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민족의 숙원 통일을 위하여
1) 조국통일의 기치 마련
조국통일3대헌장의 정립
외세의 간섭으로 지난 세기 40년대부터 시작된 민족분렬의 비극은 오늘까지 지속되고있다.
우리 겨레는 근 70년이나 지속되고있는 국토와 민족의 분렬로 인하여 여전히 민족적수난을 겪고있으며 평화로운 한지붕밑에서 단란하게 모여살지 못하고있다.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를 가진 우리 민족의 통일적발전이 가로막혀 온 민족의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있다.
조국통일, 이것은 우리 민족의 운명이며 더는 미룰수 없는 민족사적과제이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조국통일은 최대의 애국이다. 조국통일을 떠나서 그 누구도 민족앞에 지닌 사명과 책임을 다했다고 말할수 없다.
조국통일을 최대의 애국으로, 자신의 숭고한 사명으로 간직하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온 겨레가 겪고있는 분렬의 아픔을 어느 한시도 잊으신적이 없으시였다.
언제인가 장군님께서는 나는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열 때도 남녘겨레들을 생각하고 밤에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 때에도 남녘겨레들을 생각하면서 조국통일에 대해 생각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조국을 통일하는것은 그 누구도 막을수 없는 력사의 의지이며 우리모두는 그 길에서 모든것을 다하여야 한다는것을 언제나 강조하군 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동지날 동지죽 한그릇을 앞에 놓으시고도 분렬된 조국과 남녘겨레들을 생각하시며 조국통일의 의지를 굳히시였고 뭉텅 동강이 난 전선줄을 쥔채 분계선 산중턱에 오랜 세월 그대로 서있는 철탑을 보시고도 국토분단으로 인한 뼈저린 아픔을 심장으로 느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 있어서 조국통일은 어느 한순간도 잊을수 없는 력사적위업이였고 조국통일을 실현하는것이야말로 민족지상의 과업이고 자신께서 지니신 절대의 사명이였다. 하기에 장군님께서는 혁명과 건설사업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들을 조국통일과 련관시켜보시고 통일실현에 복종시키는 립장을 일관하게 견지해오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숭고한 조국통일의지는 민족의 대국상이후 어버이수령님의 조국통일유훈관철이라는 불변의 사명감과 결합되면서 더욱 강렬해지셨다.
당시 해당 부문 일군들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서거하심으로써 북남최고위급회담은 자연히 무산되는것으로 생각하고있었으며 8월에 예견되여있던 제5차 범민족대회도 그만두는것이 마땅한 도리로 된다고 생각을 모으고있었다.
조상중에 추모와 관련되지 않은 일체 행사를 금하는것은 조상대대로 내려온 전통적례법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을 잃은 크나큰 상실의 아픔속에서도 북남최고위급회담의 운명과 전도를 두고 깊이 생각하시며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회 위원장의 명의로 북남최고위급회담을 일단 연기한다는것을 남측에 공식통고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하시였으며 제5차 범민족대회를 예정대로 진행할뿐아니라 특색있게 크게 조직하도록 해주시였다.
이것은 수령님의 통일유훈을 기어이 관철하여 민족최대의 숙원인 조국통일을 반드시 실현해야 한다는것을 민족앞에 지니신 자신의 력사적사명으로, 무거운 책임감으로 받아안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만이 내리실수 있는 중대조치였다.
정세가 어떻게 변하고 환경이 어떻게 달라지든 어버이수령님의 필생의 뜻을 받들어 통일성업을 반드시 이룩하시려는 장군님의 신념과 의지는 확고부동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 서거 100일중앙추모회가 진행된 주체83(1994)년 10월 16일 일군들과 자리를 같이하시고 조국통일을 이룩하는것은 수령님의 유훈이며 온 민족이 통일된 조국에서 화목하게 잘살도록 하시려는것이 수령님의 뜻이였다고,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수령님께서 그처럼 바라시던 조국통일의 력사적위업을 기어이 성취하여 수령님의 생전의 뜻을 꽃피워야 한다고 자신의 통일의지를 엄숙히 천명하시였다.
주체85(1996)년 11월 24일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의 조국통일유훈을 기어이 실현하실 의지를 안으시고 판문점을 찾으시였다.
판문점으로 말하면 다른 전연지대와는 달리 중앙분리선을 사이에 두고 쌍방이 총부리를 겨누고있는 최전연의 가장 위험한 곳이다. 더우기 이해 11월에 들어서면서 남조선당국의 남북페쇄정책과 광란적인 군사적도발책동으로 말미암아 판문점일대에는 다치면 터질듯 한 초긴장상태가 감돌고있었다.
이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형언할수 없는 감회를 안으시고 판문점에 건립한 어버이수령님의 통일친필비를 찾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한동안 친필비너머 하늘가 먼곳을 바라보시였다.
수령님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장군님께서는 비에 새겨진 《김일성 1994. 7. 7.》이라는 글발에서 오래동안 눈길을 떼지 못하시였다.
이 친필은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시기에 어버이수령님께서 민족분렬의 비극을 가시고 조국통일성업을 이룩하기 위한 력사적문건에 남기신것이다.
장군님께서는 동행한 일군들을 둘러보시며 자신께서는 분렬의 상징인 판문점을 통일의 상징으로 바꾸어놓으려는 념원에서 해마다 해내외의 수많은 통일운동자들이 모여 통일행사를 벌리는 이곳 판문점에 조국통일의 구성이신 수령님의 친필비를 세우도록 하였다고 하시였다. 그러시고 화강석비돌에 새겨진 수령님의 친필을 바라보시면서 비에 새겨진 수령님의 친필은 불과 아홉 글자밖에 되지 않지만 여기에 담겨진 뜻은 수천수만자의 비문으로도 대신할수 없는 거룩하고 위대한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판문각로대에까지 나가 적정을 알아보시고 다시 친필비앞으로 오신 장군님께서는 수령님의 친필비앞에 이렇게 서니 생각되는것이 많다고 하시면서 수령님께서 조국통일위업에 기울여오신 수많은 낮과 밤들을 감회깊이 돌이켜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라가 분렬된 첫 시기부터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민족의 분렬을 누구보다 가슴아파하시며 조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불면불휴의 심혈을 다 바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위한 로선과 방침, 방안과 제안들을 몸소 구상하시고 작성하시였으며 그것을 해마다 보고와 연설, 담화를 통하여 천명하시였는데 그 수는 수백권에 달할것이다. 북과 남이 합의하고 민족앞에 엄숙히 선언한 조국통일3대원칙도, 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립방안도,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도 다 우리 수령님께서 내놓으신 가장 합리적인 조국통일방침이다. 수령님께서 내놓으신 조국통일3대원칙, 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립방안,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 이것이 조국통일의 3대기둥, 3대헌장이라고 말할수 있다. 항일혁명투쟁시기를 내놓으면 우리 수령님의 한생은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의 한생이였다고 할수 있다.
장군님의 추억깊은 말씀은 계속되였다.
조국통일을 위하여 온갖 심혈을 다 바쳐오신 수령님께서는 생애의 마지막나날에도 전체 조선인민에게 통일된 조국을 안겨주시려고 분망한 시간을 보내시면서 조국통일을 위한 문건에 마지막친필을 남기시고 갑자기 순직하시였다. 수령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이 력사적인 친필에는 수령님의 강의한 통일의지와 신념이 함축되여있고 조국통일에 대한 수령님의 확신이 담겨져있다.
우리는 수령님의 념원과 의지대로 조국을 반드시 통일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신 장군님께서는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과업과 방도에 대하여 밝혀주시면서 조국통일을 위한 강령적지침으로 되는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위대한 사상, 위대한 철학이 있다고 하시며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서의 승리에 대한 확신을 표명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판문점시찰은 분렬과 대결의 상징으로서의 판문점의 력사에 종지부를 찍은 일대 사변이였다.
하기에 남조선의 주요신문들도 위대한 장군님의 판문점시찰은 《우리 민족에게 통일선물을 안겨주시려는 민족적거사》, 《조국통일의 봉화를 지펴올리신 민족의 일대 장거》, 《분렬의 상징인 판문점을 통일의 상징으로 전환시키신 력사적쾌거》라고 하면서 널리 보도하였다.
이렇게 판문점시찰을 통하여 자신의 드팀없는 통일의지를 피력하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낮과 밤이 따로없이 선군령도의 자욱을 이어가시는 그 바쁘신 가운데서도 조국통일문제를 두고 끊임없는 사색과 심혈을 바쳐가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의 조국통일사상과 령도업적을 종합집대성하고 그에 기초하여 새로운 력사적시대에 조국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한 투쟁에서 근본지침으로 삼아야 할 사상과 로선을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86(1997)년 8월 4일 고전적로작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조국통일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자》를 발표하시였다.
로작의 글줄마다에는 온 겨레의 통일기운을 다시 불러일으켜 어버이수령님의 조국통일유훈을 기어이 실현해나가시려는 장군님의 철석의 의지가 넘쳐흘렀다.
장군님께서는 로작에서 조국통일을 위한 우리 인민의 반세기에 걸치는 투쟁력사를 총화하시고 탁월한 사상과 령도로 조국통일위업을 개척하시고 승리에로 이끄시여 통일의 튼튼한 토대를 닦으시고 그 밝은 전망을 열어놓으신 어버이수령님의 불멸의 업적을 전면적으로 종합집대성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께서 나라가 분렬된 첫날부터 안팎의 분렬주의자들의 《두개 조선》조작책동을 단호히 짓부시며 조국통일을 민족지상의 과업으로 내세우시고 일관하게 하나의 조선로선, 통일로선을 견지하시였으며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을 현명하게 령도하시여 조국통일운동을 전민족적인 운동으로 강화발전시키신데 대하여서와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국통일의 근본원칙과 방도를 밝힌 조국통일3대헌장을 제시하시여 나라의 통일위업수행에서 견지하여야 할 지도적지침을 마련하신데 대하여 지적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로작에서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3대원칙은 조국통일문제를 민족의 의사와 리익에 맞게 민족자체의 힘으로 풀어나갈수 있는 근본립장과 근본방도를 천명한 조국통일의 초석이라는데 대하여,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은 온 민족의 단합을 이룩하여 조국통일의 주체적력량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강령이라는데 대하여 그리고 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립방안은 통일국가의 전모와 그 실현방도를 밝힌 설계도이라는데 대하여 밝혀주시면서 조국통일3대원칙과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 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립방안을 조국통일3대헌장으로 새롭게 정립해주시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로작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조국통일3대원칙과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 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립방안은 김일성동지께서 위대한 주체사상과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과정에 이룩하신 고귀한 경험에 기초하여 조국통일의 근본원칙과 방도들을 전일적으로 체계화하고 집대성한 조국통일의 3대헌장이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조국통일3대원칙과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 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립방안을 조국통일의 3대기둥, 3대헌장으로 규정하신것은 통일운동의 방향과 리정표를 뚜렷이 아로새긴 력사적사변으로 된다.
조국통일은 어느 한 계급, 계층의 문제가 아니라 북과 남, 해외의 전민족적힘을 모아야 할 거족적인 사업으로서 각계각층의 민족성원모두가 하나같이 조국통일을 위한 사업에 떨쳐나서야 실현될수 있다. 민족성원들모두가 스스로 접수하고 받아들일수 있는 민족공동의 대헌장이 있어야 하는 리유가 여기에 있다.
조국통일3대헌장은 민족의 자주권과 존엄을 생명으로 여기는 민족자주정신으로 일관되여있으며 북과 남의 화해와 전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여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하려는 숭고한 조국애와 민족애를 구현하고있다. 3대헌장은 북과 남에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가 오래동안 존재하여온 현실적조건과 통일을 갈망하는 온 민족의 한결같은 지향에 맞게 하루빨리 조국통일을 실현할수 있는 가장 공명정대하고 합리적인 방도를 밝혀주고있다.
3대헌장에 밝혀져있는 조국통일의 근본원칙들과 방도들을 변함없이 고수하고 실현해나간다면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에서 반세기이상이나 서로 다른 리념을 가지고 살아온 북과 남, 해외의 온 겨레가 조국통일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하여 보조를 같이하고 조국통일위업수행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성과적으로 풀어나갈수 있다. 여기에 위대한 장군님께서 정립하신 조국통일3대헌장이 가지는 력사적의의가 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로작에서 또한 수령님의 필생의 뜻을 받들어 앞으로 어떤 정세와 어떤 환경속에서도 조국통일3대헌장에 기초하여 조국통일위업을 실현해나갈 확고한 의지와 결심을 표명하시면서 그 의지, 그 결심을 실현하기 위한 근본문제를 밝혀주시였다.
- 나라의 통일문제는 어디까지나 민족자주의 원칙에서 해결하여야 한다.
- 온 민족이 민족대단결의 기치아래 굳게 뭉쳐 조국통일의 주체적력량을 튼튼히 마련하여야 한다.
- 조국통일을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방법으로 실현하려는것은 우리의 원칙적립장이며 우리 당의 변함없는 로선이다.
- 우리 조국의 통일문제를 순조롭게 해결하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방도는 련방제방식에 기초하여 나라의 통일을 실현하는것이다.
장군님께서는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실현하는데서 절박한 요구로 나서고있는 북남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당면대책들도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발표하신 이 로작은 새시대의 요구에 맞게 통일문제, 민족문제해결에서 나서는 제반 원칙적문제들에 전면적인 해답을 주고 어버이수령님의 유훈을 관철하여 조국통일위업을 완성할수 있는 진로를 밝힌 새로운 조국통일총서로서 분렬의 어둠을 헤가르는 통일의 밝은 홰불이였다.
온 겨레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로작사상대로만 하면 민족의 살길이 열리고 통일의 날도 반드시 다가올것》이라고 하면서 장군님의 력사적로작을 《조국통일에 대한 확고한 신심과 크나큰 용기를 새롭게 안겨주는 애국애족의 홰불》, 《조국통일의 휘황한 앞길을 밝혀준 통일대강》이라고 높이 칭송하였다.
미국 하바드대학의 한 고급연구원은 1997년 8월 30일 방송기자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김정일북조선령도자가 얼마나 강한 사회주의고수론자이고 자기가 달성하려는 목표에 대한 요구를 얼마나 높이는가 하는것은… 최근 광복절 52주년에 즈음하여 발표한 론문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조국통일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자〉를 보아도 알수 있다. 론문은 조선반도의 통일은 오직 조선반도의 북과 남, 해외의 조선민족자신의 힘으로 해결하여야 하며 또 반드시 그렇게 할수 있다는것을 진지하게 강조하고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어버이수령님의 조국통일사상과 로선을 전면적으로 종합체계화하여 조국통일3대헌장으로 정립하심으로써 변화된 환경에서 통일운동을 더 활력있게 전개해나갈수 있는 근본지침이 마련될수 있었고 온 겨레는 조국통일투쟁을 더욱 힘차게 벌려나갈수 있게 되였다.
민족대단결이자 조국통일
우리 민족의 최대의 숙원인 조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온 민족이 하나로 굳게 단결하여야 한다.
그것은 조국통일이 민족의 일부 계급과 계층을 위한 사업이 아니라 전민족적인 위업이며 따라서 그것은 민족의 운명을 생각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귀중히 여기는 모든 애국력량의 단합된 투쟁에 의해서만 개척될수 있기때문이다.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자면 차이성은 줄이고 공통성은 끊임없이 늘여나가야 한다. 민족적공통성은 민족의 모든 성원들을 하나의 뉴대로 이어주는 사상정신적결합의 기초이다.
우리 민족이 민족대단결을 이룩하여 조국을 통일하자면 겨레의 가슴속에 깊이 간직된 민족적공통성을 적극 살리고 고수해나감으로써 그것이 통일의 튼튼한 기초로 되게 하여야 한다.
북과 남이 분렬된 상태에서 오래동안 갈라져 살게 되면 민족대단결의 기초인 민족성이 이질화되여 우리 민족은 단결의 기초를 잃고 영원히 둘로 갈라질수 있다. 조선민족이라면 민족을 단합시키는 기초인 민족적공통성이 이질화되는것을 매우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막아야 하며 그러자면 하루빨리 민족의 대단결로 조국통일의 력사적위업을 성취하여야 한다.
조국통일위업수행에서 민족대단결이 가지는 의의와 중요성을 깊이 통찰하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김일성주석께서 이룩하신 민족대단결의 력사를 빛나게 계승하고 애국애족의 기치아래 전민족의 대단결을 새로운 높은 단계에서 실현하시여 조국통일위업을 빛나게 실현해나갈 강력한 원동력을 마련해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일찌기 1960년대초에 벌써 조국을 통일하기 위하여서는 민족이 단결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조국통일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항일혁명투쟁시기에 몸소 밝혀주신 조국광복회10대강령의 민족단결사상에 따라 전민족이 일치단결하여 쟁취하여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이처럼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민족단합의 사상과 그이께서 이룩하신 풍부한 업적과 경험, 전통을 고수하고 드팀없이 계승하여 온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며 기어이 조국을 통일하려는것은 장군님의 확고한 결심이고 의지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민족적단결의 사상적기초는 모든 민족성원들의 공통된 사상감정인 조국애와 민족애라는데 대하여 밝혀주시면서 민족대단결로 조국통일위업을 실현하기 위하여 온갖 심혈을 다 바치시였다.
1998년에 들어서면서 조국통일운동의 앞길에는 새로운 정세가 조성되였다.
조국통일의 주체적력량이 더욱 강화되고있던 이해 2월 남조선에서 반통일적인 《문민정부》가 종말을 고하고 《국민의 정부》가 들어앉았다.
일일천추로 통일을 갈망해온 북과 남, 해외의 온 민족은 남조선에서의 《정권》교체와 더불어 동족사이에 대결과 반목이 아니라 화해와 단합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였다.
겨레의 이 기대에 부응하여 1998년 2월 18일 공화국의 정당, 단체들은 평양에서 련합회의를 열고 북과 남이 단합하여 자주적으로 민족의 출로를 열어나가기 위한 대책을 토의하였으며 남조선 정당, 단체들에 보내는 편지를 채택하였다.
하지만 남조선당국자들은 이른바 《해볕정책》이라는것을 들고나와 반민족, 반통일적인 대결정책의 낡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조국통일운동에서 새로운 전환적계기를 열어놓고 온 민족의 대단합을 보다 높은 수준에서 이루어나가기 위하여 주체87(1998)년 4월 18일 력사적인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대표자련석회의 50돐기념 중앙연구토론회에 보내신 서한 《온 민족이 대단결하여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이룩하자》에서 민족대단결5대방침을 제시하시였다.
서한은 어버이수령님의 주체적인 민족대단결사상을 조성된 정세의 요구에 맞게 심화발전시킨 력사적문헌이며 현시기 민족대단결실현에서 나서는 모든 리론실천적문제들에 전면적인 해답을 준 민족대단결총서이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서한에서 어버이수령님께서 독창적이고 민족애에 넘친 숭고한 민족대단결사상을 제시하시고 그것을 전 생애를 바치시여 훌륭히 구현하심으로써 민족대단결의 숭고한 모범을 창조하신데 대하여 밝히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께서 내놓으신 민족대단결사상의 본질과 정당성, 의의에 대하여 론술하시면서 수령님의 민족대단결사상은 민족의 자주성을 옹호하고 실현하기 위하여 사상과 리념, 정견과 신앙의 차이, 재산의 유무와 사회적지위에 관계없이 모든 계급, 계층이 민족공동의 요구와 리익을 첫자리에 놓고 하나로 굳게 단합할데 대한 사상이며 바로 이러한 사상이 제시됨으로써 우리 민족은 대단결을 이룩하고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자주적으로 개척해나갈수 있는 위력한 사상정신적무기를 가지게 되였다는데 대하여 밝혀주시였다.
