 옳바른 예술정책밑에 해방후부터 예술인육성에 커다란 관심을 넣어 인재 하나를 키워도 착실하게 길러냈다. 그 인재들이 민족음악발전의 주추돌이 되여 근로대중을 위한 참다운 음악창조에서 한몫하고있다.
북에서는 민족악기발전에 선차적힘을 넣으면서 그에 서양악기를 옳게 배합하여 민족음악발전을 힘차게 전진시키고있다.
수많은 크고작은 예술단체들이 근로대중이 요구하는 예술발전에 힘을 넣고있으며 나라의 곳곳에 예술의 전당들과 많은 극장들이 꾸려져 인민을 위한 예술활동을 보장해주고있다.
조선은 예술에 있어서도 절대 허술하지 않다. 본때를 보이는 나라라는것을 세상에 과시하고있다.
북조선을 방문하는 외국의 음악예술인들이 이북의 음악, 미술, 무용, 집단체조예술 등을 접한 다음에 하는 말들은 거의 일치된다. 한마디로 《조선은 음악예술의 나라》라고 묘사한다.
국립교향악단과 모란봉극장
이북을 방문할 때마다 음악예술의 전당을 찾아간다는 느낌도 받지만 오염되지 않은 공기를 맡으며 맑은 환경을 접하고 그리고 때묻지 않은 그 자연과 경치를 보는 나의 마음도 깨끗해지는 기분을 가지게 된다.
을밀대에 올라갔다. 이곳에서 저아래로 바라보면 부벽루아래 청류벽을 휘감고 흐르는 대동강의 물결은 유난히 푸르르다. 모란봉은 천하제일강산이라고 불리우는 평양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유서깊은 명승지이다.
고려때 시인 김황원이 부벽루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대동강의 경치를 부감하면서 남긴 유명한 미완의 시 《장성일면 용용수 대야동두 점점산》(이 말을 바꾸어보면 《긴 성벽의 한 면엔 사품쳐흐르는 물, 넓은 들 동쪽엔 올망졸망 솟은 산》)은 모란봉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기억속에 애틋하게 남아있다.
그 모란봉 바른쪽 만수대언덕에 김일성주석의 동상이 모셔져있고 그옆에 승리의 기상넘치는 천리마동상이 있다. 바로 그앞에 국립교향악단이 자리잡고있는 모란봉극장이 있다.
풍치가 수려한 모란봉기슭에 건립된 모란봉극장은 김일성주석의 발기와 지도밑에 백범 김구선생, 김규식선생을 비롯한 남북조선의 56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 695명이 참가한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련석회의와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 등 괄목할만 한 정치행사들이 열린 력사적인 장소로도 유명하다.
김일성주석께서 270여차례, 김정일국방위원장이 30여차례, 김정숙녀사께서 6차례나 다녀간 기록만을 보아도 모란봉극장을 《혁명사적극장》이라 부르는 리유를 알수 있을것 같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립교향악단은 북조선의 대표적인 관현악단으로 1946년 8월 8일에 중앙교향악단이라는 명칭으로 창립되였고 1947년 1월에 단원을 보강해 2관편성으로 확대했다. 이듬해인 1948년에는 국립예술극장산하의 연주단체로 편입되였다.
국립교향악단이 리용하는 건물내부에 보존되고있는 사적자료를 보면 김일성주석이 이 악단에 얼마나 지극한 관심을 기울였으며 김정일국방위원장 또한 얼마나 세심한 배려를 이 악단에 주었는가를 알수 있다. 국립교향악단은 김정일국방위원장이 각별히 사랑하고 귀중히 여겨온 북조선의 중요한 예술단체중의 하나이다.
남과 북, 해외동포들의 귀에 많이 익숙해진 불멸의 태양의 노래 《김일성장군의 노래》로 첫 연주를 시작한 국립교향악단은 지난 60여년간 국가적인 후원밑에 국내와 세계의 이름난 작곡가들의 수많은 교향악작품들로 무려 15 000여회의 연주회를 진행하였으며 북조선의 음악전통에 기초하여 이북민중들의 일상생활을 반영한 주체적이고 대중적인 교향악작품들을 창작하고 공연하는 관록있는 예술단체로 자라났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바쁜 일정을 뒤로 하며 국립교향악단을 찾아서 리허설도 보아주고 새로 창작된 작품도 들으면서 의견도 주고 격려도 해주시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이 악단이 얼마나 수뇌부의 사랑속에 성장했는지 알게 하여준다.
국립교향악단의 예술인들은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음악에 전문가이상으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계신것을 큰 자랑으로 생각하고있다.
나는 1960년대 민중들의 외면속에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일어설수도 없었다던 국립교향악단이 어떻게 하여 인민들의 사랑속에서 다시 태여날수 있었으며 또 세계적인 교향악단으로 성장할수 있었는가에 대한 뜨거운 사연을 소개하지 않을수 없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1969년 12월 어느날 음악부문의 한 일군을 집무실에서 접견해주시였다. 그분께서는 일군의 얼은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고 손수 의자까지 권하시며 말씀하시였다.
《오늘 동무를 부른것은 새로운 과업을 하나 맡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나라 교향악을 발전시키기 위한 과업을 맡기기 위해서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시고는 우리 나라 교향악의 실태를 자세히 분석해주면서 《동무도 알다싶이 지금 우리 나라의 교향악은 매우 한심한 형편에 놓여있습니다. 종파사대주의자들의 해독적인 영향은 교향악분야에도 심하게 미쳐서 교향악단은 인민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공연도 하지 못하고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시였다.
당시 국립교향악단이 민중들이 듣고도 알지 못할 유럽《고전》교향곡이나 그 본을 따서 만든 교향곡을 가지고 공연을 하고있었으니 인민들이 좋아할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대주의자들은 어리석게도 교향곡이 환영을 받지 못하는것은 청중들의 문화수준이 낮기때문이라고 민중들을 모독하면서 그들의 교향곡감상능력을 키워준다는 미명하에 《해설음악회》라는것까지 조직하였다. 그리고 미리 3개월분의 돈을 받고 정기관람권까지 예매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안깐힘을 썼어도 이미 등을 돌려버린 민중들의 마음을 다시 돌려세울수 없었다. 이제는 극장을 운영조차 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중앙무대에서 인기를 잃자 교향악단은 지방공연에 기대를 걸었다. 지방공연도 실패로 돌아갔다.
어느 한 공장의 문화회관에서였다.
교향곡에 대한 요란한 선전을 듣고 찾아온 관객은 천여명이나 되였지만 공연중에 거의다 나가버리고 끝날무렵에는 공연장에 몇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정말로 큰 충격이였다. 이제 국립교향악단은 존속할수도 없게 되였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근엄한 안색으로 말씀을 이으시였다.
《교향악이 이 지경에 이른것은 무엇때문입니까? 사대주의자들이 떠벌인대로 우리 인민이 무식하여 교향악을 리해하지 못하기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인민은 예로부터 음악을 즐기고 사랑해온 인민입니다.
문제는 어떤 교향악을 하는가에 있습니다. … 나는 우리 시대, 우리 인민이 요구하는 새 교향악을 만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이어 교향곡창작원칙과 방도를 알려주시였다.
그것은 인민들이 즐겨 부르는 민요와 인민들에게 널리 보급된 명곡을 편곡하는 원칙에서 발전시켜야 하고 그렇게 할 때만이 교향악이 인민대중의 사랑을 받는 음악으로 될수 있다는것이였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이날 대담하게 3관편성의 교향악단을 꾸리기 위한 안을 만들데 대하여서와 인민들이 사랑하는 《내 고향의 정든 집》, 《그네뛰는 처녀》 등 명곡을 교향곡으로 편곡하여 형상할데 대해서도 구체적인 지도를 주시였다.
이렇게 김정일국방위원장은 민중들이 잘 아는 노래, 명곡과 민요를 가지고 새로운 관현악곡을 창조할데 대한 현명한 방침을 제시하고 주체시대의 장엄한 교향악을 담을수 있는 그릇을 마련하기 위한 3관편성관현악단을 조직하고 창조사업의 새로운 장을 열어주시였다.
북조선에서 대표적인 관현악작품으로 손꼽는 《아리랑》, 《내 고향의 정든 집》,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 《그네뛰는 처녀》, 피아노협주곡 《조선은 하나다》, 교향곡 《피바다》 등의 작품들이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이러한 지도를 거치며 태여났다.
6.15남북공동선언이 선포되던 2000년 6월에 이북바로알기운동이 이남사회전반에서 더욱 세차게 일어났다. 신문과 잡지에는 이북음악계에 대한 기사들이 폭넓게 다루어지고있었으며 취재경쟁 또한 뜨거웠다. 이런 때에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에 참가했던 한 재미예술단 성원을 통해 이남의 음악전문잡지사로부터 글을 써달라는 급한 부탁이 왔다.
《이북에서도 과연 서양음악을 배울수는 있는가? 그렇다면 이남같이 그 비싼 레슨비를 어떻게 감당하며 외국류학도 갈수가 있는가, 기량이 출중한 음악가가 있다면 그들은 어디에서 누구와 공부를 했으며 또 어떠한 곳에서 기량을 발표할수 있는가, 악단이나 오페라단은 과연 존재하고 콩클은 어떠한것들이 있는가.》
그들의 궁금증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이남도 미국의 교포사회와 마찬가지로 이북음악계에 대해서 아는것이 별로 없었던 때였기때문에 말도 안되는 질문을 해오고있어 이런 질문들이 이남음악계의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친절히 써보내기로 작정하고 내가 실지 체험한 일들을 돌이켜보았다.
1990년 10월에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통일음악회에 북아메리카주 뉴욕, 로스안젤스, 시카고, 토론토, 필라델피아, 보스톤 등 8대 큰 도시에서 13회이상 순회공연을 하면서 교포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던 《남북가곡의 밤》에 출연한 공연팀중 10여명이 재미조선인예술단(동부)이라는 이름으로 독창과 합창종목을 준비하여 이북동포들의 관심집중속에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무대에 올랐다.
나는 이 기간에 국립교향악단도 지휘하였는데 곡목은 최성환이 편곡한 《아리랑》이였다. 그때 만났던 죽관악기연주가들의 인상적인 연주를 지금도 잊을수가 없다. 죽관악기연주가들이 모두 국립교향악단의 중요한 정식단원이라는 말을 듣고 그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왜냐하면 나의 어린시절의 괴로운 생각(국악이 대접을 못 받던)이 떠올랐기때문이다.
처음 보는 배합관현악의 《아리랑》총보를 받아보며 북조선이 민중을 위한 주체문화를 바로세우기 위해 얼마나 부단한 창조의 노력을 기울여왔는가 알수 있었다. 어느 한 곳도 민족적자존심을 높이는데 소홀한 곳이 없었다.
