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별들의 노래
조 정 협
명배우들의 전당임을 자칭하는 서울의 한 극장에서 어느 유명악단의 연주회가 열리고있었다. 무대우에서는 《랩소디 인 불루》 같은 거쉰의 쟈즈음악이며 《저 바람속에》, 《텍사스의 황색장미》 등 미국음악의 란폭한 선률이 그칠줄 모르고 울려나왔다. 그것은 사막의 고요를 들부시며 발작적으로 몰아치는 광풍의 몸부림과도 같은것이였다.
광란하는 조명등빛밑에서 남녀가수들이 연거퍼 불러대는 노래의 선풍에 휘말린 관객들은 미처 그 의미를 알지 못한채 야성적인 열광에 도취되고있었다. 삶을 속박하는 일체의것, 속박된 자신마저 들부시는 쾌감을 맛보고저 하는 병든 열망이 외부와 격리된 두터운 벽속에서 마음껏 표출되고있었다. 관중은 마치 태풍에 몸부림치는 수풀같았다. 그 무엇도 이 광풍을 가라앉힐수 없을듯싶었다. 하지만 음악의 힘이란 참으로 신묘한것이다. 박자와 리듬의 변화로써 인간의 정서를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에로 너무도 쉽사리 이끌어가는것이 음악의 신비였다.
바로 이곳에서 그런 기적이 일어났다. 은은한 바이올린의 선률이 마치나 요람속의 아기를 달래이는 엄마의 손길인양 헛된 정열에 사로잡힌 가련한 넋들을 다독이며 울려퍼지기 시작하였다. 예술의 페허속을 방황하던 관객들은 어느 사이 아름다운 선률의 손길에 몸을 맡기며 황홀한 꿈의 세계속으로 이끌려가고있었다. 고요하고 부드러운 선률이였지만 그속에는 확실히 심혼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거역 못할힘이 있었다.
관중은 눈길을 쳐들고 무대우를 주시하였다. 적황색의 조명등빛속에 서서 세련된 솜씨로 활을 긋는 녀배우의 신비로운 모습은 관중의 넋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그의 흰 팔이 퍼덕이는 백조의 나래마냥 활을 그을적마다 줄과 줄사이에서 경쾌하고도 발랄한, 그런가 하면 진지한 사색이 비낀 선률이 흘러나오며 극장안의 공기를 가볍게 흔들고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감미로운 음의 세계에 빠져든 관중은 신선한 감동속에 비로소 예술의 진미를 맛보는것이였다. 새로 나타난 녀배우의 연주에 심취된 관중은 재청을 련발하였다. 녀배우는 이 무례한 요구를 자기의 독특한 선률처럼 겸손하고도 친절하게 받아들이였다. 그가 울리는 한음한음은 그대로 서정이 풍부한 언어들이였다.
멀리로 간 애인을 기다리는 처녀의 심정을 절절하게 표현한 쏘나타곡이 울릴 때 감각이 예민한 몇몇 관객은 문득 녀배우의 선률이 음악을 초월하고있다는것을 깨달았다. 음은 활줄밑에서 흘러나오는것이 아니라 녀배우의 상처입은 가슴속에서 울려나오는 신음소리였던것이다.
이 순간 그 녀자의 흐려진 망막속에 어려오는것이 있었다.
노기띤 사나이의 눈동자, 결별을 선언하듯 사라져가던 그 사나이…
녀배우는 입술을 감쳐물며 고개를 건뜻 쳐들었다. 활을 든 손이 맹렬히 오르내리였다. 사랑의 환희로 가득찬 종결부를 그는 쓰디쓴 아픔으로 연주하고있었다.
선률이 들꽃 만발한 언덕우에서 해돋이를 맞이하는 련인들의 환희론 감정을 터뜨리는 순간 요란한 박수와 환성이 터져올랐다. 사진기들의 조명빛이 번쩍이고 꽃을 든 사람들이 무대를 향해 달려오르고있었다.
그런데 이때 관객들의 눈앞에 뜻밖의 광경이 펼쳐졌다.
녀배우가 별안간 무대를 뛰쳐나갔던것이다.
허공을 날아 떨어져내린 한방울의 눈물만이 극장안에 떠도는 선률의 잔향속에서 바르르 떨고있었다.
그는 문을 왈칵 열어젖히며 정신없이 달리였다. 이윽고 뒤에서는 방음장치를 한 묵직한 문이 닫기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멍멍하게 울리던 온갖 소음은 순간 벽속에 갇혀버리였다.
연분홍빛의 화려한 구두발밑에서 울리는 불안한 박자소리가 깊은 겨울밤처럼 고요한 복도에 공명을 일으키고있었다. 한동안 정처없이 발길을 옮기는데 앞쪽의 문들이 왈칵 열리며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동작이 민첩한 한 사나이가 어느새 사진기를 들이대였다.
《첫 공연으로 대성을 거둔 신인연주가의 심정을 듣고싶습니다.》
그 사나이는 예상밖의 저항에 부딪쳤다. 녀인은 손을 쳐들어 사진기의 렌즈를 가리우며 소리쳤다.
《다가서지 말아요. 그리고 사진을 찍지 말아줘요.》
당혹감과 의혹이 뒤엉키던 길쑴한 얼굴, 이윽고 뒤로 엉기적거리며 물러서던 그 사나이의 측은한 모양은 녀배우의 기억속에 오래 남아있었다.
그의 행동은 실로 파격적인것이 아닐수 없었다. 배우에게 있어서 인기란 생명과도 같은것이다. 《스타》가 되기 위해서는 물론 생존을 위해서라도 인기를 얻어야 했다.
영미라는 이 녀배우도 그 리치를 모를리 없었다. 하지만 어인 일인지 지금 그의 눈에는 그 무엇인가에 대한 야속함이 가득 어리고있었다.
이때 큰 키에 어울리지 않게 기형적으로 목이 밭은 한 사나이가 급히 다가오며 그의 손을 잡아이끌었다. 영미는 그 사나이를 따라 명인들의 초상화들이 걸려있는 어느 한 사무실로 들어갔다. 온갖 어리석음을 나무라는듯 한 하이든의 초상, 격렬한 감정에 휩싸인 베토벤과 불안에 잠긴 번슈타인의 초상들이 잡다한 기물들로 조잡하게 장식된 방안을 굽어보고있었다.
《오, 우리의 별. 축하하오. 우리 악단은 당신으로 하여 더 유명해지게 되였소. 아, 그 아까운 재능을 파묻고있다니. 하지만 괜찮아. 년한이 스타를 만드는건 아니니까. 이제 당신의 이름을 온 도시가 알게 될거요. 얼마나 좋소? 음악가들이란 이런 멋에 사는거지.》
사나이는 희고 길쭉한 손가락으로 이마우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말하였다. 그 몸가짐과 어조에서는 다소 신파기가 느껴졌다.
음악활동의 길에 나선 이후 늘 들어온 말을 여기서 다시 듣게 되는 영미의 마음은 왜선지 몹시 구슬펐다.
온 겨레가 우리 민족끼리의 통일열풍에 휩싸여있던 6. 15시대의 격앙된 분위기속에서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윤석을 따라 통일음악의 길에 들어섰던 영미였다. 그 시절 그들은 북과 남의 통일행사장들에서 환희에 넘쳐 통일의 노래를 불렀다. 그때에도 자기를 부르는 악단은 많았지만 영미는 윤석의 노래를 반주해주는데서 더없는 만족을 느끼였었다.
그러나 통일운동의 수난은 언제나 랑만으로 가득찼던 그의 생활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하였다. 영미가 불안과 동요속에서도 지금까지 통일의 무대를 떠나지 않았던것은 고난을 이겨내고 새날을 열어가자고 사랑과 정을 담아 말해주던 악단성원들의 고무의 손길이 있었기때문이였다.
하지만 영미는 시련을 이겨내기가 어려웠다.
날이 갈수록 겹쳐만 드는 생활난, 집세조차 물기 어려워지는 자금형편, 어린 자식의 미래를 생각할 때 머리들군 하는 가지가지 근심거리들…
이것은 영미와 같이 고난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시련이 아닐수 없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6. 15시대의 향수를 간직한채 통일의 시대를 다시 안아오자고 투쟁하고있지만 그 미래가 료원하게만 느껴졌다.
과연 노래로 우리가 바라는 새날을 안아올수 있단 말인가?
윤석을 따라 거리로, 초불의 광장으로 향해지던 발걸음은 차츰 떠지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때 영미에게로 이 악단의 손이 닿았다. 영미를 찾아온 사람은 갖은 약속을 다해가며 그를 지꿎게 설복하였다.
《고뇌는 예술가의 숙명이지요. 하지만 세월이 달라지면 노래도 달라진다지 않소? 예술과 인생을 위해 신중하게 선택하기 바라오.》
영미는 고민끝에 그 사람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였다. …
《참, 그런데 당신의 윤석은 어떻게 된거요? 오늘 우리 악단에 소개하기로 했던것 같은데?》
사나이가 영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
어제 경영자측에서는 차차 그들부부의 음악회도 조직해볼 생각이라며 남편을 소개해달라고 신신당부했었다. 이들은 영미네가 6. 15시대에 통일음악가로 활약한 사람들이라는데 대해 몹시 흥미를 가지고있었다. 왜 그러는지는 알수 없었다. 다만 《음악쟁이들은 시대정서에 민감해야 한다.》는 훈시 한마디를 하였을뿐이였다.
윤석의 이름을 듣는 순간 영미는 가슴이 찌르는듯 아파났다. 방금전 관객들과 기자들을 아연케 한 그의 돌발적인 행동은 바로 그로 하여 일어난것이였다.
어제 집으로 돌아간 영미는 밤늦도록 윤석을 기다렸다. 아직 윤석에게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지 못하고있던 영미는 이제 그에게 다 털어놓으리라 결심하였다.