그이께서는 계속하여 민족의 단결을 위해 기울여오신 어버이수령님의 평생의 로고를 뜨겁게 회고하시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내놓으신 민족대단결사상과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 수령님께서 이룩하신 민족대단결의 고귀한 경험과 업적은 우리 조국과 민족의 만년재보이며 온 민족의 대단결과 조국통일을 위한 튼튼한 밑천이라고 강조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께서 남기신 민족단합의 위대한 사상과 업적, 풍부한 경험과 전통을 고수하고 드팀없이 계승하여 온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고 기어이 조국을 통일하시려는 확고한 결심과 의지를 펼치시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서한에서 이렇게 지적하시였다.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의 민족대단결사상과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을 높이 받들고 북과 남, 해외의 온 민족의 대단결을 위하여 적극 투쟁하여야 하며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이룩하여야 합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의 민족대단결사상을 현실발전의 요구에 맞게 심화발전시킨 민족대단결5대방침을 제시하시였다.
여기에는 새로 들어앉은 남조선《정부》가 선행《정권》의 비참한 말로에서 교훈을 찾고 새 출발의 용단을 내리도록 촉구하는것과 함께 민족의 대단합을 보다 높은 수준에서 이룩해나가시려는 위대한 장군님의 한없이 넓은 도량과 아량이 뜨겁게 흘러넘치고있었다.
특히 장군님께서 수령님께서 밝혀주신 민족대단결사상과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을 변함없이 들고나가야 한다고 하시면서 남조선의 로동자, 농민, 지식인, 청년학생, 도시소자산계급, 민족자본가와 정치인, 경제인, 문화인, 종교인, 군인들이 민족공동의 리익을 귀중히 여기고 나라의 통일을 바란다면 민족대단결의 기치밑에 단합하여야 한다는것을 밝히신것은 자신의 통일의지, 민족대단결의지를 밝히신것으로 하여 세상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서한에서 민족의 대단결은 철저히 민족자주의 원칙에 기초하여야 한다고 하시였다.
민족자주의 원칙은 민족문제해결의 핵이며 전민족대단결의 기초의 기초이다. 민족자주의 원칙이 민족문제해결의 핵으로, 전민족대단결의 기초의 기초로 되는것은 민족의 자주성이 민족의 생명이며 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위한 근본담보로 되기때문이다.
민족은 자주성을 생명으로 하는 사회적집단이고 운명공동체이다. 민족이 자주성을 상실하고 외세의 지배와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민족적천대와 멸시, 망국노의 운명을 면치 못한다. 민족의 자주성에 민족의 존엄과 영예가 있고 거기에서 민족적긍지와 민족의 강의한 의지와 기상이 표현된다.
단결과 협력은 민족의 존재방식이다. 단결하고 협력해야 자주성을 옹호하고 실현할수 있다. 민족공동의 생명인 자주성을 지키고 실현하자면 필연적으로 민족성원모두의 단결과 협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민족자주의 원칙이 민족문제해결에서 핵으로 되며 전민족대단결의 기초의 기초로 된다는것을 말해주는것이다.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은 전국적범위에서 민족의 자주권을 확립하기 위한 투쟁이며 통일조국의 자주적발전과 민족공동의 번영을 이룩하기 위한 투쟁이다.
따라서 오직 민족자주의 원칙에 기초하여 전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할 때만이 우리 민족이 자기 운명의 참다운 주인으로 될수 있고 조국통일과 민족번영의 위대한 추동력으로, 결정적력량으로 될수 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서한에서 북과 남에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가 존재하는 현실적조건에서 민족대단결을 이룩하자면 애국애족의 기치, 조국통일의 기치밑에 단결해야 한다고 밝혀주시였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자기의 민족성을 귀중히 여기는것은 민족성원들의 공통된 심리이며 사상감정이다. 우리 민족은 자기 조국과 민족을 열렬히 사랑하며 민족의 넋을 소중히 간직하고 이어나가는 민족성이 강한 민족이다. 우리 민족의 애국애족의 정신과 고유한 민족적기질은 온 민족의 대단결을 위한 튼튼한 사상정신적기초로 된다. 또한 민족분렬의 고통속에 살아온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조국통일은 최대의 민족적요구로 제기되고있다. 조국통일의 기치야말로 민족공동의 투쟁의 기치, 전민족대단결의 기치로 되고있다.
장군님께서는 북과 남, 해외의 온 민족이 사상과 제도, 정견과 신앙의 차이에 관계없이 계급, 계층의 리해관계를 뛰여넘어 애국애족의 기치, 조국통일의 기치아래 굳게 단결하여야 한다고 지적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서한에서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기 위하여서는 북과 남사이의 관계를 개선하여야 한다고 하시였다.
북남관계를 개선하는것은 민족대단결을 이룩하기 위한 절실한 요구이다.
민족적단결이 그 구체적형태와 조건이 어떻든 호상리해를 통하여 형성되는것이므로 불신과 오해를 해소하고 호상신뢰를 구축하는것이 필수적전제로 된다. 그것은 또한 정치적대결관계를 화해의 관계로 전환시킬것을 필수적요구로 제기하는것이다.
북과 남에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가 존재하는 조건에서 상대방의 사상과 제도를 부인하면 대결을 피할수 없다. 북과 남은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의 존재를 인정하는 기초우에서 화합을 이룩하고 공존, 공영, 공리를 도모하면서 조국통일의 길을 함께 열어나가야 한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서한에서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기 위하여서는 외세의 지배와 간섭을 반대하고 외세와 결탁한 민족반역자들, 반통일세력을 반대하여 투쟁하여야 한다고 하시였다.
장장 수십년간에 걸치는 민족의 분렬은 외세의 지배와 간섭정책의 산물이며 그것은 외세에 추종하여 민족의 고통은 뒤전에 놓고 동족과의 대결에 광분하고있는 사대매국적인 반통일세력의 책동으로 더욱 장기화되고있다.
북과 남, 해외의 온 민족은 외세의 지배와 간섭을 반대하는 거족적인 투쟁을 벌려 민족적단합과 조국통일을 방해하는 근원을 철저히 없애야 하며 이와 함께 나라와 민족의 운명은 안중에 없이 일신의 부귀영화와 당리당략을 위하여 외세와 결탁하는 민족반역자들의 반통일적정책, 민족분렬책동을 반대하여 적극적으로 투쟁하여야 한다.
장군님께서는 애국적인 통일민주력량은 분렬주의자들의 교활한 리간, 와해책동에 경각성을 높이고 그에 단결의 힘으로 맞서나가야 한다고 하시면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모든 정당, 단체들, 각계층 인사들과 인민들은 민족적단합과 조국통일의 대업을 지상의 요구로 내세우고 단결을 강화하며 통일애국의 대오를 끊임없이 확대하고 조직적으로 튼튼히 결속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서한에서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기 위하여서는 북과 남, 해외의 온 민족이 서로 래왕하고 접촉하며 대화를 발전시키고 련대련합을 강화하여야 한다고 밝혀주시였다.
우리 민족내부에 비록 사상과 리념, 정견과 신앙에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북과 남, 해외의 모든 동포들이 자유로이 래왕하고 접촉하며 대화와 련대련합을 적극 실현해나가면 서로의 리해와 신뢰를 두터이 하고 민족공동의 목적인 조국통일을 위하여 뜻과 힘을 합칠수 있다.
북과 남사이의 대화는 민족공동의 리익을 앞세우고 북남간의 불신과 대결상태를 해소하며 모든것을 조국통일에 복종시키는 원칙에서 진행하여야 한다.
온 민족의 대단결은 해내외의 모든 동포들이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서 련대련합하여 공동투쟁을 벌리는 과정에 이루어지고 더욱 공고화된다.
북과 남, 해외의 모든 정당, 단체들, 각계각층 동포들은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서 서로 지지하고 보조를 같이하면서 공동행동을 힘있게 벌려야 한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민족대단결5대방침에서 남조선당국자들이 정책전환을 하여 반북대결정책을 련북화해정책으로 바꾼다면 북남관계가 신뢰와 화해의 관계로 발전하게 될것이며 민족적단합과 조국통일을 실현하는데서 새로운 국면이 열리게 될것이라는 원칙적립장을 명백히 밝히시였다. 남조선당국자들이 진정으로 애국애족의 립장, 련북단합의 립장에 선다면 그들과 민족의 운명을 함께 개척해나갈수 있다는것이 바로 위대한 장군님의 숭고한 뜻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제시하신 민족대단결5대방침은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과 함께 민족애와 민족자주정신에서 출발하여 그 어떤 계급, 계층의 리해관계나 지역적리익보다 민족의 리익을 우선시하는 애국애족의 경륜이다. 또한 그것은 반세기이상이나 지속되여온 민족내부의 대결을 끝장내고 화해와 단합을 이룩하며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통일의 길을 개척해나갈수 있게 하는 통일강령이다. 바로 여기에 위대한 장군님의 민족대단결5대방침이 가지는 무한한 생활력이 있으며 거대한 무게가 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발표하신 로작은 투철한 민족자주의 원칙과 열렬한 애국애족의 일념, 강렬한 통일의지로 일관된것으로 하여 내외의 일치한 공감과 지지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서울과 부산, 광주를 비롯한 남조선 각지의 거리들에는 《김정일장군님의 민족대단결사상은 통일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이 지녀야 할 참다운 민족관이며 애국관이다》, 《김정일장군님의 민족대단결사상을 받들어 조국통일을 앞당기자》는 내용의 대자보들이 나붙어 사람들을 크게 격동시켰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조국통일3대헌장과 함께 민족대단결5대방침을 통일의 대강으로 제시하신것은 온 겨레를 뚜렷한 목표와 방도를 가지고 통일운동에로 힘있게 떨쳐나설수 있게 한 불멸의 공적으로 된다.
2) 우리 민족끼리의 기치밑에
숭고한 민족애를 지니시고
세기가 교체되는 2000년의 봄이 찾아왔다.
이해의 봄은 우리 겨레로 하여금 그 어느때보다도 통일에 대한 밝은 희망을 가지고 그 투쟁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설것을 예고해준 류다른 봄이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우리 공화국은 류례없이 엄혹했던 고난의 행군을 승리적으로 결속하고 민족자주의 기치를 빛나게 고수함으로써 조국통일의 보루로 더욱 굳건히 다져졌다.
우리 민족의 통일열기도 전례없이 앙양되였는데 특히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을 위한 99통일대축전 10차 범민족대회(략칭 범민족통일대축전)를 계기로 북과 남, 해외의 3자련대가 실현됨으로써 통일운동이 전민족적범위에서 더한층 조직화, 적극화되였다. 이리하여 통일을 지향하는 애국세력과 반통일분렬세력사이의 력량관계는 조국통일에 더욱 유리하게 전변되였다.
대세의 흐름에 편승하여 남조선의 보수적인 정치인들과 집권상층들까지 북남관계개선과 나라의 통일문제를 집권유지의 명분으로 내세우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남조선당국자도 2000년 3월 베를린선언을 발표하고 북남관계개선에 대한 저들의 립장을 표시하였다.
그 어떤 주의주장도, 어제날의 행적도 통일이라는 대의앞에서는 문제시되지 않는다. 내 나라, 내 겨레에 대한 립장과 관점이 중요한것이다. 민족적량심을 가지고 조국통일을 위해 손을 내민다면 그가 누구이든 마다할 리유가 없다. 지금이야말로 수령님께서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시기에 남기신 통일유훈을 실현해야 할 시기이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이러한 웅지를 지니시고 김일성주석의 유훈을 받들어 북남최고위급회담을 마련하실 구상을 무르익히시였다.
마침내 위대한 장군님의 구상과 통일의지, 담대한 결단에 의하여 이해 4월 북과 남은 다가오는 6월에 평양에서 수뇌상봉과 최고위급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하였음을 내외에 선포하는 4. 8북남합의서가 세상에 나오게 되였다.
7. 4북남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3대원칙을 다시금 확인하고 력사적인 평양상봉과 북남최고위급회담을 가질것을 겨레앞에 확약한 4. 8북남합의서의 발표는 민족사적사변의 도래를 예고한 첫 포성이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한없이 넓은 도량과 숭고한 민족애를 지니시고 력사적인 평양상봉과 최고위급회담이 겨레의 가슴속에 조국통일의 밝은 서광을 안겨주는 획기적인 계기가 되도록 정력적으로 이끌어주시였다.
온 세계와 우리 겨레의 이목이 집중된 주체89(2000)년 6월 13일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남측 당국자일행을 영접하시기 위하여 몸소 비행장으로 나오시였다.
순간 폭풍같은 《만세!》의 환호성이 터져올라 천지를 진감하였고 드넓은 비행장은 감격과 격정의 파도로 설레였다.
남측 당국자를 어떻게 맞아주겠는가에 초점을 맞추던 세계의 언론들 특히 남측 언론들은 꿈같은 현실앞에 깜짝 놀랐다.
비행장에서 력사적인 평양상봉을 실황중계하던 남조선의 《KBS》 기자도 《조금있다 김대중대통령이 도착한다. 김영남위원장이 영접하게 된다.》고 말을 떼다가 갑자기 폭풍같은 《만세!》의 함성이 터져나오고 환희의 기쁨으로 설레이는 환영군중들속으로 위대한 장군님께서 나오시는것을 보고 한동안 어안이 벙벙해있다가 본사로부터 독촉을 받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너무너무 예상을 뒤집어엎는 사변이 일어나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며 격정에 넘쳐 평양상봉소식을 전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비행장에까지 나오시여 남조선당국자를 따뜻이 맞이하신것은 그야말로 세인을 놀래운 《파격적인 례우》였다. 이 하나의 사실에서 세계는 김정일장군님의 민족애가 얼마나 숭고하고 뜨거운가를 실감하였다.
남측 당국자는 국방위원장님께서 직접 공항에까지 나오시고 또 평양시민들이 이렇듯 동포애의 정으로 열렬히 환영해주니 감개무량하고 정말 몸둘바를 모르겠다고 하면서 국방위원장님께 다시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고 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남측 당국자를 따뜻이 맞이하신 후 함께 차를 타고 가면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시며 그를 승용차로 안내하고 자신께서는 그 옆자리에 오르시였다.
외교관례나 상식을 벗어난 이 모든것을 TV와 대형전광판앞에서 실황으로 지켜보고있던 전세계와 남녘동포들은 장군님의 도량과 풍모에 반하고말았다.
일본의 《도꾜신붕》은 《김대중을 맞이한 북조선 김정일총비서특유의 파격적인 대응은 너무도 예상외여서 한국대표단으로서는 한대 얻어맞은것 같이 얼떨떨해지고말았다.》라고 하였고 남조선의 《경향신문》(2000년 6월 14일부)은 《김정일국방위원장이 김대중대통령일행을 맞이하기 위해 직접 비행기앞에까지 나와서 기다리고있었다는것부터가 명실공히 충격적이였다. 특히 화면에 비친 그이의 일거수일투족은 시종 활기에 차있고 지극히 허심탄회하고 자연스러워서 어찌 보면 차라리 자유세계에서 들어간 우리 김대통령보다 그이쪽이 더 자신만만하고 자유분방해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러면서도 추호나마 례의에 어긋나는 일없이 손님을 맞이하는 정중함은 시종 잃지 않고있었다.
의례적인 몸짓이 아니라 정말로, 진정으로, 뜨겁게, 허심탄회하게 반가와하는것이 알알하게 속속들이 살갗으로 깊이 와닿는 점도 여간 놀랍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열화같은 민족애를 지니시고 북남최고위급회담을 성공에로 이끄시는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위인적풍모는 온 민족을 끝없는 매혹의 세계로 이끌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력사적인 평양상봉의 2박3일동안에 많은 시간을 남측 당국자일행과의 사업에 바치시며 애국애족의 사상과 철의 론리로 조국통일의 새로운 리정표로 될 북남공동선언을 마련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6월 14일에 진행된 단독회담에서 남측 당국자가 먼저 발언하도록 하시였으며 그가 베를린선언과 그것을 그대로 옮겨놓은 《친서체계》의 내용을 되풀이하는것을 오랜 시간 마지막까지 주의깊게 들어주시였다. 그러시고 그의 발언이 끝났을 때에는 우리 수뇌들이 처음으로 만난것만큼 전세계의 이목이 여기에 집중되고 7천만겨레의 시선이 쏠리고있다고 하시면서 2000년대의 첫해에 우리가 처음으로 상봉하는것만큼 7천만겨레에게 조국통일에 대한 희망과 미래에 대한 락관을 주는 선언적인 문건을 하나 내놓는것이 좋겠다는 뜻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우리의 민족문제는 어디까지나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하지 않겠는가고 하시며 남측 당국자의 의향을 물어보시였다. 반대없다는 그의 대답을 들으신 장군님께서는 그러면 오늘 우리들사이에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나가자는데 합의한것으로 하자고 말씀하시였다.
이날 여러 시간에 걸쳐 진행된 단독회담에서는 민족의 힘을 모아 자주적으로 통일을 이룩할데 대한 문제를 비롯하여 통일방도에 관한 문제와 흩어진 가족, 친척들의 방문단교환문제, 각 분야에서의 협력과 교류를 실현할데 대한 문제, 당국대화재개문제 등 북남대화와 통일실현에서 나서는 원칙적이고도 중요한 현안문제들이 폭넓고 진지하게 론의되고 합의를 보았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지니신 민족중시사상과 숭고한 민족애는 마침내 투철한 민족자주선언이자 통일지향선언인 6. 15북남공동선언을 탄생케 하였다.
선언문의 핵은 우리 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는것이다. 우리 민족끼리의 본질적의미는 우리 민족의 숙원인 조국통일을 그 어떤 외세의 간섭도 없이 우리 민족자체의 힘으로, 철저한 자주의 원칙에서 이룩해나가자는것이다.
우리 민족끼리는 우리 민족이 새 세기에 들어서면서 온갖 내외반동들의 반통일책동을 단호히 짓부시고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자주통일의 그날을 확고히 이룩할수 있게 하는 민족공동의 투쟁기치이다.
민족공동의 투쟁의 기치를 마련해주고 조국통일의 지름길을 마련해주신 바로 여기에 위대한김정일장군님의 숭고한 민족애의 세계가 그대로 비껴있다.
우리 민족끼리라는 대명제가 제시됨으로써 북과 남은 대결과 불신이 아니라 화해와 단합이라는 민족공조의 새로운 길에 들어서게 되였으며 정치, 경제, 문화의 여러 면에서 민족공동의 번영을 이룩하고 조국통일을 앞당겨나갈수 있는 새로운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맞이할수 있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위인의 숭고한 풍모와 민족애로 남측 당국자와 그 일행을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상봉의 나날 남측 당국자와 함께 걸으실 때는 그를 항상 앞세우시였으며 담화를 나누실 때에는 언제나 그에게 먼저 말을 하게 하시였다. 오찬때에는 그가 앉은 의자까지 여겨보시고 불편해할세라 팔걸이의자로 바꾸어앉히도록 하시였다. 또한 한때 남측 당국자의 옥바라지를 해주며 마음고생을 많이 했을 그의 부인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돌리시였으며 그의 소망대로 옛 선생도 만나게 해주시고 우리 녀성들과의 상봉도 마련해주시였을뿐아니라 전기간 남측 당국자와 한자리에 있게 해주시고 차도 같이 타고 다니게 해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남측 당국자가 평양을 떠나갈 때에도 그를 자신의 차에 태우고 수많은 평양시민들의 환송을 받도록 해주시였을뿐아니라 이번에 《대통령》께서 년로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평양에 오셔서 수고가 많았다고, 이제는 건강을 돌보셔야 한다고, 건강하셔야 민족앞에 다진 약속을 잘 리행해나갈수 있다고 당부하기도 하시였다.