도입부(악보의 첫머리)의 독주를 양악기에 주지 않고 중음저대에 준것도 그렇고 민족악기가 총보상의 최상단에 기록되고 민족악기연주가들의 자리도 한쪽구석이 아닌 악단의 중심부에 배정해서 긍지를 느낄수 있게 했다. 그보다 한번 개량되여 우수성이 검증된 민족악기를 지체없이 악단에 투입시켜 관현악곡의 중요한 부분을 맡게 한 파격적인 결단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수가 없었다.
이북은 김일성주석의 숨결이 살아있고 생전의 손길이 닿아 있는 모란봉극장을 정성을 들여 원래 모습으로 잘 보존하여 왔으며 2004년 12월 새로운 시대적요구에 맞게 세계적수준으로 개건할데 대한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2005년 11월까지 1년간 건물내부와 넓은 무대, 조명장치는 물론 건물외부벽까지 모두 현대화하고 음향설비도 최신형으로 갖추는 등 개건사업(보수공사)을 성과적으로 마무리지었다.
나는 이미 새 천년이 되면서 북조선의 음향전문과학자들을 뉴욕에서 만났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뉴욕의 카네기홀에 그 사람들을 안내하여 음향에 영향을 줄수 있는 건물의 구석구석을 카네기홀의 담당자의 안내를 받으며 돌아보았다. 이런 개건사업을 진행할 원대한 계획이 벌써부터 있었다는것을 그때는 알지 못하였다.
이 공사에서는 극장외부를 모란봉의 아름다운 환경과 어울리게 질좋은 건축재로 단장하고 조선식으로 조각, 장식물들을 조화롭게 설치하는 등 극장을 완벽한 조형예술작품의 최고걸작품으로 만들고 총체적인 예술공간으로 변모시켰다.
6.15북남공동선언이 발표된 직후인 2000년 8월 국립교향악단의 서울공연때 단장으로 갔던 허이복(애국렬사릉에 안장)단장이 작고한 뒤 작곡가 김연규가 단장으로 취임했으며 지휘자 김병화, 허문영, 비엔나에서 류학을 마치고 돌아온 지휘자 방철진과 20대지휘자 채주혁이 크게 활약하고있다. 리계성이 작고한 뒤 최기혁이 악장으로 발탁되였으며 남성단원으로만 조직되였던 국립교향악단도 이제는 두명의 녀성하프연주가를 비롯해 바이올린파트와 각 현악기파트에 녀성단원들이 한두명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주요공연장은 400석규모의 모란봉극장이고 인민문화궁전과 동평양대극장 같은 대형공연장에서도 가끔씩 공연을 한다. 국립교향악단은 2000년에 북조선 최고의 훈장인 김일성훈장을 수여받았다.
피바다가극단
나는 이 글에서 주체시대 가극혁명을 불러오는데 기여한 피바다가극단을 중심으로 이북의 가극을 소개하려고 한다.
혁명가극 《피바다》는 당시 인민들의 념원과 정서를 담아냈다는 예술적의의를 넘어서 일제의 잔악한 탄압과 조선민족말살정책에도 굴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김일성장군의 두리에 굳게 뭉쳐 용맹을 떨쳐온 항일유격대와 일제를 반대하여 간고한 투쟁을 벌려온 민중들의 애국활동을 잊지 않도록 해주고있다.
혁명가극 《피바다》는 김일성주석께서 몸소 창작하신 불후의 고전적명작 《피바다》를 원작으로 하여 각색한 가극이다. 원작 불후의 고전적명작 《피바다》의 첫 공연은 1936년 8월 만강에서 진행되였다.
김일성주석께서 몸소 창작한 불후의 고전적명작 《피바다가》
설한풍 스산한 원한의 피바다야
참혹한 주검이 묻노니 얼마냐
혁명에 피흘린자 그 얼마에 달하였나
죽은자 가족의 비참한 그 모습과
기막힌 원통에 가슴이 터진다
사무친 이 원한을 천만추에 못 잊으리
락심을 말아라 전세계 무산자야
혁명자 하나의 죽음의 피값에
십륙억 칠천만의 무산정권 수립된다
나는 영화 《피바다》도 여러번 보았고 혁명가극 《피바다》도 평양대극장에서 직접 보았다. 그리고 뉴욕에서 교향곡 《피바다》와 소해금협주곡 《피바다》를 공연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북조선이 어떻게 제국주의의 압박을 뚫고 일어섰는가를 짐작할수 있었다.
몇년전 뉴욕에서 교향곡 《피바다》를 공연하려고 훈련을 할 때였다. 일본인단원도 있는 우륵교향악단의 한 관악기 연주자가 왜 하필이면 교향곡의 제목이 《피바다》인가라는 질문을 해왔다.
나는 질문을 받고 그에게 조선을 강점한 일제의 총칼에 죽어간 수십만의 우리 민족이 흘린 피가 바다를 이루듯 처참했었다는것과 지금도 코리언의 가슴속엔 피맺힌 원한이 있고 또 조선민족은 일제의 죄행을 절대로 잊지 않을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에 의하여 각색된 혁명가극 《피바다》는 1971년 7월 17일 첫 공연을 가진 이후 40년간 2천여회의 공연을 이어가고있다. 《꽃파는 처녀》, 《밀림아 이야기하라》 등과 함께 5대혁명가극의 하나로 불리우는 《피바다》는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있으며 주인공이 일제의 잔혹성에 항거하여 항일투쟁에 나서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자본주의체제하에서 서양음악은 극소수의 전문가나 부의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로 형성되고 향유되여왔다. 여기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예술발전을 추동시키는데 일정한 기여를 했다고 볼수 있으나 그것은 모두 어느 특수계층의 돈벌이수단에 리용된 측면이 있다.
이런것들을 놓고볼 때 어느 개인의 경험이나 한정된 집단의 능력으로 예술의 혁명적발전을 기대하는데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일반적으로 사회의 모든 정치적, 경제적사업의 성공여부는 그것을 이끌어가는 지도부의 옳바른 철학이 있어야 하고 능숙하게 인도하는 령도자가 있어야 하며 이를 책임적으로 발전시켜나가는 주체력량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가극발전에 있어서도 례외가 아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저서 《영화예술론》에서 《시대의 요구에 맞는 주체의 문학예술을 건설하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문학예술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그 시기에 김정일국방위원장의 령도에 의하여 북의 영화예술부문에서는 눈부신 전진을 이룩했으며 이어서 가극을 중심으로 하는 음악예술에서도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였다.
북에서는 다양한 형식의 노래와 관현악을 기본으로 하여 생활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음악예술의 가장 큰 형식인 가극을 먼저 발전시킨 다음 그 성과에 토대하여 전체 음악예술의 발전속도를 앞당기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항일혁명음악의 확고한 전통의 기초우에서 김정일국방위원장은 김일성주석이 항일무장투쟁시기 직접 창작하고 공연한 《피바다》를 새로운 우리 식 가극으로 만들것을 결심하고 그 실현을 위한 사업을 정력적으로 펼쳐나갔다. 불후의 고전적명작 《피바다》를 가극혁명의 첫 표본으로 정하고 항일혁명음악의 확고한 전통과 기초우에서 주체음악을 발전시켜나갈수 있게 하였다.
1969년 10월 중순 어느날 김정일국방위원장은 불후의 고전적명작 《피바다》를 그대로 옮긴 예술영화 《피바다》연출대본을 보아주고나서 불후의 고전적명작 《피바다》를 영화로 옮긴 다음에는 가극으로 옮겨야 하겠다고 가극혁명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옮기시였다.
그분께서는 우리는 영화부문에서와 마찬가지로 가극부문에서도 혁명을 하여 우리 식의 새로운 가극을 만들어야 한다고, 그러자면 불후의 고전적명작 《피바다》를 가극으로도 옮겨야 한다고, 《피바다》는 우리 문학예술이 대를 이어 본받고 길이 전해야 할 본보기작품이라고 말씀하시였다.
그후 김정일국방위원장은 불후의 고전적명작 《피바다》를 가극으로 옮기는 사업을 지도하시면서 무엇보다먼저 가극대본창작에서 원작에 충실하게 각색하면서도 사상적내용이 완전무결한 독자적으로 완결된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되게 하여야 한다는 창작원칙을 밝혀주시였다. 1971년초 어느날에는 불후의 고전적명작의 내용들을 제멋대로 빼놓은 결함을 지적하시고 불후의 고전적명작 《피바다》를 가극으로 옮기는 과정을 통하여 가극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이와 함께 불후의 고전적명작 《피바다》를 혁명가극으로 옮기는 사업의 첫시작부터 가극창조사업에 필요한 인원선발을 전국적범위에서 진행하도록 하여 강력한 력량의 가극창조집단을 무어주시였다.
1971년 6월 평양대극장에서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새로운 가극창조사업에 참가하는 기쁨과 설레임으로 흥분되여있는 창작가들, 예술인들에게 혁명가극 《피바다》대본을 친히 안겨주면서 혁명가극 《피바다》를 우리 식의 새로운 가극으로 창작하는데서 나서는 요구와 방도들을 또다시 밝혀주시고 전체 예술인들을 고무격려하시였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새로운 가극창조를 지도하면서 아리아와 대화창을 없애고 모든 노래를 아름답고 유순한 노래로 절가화하고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대변하는 방창을 대담하게 넣어 민중들이 쉽게 접근할수 있는 인민적인 가극으로 만들도록 이끌어주시였다.
이북에서도 《피바다》식 우리 가극이 나오기 전까지는 가극이 유럽식오페라와 같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식의 대화창이 주를 이루었고 주인공의 가창실력과 기교에 너무 치우치는 아리아에 의존하고있어서 민중들의 정서와도 맞지 않고 내용도 알아들을수 없는 방향에서 창작되고 공연이 진행되여서 민중들의 외면을 받고있었다.
그러면 절가와 방창이란 무엇인가.
절가는 정형시로 된 가사를 몇개의 절로 나누어 동일한 선률에 담아 불러 청중들에게 가극의 내용이 잘 전달되도록 하는 노래이다.
가극에서 방창은 무대밖에서 부르는 노래를 말한다. 쉽게 말해서 방창은 무대앞 아래에 관현악단이 자리잡고있는데 그 량쪽에 남녀 각각 14∼15명의 성악가가 배치되여있다. 이들 성악가들이 독창 혹은 중창으로 불러주는 노래를 방창이라 한다.
그러나 이전의 가극에서는 무대밖에서 부르는 노래형식이 없었다. 북의 가극에서는 방창과 합창을 구별한다. 가극에서의 방창의 도입, 이것은 노래의 절가화와 함께 세계가극사의 새 페지를 기록한 위대한 발견이다.
혁명가극 《피바다》의 연출가는 방창의 기능을 이렇게 설명한다.
《등장인물의 내면세계를 개방하고 부각한다. 극정황을 제시하고 설명한다. 작품의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극을 발전시킨다. 음악과 극을 조화롭게 결합시킨다. 연기의 진실성을 보장한다. 무대생활을 지속적으로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관객들의 심리를 대변하면서 그들을 극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기능을 한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혁명가극 《피바다》창조의 나날 무대미술도 대담하게 혁신해야 하며 무용도 형상수단으로 여러 장면에 과감히 도입해야 한다고 하시며 가극이 해결해야 할 창작적문제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지도해주시였다.