그런데 일은 공교롭게 되였다. 밤이 깊어서야 집에 들어온 윤석은 영미에게 《우리 별무리악단이 며칠후 제주도 강정마을로 순회공연을 떠나게 되였소.》 하고 흥분된 목소리로 말하는것이였다. 악단이 제주해군기지건설 반대투쟁을 성원하기 위해 공연을 준비한다는것은 영미도 이미 알고있는 사실이였다.
《영미, 또 한번 발목이 시게 걸어보게 됐어!》
불같은 성미는 여전하였다. 세수를 하면서도 평화와 통일의 념원이 깃든 노래를 흥얼거리였다.
영미는 잠시 망설이지 않을수 없었다. 하지만 곧 자기의 선택이 남편과 가정을 위한 희생이라고 스스로 위안하였다.
가수에게 반주자가 있어야 하듯 가정에는 생활의 반주자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영미는 드디여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였다. 순간 하얀 비누거품이 잔뜩 묻은 윤석의 얼굴이 건뜻 쳐들리였다.
《영미,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였소?》
윤석의 두눈에는 실망의 빛이 어려있었다.
《그건 한때 나의 희망이였어요.》
사실 그 악단은 일부 음악가들속에서 동경의 대상으로 되고있던 악단이였다.
《물론 과거의 그 희망이나 명예때문에는 아니예요. 난 예술과 함께 가정의 운명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어요.》
고요한 방안에서 영미의 나직한 목소리가 도간도간 울리였다.
《뜻밖인데.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다니. 그래, 우리 악단의 모든 사람들, 저 거리에 초불 들고 나선 그 사람들, 당신대신 반주를 맡은 그 녀인에겐 가정이 없단 말이요?》
윤석이 말한 녀인은 자기를 대신하여 윤석의 반주를 맡고있는 별무리악단의 신인연주가였다. 영미는 윤석에게서 그 녀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것이 몹시 불쾌하였다. 처음 그 녀인이 윤석의 반주를 한다는것을 알았을 때 영미는 심상하게 여겼었다. 몸매가 우아하다든지 살색이며 눈빛이 류달리 아름답다든지 하는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데 차츰 그 녀인이 자기들의 생활에 울리는 간섭음이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더우기 그가 윤석에 대해 류다른 관심을 보인다든가 무대우에서 아주 다정한 시선을 보낸다든가 하는것은 녀성의 경계심리를 심히 자극하는것이였다.
《그 녀자에 대한 말은 다시하지 말아줘요.》
영미의 목소리는 쌀쌀하게 울리였다. 아래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윤석을 마주보던 영미는 자기들의 생활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래서 노래를 팔고싶단 말이지. 뭐, 행복을 위해서라구? 하지만 당신의 노래는 우리 가정에 그 어떤 행복도 주지 못할거요. …》
영미가 또 무엇인가 이야기하려는 순간 윤석의 격해진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영미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였다. 그들사이에 이런 일은 처음 있는것이였다. 지금 앞에 서있는 사람이 자기가 지금껏 순정을 바쳐온 사나이, 자기가 연주하는 노래를 들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하던 그 사나이라는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야속했다. 금시 울음이 터져나올것만 같았다.
두사람은 밤깊도록 잠들지 못하였다. 잠들어버린것은 오직 둘사이에 오가던 사랑의 언어뿐이였다. 윤석은 날이 밝자 말 한마디 없이 나가버리였다. 영미는 억울하고 쓰라린 심정을 그앞에 쏟아놓지 않고는 견딜수가 없었다. 급히 계단을 내려 현관문을 열고 나서던 영미는 못박힌듯 서버렸다. 윤석은 길에서 만난 어떤 녀인과 인사를 나누고있었다. 그 녀인은 다름아닌 윤석의 새 반주자였다. 이내 그들은 나란히 걷기 시작하였다. 영미에게는 윤석과 그 녀자의 웃음소리가 자기들의 생활에 울리는 불길한 전조처럼 들려왔다. 그는 멀어져가는 두사람의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행복했던 젊은 시절이, 애정과 진정을 다 바쳐온 자기의 사랑이 멀리에서 가물거리고있었다.
마음속에 이처럼 쓰라린 아픔을 안고 오늘 아침 무대우에 올랐던 영미였다.
…
《왜 대답이 없소, 설마… 그 사람이 거절한거야 아니겠지?》
대답대신 두눈을 살풋이 내려감는 영미를 바라보던 사나이는 경추증환자처럼 밭은 목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이때 영미의 뒤에서 문이 열리더니 한무리의 남녀들이 왁작거리며 들어왔다. 그들은 영미를 둘러싸고 아낌없는 찬사를 퍼부었다.
《공연이 이렇게 파격적으로 흐를줄은 몰랐소. 관객을 쉽사리 자기의 선률속에 끌어들일수 있다는건 놀라운 솜씨요.》
목이 밭은 사나이는 《돼지들도 좋은 먹이를 안단 말이요.》 하며 껄껄 웃어댔다. 그리고는 자기의 말이 지나쳤다고 생각했던지 《이건 뭐 롱담이요.》 하며 멋적은 미소를 짓는것이였다.
《우리가 돼지먹이를 만드는거야 아니지. 음악이란 여러모로 매력적인것이라오. 따라서 음악가는 언제든 행복해질수 있는 사람들이지.》
사나이는 영미의 귀가에 후덥지근한 입김을 풍기며 그 무슨 비밀을 알려주듯 나직이 중얼거리였다. 악단측에서 그들부부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것은 그들의 능력때문만이 아니였다. 그들의 출연이 애호가들속에서 대단한 인기를 모으게 되리라는 금전적타산도 있었지만 보다는 진보적인 예술활동을 벌려온 배우들을 순수 예술활동의 무대우에 세워 정계 모인물들의 호감을 사보려는 정치적타산이 깔려있었다. 오늘공연에 유력신문사의 기자들이 다 몰려들었던것도 악단측의 이렇듯 치밀한 계산에 의한것이였다.
처절한 흐느낌소리같은 옛 류행가의 선률이 방안을 감돌고있었다.
사랑을 팔고사는 꽃바람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
…
《예술을 사랑하시오. 그리고 당신들은 보다 다정하게 지내는것이 좋소. 사랑의 감정이 열렬할수록 행복은 그만큼 커지는거요. 이것이 사랑의 함수라는거지. 예술의 천사들, 그렇지 않나?》
주위에서는 와- 하고 웃음판이 터지였다. 순간 영미의 온몸은 분노로 떨리였다. 그의 심장은 도저히 이러한 모욕을 받아들일수 없었다. 귀청을 어지럽히는 소란스런 잡음속에서 영미의 목소리가 조용히 그러나 위압적으로 울리였다.
《난 지금 나의 귀중한 벗을 당신들앞에 세우려던 자신을 부끄럽게 여겨요. 그리고 이 순간 그이가 더없이 미덥게 여겨져요.》
《뭐요?! 그건 대체 무슨 말이요?》
《난 더 설명하고싶지 않아요. 이만 실례하겠어요.》
영미는 사람들틈을 헤집고 도고하게 걸어나갔다.
《갑자기 왜 저러는거야?》
《잔뜩 코를 세우는데.》
혜성처럼 나타났던 녀배우의 이상한 행동을 두고 저마끔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극장문을 나선 영미는 쏟아져내리는 해살에 눈살을 쪼프리였다.
랭기를 머금은 한줄기 바람이 얼굴로 확 끼쳐왔다. 그는 숨을 한껏 들이쉬였다.
예술을 한다는 사람들이 어쩌면 그렇게까지 타락할수 있단 말인가?
음악을 진주처럼 귀중하고 신성하게 여기며 자존심 또한 류달리 강한 그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큰 모욕은 없었다. 가슴 한구석에 남아있던 이 악단에 대한 환상이 깨여지는 순간 영미는 자신이 그런 사람들과 함께 고상한 음악을 팔려 했다는 수치심에 몸을 떨며 솜옷깃을 꼭 여미였다.
극장마당을 지나 삼삼오오 떼지어가던 사람들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영미의 눈가엔 맑은 눈물이 고여올랐다. 사람들은 그것이 젊은 녀배우의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감격일것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하고있었지만 그자신은 전혀 다른것을 생각하고있었다.
그는 윤석의 모습이며 그와 함께 별무리악단의 무대에 오르던 행복했던 시절을 그려보고있었다. 영미는 지금 이 시각 자기의 마음속에서 윤석과 별무리를 결코 지워버릴수 없으며 어디에 가서도 그 시절의 행복을 다시 맛볼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가슴저리게 절감하고있었다.
영미는 어딘가로 정처없이 발걸음을 옮기였다. 서대문역 근처에 이르러 그는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낯익은 한 녀인을 보게 되였던것이다. 윤석의 반주를 맡은 그 녀인이였다. 자기들의 생활에 뛰여든 이 불청객에 대한 영미의 지식은 매우 빈약했다. 결혼한 녀인임에도 홀몸으로 살고있다는것, 전문음악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연주수준이 비교적 괜찮다는것이 전부였다.
며칠전에는 윤석과 함께 집에 왔던적도 있었다. 그는 벽에 걸린 사진들에 별스레 관심을 돌리는것이였다. 특히 윤석과 영미가 단풍나무숲을 배경으로 다정히 웃으며 찍은 사진앞에서는 오래도록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어느해인가 평양에서 진행된 통일행사에 참가하고 돌아와 찍은 사연깊은 사진이였다.
《막 시샘이 나는데요.》
녀인은 빙그레 웃으며 사진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그가 간 다음 영미는 사진이 걸렸던 자리가 비여있는것을 보았다.
《우리에게 결혼식사진이 없다는걸 알고 그것으로 결혼식사진을 만들겠다기에 내가 주었소.》
영미는 윤석을 잔뜩 의혹이 실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기들에게 결혼사진이 없는것은 사실이였지만 그런것이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본적은 없었다. 순화라는 녀인이 가져간 그 사진에는 첫사랑의 소중한 추억이 깃들어있었다. 하여 그것을 자기들의 결혼사진처럼 생각하고 살아온 영미였다. 그 사진에 다른 그 누가 손대는것을 바라지 않았다.
