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회사정문을 나서는데 손전화기의 호출신호가 울렸다.
하루에는 얼른 손전화기를 꺼내들었다.
《여보세요.》
《어머니, 나 교꼬예요.》
하루에의 낯빛은 금시 밝아졌다.
《오냐, 그새 앓지는 않았냐?》
《예, 아무 일도 없었어요.》
《공부는 잘하겠지?》
《그럼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를 했냐? 시험기간이여서 바쁘겠는데…》
딸애는 무엇인가 갑자르는듯 했다.
《왜, 무슨 일이 있었니?》
하루에의 걱정어린 재촉에 교꼬의 기죽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 나 한가지 물어봐도 일없나요?》
《원 애두… 어서 말하렴.》
《다른게 아니구… 으-음-》
딸애의 주저하는 목소리에 하루에는 독촉했다.
《이 어머니 간을 그만 말리려무나.》
《좋아요. 성내지 않지요?》
《원,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서두가 요란하냐?》
《전, 요전번에 TV를 보고 놀랐어요.》
하루에는 속이 뜨끔했다.
《어머니, 무로우선생의 말이 사실이나요?》
하루에는 뭐라고 선뜻 말할수 없었다.
《거짓말이지요. 예, 어머니? …》
하루에는 넋을 잃은듯 멍하니 서있었다. 하많은 사연을 어떻게 한두마디로 이야기한단 말인가.
《어머니, 어서 말씀해주세요.》
딸애의 물먹은 목소리는 가슴을 아프게 허볐다.
《됐다. 그에 대해서는 네가 집에 돌아온 다음에 이야기해주마.》
하루에는 랭정한 목소리로 말하고 손전화기를 껐다. 그는 한동안 안절부절 못하며 한자리에서 서성거리기만 했다. 가슴은 여전히 활랑거리기만 했다. 무로우의 터무니없는 험담이 던진 파문은 너무도 컸다. 어머니와 가정은 물론 도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대학공부를 하는 교꼬에게까지 이어진것이다.
이때 뒤에서 《하루에!》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뜻밖에도 무로우 고이찌로가 서있었다.
하루에는 힐난의 눈총을 날렸다.
무로우는 오히려 미소를 머금고 다가왔다.
《하루에, 정말 오래간만이요.》
《난, 당신이 반갑지 않은데요.》
하루에의 온몸에서는 차거운 서리발이 돋았다.
무로우는 무심한 표정으로 승용차의 문을 열었다.
《우리 조용한 곳에 가서 이야기합시다.》
《난 당신 같은 비렬한 사람들과는 마주서지도 않아요.》
이미 각오한 일이라 무로우의 목소리는 어줍게 울렸다.
《하루에, 난 입이 열둘이래도 뭐라고 변명할 소리가 없소.》
전에없이 기죽은 그의 모습에 하루에는 입을 봉하고말았다. 더우기 지금 그들이 서있는 곳으로는 회사직원들이 나오고있었다.
하루에는 주춤하다가 승용차에 발을 올려놓았다.
차안에는 괴괴한 침묵만이 흘렀다.
무로우는 차를 긴쟈거리로 몰아갔다. 긴쟈라는 이름은 에도시대에 화페주조 및 은매매소가 이곳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모르는 사람은 번화가나 상점이 많은 이곳이 상업의 중심지로 깊은 력사가 있을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지는 에도시대당시 상업의 중심지는 니혼바시였다. 장사군들이 웅기중기 모여살던 긴쟈는 니혼바시에 비해 뒤떨어진 동네였다. 그러던것이 메이지시대에 들어서면서 때벗이를 하기 시작했다. 긴쟈의 옆동네인 신바시에 생기기 시작한 철도역이 때국물들을 씻어주는 세척제가 되였던것이다. 렬차를 통해 들어오는 물건들은 오래동안 이 지대가 뒤집어쓰고있던 누데기들을 차츰차츰 벗겨버리고 새옷을 걸쳐주었다. 나중에는 이 철도역으로 들어오는 외국제상품을 중심으로 하나의 거리가 조성되였다. 정부에서는 약삭바르게 이곳의 중심거리를 벽돌로 장식하여 서양식거리의 풍경을 선보였다. 대양에 둘러막혀 편협한 사고방식에서 벗어 못 나던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서양의 문화는 대번에 눈을 휘딱 뒤집히게 하는 《광명》이나 같았다. 새것이라면 그것이 제 몸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 가늠을 못하고 흥분되기 좋아하는 젊은패들이 제일먼저 환성을 질렀다.