평양상봉을 통하여 위대한 장군님의 위인상에 매혹된 남조선의 각계층 인민들은 한결같이 장군님을 《장군중의 장군》, 《바다같이 열린 성격을 소유하신분》, 《열정적이고 정열에 넘치신분》, 《판단력이 뛰여나신분》이라고 칭송해마지 않았다.
특히 《KBS》, 《MBC》, 《시사져널》을 비롯한 남조선의 언론들은 《김정일국방위원장이 보여준 따뜻한 정성과 성심, 환대와 수고, 준비와 노력은 국제사회의 국가수반외교와는 비교할수 없는 진한 피줄의 흐름이요, 최고의 영접이였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지금 세계가 우리를 주목한다면서 환한 얼굴로 례절을 다해 우리 민족의 특별한 정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고 하면서 그이께서 지니신 숭고한 민족애에 대하여 대서특필하였다.
력사적인 평양상봉의 나날 위인적풍모와 숭고한 민족애를 보여주신 위대한 장군님은 세계가 우러르는 위인중의 위인으로, 세계를 굽어보시는 위인으로 더 높이 칭송받으시였으며 우리 민족의 통일의지는 그 무엇으로써도 막을수 없다는것을 내외에 힘있게 과시하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숭고한 민족애에 떠받들려 주체96(2007)년 10월에 또다시 력사적인 북남수뇌상봉이 마련되고 6. 15북남공동선언의 실천강령인 10.4선언이 채택발표될수 있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통일을 바라는 우리 겨레의 마음을 헤아려 전번 상봉때와는 달리 남측 당국자가 개성공업지구를 통과하는 북남련결도로로 오도록 아량을 베풀어주시였고 그 일행이 군사분계선을 넘어서서는 개성시인민위원장이, 평양에서는 시민들의 꽃물결속에 인민문화궁전앞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맞이하도록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4. 25문화회관광장에 몸소 나가시여 남측 당국자를 동포애의 정으로 따뜻이 맞이하심으로써 세계를 다시한번 충격과 경탄으로 끓어번지게 하시였다.
당시 남측대표단에는 정계, 재계, 사회계, 학계, 종교계의 인사들로 구성된 수십명의 특별수행원들이 속해있었는데 4. 25문화회관광장행사때 남측에서는 장관들만 행사장에 내세우고 그들은 참가시키지 않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특별수행원들도 영접행사에 참가시키도록 하시고 한사람한사람 따뜻이 손잡아주시였다.
이에 대하여 남조선의 민권연구소 상임연구원은 《마치 먼곳에서 오는 귀중한 가족을 동구밖 마을입구에서부터 집대문, 사랑방문지방에 이르기까지 반갑게 맞이해들이는 우리 민족의 옛 풍습을 보는듯 하다.》라고 자기의 격정을 토로하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남측 당국자일행을 따뜻이 맞이해주시였을뿐아니라 남측 당국자와 시종 동포애적분위기속에서 담화를 나누시였다.
그이께서는 북남관계를 우리 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해결해나가는것을 세계앞에 보여주어야 하며 이번 상봉이 민족적자주성을 확립하고 민족공동의 번영을 이룩하는 좋은 계기로 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조선반도의 평화보장문제는 북남관계를 전진시키고 조국통일을 실현하는데서 선차적으로 나서는 문제이며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군사적적대관계를 해소하는것이라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그를 위한 구체적인 방향과 방도를 명시해주시였고 북남사이의 경제협력도 단순한 경제거래가 아니라 민족의 화합과 통일, 공동번영에 이바지하는 숭고한 사업이므로 이것도 역시 우리 민족끼리의 정신에 기초하여 풀어나가야 한다고 하시며 개성공업지구를 활성화하는것을 비롯하여 경제협력사업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을 대범하게 풀어주시였다.
력사적인 10월 북남수뇌상봉에서는 우리 민족끼리 자주적으로 나라의 통일도 평화번영도 이룩하여야 한다는 위대한 장군님의 숭고한 민족애가 담겨져있는 《북남관계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이 채택되였다.
북과 남이 우리 민족끼리의 정신으로 일관된 6. 15북남공동선언을 고수하고 적극 구현해나간다는것을 재확인하면서 발표된 10. 4선언은 호상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적대관계종식과 평화보장방안, 경제협력, 사회문화교류와 인도주의적협력, 국제무대에서의 민족의 리익과 해외동포들의 권리와 리익을 위한 협력문제들에 대한 공동의 인식과 추진방향 등 구체적인 현 단계의 행동내용을 담은 실천강령으로 민족앞에 제시되였다.
력사적인 6. 15북남공동선언에 이어 그 실천강령인 10. 4선언이 채택됨으로써 21세기 자주통일, 6. 15시대의 앞길에는 보다 밝은 전망이 열리게 되였다.
한없이 넓은 도량과 뜨거운 동포애로 북남수뇌상봉을 또다시 마련하시고 온 민족앞에 조국통일의 실천강령을 제시해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상봉의 나날 남측 당국자가 수뇌상봉의 정례화를 제안하였을 때에는 친척집에 갈 때 정례적으로 가는가, 수시로 놀러가는것이다, 국가간 관계에서는 정례적이지만 북남관계에서는 맞지 않는다, 수시로 만나는게 맞지 않는가고 하시였고 그가 퇴임후 북을 다시한번 방문하고싶다고 청을 드렸을 때에는 얼마든지 환영한다고 쾌히 승낙하시며 혈육의 정을 더욱 뜨겁게 하시였다.
하기에 남측의 공식수행원들과 특별수행원들은 저저마다 엄지손가락을 내들며 《김정일국방위원장님은 최고의 최고이십니다.》, 《정말 멋지십니다.》라고 자기들의 흥분된 심정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처럼 력사적인 평양상봉의 매 순간순간은 온 민족이 넓은 도량과 숭고한 민족애를 지니신 위대한 장군님이시야말로 인간중의 진짜 인간이시고 대성인이심을 페부로 절감하는 력사적화폭이였다.
두차례에 걸쳐 진행된 력사적인 북남수뇌상봉은 우리 민족끼리 자주통일시대의 탄생과 그 활로를 열어놓은 획기적인 계기로서 새 세기에 통일된 조국을 온 겨레에게 안겨주시려고 그토록 마음쓰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숭고한 민족애와 민족중시사상이 낳은 위대한 결정체이다.
6. 15시대 통일오작교가 있어
력사적인 평양상봉과 6. 15북남공동선언의 채택으로 하여 이 땅우에는 자주통일의 새시대, 우리 민족끼리의 새시대가 펼쳐졌다. 반목과 불신, 대결이 지속되여오던 북남관계는 화해와 신뢰, 협력과 교류의 시대에 들어서게 되였다.
온 겨레는 분렬 55년만에 처음으로 이루어진 북남수뇌상봉의 귀중한 성과물인 6. 15공동선언이 성과적으로 리행되여 통일의 길로 이어지기를 바라마지 않았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온 민족의 절절한 기대와 념원에 맞게 북남관계를 개선하고 우리민족끼리시대의 새로운 전환기를 열어놓기 위하여 남조선의 각계 인사들과 대표단들을 몸소 만나주시고 공동선언리행을 위한 사업을 정력적으로 이끌어주시였다.
북남관계를 개선하고 6. 15공동선언을 철저히 리행해나가자면 북과 남사이에 화해와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하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일반적으로 상대방이 맺은 약속은 서로의 신뢰에 의하여 맺어지고 관철된다. 개인들사이의 약속이나 국가간에 맺어지는 협정이나 다 이러한 감정이 없이는 지킬수 없다는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지난 시기 북과 남사이에는 통일을 위해 큰걸음을 내디딜수 있는 좋은 합의들이 이룩되였었다. 그러나 남측이 돌아앉아 공화국을 비방중상하고 화해분위기를 흐리게 하여 그 합의가 실행에로까지 이어지지 못하였다. 력사적인 7. 4북남공동성명이 나온 직후에도 북과 남은 서로 비방중상을 중단할데 대한 문제를 합의하였지만 남측이 그것을 휴지장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북남관계를 또다시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번만은 그렇게 되여서는 안된다는 확고한 의지를 안으시고 북남쌍방사이에 비방중상을 중지하고 화해와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하는데서 나서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가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력사적인 평양상봉이후 맨 처음으로 남조선의 언론사대표단을 평양에 초청해주시였다.
언론인들은 시대를 전진시켜나가는데서 중요한 역할을 논다. 언론인들이 틀어쥔 붓대와 마이크를 통하여 정의와 진리가 전파되고 력사의 전진이 추동되게 된다. 그래서 언론인들을 가리켜 사회여론의 대변자, 정의와 량심의 전파자라고 말하는것이다.
그러나 지난 시기 남조선의 일부 언론들은 편견과 외곡으로 공화국에 대하여 나쁜 소리들을 많이 하면서 민족내부에 대결의식을 조장하는데 앞장서왔다. 그들이 과거 랭전시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보니 겨레의 통일위업은 난관과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러한 남조선언론의 실태와 그들이 6. 15공동선언리행에서 노는 역할을 깊이 헤아리시고 남조선언론인들과의 사업에 깊은 관심을 돌리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89(2000)년 8월 12일 평양을 찾아온 남조선언론사대표단을 몸소 만나 담화를 나누시였으며 그들과 오찬도 함께 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담화와 오찬석상에서 우리 민족이 당하여온 수난에 찬 분렬의 력사를 회고하시면서 높은 민족적자존심을 가지고 새 천년대의 요구에 맞게 민족앞에 나서는 력사적과제를 풀어나가며 민족공동의 리익을 도모하고 북남관계를 새롭게 발전시킬데 대하여 중대한 말씀을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6. 15공동선언이 발표된 이후 북과 남의 제반 관계가 민족적화해와 단합, 조국통일에 리롭게 발전하고있는데 대하여 만족을 표시하시면서 공동선언을 리행하는데서 북과 남의 언론기관들과 언론사들이 자기의 책임과 임무를 다하여야 할것이라고, 지난날 같은 민족이면서도 서로 대결하고 불신하던 낡은 타성에서 벗어나 공동선언을 리행하는데 도움이 되고 인민들의 의사에 맞는 언론활동을 적극 벌려야 할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누구든지 6. 15공동선언을 지지환영하고 통일위업을 실현하는데 나선다면 여당이건 야당이건 관계없이 그리고 과거는 물론 어제의 실언도 불문에 붙이고 함께 손잡고 나갈것이라고 하시였다.
이어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남측 언론사대표단이 관심하는 일련의 문제들에 대하여 해명을 주시면서 선군정치에 대하여서도 명답을 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우리 힘의 원천으로는 두가지가 있다, 첫째가 일심단결이고 두번째가 군력이다, 군력이 있어야 외국과의 관계를 자주적립장에서 풀어나갈수 있다, 다른 나라와 친해도 군력을 가져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렇지 않으면 외세에 롱락당한 한세기전의 비참한 운명을 면할수 없다는데 대하여 일깨워주시였다.
장군님의 말씀 한마디한마디에는 정의와 량심의 대변자인 언론인들이 민족의 자주정신을 높이 발양시키고 온 겨레를 자주통일의 한길로 불러일으키는 선구자로서의 자기의 사명과 역할을 원만히 수행해나가기를 바라시는 믿음이 어려있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남조선언론사대표단을 만나주신것은 그들이 6. 15북남공동선언리행에서 언론인들의 본분을 지키도록 하는데서 전환적계기로 되였다.
언론사대표단의 평양방문이후 남조선언론인들은 위대한 장군님의 위인상과 공화국의 현실을 적극 소개선전하였다.
2000년 남조선언론계는 20세기의 특기할 사변을 마련하신 장군님의 위인상에 매혹되여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의 영상사진들을 전례없이 많이 모시였는데 남조선의 주요신문 11종과 잡지 14종만 봐도 절세의 위인들의 영상사진을 총 1 030상 모시였다. 《경향신문》(2000년 12월 21일부)과 잡지 《시사져널》은 위대한 장군님을 《2000년 올해의 인물》로 발표하였다.
남조선의 주요신문들과 잡지들이 북남합의서발표이전인 3월 한달동안에 공화국과 관련한 기사를 평균 7. 5건(사설은 평균 3. 5건)을 실었다면 평양방문이후인 9월과 10월에는 사설만 해도 한달에 평균 10건으로서 3일에 한번정도로 실었으며 기타 시론, 론평 등은 거의 매일 싣다싶이 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북남상급회담을 비롯한 여러 갈래의 회담들이 우리민족끼리정신에 기초하여 북남관계를 개선하는데서 나서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실리있는 회담으로 되도록 이끄시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북과 남의 대화는 민족공동의 리익을 앞세우고 북남사이의 불신과 대결상태를 해소하며 모든것을 조국통일에 복종시키는 원칙에서 진행하여야 합니다.》
2000년 7월말 력사적인 6. 15공동선언발표이후 그 리행을 위한 첫 회담으로서 북남당국사이의 상급회담이 열리였는데 여기에서 북과 남은 북남회담을 새로운 시대적요구에 맞게 운영해나가기 위한 원칙적문제들을 제기하고 회담을 북남공동선언의 합의사항을 리행하는 회담으로, 불신과 론쟁으로 일관되던 과거의 낡은 타성에서 벗어나 신뢰와 협력의 정신에서 문제를 타결하는 회담으로, 실질적으로 결실을 맺는 회담으로 만들데 대한 문제들에서 합의를 보았다. 이것은 상급회담뿐아니라 북과 남사이에 진행될 여러 갈래의 회담들을 6. 15북남공동선언리행에로 지향시켜 실속있게 전개해나갈수 있는 담보로 되였다.
이에 토대하여 그해 8월 29일부터 9월 1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제2차 북남상급회담에서는 조선반도의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평화를 보장하기 위한 쌍방 군사당국자들의 회담을 조속한 시일내에 가지도록 건의할데 대한 문제, 경제협력을 확대발전시키기 위한 제도적담보를 마련할데 대한 문제를 비롯하여 북남관계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을 우리 민족끼리 풀어나갈데 대하여 합의하였다.
특히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9월 1일 평양에 온 북남상급회담 남측 수석대표를 접견해주시고 공동선언의 정신에 맞게 북남관계를 발전시키는데서 나서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상급회담뿐아니라 북남사이의 인도주의적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적십자회담들과 경제교류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경제실무접촉, 군사적대치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군사당국자들사이의 회담도 실리있는 회담으로 되도록 이끌어주시였다.
그리하여 여러차례 진행된 북남적십자회담들을 통하여 북남사이의 인도주의적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실제적인 조치들이 취해지고 북남적십자단체들의 활동이 활기있게 진행되였다. 또한 2000년 6월 력사적인 평양상봉이후 2007년어간에만도 북남당국사이에는 21차의 상급회담과 13차의 경제협력추진위원회 회의 그리고 8차의 적십자회담과 6차의 장령급군사회담을 비롯하여 무려 140여차의 회담과 접촉이 진행되였으며 거의 모든 회담들에서 매번 합의문건이 채택되였다.
이러한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속에 남조선에서 옥중고초를 겪은 63명의 통일애국투사들이 조국의 품에 안기는 놀라운 현실이 펼쳐지게 되였다. 6. 15이전시기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민족사적사변이였다.
북남관계가 개선되여나간 과정은 북남공동선언실현의 앞길에 장애를 조성해나선 미국과 그에 추종하는 반통일세력들의 책동을 짓부셔버린 과정이였다.
2001년 새로 집권한 미국의 부쉬2세행정부는 집권하기 바쁘게 대조선적대시정책을 로골화하면서 조선반도의 평화와 통일과정을 막아보려고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미국은 2001년 3월 남조선당국자를 워싱톤으로 불러들여 《해볕정책》도 북을 《흡수통일》하는 조건에서 지지할것이라고 하면서 저들의 승인을 받아서 북남관계를 처리해야 한다고 압력을 가해나섰는가 하면 우리 공화국을 《악의 축》으로 모독하고 공화국을 핵공격목표로 정한 핵태세검토보고서를 만들어 반공화국고립압살기도를 로골화하였다.
남조선의 반통일분자들도 이에 편승하여 6. 15시대의 흐름을 차단하고 과거의 대결시대를 되살리려고 음으로양으로 책동해나섰다.
그리하여 모처럼 마련되였던 여러 갈래의 회담들이 중단되게 되였으며 북남관계는 6. 15이전의 대결상태로 되돌아가는가 아니면 화해와 단합의 관계로 발전하는가 하는 갈림길에 놓이게 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온 민족이 단합된 힘으로 외세와 반통일세력의 방해책동을 물리치고 6. 15공동선언을 굳건히 고수하며 화해와 단합, 통일의 길로 힘차게 나가도록 이끌어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91(2002)년 4월 평양을 찾아온 남측 특사일행을 접견해주시고 6. 15북남공동선언의 기본정신을 존중할데 대하여, 미국과 반통일세력의 악랄한 책동으로 조선반도에 조성된 위기사태를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풀어나갈데 대하여, 당면하여 북남관계를 원상회복할데 대한 문제를 비롯하여 6. 15공동선언을 철저히 리행하는데서 나서는 원칙적인 요구들을 하나하나 밝혀주시였다.
이날 장군님께서는 민족중시의 립장에서 남측 특사가 제기하는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해서도 완벽한 해답을 주시였다.
북남철도와 도로련결문제가 상정되였을 때였다.
남측 특사는 신의주-서울사이의 철도와 개성-문산사이의 도로련결문제만을 말씀올렸다.
장군님께서는 숭고한 민족중시의 립장으로부터 신의주-서울사이의 철도만 련결할것이 아니라 동해선철도도 련결하여야 한다, 동해선철도를 련결하여야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할수 있다, 신의주-서울 철도만 련결하면 조선땅이 찌그러질수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그것은 동서의 철도를 다 련결하여야 철도가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는데 실질적으로 이바지할수 있으며 실리도 크다는 뜻으로서 민족적리익의 견지에서 하신 말씀이였다.
4월 5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와 남측 특사사이에 두차례에 걸쳐 진행된 회담을 통하여 일시 동결되였던 북남관계를 원상회복한다는 내용을 담은 공동보도문이 합의발표되게 되였다.
특히 공동보도문에서 쌍방은 북남사이의 끊어진 철도와 도로를 련결하는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아래 동해지구에서 새로 동해선철도 및 도로를, 서해지구에서 신의주-서울사이의 철도 및 개성-문산사이의 도로를 빨리 련결하기로 하고 철도와 도로련결 및 협력사업을 토의하기 위하여 북남경제협력추진위원회아래 분과들을 가동하기로 발표하였다.
북과 남의 온 겨레는 북남관계가 원상회복되고 대화와 협력사업이 추진되는것과 함께 동강났던 철도와 도로가 련결되게 된다는 소식에 접하여 감격을 금치 못하였다.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동강난 철도와 도로, 그것은 민족분렬과 그로 인한 불행과 고통의 상징이였다.
끊어진 두줄기 철길의 침목사이에 아름드리나무들이 뿌리내리고 끊어진 도로는 지뢰밭으로 변하여 짐승들도 넘나들지 못하였으니 철도와 도로련결은 말그대로 갈라진 강토의 지맥과 끊어진 민족의 혈맥이 이어지는 통일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후에도 여러차례에 걸쳐 북남철도 및 도로련결분과사업을 료해하시면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모두 풀어주시였다.
그리하여 2002년 9월 내외의 커다란 관심속에 착공식을 가진 동해지구와 서해지구의 철도 및 도로련결공사가 힘있게 추진되여 2007년 5월 17일에는 북남철도련결구간 렬차시험운행이 동서해선에서 각각 북측 금강산청년역에서 남측 제진역까지, 남측 문산역에서 북측 개성역까지 진행되였다.
