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 론
력사속에서 찾아낸 너와 나
-조정래의 장편대하소설 《아리랑》(1권-12권)에 대하여-
김 성 희
장편대하소설 《아리랑》을 읽었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자기 민족을 더 잘 알고 민족의 어제와 오늘, 나아가서 래일을 더 잘 알게 되였을것이다.
한 개인에게 있어서도 자기를 안다는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 자리를 찾는 과정은 한생을 두고 계속된다. 최후의 순간까지도 회고와 추억의 갈피를 헤집으며 자기 한생을 재검토하고 교훈을 찾아 후대들에게 넘겨주는것이 바로 인간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진보한다.
민족도 마찬가지이다.
소설 《아리랑》에 그려진 수난기 곡절많은 민족사의 화폭은 우리에게 있어서 새로운것이 아니다.
소학교시절부터 수많은 력사책과 소설책속에서, 영화의 은막과 연극무대, TV화면에서 우리는 그 시대를 보았다. 그리하여 그 시대를 다 안다고 생각하여왔다.
그러나 소설 《아리랑》을 읽어봄으로써 우리는 다시금 더욱 새롭게 그 시대를 볼수 있게 되였다.
시점이 달라지면 같은 대상이 그렇게도 달리 보일수도 있는것인가.
작가는 주의주장을 넘어 《순수》한 민족의 시점에서 력사를 보고 그리고저 하였다.
《… 조국은 영원히 민족의것이지 무슨무슨 주의자들의 소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지난날 식민지력사속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피흘린 모든 사람들의 공은 공정하게 평가되고 공평하게 대접되여 민족통일이 성취해낸 통일조국앞에 겸손하게 바쳐지는것으로 족하다. 나는 이런 결론을 앞에 두고 소설 〈아리랑〉을 쓰기 시작했다.》(1부 《작가의 말》중에서)
그의 이 의도가 어느 정도 실현되였는지, 과연 작가가 무슨무슨 주의자들의 온갖 편견에서 벗어나 《조국은 영원히 민족의것》이라는 자기의 립장을 어느만큼 지켜냈는지, 그리하여 외곡된 력사를 바로 인식시키려는 그의 노력이 얼마나 관철되였는지 그것을 다 가늠하고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6. 15의 정신에 비추어 소설에서 찾아보게 되는 가장 중요한 문제점을 골라 몇마디 하려고 한다.
1) 과거와의 대화
장편대하소설 《아리랑》의 주제는 일제식민지통치시기 민족의 수난과 투쟁의 력사이다.
작가는 해방후 《대통령》으로부터 사회의 말단구조에 이르기까지 남조선사회의 전반을 장악하고있던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에 의하여 의식적으로 외곡되고 암장되여있던 식민지시대현실의 진실한 재현을 통하여 민족통일위업의 필수적요인으로 될 력사의 교훈을 이끌어내고저 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받아안은 가장 큰 감명은 우선 일제식민지통치가 빚어낸 그 몸서리치는 전고미문의 민족적수난의 요인을 간악한 일제의 침략과 함께 자신의 내부에서도 찾아보려는 그 랭철한 력사인식이다.
원인은 객관에서만이 아니라 주관에서도 똑바로 찾을 때 진보와 변혁의 밑천으로 될수 있다.
일제가 쳐들어왔기때문에 우리가 먹히웠다, 일제가 잔인했기때문에 우리가 곤욕을 겪었다. … 이렇게만 생각하는것은 일면적인것이다.
같은 출발점에서도 우리가 무엇때문에 강도 일제의 식민지노예의 멍에를 뒤집어쓰지 않으면 안되였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소설 《아리랑》은 일제의 침략앞에서 우리가 약했던것, 어리석었던것이 무엇인가를 명료히 파헤쳐 보여주었다.
작품에서는 무한히 허심한 자세로 우리 민족이 일제에게 당한 수난과 치욕의 력사를 사실그대로 재현하면서 한편으로는 일제의 교활성과 잔인성, 야만성을 낱낱이 폭로함과 동시에 다른편으로는 그앞에서 어쩔수없이 수난을 당하지 않을수 없었던 민족적비극의 요인을 깊이있게 밝혀내고있다.
한마디로 말하여 그것은 외세의 침략앞에서 민족이 단합된 힘으로 맞서 싸우지 못하고 사분오렬되여버렸다는것이다.
작품에서는 조국의 분렬이 1945년 8월이 아니라 이미 19세기말-20세기초에 일제에 의해 민족의 자주권이 롱락당하는 그때에 시작된것으로 그리였다.
분렬의 시작은 근대화의 밀물을 타고 기여드는 일제침략자들앞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분연히 일떠선 애국세력과 이때를 오히려 개인의 영달과 치부를 위한 절호의 기회로 삼은 매국세력과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소설에서는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위기에 처한 준엄한 시각에 손에 무장을 들고 독립운동에 떨쳐나선 송수익, 공허, 지삼출, 손판석, 배두성, 방대근, 리광민 등의 매력적인 형상과 함께 제 한몸의 영달과 치부를 위하여 침략자들에게 아부굴종하고 그의 하수인이 되여 동족살륙과 억압에 미쳐날뛴 백종두, 백남일부자, 장덕풍, 장칠문부자, 정재규, 정상규형제, 리동만, 양치성 등의 추악한 형상을 생동하게 창조하였다.
애국과 매국-두 세력의 근본차이는 어디에 있었고 그 숙명적인 분렬의 본질은 무엇이였던가.