양풍에 기갈이 들대로 든 일본사람들은 마른 해면이 물을 빨듯 그것을 받아먹기 시작했다. 그들의 활보로 좀장사로 벌어들인 코묻은 돈을 보석처럼 괴춤에 쑤셔넣던 장사군들도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 형형색색의 카페들이 장마철의 죽순처럼 자라나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는 미국동부의 류행으로 몸을 휘감은 젊은이들이 중앙거리를 관통하는 미유끼거리로 쏟아져나왔다. 이를 기화로 1971년에는 맥도날드 일본 1호점이 긴쟈 미쓰꼬시백화점의 1층에 꾸려져 사람들에게 유혹의 추파를 던졌다. 이후 80년대 대호황기를 정점으로 전세계고급상표가 《아시아의 류행거점》인 이곳으로 몸싸움을 하며 너도나도 밀려들었다. 한개의 거리가 통채로 자기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몇푼어치의 서양상품과 바꾸어버린것이다.
무로우는 얼마후 세이부백화점을 지나 서양술집앞에 차를 세웠다.
하루에는 쌀쌀한 표정으로 차문손잡이를 잡았다.
《난 당신과 마주앉고싶은 생각이 없어요.》
무로우는 시무룩해서 뜨직하니 입을 열었다.
《사실 나는 우리들사이에 이런 불미스러운 날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소. 하긴 이젠 깨진 거울이지. …》
그는 우울한 기색으로 긴 한숨을 내쉬였다.
《하루에, 용서하오. 내가 잘못했소.》
하루에는 가슴굽을 허비며 괴여오르는 오열을 금할수 없었다. 까만 두눈동자는 일렁이는 물기속에 흐려져있었다. 이어 눈귀에서 투명한 방울이 똘랑 떨어지더니 물줄기로 변했다.
용서! 그게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서리발같은 언사로 어머니의 가슴에 남겨놓은 상처를 무엇으로 지울수 있단 말인가.
하루에는 더 참지 못하고 두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무로우의 가슴은 서늘해졌다. 자기가 얼마나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는가 하는것을 다시금 실감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어깨를 들먹이는 하루에를 부여잡았다.
《진정하오. 제발 내 잘못을 잊어주오. 부탁이요.》
하루에는 눈물을 닦으며 그를 뿌리쳤다.
《아니, 진정한 사랑에는 동상이몽이란 있을수 없어요. 그러니 더이상…》
하루에는 자그마한 틈도 없이 완강했다.
조바심에 사로잡힌 무로우의 목소리는 한결 주눅이 들어 자신없이 울렸다.
《하루에, 제발 부탁이요. 당신이야 나를 잘 알지 않소.》
하루에는 싸늘하면서도 그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요. 대학시절엔 정의와 진리, 사랑을 부르짖던 당신이였어요. 그리구 얼마전까지만 해도 자기의 가정적불행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던 사나이였구요. 그래서 난 당신의 그릇된 력사관보다도 진실한 사랑과 행복에 목마른 무로우라는 인간의 단즙이 될 생각까지 했어요. 그렇지만 오늘에야 내가 사나이의 위선적인 입김에 유혹된 녀자라는것을 알게 되였어요. 당신은 이 나라의 력사를 외곡하다 못해 자기자신까지 외곡하는 너절하고 비렬한 인간이 돼버렸어요.》
하루에는 차에서 내렸다.