나라의 지맥을 하나로 잇는 이 벅찬 현실은 대립과 갈등, 분렬의 력사를 극복하고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마련하는 뜻깊은 경사였으며 분렬의 철조망과 지뢰밭을 뚫고 통일의 길을 열어놓는 력사적장거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동포애적조치와 온 겨레의 단합된 힘에 의하여 민족분렬 50여년만에 끊어진 지맥이 하나로 이어진데 이어 남녘에서 금강산으로 오는 배길이 열리고 북과 남의 비행기들이 서해항로를 따라 분계선을 넘어 오가는 6. 15시대의 통일오작교가 놓여지게 되였다.
6. 15시대의 통일오작교가 있어 북과 남의 수많은 동포들이 백두산과 한나산으로, 평양과 서울로, 인천과 금강산으로 오고가며 민족의 통일열기를 한층 뜨겁게 하였다.
평양국립교향악단과 평양학생소년예술단, 평양교예단의 서울방문공연, 남조선 《KBS》교향악단과 《MBC》공연단의 평양방문공연을 비롯하여 북남예술인들의 합동공연과 합동연주회들, 평양통일탁구경기, 평양과 서울에서 진행된 북남태권도시범단 교환, 제14차 부산아시아경기대회와 제22차 세계대학생체육경기대회 북남선수단 공동입장과 공동응원, 북남력사학자들의 평양과 서울, 금강산토론회와 공동자료전시회 및 사진전시회, 평양에서 진행된 일제의 조선인강제련행의 범죄성에 대한 북남공동학술토론회와 공동자료전시회, 제주도에서 북과 남이 함께 진행한 민족통일평화체육문화축전…
특히 2005년 6월 평양에서 진행된 력사적인 6. 15공동선언발표 5돐기념 민족대통일축전은 민족분렬사상 처음으로 북과 남의 당국대표단과 해내외의 유명인사들이 참가함으로써 6. 15통일시대의 생활력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2005년 6월 14일 평양에서 개막된 6. 15공동선언발표 5돐기념 민족통일대축전행사에는 북측에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을 단장으로 하는 당국대표단과 90여개 단체의 대표 130여명이, 남측에서 통일부 장관을 단장으로 하는 당국대표단과 160여개 단체의 300여명의 대표들이, 해외에서 70여개 단체 대표 100여명이 참가하였다.
김일성경기장에서는 북과 남, 해외의 대표들과 5만여명의 평양시민들의 참가하에 6. 15공동선언발표 5돐기념 민족통일대축전 개막식이 성대히 진행되였다.
사상과 리념, 정견과 신앙의 차이를 초월하여 북과 남, 해외의 각당과 각계각층이 함께 하고 당국과 민간이 같이하며 백두에서 한나까지 전 지역이 모인 이 축전이야말로 조국통일의 주체는 우리 민족임을 내외에 힘있게 과시하고 우리 민족끼리의 리념을 실천해나갈 온 민족의 한결같은 의지를 확인하는 민족대회합의 새로운 마당이였다.
뜨거운 통일의 분위기속에서 진행된 대회에서는 겨레의 불같은 통일애국의 마음과 의지를 담아 민족통일선언을 채택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주체94(2005)년 6월 17일 6. 15공동선언발표 5돐기념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한 남조선《대통령》의 특사인 통일부 장관과 문익환목사의 부인 박용길녀사를 비롯한 남측의 평양상봉연고자들을 만나주신것은 축전의 최고절정을 장식한 일대 사변이였다.
장군님께서는 이날 핵문제와 6자회담에 대한 공화국의 립장과 당면한 북남관계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비롯하여 나라의 통일문제를 자주적으로 풀어나가며 민족공동의 번영과 발전을 이룩하는데서 나서는 문제들에 대해 귀중한 말씀을 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특사일행을 향해 여러분들이 6. 15공동선언발표 5돐 기념행사에 온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사실 6. 15공동선언의 내용은 훌륭하다고,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수 있는 선언이라고 하시며 이번에 평양에서 가진 6. 15민족통일대축전에 이어 8. 15에 서울에서 또 한차례의 통일축전을 벌리면 세계의 분위기상 과속이 아니냐고 놀랄 정도로 북남관계가 잘될수 있을것이라고, 8. 15에 우리 대표단을 내보내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또한 북과 남으로 흩어져사는 가족, 친척상봉을 어떻게 하면 더 많이 할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서도 직접상봉을 많이 할수 없다면 지금이 정보화시대인데 그에 맞게 동영상상봉을 조직하는것이 좋겠다고 하시며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해결방도까지 구체적으로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남측 특사일행과 평양상봉연고자들, 문익환목사의 부인을 위하여 오찬을 마련하시고 그들과 기념촬영을 하시였다.
장군님께서 남측 특사일행을 만나주시고 우리 민족끼리의 기치밑에 조국통일운동을 더욱 힘있게 벌려나가기 위하여 북남관계에서 새로운 전환을 가져올데 대한 귀중한 말씀을 주신 6월 17일은 조국통일운동력사에서 하나의 획을 긋는 격동적인 사변의 날로 기록되였다. 5년전 6. 15공동선언발표가 북남화해와 협력의 출발이였다면 5년후의 이날은 그 새로운 도약을 기약하는 계기로 되였다.
북과 남, 해외의 우리 겨레는 조국통일에 대한 새로운 희망과 신심에 넘쳐 통일운동을 더욱 거세차게 벌려나갔다.
그 일환으로서 이미 2005년 3월 금강산에서 결성되였던 6. 15공동선언실천을 위한 북, 남, 해외공동행사준비위원회를 점차 북남공동선언을 지지하는 온 겨레를 하나로 단합시키고 조국통일운동을 거족적으로 힘있게 추진시켜나가는 상설적인 전민족규모의 통일애국운동기구로 확대발전시켜나가기 위한 사업이 힘있게 벌어졌다. 그리하여 2005년 12월 6. 15공동선언실천을 위한 북, 남, 해외공동행사준비위원회를 6. 15공동선언실천 민족공동위원회(략칭 6. 15민족공동위원회)로 그 명칭을 바꾸었을뿐아니라 위원회의 규약도 채택발효시키고 공동사무국도 설치하여 6. 15민족공동위원회를 행사위주의 조직으로부터 상설적인 통일운동련대조직으로 강화발전시켰다.
전민족적인 통일운동련대기구가 결성됨으로써 공동선언발표이후 통일운동에서 거둔 성과를 계승하여 겨레의 통일지향과 의지를 하나로 모아나갈수 있는 민족대단결의 모체, 강력한 추동력이 마련되게 되였다.
이렇듯 6. 15통일시대에 북과 남에 펼쳐졌던 현실은 북남공동선언의 거대한 생활력이 안아온 우리민족끼리시대의 새 모습이였다.
민족공동의 번영을 위하여
6. 15북남공동선언의 채택으로 북과 남사이에는 경제협력을 보다 광범하게 넓혀나갈수 있는 길이 열려지게 되였다.
북남사이의 경제협력을 발전시키는 문제는 단순한 경제실무적문제가 아니다. 북남경제협력사업은 한피줄을 나눈 겨레가 끊어진 민족의 뉴대를 잇고 나라의 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중요한 사업이다.
북남경제협력은 북과 남의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합리적으로 발전시켜 민족의 통일적발전을 가져올뿐아니라 민족내부에 서로 돕고 도와주는 화해와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해준다. 또한 경제협력을 통하여 서로 자유로운 래왕과 접촉, 화해의 길을 넓혀나가고 민족공동의 번영을 이룩해나갈수 있게 한다.
그렇기때문에 북남경제협력사업은 북과 남이 공존, 공영, 공리를 도모하고 민족공동의 번영과 조국통일을 촉진하기 위한 애국애족적인 사업으로 된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조국통일위업실현에서 북남경제협력이 가지는 의의와 중요성을 깊이 통찰하시고 북남경제협력문제도 통이 크게 해결해주시여 민족번영의 새로운 시대를 펼쳐주시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북과 남은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의 존재를 인정하는 기초우에서 화합을 이룩하고 공존, 공영, 공리를 도모하면서 조국통일의 길을 함께 열어나가야 합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남녘동포들이 눈으로만 그려보고 마음속으로만 오르던 금강산관광의 길을 활짝 열어주시였으며 6. 15공동선언발표이후 그 길을 더욱 넓혀주시여 금강산관광이 북남경제협력의 대명사로 민족사의 한페지에 기록되도록 세심히 보살펴주시였다.
예로부터 금강산은 조선의 제일명산으로, 세계적인 천하절승으로 일러왔다. 독특한 산악미를 자랑하는 1만 2천봉우리들과 천태만상을 이룬 기기묘묘한 바위들, 구슬같이 맑은 물이 쏟아져내리는 폭포들과 계곡들로 하여 금강산은 세인의 감탄을 자아내고있다.
금강산의 경치가 세계으뜸이여서 예로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각지의 명산들에 《금강》이라는 이름을 붙여 장수산을 《해서(황해)금강》, 칠보산을 《함경금강》, 석승산을 《의주금강》이라고 불러왔다.
이러한 금강산이지만 나라의 분렬로 하여 남녘동포들은 반세기이상이나 금강산에 와보지 못하고있었다. 생전에 금강산을 한번 구경이라도 해보았으면 하는것이 남녘동포들의 간절한 소원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남녘동포들의 이러한 가슴속소원을 헤아리시고 여러차례 남조선 현대그룹의 정주영명예회장과 정몽헌회장을 만나주시고 북남경제협력의 일환으로서 금강산관광사업을 잘해볼데 대한 믿음을 안겨주시였으며 현대그룹에 금강산관광개발권을 비롯한 중요대상들에 대한 우선권을 주도록 하시였다.
사실 군사분계선 남측지역에 대한 관할권을 미군이 장악하고있고 미국의 반공화국적대시정책이 중단되지 않고있는 실정에서 군사분계선과 린접하고있는 금강산지역에 대한 관광에는 복잡하고 심중한 문제들이 많았다.
하지만 장군님께서는 민족의 명산을 한번 보고싶어하는 남녘동포들의 소망을 소중히 여기시고 북과 남사이의 군사적대치상태속에서도 대범하게 금강산관광의 길을 열어주시였던것이다.
그리하여 1998년 11월 18일 800여명의 관광객을 태운 배가 고동소리를 높이 울리며 남조선의 동해항을 떠나 금강산관광길에 오르게 되였다.
관광객들을 태운 배가 울린 배고동소리, 이는 위대한 장군님의 숭고한 민족애에 의하여 처음으로 금강산관광길에 오른 남녘겨레들의 기쁨을 터치는 환희의 고동소리였고 온 민족이 손을 잡고 금강산으로 오를 통일의 날이 멀지 않았음을 예고하는 희망의 기적소리였다.
첫 관광이 있은 때로부터 한해 남짓한 기간에만도 10여만명의 남조선 각계 동포들이 금강산을 다녀갔고 금강산관광사업은 날이 갈수록 더욱 활기를 띠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6. 15공동선언의 채택으로 온 겨레의 통일열기가 뜨겁게 분출되고있는 시대적요구에 맞게 금강산관광길을 더욱 넓혀주시여 더 많은 남녘동포들이 금강산관광길에 오르도록 해주시였다.
력사적인 평양상봉이 있은 때로부터 석달이 지난 주체89(2000)년 9월 어느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금강산관광지구를 시찰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정몽헌회장을 비롯한 현대관계자들과 함께 고성항을 비롯한 여러곳을 돌아보시면서 시작이 절반이라는 말이 있는데 현대에서 시작한 금강산관광을 잘 조직해보는것이 좋겠다는 믿음을 다시금 안겨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장군님께서는 내가 보건대 이제 금강산관광을 더 활성화하자면 어차피 남쪽과는 관광수송통로가 개발되여야 할것이라고 하시면서 그 하나하나에 대하여서까지 세심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금강산을 단순히 관광을 위한 금강산이 아니라 북과 남, 해외를 잇는 무지개다리로, 온 민족이 만나는 통일오작교로 되게 하시려는 장군님의 크나큰 도량에 현대관계자들은 그렇게 하면 장군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천하절승 금강산을 남녘동포들이 다 보게 할수 있을것이라고 흥분된 심정을 감추지 못해하였다.
이날 금강산관광을 비롯하여 북과 남사이의 경제협력을 더욱 발전시켜나갈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신 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을 제시하시면서 북과 남이 공존, 공영, 공리를 도모하고 조국통일위업에 모든것을 복종시키는 원칙에서 단결을 이룩할데 대한 사상을 밝히시였다고, 남쪽에서 자꾸 상호주의라고 하는데 구태여 상호주의라고 한다면 서로 배워주고 도와주는 이런 원칙에서의 상호주의라고 해야 할것이라고, 그런 식으로 공존, 공영, 공리를 해서 두 제도가 존재하는 련방제를 하여야 한다고 깊은 뜻을 담아 말씀하시였다.
계속하여 두 제도가 존재하는 기초우에서 공존, 공영, 공리를 하자는것이지 우리의 사상과 제도를 남쪽에 강요하거나 먹이자는것이 아니라고, 우리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우선 현대에서 제기한 금강산관광을 승인한것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북남경제협력을 더욱 폭넓게 진행하여 우리 민족의 숙원인 조국통일위업을 기어이 이룩하시려는 장군님의 철의 의지가 마디마디에 어려있는 말씀을 받아안으며 동행한 일군들과 현대관계자들은 숙연해지는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오곡백과 무르익은 가을날 몸소 찾아오시여 믿음을 주시고 용기를 북돋아주신 장군님의 정력적인 령도가 있어 금강산관광사업은 더욱 힘있게 추진되였다.
2003년 2월 남측의 현대관계자들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금강산륙로관광을 위한 시험답사를 진행한데 이어 남측의 관계인사들과 내외기자들로 구성된 시범륙로관광단이 시범관광을 진행하였다.
이로써 금강산관광사업은 해상을 통한 관광의 일면성을 극복하고 보다 활기를 띠게 되였으며 2003년초부터는 동해림시도로를 통한 륙로관광도 진행되게 되였다.
이에 대해 미국신문 《로스안젤스 타임스》는 《남북은 요새화된 비무장지대를 관통하는 금강산관광도로의 공식개통으로 또 하나의 력사를 만들었다.》고 썼다. 남조선언론들도 금강산관광이 북남사이의 긴장을 완화하고 북남관계를 개선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하면서 《금강산관광은 남북관계의 대명사》, 《만남과 화해, 협력의 상징》이라고 널리 소개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금강산관광과 함께 우리 민족의 유구한 력사가 깃들어있는 개성땅에 북과 남이 함께 하는 공업지구를 건설하도록 하시여 북남경제협력사업의 새로운 장을 열어주시였다.
오늘 개성공업지구가 민족공동의 번영을 위한 사업으로 온 겨레의 관심속에 진행되고있는데는 그 형성과 발전을 위해 바쳐오신 위대한 장군님의 심혈이 뜨겁게 깃들어있다.
6. 15공동선언발표이후 남조선의 수많은 기업들은 저저마다 북과의 경제협력을 희망해나섰다. 더구나 북남경제협력사업이 당국사이의 사업으로 전환되고 협력대상과 투자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경제특구건설문제는 절실한 요구로 제기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주체89(2000)년 6월말 또다시 평양을 방문한 남조선 현대그룹 명예회장 정주영일행을 접견해주실 때였다.
접견석상에서 정주영은 민족사에 특기할 력사적인 평양상봉을 마련하시고 온 겨레에게 통일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6. 15공동선언을 탄생시키신 위대한 장군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면서 자기가 생각하고있는 경제협력방안들을 말씀드리였다. 그는 장군님께서 북남관계가 험악했던 시기에도 대용단을 내리시여 금강산관광을 하도록 배려를 돌려주시였는데 앞으로 현대가 북에 경제특구를 하나 건설할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셨으면 한다고 말씀올렸다.
북남경제협력을 민족의 화해와 단합을 이룩하는 중요한 계기로, 민족의 부강번영을 위한 중대사로 여기신 장군님께서는 그의 소청을 헤아려 개성에 공업지구를 건설하도록 해주시였다.
그러시고는 주체89(2000)년 8월 어느날 지방현지지도의 길에서 남조선 현대아산 정몽헌회장일행을 접견해주시고 그들에게 개성지역을 공업지구부지로 확정해주시였다.
그리하여 개성공업지구를 내올데 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과 개성공업지구법, 개성공업지구개발규정이 발표되였다. 이에 토대하여 북과 남은 2003년 6월 30일 온 겨레의 커다란 기대와 관심속에 개성공업지구건설착공식을 성대히 진행하였다.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와 남조선의 현대아산관계자들, 그밖에 개성공업지구건설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된 착공식에서는 축하연설들에 이어 착공발파가 있었다.
개성공업지구건설착공식은 내외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남조선언론들은 《개성공단착공은 남북경협의 새시대를 열어놓은 력사적쾌거》라고 하면서 공업지구건설착공식소식을 크게 보도하였으며 세계의 언론들도 《조선분단의 상징인 개성이 화해협력의 상징으로 자기의 새 모습을 드러내게 되였다.》고 평하였다.
개성공업지구착공의 첫삽을 박은 때로부터 1년 남짓한 세월이 흐른 2004년 12월 개성공업지구현지에서 개성공업지구 첫 제품생산기념식이 진행되였으며 그후부터 개성공업지구는 북남경제협력의 상징으로, 민족공동의 번영을 위한 상징으로 더욱 활성화되여갔다.
금강산관광사업과 개성공업지구사업은 경제협력사업을 통하여 민족공동의 번영을 이룩하고 북과 남사이의 민족적뉴대를 더욱 두터이 하는데 이바지하였다.
날이 갈수록 경제협력사업을 위하여 북을 방문하는 남녘동포들의 수가 계속 늘어났으며 경제협력사업은 농업, 공업, 임가공 등 여러 부문과 지역으로 확대되였다. 북과 남은 2003년 8월 북남사이의 투자보장, 2중과세방지, 상사분쟁해결절차, 청산결제를 기본내용으로 하는 4개 경제협력합의서 발효통지문을 정식교환한것을 비롯하여 2005년말까지 1차례씩의 북남수산협력분과회의와 북남농업협력위원회 회의를 진행하고 11차례의 북남경제협력추진위원회 회의를 비롯하여 수십차례의 각 부문별분과회의와 실무접촉을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1992년에 1건에 불과했던 북남협력사업이 2002년에는 52건에 이르렀으며 2003년에는 한해동안에 북남교역액수가 수억US$로 증가하는 등 짧은 기간에 적지 않은 성과를 이룩하였다.
반세기이상이나 분렬되여있던 북과 남이 온 겨레의 커다란 관심과 기대속에 경제협력사업을 활발히 진행하면서 이 땅에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가 조성되자 외세와 그에 추종한 남조선의 반통일세력들은 이를 저지파탄시키기 위해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북과 남이 화해하고 협력하는것을 처음부터 달가워하지 않은 미국은 개성공업지구건설이 론의되던 때부터 이에 간섭해나서면서 남조선당국에 철저히 저들의 승인하에서만 개성공업지구건설을 진척시킬것을 강요해나섰다.
미국은 개성공업지구건설을 위한 현지조사 및 부지측정사업이 진행되자 통행에 대한 《유엔군사령부》의 승인이니 뭐니 하면
서 첫걸음부터 빗장을 지르려고 책동하였다. 또한 2004년 2월 제13차 북남상급회담에서 개성공업지구 시범공장지구건설이 합의되자 테로지원국에 전략물자를 수출할수 없게 규정한 와쎄나협정을 개성공업지구에 진출하는 남조선기업에도 적용하겠다, 콤퓨터를 비롯한 미국산 부품이 들어간 전략물자의 반입을 불허하겠다고 하면서 남조선당국에 압력을 가하였다.
남조선의 한 경제전문가는 이에 대해 《미국이 심지어 버섯종균배양설비마저도 군사용으로 전용된다고 반출금지항목에 넣었는데 이런것쯤은 북도 얼마든지 만들수 있는것으로서 이런 식으로 해서는 개성공단사업이 언제 가도 실현될수 없다.》라고 하면서 미국의 비렬한 책동을 규탄하였다.