피로 마련된 군자금을 차고 간난신고하여 만주로 들어간 공허를 만난 자리에서 대종교도 한법린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한몸한몸이 다 조선입니다.》
공허는 그 말의 뜻을 이렇게 풀이하여 되새겼다.
우리 한사람한사람은 다 조선을 되찾는 일에 나서야 합니다.
우리 한사람한사람이 모여 조선이 됩니다.
우리 한몸한몸이 조선의 앞날을 대변하고있습니다.
우리 한몸한몸을 지켜 조선회복에 바칩시다. …
여기에는 참으로 깊은 뜻이 응축되여있다.
자기 한몸속에 조선이 있으면 애국인것이고 오직 자기 한몸뿐이면 매국인것이다.
애국과 매국을 가르는데서는 계급과 신분, 신앙과 주의가 관계없다.
작품에서는 정당하게도 민족수난의 엄혹한 시기에 애국과 매국의 분렬은 량반과 상민, 유산자와 무산자, 유신론자와 무신론자,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등의 기준이 1차적이 아니였음을 보여주었다.
그 어느 계급, 계층, 그 어느 주의자들속에서도 애국과 매국의 분렬은 일어났다.
지어 한가정내에서도 극단적인 두 진영의 대립과 모순이 얽히게 되였다.
량반, 유산자, 종교인들속에서도 조선독립을 위한 투쟁에 생명과 재산을 다 바쳐나선 열혈의 애국자들이 있었고 상민, 무산자들속에서도 외세의 앞잡이가 되여 동족의 피땀으로 제 배를 불리운 매국노들이 있었다.
작품에서는 그 어떤 편견도 없이 민족의 운명과 개인의 운명을 따로 갈라보지 않는 순결한 민족적량심의 체현자들을 애국자로 열렬히 찬양하면서 자기 개인, 자기 계급, 자기 신앙, 자기 주의를 위하여 민족과 겨레의 운명을 외세의 발톱아래 집어던진 더러운 리기적인간들을 매국노로 준렬히 단죄하였다.
민족분렬은 나아가서 애국자로 자처하며 독립운동에 나선 사람들속에서도 일어났다.
작품에서는 20세기초부터 시작하여 근 반세기동안 이 땅은 물론 멀리 만주와 연해주, 하와이 등지에까지 세차게 파급되였던 독립운동의 전 과정을 폭넓게 일반화하면서 일제를 반대하는 민족해방투쟁이 좌절과 좌절의 악순환속에 곡절을 겪지 않으면 안되였던 근본요인의 하나를 이른바 운동자들의 파벌싸움에서 찾고있다.
파쟁의 원인도 가지각색이다.
주의가 달라 갈라지고 리해타산으로 흩어지고 지어 단순한 승벽과 자존심때문에 헤여진다.
민족을 이룬 구성원들이 각계각층을 이루고있는것만큼 사상과 신앙, 개성에 있어서 다양한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외세에 의해 민족의 자주권이 유린당하는 엄혹한 시기에 조금이라도 민족적량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모든 차이와 리관계를 뒤로 미루고 오직 조국의 독립이라는 그 하나의 목적실현에 모든것을 복종시켜야 할것이였다.
그러나 조선의 독립운동은 그 첫걸음부터 운동자들의 파쟁에 휘말려들었다.
의병운동만 보아도 개명한 공화주의자들과 고루한 복벽주의자들사이에 의견상이가 생겼고 그뒤의 독립군운동에서는 만주나 연해주, 상해, 하와이 등 조국을 멀리 떠난 해외에 가서까지 각당, 각파의 각축전이 있었다.
소설에서 가장 인상깊게 그려진 하와이에서의 박용만파와 리승만파사이의 추악한 파벌싸움은 그 전형적인 실례라고 할수 있다.
리승만은 박용만의 무력급진론을 반대하면서 《조선의 독립은 그런 가망없는짓으로 되는것이 아니라 그보다 먼저 무식한 동포들을 교육시켜 독립할 준비를 해나가는 동시에 대국인 미국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주장을 세우면서 사사건건이 맞서나가던 나머지 지어는 국민회 총회장 김종학을 국민회재정부정행위에 걸어 미국법정에 상소하여 쇠고랑을 채우는 망동까지 부린다.
후에 무죄석방된 김종학은 너무도 분하여 자결하면서 《리승만은 한인동포사회를 리간시키고 분렬시키는 민족의 야비한 역적》이라는 유서까지 남기였다.
그러거나말거나 이런 추악한 야심가를 림시《대통령》으로 내세운 상해림정의 실태는 구태여 더 론할것이 못된다고 해야 할것이다.
주의로 인한 분렬에 령도권(주도권)쟁탈전으로 인한 분렬이 겹치여 조선의 독립운동대오는 걷잡을수 없는 분렬의 와류에 말려졌다.
그것은 마침내 이국땅에서 동족끼리 피의 살륙전을 벌린 흑하사변이라는 참상을 빚어냈다.
작품에서는 초기사회주의운동의 실태도 구체적으로 파고들어 주로 리경욱, 정도규 같은 자산계급출신의 일본류학생들에 의해 개척된 국내에서의 초기사회주의운동이 얼마나 근시안적인 파쟁에 휩싸였다가 조선공산당의 해산이라는 치욕을 남기게 되였는가를 생동히 보여주었다.
파쟁과 분렬은 망국의 길이다.
전민족의 단결이 없이는 강대한 일제와의 싸움에서 이길수 없다는것을 과연 그 사람들이 모르고있었겠는가.
이것은 너무도 단순하고 명백한 진리가 아니겠는가.