《하루에, 내 말을 듣소.》
무로우가 따라나와 그의 앞길을 막아섰다. 그는 하루에의 두어깨를 부여잡고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하루에는 차거운 비웃음을 던졌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가요?》
뜨겁게만 여겨지던 무로우의 입김이 지금처럼 역스럽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였다. 어서 사나이의 우악스러운 손에서 벗어나고싶었다.
무로우는 지금 자신을 무섭게 매질하고있었다. 사랑이라는 그 하나의 감정만이 아니였다. 물론 사랑처럼 무서운것은 없다. 일단 그곳에 빠지면 영영 헤여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수다하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그것을 말할 체면이 없었다. 다만 남녀의 이성보다도 더없이 귀중하게 여겨온 하루에의 그릇된 인식과 앞날이 더 안타까웠다.
《당신이 정 나를 용서할수 없다면 더이상 붙잡지 않겠소. 하지만 하루에는 어디까지나 일본사람이라는것은 부인할수 없지 않는가 말이요. 그래, 조선사람인 그가 당신에게 끝까지 모성의 모습으로 남아있을것 같소? 아마 때가 되면 <넌 일본년이다!> 하고 버리지 않으면 다행일거요.》
《닥쳐요!》
하루에는 원망과 증오가 서린 눈길로 그를 쏘아보았다.
《일본사람?! 그래요, 나도 당신과 같은 일본사람이예요. 내게도 이 일본이 조국땅이란 말이예요. 단지 내가 바라는것은 당신 같은 파렴치한들에 의해 병들어가는 일본이 아니라 나의 어머니처럼 인자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사는 진정한 내 조국을 바랄뿐이예요. 그리구 나도 그러한 일본사람이 되고싶구요.》
무로우의 가슴은 흠칫 놀랐고 그의 두손은 맥없이 흘러내렸다.
하루에는 그루를 박으며 말했다.
《똑바로 명심하세요. 나에겐 나의 어머니가 더없이 귀중해요. 바로 조선사람인 부향녀어머니가 말이예요.》
무로우는 무더위속의 풀잎처럼 후줄근해서 머리를 푹 떨구었다. 그는 저도 모르는 긴 한숨을 내쉬며 착잡한 생각에 말려들었다.
무엇때문에 하루에는 부향녀를 그리도 존경하는가? 자기의 친어머니가 되여서… 아니, 그것뿐이 아니다. 그는 지금 나를 경멸하고있다. 나자신이 가는 길을 매국으로 보고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해본적이 없지 않는가. 일본인으로서 일본의 리익에 부합되는 일을 하는거야 천만번 옳은 일이 아닌가. 그런데 하루에는… 정말 리해되지 않는 일이다. 하루에도 모든 현상을 감성적으로 대할 정도로 지적수양이 부족한 녀자는 아니지 않는가. 자기의 리념과 신념을 가진 인간은 함부로 말을 던지지 않는다. 그러면 하루에한테는… 정말 내가 가는 이 길이 애국이 아니란 말인가? 지식의 빈곤과 허약에서 오는 마찰은 서로 교차점을 이루기 힘들지 않는가.
무로우는 지금까지 자기가 걷는 길이 매국이라고 생각한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렇듯 후견인과 당국의 지지속에 진행되는 일이였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사람인 하루에는 그것을 타매하고있다. 하루에는 결코 일시적인 감정으로 무작정 상대를 멸시할 저속한 인간은 아니다. 오직 리성과 의식, 지성인의 눈초리로 사물을 식별하고 감수하는데 습관이 된 녀성이였다.
무로우의 행동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은 하루에만이 아니였다. 그의 이전 스승들은 《무로우군, 사람이란 실용주의적견지에서 모든것을 생각해버릇하면 나중에는 자신에 대해서도 의심하게 되는 법이라네. 만일 자기의 가치가 제 리익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나?》 하고 핀잔하군 했다.