한편 남조선의 반통일세력들은 미국의 이러한 책동에 적극 추종하면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와 현대그룹사이에 이루어진 정상적인 협력사업에 대하여 시비중상해오던 나머지 대북송금사건이라는것까지 들고나와 여야간 정쟁을 일삼고 민심을 소란하게 만들며 북남화해과정을 파탄시켜보려고 분별없이 날뛰였다.
그들은 금강산관광사업을 《대북퍼주기》라고 걸고들면서 금강산관광중단을 제창하였는가 하면 2003년 2월에는 저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국회》에서 《특검법》을 통과시킴으로써 북남사이의 화해와 협력사업에 앞장섰던 한 기업가를 끝내 죽음에로 몰아넣기까지 하였다.
특히 남조선의 반통일세력은 2008년 《정권》의 자리에 올라앉기 바쁘게 《잃어버린 10년》을 운운하면서 6. 15공동선언과 10. 4선언을 전면부정해나섰으며 《선대미관계, 후남북관계》를 제창하면서 친미사대적이고 반민족적인 자세를 공공연히 드러냈다. 이자들은 그 무슨 《피격사건》을 구실로, 더우기는 모략적인 《천안》호사건을 날조하여 북남경제협력의 옥동자로 불리우던 금강산관광사업을 전면중단한것을 비롯하여 여러 분야에서 북남사이에 활발하게 진행되여오던 경제협력사업에 차단봉을 내리우는 반민족적이며 반통일적인 행위를 감행하였다.
6. 15통일시대와 더불어 활발히 진행되였던 경제협력사업의 전 과정은 우리 민족끼리의 리념에 기초하여 북과 남이 손을 잡고 민족공동의 번영을 이룩하기 위한 경제협력사업을 힘있게 밀고나갈 때 세계에 소리쳐 자랑할만 한 통일강국을 우리 민족자체의 힘으로 능히 일떠세울수 있다는것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3) 민족성원모두를 한품에 안아
언제나 남녘동포들을 생각하시며
흔히 사람들은 따뜻하고 변함없는 사랑을 어머니의 사랑에 비유한다. 그리고 그것을 영원히 지니고싶어 시와 노래로, 전설로 길이 전하고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그러한 사랑을 초월하는 위대한 사랑이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겨레들을 위하시는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사랑이였다.
남녘동포들에 대한 그이의 사랑은 웅심깊고 열화같은 혈육의 정이 흘러넘치고 진실하고 변함이 없는 사랑으로 가득차있으며 그 사랑에는 겨레의 운명과 관련되는 문제라면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끝까지 책임지고 풀어주는 어머니의 진정이 뜨겁게 스며있었다.
언제인가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우리는 언제나 민족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하시며 조국을 사랑하는것,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것, 이것이 중요하다, 공산주의자라고 하여 자기 민족이나 조국을 떠나서 그 어떤 허공에 뜬 세계혁명을 할수는 없다, 공산주의자들은 누구보다도 자기 조국과 자기 인민을 사랑하며 자기 민족을 사랑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이렇듯 열화와 같은 민족애를 지니시였기에 조국이 분렬되여 오랜 세월이 흘렀고 분계선철길우에 떨어진 씨앗이 움터자라 거목이 되였어도 마음은 언제나 남녘인민들에게 가있으시였다. 기쁜 일이 있으면 그 기쁨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것을 아쉬워하시고 그들에게 불상사가 생겼을 때에는 잠 못 이루신 그이이시였다.
주체84(1995)년 6월 서울에서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을 때였다.
그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날이 새도록 남녘동포들이 당하는 고통을 생각하시며 집무실에서 한밤을 보내시였다. 그러시고도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시며 전화로 한 일군에게 저녁시간에 물건사러 나왔던 가정부인들이 수백명이나 파묻혔다니 이런 큰 변이 어디 있습니까, 숱한 아이들이 어머니를 잃고 울고있을텐데 그애들이 누구보다도 불쌍하게 되였습니다, 정말 가슴아픕니다, 새벽 6시에 퇴근하여 잠간 쉬려고 누웠는데 잠을 이룰수가 없어서 전화합니다라고 하시였다.
삼풍백화점붕괴사고로 하여 남녘겨레들이 당한 고통과 불행을 두고 잠시나마 피곤을 푸셔야 할 그 짧은 시간마저 바쳐가시며 마음쓰시는 장군님의 동포애는 진정 뜨거웠다.
남녘동포들에 대한 불보다 뜨거운 사랑을 지니시였기에 그들이 불행을 겪을 때마다 친혈육의 심정으로 그것을 가셔주기 위하여 모든 조치를 다 취해주신 장군님이시였다.
주체73(1984)년 남조선의 수재민들에게 수많은 구호물자를 보내주신 이야기는 위대한 장군님의 뜨거운 동포애의 정을 길이 전하며 오늘도 겨레의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되여있다.
그해 8월과 9월초에 걸쳐 례년에 없는 비가 쏟아져 서울을 비롯한 남조선의 여러 지역에 물란리를 일으켰다.
남조선당국의 공식발표에 의하더라도 350명이 죽고 20만 7 000여명의 수재민이 났으며 3만 6 700여채의 살림집이 파괴되는 참상이 빚어졌다. 피해지역에서 거처할데 없이 한지에 나앉은 수재민들은 당장 먹을것이 없어 아우성쳤다. 게다가 수재에 뒤따른 병마가 수재민들의 생명을 위협하였다.
그런데도 남조선당국자는 애타게 구원을 기다리는 수재민들을 외면하고 일본행각의 길에 올랐다. 남조선당국의 이러한 반인민적처사로 하여 수재민들은 커다란 고통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무렵 현지지도의 길에 계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 기막힌 참상에 대한 보고를 받으시고 못내 가슴아파하시였다.
비가 오지 않으면 남조선인민들이 흉년으로 불행을 당할가봐 걱정하시고 비가 너무 많이 오면 남조선인민들이 물란리로 고통을 겪을가봐 잠 못 이루시던 그이이시였다.
남조선인민들이 당한 재난을 두고 깊이 마음쓰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김일성주석의 높은 뜻을 받들어 남녘의 수재민들에게 혈육의 정이 깃든 구호물자를 보내줄데 대한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9월 8일 남조선수재민들에게 5만석의 쌀과 50만m의 천, 10만t의 세멘트와 기타 의약품들을 보내줄데 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적십자회 중앙위원회결정이 방송, 통신으로 세상에 발표되였다.
북에서 구호물자를 보내준다는 소식을 들은 남녘동포들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듯이 한피줄을 이은 이북형제들만이 이남의 리재민들을 구원할수 있다고 환영하였으며 서방의 출판물들까지도 《100%로 끓는 동포애의 산물》이라고 평하였다.
공화국에서 취한 구제조치는 120여년을 헤아리는 국제적십자구제운동사에서도 전례를 찾아볼수 없는 큰 규모의것이였다. 당시까지의 적십자구제운동 최고기록이 1983년에 수해를 입은 인디아에 스웨리예가 제공한 75만US$였는데 공화국의 구호물자는 미국돈으로 환산하면 1 800만US$로서 그의 24배에 달하는 방대한 량이였다.
그 당시 가까운 동맹국이라고 자처하는 미국과 일본이 남조선당국에 제공한 구제금은 각기 2만US$와 10만US$였다.
고결한 동포애가 낳은 이 구호물자를 두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뭐니뭐니해도 민족이 제일이라고, 도와줄 사람은 우리밖에 없다고 말씀하시였다.
어려울 때 형제라는 말이 있지만 친형제도 구제 못하는 남녘동포들의 재난을 누구보다 가슴아파하시며 그들을 구원하는 일에 모든것을 아낌없이 바치시는 그이이시였다.
이러한 동포애의 조치가 있어 판문점에서는 분렬이후 처음으로 공화국의 구호물자를 인도인수하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북남적십자단체들의 실무접촉이 있었고 북측의 진지하고 아량있는 노력에 의하여 구호물자를 받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리던 남측은 구호물자를 접수하기 위해 항구와 판문점으로 나오지 않을수 없었다.
모든것을 민족우선, 민족중시의 관점과 립장에서 대해오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수재민들에게 구호물자를 보내는 일을 처음부터 단순한 적십자단체의 인도주의적사업으로만 보지 않으시고 한피줄을 나눈 공화국의 전체 인민이 도탄에 빠진 남녘동포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내주는 일로 여기시였다.
9월 중순 어느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정무원(당시)의 책임일군들로 중앙지휘부를 조직해주시고 구호물자를 준비하고 인도하는 사업에 모든 힘과 가능성을 다 발동시켜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남조선수재민들에게 구호물자를 보내는것은 한피줄을 나눈 동포애의 마음을 보내는것인데 거기에는 한점의 티도 없어야 한다고, 알알이 고르고 오리오리 다듬어서 보내야 한다고 하시며 세멘트도 의약품도 제일 좋은것으로 준비하게 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몸소 구호물자생산현장을 돌아보시며 남조선수재민들에게 보내는 원호물자를 비가 온다고 하여 늦추어서는 안된다고 하시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제정된 기간안에 무조건 보내줄데 대한 뜻깊은 말씀을 주시였다. 이와 함께 준비된 구호물자를 지정된 장소에 제때에 실어가기 위해 근 2 000량의 화차와 수천대의 화물자동차를 동원할데 대한 특별지시를 하달하시였다.
그 은정에 실려 2~3일사이에 5만석의 쌀, 50만m의 천, 10만t의 세멘트, 10여종에 759지함에 달하는 의약품이 개성과 해주, 흥남, 원산에 집결되였고 10만t의 세멘트를 14척의 대형짐배에 싣는 작업도 한주일동안에 완료되였다.
9월 28일 드디여 근 40년간의 분렬사상 처음으로 북녘인민들의 뜨거운 혈육의 정을 담은 화물자동차와 대형짐배들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굽이쳐갔다. 그날은 민족사에 특기할 력사적인 날이였다.
지척이면서도 만리이역인양 떨어져있던 북과 남의 지맥이 련결되고 민족의 혈맥이 하나로 이어지는 그 경사의 날에 온 겨레는 감격과 기쁨으로 설레였다.
수재민 호당 250㎏의 쌀과 17m씩 차례질수 있는 천, 3만동의 살림집을 건설할수 있는 세멘트를 비롯한 구호물자는 남녘의 수재민들에게 있어서 사랑의 생명수였고 재생의 불사약이였다.
서울에서는 수재를 입지 않은 사람들까지 북녘겨레들의 지극한 마음을 받아안고싶어 구호미를 받은 수재민들을 찾아갔다. 어떤 사람들은 북의 세멘트로 집을 지어 통일의 정각을 만들겠다고 하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동포애는 이처럼 두텁게 얼어붙었던 분렬장벽의 얼음장을 뚫고 남녘겨레들의 가슴속에 재생의 봄을 가져다주었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진리를 다시금 새겨주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나라의 분렬로 인하여 남녘동포들에게 주고싶어도 줄수 없었던 그 사랑, 그 은정을 공화국에 들어오는 동포들에게 고스란히 안겨주시였다.
물론 남녘동포들이 공화국에 들어오게 되는 경위와 그들의 사회계급적처지는 같지 않았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공화국경내에 들어오게 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절차를 밟아 공화국을 방문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공화국을 동경하여 의거를 단행한 사람들도 있었다. 또 그들속에는 정치인, 지식인, 경제인, 로동자, 종교인, 군인, 학생 등 각계각층이 망라되여있었으며 그들의 사상과 정견도 각이하고 공화국에 대한 인식정도와 감정도 다 달랐다.
하지만 장군님께서는 그 경위가 어떠했든지간에 계급과 계층, 사상과 정견에 관계없이 그들모두에게 아낌없는 사랑과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주체65(1976)년 남조선어선 《신진3》호성원들이 받아안은 은정에 대한 이야기는 수십년이 지난 오늘도 김정일장군님의 뜨거운 동포애의 정을 감동깊이 전해주고있다.
《신진3》호가 항로미실로 공화국경내에 들어온 시기는 미국의 새 전쟁도발책동으로 하여 판문점사건이 일어난 직후였다.
나라의 정세가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달아 초긴장상태에 들어간 때였던것만큼 남조선어민들도 북측에서 자기들의 불법침입행위를 두고 어떤 조치를 취하겠는가 몹시 걱정하고있었다.
해당 일군들로부터 남조선어선 《신진3》호에 대한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판문점사건은 미제와의 문제이고 《신진3》호는 우리의 혈육인 남조선인민들과의 문제라고 하시면서 남조선어민들을 동포애의 정을 가지고 성의를 다해 돌봐주도록 이르시였다.
그러시고도 남조선어민들의 건강상태와 생활조건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알아보시며 그들이 사소한 불편도 없이 지낼수 있도록 온갖 조치들을 취해주시였다.
절세의 위인의 사랑어린 조치가 있어 오랜 세월 몸에 병을 가지고있으면서도 치료비가 없어 병을 고칠 엄두를 내지 못하고있던 기관장을 비롯한 몇몇 선원들은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고 고질병을 완전히 털어버리게 되였다.
장군님께서는 집을 떠나 추석을 맞는 어민들의 심정을 헤아리시여 추석날에는 색다른 음식을 푸짐히 차려주도록 하시였고 체육과 오락도 조직하여 그들이 유쾌하게 지낼수 있도록 해주시였다.
그후 《신진3》호가 남으로 돌아가게 되였을 때에는 풍랑에 파손된 고기배를 새 배처럼 말끔히 고쳐주게 하시였고 한끼만 먹으면 가닿을 길이지만 물길이니 도중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하시면서 쌀과 부식물을 풍족히 실어주라고, 가다가 회도 쳐먹을수 있게 식초와 고추장 같은것도 잊지 말고 넣어주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이 담긴 식료품들을 받아안은 선원들은 그것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였다.
한 어민은 자기들을 바래주기 위하여 부두에 나온 일군의 손을 잡고 《김일성장군님과 김정일선생님께서 사람값에도 못 들었던 저희들에게 그처럼 하늘같은 은정을 베풀어주실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오늘 저희들은 여기를 떠나지만 마음만은 두고갑니다.》라고 격정에 넘쳐 말하였다.
이것은 그 한사람만이 아닌 어민모두의 심중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에 넘친 말이였다.
하기에 그들은 남으로 돌아가는 날 그 사랑, 그 은정이 고맙고 뜨거워 원산앞바다를 여섯번이나 돌고서야 떠나갔다.
그것은 우리 겨레는 떨어져서 못살 피와 정으로 이어진 하나의 민족임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화폭이였다.
남녘동포들을 위하는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과 은정은 그가 누구이든 차별없이 꼭같이 흘러들었다.
언제인가 공화국에 왔던 남조선의 한 기업가가 한 일군에게 백두산들쭉술을 많이 살수 있게 해줄것을 부탁한 일이 있었다.
그는 들쭉술에 홀딱 반했다면서 자기의 요구를 들어달라고 거듭 간청하였다. 그러면서 연회때 들쭉술을 그저 보통술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마셔보니 그 향기가 어찌나 이채롭고 감미로운지 정신이 핑 돌 지경이였다, 거뜬하고 혈액순환이 잘되고 아주 좋은 술이다, 지금까지 세계에서 이름난 좋은 술은 다 마셔보았지만 백두산들쭉술이 제일이라고 흥분된 어조로 말하였다.
그리고는 들쭉술이 백두산에서 나는 특산품이여서 그런지 더 마음이 끌린다고 하면서 남에 있는 친지들에게 꼭 이 술을 맛보이고싶다고 덧붙였다.
그날 저녁 이 사실을 알게 되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호탕하게 웃으시며 가져가게 하라고, 고향방문왔는데 돈을 받겠는가, 마음껏 가져가게 하라고 하시며 포장도 잘해서 보내주자고 하시였다.
력사적인 평양상봉이후 위대한 장군님께서 추석명절을 맞는 남녘의 각계층 인사들에게 보내주신 칠보산의 첫물송이버섯에 대한 이야기는 그이의 사랑이 얼마나 뜨겁고 자애로운가를 다시금 돌이켜보게 한다.
동해바다가에 우뚝 솟아 함북금강으로 불리우는 칠보산, 일곱가지 보물을 가지고있다고 하는 이 명산의 명물들가운데는 우리 나라 버섯가운데서 단연 으뜸으로 손꼽히는 송이버섯도 있다.
소나무의 상긋한 냄새와 달짝지근하면서도 쫄깃쫄깃한감을 주는 부드러운 맛으로 하여 예로부터 소문난 칠보산송이버섯이 장군님의 민족애와 더불어 더 유명해지게 되였다.
주체89(2000)년 8월 어느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전선시찰의 길에서 인민군군인들이 칠보산에서 첫물송이버섯을 많이 땄다는 보고를 받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못내 만족해하시며 동행한 일군들에게 력사적인 평양상봉때 남측성원들이 연회상에 오른 송이버섯료리를 보고 부러워하기에 가을에 가서 칠보산에서 나는 첫물송이버섯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신데 대하여 이야기하시였다.
평양상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남측대표단일행을 위해 국방위원회명의로 차린 오찬회석상에서 남측 당국자의 부인은 연회탁에 오른 송이버섯료리를 보고 귀한것이라고 부러워하였다.
그때 장군님께서는 이번에 평양에 온 모든 남측 귀빈들에게 칠보산에서 나는 첫물송이버섯을 선물로 보내주겠다는 뜻깊은 약속을 하시였던것이다.
이러한 사연을 이야기하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남측에 송이버섯을 보내줄 때 력사적인 평양상봉에 참가하였던 남측성원들은 물론 6. 15공동선언발표직후 평양에 왔던 현대그룹명예회장 정주영일행과 남조선언론사대표단 성원들에게도 보내주며 한사람당 몫도 1~2㎏정도가 아니라 10㎏씩 하면 그들이 대단히 좋아할것이라고 하시며 환한 웃음을 지으시였다.
일군들은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였다.
장군님의 말씀대로 200여명의 남측성원들모두에게 각각 10㎏씩 주자고 해도 2t이상의 송이버섯이 있어야 하는데 그 수량도 엄청났거니와 국제시장가격으로 볼 때 그 값도 약차한것이였다.
놀라움에 서로의 얼굴만 마주보고 서있는 일군들을 둘러보시던 장군님께서는 호탕하신 어조로 왜 그렇게 놀라는가, 줄바에는 아예 통이 크게 남조선의 현직 《국회》의장과 여야당 당수들에게까지 한아름씩 안겨주자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후에도 여러차례에 걸쳐 송이버섯포장문제, 수송경로 및 방법문제와 관련하여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제2차 북남상급회담에 참가한 남측 수석대표일행을 접견하신 자리에서도 장군님께서는 우리 국방위원회에서 지금 남쪽에 보낼 칠보산송이버섯을 준비하고있다고 하시면서 우리 나라 송이버섯가운데서 가장 좋은것이 칠보산송이버섯인데 다른 나라에도 이름났다는것, 송이버섯이 비록 소비하면 없어지는것이지만 그래도 우리 북쪽의 마음과 향기를 느끼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보낸다고 하시면서 이제 한사람당 10㎏씩 추석 전날에 보내주겠으니 선물을 받는 사람들이 친지들과 세간난 자식들에게도 나누어주어 명절날 쓰게 하라고 말씀하시였다.
이렇게 되여 조선인민군 대장이 2000년 9월 11일 사랑의 송이버섯을 비행기에 싣고 분렬의 장벽을 넘어 서울에 나가게 되였다.
남측 각계 인사들의 참가밑에 진행된 송이버섯선물전달식에서 조선인민군 대장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남녘의 평양상봉수행원들과 언론사대표단 성원들, 현대그룹 정주영명예회장일행 등 267명에게 보내주신 송이버섯을 1인당 10㎏씩 전달하였으며 그밖에 평양에 와보지 못한 64명의 각계 인사들에게도 똑같이 송이버섯을 정중히 전달하였다.