영미는 그 사진을 찍어준 마음씨곱고 쾌활한 사진사를 잊을수 없었다. 그는 자기들과 사진으로 인연을 맺은 사람이였으며 자기들의 미래를 축복해준 첫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는 영미와 윤석의 사진을 찍어줄 때면 늘 《이게 결혼사진이라면 좋겠지? 자네들의 결혼사진은 꼭 내가 찍어주겠어.》 하고 말하군 하였다. 하지만 그는 끝내 영미네와의 약속을 지킬수 없었다.
몇해전 가을 영미네는 어느 민간단체에서 주최한 집회가 끝난 후 결혼식을 하게 되였다. 이날 그들을 찾아온 사진사는 몹시 들뜬 기분으로 옷차림새며 분장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참견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준비를 마치고 나설 때였다. 뜻밖에 결혼식장으로 들이닥친 경찰이 곧장 사진사를 향해 다가갔다. 그가 통일애국인사들을 찬양하고 현실을 신랄히 비판한 사진과 글들을 출판물에 실어온것이 문제가 되였던것이다.
경찰차로 호송되여가던 그는 영미를 바라보며 《인차 돌아올테니 기다리라구. 그땐 정말 멋지게 찍어주겠어.》 하며 익살스런 인상을 지어보이였었다.
그후 주위에서 이제라도 결혼기념사진을 찍자고 권할 때마다 영미네는 거절하였다. 그때 그들은 자기네의 다정한 모습을 사진찍으며 기뻐하던 그 사람을 생각하였다. 지금은 자기가 찍어주었던 사진속의 모습들을 그려보며 어제날의 약속을 새겨보는것이 유일한 기쁨이고 희망일수 있었다. 언제이든 그가 불쑥 자기들을 찾아올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때 자기들이 이미 결혼사진을 찍었다는것을 알면 얼마나 서운해하겠는가. 그에게서 생활의 기쁨을 빼앗고싶지 않았다.
… 영미는 사진이 없어진 빈 공간을 쓸쓸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자기 생활의 가장 귀중한것을, 이 작은 집을 밝게 해주던 행복을 졸지에 잃어버린것만 같았다. 윤석도 그 사진을 좋아했었다. 윤석이 그앞에 서있을 때면 현실의 사랑보다 과거의 사랑에 취해있는 사람을 보는것 같았다.
그런 사진을 왜 다른 녀자에게 주는거야?
영미는 자기들의 소중한 사진을 초면이나 다름없는 녀인의 손에 들려준 윤석의 처사도 그렇지만 남의 생활에 별스레 친절을 베풀며 접근하는 그 녀자 역시 몹시 언짢게 여겨졌다.
그 녀인과의 거리가 가까와졌다. 영미는 자기 생각을 오래 묻어두지 못하는 성미였다. 그는 할 말은 꼭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녀인을 향해 다가갔다. 머리를 수굿한채 뭔가 생각에 잠겨 걷던 녀인은 무춤 걸음을 멈추었다. 자기 발치의 연분홍빛신발을 이윽히 바라보던 녀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녀인의 얼굴에는 함뿍 미소가 그려졌다. 녀인은 겨울날씨가 어떻다느니, 영미가 점점 더 세련되여보인다느니 하고 별스레 말을 많이 하였다.
놀라웠다. 그의 거동이며 어조에서는 꾸민 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던것이다.
《산보하시는가요? 그런데 무슨 산보를 혼자 하세요?》
영미의 이 말에 잠시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이던 녀인은 대답대신 화제를 돌리였다.
《영민 어째서 악단에 나오지 않아요? 혹시 두사람이 다투기라도 한게 아니예요?》
녀인은 손에 들었던 악보책을 영미앞에 펴보이며 윤석의 요구수준이 이만저만 아니라고 한탄조로 말하였다. 영미처럼 수준있는 연주가와 호흡해왔으니 자기로서는 그 요구를 만족시키기 어렵다는것이였다. 악보를 보니 자기가 윤석을 알게 된 후부터 연주해온 노래들이 있었다.
《이 노래들을 부를 때 윤석씬 어떤 대목에선 눈물까지 흘리더군요. 그의 감정을 내가 어떻게 다 리해할수 있고 따라서줄수 있겠어요? 돌아와요. 사랑은 언제나 함께 있는것이래요.》
몹시 귀에 익은 말이였다. 그 녀인이 오래된 자기들의 사랑의 대사를 외우는것 같았다. 언젠가 윤석은 《그대곁엔 내가 있고 내곁엔 언제나 그대가 있어》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었다. 동료들은 그것을 윤석의 세레나데라고 하였다.
영미는 녀인의 그 태연함에 다소 당황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그인 지금 어디 있어요?》
녀인은 윤석이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남정들곁에 녀인들이 있으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몰라요. 그래 영민 어떻게 할 생각이예요?》
영미는 대답대신 속에 품고있던 생각을 쏟아놓았다.
《언닌 지금 자기가 너무 친절하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 언닌 우리가 얼마나 다정한 사이였는지, 얼마나 행복했는지 다 모를거예요. 그리고 지금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픈것인지 리해할수 없을거예요.》
그는 최근에 있은 좋지 못한 일들에 대해 렬거하며 실로 모진 언어를 마구 내뱉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영미는 그가 량심의 가책을 느끼고있을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한순간에 불과했다. 녀인이 영미앞으로 다가섰다. 해빛에 반짝이는 녀인의 밤빛구두는 마치 자기앞에 나타난 뾰족한 연분홍빛신발을 호기심을 품고 바라보는것 같았다.
《난 영미의 그 감정이 잘 리해되지 않는군요. 분명 뭔가 오해하고있어요. 하지만 영미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고있는가를 잘 알게 되는군요.》
아량을 보이는듯 한 그의 태도에 영미는 분기가 치밀어올랐다.
《그만두세요. 어쩌면… 난 결코 선입견을 가지고 말하는것이 아니예요.》
그제서야 녀인은 신중한 표정을 지으며 영미에게서 한걸음 물러섰다.
《참, 이런 일이 있을줄은 몰랐군요.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어떻든 나의 친절이 영미네 가정의 행복을 방해했다면 깊이 생각해보겠어요. 하지만 한가지만은 말하고싶어요. 영미가 윤석씨를 그처럼 귀중히 여기듯이 나에게도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거예요. 언제나 함께 있고싶은 그런 사람이.》
무엇인가를 더 말할듯 하던 녀인은 이내 생각을 달리한듯 총총히 발걸음을 옮겨갔다. 영미는 자기옆을 지나쳐가는 녀인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혹시 내가 사람을 잘못 본것이 아닐가? 너무 자기 감정에 옴해서 애꿎은 녀인에게 화풀이한것은 아닐가? 그런데 그는 왜 우리 가정의 일에 그렇듯 관심하는것일가?
여러가지 의혹들이 영미의 머리속을 떠돌고있었다.
윤석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였다. 지금껏 성실하게 자기 노래를 반주해온 영미를 자신의 한부분처럼 사랑해온 윤석이였다. 그런데 오늘 아침의 모습은 그와 너무도 판이했다. 하지만 거기에 문제가 있는것은 아니였다. 그 모습은 언젠가부터 벌어지기 시작한 자기들사이의 관계가 어디까지 이르렀는가를 말해주고있을뿐이였다.
무엇때문에 이렇게 되였을가? 내가 별무리악단을 떠나려 했다는 그 하나의 리유때문일가?
잠시후 영미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생각에서 깨여났다.
《여, 친구. 광화문으로 가자구!》
20대의 청년들 몇이 떠들썩하며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악단이 광화문네거리근방에 자리잡았다고 하던 녀인의 말이 떠올랐다. 각종 시위와 집회들이 그칠새없는 광화문네거리와 서울곳곳에서는 최근 미군과의 전쟁연습을 반대하고 통일을 요구하는 투쟁이 벌어지고있었다. 영미는 자기도 모르게 앞서간 청년들을 따라 걸었다. 바삐 걸음을 옮기는 그의 눈앞으로 윤석의 모습이 가득 어리여오고있었다.
그 어디에나 지나온 나날의 추억의 자욱이 새겨진 이 거리였다. 한때는 이 거리의 곳곳에서 통일음악회가 들썩하게 벌어지군 했었다. 관객들도 배우들과 어울려 서로서로 손을 잡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정처없이 걷던 영미는 무춤 걸음을 멈추었다. 영미의 눈에 윤석의 모습이 언뜻 비껴들었다. 그를 부르며 막 달려가던 그는 그만 실망하게 되였다. 그 사람은 윤석이 아니였다. 그 사나이는 의아한 눈길로 영미를 바라보았다. 이윽고는 리해한다는듯 미소를 지어보이며 가버리였다. 영미는 자기가 사람을 헛갈린것이 그 미소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윤석이 늘 그렇게 사람좋게 웃으며 자기를 대해주었던것이다. 웃음과 눈물이 많고 정에 무른 사람이였다.
6. 15공동선언실천을 위한 통일행사장이나 미군기지철수운동 등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투쟁의 현장마다에서 울려오는 부름소리에 그는 언제나 웃으며 노래로 대답하였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함께 가자》, 《흩어지면 패한다》 …
얼마나 많은 노래를 불렀던가. 영미는 바로 그 모습에 반했고 그 모습에 힘을 얻으며 무대에 서군 했었다. 어떤 사람들은 영미의 능란한 반주가 있어 윤석의 노래가 더 훌륭해진다고 말하군 하였다. 하지만 영미는 윤석의 노래가 있어 자기의 연주가 더 훌륭해지는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음악은 윤석의 노래에 바쳐지는 사랑이고 열정이기도 하였다.
영미에게는 문득 윤석을 처음 만날 때의 일이 떠올랐다.
한송이 장미처럼 활짝 피여나던 시절 영미앞에는 새로운 환경이 펼쳐졌다. 영미가 대학졸업반이 되자 부모들은 그의 배우자를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아늑한 보금자리에서 애지중지 키워온 딸을 이름난 배우가 될수 있도록 뒤받침해줄 밑천든든한 집들과 흥정을 벌리고있었다.