가극창조사업은 급속도로 진행되였으며 사업이 시작된지 한달만인 1971년 7월 17일에 김일성주석이 참가한 가운데 력사적인 첫 공연의 막을 올렸다.
공연을 관람한 김일성주석은 대화창을 없애고 노래들을 절가화하였으며 방창과 무용을 받아들이고 무대를 립체적인 흐름속에서 보여주게 한것은 종래가극의 낡은 틀을 완전히 마사버리고 전혀 새로운 가극의 형상방도들을 독창적으로 해결한것이라고 하면서 높이 치하하시였다. 주석님께서는 이러한 혁신적인 성과를 이룩하게 된것은 우리의 작가, 예술인들이 당의 주체적인 문예사상과 방침에 철저히 의거하여 창조활동을 벌렸기때문이라고 말씀하시였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첫 공연이 끝난 후 《혁명가극 〈피바다〉는 그 혁신적의의로 하여 세계가극예술발전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될것입니다. 우리는 혁명가극 〈피바다〉를 우리 식의 새로운 가극으로 창조함으로써 저들만이 가극을 독점한것처럼 우쭐대던 사람들의 거만한 코대를 꺾어놓았습니다.》라고 말씀하시며 감격해했다.
이것은 그당시 서유럽의 문화를 숭상하던 사대주의자들의 반발이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가극창조성원들에게 종래의 가극형식을 가지고서는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사상정신세계와 심리적움직임을 원만히 전달할수 없었다고, 그래서 혁명가극 《피바다》를 창조하면서 방창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여 이 문제를 풀기로 하였다고, 가극에 방창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인것은 가극력사에서 새로운 발견으로 된다고, 가극에 방창을 받아들인것이 얼마나 정당한가 하는것은 오늘 혁명가극 《피바다》의 공연에서 완전히 확증되였다고, 가극에 방창을 받아들이니 작품의 사상이 똑똑히 전달되고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여러 각도에서 펼쳐보일수 있게 되였다고 하면서 방창은 작품의 사상예술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관중들을 극세계에로 깊이 끌고들어가는 힘있는 형상수단이라고 강조하시였다.
이렇게 김정일국방위원장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피바다》식혁명가극을 창조하여 극음악발전의 새시대를 열어주시였다.
혁명가극창조의 나날 김일성주석의 발기에 의하여 1946년 창립된 북조선가극단은 1971년에 새로운 형식의 혁명가극을 창조하기 위한 강력한 예술집단으로 꾸려지면서 그 명칭이 피바다가극단으로 고쳐지게 되였다.
피바다가극단은 북조선의 대표적인 예술단체이다.
현재 알려진 단원수도 3백여명으로 많은 편이다. 혁명가극 《피바다》의 공연을 비롯한 주체예술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하여 김일성훈장을 수여받았다.
주요공연장은 1960년에 준공되고 최근에 현대적으로 개건된 평양대극장이다. 다른 단체들과 마찬가지로 무대작품공연에 필요한 모든 인원들이 단원으로 배속되여있으며 자체적인 편성의 배합관현악단을 별도로 두고있다.
유명한 단원들로는 총련출신으로 툴루즈국제성악콩클에 입상했던 조청미와 혁명가극 《피바다》의 초연때 지휘를 맡았던 지휘자 리진수, 《피바다》에서 어린 갑순이로 나왔던 쏘프라노 방영희, 총련출신안무가 김목룡 등이 있다.
매달 20여회씩 공연을 하는 《피바다》의 공연회수는 2천여회로 북조선무대작품사상 최고기록을 세우고있다. 《피바다》에 출연한 초기의 1세대배우들의 뒤를 이어 2세, 3세의 명배우들이 명배우집단의 전통을 살리며 혁명가극의 력사를 빛나게 장식해가고있다.
세월이 흘러가며 주인공들(주연 배우)도 여러번 교체됐다. 그사이에 김일성상계관인, 로력영웅이 나왔으며 수많은 인민배우, 인민예술가, 공훈배우, 공훈예술가가 배출됐다.
조청미에게 자리를 물려준 김기원은 30대에 첫 주인공으로 발탁되여 주인공역을 잘 소화해냈다. 전직이 상점판매원이라는 이색적인 경력을 가진 그는 이북의 최고무대에 주인공으로 서며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10대아동역인 을남배역을 맡은 최경도는 첫 공연이후 이 배역으로 활약하여 주목을 받았다. 2001년초 갑자기 쓰러져 고비를 맞기도 했던 그가 60에 가까운 나이에도 아동역(을남)을 맡고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고있다.
역시 아동역인 갑순이(주인공의 딸)의 역을 하고있는 방영희는 벌가리아에 류학한 경력이 있으며 1971년 11살의 나이에 어린 갑순이역으로 무대에 선 이후 지금까지 갑순이로 살고있다. 갑순이역에 출연한것이 계기가 되여 성악가의 길을 걷게 된 그는 18살때부터 피바다가극단전속 고음가수(쏘프라노)로 활동하고있다. 방영희는 국립교향악단과 재미예술단의 합동연주회에서 필자의 지휘로 협연한적이 있는 기량이 높은 가수이다.
눈길을 끄는것은 악역인 변구장역을 부자간에 대를 이어가며 맡고있는것이다.
현재 변구장역을 하고있는 김승남은 아버지 김영원의 배역에 대를 이어가며 열연을 하고있다. 김승남은 원래 다른 기관에서 예술활동을 하다가 피바다가극단에 전속됐다고 한다. 북의 음악은 철학적깊이가 있다.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에 참가하는 재미조선인예술단의 가수들은 당연히 베르디나 푸치니의 아리아를 기량껏 신나게 부르려고 하지만 청중들은 그러한 노래에서 받는 감동이 별로 크지 않다고 한다. 기악하는 음악인들도 마찬가지다. 가급적이면 챠이꼽스끼나 시벨리우스의 곡을 연주해서 실력을 과시해보고싶어한다. 하지만 반응은 랭랭하다.
언제인가 축전에 참가했던 세계적으로 이름있는 한 바이올린연주가는 《이북의 음악은 대하면 대해볼수록 무게가 있고 감정표현에서 철학적인 깊이가 있다.》고 고백하면서 절대로 가볍게 대할 음악이 아니라고 정색을 하며 자기의 심정을 이야기하였다.
김원균명칭 평양음악대학
세계에는 그 어떤 나라에 가보아도 자기들의 문화를 꽃피우기 위한 나름대로의 예술의 전당이 있다. 미국의 쥴리아드 음악학교나 로씨야의 챠이꼽스끼 모스크바음악원 그리고 영국의 왕립음악학교, 이딸리아의 산따 체실리아 등 세계적으로 이름있는 학교가 이 세상에 많고많지만 김원균명칭 평양음악대학처럼 뜨거운 사연들이 감동깊이 다가오는 곳은 없다. 나는 그 뜨거운 심장의 노래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한다.
김일성주석은 공화국이 창건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문화선전상(당시)을 만나 대학학제를 가진 국립음악학교를 설립할데 대한 과업을 주면서 이를 추진할데 대한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방도를 가르쳐주시였다.
대학창립은 나라가 필요로 하는 예술인재들을 더 많이 키워내여 사회주의의 승리를 향하여 전진하는 조국인민들의 혁명대오에 필승의 신념을 안겨줌으로써 보다 문명하게 살고싶어하는 인민들의 꿈을 이루어주려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드디여 1949년 3월 1일 국립음악학교창설에 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결정을 발표하여 음악대학창립을 온 나라에 선포하게 한 김일성주석은 여러 기회에 혁명위업달성을 위해 대학이 꼭 지켜나가야 할 음악예술의 방향과 지침을 주시였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김일성주석의 고귀한 뜻을 받들어 웅장한 새 교사를 풍치수려한 대동강반에 새로 건설하고 대학 이름도 영생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지은 작곡가의 이름을 달도록 하였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후대교육을 위해서는 억만금도 아깝지 않다고 하며 교원들의 자질을 높이는 문제로부터 학생선발, 악기, 기재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문에 세심한 지침을 주시였다. 1969년 대학창립 20돐 경축공연때에는 그 준비로부터 한종목씩 세심한 지도를 해주시였으며 그후에도 때로는 집무실에서, 때로는 현지지도의 길에서 대학교육사업과 관련한 사업들을 수백차례나 지도해주며 교육의 실천적방향을 잡아주시였다.
이렇게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정력적인 지도밑에 김일성훈장을 수여받은 이 대학은 강력한 교수진영과 완벽한 교육토대를 구축하고 국가급의 음악연구소와 대학관현악단까지 갖추어진 음악교육의 대전당으로 강화발전하였다.
김원균명칭 평양음악대학에서는 지금까지 김일성훈장수훈자 , 김일성상계관인 , 로력영웅, 후보원사, 교수, 박사, 인민예술가, 인민배우, 공훈배우 등 수백명의 명예칭호 및 학위학직소유자들을 배출하였으며 2.16예술상개인경연을 비롯한 전국적인 경연에서 450여명의 입상자를 배출하였다.
수많은 졸업생들이 5대혁명가극의 주역으로 활약하고있는가 하면 주체예술의 대를 억세게 이어나가는 주연가수로, 작곡가로 이름을 떨치고있으며 국제적인 음악경연에도 당당히 진출하여 우승함으로써 나라와 민족의 영예를 온 세상에 떨치고있다.
대학명과 더불어 영생하는 김원균은 강원도 원산출신이며 1952년부터 모스크바 챠이꼽스끼명칭 음악대학에서 류학한 후 국립예술극장 작곡가, 조선음악가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피바다가극단 총장 겸 조선음악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고문 등을 하였다. 1961년부터 몇년간 이 대학의 학장을 하였다.
그는 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애국가》를 작곡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였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로력영웅으로 존경받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음악대학의 이름에 작곡가 김원균의 이름을 달데 대한 정령을 2006년 6월 27일에 발표하였다.
정령에는 이렇게 지적되여있다.
…
당과 수령의 현명한 령도밑에 우리의 음악예술은 가장 혁명적이며 인민적인 음악예술로 자랑스러운 발전의 길을 걸어왔으며 오늘 사회주의강성대국건설을 추동하는 위력한 사상정서적무기로 되고있다.
주체음악예술건설의 빛나는 력사의 갈피에는 당과 수령에 대한 끝없는 충실성과 뛰여난 예술적재능을 지니고 음악창작활동에 헌신한 김원균동지의 고귀한 노력과 공적이 깃들어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품속에 안겨 자기의 재능과 희망을 마음껏 꽃피울수 있게 된 김원균동지는 영생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와 《애국가》를 훌륭히 창작하여 해방직후 우리 나라 음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으며 그후에도 사상예술성이 높은 명곡들을 창작하고 음악예술인후비들을 키워내는데서 공로를 세웠다.