추석을 맞으며 민족의 향취그윽한 칠보산의 첫물송이버섯을 받아안은 남조선의 각계 인사들은 송이송이마다에 슴배여있는 위대한 장군님의 고결한 인정미와 하늘같은 민족애가 뜨겁게 닿아와 고마움을 금치 못해하였다. 송이버섯을 보내주시여도 한두번 맛보는 정도가 아니라 한지함씩 통채로 안겨주시는 장군님의 크나큰 도량에 온 남녘땅이 경탄하였다.
언제나 남녘동포들을 생각하시며 그토록 마음써오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숭고한 민족애는 어제도 오늘도 래일도 겨레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져 길이길이 전해질것이다.
북남협력의 선구자로 내세워주시여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펼치신 민족중시의 정치는 온 민족을 한품에 안아 조국통일과 민족번영의 바른길로 이끌어준 자양분이였다.
바로 그 자양분이 있어 남조선의 대기업가였던 정주영도 북남협력의 선구자로 민족앞에 떳떳이 나설수 있었다.
그는 남조선의 현대그룹창업자로서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대재벌이였다.
《일찌기 기업으로 애국한다.》는 나름대로의 지조를 품은 그의 인생은 기업과 떼여놓고 볼수 없다. 그는 자기 인생의 거의 전부를 기업에 바치였다. 나중에는 정치개혁을 주장하며 《대통령》선거에도 출마해보았다.
하지만 결코 인생의 진정한 기쁨은 맛보지 못하였다. 그러던 그가 생의 말년에 참다운 애국은 통일에 있다는 생각에서 인생전환을 하게 되였다.
공화국북반부에 고향을 둔 사람으로서 더우기는 집권세력과 뜻이 다르다는 리유로 기업활동에서 각종 저애를 받고 지어 심한 정치적압력까지 받던 그는 세월이 갈수록 마음이 저절로 오래전에 떠나온 북으로 향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는 그립던 고향에도 가보고싶었고 유명한 평양랭면도 먹어보고싶었으며 그리고 어린시절의 추억이 깃든 금강산도 돌아보고싶었다. 그는 늦었지만 이제라도 나라의 통일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품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위대한 장군님의 고전적로작 《온 민족이 대단결하여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이룩하자》에 접하게 되였다. 민족적량심을 가지고 조국통일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지어 남조선의 집권상층이나 대자본가, 군장성들과도 단합할것이라는 절세의 위인의 숭고한 뜻을 로작을 통하여 받아안은 그는 자기 기업의 전략을 공화국과의 협력교류로 내세우고 그 실현을 위한 걸음을 앞장에서 내짚었다.
반통일세력들의 악랄한 비방과 방해책동을 물리치며 통일애국의 길에 나선 그의 마음속진정을 누구보다 귀중히 여기신분은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이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한생을 자본의 축적과 기업의 확대, 개인의 치부를 위한데 바쳐온 그의 과거보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이나마 민족을 위하여 무엇인가 이바지하려는 그의 진정을 소중히 여기시여 공화국방문의 길을 열어주시였다.
방문기간 그는 꿈에도 소원이였던 고향의 향취를 다시 맛볼수 있었고 친척들과의 감격적인 상봉도 할수 있었다. 체류기간 그와 일행은 평양시와 지방의 여러곳을 참관하고 풍치수려한 묘향산, 금강산에서 즐거운 휴식의 한때를 보내였으며 금강산관광사업을 비롯하여 여러 경제분야에서 협력할데 대한 합의서를 채택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민족을 위해 크게 한 일도 없는 자기에게 돌려주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은정에 고마움을 금할수 없었다. 그럴수록 그이를 한번만이라도 만나뵙고싶은 간절한 마음속충동을 억제할수 없었다.
1998년 10월말 그는 자기 기업의 뒤를 이을 아들인 정몽헌회장일행을 데리고 또다시 평양을 방문하였다. 위대한 장군님을 만나뵙고싶은 일생일대의 소망을 기어이 풀려는것이 그의 방문목적이였다.
그의 소망을 헤아려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토록 바쁘신 속에서도 몸소 시간을 내시여 그를 만나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만면에 환한 미소를 담으시고 고령에 있는분이 나를 찾아오게 해서야 되겠는가고, 체류기간 불편한 점들은 없었는가, 정주영선생이 다리를 불편하게 쓰는것 같은데 어떻게 되여 그렇게 되였는가고 따뜻이 물어주시였다. 그리고 자신께서는 정주영선생이 한번 하자고 마음먹으면 끝까지 내미는 성미를 가지고있는분으로 알고있다는 믿음의 말씀도 주시였다.
절세의 위인의 접견을 받는 영광의 자리에서 정주영은 《장군님을 만나뵈왔으니 이젠 100살을 더 살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주 오겠습니다.》라고 격정에 넘쳐 말씀드리였다.
장군님께서는 시종일관 그를 명예회장선생이라고 불러주시며 우리 민족이 잘되고 잘살게 하자는 사람들과는 그 누구와도 언제나 손잡고 나갈것이라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공업지대를 창설하는 문제, 체육분야에서 북과 남이 교류를 진행할데 대한 문제, 북과 남, 해외의 공동의 관심사로 되고있는 금강산관광개발문제를 비롯하여 북남사이의 협력교류와 관련한 현대의 사업방향을 적극 지지해주시였다.
그는 위대한 장군님의 따뜻한 고무와 인정에 가슴이 후더워났다.
그는 장군님의 위인적풍모에 감동되여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을 담아 그이를 《장군》이라고 존칭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날 헤여지기에 앞서 그이를 가운데 모시고 아버지와 자기가 옆에 서서 찍었으면 하는 정몽헌회장의 청을 굳이 사양하시면서 나이많은 정주영선생이 가운데 서야 한다고 하시며 그의 손을 꼭 잡으시고 기념사진을 찍으시였다.
이처럼 정주영은 위대한 장군님을 잠간만이라도 만나뵙고 자기가 운영하던 기업을 넘겨주게 될 아들을 그이앞에 내세우고 그이를 모시고 기념사진을 찍어 가문의 가보로 물려주고싶었던 간절한 소망을 모두 실현하게 되였다.
그가 남조선으로 돌아가던 날 수백명의 기자들이 판문점에까지 나와 취재에 열을 올렸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위대한 장군님을 만나뵙던 일들을 긍지에 넘쳐 되새겨보며 자기가 체험한 그이의 위인적풍모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남조선의 한 기자가 《북에 갔다오더니 변한것 아닌가? 왜 자꾸 장군님, 장군님 하는가?》고 물었을 때 그는 《내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장군이라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봤어도 장군다운 장군은 김정일장군이 처음이다.》고 면박을 주었다.
그는 정치인은 물론 대통령이라고 해도 칭찬하는 말을 해본적이 없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였다. 이런 그가 위대한 장군님을 만나뵙고 그이께 완전히 매혹되였던것이다.
위대한 장군님의 말씀을 자자구구 새길수록 그의 눈앞에는 통일의 아침이 보이는것만 같았고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고싶은 열정이 샘솟았다.
그 열정을 안고 그는 금강산관광개발사업을 다그쳐 그해 11월 동해의 푸른 물에 첫 관광선을 띄움으로써 북남경제협력의 물고를 터놓았다.
그후 그와 일행은 1999년 한해만도 세차례나 북행길을 다녀갔으며 그때마다 북남경제협력과 관련한 위대한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았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 기간 현대그룹에 금강산관광개발권을 비롯하여 중요대상들에 대한 우선권을 주도록 하시여 현대그룹의 지위를 더욱 높여주시였다.
정주영과 현대그룹은 자기들을 민족앞에 높이 내세워주시는 장군님의 동포애적조치에서 힘과 용기를 받아안고 북남경제협력사업을 활력있게 전개해나갔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력사적인 평양상봉이 있은 직후인 주체89(2000)년 6월말 평양을 찾아온 정주영과 그 일행을 또다시 만나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그들일행을 뜨겁게 환영해주시고 그의 건강상태와 기업형편에 대하여 하나하나 물어주시였다. 그러시면서 방북의 길은 정주영명예회장선생이 선참으로 개척하였다고, 명예회장선생은 민족이 화해하는 길을 열어놓은 개척자와 다름없다고, 명예회장선생의 공적은 앞으로 력사에 큰 장을 차지하게 될것이라고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개척자! 이 부름은 단순히 경제협력의 길을 처음으로 열어놓은 그의 공로를 평가하여 내린 칭호만이 아니였다. 여기에는 나라와 민족의 번영을 위해 헌신한 그를 끝없이 아껴주고 민족앞에 떳떳이 내세워주시려는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사랑과 은정의 세계가 비껴있었다.
그는 평범한 기업가에 불과한 자기를 위해 어제는 판문점을 통한 공화국방문의 길을 열어주시는 은정어린 조치를 취해주시고 오늘은 또 할 일을 한것뿐인데도 민족이 화해하는 길을 열어놓은 개척자로 내세워주시니 고목에도 새 힘이 솟는것만 같았다.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인생의 영광, 최대의 행복이였다.
위대한 장군님을 우러르는 그의 주름잡힌 얼굴에는 자그마한 애국의 싹도 귀중히 여기시여 그것을 큰 나무로 키워주고 고목에도 꽃을 피워주는 재생의 은인, 운명의 태양에 대한 다함없는 경모심이 흘러넘치였다.
그와 그의 일가에 대한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과 은정은 이뿐이 아니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어느 기념촬영시에는 정주영선생이 불편해하니 앉아서 사진을 찍자고 하시였고 또 어느때에는 상한 관절때문에 불편해하는데 치료를 잘하여야 한다고 당부하기도 하시였다. 그리고 건강한 몸으로 오래오래 앉아있으라고 하시며 귀중한 약재도 보내주시였다.
혈육의 정을 초월하는 이처럼 뜨거운 사랑과 믿음을 받아안은 그였기에 인생의 마지막순간까지 반통일분자들의 온갖 압력과 회유를 물리치며 통일애국의 길을 꿋꿋이 걸을수 있었다.
그러던 그가 로환으로 사망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애석함을 금치 못해하시며 조의표시를 특별히 잘할데 대한 말씀을 주시고 자신의 명의로 된 조전을 그의 유가족들에게 보내주시였다. 그리고 고인을 추모하는 조의대표단과 함께 화환까지 보내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그의 애국적소행을 잊지 않으시고 그가 사망한 후에도 남조선의 현대가 금강산관광활성화를 위한 사업을 계속 추진하도록 조치를 취해주시였고 평양의 보통강기슭에 그의 애국심이 깃든 체육관이 일떠섰을 때에는 거기에 그의 이름과 그앞에 류경이라는 단어를 붙여 의의가 있게 류경정주영체육관이라고 명명하도록 해주시여 그가 민족을 위한 한길에서 영생하는 삶을 누리도록 해주시였다.
뿐만아니라 민족화해협력의 개척자의 한사람인 현대아산의 정몽헌회장이 반통일세력의 모함에 의해 뜻밖에 사망하였을 때에도 못내 애석해하시면서 심심한 조의를 표시하도록 하시였다.
한번 인연을 맺으면 영원히 변함없이 믿음과 사랑을 안겨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94(2005)년 7월 정몽헌 전 회장의 미망인인 현대그룹 회장과 그의 딸 그리고 현대아산 부회장을 접견해주시고 정몽헌선생은 정말 아까운분이였다고 추억하시면서 그만 불상사가 생기여 가슴이 아픈 그 심정을 이루 다 말할수 없다고 그들을 위로해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현대그룹 회장에게 사람에게 있어서 첫사랑이 중요하다고, 우리는 북남관계에서 당국보다 훨씬 앞서 현대와 첫사랑을 시작하였다고, 정주영명예회장과 정몽헌회장이 열어놓은 북남관계를 가문은 대를 이어가면서 잘해나가야 한다고, 나는 북남관계에서 현대가 그 어느 기업보다 모범이 되리라고 믿는다고 말씀하시였다.
남조선당국의 악랄한 반통일대결정책으로 하여 북남관계가 파국에 처하고 대결과 긴장이 극도로 격화되고있던 주체98(2009)년 8월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공화국을 방문한 현대그룹 회장과 일행을 또다시 접견해주시고 현대그룹의 선임자들에 대하여 추억하시면서 그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다 풀어주시였다.
이렇듯 남조선의 한 기업가가정을 민족앞에 떳떳이 내세워주시려는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믿음과 은정은 끝이 없었다. 이것은 그대로 그들만이 받아안은 사랑이 아닌 온 남녘겨레가 받아안은 어버이의 사랑이였다.
《우리가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40여년간에 걸치는 일본제국주의의 악독한 식민지통치의 후과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의 많은 성원들은 나서자란 정든 고향을 떠나 머나먼 이역땅에 가랑잎처럼 흘러가 온갖 민족적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피눈물나는 고역을 치르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로 하여 우리 민족에게 해외동포라는 낱말도 생겨나게 되였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나라는 비록 해방되였으나 미국의 남조선강점과 그로 인한 민족분렬은 그들에게 귀환의 넓은 길을 열어줄수 없었다. 이는 수난많은 우리 민족이 안고있는 또 하나의 비극이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조국이 있고 민족의 본태가 살아있는 정든 산천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몸은 비록 이국에서 살고있지만 언제나 조국을 그리워하고 조국의 운명을 걱정하고있는것이다.
어느 한 시인은 《나의 조국》이라는 자기의 시에서 조국의 그리움을 이렇게 절절히 노래하였다.
…
조국이여!
너는 무엇이기에
가만히 네 이름 부르면
가슴은 터질듯 긍지로 부풀고
눈굽은 쩌릿이 젖어드는것이냐
어찌하여 때로 이국의 거리를 거닐다가도
문득 솟구치는 그리움에
마음은 한달음에 달려와
너를 안는것이냐
…
정녕 조국은 모든 민족성원들의 삶의 요람, 정든 집뜨락, 다심한 어머니의 사랑이기에 해외동포들은 언제나 조국의 품을 그리워하고 그 사랑을 소중히 여기는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념원과 뜻을 헤아려주신분은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이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해외에서 사는 모든 동포들을 혈육의 정으로 한품에 안아주시고 그들의 운명도 미래도 다 맡아주시였으며 온갖 사랑을 다 돌려주시였다.
특히 재일동포들에 대한 장군님의 사랑은 집떠난 자식을 먼저 생각하는 친부모의 심정 그대로였다.
주체61(1972)년 7월 어느날 새벽 5시를 가까이 할무렵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한 일군을 부르시였다.
일군을 반겨맞으신 그이께서는 요즘 어떤 대표단들이 조국방문을 신청하여왔는가고 물으시였다.
밤새워 일을 보신 이 새벽에조차 자신의 건강보다 머나먼 이역땅에 있는 재일동포들을 먼저 생각하시는 장군님의 사랑이 그대로 어린 물음이시였다.
그 일군으로부터 조국방문을 신청하여온 방문단들의 명단을 받아드신 그이께서는 조국방문을 신청한 단체들이 대단히 많다고, 이것은 참 좋은 일이라고 하시며 방문단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꼽아가시였다. 이윽하여 그이께서는 만족하신 어조로 이 방문단들의 영접사업을 어떻게 조직하였는가고 물으시였다.
일군은 선뜻 대답올리지 못하였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그처럼 많은 인원의 조국방문단을 받아 영접해본 경험이 없었다. 그리고 조국에 있는 기간 그들이 사소한 불편도 없이 즐거운 나날을 보낼수 있도록 충분한 조건도 채 마련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해당 일군들은 조국을 방문할것을 신청하는 재일동포들의 요구를 다 받아들이지 못하고있었다.
일군은 조국방문을 신청해온 재일동포들의 단체들가운데서 몇개 단체만 먼저 조국을 방문하게 된다는것을 솔직히 말씀드리였다.
사실 해외동포들의 조국방문은 그 무엇으로써도 막을수 없는 하나의 추세로 되고있었다. 조국을 방문하는 해외동포들가운데는 일제의 식민지통치와 외세의 민족분렬책동으로 말미암아 수십년동안 서로 헤여져 생사조차 알지 못하였던 아들딸을 만난 부모도 있었고 안해를 만난 남편도 있었다. 생리별을 당한 그들은 일일천추로 상봉의 날을 기다렸으며 그날을 앞당기기 위하여 모든것을 다하고있었다.
동포들의 마음을 헤아려보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조국래왕사업을 그렇게 소극적으로 해서는 안되겠다고, 그렇게 해서야 조국에 와보고싶어하는 재일동포들의 소원을 언제 다 풀어주겠는가고, 우리가 아직은 좀 힘이 들더라도 제기된 방문단을 다 받아서 그 소원을 빨리 풀어주어야 한다고 이르시였다.
계속하여 그이께서는 조국래왕사업을 판이 크게 벌려야 하겠다고, 재일동포들이 이국땅에서 지금까지 고생을 해온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무엇을 아끼겠는가고, 재일동포들이 요구한다면 1년에 수십명정도가 아니라 수백명, 수천명이라도 다 맞아들이도록 하자고 말씀하시였다.
재일동포들과 관련한 사업을 한시도 미룰수 없는 과제로, 그들이 안고있는 마음속고충을 무조건 풀어주어야 한다는것이 장군님의 확고한 결심이고 의지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이렇듯 한량없는 사랑속에 재일동포들의 조국래왕사업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게 되였다.
이때부터 해마다 국가적인 행사들과 명절, 기념일을 맞으며 수많은 축하단과 대표단들이 조국을 찾아오고 수천명의 각계각층 동포들이 조국을 방문하여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돌아가군 하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해외동포들이 이역땅에 살면서도 언제나 조국의 향취를 잊지 않고 조국의 숨결, 조국의 맥박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가도록 세심히 보살펴주시였다.
주체78(1989)년 12월 어느날이였다.
양력설을 며칠 앞둔 이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해당 부문 일군들을 통하여 조국에 와있는 재일동포청년들의 생활정형에 대하여 알아보시였다.
그들이 조국에 와서 공부하게 된것을 크나큰 영광으로 생각하며 열심히 배우며 생활하고있다는 보고를 받으신 장군님께서는 더없이 기뻐하시며 설날을 맞으며 그들에게 무엇을 안겨주려는가에 대하여 료해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명의로 된 선물을 받도록 하려고 한다는 한 일군의 대답을 들으신 장군님께서는 그렇게 하는것이 좋겠다고, 그리고 무엇을 더 줄것이 없겠는가고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조국에 와서 처음으로 설을 쇠게 되는 동무들이겠는데 꿩을 보내주자고, 일본에서 나서자란 그 동무들에게 조국의 꿩맛을 보게 하는것이 좋을것 같다고 말씀하시였다.
이렇게 되여 양력설명절에 위대한 장군님의 은정이 어려있는 꿩을 받아안은 그들은 모두가 환희와 격정에 휩싸였다.
김일성주석 탄생 70돐을 맞으며 일본에 있는 어린이로부터 초급학교 학생에 이르기까지의 전체 동포자녀들에게 산삼이 3뿌리씩 차례지도록 2만 3 500뿌리나 보내주신 장군님이시였다.
그때 동포자녀들의 부모들, 일본 전국의 모든 재일동포들과 함께 그 향긋한 삼향기를 페부깊이 간직하며 감사의 눈물짓던 일이 생생한데 오늘은 또 조국에서 맞는 양력설을 조국의 향취와 함께 영원히 추억속에 남도록 다심하게 마음쓰시는 장군님의 그 한없이 자애롭고 웅심깊은 어버이정이 재일동포청년들의 가슴속에 알알하게 닿아왔다.