다 자란 새를 작은 조롱에서 더 큰 조롱으로 옮기려는듯이…
자기가 상상해온 사랑의 감정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이 타산에 영미는 한없는 슬픔을 느끼였다. 한갖 타산으로 시작되는 생활을 어떻게 사랑이라고 할수 있겠는가.
어느날 그는 부모들앞에서 인간의 고상한 감정을 어지럽히고싶지 않으며 자신의 배우자는 인격이 있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그런 사람이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부모들은 철없는 소녀를 대하듯 재미있게 바라볼뿐이였다.
거기서 너도 이제 생활을 알게 되리라는 무언의 암시를 읽은 영미는 도전하듯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원래 이 세상이 그렇게 되여있는것 아닌가 하는 서글픈 생각도 들었다. 만일 그렇다면 영원히 결혼하지 않으리라고 친구들앞에서 호언하였다.
이런 때 윤석을 알게 되였다. 6월의 어느날이였다. 거리거리는 6. 15기념행사들로 흥성이고있었다. 가는 곳마다엔 새 풍경이 펼쳐져있었다. 《통일사진관》, 《통일서점》, 《통일화원》, 《통일관광려행사》, 《통일려관》, 《통일가게》 등 《통일》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간판들이 늘어나 아예 통일상가처럼 되여버린 거리까지 생겨나고있다. 통일운동을 외면하고는 사람들속에 섭쓸리기도 어렵고 《통일》이라는 간판을 걸어야 장사도 잘된다는 말까지 돌고있었다.
거리로 나섰던 그는 여의도의 어느 한 행사장에서 누군가의 노래소리에 이끌리게 되였다. 무대우에서는 한 청년이 대중의 열광적인 호응을 받으며 신바람나게 노래부르고있었다. 청년의 그 노래는 사람들에게 평화와 사랑의 의미를 일깨워주며 울리는 열렬한 호소였다.
영미는 어스름이 깃드는줄도 모르고 노래에 심취되여있었다. 행사가 끝나자 흥분한 군중은 구호를 웨치고 노래를 부르며 행진을 시작하였다. 영미도 노래를 합창하며 그들을 따라 걸었다. 그에게 어떤 의도가 있는것은 아니였다. 노래의 감동에 실려가고있을뿐이였다. 노래속에서 그는 하나의 현실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이 세상에는 자기만이 아니라 모두의 삶, 모두의 행복을 위한 숭고한 리상을 안고 자신을 바치는 훌륭한 인간들도 있다는것이였다.
얼마나 걸었는지… 그만 신발 한짝이 벗겨졌었다. 졸업반이 된 영미에게 그의 부모들이 사준 값진 구두였다. 영미는 그것을 눈앞에 보면서도 끝없이 밀려오는 인파에 밀려 도무지 손을 뻗칠수가 없었다. 그는 한발로 콩콩 뛰며 안타까워하였다. 이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청년이 한발로 선채 어쩔줄 몰라하는 몸매날씬한 처녀를 재미있다는듯이 바라보고있었다. 사람들틈을 헤치며 신발을 찾아온 청년은 그를 길 한옆으로 이끌었다.
《고맙습니다.》
《뭘요. 그런데 이런 신을 신고야 어떻게 걷겠습니까?》
잠간 기다리라고 하며 어디론가 급히 달려갔던 청년은 새 운동신 한컬레를 손에 들고 나타났다.
《이걸 신어보시오. 이런 길을 걷자면 우선 신발이 간편하고 든든해야 합니다.》
청년이 거듭 재촉해서야 영미는 그 신발을 신었다. 꼭 맞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이 고마운 사람을 똑똑히 보아두려는 생각에 눈길을 들던 영미는 그가 무대우에서 자기를 무척 감동시킨 그 청년인것을 알아보았다. 영미는 무등 반가워하며 노래를 참 감동깊게 들었다고 하였다. 그의 외모를 훑어보던 청년은 대학생인가고 물었다. 대학졸업반이라는 영미의 대답을 들은 청년은 기특한 일을 하는 귀여운 애숭이를 대하듯 영미를 바라보았다. 영미는 매우 친절하면서도 몸가짐에서 위엄이 느껴지는 이 사람이 어떤 의로운 위업에 한몫 단단히 하고있을 대단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아저씨, 고마워요.》
이때 청년의 주위에 모여온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리였다.
《어쩌다 처녀 하나 홀쳤구나 했더니 아저씨라?》
영미의 두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럼 뭐라고 부르겠어요?》
《내 이름은 윤석이요. 거긴 어떻게 부르오?》
《제 이름은 영미랍니다.》
《거 이름 좋다. 윤석과 영미라… 영화제목 같지 않아?》
윤석의 친구들이 모두 유쾌한 사나이들이라는 점이 영미의 마음에 들었다. 영미는 그의 노래를 배우고싶었다. 하여 매일과 같이 공연장소를 찾아가 가사들을 발취하고 곡들을 채보하였으며 공연이 끝난 후면 노래를 연주하며 선률을 익히군 하였다.
그 노래에서는 풍만하고 진실한 감정과 함께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억센 힘이 느껴졌다. 그는 노래를 부른다기보다 심혼을 구가하고있었다. 영미는 그 무한하고 아름다운 노래의 세계에 이끌려들고있었다.
윤석은 이악하고 정열적인 처녀의 모습을 홀린듯이 바라보았다. 어느날엔가는 처녀에게 자기 신상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의 전공은 음악이 아니였다. 다만 취미삼아 노래를 배웠다고 한다. 그후 통일운동을 하면서 노래의 힘을 알게 되였고 지금에 와서는 노래가 자기의 생활로 되였다고 하였다. 영미는 그 목소리와 재능을 가지고 음악계에 나서면 크게 성공할것이라며 앞으로 일류극장의 무대에서 노래부를 생각은 없는가고 물었다.
윤석은 자기는 노래를 위해 노래부르는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영미는 순박해보이는 그의 모습에서 그것이 진심임을 느끼였다. 뭇사내들과는 달리 자기의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사는 그가 무척 돋보이였다. 윤석은 영미가 바이올린을 전공한다는것을 알고는 방과후 자기들에게 와서 연주하는것이 어떤가고 하였다. 무대담도 키우고 좋을것이라는 생각에 영미는 제꺽 응하였다.
처음 생각은 어떻든 영미는 차츰 그의 노래와 그들 악단의 랑만적인 분위기에 사로잡히고말았다. 반주를 하면서 윤석의 노래를 음미해보는것이 특별히 좋았다. 윤석도 영미가 반주할 때 대단히 만족해하였다. 이렇게 서로의 선률속에 빠져들며 손을 잡았고 화음을 이루며 늠실대는 선률의 파도를 타고 미래를 향해 달리기 시작하였다.
윤석과 함께 첫 공연을 한 그날 어느 기자가 그들의 사진을 크게 찍어 신문에 실었다. 그 신문을 펼쳐보던 영미는 자기들의 사진밑에 《노래속에 사랑도 움터》라는 글이 씌여있는것을 보고 어떻게 제멋대로 이럴수 있느냐고 불만을 터뜨리였다.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윤석의 당황한 시선과 마주쳤다. 이윽고 둘은 그 사진속에서처럼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어느 다방앞을 조금 지나자 영미는 번듯한 공지에 가설무대가 설치된것을 보았다. 주위에는 반전평화, 미군철수를 요구하는 집회참가자들과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들고있었다. 공연준비에 바삐 돌아가던 녀배우들이 탄성을 올리며 마중왔다.
《영미!》
그 부름소리를 듣는 순간 영미는 짜릿한 감동에 휩싸이였다. 모두 얼마나 좋은 사람들인가. 스스로 어려운 길을 걸으며 서로 고무해주고 이끌어주던 정다운 벗들이였다. 소박하나 진실한 이들의 노래속에 참된 예술이 있다고 영미는 생각했다.
《어떻게 왔니?》
《내가 뭐 못 올데를 왔니?》
《그럼 아예 왔다는거냐?》
그들은 영미를 무대뒤에 설치된 천막으로 이끌었다. 그리고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근심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일은 무슨 일, 조금 분주했을뿐이야.》
영미의 친구들은 그사이 악단에서 있은 일들을 신바람나서 이야기해주었다. 하지만 오래 앉아 이야기할수 없었다. 누군가 칸막이를 들추며 공연시간이 되였다고 알려주었다.
그들이 나간 후 영미는 천막안을 둘러보았다. 더운 기운이 풍기는 난로며 질서있게 걸려있는 의상들이며 소도구들을 보니 모든것이 여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간 있을 곳이였지만 생활을 섬세하게 가꾸는 녀성들의 체취가 어디서나 느껴졌다.
벽에는 악단이 모두 함께 찍은 사진들이며 기념품 같은것들이 걸려있었다. 그것을 새삼스럽게 보던 영미는 책상앞에 가앉았다. 책꽂이에는 여러권의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있었다. 낯익은 책 한권을 집어든 영미는 그것이 윤석의것임을 알아보았다. 윤석은 괜찮은 문장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종종 여러 출판사들에 자기의 수필을 보내군 하였다. 그중 어떤 글들은 평판이 매우 좋았다.
영미는 호기심에 끌려 최근에 쓴 글들을 찾아보았다.
《오래전의 사진이지만 그것으로 우리들의 결혼사진을 만들자는 생각은 참 기발한 생각이다. 녀성들은 얼마나 섬세한것인가. 새 바이올린연주가는 그 사진으로 결혼사진을 만드는것이 실감나겠느냐는 나의 물음에 사진도 예술이며 예술에는 진실이 깃든다고 대답했다. 나는 우리의 사진이 영원히 우리 생활의 진실이기를 바란다.》
영미는 이 글을 곱씹어 읽어보았으나 뜻이 잘 리해되지 않았다. 그는 또 다음장을 번지였다.
《영미를 좀 따뜻하게 대해줄수도 있지 않았는가 후회된다. 제발 눈물만은 흘리지 말기 바란다. 나의 심장은 그 눈물의 무게를 이기기 어렵다.》
영미는 가슴이 뭉클해났다.