선군시대 음악예술교육의 대전당인 음악대학의 명칭을 당과 인민이 기억하는 음악가와 결부하여 부르는것은 당과 수령의 손길아래 자라나 보람찬 예술창조활동으로 당과 사회주의조국을 받들어온 우리 음악예술인들의 공로를 길이 전하며 우리 당의 선군령도따라 주체음악예술의 새로운 전성기를 펼쳐나가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
나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을 접하면서 왜 조선을 그렇게 위대하다고 하는지를 알수 있었다.
정령에 밝혀져있는것처럼 《당과 수령의 현명한 령도밑에 우리의 음악예술은 가장 혁명적이며 인민적인 음악예술로 자랑스러운 발전의 길을 걸어왔으며 오늘 사회주의강성대국건설을 추동하는 위력한 사상정서적무기로 되고있다.》라고 대학의 명칭을 바꾸는 목적과 취지에 대하여 명확히 설명하였다. 다시말하여 이 전당은 단지 자기의 재능만을 꽃피워서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쟁이(쇼맨)를 길러내는 곳이 아니라 나라의 발전을 추동하고 사상적결속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한다는것이다.
정령은 김원균동지는 영생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와 《애국가》를 훌륭히 창작하여 해방직후 우리 나라 음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으며 그후에도 사상예술성이 높은 명곡들을 창작하고 음악예술인후비들을 키워내는데서 공로를 세웠다고 하면서 예술인들이 나라를 위해 할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밝혀주었다.
자본주의나라에서는 일개 음악가의 창작활동에서 얻어진 성과같은것에 대해선 조금의 관심도 없이 무심히 지나쳤을수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음악의 나라 사회주의조선에서는 김원균이 쌓아올린 성과와 나라에 대한 충실성을 잊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비록 그가 사망한지 여러해가 흘러갔어도 나라가 그것을 잊지 않고 죽어도 잃지 않는다는 영원한 정치적생명을 부여하는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인덕정치의 아름다운 현장을 직접 목격하면서 큰 감동을 받았을것이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대학의 새 교사건설이 완성되자마자 대학을 방문하여 건축의 질도 최상의 수준에서 보장되고 모든 교육시설들이 음악예술교육의 전당답게 잘 갖추어졌다고 만족을 표시하고 명칭을 변경하도록 하시였다고 한다.
이 대학을 방문한 음악인들과 저명한 인사들도 시설과 규모에 있어서 세계최고수준급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고있다.
성악학부, 민족기악학부, 양악기악학부, 작곡학부들이 있으며 수백여개의 강의실과 전공개별수업실, 련습실, 외국어수업실, 전자열람실, 콤퓨터조종실, 체육실, 음악당, 기숙사 등을 갖추고있다.
전공수업실은 각각 방음시설이 된 훈련시설과 개별수업실로 구성되였다. 기숙사에는 각 지방에서 선발되여온 학생들이 국가의 혜택을 받으며 꿈과 리상을 키워나가고있다.
특히 800명의 관객을 수용할수 있는 음악당은 중주련습실, 종합련습실, 음향조종실, 조명조종실, 영사실 등을 갖춘 최고의 시설로 되여있고 음악당에는 100명규모의 음악대학출신의 연주가들과 교수들로 구성된 직업관현악단인 대학관현악단이 상주하고있다.
이 악단은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에 참가하는 재미조선인예술단을 위해 전속악단처럼 갈 때마다 공연에서 제기되는 모든 편의를 제공해주고있으며 기타 많은 도움을 주고있다. 이 악단을 대학생들로 구성된 학생오케스트라가 아닌가 하고 더러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 악단 사람들이 음악대학 관현악단이라는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있는것을 발견할수 있었다.
우리일행의 한 음악인이 《왜 관현악단이름을 학생오케스트라로 오해할수 있겠는데 이렇게 수준있는 악단의 이름을 평양아까데미아오케스트라라고 하여 학생오케스트라가 아닌 직업관현악단이라는것을 이름에 부각시키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하였었다.
질문을 받은 이 악단의 김명철단장은 《아닙니다. 선생님, 우리 음악대학 관현악단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몸소 무어주시였습니다. 우리는 이 소중한 관현악단에 말할수 없는 애착심과 넘치는 자부심이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하는것이였다.
그는 계속하여 《수령님께서는 국사가 그렇게 바쁘신 중에도 창립이래 여러차례 우리 악단을 찾아주시고 지도해주시였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 은덕을 잊을수가 없습니다.》라고 자기들의 심정을 이야기하였다.
김명철단장의 이야기는 이북음악인들의 공통된 심정을 말하는것으로 리해가 되였다. 이 악단의 지휘자는 여러명이 있는데 근래에는 비엔나아까데미아류학에서 돌아온 젊은 지휘자들이 바통을 잡고있다.
도이췰란드류학에서 돌아온 리동철, 체스꼬에서 류학한 최문호, 현재 국립교향악단에 배치된 채주혁, 은하수관현악단의 지휘자 리명일, 만수대예술단 지휘자 허명권 등이 최근까지 이 악단의 지휘를 맡고있었다.
현재 리동철은 지휘과 학생들의 수업을 담당하고있으며 허명권은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챠이꼽스끼의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을 지휘하여 많은 찬사를 받은바 있는 20대의 유능한 지휘자이다.
세계가 조선의 노래를 듣게 하라.
나는 김일성광장에서 있었던 열병식과 군중시위,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도 직접 보았다. 100%가 조선의 음악이다. 독창회나 합창공연도 삼지연악단과 은하수관현악단의 공연도 조선의 노래를 위주로 음악회를 이끌어가지만 음악회마다 청중들에게 무한한 감동을 준다.
조선의 음악예술은 선률이 좋고 장단이 흥이 나며 화성에서 색갈이 있고 심장을 움직이는 감동이 있다. 노래속에 자주, 평화, 친선의 철학이 있고 누구나 처음 들어도 친근하게 느끼는 매력이 있는 진짜 예술이다.
김일성주석이 60여년전에 세워준 김원균명칭 평양음악대학은 오늘 김정일국방위원장의 《노래소리가 높은 곳에 혁명이 있고 승리가 있다는것은 하나의 진리입니다.》는 명언을 신념으로 틀어쥐고 민족음악예술발전에 기여할 인재들을 키워내는 주체음악교육의 대전당으로 거연히 우뚝 서있다.
윤이상음악연구소 관현악단
윤이상음악연구소 관현악단은 북조선의 대표적인 실내관현악단이다. 1990년 12월에 평양과 각 지방 음악대학과 예술학원에서 유능한 연주자 42명을 뽑아 조직된 이 악단은 600석규모의 윤이상음악당을 자기의 전속무대로 하고있는 악단인데 1 000여회가 넘는 공연을 해오고있다.
1984년에 발족한 윤이상음악연구소의 관현악단으로 되여있는 이 악단은 윤이상의 음악작품과 북조선의 음악은 물론이고 세계명곡과 현대음악까지 다양한 음악을 폭넓게 연주하는 악단으로 중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순회공연하면서 점차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게 되였다. 윤이상음악연구소에는 60여명의 연주가들로 구성된 관현악단이 있으며 윤이상음악당, 윤이상박물관, 윤이상선생의 생전 집무실 등이 있다. 그만큼 이북에서는 윤이상선생을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작곡가로 귀하게 대하고있으며 선생에 대한 김일성주석과 김정일국방위원장의 배려는 실로 특별하였다.
윤이상선생은 우리 민족은 물론이고 세계음악애호가들에게까지도 너무도 잘 알려진 우리 민족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음악가이다. 우륵교향악단의 16회 정기연주회때인 1992년 9월26일 그의 작품중 《밤이여 나뉘여라》를 뉴욕 카네기홀의 무대에서 연주하여 큰 반향을 일으킨바 있다.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선생(1917-1995, 재도이췰란드동포)은 1959년부터 도이췰란드의 여러 음악대학의 교수,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동양음악과 유럽음악에 다리를 놓은 우리 민족의 소중한 작곡가이다.
일찍부터 이남사회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참가한 그는 1967년 6월 이남의 정보당국이 조작한 동베를린공작단사건(남조선 적화공작단사건)으로 랍치되여 이남의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끌려가 갖은 고초를 다 겪었다. 그후에도 선생은 이남의 군사파쑈독재를 반대하고 자주, 민주, 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정력적으로 활동하였으며 범민련 해외본부 의장으로서 민족적단합과 조국통일을 위한 범민련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김일성주석께서는 재도이췰란드교포 윤이상일행과 한 담화에서 선생은 범민족통일음악회의 성과를 통하여 조국통일위업에 커다란 공적을 쌓아올렸다고, 선생은 범민족통일음악회를 통하여 북에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음악예술전통과 유산을 없애고있다는 남조선당국자들의 기만선전을 깨는데도 크게 이바지하였다고, 선생이 조국통일을 위해 앞으로 자기의 힘과 재능을 다 바치겠다고 하는데 대단히 좋은 일이라고, 나는 선생이 이 사업에서 큰 성과를 거두리라고 믿는다고 윤이상선생의 애국활동을 크게 치하하시였다.
평양에 있는 윤이상음악당은 동유럽사회주의나라들이 붕괴되던 어려운 시기에 건립되였다.
1991년 여름이였다. 동유럽에서 일어난 사회주의붕괴로 인해 북조선에는 말할수 없는 시련의 파도가 밀려들고있었다.
이러한 엄혹한 시기에 김정일국방위원장께서는 윤이상선생의 생일 75돐을 계기로 윤이상음악당건물을 하나 크게 잘 짓고 윤이상음악연구소도 함께 있도록 하며 새 건물에서 음악연주회와 음악토론회도 해마다 진행할데 대한 지침을 주시였다.
그리하여 평양에서는 지금까지 한해도 번지지 않고 해마다 우리 민족과 세계의 음악가들의 관심과 기대속에 윤이상음악회가 성황리에 진행되고있다. 8 000명이 넘는 북과 남, 해외동포, 외국인음악가들이 이 음악회에 참가하였으며 그 사이 이 음악회를 관람한 손님들도 5만 5 000명을 넘었다.
제1차로부터 11차까지 윤이상음악회에 참석하여 자기의 애국애족적인 사상감정과 음악세계가 조국인민들과 교감하는 감격적인 순간들을 체험하면서 윤이상선생은 김정일국방위원장의 깊은 뜻을 가슴속에 새겨안게 되였다.
윤이상선생의 창작활동과 사회활동에 깊은 관심을 돌려오신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선생을 원형으로 한 다부작예술영화를 만들도록 하고 영화가 완성되였을 때에는 선생이 이국땅에서 가족끼리만 모여앉아 생일을 맞게 되니 얼마나 외롭겠는가고 하시며 일군들에게 영화와 함께 병치료에 좋은 약들을 가지고 베를린으로 가서 선생을 축하해주고 자신의 인사도 전하도록 하시였다.
선생은 떠났지만 조국의 극진한 사랑과 보살핌속에 윤이상음악회와 윤이상음악연구토론회가 해마다 열리고있으며 그의 작품들은 민족의 재부로 더욱 빛을 뿌리게 되였다.