위대한 장군님의 이러한 보살피심속에서 새 세대들만이 아닌 전체 재일동포들이 자기 조국과 민족을 더 잘 알고 언제나 조국을 잊지 않으며 조국과 함께 숨을 쉬고 조국과 더불어 심장의 박동을 함께 하는 참된 애국자로 자라날수 있었다.
재일동포들을 위하시는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그 사랑은 공화국이 류례없이 간고한 시련을 헤쳐나가던 엄혹한 시기에도 변함이 없었다.
어려울 때 주는 사랑이 가장 뜨겁고 진실한 사랑이라는 말이 있다.
사랑과 인정이 말라버린 거치른 이역땅에서 사는 재일동포자녀들의 미래를 위해 온 나라 전체 인민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전후복구건설에 떨쳐나섰던 때인 1957년 4월부터 어버이수령님의 동포애적조치에 의하여 시작된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의 력사가 어려웠던 고난의 행군, 강행군시기에도 끊기지 않고 계속되게 된데는 재일동포들을 위하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크나큰 사랑이 깃들어있다.
지난 세기 90년대 중엽 사회주의를 건설하던 이전 쏘련과 동유럽나라들의 련이은 좌절과 사회주의시장의 붕괴, 미국의 날로 악랄해지는 반공화국고립압살책동과 몇해째 계속되는 자연재해로 하여 공화국은 고난의 행군, 강행군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하지만 그렇듯 형언할수 없는 어려움속에서도 재일동포자녀들에게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보내주는 사업은 중단없이 계속되였다.
여기에는 우리가 아무리 곤난하여도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은 무조건 제때에 보내주어야 한다, 일본땅에 단 한명의 조선사람이 남을 때까지 보내주어야 한다고 하신 위대한 장군님의 숭고한 뜻이 어려있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을 잃고 온 민족이 몸부림치던 주체83(1994)년 12월에도 일군들에게 총련에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보내는것은 어버이수령님께서 세워주신 제도와 전통인데 어떤 일이 있어도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앞으로도 수령님께서 계실 때와 꼭같이 보내주어야 한다는 뜻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그 순간 일군들은 언제인가 교육원조비에는 총련동포자녀들을 생각하시는 어버이수령님의 자애로운 사랑이 담겨져있다고, 총련에 교육원조비를 보내는것은 총련동포자녀들에 대한 수령님의 마음을 보내는것이라고 하시던 그이의 말씀이 되새겨져 가슴 후더워옴을 금할수 없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변함없이 수령님과 꼭같으신 마음으로 재일동포자녀들에 대한 민족교육을 생각하시는 위대한 장군님이시였다.
뜻밖에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받아안은 재일본조선인중앙교육회 일군들은 격동된 심정을 터치며 이렇게 말하였다.
《어려울 때 위인을 더 잘 안다고 하였는데 크나큰 슬픔속에서도 자신보다 재일동포자녀들을 먼저 생각하시며 예나 다름없이 극진한 배려를 돌려주시는 우리의 장군님처럼 사랑많으시고 인정깊으신 령도자는 동서고금에 다시 없을것입니다.》
절세의 위인들의 사랑과 은정속에 1957년부터 2012년까지 157차에 걸쳐 467억 5 945만 390¥에 달하는 막대한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이 생명수가 되여 재일동포들에게 흘러들었기에 비록 이역땅이지만 초급학교로부터 대학교에 이르는 민족교육의 화원이 만발하게 피여날수 있었고 오늘도 민족의 대, 애국의 대가 꿋꿋이 이어지고있는것이다.
1995년 1월 17일 새벽 리히터척도로 7.2의 파괴적인 지진이 일어나 일본의 한신, 아와지지역을 순식간에 참혹한 페허로 만들어놓았다. 이것은 1995년 국제10대뉴스의 하나로 세상을 놀래운 자연의 무자비한 파괴였다.
당시 일본의 고베로부터 오사까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휩쓴 이 지진은 1923년 간또대지진이후 처음으로 되는 큰 지진으로서 고베시를 완전한 재더미로 만들어놓았다.
그통에 고베시에 집중되여 살던 재일동포들도 큰 피해를 입게 되였다. 121명의 동포들이 목숨을 잃고 1 500여명의 동포들이 부상당하였으며 2 225호의 동포들의 집과 공장, 점포들이 완전히 불타거나 파괴되고 4 200여명의 동포들이 엄동설한에 피난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동포들이 당한 이 뜻밖의 재난을 두고 못내 가슴아파하시며 대지진이 일어난 다음날 깊은 동정과 은정어린 위문전문을 총련중앙상임위원회 의장앞으로 보내주시였다.
《나는 일본의 효고현을 비롯한 깅끼지방에서 대규모의 지진이 일어나 그곳 총련조직들과 동포들이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는 뜻하지 않은 소식에 접하였습니다.
나는 이 불행한 소식에 접하여 한덕수의장동지를 비롯한 총련중앙상임위원회와 피해지역 동포들과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위문과 애도의 뜻을 표하는바입니다.
나는 총련의 모든 조직들과 동포들이 더욱 굳게 단합하여 지진피해를 하루빨리 가시고 안착된 생활을 이룩하기를 충심으로 바랍니다.》
그러시고도 장군님께서는 재일동포들이 겪는 불행과 고통을 덜어주는 일인데 하나도 아까와할것이 없다고, 우리가 죽을 먹고 굶는 한이 있더라도 위문금을 보내주어야 한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지진피해를 입은 동포들에게 100만US$의 위문금을 보내는것과 관련하여 총련중앙상임위원회 한덕수의장에게 다시금 위문전문을 보내시였으며 지진피해를 입은 일본인들에게도 20만US$의 위문금을 보내주는 인도주의적조치를 취하도록 하시였다.
이것은 경제가 발전했다고 자처하는 나라들이 일본정부에 보낸 구제금이 기껏하여 50만US$미만이라는 사실과 대비해볼 때 엄청난 액수에 달한다.
사실 이 시기 공화국의 형편에서 해외동포들에게 위문금을 보내준다는것은 힘겨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하지만 민족이 당하는 불행과 고통을 하루빨리 가셔내는것을 가장 선차적인 문제로 내세우시는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비록 나라사정이 어려웠던 시기였지만 재일동포들에게 거액의 위문금을 보내주시였던것이다.
숭고한 민족애와 한없이 넓은 도량을 지니신 장군님께서는 총련산하 동포들뿐아니라 민단계동포들도 포함하여 모든 피해동포들에게 한사람도 빠짐없이 위문금이 가닿도록 은정어린 조치도 취해주시였다.
위문전문과 위문금을 받은 재일동포들은 장군님의 사랑에 감격을 금치 못해하였다.
그들은 어려움을 겪는 속에서도 이국땅에 사는 자기들을 념려하시여 그토록 은정을 베풀어주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이 너무도 고마워 《우리에게는 어머니조국이 있다.》,
《어버이수령님과 꼭같으신 위대한 장군님의 품이 있다.》, 《사랑의 생명수를 보내주신 장군님의 은혜에 꼭 보답하겠다.》고 격정을 터치였다. 민단동포들은 총련조직을 찾아와 자기들까지 친혈육으로 믿고 따뜻이 돌보아주시는 위대한 장군님께 감사의 인사를 꼭 전해달라고 절절히 부탁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주체85(1996)년 1월 재일조선청년학생들을 위하여 마련해주신 뜻깊은 좌석에서 있은 일에 대한 이야기는 재일동포들의 가슴속에 맺혀있는 슬픔을 하루빨리 가셔주시기 위해 마음쓰신 그이의 은정을 가슴뜨겁게 전해주고있다.
그날 일군들에게 조선대학교 학생들이 조국에 와서 공부는 어떻게 하고있는가, 조국에 처음 온 동무들은 몇명인가 하는것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시던 장군님께서는 문득 누구에게라 없이 여기에 효고현에서 온 동무가 있는가고 물으시였다.
모두가 영문을 몰라하는데 한 조선대학교 교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졸업반 학생들속에 효고현에서 온 학생이 있다고 정중히 말씀드렸다.
장군님께서는 그 학생의 가정에서는 지난해의 한신, 아와지대진재때 어떤 피해를 입었는가고 또다시 물으시였다.
그 학생이 대지진의 후과로 비록 어머니를 잃기는 하였지만 위대한 장군님께서 계시기에 자기는 마음이 외롭지 않다고 하면서 학습과 생활을 잘하고있다는것을 아시게 된 장군님께서는 못내 감동을 금치 못해하시며 그 학생은 훌륭한 조선학생이라고 치하하시였다.
이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 자리에 참가한 수많은 재일동포청년들가운데서 그 학생을 몸가까이 부르시여 이름이며 나이, 가정형편과 피해정형을 하나하나 물어주시였다.
어머니가 잘못된 사연을 구체적으로 다 들으시고 저으기 가슴아프시여 안되였다고, 참 안되였다고 따뜻이 위로하시는 장군님의 모습은 인자한 어머니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 학생은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끝내 소리내여 흐느껴 울고말았다.
장군님께서는 그의 어깨를 어루만져주시며 비록 어머니를 잃었지만 당이 있고 조국이 있는 이상 동무는 결코 외롭지 않다고 거듭거듭 격려해주시였다.
참으로 이역에 있는 자식의 운명과 장래를 책임지고 보살펴주시는 위대한 보호자, 자애로운 어버이의 사랑은 끝이 없었다.
이렇듯 안아주고 보살펴주는 따뜻한 어머니의 품이 있어 재일동포들은 찬바람부는 이역땅에서도 보란듯이 민주주의적민족권리를 당당히 행사하고있는것이며 조국의 통일과 민족의 번영을 위한 길에서 참된 삶을 빛내이고있는것이다.
몸소 위로연도 차려주시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민족의 어버이를 잃은 슬픔이 하늘땅에 사무치던 대국상의 나날 자신보다 해외동포들을 먼저 생각하시고 그들의 아픈 마음을 쓰다듬어주시며 그들모두를 애국애족의 길로 내세워주신 이야기는 오늘도 만사람의 가슴을 뜨겁게 해주고있다.
우리 겨레가 너무도 뜻밖에 당한 대국상으로 피눈물의 바다에서 몸부림치고있을 때 세계의 수많은 나라들에서도 조의대표단파견을 요청하여왔다. 그때 공화국정부에서는 다른 나라의 조의대표단은 받지 않는 조치를 취하였다.
하지만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살고있는 해외동포들에게는 조의방문이 허락되였다.
그 누구보다도 크나큰 상실의 아픔을 안고계신 위대한 장군님께서 어버이수령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시던 우리 겨레를 먼저 생각하시며 해외동포들의 조의방문길을 열어주시였던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것만 같은 비보를 받고 피눈물을 흘리던 해외의 수많은 동포들이 장군님께서 마련해주신 조의방문길에 올라 불원천리 평양으로 달려왔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 모진 상실의 아픔속에서도 어버이수령님을 추모하기 위해 조국으로 달려온 수많은 해외동포인사들을 몸소 만나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주체83(1994)년 7월 14일에만도 한덕수 총련중앙상임위원회 의장을 단장으로 하는 총련의 조의대표단을 비롯한 세계 여러 지역에서 달려온 동포들을 만나주시고 그들의 가장 심심한 애도의 뜻에 사의를 표하시였으며 그들과 동포애의 정이 넘치는 담화를 나누시였다.
이날 장군님께서는 우리 수령님을 못 잊어 해외에서 수만리길을 거쳐 조의를 표시하겠다고 해외교포조직대표 및 교포인사들이 많이 와있는것만큼 그들에게 불편이 없도록 잘 돌봐주어야 한다고 하시며 그들의 숙식조건에 이르기까지 깊은 관심을 돌릴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이뿐이 아니였다. 일군들은 위대한 장군님의 부담을 덜어드릴 생각으로 해외동포들이 수령님의 령전에 조의를 표시한 다음 추도대회때에만 장군님께 간단한 인사를 드리도록 하는것으로 행사계획을 세웠었다.
이 사실을 료해하신 장군님께서는 수령님의 령전에 그들이 조의를 표시할 때 내가 호상을 서겠다고 하시며 수령님의 령전에 조의를 표시하고 영결하겠다고 찾아온 그자체가 수령님에 대한 뜨거운 흠모의 정의 표시이고 수령님에 대한 끝없는 존경과 숭배심의 표현이라고, 나는 그들이 수령님의 령전에 조의를 표시할 때 호상을 서고 다 만나주겠다고, 이미 수령님의 령전에 조의를 표시하였다 하더라도 그에 관계없이 해외에서 온 우리 동포들을 이제 다 금수산의사당으로 오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오늘 조국에 도착한 대표단을 포함하여 이미 조국에 와있는 전체 해외교포성원들도 다 만나주겠다고 하시였다.
사실 해외동포들은 어버이수령님의 령전에 조의를 표시하는 동시에 위대한 장군님께 위로의 인사를 드리기 위하여 조국에 오는것이다. 민족의 어버이를 뜻밖에 잃은 엄연한 현실앞에서 수령님 그대로이신 장군님을 만나뵙고 인사를 드리겠다는것이 상실의 슬픔과 함께 그들의 가슴을 꽉 채운 소망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을 안고계시면서도 그들의 가슴속깊이에 간직된 소망을 헤아리시여 해외동포들을 일일이 다 만나 뜨겁게 손잡아주시며 사의를 표시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렇듯 해외동포조문단과 조객들을 따뜻이 맞아주시고 체류기간 불편한 점이 없도록 보살펴주시였을뿐아니라 력사에 류례없는 위로연까지 마련해주시였다.
피눈물속에 해가 뜨고 달이 지던 7월 16일이였다. 이날 장군님께서는 여러차례에 걸쳐 해외의 거의 모든 조직들에서 대표들과 동포명류인사들이 수령님의 령전에 조의를 표시하고 나에게 위문의 인사를 하겠다고 온것만큼 그들을 다 잘 대해주어 보내야 하겠다고, 총련에서 온 성원들을 위한 연회를 차려야 하겠다고, 그리고 추도대회가 끝난 20일 저녁에는 총련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온 해외교포조직대표들과 인사들을 위한 연회도 목란관에서 차려주어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순간 일군들은 마음속으로 뜨거운것을 삼키였다.
위로연이라고 하면 정신육체적으로 당하고있는 고통이나 괴로움을 풀어주기 위하여 차리는 연회라고 할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위로연은 마땅히 크나큰 상실의 아픔속에 계시는 위대한 장군님을 위로하여 우리 민족이 차려드려야 할것이였다.
그러나 장군님께서는 해외에서 조의를 표시하기 위하여 온 동포들모두를 자신과 꼭같이 어버이를 잃은 상제로 여기고 그들에게 위로연을 차려주도록 하시였던것이다.
그리하여 7월 19일 어버이수령님과의 영결식이 엄숙히 거행된데 이어 총련조의대표단, 조국에 체류하고있는 총련일군들과 동포들을 위한 위로연이 진행되였고 20일 저녁에는 총련을 제외한 세계 여러 지역에서 온 해외동포조직대표들과 인사들을 위한 위로연이 진행되였다.
아무리 겨레를 생각한 위인이 있었다 해도 대국상의 나날에 해외동포들을 위하여 위로연까지 마련해준 사실을 그 어느 나라 력사도 일찌기 알지 못하고있었다.
위로연의 연회상을 마주한 해외동포들은 어버이수령님이 사무치게 그리워,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누르시고 오히려 동포조객들인 자기들의 슬픔을 먼저 헤아려 위로해주시는 장군님의 사랑이 너무도 고마워 울고 또 울면서 자기들의 격정을 토로하였다.
최홍희 국제태권도련맹 총재는 《나는 모든 해외동포들이 친애하는 김정일선생님을 높이 모시고 통일성업에 매진하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저 하며 이 길이 바로 김일성주석의 념원을 실현하는 길임을 일러두고저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다른 해외동포인사들도 일치하게 김일성주석의 생전의 뜻을 이어가시는 위대한 장군님을 모시고 사는 더없는 영광에 대하여, 그이의 두리에 일심단결하여 조국통일성업에 모든 힘을 다 바칠데 대하여 격조높이 말하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사랑에 의하여 마련된 위로연은 해외동포들로 하여금 슬픔을 이겨내고 애국애족의 길로 한사람같이 떨쳐나서도록 힘과 용기를 안겨준 뜻깊은 계기로 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대국상의 나날 한 해외동포를 위하여 생일연회도 마련해주시였다.
주체83(1994)년 8월 어느날이였다.
이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재미동포 손원태에게 80돐 생일상을 안겨주시였다.
손원태로 말하면 위대한 수령님께서 옛 길림시절에 인연을 맺으신 손정도목사의 아들이였다. 수령님께서 길림에서 헤여지신이래 그와 다시 만나신것은 주체80(1991)년 봄 어느날이였다.
그날 해외에 살고있는 그를 조국으로 불러 만나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생일을 한번도 차려주지 못한것을 두고 못내 서운해하시면서 80돐생일상만은 형님으로서 성의껏 차려주겠다고, 그때 조국에 와서 생일을 쇠라고 말씀하시였었다. 주체83(1994)년 5월 어느날에도 일군들에게 그의 80돐생일상을 잘 차려주자고 하시면서 생일날에 줄 선물까지 마련해놓으시였다.
그러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 너무도 갑자기 서거하시였다는 비보를 받고 도저히 믿을수 없었던 손원태는 줄곧 흐르는 눈물을 걷잡지 못하며 공화국으로 달려왔다.
조의식장에서 그를 만나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멀리 타향에서 수고로이 와주어 고맙다고, 수령님께서는 생전에 선생님의 80돐생일을 크게 쇠드리겠다고 하시였는데 참으로 안되였다고 하시면서 앞으로도 제 집처럼 드나들어야 한다고, 저는 수령님의 친지들을 항상 잊지 않겠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는 비길데 없는 상실의 아픔을 안고계시는 장군님께서 자기의 생일까지 관심을 돌리시는것이 너무도 고마와 더욱 목이 메였다.
그가 80돐생일을 맞는 날이였다.
이날 이른아침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자신의 명의로 된 꽃바구니와 대형과일바구니 그리고 그와 부인에게 대를 두고 길이 전할 선물과 축하의 인사까지 보내주시였다. 그러시고 저녁에는 어버이수령님께서 생전에 그의 생일에 즈음하여 마련해놓으신 선물인 대형보석화 《송학》을 전달하게 하시고 생일 80돐을 축하하는 성대한 연회까지 차려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계시여 어버이수령님의 생전의 사랑이 그대로 뜨겁게 이어지고있음을 절감한 그는 생일상을 받고 자기의 심중을 이렇게 터치였다.
《참으로 친애하는 김정일선생님은 그대로 김일성주석이시며 백의민족의 위대한 태양이십니다.
김일성주석께서는 비록 너무도 애석하게 우리의 곁을 떠나시였지만 우리 7천만백의민족에게는 수령님의 위업을 빛나게 이어가시며 우리모두를 사랑의 한품에 안아주시는 친애하는 지도자분께서 계십니다.》
대국상의 나날 력사에 류례없는 위로연에 참가하여 힘과 용기를 가다듬고 애국애족의 길을 걸은 사람들속에는 녀류기자 문명자도 있다.
그는 한때 미국의 백악관출입기자로 활약한 경력도 있고 세계 여러 지역을 밟으면서 예리한 분석과 째인 론리로 자기의 정치적견해를 밝힌것으로 하여 남조선과 해외동포들속에서는 물론 서방세계에도 널리 알려진 녀성문필가였다.
그러한 그에게 있어서 미국의 끈질긴 고립압살책동에 맞서 추호의 동요나 좌절도 없이 민족의 자주권과 존엄, 사회주의를 굳건히 지켜내는 공화국의 현실은 경이의 대상, 동경의 대상이 아닐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여러차례 평양을 방문하여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뵈올수 있었으며 이 과정에 그의 가슴속에는 20세기의 정치사를 주도해오신 김일성주석과 김정일장군님에 대한 존경과 흠모가 자리잡혀졌다.