《사실 내가 그를 리해해줄수 없었던것은 그를 단순히 반주자로서 사랑해온것이 아니였기때문이다. 아마 지금 나를 원망하고있을것이다. 그의 정겨운 바이올린소리를 다시 들을수 있을가?》
그뒤에는 큼직한 물음표가 세개씩이나 그려져있었다. 영미는 책을 가슴에 꼭 껴안았다. 윤석의 사려깊은 눈동자가 어려온다. 오래동안 함께 지내면서도 자기에게 향해지는 그 시선의 의미를 모르고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는 그가 바라던 녀성이 아니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영미에게는 어린시절에 들었던 동화 하나가 떠올랐다.
별에서 떨어진 어떤 돌멩이가 있었다. 그 돌은 자기를 애정을 담아 바라보는 어떤 소년앞에서 늘 우쭐해있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소년은 돌을 보고 못생긴 돌멩이라고 하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소년은 지금껏 별에서 떨어진 돌멩이가 보석일거라고 잘못 생각했었다는것이다. 소년이 실망하자 돌멩이는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왜 그런 이야기가 떠올랐을가?
잠시 생각에 잠겼던 영미는 자기들은 서로를 늘 보고있으면서도 서로를 잘 알지 못하고있었던 돌과 소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윤석의 눈에 자기가 어떻게 비끼고있었는지 알고싶었다. 이것은 생활이 그에게 요구하는것이였다.
영미는 다시금 책장을 번지였다. 흐려진 망막으로 윤석의 글이 아프게 비껴들었다.
《나는 영미가 오래동안 우리들의 노래를 연주해왔지만 자신의 노래는 없었다는것을 놀라움속에 깨달았다. 그는 우리의 노래에 깃든 뜻을 벌써 잊고 사는것 같다. 그에게 자기의 선률이 없다면 우리 생활에 어떻게 진정한 행복이 깃들수 있겠는가?》
영미는 자기가 지금껏 알지 못했던것, 윤석이 반주자이며 안해인 자기에게 바라는 그것이 이 짧은 글속에 담겨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윤석이 또박또박 박아쓴 글들을 사색에 잠겨 바라보던 그의 귀전에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머리에 《평화》라는 글을 새긴 붉은 띠를 질끈 동여맨 애젊은 처녀가 그앞에 불쑥 나타났다.
《저 윤석선생님을 못 보셨습니까?》
영미는 머리를 저어보였다. 잠시 서성거리던 처녀는 낯선 녀인을 못마땅한 눈길로 주시해보았다. 그 눈은 《감히 선생님의 책을?》 하고 말하는듯 했다.
영미는 빙긋이 미소지으며 자기를 소개하였다. 그러자 처녀는 몹시 반가워하며 금방 공연이 시작되였다고 알려주었다. 천막을 나선 영미는 밀집된 관객들속을 뚫고 앞자리로 나아갔다.
무대우에는 그가 이전에 많이 들어온 노래들과 함께 새로 지은 노래들이 올랐다. 가수들, 연주가들, 무용수들의 모습은 예전이나 다름없이 활기에 넘쳐있었다.
이윽고 윤석이 여러 남녀가수들과 함께 무대에 오르자 관중은 설레이기 시작하였다. 윤석은 활짝 웃어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이윽고 순화라는 녀인이 악기를 들고 무대에 올라 윤석의 옆자리에 가 섰다. 언제나 영미가 서있군 하던 그 자리였다.
윤석의 노래반주를 하게 된 후 관객들속에서 그를 보는것은 이번이 처음이였다. 윤석은 반주자와 몇마디 이야기를 나누며 미소짓고있었다. 그것은 영미의 마음을 몹시 괴롭혔다. 아마 이런것이 한 남자만을 사랑하는 녀인의 심정인 모양이다.
한순간 영미는 무대우에서 자기를 보는 녀인의 시선을 느끼였다. 영미가 그쪽으로 눈길을 돌리자 녀인은 고개를 약간 쳐들사 하며 대단히 매력적인 동작으로 활을 긋기 시작하였다. 노래는 영미가 자주 연주해오던것이였지만 객석에서 들으니 느낌이 새로왔다. 연주기법때문이라기보다 그 노래에 실려오는 그 어떤 향수때문인것 같았다.
첫 노래가 끝나자 관중은 손을 흔들며 환호하였다. 하지만 영미는 마음이 울적해졌다.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보였다. 윤석은 연주가의 손을 잡고 관중에게 인사를 보내였다. 몹시 눈에 익은 동작이였다. 무던히도 사진찍기를 좋아하고 사진찍을 때의 몸가짐에 신경을 많이 쓰던 사람이였다.
영미의 곁에서 연방 사진기의 샤타를 누르던 한사람이 그에게 금방 촬영한 화면을 보여주었다.
《사진이 어떻소?》
《괜찮게 되였군요.》
영미는 윤석과 그 녀인을 중심에 놓은 사진을 바라보며 시들히 대답하였다. 그 사람은 《괜찮다구? 난 저 친구의 사진을 많이 찍었더랬는데 이건 뭔가 조화가 맞지 않아.》 하고 중얼거리였다.
그 말을 듣자 영미에게는 윤석과 자기를 보며 《천상배필이요. 어쩜 이렇게 잘 어울릴가?》 하던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그때 영미의 얼굴은 가을날의 단풍잎처럼 빨갛게 타올랐었다. 영미에게는 윤석과 첫사랑을 약속하며 사진찍던 잊지 못할 추억이 있었다.
…
악단이 평양에서 열렸던 북남공동행사에 참가하고 돌아왔을 때였다. 처음으로 북의 예술인들과 함께 통일음악회무대에서 노래불렀던 배우들은 몹시 흥분되여있었다. 북녘동포들과 삼천리강산에 통일의 노래를 더 높이 울려가자고 굳게 약속한 그들이였다. 두손 꼭 잡고 다시 만나자고 절절히 말하던 북녘동포들의 모습이 눈앞에 삼삼했다. 그 손마다엔 아직도 북녘동포들의 따뜻한 체취가 그대로 남아있는듯싶었다.
그때 악단에서는 평양에서의 약속을 지켜 통일문화운동을 보다 활성화하기 위한 토의가 진행되였다. 토론과정에 혁신적인 안들이 수많이 쏟아져나왔으며 악단은 열띤 론쟁속에 여느때없이 흥성거리고있었다.
그런데 다른 문제들과는 달리 앞으로 더 확대될 악단의 성격에 맞게 이름을 고쳐짓는 문제와 남쪽의 민요만이 아니라 북의 민요도 함께 무대에 올리는것과 관련한 문제는 종시 락착짓지 못하고있었다. 악단의 명칭을 놓고는 《민들레》라는 이름이 좋다느니, 《아침이슬》이 좋다느니 하고 저마다 극성을 부리는것이 문제였다면 북의 민요를 무대에 올리는것과 관련해서는 지내 신중한 자세를 취하는측과 지내 랑만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사이의 마찰이 심한것이 문제였다.
한쪽에서는 남쪽의 민요만을 전문해온 배우들이 창법이 다른 북의 민요를 제대로 형상해낼수 있겠는지, 자칫하면 웃음거리나 되지 않겠는지 우려를 표시하였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같은 민족의 노래인데 못할게 무어냐며 열을 올리고있었다. 재미있는것은 윤석과 영미가 서로 대립된 두 진영의 선두에서 목소리를 높이고있는것이였다. 론쟁은 끝이 없을듯싶었다. 그런데 영미가 결김에 던진 한마디가 예상외의 효과를 나타내였다.
《북과 남의 민요를 함께 부르는 무대가 통일무대 아니예요? 노래도 통일 못시키면서 무슨 통일을 한다는거예요?》
윤석은 그 말에 입을 다물고말았다. 영미는 윤석에게 다가와 내기를 청하였다. 이긴 사람은 진 사람에게 무엇이나 다 요구할수 있다는것이였다. 억지다짐으로 윤석의 대답을 받아낸 영미는 그달음으로 북의 음악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을 찾아가 창법이며 연주기법에 대해 알아보았고 북노래싸이트들을 통해 악보들도 채보하였다. 북에서 출판된 《민요따라 삼천리》와 같은 책들에서 그는 깊은 감동을 받아안았다. 영미는 민족의 노래는 하나였으며 반드시 하나로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더 굳게 가지게 되였다. 며칠후 그가 몇몇 동료들과 함께 한 시범출연은 기대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사람들은 영미네의 그 정열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어떻게 그렇게 짧은 기간에 훌륭히 형상할수 있었는가고 묻는 사람들에게 영미는 매우 단순하게 대답했다.
《우린 평양에서 통일을 노래하는 가수가 되자고 약속하지 않았어요.》
누구보다 기뻐하는 사람은 윤석이였다. 성장한 그의 모습을 보는것이 흐뭇하여 입을 다물줄 몰랐다. 영미는 윤석에게 산보를 청하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들에게 쏠리자 윤석은 별수없이 따라간다는듯 한 인상을 지어보이였다. 하지만 잠시후 문밖에서는 《혼자 가면 어떻게 해.》 하며 허둥지둥 따라가는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삽시에 웃음판이 터지였다. 그날 비가 내렸다. 비방울소리 울리는 우산밑에서 민요가 흥취나게 울려나왔다.
《생각나요? 날 보고 림시반주자라고 하던 말.》
《생각나. 영미가 첫 출연을 한 날이였지.》
《그래 아직도 내가 림시반주자예요?》
윤석은 호탕하게 웃었다.
《별소릴. 우린 앞으로도 함께 있을거야.》
그들은 서로 손을 잡았다. 두손은 몹시도 겁게 달아오르고있었다. 그들은 어느 수림 우거진 공원에 이르렀다. 비가 와서인지 텅 빈 공원에서는 나무잎을 두드리는 비방울소리만이 소란하게 울리고있었다. 비물고인 풀밭을 저벅저벅 밟으며 걷던 그들앞에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윤석은 그를 보자 몹시 반가워하며 소리쳐불렀다. 그 사나이도 얼굴에 활짝 미소를 그리며 다가왔다.