대중은 독립을 위한 일이라면 희생을 무릅쓰고 따랐다.
문제는 그 대중을 이끈다는 《유식한》 운동자들에게 있었다.
그들의 운동에는 조선의 독립과 함께 다른 또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복벽주의자들에게는 대한제국을 복귀하여 저들의 특권을 되살리려는 꿈이 있었고 《민족자결론》자들이나 행세식사회주의자들에게는 독립된 조선에서 권력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야심이 있었다. 작품에 그려진것처럼 3. 1봉기때 조선과 만주, 연해주에서 제가끔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운동가들이 서둘러 제가끔의 림시정부를 만들어 발표함으로써 단번에 3개의 림시정부가 출현하는 웃지 못할 희극이 연출된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였다.
선언서나 내고 모두 떨쳐나 만세나 부른다고 악독한 일제가 순순히 물러나고 조선이 독립될것이라고 믿은것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아직도 조선독립운동의 앞길이 묘연한 시기에 다투어 정부를 내오고 자리다툼에 열을 올린것은 더욱 개탄할 일이 아닐수 없다.
남조선문단에서 소설 《아리랑》처럼 일제강점하의 독립운동의 실태를 폭넓게 반영하면서 8. 15해방을 거쳐 20세기를 넘어 새 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여온 그 지긋지긋한 민족분렬의 력사를 그렇게 객관적으로 예리하게, 깊이있게 파헤친 작품은 없었다.
우리가 왜 아직도 통일되지 못하고있는가.
우리가 왜 아직도 분렬의 력사를 답습하고있는가…
물음도 대답도 작품속에 있다.
* *
장편대하소설 《아리랑》이 우리에게 보여준 가장 깊은 감명은 또한 그 가혹한 일제의 만행과 야수적인 탄압속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 민족의 넋을 힘있게 보여주면서 바로 그것으로 하여 민족은 영원하다는 긍지로운 신념의 목소리를 높인것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자주성은 민족의 존재와 번영을 담보하는 민족의 생명입니다.》
민족이 지닌 생명은 무엇인가.
민족이 한민족으로서 존재하고 발전할수 있는 그 줄기찬 생명력의 원천은 무엇인가.
민족사의 주체를 이루는 인민대중의 본성적인 자주적지향에 있다.
우리가 민족자주정신이라고 부르는 그 민족의 넋, 민족혼은 외세의 침략에 대비해서는 애국의 방패가 되고 창끝이 되며 평화로운 나날에는 내 나라, 내 조국을 빛내이는 창조의 노력이 되고 열정이 되여 영생하는 민족의 숨결과 맥박을 이루는것이다.
그것은 불속에서도 타지 않고 밟히여도 꺾이지 않으며 치욕의 수난속에서도 숨결을 간직한다.
소설 《아리랑》은 먼저 이 민족의 넋, 민족의 기개를 깡그리 짓밟아버리기 위하여 일제침략자들이 벌린 온갖 야수적만행과 교활한 책동을 력사적사실에 기초하여 까밝히면서 우리 겨레가 겪은 수난과 고통이 얼마나 참혹한것이였는가를 생생히 보여주고있다.
해방후 공화국북반부에서는 반제계급교양을 중시하면서 일제가 조선인민에게 저지른 악독한 만행과 죄악을 폭로규탄하고 반일민족의식으로 대중을 무장시키기 위한 문학작품들이 체계적으로 창작보급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항일혁명투쟁시기에 친필하신 불후의 고전적명작 《피바다》, 《한 자위단원의 운명》을 비롯한 항일혁명문학과 계급교양주제의 수많은 작품들도 여기에 바쳐졌다.
그러나 남조선에서는 괴이하게도 일제가 저지른 그 모든 만행과 동포들이 겪은 그 모든 고통이 고의적으로 외면시되고 지어는 미화되였다.
그것은 작가가 고백한것처럼 《해방과 함께 우리 사회 모든 부문을 장악했던 친일파들의 조직적인 음모로 일제시대는 망각이 최선이고 일제시대이야기를 꺼내는것은 촌스럽고 모자라는것으로 매도되는 최면을 당했던것》이다.
이제 우리는 소설 《아리랑》에서 그 최면을 극복한 남조선문단의 진실한 목소리를 듣는다.
조선의 넋, 배달민족의 혼을 말살하려는 일제의 만행은 그처럼 악랄하고 그처럼 교활하고 그처럼 야만적이였던것인가.
이렇게 남조선인민대중은 새롭게 눈을 뜬다.
최면의 안개가 걷히면서 바라본 력사의 현실은 참으로 엄혹하다.
돈에 팔리고 권세에 팔린 무리들에게서 민족의 혼을 빼버리는것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호남지방의 1등곡창지대인 군산지역을 타고앉아 불이농장을 개척한 요시다가 리동만을 비롯한 졸개들이 제놈의 생일을 축하한답시고 금돼지를 장만한다, 처녀기생을 마련한다 하면서 벌려놓은 비굴한 추태를 흐뭇하게 굽어보면서 《하! 똥강아지같은 놈들, 네놈들 같은것들이 있으니까 우리가 조선땅을 맘껏 짓밟을수 있는거다.》라고 자부하는것은 인상적이다.
민족의 혼은 애당초 리욕에 눈이 어두워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에게는 있지도 않았으며 조선의 독립보다도 령도권을 위해 운동에 나선 파쟁군들에게도 그것은 하나의 위선적인 치장물이였을뿐이였다.