그런 그가 대국상의 소식에 접한 길로 평양에 달려와 조의식장에서 위대한 장군님을 뵈옵고 더우기는 위문을 온 조객이 오히려 위문을 받는 세상에 있어보지도 듣어보지도 못한 위로연에 참가하여 받은 충격은 남다른것이였다. 특히 그는 조선기록영화 《인민을 위한 길에 언제나 함께 계셨습니다》를 보고 장군님의 위인상에 대하여 더 깊이 알게 되였다.
그후 그는 주체89(2000)년 6월말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을 다시금 만나뵙게 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를 만나주신 자리에서 우리가 만났던 때로부터 이제는 6년이 되였다고 하시면서 김일성주석님께서 서거하시였을 때 녀사를 만나 악수를 한 기억이 있다고, 그 다음에는 내가 시간을 낼수 없어 편지를 써보낸적이 있다고, 그 편지에서 앞으로 조국을 다시 방문하는 기회에 꼭 만나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썼는데 나는 늘 그 약속을 잊지 않고있었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주 녀사에 대한 말씀을 하시였다고, 특히 1994년 4월 주석님께서 녀사를 만나주신 후에 여러차례의 말씀이 계시였다고 하시면서 그래서 오래전부터 녀사를 만나보려고 생각하였다고, 내가 이미전부터 녀사를 만나주겠다고 한 빚을 지고있었는데 이번에 그것을 갚자고 이렇게 시간을 냈다고 하시였다.
이날 력사적인 북남수뇌상봉에 대하여서와 조미관계문제를 비롯하여 그가 관심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하나하나 말씀해주고나신 장군님께서는 헤여질 때에는 다리가 불편한 그를 도와 몸소 승용차에 편히 오르도록 보살펴주기까지 하시였다.
참으로 민족의 대국상속에서도 해외동포모두를 사랑의 한품에 안아 슬픔을 힘과 용기로 바꾸어 일어서도록 위로연까지 차려주며 보살펴주고 손잡아 이끌어주신 김정일장군님의 품이 있어 해외동포들은 통일을 위한 애국애족의 길을 과감하게 걸어나갈수 있었다.
민족과 통일을 위하는 사람이라면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은 민족을 사랑하고 통일을 위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한품에 안아 애국애족의 길에 내세워주시고 민족의 기억속에 영생하는 애국인사로 그들의 삶을 빛내여주신 민족애의 최고화신이시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고 민족의 장래를 조금이라도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다같이 손잡고 단결하여야 하며 전민족이 단합된 힘으로 조국통일을 위한 거족적인 투쟁을 힘차게 벌려나가야 합니다.》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걱정하고 조국통일을 위해 나서는 사람이라면 어떤 사상과 신앙을 가졌건 또 그가 남조선에서 군장성이건 집권상층에 있건 과거를 백지화하고 관용으로 대하며 그들을 단합시켜야 한다는것이 위대한 장군님의 민족대단결의 사상이다. 사상과 리념, 주의주장보다 민족을 더 귀중히 여기며 민족의 리익을 위한데 모든것을 복종시켜나가시는 그이의 숭고한 애국의 뜻에는 매혹되지 않는 사람이, 머리를 수그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남조선의 전국민족민주운동련합(전민련) 고문이였던 문익환목사는 그들중의 한사람이였다.
문익환목사로 말하면 오래전부터 남조선사회의 민주화와 나라의 평화적통일을 위하여 헌신하여온 민주인사였다. 그는 일찌기 《민족통일이란 정부당국의 점유물이 될수 없으며 통일의 주체는 민중이기때문에 이들의 자주적인 참여속에서 통일방안이 모색되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나름대로의 통일방도를 모색해왔다.
그러한 그에게 절절한 념원이 한가지 있었으니 그것은 위대한 김일성주석을 만나뵈옵는것이였다. 통일문제에 대한 수령님의 고견을 직접 듣고싶어서였다.
그러던 주체78(1989)년 1월 1일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신년사에서 조국통일방도의 민족적합의를 위한 북남지도급인사들의 정치협상회의소집을 제의하시면서 남조선의 여러 정당 총재들, 각계 인사들과 함께 몸소 그를 초청해주시였다.
뜻밖에도 위대한 수령님의 초청을 받아안게 된 그는 형언할수 없는 강렬한 흥분과 격정에 휩싸였다.
그는 즉시 성명을 발표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북남정치협상회의 소집제안에 지지를 표명한데 이어 1989년 3월말 마침내 온 남녘겨레의 통일열망을 안고 처음으로 평양방문의 길에 올랐다.
문익환목사의 평양방문을 그 누구보다도 기뻐하신분은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이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고령의 몸으로 평양에 찾아온 그를 친혈육의 정으로 따뜻이 맞아주도록 하시고 그의 평양방문을 애국적인 장거로 높이 치하해주시며 아무런 불편없이 공화국의 여러곳을 돌아보도록 해주시였다.
그 사랑속에 문익환목사는 공화국의 여러곳을 참관하면서 북도 남도 하나의 민족이라는것을 다시금 페부로 절감하게 되였으며 그 어떤 주의주장이나 반민족적폭력행위도 민족의 진한 피줄을 갈라놓을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였다.
특히 그는 위대한 수령님을 두차례나 만나뵙고 민족의 분렬을 막고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현실적이며 합리적인 조국통일방안과 민족대단결을 이룩하는데서 나서는 원칙과 그 실현방도들에 이르기까지 조국통일위업수행에서 나서는 귀중한 가르치심을 받아안게 되였다. 통일문제에 대하여 고심도 많이 하고 나름대로의 일가견도 가지고있던 그였지만 민족공동의 리익을 최우선시하고 여기에 모든것을 복종시키며 남조선사회의 민주화와 광범한 대중이 참가하는 통일운동을 통하여 민족의 통일을 이룩할데 대한 김일성주석의 통일방안에 접하고 그이의 위인상에 완전히 매혹되였다.
문익환목사의 평양방문의 나날은 북과 남에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가 반세기 가까운 나날 존속해왔어도 민족적인 대의에 모든것을 복종시키는 립장에만 선다면 그 어떤 주의주장도 다 초월하여 전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할수 있다는것을 내외에 과시한 나날이였다.
남조선의 반통일분자들은 민족의 화해와 단합, 통일을 위해 의로운 일을 하고 돌아간 그의 손에 쇠고랑을 채워 감옥으로 끌고 가는 횡포를 감행하였지만 그는 옥중에서도 《나는 왜 평양에 갔나》라는 글을 써서 반통일세력들을 전률케 하였고 애국적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 사실을 두고 가슴아파하시며 즉시 그를 구원하기 위한 온갖 대책을 다 취해주시였다.
그리하여 남조선당국을 규탄하는 공화국의 각 정당, 사회단체들의 명의로 된 성명들과 담화들이 련이어 발표되였고 각급 인사들로 문익환목사 구원대책위원회가 발족되였으며 북남고위급회담의 공식석상에서도 그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는 목소리가 울려나오게 되였다.
그 나날 그는 조국통일상수상자의 영예도 지니게 되였고 감옥에서 석방되였을 때에는 수많은 위문품들과 함께 귀중한 보약재들도 받아안게 되였다.
그 사랑, 그 믿음이 그대로 생의 자양분이 되였기에 그는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나라와 민족의 통일을 위한 길에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칠수 있었다.
통일의 새봄을 앞당겨오기 위해 헌신하던 그가 끝내 통일의 그날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공화국의 신문들과 방송들에 그의 부고를 내도록 하시고 유가족들에게 조전을 보내여 위로도 해주시였으며 평양에서 그를 추모하는 추도대회를 진행하도록 해주시였다.
민족의 단합과 통일을 위해 헌신한 문익환목사를 잊지 못해하시는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사랑은 그의 부인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84(1995)년 7월 8일 어버이수령님의 서거 1돐 추모행사에 참가하기 위하여 평양에 온 남조선의 통일맞이 7천만겨레모임 대표이며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공동의장인 문익환목사의 부인을 접견해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소복차림으로 찾아온 그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시면서 녀사께서 수령님의 서거 1돐에 즈음하여 수령님의 령전에 인사를 올리기 위해 신상의 위험도 마다하지 않고 평양을 방문한데 대하여 다시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고 하시였다.
계속하여 그이께서는 우리 인민들은 수령님의 높은 뜻을 받들고 조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성스러운 투쟁에 한생을 고스란히 바치신 문익환선생을 잊지 않고있으며 진심으로 존경하고있다고, 문익환선생과 같이 애국적지조가 높고 절개가 굳은 통일애국투사를 잃은것은 조국통일을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에서 커다란 손실로 된다고 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이날 자신께서는 녀사가 혼자 온것이 아니라 문목사가 온줄 알고 남쪽의 4천만인민이 온줄 알겠다고, 먼저 가신분들의 뜻을 받들어 나라의 통일을 위해 모든것을 다하겠다고 말씀하시였으며 그를 옆에 나란히 세우고 뜻깊은 기념촬영을 하시였다. 그리고 그가 남조선에 돌아가 반통일분자들에 의해 감옥으로 끌려갔을 때에는 그를 석방시키기 위한 여러가지 대책들을 취하도록 하시였을뿐아니라 주체94(2005)년 6월에는 평양을 찾아온 그를 또다시 만나주시였다.
그는 이런 믿음과 사랑을 가슴깊이 간직하고 반통일분자들의 온갖 탄압과 박해속에서도 자기의 집에 평양방문때 찍은 사진과 선물 등을 전시해놓고 찾아오는 청년학생들과 민주인사들이 통일운동에 적극 나서도록 고무해주었으며 생의 마지막까지 6.15공동선언의 리행과 《보안법》의 페지 등 통일애국투쟁을 줄기차게 벌려나갈수 있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가꾸어오신 민족대단결, 민족중시의 화원에는 국제태권도련맹 총재였던 최홍희선생과 같이 지난날 민족앞에 죄를 지은 사람들의 과거를 백지화하고 그들을 통일애국의 길로 이끌어준 인생전환의 극적인 화폭도 있다.
해방전 일본군대에 강제징집되였던 그는 1944년 평양주둔 일본군 제30사단에 조직되였던 반일학도병무장대의 한 지도성원으로서 항일의 전설적영웅 김일성장군님이 령도하시는 조선인민혁명군을 찾아가려고 시도하다가 비밀이 탄로되여 체포되였다.
그는 해방후 본의아니게 남조선으로 나가 륙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남조선군에 들어가 사단장, 군단장으로 복무하였다.
그는 1955년에 심혈을 기울여 연구발전시킨 민족무술을 태권도라고 이름짓고 이를 세계적범위로 보급시키기 위하여 1966년에 국제태권도련맹을 창설하였다. 그후 그는 남조선군사독재정권이 태권도를 불순한 정치적목적에 악용하면서 그것을 반대해나서는 자기에 대한 암살책동을 집요하게 벌리는데 항거하여 망명의 길에 오르게 되였다.
자기딴에는 희망을 안고 찾아간 남조선땅에서 인생의 쓰디쓴 고배만 마시고 나중에는 당국의 눈을 피해 해외에로의 정치적망명의 길에 오르지 않으면 안되였던 최홍희선생의 가슴은 쓰리고 아팠다.
그럴수록 그의 가슴속깊이에서는 자기의 운명을 지켜주고 보살펴주는 따뜻한 삶의 보금자리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솟구쳐올랐다.
망명생활과정에 그는 자기가 남조선에서 듣던바와는 다른 공화국북반부의 소식들에 접하게 되였다. 그러나 공화국에로의 방문의 걸음을 선뜻 내짚을수 없었다.
바로 이러하던 그에게 어버이수령님께서와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조국방문의 넓은 길을 열어주시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주체68(1979)년 5월 12일 최홍희선생을 만나주시고 멀리 해외에서 사회주의조국을 찾아온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며 열렬히 환영한다고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그와 기념사진도 찍으시고 건강은 어떤가, 조국에 있는 친척들은 다 만나보았는가고 따뜻이 물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 해외의 민주인사들이 조국통일3대원칙을 고수하기 위한 투쟁에서 지침으로 삼아야 할 문제들에 대하여서와 민족대단결의 원칙에서 통일전선을 실현할데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어떻게 해서라도 민족대단결을 이룩하여 우리 나라가 《두개 조선》으로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애국적민주인사들이 민족대단결의 원칙에서 사업을 더 잘하여 모든 해외동포들이 다같이 손잡고 나라의 통일을 앞당겨나가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불미한 과거를 탓할 대신 자신을 한품에 안아주시는 절세의 위인들의 넓으신 도량과 포옹력에 깊이 탄복한 그는 가슴속에 넘쳐나는 재생의 활력과 참다운 삶의 희열을 뜨겁게 느낄수 있었으며 그 품이야말로 자기의 운명을 지켜주고 참된 삶을 꽃펴주는 진정한 삶의 보금자리이라는 생각을 더욱 가다듬게 되였다.
그는 그후 해외에서 자기가 발행하고있던 신문의 편집내용에 공화국의 현실을 반영하면서 통일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해나갔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조국통일을 위한 그의 이러한 노력들을 높이 평가해주시면서 해방전 반일학도병무장대에 참가하였던 그의 공적도 높이 평가하시여 그에게 애국지사의 고귀한 칭호를 안겨주시였다. 그리고 그가 민족고유의 무술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애쓰는것을 애국애족의 소행으로 높이 평가해주시며 전 15권에 달하는 방대한 《태권도백과사전》도 성과적으로 출판하도록 해주시였고 태권도의 모국답게 웅장화려한 태권도전당을 일떠세워주시여 그의 평생의 소원도 다 풀어주시였다.
주체81(1992)년 4월 어느날 최홍희선생을 만나주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최홍희선생을 만나서 대단히 기쁘다고 하시면서 민족의 자랑인 태권도를 더욱 발전시키고 여러 나라들에 널리 보급할데 대하여서와 태권도를 가지고 조국통일성업에 적극 이바지할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최홍희선생은 공화국에 올 때마다 그이의 비범한 령도력과 뜨거운 인정미에 대한 이야기를 적지 않게 들어왔지만 정작 만나뵈옵고보니 위대한 수령님 그대로이신 그이의 고결한 인품에 매혹되는 마음을 억제할수 없었다. 그때부터 그는 그이에 대한 흠모의 마음을 깊이 간직하게 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를 원형으로 하는 다부작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차홍기편)을 세상에 내놓도록 하시여 그의 삶을 나라와 민족앞에 빛내여주시고 그의 80돐생일상과 부인의 70돐생일상을 보내주시는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주체89(2000)년 조선로동당창건 55돐경축 열병식과 군중시위가 성대하게 진행되던 김일성광장의 주석단에서 최홍희선생의 손을 다정히 잡아주시며 먼길에 오시느라고 수고했다고, 정말 해외에서 수고가 많다고 뜨거운 은정의 말씀을 하여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로부터 며칠후인 10월 20일 그를 또다시 만나주시였다.
현관에까지 나오시여 그를 마중해주신 장군님께서는 국제태권도련맹 총재 최홍희선생이 태권도를 세계적으로 보급하느라고 로고가 크다고 하시며 그가 고령이지만 왕성한 투지와 패기를 가지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헌신분투하고있는데 대하여 높이 평가하시였다.
계속하여 최홍희선생이랑 우리 수령님을 찾아 평양에 오게 되였는데 그때 그렇게 하기를 정말 잘하였다고, 그렇게 하였기때문에 선생의 운명과 태권도가 빛이 나기 시작하였다고, 남조선에서 뜻이 있는 사람들은 다 우리 수령님의 품을 찾아왔다고 말씀하시였다.
이날 그를 위하여 뜻깊은 오찬까지 마련해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헤여지실 때에는 나이많은분이라고 그를 먼저 내세워주시며 문앞에까지 나오시여 오래오래 장수하라고 당부하시면서 차가 떠날 때까지 배웅해주시였다.
이처럼 뜨거운 사랑과 은정을 베풀어주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91(2002)년 1월 그가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그를 하루속히 공화국에 데려와 병을 치료하도록 해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선군령도의 그 바쁘신 속에서도 그의 생명을 연장할수 있는 구급대책까지 취해주시였을뿐아니라 치료정형을 매일같이 알아보시며 병치료에 필요한 귀한 약재들과 그의 입맛을 돋구어줄수 있도록 산삼과 과일까지 보내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그토록 믿음을 주시고 사랑을 안겨주시던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최홍희총재는 태권도를 가지고 조국통일에 이바지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지고 수십년동안 해외에서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쳐 태권도활동을 열정적으로 해오다가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것을 알고는 조국의 품에 안겨 생을 마쳤다고 하시며 최홍희총재는 결국 인생의 마무리를 잘한셈이라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그의 장의를 사회장으로 하고 령구를 서장회관에 안치하도록 하시였으며 자신의 명의로 된 화환도 보내주시였다. 그리고 그의 유해를 애국렬사릉에 안장하도록 하시는 은정을 거듭 베풀어주시였다.
이처럼 최홍희선생은 자기의 민족적량심과 애국적소행을 알아주고 귀중히 여겨주신 김일성주석과 김정일장군님의 품에 안겼기에 애국애족의 참된 삶을 빛내일수 있었으며 조국의 애국렬사들과 함께 영생의 언덕에 오르게 된것이다.
민족을 위하고 통일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품에 안아주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동포애는 재미동포 리준무선생에게도 뜨겁게 미치고있다.
1999년 새해를 맞으며 미국 뉴욕의 이름있는 한 극장에서는 신년대음악회가 수천명의 참가밑에 열리였다. 이 대음악회에서 불멸의 태양찬가 《김일성장군의 노래》가 격동의 도가니속에서 연주되였는데 그 지휘를 한 사람이 바로 리준무선생이였다.
그는 1999년 6월 제3차 세계녀자축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공화국의 녀자축구선수단이 미국에 갔을 때에도 《김일성장군의 노래》와 《김정일장군의 노래》관현악연주를 열정적으로 지휘하여 미국땅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었다. 그리고 2000년 2월의 명절을 맞으며 또다시 조국의 음악을 가지고 음악회를 진행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해외에서 오래전부터 애국적음악활동을 벌려온 그의 소행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시고 그에게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89(2000)년 3월 어느날 한 일군에게 2000년 2월의 명절에 즈음하여 재미교포음악지휘자가 교향곡연주회를 진행하였는데 세계명곡들과 함께 우리 나라 노래 《조선의 장군》,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 《아리랑》 등을 성대히 연주하였다고 하시면서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그가 공화국을 방문하였을 때에는 모든 편의를 잘 보장해주도록 하시고 조국에 와서 음악전습도 받았으면 하는 그의 소원도 풀어주시였다. 그러시고도 그가 재미동포들속에서 민족문화예술보급활동을 잘해나가도록 가야금, 장고를 비롯한 민족악기들과 그 교측본들을 보내주도록 하시였으며 조국의 음악들을 수록한 CD일식을 보내주도록 하시였다.
하여 오늘도 그는 절세의 위인의 그 사랑과 믿음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민족과 통일을 위한 애국적음악활동을 정력적으로 벌려나가고있다.
민족을 사랑하고 통일을 위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따뜻이 안아주고 통일애국의 길에 내세워주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품이 있었기에 최덕신, 문선명, 김성락, 림창영 등 해내외의 수많은 동포들도 그 품에 안겨 자기들의 삶을 빛내일수 있었다.
한평생 민족중시의 위대한 경륜을 펼치시여 이 땅에 민족의 넋과 숨결이 약동하는 화원을 마련해주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불멸의 공적은 세월이 흘러가도 우리 겨레의 심장속에 영원히 남아있을것이며 그이께서 마련해주신 민족대단결사상과 우리 민족끼리의 기치가 있어 온 겨레가 함께 모여살 통일의 새 아침은 분렬의 어둠을 밀어내고 반드시 이 땅에 밝아오고야말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