이런 명성을 얻고 활동하는 윤이상음악연구소 관현악단은 1999년부터는 수석주자들로 구성한 《평양 윤이상 안삼블》로 도이췰란드순회공연을 가졌으며 이어서 노르웨이와 중국순회공연도 성사되여 높은 수준의 현대음악실내악단으로 현지언론과 전문가들로부터 격찬을 받은바 있으며 또한 도이췰란드음반사 베르고에서 윤이상의 실내악작품의 음반을 내보내여 호평을 받고있다.
도이췰란드를 방문한 윤이상음악연구소 관현악단은 이 나라의 여러 도시에서 공연하였다. 주요연주곡목들은 윤이상의 실내악작품들외에 이북의 창작곡들과 바로크에서 현대음악을 아우르는 서양작품 등이였고 다채롭고 광범위하게 준비된 수준높은 연주로 현지음악애호가들에게 북조선의 예술수준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윤이상음악연구소 관현악단은 이 공연들을 통해 이곳 청중들의 열렬한 찬사를 받았다. 특히 《아름다운 선률과 훌륭한 연주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도이췰란드의 본종합대학 총장은 《위대한 지도자가 있어 북조선이 예술분야에서 성과를 이룩할수 있었다.》고 치하하면서 《김일성주석과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초상화를 자기 사무실에 모시고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도이췰란드 청소년교향악단 단장 헤일러는 《훌륭한 관현악단을 보내주신데 대하여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 충심으로 되는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고 말하였고 재도이췰란드동포들도 공연을 보고 감격을 금치 못하면서 《조국이 통일되여 북과 남의 예술인들이 함께 재능을 마음껏 펼칠수 있는 그날이 하루빨리 오기 바란다.》고 가슴속에 맺힌 사연을 이야기하였다.
오랜 기간 윤이상음악연구소 관현악단을 맡아온 지휘자 강룡웅이 작고한 다음 김호윤이 지휘자로 일하고있으며 악장은 독주가로도 명성을 떨치고있는 김철룡이 맡고있다. 악단의 구성은 남녀혼합편성으로 되여있으며 젊은 연주가들로 조직되여있다.
지휘자 김호윤과 악장 김철룡은 세계적수준의 예술가로 평가를 받았다.
나는 지금도 김호윤이 국립교향악단에 있을 당시 지휘한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를 최고의 명연주로 기억하고있다. 2008년 7월 현대음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있는 윤이상음악연구소 관현악단의 지휘봉을 잡으면서 김호윤은 이북의 현대음악을 보다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킬 새로운 포부와 구상을 하였다.
김호윤지휘자는 《선배지휘자들이 완전하게 만들어놓았지만 속도에서 발전여지가 있다고 생각해왔습니다.》라고 하면서 선배지휘자들이 거둔 성과에 기초하여 연주속도를 당기면서 흥취를 돋구려는 방도를 모색하고있는것으로 보였다.
김호윤은 도이췰란드 베를린에서 지휘법을 배웠다. 그는 류학시절에 지휘법을 비롯한 기량을 배웠다면 조국에 돌아와서는 정신력과 예술철학을 배웠다고 말한다.
특히 지휘자와 연주가는 서로의 고충도 알고 풀어줄수 있어야 하고 또 단원들과 지휘자가 한마음이 되여야 인민들의 심금을 울리는 연주가 나올수 있다는 그의 지론에 나는 상당히 공감을 하고있다.
김호윤은 《우리 악단의 연주가나 창작가들이 원하는것은 결코 세계적인 명성이 아니다.》라고 전제하면서 자기들의 희망은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새 음악을 창조하는것이라고 강조했다.
1992년에 작곡된 윤이상의 바이올린협주곡 《제3번》을 협연한 악장 김철룡을 관현악단의 동료단원들도 최고의 바이올린연주가로 인정하고있었다. 이 곡의 수준이 기교적으로 난해하고 음악적인 면에서도 간단치가 않다는 말이다.
내가 김철룡의 연주를 처음 들어본것은 1990년 10월 재미조선인예술단(동부)으로 범민족통일음악회에 참가했을 때였다.
학생모습이 완연한 애된 바이올린연주가가 불꽃을 튀기는듯 현란한 활놀림으로 청중을 사로잡으며 연주를 해나가고있었다. 이 협연자가 바로 윤이상음악연구소 관현악단 악장인 김철룡이였다.
야! 하고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저정도의 실력을 가진 연주가가 뉴욕의 줄리아드음대에도 있을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2006년 4월에 중국 심양에서 통일음악회를 개최하였다. 《조선의 장군》을 이 음악회의 첫 순서로 연주하며 력사적인 통일음악회의 막을 열었다. 남과 북 그리고 해외의 음악가가 한 무대우에서 베토벤의 3중협주곡을 연주하는데 큰 의미를 두었다. 여기에 평양 윤이상음악연구소 관현악단의 악장 김철룡도 출연하였고 이남의 첼로연주가 신상원과 도이췰란드 피아니스트 김미경이 해외대표로 참가해서 범민족적인 음악회를 조직하여 진행했었다.
원래 베토벤의 트리플콘체르토는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세 악기가 균등한 역할을 하게 되여있어야 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베토벤은 중요한 선률과 역할을 첼로에만 집중시켜 놓았기때문에 사람들은 피아노와 바이올린은 둘러리역할만 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도 많이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아예 이 곡을 가리켜 베토벤의 첼로협주곡이라고 롱담까지 할 정도다.
공연전에 심양교향악단과 훈련을 하던 때의 일이다. 2악장의 바이올린파트를 이렇게 아름답고 음악적으로 처리하는 바이올린연주가를 일찌기 본적이 있었던가. 기가 막힌 명연주였다.
휴식시간이 되자 기다렸다는듯이 심양교향악단의 중국인 연주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연주려행외에는 외국에 가본적이 없는 김철룡을 에워싸는것이였다.
어느 나라에서 류학을 했으며 선생은 누구인가, 련습은 어떻게 하고있고 학비는 어떻게 조달했는가, 부모님은 돈 잘 버는 직업을 가지고있는가 등등 가지가지의 질문을 쏟아내는것이였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인재 하나를 키워도 확실하게 길러내시였다. 조선은 예술에 있어서도 절대 허술하지 않다. 본때를 보이는 나라라는것을 이제 그들도 알게 된것 같았다.
요즘 이북동포들은 척척척 발걸음소리에 온 나라 강산이 반기고 온 나라 인민이 따라서고있으며 그 우렁찬 진군에 화답하며 찬란한 미래가 앞당겨진다는 현실에 가슴설레고있다.
이러한 때를 맞추어 시대정신이 맥박치는 선군조선의 음악예술정책을 바탕으로 추구하고있는 조선의 현대음악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키려는 윤이상음악연구소 관현악단 예술인들의 새로운 시도가 날이 갈수록 빛나고있다.
개량발전된 민족악기들
북조선을 방문하는 외국인음악예술인들이 이북의 음악, 미술, 무용, 집단체조예술 등을 접한 다음에 하는 말들을 보면 거의 일치하다. 한마디로 《조선은 음악예술의 나라》라고 묘사한다. 그러면 이번에는 이북의 민족악기들에 대한 이모저모를 소개해본다. 나는 이 주제를 다루기 위해 참고도서로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저술한 로작 《음악예술론》을 참조했다. 그래서 1960년대와 1970년대초에 개량발전된 민족악기들가운데서 저대와 장새납을 중심으로 한 죽관악기류를 먼저 다루고 이어서 가야금과 소해금을 중심으로 한 민족현악기에 대하여 두번에 걸쳐 련재하려고 한다.
북조선음악의 정체성과 민족악기의 독창성은 《음악예술론》의 첫장에서부터 뚜렷하게 확인할수 있다.
로작의 첫장에 나오는 《1. 주체음악》의 소제목들은 《1) 주체시대는 새형의 음악을 요구한다》, 《2) 주체는 우리 음악의 생명이다》, 《3) 혁명에 필요한것이 명곡이다》, 《4) 음악을 대중화하여야 한다》로 구성되여있다.
이 로작에서 작곡, 연주, 후비양성 등 음악에 대한 세세한 부분까지 방향을 제시하고있는데 론문의 첫머리에 《생활이 있는 곳에는 음악이 있고 음악이 있는 곳에는 생활이 있다.》라고 씌여있고 계속하여 《음악은 사람들에게 생활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풍부한 정서, 약동하는 생기, 래일에 대한 희망과 랑만을 안겨주는 인간생활의 가장 친근한 예술이다.》라고 지적되여있다.
이북은 민족악기의 현대화가 없이는 민족음악발전을 획기적으로 이루어내기가 불가능하다는것을 간파하고 악기개량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갔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로작 《음악예술론》에서 《민족악기를 현대적으로 개량발전시키는것은 민족음악을 시대적미감에 맞게 발전시키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라고 지적하시였다.
김일성주석과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악기개량의 방향과 방도를 제시하고 지도하심으로써 북에서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초에 수많은 민족악기들이 민족적정서가 짙은 아름다운 음색과 맑고 부드러우며 우아하고 처량한 소리를 내는 악기로 현대적미감에 맞게 훌륭히 개량되게 되였다.
이 시기에 새롭게 개량된 대표적인 민족악기들을 보면 단소속악기에 고음단소, 단소가 있으며 저대속악기에도 고음저대, 중음저대, 저대 세 종류가 있고 새납피리속악기에는 새납, 장새납, 대피리, 저피리 등을 들수 있다.
이 개량된 악기들은 우리의 민족음악과 양악을 마음대로 조화시켜 연주할수 있으며 풍부한 주법들과 전조나 이조가 자유자재로 할수 있게 되여 독주뿐만아니라 중주, 합주 등 다양한 연주형식에 널리 리용되고있으며 특히 배합관현악에서 특별한 연주효과를 훌륭히 이루어내고있다.
이렇게 창조한 새 악기의 우수성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이에 걸맞는 새 음악창작사업을 본격적으로 장려하여 1970년대 중반부터 독주, 중주, 합주, 관현악 등의 명곡들이 쏟아져나오는 그야말로 예술의 부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 나온 음악들중 최성환이 편곡한 관현악 《아리랑》과 김영규가 편곡한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는 걸작중의 하나로 평가를 받고있다.
이 시기에 창작된 관현악곡들을 모아 조선음악전집을 출판하기 시작했는데 제8권과 18권에 수록된 관현악곡과 제20권에 있는 협주곡들은 세계적인 명곡으로 절찬을 받고있다.
제8권에 수록된 교향곡 《피바다》의 도입부에 있는 중음저대의 구슬픈 독주가락으로 유명한 《아리랑》과 새납의 곡중 독주로 유명한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는 배합관현악의 대표적작품이라 할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배합》이라는 의미는 기존 서양악기편성의 관현악에다 단소, 저대, 장새납 등의 민족악기를 융합하여 관현악곡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창작함으로 해서 조선음악의 우월성을 유감없이 발전시켰다는것이다.