《이분 몰라? 그 유명한 사진작가를 몰라?》
영미는 어이없는듯 허구프게 웃었다.
그를 어떻게 안단 말인가.
윤석은 그가 찍은 인물사진들과 풍경사진들에 대해 렬거하며 구도가 독특하다느니, 화폭의 분위기가 정서적이라느니 하며 흥분하여 말하였다. 그의 말을 듣고보니 사나이의 비옷속에 큼직한 사진기가 메워져있는것이 보였다.
《원 별소릴. 유명하긴 뭐가 유명해? 그건 자네 같은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말이지. 그래 자기의 모습을 찍는 사진사를 봤나?》
《하지만 나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데요. 누가 어떤 일을 하든 자신과 무관할수는 없다는겁니다. 난 가끔 사진에도 분명 심오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군 합니다. 다른 예술작품들에서처럼 삶과 또 영원과도 관계되는…》
사진사는 한참이나 배를 그러쥐고 웃었다.
《원 사람두. 제발 웃기지 말게.》
영미도 깔깔 웃음을 터뜨리였다. 다음순간 영미는 윤석의 모습이 자못 진지한데 의아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하지만 어린애같은 그 모양이 우스워 또 한번 웃었다.
《하여튼 오늘 자네 기분이 좋은것 같구만. 이 아가씬 녀자친구인가? 기념으로 사진이나 한장 찍지 그래.》
잠시 시무룩해있던 윤석은 사진사의 그 말에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이분의 렌즈속으로 들어간다는건 행운이야.》 하며 벌써 사진찍을 차비를 서둘렀다. 영미에게는 사람들이 그를 두고 자기 모습에 반한 나르키쏘스라고 놀려주던것이 생각났다.
무슨 사람이 아이들처럼 사진찍는것을 그리 좋아할가?
하지만 이 순간은 영미도 사진 한장 찍어두고싶었다. 한참 맞춤한 곳을 찾던 윤석은 배경이 좋다며 영미의 손을 잡고 이끼덮인 방울나무그루터기우에 올라섰다.
사진구도를 잡아보던 사진사는 《가까이, 더 가까이. 그래야 조화가 맞는거야. 이거 천상배필인데.》 하며 연방 탄성을 올리였다.
영미는 주위가 온통 단풍에 물든것을 보며 장소 하나 잘 골랐다고 생각했다. 비옷을 머리우에 뒤집어쓴 사진사가 촬영을 다하고난 뒤였다. 나무그루터기에서 내려서던 영미는 발이 미끄러워 휘친거리였다. 그를 붙잡던 윤석도 그만 미끄러지고말았다. 우산은 저만치 날아나고 영미는 자기가 경사진 풀밭을 구르는것을 느꼈다. 딱 감았던 눈을 뜨는데 그만 부릅떠진 커다란 두눈과 마주쳤다. 영미도 윤석이도 자기들이 비젖은 풀판우에 한몸이 되여버린것을 알고는 급히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뜻밖의 일에 영미의 얼굴은 홧홧 달아올랐다.
《나무그루터기가 미끄러운건 이끼때문이였어.》
《여긴 온통 단풍이네.》
그들은 동에 닿지 않는 말들만 하였다. 하지만 이 순간 그 얼굴들에 피여오르는 행복을 감출수는 없었다. 이때 사진기의 조명등이 또다시 번쩍였다.
《아주 좋아. 천상배필이라니까.》
영미는 그만 울상이 되였다. 이 짧은 순간에도 그의 머리속에는 입술에 바른 연지가 얼굴을 어지럽히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단정한 처녀들이 뜻밖의 일을 겪고나서 흔히 가질수 있는 그러한 감정이였다. 영미는 사진사가 금방 찍은 사진들을 보여줄 때 자기의 얼굴부터 찬찬히 여겨보았다.
윤석은 무슨 보물이라도 얻은것처럼 기뻐하며 《이거 정말 멋진데. 오늘은 참 운이 좋아. 형님눈은 보배라니까요.》 하고 싱글벙글 웃었다. 사진사는 아주 친절한 사람이였다. 그는 영미네들에게 사진을 자기가 가져다주겠다고까지 하는것이였다. 윤석은 고맙다고 인사하며 악단의 공연장소를 알려주었다. 사진사와 헤여진 후 그들은 공원길을 걸으며 많은것을 이야기하였다. 화제는 어느 사이 자기들의 미래에로 이어져갔다. 그날 그들은 사진사의 말처럼 가까이 손잡고 다가서서 마음속에 간직된 사랑을 고백하였다.
밤이 되여오면서 비는 걷히였다. 맑게 개인 밤하늘에 하나둘 별이 돋았다. 이내 별무리가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별이 돋는 모양을 넋을 잃고 바라보던 윤석은 한순간 《찾았다.》 하고 소리질렀다. 그는 영미에게 악단의 새 이름을 《별무리》라고 지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별무리? 참 좋은 생각이예요. 아마 모두 찬성할거예요.》
나무잎사귀들에서 떨어지는 비방울소리마저 황홀한 심경에 싸여 듣고있던 영미의 얼굴은 행복의 미소로 밝게 빛났다.
《난 일생 오늘을 잊지 못할것 같애요.》
《정말 그래. 사진을 잘 뽑아야 할텐데.》
《그런데 그 사진사가 정말 올가요?》
《오지 않구. 꼭 올거야.》
이윽고 눅눅한 밤공기속을 날아오른 맑은 휘파람소리가 나무잎사귀들에 맺힌 비방울들을 스치며 달빛어린 강의 수면우로 고요히 퍼져갔다.
그후 사진사는 약속대로 그들을 찾아왔다.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겨우 찾았다고 하는것이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여 영미네는 그와 친숙해졌다. 깊이 알게 될수록 그 락천적인 성격과 성실한 인간미에 매혹을 느끼게 되는것이였다. 영미네는 그가 찍어주는 사진들마다에 노래처럼 아름다운 생활의 모습을 새겨가고있었다.
하지만 생활의 곡조는 언제나 고르롭게만 울리는것이 아니였다. 가정을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의 추억을 풍부히 해줄뿐이였다.
영미도 자연 사진찍는것을 좋아하게 되였다. 그들은 이렇게 생활속에서 하나로 결합되여가고있었다.
지나온 나날의 모습들은 어느것이나 6. 15시대의 소중한 추억을 새겨주고있었다. 영미는 그 사진들을 볼 때마다 민족이 굳게 손잡던 시기 새 력사의 창조를 위한 길에 자기들이 함께 통일의 노래를 부르며 살았다는 긍지를 뿌듯이 느끼군 하였다.
그는 그렇듯 화목하고 다정했던 자기들의 생활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것이 가슴아팠다.
영미는 또다시 터져오르는 박수소리에 머리를 쳐들었다. 관객의 재청을 받은 윤석이 두번째 노래를 준비하고있었다. 그 녀자가 윤석과 눈으로 호흡하며 연주를 시작하였다. 영미의 숨결이 높뛰기 시작하였다. 두번째 곡은 첫곡보다도 더욱 강렬한 향수를 자아내고있었다.
하필 이 곡을 선정할건 뭐란 말인가.
영미는 녀인이 일부러 그 곡을 택하여 자기를 괴롭히는것만 같아 무대를 향해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였다. 녀인은 이따금 자기쪽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있었다. 영미는 두눈을 감았다. 꼭 다문 입술이 바르르 떨리고있었다.
나의 반주는 이젠 끝난것인가? 어제날의 사랑의 노래도 끝난것인가?
공연이 끝나자 영미는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영미, 오늘 밤엔 굉장할거야. 꼭 와야 해. 그리고 우린 또 순회공연을 떠나기로 했어. 너도 함께 갔으면 좋겠는데 어쩔 생각이냐?》
영미는 대답대신 눈웃음을 지어보이였다. 관중들틈을 빠져 공연장소를 떠나던 영미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지난 시절 눈에 익고 몸에 배인 그 생활이 거기서는 그대로 흐르고있었다. 아니 지난 시절보다 현실에 보다 더 과감히 뛰여들려는 열정적인 기백이 느껴지고있었다.
별무리, 자기를 반겨맞아주던 벗들의 모습이며 오늘 저녁 꼭 나와야 한다고 당부하던 그 모습들이 눈앞에 어려왔다. 오직 자기만이 외토리별이 되여 그들과 멀어지고있다고 생각하니 못내 서글퍼졌다.
《그에게 자기의 노래가 없었다.》고 한 윤석의 글이 눈앞에 확대되여왔다. 자기에겐 추억이 되여가는 그 길을 변함없이 이어가는 윤석과 이사람들에 대해 자기가 너무도 많은것을 모르고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에 대해 알아야겠다는 충동이 일었다. 이 사람들에 대하여, 이들의 노래에 대하여 알게 된다면 그처럼 어려운 속에서도 별무리와 함께 사는 그 삶의 리유를 알수 있을것 같았다.
그러면 자기의 사랑, 행복도 다시 찾을수 있으리라는 밝은 희망이 가슴속에 차오르고있었다.
어느덧 저녁노을이 눈부시게 비쳐오고있었다. 노을은 번민과 가지가지의 환영속에 모대기는 외로운 녀인을 자기의 금빛옷자락속에 감싸안으며 따뜻이 애무해주고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고 들어선 영미는 마음이 울적해졌다. 누구도 반기는이 없는 괴괴한 이 집의 고요가 싫었다. 그는 까닭없이 소리를 지르고싶은 충동을 느끼며 신발을 벗어들었다.
신장문을 열고 신을 넣으려던 그는 잠시 손을 멈추었다. 뭔가 시선을 끄는것이 있었다. 영미가 전등스위치를 누르자 한컬레의 운동신이 불빛속에 형체를 드러냈다. 윤석과 함께 순회공연을 떠날 때마다 신던것이였다. 이 신을 신어본지도 퍼그나 되였다고 생각하며 영미는 깊은 한숨을 내쉬였다.