민족의 혼을 참답게 간직하고있은것은 우선 소박하고 진실한 근로인민이였고 다음은 남먼저 정의와 진리에 눈뜬 선각자들이였다. 그것은 요시다, 하시모또, 쓰지무라, 하야가와 등이 백종두, 장칠문, 정상규, 양치성 등의 정상배들에게 써먹은 황금과 권세의 최면술로는 정복할수 없는 억센 력량이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칼과 대포를 휘둘러 공포의 사슬로써 이들을 얽어매려고 했던것이다.
작품에서는 조선에 발을 들여놓은 첫 순간부터 일제가 벌려놓은 귀축같은 만행을 낱낱이 폭로하면서 특히 의병《토벌》과 3. 1인민봉기진압, 만주의 독립운동거점지역에 대한 경신년《대토벌》의 진상을 파헤치는데 형상의 초점을 모으고있다.
일제가 얼마나 야만적이였는가 하는것은 일제《토벌대》가 양치성의 안내를 받으면서 연길현일대에서 벌려놓는 무차별적인 대학살장면 한두개만 보아도 잘 알수 있다.
연길현 의란구에 가서는 온 마을사람들을 모두 끌어내여 젊은 녀자와 처녀들을 골라내고는 100% 총살하였으며 골라낸 그 녀자들은 륜간한 후 역시 남김없이 죽여버리고 집과 함께 불질러버리였다.
연길현 와룡동에 가서는 독립군 련락책이던 교원을 붙잡아 나무에 비끄러맨 다음 《토벌대》놈들이 한명씩 나와 한점한점 산 사람의 가죽을 벗기고 눈알을 파내는 방법으로 죽이였으며 나머지 마을사람들도 총창과 군도로 란탕치고 란도질하여 학살하였다.
《학교, 시교당, 례배당 등을 포함하여 도합 3천여채이상 소각했고 그 협조자와 동조자들을 1만여명 처단하는 전과를 올렸다.》는 놈들의 작전총화보고가 보여주는것처럼 말그대로 일제의 총칼밑에 온 겨레는 피바다에 잠겼던것이다.
소설 《아리랑》은 일제가 조선인민에게 저지른 그 야수적만행의 진상을 폭로하고 외래침략자들에게 민족의 자주권을 빼앗기면 어떤 비극적운명에 처하게 되는가를 사실주의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남조선인민들속에 민족의 자주의식을 고취하고 그들을 반제의식으로 무장시키는데 이바지했다는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문학사적가치를 가진다.
그러나 소설 《아리랑》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일제의 그 어떤 만행으로써도 꺼버릴수 없었던 민족의 열렬한 항거정신과 굳센 기개를 생동하고 깊이있게 형상하는데 더 큰 힘을 돌리고있다.
소설 《아리랑》은 민족의 수난사에 대한 쓰라린 고발인 동시에 민족의 항쟁사에 대한 장엄한 찬가이다.
의병운동, 독립군운동과정을 통하여 볼수 있는 우리 인민들의 마음속에 심어져있던 애국의 불씨는 20세기초의 어둠과 눈물과 피의 바다속 그 어디에 간직되여있었는가.
그 불씨는 을사년의 《시일야방성대곡》이 울려퍼지는 속에 하나하나의 작은 불티로 흩어져 이 나라 백성들의 가슴속에 소중히 간직되여있었다.
그것은 일제가 토지조사의 명목으로 이 땅에 강탈의 말뚝을 박으려 할 때 곡괭이를 들고 맞받아나섰던 차서방과 오령감 같은 순박한 농부들의 웨침속에 있었고 《지도자》란 사람들의 파쟁과 무능력과 배신에 부대껴 억울한 시련과 슬픔을 맛보면서도 일편단심 독립을 위한 한길에 한목숨 던져나섰던 방대근, 리광민 같은 열혈청년들의 념원속에 있었다. 지어 그것은 기구한 운명의 곡절로 말미암아 헤아릴수 없는 치욕을 겪으면서 육체의 순결은 빼앗겨도 넋의 순결은 지키려 애쓰는 보름이며 수국이, 옥녀 같은 녀인들의 눈물속에도 있었다.
공허는 말한다.
《왜놈덜이 아무리 가시밭길 아니라 훨훨 타는 불길얼 맨글어도 조선얼 아조 죽이지넌 못허는구만이라. 시방 죽어있는 조선이야 껍데기조선이제 알갱이조선언 펄펄 살아있덜 않은감요. 조선사람덜이 두눈 똑 바라지게 뜨고 살아있응게 조선이야 죽은것이 아니제라.》
그렇다.
그 모진 세월의 풍파속에서도 자기들의 가슴속에 민족의 넋, 민족혼을 불씨처럼 고스란히 간직하고 꺼져가는 독립운동의 홰불을 줄기차게 지펴온것은 역시 인민대중이였다.
작품에서는 옳바른 지도를 받지 못한 조건에서도 인민이 어떻게 굴함없이 그 순박성, 그 순결성, 그 강의성, 그 헌신성으로 고통스런 수난의 반세기를 힘찬 투쟁의 반세기로 엮어왔는가를 잘 보여주었다.
소설은 이런 인민대중이 있어 민족은 영원할수 있다는것을 웅변으로 확증하고있다.
일제식민지통치하에서 죽지 않고 살아있는 민족의 넋과 기개를 확증하는데서 소설 《아리랑》이 거둔 가장 큰 성과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조직령도하신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예술적반영이다.