지휘자가 보면대우에 올려놓고 지휘할 때 보는 교향악단에 속해있는 전체 악기가 연주해야 할 모든 음악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촘촘히 그려져있는 큰 악보를 총보라고 하는데 보통 피콜로, 플류트 같은 고음목관악기가 악보의 맨우에 있고 오보에, 클라리네트, 호른, 트럼베트 등 금관악기, 타악기가 나오고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바스 등 현악기순으로 배치가 되여있다.
그런데 배합관현악에서는 민족악기가 모든 서양악기의 머리꼭대기에 의연히 자리잡고 앉아 랑랑한 소리를 내며 서양악기군을 압도하면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낸다.
지금부터는 죽관악기를 중심으로 한 민족악기들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1) 단소 : 단소는 개량되여 민족관현악과 배합관현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악기로 되였을뿐아니라 관현악의 최고음역을 담당하는 고음단소가 새로 나오게 되였다.
개량된 단소의 기본재료는 종래의 단소처럼 참대가 아니라 박달나무나 자단과 같은 단단한 나무인데 그 규격을 과학적으로 통일시킴으로써 음정을 보다 정확히 낼수 있게 되였다. 또한 종래의 단소에 1개 음공(구멍)이 더 추가되여 모두 6개 음공으로 되였으며 그것을 12반음계체계에 맞게 음공을 과학적으로 설정하고 건(누르개)장치를 도입하여 운지법을 해결함으로써 전조와 이조를 쉽게 할수 있고 빠르고 복잡한 기교적인 연주도 능란하게 할수 있게 되였다.
(2) 저대속악기: 우리 나라의 독특한 민족악기의 하나인 저대는 자기의 고유한 특색을 보존하면서도 현대음악을 능숙히 연주할수 있는 현대적인 목관악기로 개량발전되였다.
개량된 저대는 박달나무나 자단과 같은 단단한 나무를 기본재료로 하여 고음저대, 중음저대, 저대로 나누고 규격을 과학적으로 통일시킴으로써 각각 악기들의 음정을 보다 정확히 낼수 있게 되였다. 그리고 12반음계체계에 맞게 음공을 과학적으로 설정하고 건장치를 새롭게 도입하여 운지법을 해결함으로써 전조와 이조도 쉽게 할수 있게 되였다. 그러면서도 취구(마우스피스)의 모양과 입술대는것 등의 기본주법의 기초를 그대로 보존함으로써 롱음과 끌소리 등 고유한 주법들을 자유롭게 할수 있게 되였다. 그리고 저대류의 악기들은 다 웃울림통과 아래울림통사이에 련결관을 만들어넣음으로써 악기의 절대음높이를 조절할수 있게 되였다. 저대속악기들은 모두 저대의 우아하고 부드럽고 처량하며 구성진 음색의 통일성을 유지하면서도 음역에 맞게 고음저대와 저대는 《B♭》조악기로, 중음저대는 《E♭》조악기로 되여있다.
(3) 장새납 : 장새납은 1960년대에 새납을 우리 시대 민중들의 지향과 발전하는 음악연주의 요구에 맞게 새납을 바탕으로 하여 새롭게 만들어진 목관악기이다. 새납보다 길이가 길어진 모양을 특징으로 하여 장새납이라고 부른다.
본래의 새납은 음량이 매우 크고 밝으며 화려한 좋은 점을 가지고있는 반면에 음색적으로 너무 예리하여 합주에서 지나치게 튀여나고 반음계체계를 쉽게 연주할수 없는 부족점을 가지고있었다. 장새납은 새납보다 관대가 더 길고 음공이 더 설치되였으며 누르개장치가 도입되고 12평균률반음계체계로 조률하도록 만들어짐으로써 전조와 이조를 가능하게 하고 음역을 제2옥타브 4도까지로 넓힌 현대적인 악기로 완성되였다.
새 천년을 맞이하는 우륵교향악단 신년연주회가 뉴욕 링컨쎈터 앨리스털리홀에서 열렸는데 금강산가극단소속의 장새납연주가 최영덕이 그사이 피콜로, 트럼베트가 담당했던 그 유명한 독주부분을 처음으로 장새납이 맡아 제맛을 내게 연주하여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의 색채가 완전히 달라져 이날 음악회에 온 음악전문가들의 관심과 많은 동포들의 절찬속에서 성대한 공연을 한바 있다.
(4) 피리속악기: 전통적인 민족악기인 피리과에 속한 악기들은 우리 시대 인민들의 정서와 비위에 맞게 개량되여 현대적인 대피리, 저피리로 발전되였다. 종래의 피리는 그 소리가 맑지 못하고 생소리에 가까운 소리를 내는것이였으며 음역이 좁고 5음계로 조률된것이다. 또한 자연재료인 참대를 그대로 울림통으로 만들었기때문에 음정과 음색을 기대할수 없었으며 따라서 여러가지 현대적음악연주에서 많은 애로점을 가지고있었다. 개량된 피리속악기들은 기본재료를 참대대신 박달나무나 자단과 같은 굳은 나무를 잘 가공하여 규격화하였으며 울림통에 12반음계체계에 맞게 구멍을 과학적으로 뚫고 누르개장치를 새롭게 도입하여 운지법을 해결함으로써 전조와 이조도 쉽게 할수 있게 되였다. 그리고 리드와 울림통사이에 련결관(조음관)을 설치하여 악기의 절대적인 음정을 조절할수 있게 되였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이러한 민족악기에 대해 《우리의 음악예술을 주체적인 음악예술로 발전시키기 위하여서는 민족음악과 민족악기를 위주로 발전시키면서 거기에 서양음악과 양악기를 복종시키는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라고 지적하시였다.
이 말씀속에 조선음악의 정체성과 민족악기의 독창성의 결론이 담겨있다.
그리고 다음의 도서 《민족음악의 계승발전》을 읽어보면 더 확실하게 그 결론을 찾을수가 있다.
책에는 김정일국방위원장의 말씀 《우리 장단을 살리려면 관현악곡을 우리 식으로 독특하게 써야 하며 연주형상에서 민족적특성을 살려야 합니다.》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민족악기연주법을 계승발전시키는것이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는것은 첫째로 그것이 민족의 음악적정서를 표현하는 수법이라는데 있다. 우리 식으로 독특하게 써서 민족적특성을 구현한 작품이 있고 연주가와 악기가 있다고 하여 민족적특성을 구현하는 문제가 다 해결되는것이 아니다.
음악예술은 연주의 예술이며 연주형상을 통해서만 완성되는 예술인것만큼 작곡가의 창작은 음악창조활동의 첫 단계로 될뿐이다. 민족적특성을 구현하여 독특하게 써놓은 작품도 연주형상에서 잘못하면 작곡가의 의도를 충분히 실현하지 못할뿐아니라 때에 따라 다르게 형상될수도 있다.
연주형상에서 민족적특성을 살리는가 못 살리는가 하는것은 결정적으로 민족적인 연주법을 옳게 적용하는데 있다. 우수하게 개량발전시킨 민족악기라도 우리 식 연주법이 아니라 서양식연주법으로 연주하면 그러한 음악은 민족성을 옳게 구현할수 없다. 반대로 서양악기라도 우리 식의 연주형상수법을 옳게 적용하면 우리의 민족적특성을 살릴수 있는것이다.
우리의 민족적연주법을 계승발전시키는 문제가 중요한것은 둘째로 연주법도 시대적성격을 띠는것과 관련된다.
한 민족의 음악이 고정불변할수 없는것처럼 악기들의 연주법도 고정불변할수 없다. 시대가 변하면 인민들의 사상미학적요구가 달라지고 그에 따라 민족적선률도 달라지게 되며 민족적선률이 달라지면 그의 사상정서를 살리기 위한 수법으로서의 연주법도 달라지기마련이다.
오늘에 와서 민족악기의 연주법이라 하여 덮어놓고 그대로 살릴 필요는 없다. 낡은 사회의 뒤떨어진 사상미학적요구를 대변하였던 락후한 연주법을 버려야 한다. 뿐만아니라 민족적특성을 살리는데 필요한 연주법도 옛날 그대로가 아니라 시대의 요구에 맞게 발전시켜야 하며 지금까지 없던 연주법도 시대의 요구에 맞는것이라면 새로 창조해야 한다.》
이러한 요구를 구현하여 나온 관현악곡의 하나가 바로 김윤붕이 편곡한 관현악 《그네뛰는 처녀》이다. 이 곡은 기존 서양악기만으로 연주해도 우리 민족의 정서에 흠뻑 젖게 하는 관현악곡이다.
이 곡을 우륵교향악단이 앙코르곡으로 뉴욕에서 여러번 연주하여 동포들과 미국인애호가들로부터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가야금과 민족현악기에 대하여
나는 오래전에 1986년에 만들어진 이북영화 《가야금에 깃든 사연》을 감상하였다. 이 영화는 6세기 중엽 민족음악가 우륵이 고유한 민족악기인 가야금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영화로 옮긴 작품으로서 봉건사회의 제약속에서 백성들의 감흥을 표현하기 위하여 정열을 바치는 음악가 우륵과 백성의 생활속에서 탄생하는 가야금을 이야기한 영화였다.
새 악기를 만들려고 시도하나 계속 좌절당한 우륵은 스승이 귀양에서 풀려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중을 나가던중 귀양지에서 온 배사공을 만나 스승 길부인이 궁성측의 작곡요구를 거부하여 귀양지에서 매질과 화형에 처해졌음을 알고 좌절한다. 그러나 죽기 전날 스승이 우륵에게 당부한 편지내용을 전해듣고는 좌절에서 벗어나 스승의 당부를 되새기며 마침내 가야금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이것이 영화이야기의 일부이다.
새 천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악단의 이름을 통일조국에 맞는 《우륵교향악단》이라는 새 이름으로 결정한 뒤 이북의 윤이상음악연구소에 요청해두었던 음악가 우륵에 대한 관련자료를 구할수 있었다. Ureuk Symphony의 《우륵》이 무슨 뜻이냐는 미국사람들의 질문을 자주 받았다. 그래서 그와 관련된 글을 아예 공연프로그람에 실어넣었다.