신장문을 닫고 방안으로 들어간 영미는 침대우에 걸터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벽에는 다른 가정들에서 흔히 볼수 있는 그림들이 아니라 사진이 주런이 걸려있었다. 결혼후 자기들의 방을 꾸릴 때 윤석이 못을 박고 하나하나 걸어놓은것들이였다.
마지막사진은 어느해인가 6. 15공동선언발표기념일을 맞으며 진행된 집회에 참가하여 찍은것이였다. 통일에로의 길이 아무리 멀고 험난해도 우리 민족끼리의 정신을 끝까지 이어가야 한다고 호소하던 그 집회에서 윤석도 열변을 토하였다. 옆의 사진들과는 달리 비장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사진이였다. 그후 윤석은 사진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대신 신문, 잡지들에 수필과 비평들을 자주 발표하군 하였다. 시대변화와 민족의 삶, 력사앞에 지닌 민중의 책임문제 등을 다룬 글들이였다.
어느날 영미가 요즘 왜 사진을 찍으려 하지 않느냐고 묻자 자기는 원래 그런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대답하는것이였다. 영미는 그가 롱을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윤석은 정색해서 말하고있었다.
하긴 이런 세월에 무슨 사진찍을 기분이 나겠는가.
첫사랑의 모습이며 즐거웠던 나날의 모습들을 사진으로 남겨주던 그 사람도 이제는 곁에 없었다. 마지막사진으로부터 벽체사이의 빈 공간이 구슬프게 안겨왔다. 그것은 자기들의 생활에 생겨난 공백이였다. 저 한장한장의 사진들과 함께 사랑과 기쁨의 노래로 흘러온 자기들의 생활이 지금은 메워질줄 모르는 하얀 공백처럼 쓸쓸한 정적속에 잠겨들고있었다.
얼마간 시간이 흘렀을 때 초인종소리가 울리였다. 서둘러 달려나간 영미는 윤석이 온것 아닌가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앞에 나타난 사람은 뜻밖에도 순화였다.
《내가 온게 반갑지 않은 모양이지요? 손님을 계속 이렇게 세워둘셈인가요?》
녀인은 언짢은 기색을 짓고 서있는 영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녀인의 눈에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가 흐르고있었다.
《영민 참 행복하겠어요.》
영미를 따라 방에 들어온 녀인이 벽에 걸린 사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째서요?》
《그인 참 다감한분이더군요. 인정도 많고. 영미가 사랑을 많이 받을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일생을 그런 사람과 함께 산다는건 행복이예요.》
《하지만 언제나 행복할수 있는건 아닌가봐요. 난 오늘 자신이 그에게 있어서 한갖 반주자에 불과했다는것을 깨달았어요. 그마저도 이젠 끝나버렸지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녀인은 《가수의 노래도 안 끝났는데 반주가 먼저 끝나다니요.》 하며 자기의 가방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들었다.
《영미네 결혼사진이예요. 마음에 들겠는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성의로 알고 받아줘요.》
영미는 몹시 불쾌하였다. 그가 왜 끝내 자기가 바라지도 않는 그런것을 들고 나타난것인지 리해할수 없었다.
《난 그것을 보고싶지 않아요. 이미 말했지만 그런것을 바라지도 않아요.》
녀인은 포장을 벗기려던 손을 멈추고 사진을 자기 무릎우에 올려놓았다.
《성의를 무시한다고 생각할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그런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거예요. 마음의 가치란것도 있지 않나요? 거기서 가져간 그 사진은 첫 시절의 우리 모습이였어요. 우린 아직도 그 사진을 찍어준 사람을 잊지 않고있어요.》
영미는 그 사진사가 자기들에게 얼마나 귀중한 벗이였는가에 대하여, 그의 인간미며 자기들의 결혼사진을 꼭 찍어주겠다고 한 약속에 대하여 녀인에게 이야기하였다.
《나는 너무도 사심없고 선량한 마음씨를 지닌분이 그때문에 고통을 겪는것을 생각할 때면 잠이 오지 않아요. 사진을 보면 금시 그의 따뜻한 미소며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는것만 같았어요. 난 그에게 실망을 주고싶지 않아요. 설사 그가 약속을 지킬수 없게 된다 해도 그 사진에 손댈수는 없어요. 그것은 내 마음에 상처만을 안겨줄뿐이예요.》
이렇게 말하고나니 마음이 어느 정도 개운해지는것 같았다. 한순간 고요가 깃들었다. 그 깊은 고요속에서 사진사의 목소리가 울려오고있었다.
《자네들 결혼사진은 내가 꼭 찍어주겠네.》
그에 대해 윤석은 벌써 잊었는지 모르지만 영미자신은 그럴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때 영미는 고요속 그 어디에선가 울려오는 흐느낌소리를 들었다. 그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울고있는것은 다름아닌 그 녀인이였던것이다. 눈물젖은 녀인의 모습이 흘러내린 긴 머리채사이로 안겨왔다.
무엇때문일가. 나의 말이 너무 가혹했는가. 아니면…
《미안해요. 이런 모습을 보이고싶지 않았는데.》
녀인은 고개를 쳐들었다. 맑은 눈물이 그들먹한 그의 두눈에 미소가 비끼고있었다.
《난 영미의 그 마음에 몹시 감동되였어요. 그를 잊지 않고있다니 쉽지 않은 일이예요. 그리고 한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함께 있다면 그는 행복한거예요.》
녀인은 영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그런데 정말 내가 그를 대신해줄수 없는 걸가?》
《약속은 대신해줄수 있는게 아니지요.》
녀인의 축축히 젖은 손이 몹시도 떨리고있었다.
《나도 한 사진사에 대해 알고있어요. 영미가 그 사진사를 알기 썩 전부터였지요. 그는 자기를 예술가라고 생각했어요. 좋은 화폭을 얻는것으로 만족을 느끼던분이였어요. 자기가 리상하는 화폭을 얻기 위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군 했지요. 그 이상의 기쁨을 몰랐어요.》
《디지털노마트족》이니, 《딩페트족》이니 하는 《신인류족》의 각이한 명칭들이 영미의 뇌리를 스쳐갔다. 자기나름의 취향에 따라 자기의 세계에서 행복을 찾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이 사회에 얼마든지 있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찍었어요. 그러나 모두 그의 시야에 잠간씩 비껴드는 하나의 화폭들이였을뿐 다른 의미는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날 그이는 나에게 어떤 청년들의 사진을 자랑삼아 보여주더군요. 후날 그들에게 사진을 주고 돌아왔을 때 난 그이의 심중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있다는것을 느끼게 되였어요.》
이때 영미의 눈앞에는 머리우에 떨어지는 비방울을 사랑의 축복인양 달게 맞으며 사진찍던 어제날의 정경이 방불하게 그려지고있었다. 그리고 윤석이 자기들을 찾아왔던 사진사와 우정을 맺던 모습도 떠올랐다. 영미는 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서로 판이한 사람들의 생활에도 어쩌면 이렇게 어슷비슷한 면이 많은것인가고 생각하였다.
《그날 청년은 사진사에게 자기가 왜 사진을 즐겨 찍는것인지 말해주었어요. 그는 통일의 길에 바쳐가는 자기의 생활을 그렇듯 긍지롭게 생각했던거예요. 그날의 사진에는 통일의 길에 자기들의 사랑을 영원히 이어갈 순결한 약속의 의미가 비껴있었어요. 그인 평범하게 보아온 청년의 아름다운 마음에 몹시 감동되였어요. 그후 통일행사장들과 투쟁현장들에서 통일애국의 길에 나선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며 자신도 그 길에 들어서게 되였지요. 지금도 그인 그들의 첫사랑의 모습을 뜨거운 애정을 안고 추억하고있어요.》
영미는 녀인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경멸감을 품고 바라보았던 그 모습에서는 지금의 자기보다 훨씬 순결한 미가 느껴지고있었다. 그런데 다음순간 영미는 전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였다.
《그 사진사가 누구인지 아세요? 그가 바로 영미가 기다리는 그 사진사였어요. 그리고…》
녀인은 영미의 손등을 다정히 어루쓸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리고 또 그인 나의 남편이예요.》
영미는 고개를 쳐들며 녀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금방 무슨 말을 했어요? 그래 그 사진사가, 그분이 남편이였다구요?》
녀인은 영미를 정겨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둘은 한참이나 그렇게 앉아있었다. 시계바늘만이 자기의 영원한 시간속에 사는 사진들우에서 덧없는 초침소리를 울리고있을뿐이였다. 초침소리는 영미의 가슴속에 무엇인가를 일깨워주며 한자욱한자욱 다가서는 누군가의 발자국소리같았다.
《왜 그 말을 이제야 하는거예요? 난 그런줄도 모르고…》
《영미, 욕많이 해요. 사실 난 악단에 왔을 때 영미가 없는것을 보고 뭔가 사연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 당장 찾아가려다 그만두었어요. 영미가 꼭 돌아올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랑하는 사람들은 오래 떨어져있지 못하는 법이니까요.》
영미는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였다. 꼭 잡은 두사람의 손등을 적시며 맑은 눈물이 떨어져내렸다.
《언니, 용서해요.》
그 녀인의 진정을 의심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영미는 고개를 다소곳하고 괴로운 한숨을 내쉬였다.
《난 요즘 생활에 대해서 더 많은것을 생각하게 돼요. 나도 이전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것을 큰 행복으로 여겼던 평범한 주부였어요. 최근에야 그이의 마음을 잘 알게 되면서 그이가 찍은 사진들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였어요. 그리고 그이를 더욱 사랑하게 되였고 그 사랑속에서 참다운 행복을 알게 되였지요. 이 사진엔 영미네가 어제날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기 바라는 우리 부부의 뜻이 깃들었어요. 영미, 그래 아직도 나의 성의를 마다하겠어요?》
녀인의 뜨거운 손안에서 영미의 하얀 손이 바르르 떨고있었다. 높뛰는 심장의 파도가 온몸에 물결쳐가고있었다.