현재까지 남조선사회에서나 문단에서 가장 외곡되고 말살당했던것이 바로 이 문제였던것만큼 공산주의자들이 벌린 항일혁명투쟁사에 대하여 어느 정도 평가하고 어느 정도 형상하는가 하는것은 이 작품창작에서 가장 심중한 문제점이였을것이다.
작품에서는 민족주의계렬의 독립운동만이 아니라 사회주의계렬의 독립운동도 반일은 애국이라는 견지에서 동일하게 평가하고 내세워야 한다는 창작적의도로부터 국내에서의 조선공산당계렬의 사회주의운동자들과 함께 1930년대 중국 동북지방에서의 항일빨찌산투쟁참가자들에 대하여서도 깊은 애착과 폭넓은 포옹력을 가지고 묘사하고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독립군운동이 쇠진해지는 가운데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 등 독립운동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한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런 조건에서 의렬단과 같은 민족주의단체에서 투쟁하고있던 방대근, 리광민을 비롯한 애국적청년들은 항일련군에 망라되여 공산주의자들과 손잡고 결사의 반일항전을 벌리는것이다.
양정우휘하의 부대에서 유능한 지휘관으로 성장한 방대근은 물론 일제와의 치렬한 격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하는 필녀, 수국 등 항일유격대원들의 형상은 가장 어려운 최악의 조건에서도 항일혁명의 붉은 기발을 끝까지 고수하여온 우리 인민의 항일혁명투쟁사에 대한 열정적인 찬가로 울린다.
특히 작가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를 이끄시고 보천보로 진격하여 강도 일제를 쳐부신 력사적인 보천보전투소식이 국내에서 일으킨 커다란 파문을 묘사하면서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러 흠모하는 우리 인민의 격동된 심정을 깊이있게 보여주고있다.
이 소식을 자기들의 잡지에 더욱 자세하게 게재할 론의를 하는 마당에서 윤일랑은 송중원에게 이렇게 말한다.
《잘만 다루면 인기절정일거야. 만주사변은 터지고, 사회주의세는 잠적하고, 모두가 의기소침해있는 판에 이런 통쾌한 쾌거가 어디 또 있겠나. 신문에서 호외를 발행할 정도면 이게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인지 알만 하지 않나. 친일반역자들 빼고 조선사람치고 이번 일에 통쾌해하지 않을 사람 없고 박수갈채 보내지 않을 사람 없단 말일세.》
보천보전투와 관련한 내용을 옹근 하나의 장으로 그려주고있는 이 대목만 놓고도 작가의 혁신적안목을 뚜렷이 엿볼수 있는것이다.
장편대하소설 《아리랑》에서는 반일항전에 일떠선 민족의 드높은 기상과 전투정신을 보여줌에 있어서도 역시 그 어떤 계급적, 당파적편견을 벗어나 말그대로 광범한 전민족적항쟁의 대서사시로 엮어나가고있다.
국내는 물론 만주와 연해주, 일본과 하와이 등 머나먼 해외에서 각이한 조건과 환경에 처해있으면서도, 각이한 주의주장에 휩쓸리면서도 애국적동포들은 일제를 치고 조선을 독립시키는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이면 모든 희생을 각오하고 떨쳐나서는것이다.
그리하여 작품에는 그 가혹한 수난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불타오른 민족혼의 체현자들의 군상이 참으로 아름답고 고결하고 숭엄한 화폭으로 묘사되여있다.
이리하여 작품은 민족수난의 근본요인을 심각하게 고찰하면서도 결코 비관에 빠지지 않고 드높은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안겨주는 락관의 문학으로 될수 있었다.
2) 미래의 설계
작품에서는 1부의 서문에서 《력사는 과거와의 대화만이 아니다. 미래의 설계가 또한 력사다.》라고 선언하였다.
그렇다면 장편대하소설 《아리랑》이 반영한 수난기의 민족사를 통해 우리가 설계하는 미래는 어떤것인가.
력사가 미래의 설계로 되자면 우선 과거와의 대화가 바로 진행되여야 할것이다.
이미 고찰한것처럼 소설 《아리랑》에서 작가가 고결한 민족적량심과 높은 지성적안목으로 력사를 객관적으로 진실하게 재현하기 위하여 애쓴것은 기본적으로 성공하였다.
아마도 남조선문단에서 해방전 민족해방운동사에 대한 비교적 진실한 예술적반영으로는 이 작품을 따를것이 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여 력사를 대하는 관점과 태도에서 우리는 아직도 현저한 차이를 가지고있다.
작품에서는 해방이후의 력사만이 아니라 식민지시대의 력사까지도 외곡하고 암장시킨 그 《제살 깎아내기인 그 어리석음》을 두고 《북과 남이 서로 다를것이 없었다.》고 단정하면서 자기의 객관적립장과 공정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진리는 언제나 절충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력사의 진리는 자기의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있다.
그것은 력사의 주체가 인민대중인것만큼 인민대중을 중심에 놓고 그들의 자주적지향과 요구, 그들의 지위와 역할을 기본으로 하여 력사를 대하는것이다.
과거를 두고는 그 수많은 갈래속에서 어느것이 진정한 인민대중의 력사인가를 가려보아야 하며 미래를 두고는 어느것이 참된 인민대중의 요구인가를 따져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소설 《아리랑》은 아직도 적지 않은 문제점을 가지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에게 남겨진 과제를 통일로 보고 북과 남의 견해상차이를 극복하려는 의도로부터 출발하여 식민지시대의 민족수난과 투쟁의 력사를 투시하고 옳은 교훈을 이끌어내고저 한 작가의 노력은 헛된것이 아니였다.