그렇지만 무로우가 가장 존경하는 후견인은 실용주의는 개인은 물론 국가적인 견지에서도 매우 유익한것이라고 강조한다. 실질적으로 이 일본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은 다 그것을 추구하고있었으며 세계발전국들은 그것을 자로 하여 모든 활동을 벌리고있지 않는가.
무로우는 갈래없는 고민을 털어버리려고 애를 썼다. 그렇지만 하루에와의 사랑에서부터 시작된 그것은 칡넝쿨처럼 뻗으며 자신을 더 얽매고있었다.
조선사람인 부향녀! 바로 그 요인으로 첫사랑은 가슴아픈 상처로 되여버렸다.
하루에한테서 배신당한 감정은 결김에 그를 결혼이라는 문턱을 넘게 하였다. 조선녀자와 결별을 하지 못하는 하루에한테 자신의 행복상을 시위하고싶은 야심에서였다. 그러나 사랑의 결렬은 무관심에서 시작되듯 그들부부는 처음부터 상대방을 관심밖의 존재로 밀어던졌다. 그것은 서로 다른 리상과 포부를 지닌 두 존재의 결합에서 필연적인것이였다. 안해는 향락과 부귀를 추구했고 무로우는 학문의 세계에서 그의 요구와 행동에 눈과 귀를 접었다. 목적과 뜻의 엇박자는 젊음의 약동을 갉아먹는 좀벌레로 화했으며 나중에는 결렬이라는 커다란 웅뎅이만 남겨놓았다.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거치른 길을 걸어온 근 20년간의 세월은 무로우에게 첫사랑에 대한 애틋한 추억과 갈증만을 더해준 나날이였다.
녀자복이 없다는 한탄과 결렬된 첫사랑의 그리움을 그는 부향녀에게 토해버렸다. 비록 후견인의 발기였지만 그는 리성의 불길을 감성이라는 거품으로 덮고 기염을 토했다. 허나 감성이란 어디까지나 리성앞에 머리를 숙이며 후회를 낳는 법이다. 자기가 발설한 허위를 진실이라고 감싸기에는 그것이 너무도 위험천만한것이였다.
물론 하루에가 어떻게 부향녀의 딸로 될수 있는가 하는것은 아직까지 답을 요구하고있다. 그렇다고 해서 추상과 상상으로 늙은
녀인의 과거사를 비방한것은 지성인으로서 씻을수 없는 만용이였다.
그는 홀로 술집에 들어섰다. 괴롭고 쓸쓸한 마음을 도저히 진정할수 없었다. 술 한잔에 마음을 달래고싶었다.
술집안을 둘러보던 그의 눈길은 구석에 놓인 식탁에서 멈춰섰다. 한해전에 하루에와 마주앉은 낯익은 식탁이였다. 다행히도 손님이 없었다.
무로우는 술과 안주를 청했다.
이때 한 중년의 사나이가 와서 물었다.
《손님, 앉아도 될가요?》
무로우는 마뜩지 않은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부인이 있소.》
손님은 그의 말이 못미덥다는듯 머리를 저으며 다른 식탁으로 찾아갔다.
무로우는 술 두잔을 거퍼 들이켰다. 차디찬 얼음물에 잠겨있던 속이 열감을 받는것 같았다. 체내의 화기가 피부로 전달되면서 차츰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하루에!》
그는 마치 상대가 앞자리에 앉아있기라도 한듯 조용히 이름을 불러보았다.
허나 녀인은 그 자리에 없었다.
결국 한해전에 시작된 우리의 관계가 오늘로 또다시 막을 내렸다는 소린가.
괴로움에 지친 그는 실눈을 지으며 아릿한 추억의 안개를 더듬었다.
그때 무로우와 하루에는 이 식탁에서 몇년만에 얼굴을 마주했다.
무로우는 내심 기쁨을 금치 못하며 접대원에게 술과 료리를 청했다.
《도미회와 올드바(스코틀랜드위스키) 200그람, 프랑스제포도주 300그람을 주오.》
앞에 앉아있던 하루에가 한마디 끼여들었다.