잠시후 영미는 그와 헤여졌다.
《부탁해요. 윤석씨를 찾아가세요. 그러지요? 그는 참 훌륭한분이예요. 평생 영미만을 사랑해줄거예요. 사랑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함께 있어야 해요.》
그를 바래우고 돌아온 영미는 녀인이 앉아있던 자리에 놓여있는 사진을 보았다. 그는 하얀 포장종이를 벗기였다. 그러자 금빛액틀속에서 아름다운 결혼례복을 입고 환히 웃는 윤석과 자기의 모습이 눈부시게 안겨왔다. 그것은 분명 첫사랑의 약속을 나누던 시절의 자기들의 모습이였다.
그때 사진사가 하던 말이 다시금 가슴을 울리며 들려왔다.
《가까이 다가서라구. 그래야 조화가 맞는거라니.》
자연을 바라볼 자유마저 빼앗기고 굵은 창살사이로 세상을 보아야 하는 그에게 있어서 자기들의 모습은 이 세상에 대한 기억이였고 어둠속에서도 이제 새날이 밝으리라고 믿음을 주는 희망이기도 하였다. 어둠침침한 작은 공간을 두드리며 떨어지는 비방울소리에서도 그는 벗들의 힘찬 노래소리를 들었고 생명을 지지누르는 콩크리트짬사이를 비집고 머리솟구는 파란 잔디에서도 래일을 향해 미소짓는 아름다운 모습들을 보고있었다. 그는 윤석이와 같은 사람들의 투쟁소식을 들을 때면 마치 그들이 자기곁에 있는듯 큰 힘을 얻군 하였다.
영미는 그 사람이 엄혹한 시련을 어떻게 이겨내겠는가고 생각하고있었지만 그는 인간의 자유와 꿈을 구속하는 좁은 공간속에서도 행복을 느끼고있었다. 안해며 윤석과 영미,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의 마음속에 날이 갈수록 더욱 가까이, 더더욱 아름답게 비껴들고있었던것이다.
영미는 차마 사진을 마주볼수가 없었다. 너무도 달라진 자신에 대한 혐오감때문이였다.
그 녀인은 모진 고통속에서도 남편이 걷던 길을 이어가며 영미네를 위해 진심을 다 바쳐가고있었다. 그렇게 그들부부의 마음은 언제나 함께 있었다. 하지만 영미자신은 자기만의 행복을 찾아 정든 사람들에게서 점점 더 멀어져가고있었다.
별무리악단의 무대우에서 자기를 바라보던 녀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모습은 어제날의 그 선률속으로, 그 생활속으로 영미를 불러주고있었다. 그것은 다만 녀인의 모습만이 아니였다. 윤석의 모습이기도 했고 사진사며 정든 벗들의 모습이기도 하였다. 사랑도 우정도 오로지 통일을 위해 바쳐가며 거기서 생활의 행복을 찾는 고결한 모습들이였다.
영미에게는 지나간 나날들이 생생히 되새겨지고있었다. 윤석이 가져온 신발을 신고 그를 따라나서던 천진한 모습, 노래속에 움터난 사랑의 감정에 얼굴 붉히던 순진했던 모습이며 북과 남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통일무대를 만들자고 부르짖던 열정의 그 모습…
바로 그 모습에 반했던 윤석이였다. 그리고 사진처럼 영원히 변치 말자며 첫사랑을 약속했던것이다. 그때 윤석이 바란것은 그가 다만 반주자가 아니라 겨레앞에 한 약속을 지켜갈 자기의 신념을 노래하는 별무리들속의 별이 되여주는것이였다.
난 오늘도 림시반주자였어. 그래서 나에겐 자기의 노래가 없었던거야. 그리고 시대의 노래를 외면한 외토리별이 되였던거야.
자기들의 사진우에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을 닦고 또 닦던 영미의 귀전에 어디선가 정다운 속삭임소리가 울려왔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함께 있어야 해요.》
그는 사진을 꼭 품어안았다. 사랑이, 행복이 마음의 기슭을 적시며 밀려드는 노래의 선률마냥 자기의 가슴속에 또다시 찾아들고있었다. 행복은 첫사랑의 시절처럼 사랑의 약속을 변함없이 지켜가는 그 모습에 있었다.
녀인이 사라져간 어둠속 먼곳을 바라보는 영미의 모습엔 행복을 다시 찾은 한없는 기쁨이 어리고있었다. 방안에 홀로 남은 영미는 윤석이 못내 그리워졌다. 이때 방안의 고요를 흔들며 전화종소리가 울리였다. 영미가 송수화기를 들자 어떤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아침의 그 목이 밭은 사람이였다.
《오늘 그건 뭐요?! 우린 대단히 실망했소. 하지만 난 당신을 용서해줄수 있소. 지금 당장이라도 여기에 와주오.》
이윽고 흥분으로 떨리는 사나이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당신에게 아주 중요한 소식을 알려주겠소. 우린 곧 외국순회공연을 떠나게 된단 말이요. 윈, 빠리, 뉴욕…》
영미는 쓴웃음을 지으며 랭담한 어조로 대답하였다.
《안됐어요. 잘 가세요, 예술의 천사들.》
《뭐라구? 난 도대체 당신이…》
영미는 송수화기를 전화기우에 놓아버렸다. 그런데 잠시후 전화종소리가 또다시 울리는것이였다. 영미는 한마디 단단히 해주리라 생각하며 전화기에로 다가섰다. 그런데 다음순간 그의 얼굴엔 밝은 미소가 확 피여올랐다. 수화기에서 별무리악단의 정든 벗들의 목소리가 울려오고있었던것이다.
《영미, 어쩔셈이냐? 우린 모두 너를 기다리고있어.》
《나를? 그래 정말 나를 기다렸단 말이냐?》
《그건 무슨 소리냐? 빨리와. 우리가 마중갈테니.》
《고마워. 난 지금 너희들이 몹시 보고싶어.》
허둥지둥 옷을 갈아입고 막 문을 열고 나서던 영미는 무춤 걸음을 멈추었다. 문가에 누구인가가 우뚝 서있는것이였다. 흠칫 놀라 뒤걸음치던 영미는 이내 그 사람을 알아보았다. 비록 잘 생긴 사람은 아니였지만 언제나 정다운 그 사람, 윤석이 자기앞에 서있었다. 영미는 와락 달려가 그 품에 안기고싶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튀여나왔다.
《누굴 찾아왔어요?》
《…》
《난 이젠 당신의 반주자가 아니지 않아요?》
얄궂은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고나니 무정한 이 사나이에 대한 야속함이 솟구쳐올랐다.
《미안해. 하지만 영민 다 모를거야. 영미에게 던진 그 한마디 한마디가 십년, 백년의 고통처럼 나를 괴롭혔어. 왜냐하면…》
영미의 얼굴에 드디여 행복의 미소가 넘쳐흘렀다. 그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으로 윤석의 입을 가리우며 속삭이였다.
《그만해요. 모든건 나때문이였어요. 그 고통을 나의 선률로 가셔줄수 있을가요?》
괴로움에 잠겨있던 윤석은 눈길을 들어 자기의 안해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안해를 사랑하는 이 사나이는 처녀시절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눈동자에서 오늘 하루가 그의 인생에 백년의 세월보다 더 많은것을 가져다주었음을 심장으로 느끼고있었다.
윤석은 안해를 사나이의 넓고 억센 품에 힘껏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두볼에 손을 대고 아름다운 곡선을 따라 따뜻이 애무해주었다. 높뛰는 심장의 박동이, 따뜻한 체취가 서로의 온몸에 퍼져오고있었다.
《이렇게 함께 있으면 우린 언제나 행복할거예요.》
이날 영미는 오래동안 벗어두었던 그 신발을 신고 윤석과 함께 길을 떠났다.
어깨우에선 윤기나게 닦은 바이올린이 별빛을 받아 반짝이고있었다.
유난히도 밝은 밤이였다. 머리우에선 별무리들이 은하의 세계를 수놓고있었다.
그들은 마치 은하세계에 잇닿은 별들같았다.
《영미, 저 하늘을 봐. 하나하나의 별들이 있어 저 하늘은 깊은 밤에도 은하의 빛으로 아름다운거야. 하지만 뭇별들이 하나둘 사라지면 하늘은 빛을 잃게 돼.》
별빛을 가득 담은 영미의 맑은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이였다. 이 순간 별들은 숨을 죽이고 지상에서 울려오는 아름다운 생명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것 같았다. 윤석의 목소리가 기쁨에 웃는 별들사이를 스치며 아득히 오르는듯 하더니 이내 천사의 노래마냥 대지에 울려퍼져와 그의 온넋을 휩싸안는것이였다.
영미는 조용히 그 의미를 새겨보았다.
노래는 천년세월 변함없는 저 하늘의 별들처럼 이 땅의 통일을 위해 사랑을 다 바쳐가려는 한쌍의 부부를 축복해주는듯싶었다. 그리고 사랑과 인간의 삶에 대하여, 이 세계에 대하여, 그 불멸에 대하여 끝없는 사색을 불러일으키는것이였다.
어느 둔덕우에서 그들은 걸음을 멈추었다. 저 멀리에 어둠을 밝히며 웅실대는 초불의 대오가 바라보였다. 밤하늘의 별들이 모두 거기에 내려앉은듯싶었다. 서로 빛을 더해주며 성좌를 이루고 은하를 이루는 별들처럼 고난과 시련속에서도 사랑으로 더 뜨겁게 뭉치며 자신들의 힘으로 새날을 안아오려는 민중의 아름다운 모습이였다. 영미는 저 별무리들속에 영원히 빛나는 통일의 별로 살고싶었다.
《별무리는 영원히 아름답게 빛날거예요.》
이윽고 화음을 이룬 영미와 윤석의 노래가 대자연의 심연을 흔들며 울리여갔다.
그대곁엔 내가 있고
내곁엔 언제나 그대가 있어
…
밤하늘가로 날아오른 노래는 반짝이는 별들사이를 누비면서 끝없이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