작품에서는 수난의 근본요인을 《민족부대》의 분렬에서 찾음으로써 계급과 주의, 신앙을 초월한 민족적단합과 통일을 호소하였으며 영원한 민족의 넋과 기개를 소박하고 평범한 인민대중의 순결한 애국적량심과 강의한 의지에서 찾음으로써 민족자주의 확고한 미래를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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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통한 미래의 설계에서 장편대하소설 《아리랑》이 제기한 중요한 사회적문제성은 민족의 자주성과 대미관념문제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자주성은 사람의 생명인 동시에 나라와 민족의 생명이다. 나라와 민족의 자주성은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근본담보이며 사람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선결조건이다.》
소설 《아리랑》이 과거의 력사를 마주한 대화를 통해 시종일관 호소한것은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존엄이며 여기서 모든 외세에 대한 의존심을 버릴데 대한 강렬한 주장이다.
우리의 주변나라들도 조선의 분렬에 책임이 있다. 우리를 침략하고 예속한 일제는 더 말할것도 없고 우리의 근대 및 현대민족사에 관여하였던 그밖의 대국들도 직접, 간접적으로 이에 련결되여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범을 똑바로 갈라보아야 한다.
38°선을 기안한것도 미국이며 5. 10단선을 조작한것도 미국이며 6. 25침략전쟁을 일으킨것도 미국이며 공화국북반부에서 모든 외국군대가 다 물러간 뒤에도 오늘까지 끈질기게 남녘땅에 남아있는것도 미국이다.
해방후 친일세력들이 남조선에서 살길을 얻고 국가권력으로부터 경제기반까지 다 틀어쥐고 날뛸수 있게 한것도 미국이며 친일파의 후예들이 뻐젓이 활개치게 한것도 미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남조선에서는 대미인식에서 근본적인 전환이 일어나지 않고있다.
일제를 민족의 원쑤로 보고 반일을 애국으로 보는데서는 많은 전진이 있었다.
문제는 미국을 이른바 《우방》으로, 《해방자》로 보면서 일제의 조선침략의 공범자로서 해방후에도 일제를 대신하여 이 땅에 기여든 조국분렬의 주범인 미국의 본질을 오늘까지도 바로보지 못하는 극히 몰지각한 력사인식에 있다.
여기서 장편대하소설 《아리랑》은 매우 중요한 문제점을 제기하고있다.
일제로부터 그토록 수난을 당했고 일제를 반대하여 그토록 피를 흘린 우리 민족이 어떻게 되여 저 남쪽땅에서 해방후 또다시 친일파, 민족반역자들로 하여금 《정권》을 장악하고 국토의 한가운데 영구분렬의 장벽을 높이 쌓게 하였는가 하는것이다.
작가는 소설을 끝낸 후기에서 이렇게 썼다.
《그런데 우리모두의 삶속에 체질화되여있는 무책임과 거짓말과 속임수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바로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횡행한 이 사회의 40년과 직결되여있다. 다시말하건대 친일파, 민족반역자, 그들이 누구인가? 기회주의자, 리기주의자, 파렴치한의 표본이 아닌가. 그들이 저 대통령에서부터 사회 구석구석의 기득권을 장악한채 40년을 지배한 이 땅에 어찌 정의가 있고 량심이 있을수 있었겠는가.》
작가자신이 인정한것처럼 해방후 남조선에서 친일파들이 모든 분야를 장악하고 《일제의 고등계형사질을 하며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했던자들이 경찰로 둔갑해서 똑같은 지하실에서 다시 독립운동가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고문》하는 그 어처구니없는 력사의 오유는 과연 어찌된 일이였던가.
작품에서는 해방후 남조선에 조작된 괴뢰정부의 《대통령》이였던 리승만의 해방전 경력의 일단을 그려주면서 수난기 민족사의 갈피속에 깃들어있는 미제의 침략적본성과 대미사대의식의 허무성, 해독성을 날카롭게 해부해보임으로써 조국분렬의 직접적인 책임문제를 바로 미국에 묻고저 하는 진취적인 자세를 보이고있다.
성스런 독립운동대렬에 끼여든 추악한 야심가인 리승만은 당시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론》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힌 나머지 국제무대에서 미국에 의거한 외교적활동으로 독립을 선사받겠다는 망상을 가지고 그밖의 일체의 독립운동을 다 반대해나섬으로써 사실상 조선독립에 손해만 끼쳤을뿐 아무것도 기여한것은 없다.
리승만은 독립운동대렬내에, 우리 동포사회에 숭미사대의식을 퍼뜨린 첫 조상이였다.
그런데 미국은 리승만이 빠리강화회의에 참가하려고 시도하였을 때 그에게 출국불허처분을 내렸다.
이에 분개한 사람들앞에서 리승만은 무슨 얼빠진 말을 하는가.
《미국을 의심하지 마시오. 미국은 우리 편이요. 윌슨대통령은 우리 독립의 은인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소. 우리가 미국을 믿지 않는건 우리의 손해지 미국의 손해가 아니요.》
이런자들은 미국에 《한국위임통치청원서》까지 내는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송병준을 비롯한 개같은 무리들이 일제에게 감히 민족의 이름을 도용하여 《합방청원서》를 낸것이 매국의 극치라면 리승만을 비롯한 얼빠진 무리들이 미제에게 《한국위임통치청원서》를 낸것은 그와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이런자들이 해방후 제놈의 독재권력을 위해 미국을 등에 업고 날뛰였기에 미제에 의해 나라가 분렬되고 일제통치의 41년보다 훨씬 더 길고긴 미제강점하의 신식민주의시대가 닥친것이였다.