《저에게도 올드바 200그람을 주세요.》
무로우는 놀라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알고있는 하루에는 주정이 높은 술은 전혀 입에 대지 못하는 녀성이였다. 그런데 오늘은…
이윽고 음식들과 술이 식탁에 놓였다.
무로우는 위스키잔을 들었다. 시름이 가셔진 안색이였다. 하루에와 이렇게 마주앉으니 애틋한 정회가 스스로 피여올랐다.
《자, 상봉을 축하해서 듭시다.》
그는 술잔에 입을 가져다 댔다. 그렇지만 눈길은 하루에에게 가있었다.
하루에는 처녀처럼 얼굴을 붉히며 에스키모를 핥듯 위스키를 조금 마셨다. 그러나 인차 소태먹은 고양이상을 해보였다.
역시! …
무로우는 속으로 웃음을 지으며 빨갛게 익은 그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하루에는 아직도 옛시절의 미모를 그대로 안고있었다. 사실 그 녀자는 매우 아름다운 미인이라고는 할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한테는 처녀시절이나 40대의 중반이 된 오늘에나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매력적인것이 있었다. 순박하면서도 총명과 슬기로 반짝이는 검고 큰 두눈에는 맑고 깨끗한 빛이 짙게 어려있었다. 그것은 잔잔한 물우에 비낀 별빛인양 무엇인가 흥미진진하게 속삭이는것 같기도 하고 상대를 조용히 부르는것 같기도 하였다. 한번 마주선 사람이라면 누구든 친근감과 호감을 가지게 하는것이다. 그래서 무로우는 그가 이따금 짓군 하는 웃음이 그처럼 맑고 명랑하게 여겨졌다.
지금 이 시각도 그에게 뭔가 자기의 심정을 터놓고싶었다. 그를 만나기 전에는 소설이라도 쓸만큼 많은 말들을 외워왔다. 그러나 정작 대하고보니 입은 물에서 건져낸 동지달 물고기처럼 되고말았다. 한켠으로는 자기의 진정이 실없는 소리로 되여 신성하고 아름다운 화원에 하는 헛손질이 될가 조심스러웠다.
그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픈 추억이 또 머리를 쳐들었다. 아무리 접어버리려 해도 바람을 만난 책갈피처럼 다시 번져져 눈앞에 반듯하게 펴놓이는것을 어쩔수 없다. 그것도 한두번이라면 이렇게 괴롭지는 않을것이다.
어색한 분위기를 지탱할수 없어 넥타이의 매듭을 늦춘 그는 담배를 꺼내 붙여물었다.
술집안의 작은 무대우에서는 기모노에 공단오비를 두른 애젊은 녀가수가 샤미센을 타며 일본민요를 부르고있었다. 고향 멀리 타향으로 떠난 사랑하는 사나이를 그리는 한 처녀의 애달픈 마음을 담은 노래였다. 처량하고 쓸쓸하게 울리는 선률에는 사랑의 갈증을 달랠길 없어 멀리 파도사나운 배길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구슬픔이 그대로 흐르고있었다.
손님들은 묵묵히 노래소리에 심취되여 가수에게로 눈길을 집중했다. 어떤이들은 쓰겁게 술을 받아들이며 괴로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마치 자기가 노래의 주인공이라도 되는듯.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벌써 목욕탕에서 갓 나온 사람들처럼 혈색이 불깃불깃해진 주정군들의 청높은 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주변공기가 불편해짐을 느낀 하루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이만 실례하겠어요.》
《하루에! …》
무로우는 부지불각 자기 손을 그에게로 뻗쳤다.