《우륵은 6세기 중엽 신라에서 활동한 평민출신음악가이다. 그는 원래 가야국의 성열현 사람으로서 6세기 중엽부터 신라에서 음악활동을 하였다. 그는 우리 민족이 가장 사랑하는 악기중의 하나인 가야금을 처음으로 만들었을뿐만아니라 그것을 보급하는 일에 일생을 바쳐온분으로 우리 나라 가야금음악발전의 시초를 열어놓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수많은 곡들을 창작하였는데 그 악곡명의 일부는 <하가락도>, <상가락도>, <보기> 등이며 많은 곡의 이름이 아직도 <삼국사기>와 같은 오랜 력사책에 전해내려오고있다. 그는 또한 가야금연주의 명수였으며 후비양성에도 힘써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우륵은 가야국이 망할무렵인 6세기 중엽에는 제자 니문과 함께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류랑연주를 해오다가 신라왕의 요청으로 551년 3월에는 신라땅의 랑성(오늘의 청주)에 살면서 창작사업과 후비양성에 힘을 기울이였다. 그의 제자가운데서 계고, 법지, 만덕 등 유능한 음악가들이 나왔다. 그들은 수많은 곡들을 만들고 가야금음악을 널리 보급하였다. 이리하여 가야금은 오늘 우리 시대에까지도 민족악기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있는것이 사실이다. 이와 같이 우륵은 우리 나라 음악발전에 이바지한 작곡가이자 연주가이고 교육자였다. 특히 그는 가야금과 같은 훌륭한 민족악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우리 나라 음악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가야금과 소해금은 개량악기중에서 제일 연주가 많이 되는 악기인데 가야금은 주로 독주와 중주에서, 소해금은 주로 합주나 관현악에서 더 필요로 하고있다. 실지로 이북의 만수대예술단의 악단은 주로 배합관현악으로 조직되여있는데 현악기는 소해금, 중해금, 대해금, 저해금들이 담당하고 가끔 바이올린과 소해금, 비올라와 중해금, 첼로와 대해금, 콘트라바스와 저해금이 배합되여 시각적인 조화뿐만이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민족적음색과 서양현악기군의 음색 특히 저음의 음량에서 서로 필요한 부분을 보충해준다.
가야금에 관한 한가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1986년 봄이였다.
우리 교향악단의 정기연주회에 리성재의 가야금(12현)과 관현악을 위한 수상을 연주하기 위해 서울에서 이름난 가야금연주가 L교수가 독주자로 오게 되였다. 그는 우리 집에 며칠간 숙식을 하고있는 동안 로스안젤스 고려비데오에서 구입한 《평양학생소년 일본연주회》의 비데오를 보게 되였다. 마침 그중에 나오는 가야금 3중주를 보면서 L교수는 감탄과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있었다. 그 교수는 《음악도 음악이지만 가야금에서 어떻게 저런 뛰여난 기교가 나올수 있는지 기가 막혀서 말이 안나온다.》고 이야기하였다. 감탄하는 L교수의 모습을 보면서 그당시 이북의 민족음악의 수준이 얼마나 발전되였는지를 나도 가늠해볼수가 있었다.
요즘 이남의 대학에서도 《초소의 봄》을 가야금합주로 연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 곡은 중주로도 연주되고 죽관악기의 독주곡으로 자주 연주되지만 가야금협주곡으로는 더 유명하다. 가야금곡은 이제 독주, 중주, 합주, 협주곡 등 다양한 형식에서 연주되고있다. 특히 태권도영화 《평양날파람》주제음악에 사용될 정도로 사랑을 받고있는 민족악기이며 주제음악을 연주한 김금숙은 뉴욕필하모니 평양공연때 동행했던 미국의 유명한 방송 CNN이 특별취재하여 미국에도 방영된바 있다.
이제 이북에서 1960년대부터 체계적으로 벌려온 악기개량사업의 빛나는 결실인 민족현악기를 하나하나 알아보기로 한다.
가야금 : 전통적인 가야금은 새롭게 개량되여 음역이 늘어나고 음량도 풍부해졌으며 부들줄대신에 조률못을 쓰게됨으로써 조률이 편리하고 과학적으로 되여 현대적인 민족악기로 되였다. 가야금의 일반적구조는 줄, 앞판, 뒤판, 머리, 꼬리, 줄조임못, 괘, 울림구멍, 다리 등으로 되여있다. 웃판은 오동나무, 밑판과 테두리는 밤나무, 가래나무, 꼬리는 복자기나무, 고로쇠나무, 괘는 대추나무, 배나무, 복자기나무로 만든다. 가야금은 《B♭》조악기이며 기보는 한 옥타브 높이 한다. 음은 소옥타브 《쏠》부터 3옥타브 《화》까지 본음계로 맞춘다. 현재 전문예술단체에서와 대중들속에서 널리 쓰이고있다.
가야금의 음색은 맑고 우아하고 부드럽고 처량하다. 12현으로 된 전통가야금은 자리에 앉은 자세로 연주하게 되여있으나 이북의 가야금연주는 의자에 앉아서 연주하도록 되여있다.
양금 : 양금도 우리 시대 민중들의 미학적정서에 맞게 개량되여 어떤 음악이든지 훌륭하게 연주할수 있는 발전된 민족악기로 완성되였다. 종래의 양금은 다른 민족악기들과는 달리 7음계로 조률되여있었고 줄이 쇠줄로 되여있어 맑고 처량하면서도 독특한 소리색갈을 가진 이채를 띠고있는 악기였다. 그러나 음역이 좁고 울림이 풍부하지 못하고 여음이 제멋대로 지속되여 음악의 성격에 따라 그 울림을 조절할수 없는 등 제한성으로 하여 오늘 우리 시대 인민들의 정서적미감에 맞는 음악을 창조하는데서 적지 않은 부족점을 가지고있었다. 새롭게 개량한 양금은 이 약점들을 극복하고 맑고 선명하면서도 부드러운 소리색갈과 풍부한 울림을 가진 악기로 되였다.
옥류금 : 옥류금은 1970년대에 와공후를 대담하게 개량할데 대한 김정일국방위원장의 구상에 따라 창안제작된 지탄악기(손가락으로 뜯는)이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이 악기를 현대음악발전의 높은 요구를 보장하면서 질적으로 제작완성하도록 악기의 형태와 크기, 줄수, 변음장치, 음량과 음색, 목각장식에 이르기까지 여러차례에 걸쳐 세심한 지도를 주시였으며 악기가 다 완성된 다음에는 옥류라고 부르는 대동강의 흐름과도 같이 맑고 부드럽고 우아한 소리를 내는 우리 시대의 새 민족악기라는 의미에서 악기이름을 《옥류금》이라고 지어주시였다고 한다.
옥류금은 그 력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지만 현대음악의 요구를 원만히 충족시킬수 있도록 높은 수준에서 완성된 악기로서 우리 시대에 완성된 귀중한 문화적재보로 보존되고있다.
해금과에 속한 악기 : 해금은 우리 시대에 와서 개량되면서 소해금, 중해금, 대해금, 저해금의 해금속악기로 발전하였다.
소해금은 고음악기이고 중해금은 중음악기이며 대해금은 저음악기이고 저해금은 최저음악기이다.
소해금과 중해금은 무릎사이에 끼운 받치개의 편에 고정시키고 악기머리가 왼쪽어깨에 놓이게 왼손으로 쥐고 오른손에는 활을 쥐여 그으면서 연주하지만 대해금과 저해금은 울림통밑부분에 높이조절장치가 되여있는 다리를 바닥에 세워놓고 연주하게 되여있다.
해금속악기들은 크기가 서로 다르지만 그 구조는 같다. 개량된 해금의 울림통은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있다. 괘의 저음쪽 다리는 앞판에 직접 놓여있고 고음쪽 다리는 뒤판과 련결되여있는 울림기둥우에 놓여있다. 이때문에 줄이 진동할 때 그것이 앞판과 뒤판에 직접 전달되여 큰 공명을 일으킨다.
어은금 : 어은금은 김정일국방위원장이 1962년에 직접적인 지도밑에 만든 민족악기로 알려져있다. 독특한 악기구조와 민족적인 발음원리를 가지고있다. 우선 악기모양이 민족적이다. 울림통은 농촌에서 흔히 볼수 있는 조롱박모양으로 되여있고 악기의 머리부분은 지난 시기 녀인들이 머리단장을 할 때 사용하던 비녀를 련상하게 한다. 소리색갈은 맑고 부드럽다. 특히 악기에는 롱현장치까지 되여있어 음악연주에서 민족적색채를 더욱 짙게 해준다. 4도음정체계로 되여있는 어은금은 그 어느 나라 음악도 훌륭히 연주할수 있게 과학적으로 만들어졌다. 이 악기는 형태와 모양에서, 악기의 성능과 음계에서, 또 소리에서 흠잡을데 없으므로 전문적인 예술단체들과 민중들속에서 널리 리용되고있다.
음악과 관련하여 이북의 《로동신문》 2010년 8월 7일부에 노래소리 높은 곳에 대고조의 승리가 있다는 사설이 실린바가 있다.
사설에서는 혁명의 노래를 필승의 무기로 틀어쥐고 모든 부문, 모든 단위들에서 대고조의 진군나팔소리, 혁명의 노래소리를 높이 울리며 폭풍쳐 내달림으로써 강성대국에로 솟구쳐오르는 선군조선의 영웅적기상을 힘있게 떨쳐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노래소리가 높다는것은 사기가 충천하다는것이며 혁명과 건설이 무한대한 활력을 가지고 줄기차게 전진한다는것이다.》라고 하면서 노래는 락천적인 생활기풍을 확립하고 최후의 승리를 가져오는 보검이라고 강조하였다.
이어서 사설은 《오늘 강성대국건설의 승리를 위한 총공격전이 힘있게 벌어지고있는 우리 조국은 노래로 흥하고 혁명의 노래와 함께 비약하고있다. <번개치라 희천속도로>, <주체철 제일이야>, <간석지에 새겨가는 청춘의 마음>을 비롯한 신심과 랑만에 넘친 노래들과 더불어 이 땅우에 세상을 들었다놓는 위대한 기적들이 련이어 창조되고있다. 강성대국선포의 승전고가 터져오를 력사의 날이 다가오는 오늘처럼 혁명의 노래소리로 온 나라가 들썩하고 천만군민이 기세충천하여 내달린 때는 일찌기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북의 음악예술인들은 민족음악과 민족악기에 대한 개발사업을 꾸준하게 진행하여왔다. 이북은 역시 음악예술의 나라로 칭송받을만 하다. 이북동포들에게 있어 음악은 생활이고 승리의 신심이며 무한한 희망을 안겨주는 찬란한 해빛이다.
가야금병창
항일혁명시기부터 김일성주석께서 민중들에게 문화적생활의 실질적인 혜택을 돌려주고 질높은 문명적삶을 누리게 하려고 노력을 한 기록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와 《김일성선집》에 나와있다.
항일유격대안에는 비록 전문적인 예술인이 없었지만 엄혹했던 항일투쟁속에서도 틈틈이 연예활동을 벌려온것은 승리를 락관적으로 내다볼수 있는 위인적혜안과 대중들의 문화수준을 한층더 올려놓기를 원하는 이민위천의 애민정신이 있었기때문이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김일성주석의 예술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시대의 요구와 민중들의 지향 그리고 음악예술발전의 현실적인 조건들을 명철하게 분석하고 그에 기초하여 가야금병창형식에서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우리 식의 새로운 음악을 창조할데 대한 독창적인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고 창작가들에게 직접 과업을 주고 그 실현을 위한 실질적인 지도를 하여주시였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1968년 10월 25일 창작가들이 모인 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음악창작에 대한 담화를 하시였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적문예사상에 따라 음악창작방향에 대하여 말해주려고 창작가들을 불렀다고, 최근 음악창작사업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아직도 고치지 않으면 안될 결함들이 적지 않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지적하시였다.