권력의 야심도 없고 순결한 애국심을 간직한 백성만은 벌써 그 시기에 미제의 침략적본성을 꿰뚫어보았다.
작품에서는 1908년 쌘프런씨스코에서 애국적인 청년들인 장인환, 전명운이 일제의 조선강점을 협력하고있는 미국인 조선외교고문이던 스티븐스를 총격한 인상적인 사건을 묘사하면서 여기서 매국역적 리승만이가 보여준 치졸한 배신행위를 의분에 넘쳐 규탄하고있다.
동포들은 극히 어려운 처지에서도 장인환, 전명운구원후원회를 뭇고 수천US$의 후원금을 모아 변호사를 댔으며 그 통역으로 리승만을 초청하였다.
고급호텔에서 그 눈물어린 돈을 탕진하며 며칠 기다리던 리승만은 불쑥 돌아가고말았다.
재판이 언제 있을지도 모르고 또 론문을 써야 하니 시간도 없고 또 나는 예수교인이니까 하느님의 뜻에 거역되는 살인관계통역은 원하지 않고… 참으로 하나의 정치만화이다!
이것이 해방후 남조선에서 《대통령》의 벙거지를 썼던 리승만의 정체이다.
작가는 공정하게도 식민지시대에 일제와 공모한 미제의 정체를 사실그대로 그리면서 미제는 어느때에도 조선의 벗이 아니였음을 3. 1운동시기의 하나의 일화를 통해서도 잘 보여주고있다.
정주에서 미국선교사 윌리암스가 송중원, 리광민 등이 교회내에서 회의를 가지는것을 거절했을 때 그들은 의분에 넘쳐 부르짖었다.
《선교넌 조선사람들헌티 허고 비우넌 왜놈덜 비우 맞치고 요리조리 실속만 채우는 못된 놈덜이 아니고 머시여.》
력사의 진실은 이러하다.
장편대하소설 《아리랑》은 력사의 재현을 통하여, 과거의 교훈을 통하여 일본이든 미국이든 그 어느 나라이든 우리 민족의 자주권을 떠맡아 보호해주고 지켜줄 우방은 없었으며 우리 민족문제는 오직 우리 민족끼리 풀어야 한다는것을 힘있게 강조하고있다.
조국분렬의 시초에도 미국이 있었고 오늘 그 종점에도 미국이 있다.
그러므로 과거에 친일이 매국이였고 친일파가 민족반역자였던것처럼 오늘은 친미가 매국이고 친미파가 민족반역자인것이다.
반미에 애국이 있고 우리 민족끼리의 민족공조에 통일이 있다.
소설 《아리랑》은 이렇게 부르짖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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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통한 미래의 설계에서 장편대하소설 《아리랑》이 제기한 중요한 사회적문제성은 민족의 운명개척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리념상 대립을 해소하고 민족주체력량의 통일을 이룰데 대한 문제이다.
작가는 자기스스로 《사회주의자들의 독립운동을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과 동일선상에 올려놓는 일》을 창작적과제의 하나로 삼고 리념보다는 민족이 우선이라는 원칙에서 이 문제를 신중히 다루었다.
작품에서는 민족주의자 송수익의 고심어린 리념탐구과정을 주선에 놓고 민족주의리념의 형성과 변화발전과정을 섬세히 그리였다.
전통적인 량반유생출신인 송수익은 봉건체제의 몰락과 외세의 침략이라는 시대적환경에 직면하여 자기의 계급적신분과 유교적사상의식의 울타리를 대담하게 벗어나 백성들과 함께 의병투쟁에 떨쳐나섰다.
그가 일제를 내몰고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려는 민족주의운동에 헌신하는 과정은 독립운동대렬내에서의 복잡한 로선투쟁속에서 옳바른 리념, 단일한 목표를 찾기 위한 고통스런 탐구과정이였다.
량반출신의 다른 의병장들과는 달리 《복벽주의》를 박차고 만민평등의 개화사상을 거쳐 민권수립의 공화주의에로, 민족혼을 숭배하는 대종교에 몸담고있다가 독립운동단체들의 파쟁의 희비극을 체험하고 신채호의 무정부주의적폭력혁명론에로, 마침내 관동군 사령관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가 변절자의 밀고로 체포되여 감옥에서 옥사하기까지 그의 사상적편력은 폭넓게 이루어졌다.
여기서 가장 극적인 계기는 민족주의세력밑에 있던 젊은 세대들이 1917년 로씨야사회주의10월혁명의 승리에 고무되면서 사회주의, 공산주의사상에로 끌려가는것이였다.
민족주의냐 사회주의냐 하는 리념의 대결이 독립운동대오의 분렬을 초래할 위기를 몰아왔을 때 고민에 빠진 송수익에게 대종교 대종사 서일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배달겨레의 얼과 뜻을 해치지 않고 존중하는 립장에서 협조를 해준다면 공산주의라고 해서 꺼릴것이 없지 않을가 합니다.》
바로 이 말속에 사회주의에 대한 작가의 립장과 태도가 집약되여있다고 말할수 있다.