녀인은 사나이의 손에 잡힌 팔목을 내려다보았다. 가눌수 없는 당혹과 충격을 억제하느라고 숨을 깊이 들이켰다. 무엇이라 이름할수 없는 뜨겁고 열정적인것이 흘러드는듯싶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감정을 억제해야 한다는 생각에 손을 가볍게 뽑았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괴롭힐 필요가 있을가요?》
하루에의 안면엔 불쾌한 표정이 피끗 스쳤다. 목소리는 부드럽지 않았다. 그렇다고 쌀쌀하지도 않았다. 눈길은 여전히 애틋하고 부드러웠다.
무로우는 실망감에 잠겨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말해서 난 지금까지 당신에 대한 감정을 단 한번도 버린적이 없소!》
침통한 표정으로 무겁게 말을 꺼내는 그의 모습은 더없이 측은해보였다.
하루에는 난처한 기색으로 자리에 다시 앉았다.
《이렇게 저와 마주앉는다는것을 부인이 알면 질투하지 않을가요?》
무로우는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질투없는 부부생활이란 향기없는 꽃과도 같은거지. …》
그는 길게 한숨을 내그으며 기운이 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테는 이젠 그럴 사람도 없소.》
녀인의 눈동자는 반쯤 더 커졌다.
혹시…
무로우는 담배를 붙여물었다. 희뿌연 연기가 그의 심지없는 숨소리와 한데 어울려 허공으로 퍼져나갔다.
《부인이 잘못되였는가요?》
무로우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럼? …》
《우린 갈라졌소.》
《왜요?》
사나이는 술잔을 손에 들고 빙그르 돌리며 쓰겁게 웃었다.
《쌍마가 끄는 마차도 서로 박자가 어긋나면 쉽게 넘어지지 않소.》
하루에의 까만 두눈동자엔 일순 경멸의 빛이 흘렀다. 사람들은 흔히 리혼에 대해 무심하게 여긴다. 이것은 스스로가 자기의 보금자리에 불을 가져다 대는 행위이다. 지금 괴롭게 한숨을 내긋는 무로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전후사연이 어떻든지간에 그는 스스로 가정이라는 대하에서 밀려난 거품과도 같은 존재이다.
《무로우씨, 사랑으로 이루어지고 화해와 리해의 량손으로 엉킨 실오리를 풀어가는게 가정이 아니나요. 그런데 당신은…》
무로우는 한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제지시켰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한지붕을 유지할수 없는게 바로 오늘의 현실이요.》
그는 담배연기를 길게 빨아들이고는 코구멍과 입으로 내뿜었다.
《인간이란 인정과 동정이라는 감방속에서 시들어가는 존재나 같은거요. 그것은 일시 양지처럼 느껴지지만 때로는 음지로 변하는 때도 있거던.》
무로우는 잔에 남은 술을 들이켰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요즘 무척 괴롭소. 생활은 왜 이다지도 외롭고 쓸쓸하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단 말이요. 아무리 값진 명예와 성공도 마음속의 이 상처만은 메꾸어주지 못하는구만.》
《그만하세요. 인생의 성공은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부터 시작되는거예요. 생활의 안정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성공의 열매를 볼수 있겠나요.》
《하긴 당신의 말도 틀리지는 않소.》
사나이는 지금 몹시 허우적거리고있었다. 인생을 포기하고 생활을 눅거리로 팔아버리는자들에게서는 전혀 볼수 없는 모습이다.
그는 지금 파괴된 마음의 안식처를 찾으려고 몸부림치고있었다.
《정말이지 흘러간 시절이 그리워지오.》
하루에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짐작이 갔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마실수 없는 물에 불과했다.
《상처입은 인생은 기워서 다시 입을수 있는 옷과는 다르지 않나요.》
《그러나 교훈은 주지 않소.》
《그렇다구 오늘날에 와서 이미 사그러진 불찌를 되살릴 필요가 있을가요?》
하루에의 어조는 단호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모르게 떨리고있었다. 주저감때문인지… 그자신도 알수 없었다.