《노래가 진정으로 혁명을 위하여,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게 하자면 위대한 수령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노래를 민족적정서가 흐르면서도 현대적미감에 맞게 통속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다시말하여 우리의 노래를 왁왁 고는 서양음악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서정적인 우리 나라의 민요를 바탕으로 하여 로동당시대에 사는 우리 인민들의 생활감정에 맞게 유순하면서도 아름답고 우아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노래반주와 간주편곡에 대해서도 기본노래가 살도록 안받침해주고 노래에서 주려는 형상적의도를 보강해주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서 김정일국방위원장은 그런데 지금 많은 경우에 노래반주를 편곡할 때 쓸데 없는 잔재간을 부리기때문에 노래를 감상하는데 방해를 줄뿐아니라 감정을 분식시키고있다고 하면서 반주와 노래의 관계를 명확히 설명해주시였다. 또한 노래를 들을 때 반주가 부담으로 되게 하여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반주는 노래를 아래우에서 부드럽게 잘 감싸주어야 하며 간주에 가서 관현악은 기악으로서의 음량과 특성을 살리도록 하여야 한다고, 간주에서는 노래의 감정을 다른데로 끌고가지 말고 노래에서 준 그 감정을 더 고조시켰다가 다시 다음절 노래로 들어갈수 있도록 잘 유도해주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지적하시였다.
그후 가야금병창에서 새로운 혁신이 일어났다.
알다싶이 가야금병창은 가야금을 타는 연주실력도 높아야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목소리도 아주 좋아야 한다. 노래를 부르며 자유자재로 가야금을 타는 연주기량이 복합적으로 겸비되여있어야 병창의 감흥을 그대로 청중에게 전달할수 있게 된다. 한가지를 더 첨부한다면 가야금연주자는 인물이 단정하여 우리 민족고유의 맛과 멋을 능란하게 부릴줄 알아야 가야금병창에서의 맛을 돋굴수 있다.
가야금병창을 하는것은 각 지방마다 조금씩 다른데 창의 노래색갈에서 그 지방의 특색을 엿볼수 있다. 대개 종래의 가야금병창은 전통적인 12현가야금으로 기방(妓房) 등 좁은 공간에서 공연을 하였는데 이러한 악기는 봉건적인 전통을 바탕으로 해서 단정하고 고고한 맛은 많으나 대중적이지 못하고 그 다양성과 현대적미감에서 뒤떨어지는것이 문제로 지적되고있다.
특히 남도지방의 병창에서 내는 창법이나 소리색갈은 판소리에 가깝고 호소력도 있으나 텁텁한 막걸리같은 발성으로 하여 늙은이들의 미감에는 맞을지 모르나 젊은 층의 호응도가 떨어지는것이 단점으로 지적되고있다.
이런 발성법상의 문제는 신기하게도 경기지방이나 평안도지방으로 올라갈수록 맑고 청아한 소리로 바꿔지는 현상을 보게 된다.
가야금병창은 새 가야금으로 더욱 다양해졌다.
이북에서는 민족음악의 우수한 양식의 하나인 가야금병창음악을 1960년대에 한층더 발전시키고 풍부화하였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김일성주석이 기틀을 잡아놓은 문학예술부문 업적에 기초하여 악기개량사업과 새로운 음악창작사업에서 주체적이고 혁명적인 음악예술의 전면적인 개화기를 열어놓으시였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민족음악을 현대적미감에 맞게 계승발전시키는 사업을 전면적으로 벌려나가시였다.
하여 이북에서는 민족악기의 대대적인 개량사업과 개량된 새 악기에 맞는 주법과 연주, 표현방법 등을 다양하게 연구하고 발전시켰으며 수많은 새로운 민족음악이 창작되였다.
1960년대에 들어와 급속히 발전되고 보급되여온 가야금병창은 전국의 전문예술단체와 예술소조들의 활동에서도 필수적종목으로 부상하게 되였으며 대중화, 일반화되여 가야금병창에 대한 사회적요구와 인기는 말할수 없이 높아져갔다.
《가야금아 울려라》, 《오곡이 여물 때》, 《살기 좋은 내 고향》 등이 대표적인 가야금병창곡들이다.
이런 새로운 곡이 나오자마자 근로대중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을수 있었던것은 무엇보다 전통적인 민요형식에 바탕을 두면서도 현대적인 표현형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기때문이다. 그리고 전통적인 단순선률에서 탈피하여 성부편곡이 활성화되여 화성을 도입하고 3부, 4부의 합창효과를 내는 성부편곡이 적극화되였으며 반주부의 편곡도 가야금고유의 표현적기능을 최대한으로 살려서 다채로운 표현방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북에서는 병창에서 다성기법을 도입하였다.
지난 시기 기본선률에만 의존하던 병창형식을 타파하고 장단리듬, 분산화음, 대위선률 등 여러가지 다양한 형상수단을 적용하여 곡의 내용을 보다 다양하고 풍부하게 표현하여 병창으로서의 예술적수준이 훨씬 더 높아지게 되였다.
특히 1960년대에는 가야금병창곡을 창작하는데 있어서 사회주의적현실주제와 혁명적예술의 주제들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사용함으로써 가야금병창의 형상적범위가 말할수 없이 넓어졌고 창작기법도 무척 다양해졌다.
《오곡이 여물 때》, 《살기 좋은 내 고향》 등의 가야금병창곡들은 활기있고 락천적인 류의 작품들이며 《귀틀집 실물레》, 《당의 품에 꽃피는 내 고향》은 서정적인 작품들이다. 《귀틀집 실물레》는 항일혁명전통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서 전통적민요조에 기초하여 물레질하는 가벼운 률동과 경쾌한 리듬, 섬세하고 부드러운 굴림소리(장식음)를 재치있게 적용하여 고유한 민족적색채를 잘 부각시키고 병창안삼블의 특성에 맞게 다성수법들을 도입하고 독창, 2중창, 제창 등을 적절히 배합하여 작품의 내용을 음악적형상으로 보다 풍부하게 하였다.
가야금병창곡 《우리의 강반석어머니》는 나라의 해방과 근로대중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바치신 강반석녀사의 생애를 서정서사시적서술형식으로 민족적선률에 담아 깊이있게 형상하였으며 《직동령의 승리방아》는 조국해방전쟁(6.25전쟁)시기 전선원호사업에 모두 떨쳐나섰던 인민들의 투쟁모습과 군민일치의 전통적미풍을 형상한것이다.
이처럼 이북은 가야금음악에서도 민중이 좋아하고 민중에게 알려주고싶은 노래라고 생각되면 민요에만 국한하지 않고 대중들에게 새롭게, 과감하게 접근해나갔다.
가야금병창도 민중의 요구와 시대적미감에 맞게 보다 새롭게 발전시키였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저서 《음악예술론》에서 작곡과 편곡을 론하면서 음악에서 기본은 선률이라고, 선률은 아름답고 유순하여야 한다고 지적하시였다. 또한 편곡은 창작이다라고 지적하면서 반주편곡의 중요성을 강조하시였다.
1960년대부터 가야금병창은 천리마시대의 민중들의 요구에 맞게 주체의 현대적표현기법들을 부단히 연구하고 실험해가면서 연주기법상의 새로운 발전의 길을 개척하게 되였으며 1970년대에는 민족적특성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이루게 되여 가야금병창의 새로운 력사를 열어놓았다.
민족악기(국악기)를 현대적으로 개량발전시키는 운동이 성과적으로 진행되여 가야금도 현대적으로 개량됨으로써 음역이 넓어지고 한손으로만 연주하고 다른 한손은 롱현만을 담당하던 종래의 기법에서 과감하게 탈피하여 두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연주기법이 보편화되였다. 이 시기부터 분산화음이 자연스럽게 도입되였고 창작형상이 이전에 비할바 없이 화려해졌고 내용에 있어서도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병창에서 창법도 종래의 틀에 박힌 성악적발성에서 벗어나 밝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자연스럽게 노래부르는 주체발성법을 적극 도입하고 체계를 확립하여 성악중심의 가야금병창을 노래의 기본선률을 잘 살리고 가야금을 단지 반주수준에 머무르지 않게 하고 그 표현방법을 높이 끌어올려 병창형상의 수준을 한층더 높은 단계로 올라서게 하였다.
가야금병창은 배합관현악편성으로 다채로워지게 되였다.
조선인민군협주단에서 1980년 새해에 음악무용종합공연에 처음으로 내놓은 《내 나라는 락원의 금수강산》은 새로운 형식의 가야금독병창곡이다. 가야금독병창형식은 독창과 가야금병창을 결합하고 거기에 소편성의 배합관현악반주가 함께 하는 연주형식이다.
우리 식의 독특한 가야금독병창작품들이 련이어 발표되여 민중들의 절찬을 받게 되였으며 근로대중들은 종래의 가야금병창창작형식에서 벗어나 배합관현악과 같이하여 다양한 모습으로 새롭게 창작된 작품들을 크게 환영하였으며 이에 대한 근로대중들의 호응도도 아주 높아졌다. 가야금병창음악은 무료하고 답답하다는 종래의 인식을 깨버리고 새로운 경지에 올라서게 되였으며 전체적인 다른 죽관악기나 소해금 등의 민족음악발전에도 커다란 견인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때부터 가야금독병창은 녀성독창가수의 매력있는 목소리에 병창가수들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탄력있는 가야금소리 그리고 맑고 처량한 여러가지 악기들의 소리와 잘 어우러져 부드럽고 우아한 민족적선률을 아름답게 형상함으로써 커다란 음악적효과를 가져오게 되였다.
가야금독병창에서는 악기를 연주하지 않는 독창가수가 연주하는 중심에 서서 자유롭게 노래를 부르고 배합관현악반주가 있음으로 하여 병창가수들도 가야금연주부담을 덜고 자유로울수 있으므로 노래의 형상능력을 충분히 올릴수 있게 되였으며 독창가수가 기본선률을 끌고나가면 병창가수들은 가야금연주에만 몰두하여 높은 기량의 연주를 기대할수 있게 되였다.
그리고 독창가수가 가야금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다가 병창가수들과 같이 부르거나 서로 주고받는 등 다양한 형식의 다채로운 가야금병창음악을 기대할수 있게 되였다.
실로 가야금독병창은 가야금병창의 본래의 색갈을 잘 살리면서도 화려한 녀성성음과 가야금과 배합관현악이 잘 조화된 립체적인 풍만한 음향으로 민족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독특한 음악형상을 펼쳐보이는 우리 식의 민족음악연주형식이다.
오늘 이북에서는 《내 나라는 락원의 금수강산》, 《수령님 사랑넘쳐 집집마다 행복일세》, 《장자산의 푸른 잣나무》, 《만풍년 싣고 달리는 기쁨》 등의 훌륭한 가야금독병창작품들이 창작되여 근로대중들의 사랑과 절찬을 받고있으며 주체음악예술의 꽃밭을 아름답게 빛내이면서 온 세상에 예술강국의 자랑을 떨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