작가는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독립군운동이 쇠진해진 이후 방대근을 비롯하여 독립군계렬의 기본인물들이 동북항일련군에 망라되여 공산주의자들과 손잡고 피어린 혈전에 몸바쳐 나선것을 그려주면서 항일빨찌산의 영웅적투쟁을 어느 정도 응당하게 평가하였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지도하는 항일련군부대안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되며 점차 자신들도 모르게 공산주의자로 변하게 되는것이다. 여기서 필녀의 형상은 상징적 의의를 가지고있다. 그는 송수익을 평생 사모하면서 그의 민족주의적리념을 절대적으로 숭앙하여 따르는 녀성이다. 그러던 그가 항일빨찌산부대에서 총들고 싸우는 녀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기도 입대의지를 밝히면서 이렇게 말하는것이다.
《나도 대근이헌티 귀동냥얼 히서 알만치는 아는디 공산주의자가 어디 따로 있다오? 거그서 갤치는대로 믿고 따르면 공산주의자제. 못사는 사람덜 편들고, 못된 지주놈덜 쳐없애고, 녀자라고 하시 안허고, 독립투쟁에 나스는 공산주의가 나넌 좋소. 글게 나도 공산주의자 아니란법 없덜 않을게라?》
국내에서도 원산지구 지하조직원인 녀성투사 최현옥을 비롯하여 조선공산당해산후에 사회주의운동을 각이한 형식으로 유지해나가는 고서완, 리경욱, 정도규 등의 형상을 긍정적으로 그리였다.
어쨌든 조선의 독립과 민족의 자주권을 위하여 싸운 사람이라면 계급과 리념을 따지지 않고 공평하게 평가되고 대접되여야 한다는 립장에서 반일민족해방투쟁에서의 사회주의자들의 역할을 비교적 공정하게 그려주려고 노력한것은 장편대하소설 《아리랑》이 이룩한 중요한 사상예술적성과의 하나로 된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우리는 작가가 아직도 사회주의를 보는 시점에서 편견을 완전히 버리지 못할뿐아니라 중요하게는 우리 나라에서의 사회주의운동의 발전과정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빈구석을 보게 되는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작가는 방대근, 필녀, 수국을 비롯한 주요작중인물들이 항일련군에 들어가 싸우는 모습을 그리면서 그들모두를 주보중, 양정우와 같은 중국사람들의 부대에 소속시켜 그리였으며 조선혁명의 주력군이였던 조선인민혁명군대오에는 세우지 못하였다.
사실 그들이 살고 투쟁한 연길현은 거의 전적으로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직령도하신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거점이며 양정우, 주보중도 위대한 수령님과 밀접한 련계밑에 활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애착을 가진 주요인물들을 조선사람들의 부대가 아니라 굳이 중국사람들이 기본인 부대에 소속시켜 그린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또 그들이 부대안에서 등사본으로 된 《3. 1월간》잡지를 보는것을 그리였는데 그것을 재만조선인들속에 조직된 조국광복회기관지라고만 소개하고 위대한 수령님에 의해 조직된 조국광복회가 만주는 물론 기본은 국내 전반 지역에 광범한 지하조직망을 형성하고 일제격멸과 조국해방을 위한 최후결사전에 대비한 적극적인 투쟁을 벌린 사실은 언급하지 않고있다.
결과 작가는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북지방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은 사실상 좌절되고 조국의 해방은 쏘미련합군의 대일작전으로 불시에 이룩된것으로 묘사하였다.
작품에 그려진 사회주의자들은 그 전형성의 견지에서도 일련의 문제점이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를 절충시킨 고서완을 사회주의혁명가로 보지 않을뿐아니라 《위장전향》을 하고 지주로서 소작인을 부리며 사는 정도규도 역시 진정한 혁명가로 보지 않는다.
《위장전향》을 인정한다면 감옥에서, 만주광야에서 피흘린 수많은 애국렬사들에게 그이상 모욕이 없을것이다.
이리하여 주로 자산계급출신의 지식인들로 이루어졌던 초기의 행세식맑스주의자들과 질적으로 구별되는 참다운 사회주의혁명가의 전형은 창조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작가의 주장만은 명백하다.
민족의 리익을 존중하고 침해하지 않는다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손잡고 나갈수 있다는것이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결코 극단적인 대립속에 놓여있는 불상용적인 모순관계에 있는것이 아니다.
일찌기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애국주의를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최대공약수라고 하시였으며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자주권을 위한 투쟁에서 진정한 민족주의자들이 이룩한 고귀한 업적을 높이 평가하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불후의 고전적로작 《민족주의에 대한 옳바른 리해를 가질데 대하여》에서 민족주의는 자기 민족을 사랑하고 민족의 리익을 옹호하는 사상이며 진정한 민족주의는 곧 애국주의라는데 대하여 밝혀주시였다.
사회주의는 근로인민대중의 리익을 옹호하고 인민대중중심의 사회건설을 지향하는것으로 하여 참다운 애국, 애족, 애민의 사상으로 된다.
이 애국의 뉴대로 하여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하나로 손잡고 조국통일의 주체, 민족번영의 주체로 묶어질수 있으며 또 묶어져야 하는것이다.
장편대하소설 《아리랑》은 남조선독자들의 의식속에서 이 두 사상, 두 제도의 거리를 뛰여넘어 참다운 민족애를 가지고 단합과 통일을 호소하였다는 점에서 통일문학의 지평선에 솟아난 귀중한 성과작으로 된다.
통일의 곧은 진로는 어디에 있고 통일조국의 밝은 미래는 어디에 있는것인가.
우리는 작가가 주장한 조국은 영원히 민족의것이지 무슨무슨 주의자들의 소유가 아니라는 그 말속에서 그 해답의 골자를 찾는다.
우리 민족끼리의 리념아래 북과 남은 마침내 하나가 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