《하긴 인제야 다 꺼진 불꽃에 지나지 않지. …》
무로우는 서글픈 시선으로 녀인을 바라보았다. 생김새는 남보다 독특한것이 없는 평범한 형이였다. 그러면서도 꼭 자기만의 소유처럼 내재하고있는 개성미가 있다. 차겁게 느껴지는 옆모습과는 달리 앞모습은 부드럽고 푸근한 인상으로 느껴진다. 맑은 그의 눈빛은 선량한 마음을 그대로 엿보게 한다.
무로우의 눈길은 녀인의 손가락에 끼여있는 반지에서 멈춰섰다. 시세에 뒤떨어지고 값눅은 은반지였다. 하루에의 용모에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것이였다. 수십년세월이 흐른 오늘까지도 그 반지를 끼고있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머리속에 치미는 생각에 무로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하오. 내 잠간…》
그가 자리를 뜨자 하루에는 허무한 생각이 들었다. 자기라는 녀성이 너무도 무맥하고 섬약한 존재로 여겨졌다. 어제날엔 스스로 자기와의 관계를 끊어버린 무로우였다. 사나이의 배신앞에 하루에는 가슴속에 고인 눈물을 얼음장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속에 그것이 눈석이마냥 스르르 녹아버릴줄은 몰랐다. 어제날의 잊을수 없는 애정, 첫사랑의 숨결이 이렇듯 뜨겁고 강렬한 생명력으로 남아있을줄은 몰랐다.
그렇듯 그는 무로우라는 인간에 대해 잘 알았고 기대와 믿음 또한 컸었다. 결혼후에도 서로가 다정한 친우가 되여 인사말을 나누었으며 상대의 불편을 가셔주기도 했다. 이제는 례사롭게 흘러가던 그 우정이 서로가 독신이라는 감투앞에서 이렇듯 사그라졌던 사랑의 불찌를 되살릴줄 어이 알았는가.
이윽고 무로우가 돌아왔다. 그는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빨간 곽을 꺼냈다.
《자, 받소!》
《? …》
곽을 열어보니 뜻밖에도 사치하게 세공된 값비싼 금반지가 놓여있었다.
《왜 이걸 저한테 주는거죠?》
무로우는 어줍게 웃음을 지었다.
《다른 의미는 없소. 20여년전에 당신에게 끼워주지 못한걸 오늘이라도…》
하루에는 무로우의 사려에 감복했다. 싸늘하게 식었던 마음속에서 야릇한 감정이 움트는것만 같았다. 마음의 동요를 느끼기 시작했다. 한곳에 정착될수 없는듯 심장의 박동이 진동했다. 옛사랑의 감정이 괴여오르는것만 같았다. 사나이의 애력앞에 자존심이 서서히 자리를 내여주고있었다.
탐욕과 이성을 전제로 녀성을 대하는 사람은 영원히 사랑의 진가에 대해 알수 없다. 사랑은 리자를 바라고 하는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쌍방의 개인적욕망을 초월한 기초우에서 자라는것이여야 한다.
하루에 또한 녀성이다. 남자에 비해 인생의 아지랑이를 소리없이 피우던 봄계절을 더 소중히 간직하고있는 녀자이다. 그렇듯 리성과 감성의 두 측면에서 후자의 지배를 더 받는것이 녀성인것이다. 그래서 녀자들은 부드럽고 포근한 입김이 배인 말에 쉽게 굴복하는것인지도 모른다. 공고한 애정으로 충만된 두 현만이 하나의 아름답고 훌륭한 인생의 선률을 낼수 있는것이다.
하루에는 느슨한 미소로 거절했다.
《무로우씨, 정말 고마워요. 그렇지만 전, 이걸 받을수 없군요.》
무로우는 실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성의를 무시하는것도 도리가 아니라고 했소.》
《그런 의미가 아니예요.》
하루에는 자기 손에 끼여져있는 은반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가에는 연한 수심이 비껴있었다.
《제가 금반지를 낄 생각을 했다면 아마 이미전에 꼈을거예요. 저의 이 은반지에는 깊은 사연이 있답니다.》
무로우는 락심한 기색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의 입에서는 고뇌로 엮어진 한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물론 그렇겠지! 그러나 이건 내가…》
하루에는 긴 속눈섭을 내리접었다. 마치 그 어떤 잡스러운 감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자신을 억제하는듯싶었다.
《때로는 아픈 추억이 사람을 타락하게도 만든답니다. 더우기 우리사이는 이미전에 막을 내리지 않았나요.》
무로우는 괴롭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 가슴아픈 추억이라도 어떤 때는 그것이 사람을 더 성장하게 만들수도 있는거요. 우리의 공연은 다시 막을 올릴 여지가 충분하다고 나는 생각하오!》
그는 마치 목마른 사람처럼 숨을 길게 들이키고는 술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마시고싶지 않은것을 억지로 삼키는지 안면근육은 험상하게 이그러졌다. 이어 얼굴에는 검은구름이 확하니 밀려들었다. 그러나 눈빛만은 밝은 빛을 뿌리고있었다.
《하루에, 난 당신을 사랑하오. 부디 나의 나래가 되여주오.》
무로우는 하루에의 손을 꼭 잡았다.
하루에는 흠칫 놀랐으나 두번다시 그 손을 뽑지 못했다. 아니, 속으로 그렇게 원하고있었다.
드디여 그들의 사랑은 다시 한줄기 궤도우에 올라섰다. 젊은이들의 사랑은 시를 낳지만 중년들의 사랑은 철학을 낳는다고 했다. 다시 두줄기로 갈라질수 없는 애틋한 그들의 애정은 영원한 결별을 모를것처럼 이어졌다. 교꼬마저도 무로우를 선생님이라고 존경하며 진심으로 환영했다.
그런데 오늘 다시금 쓰디쓴 고배를 마셔야 하는 무로우의 가슴은 터질것만 같았다. 자기 인생에 대한 원망과 저주가 한순간에 왈칵 솟구쳤다.
뭐, 내가 파렴치하다구? 그래, 그 말이 비슷할는지도 모르지. 하긴 나자신도 내가 지금 어디로 가는지 가늠 못하는 멍청이로 되고있지 않는가. 코꿰인 소처럼 어디론가 끌려가면서도 말이야.
하루에! …
녀자가 미인으로 되는데는 한가지 방법이 있지만 훌륭한 녀성으로 되는데는 100가지 방법이 있다고 한다. 자기의 심장속에 깊이 새겨진 하루에는 그 모든것을 고이 간직하고 그에 익숙된 모습이였다.
무로우는 쓸쓸한 눈빛으로 술잔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사랑이란 바로 이 술처럼 빛갈도 향기도 아름답고 순결한것이지! 사람들은 바로 여기에 현혹되여 선뜻 이걸 들이키지. 그것이 몸안에 들어가 어떤 분해작용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순간의 정신육체적흥분에 하루 혹은 일생을 유혹당하면서… 바로 남녀간의 사랑도 이 술과 같은것이다.
무로우는 괴롭게 잔을 들어 술을 들이켰다.
갑자기 옆식탁에서 술에 취한 젊은이가 일어났다.
《여, 악단. 왜 자꾸 고리타분한 깽깽이노래만 부르는거야. 디스코음악이 없어?》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휘파람을 불며 젊은이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와-아- 디스코!- 디스코!-》
부랴부랴 악단이 꾸며졌다. 이어 흐트러지고 광란적인 리듬, 색정적이며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선률과 합성음으로 일관된 음악이 울리기 시작했다.
때를 기다린듯 술집은 미치광이들의 소굴로 변하고말았다. 여기저기서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은 처녀총각들이 광란적인 음악에 맞추어 몸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물론 식탁과 그우에 놓인 음식들조차도 때를 기다린듯 자기의 목마름을 한껏 달래는듯싶었다.
무로우는 갑자기 속에서 메슥메슥한것이 괴여오름을 느꼈다. 주변의 모든 공기들이 말세를 추구하며 흐르는것만 같았다.